|
동양칼럼】수동, 공공예술로 다시 태어나 | ||||
| ||||
수동의 한 모퉁이 산자락에 피어나는 봄꽃들은 이제 바람을 타고 산 아래로 이어지고 어둡고 칙칙한 달동네의 골목엔 햇살 머금은 웃음이 환하게 번진다. 시멘트 블록을 비집고 피어난 민들레와 어울려 그려져 있는 벽화에도 홀씨가 흩날린다. 봄날, 어두운 겨울의 찌뿌듯한 느낌을 털어버린 것 같은 상쾌한 발걸음들이 수암골에서 내려온다. 얼마 전까지 수암골은 청주의 퇴락한 동네 중의 하나였다. 한국전쟁 당시 피난 온 사람들이 그냥 머물러 살던 수동은 그간 도심에 자리하면서도 전혀 개발되지 못하고 버려져 있었다. 이리저리 제각각으로 지어진 집들의 흙벽에 허연 백회 덧칠을 하고 살고 있는 사람들에겐 고달픈 삶들이 일상이 되었다. 이렇게 버려지고 소외당한 수동의 달동네 수암골이 청주의 관광명소가 되었다. 청주를 중심배경으로 한 드라마 ‘카인과 아벨’이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청주가 전국으로 알려지게 되었지만 거기서 더욱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수암골의 벽화들이었다. 기존 벽화에서 보여주는 무분별하거나 목적의식적인 작품들이 아닌 하나하나 예술적 창의성과 상상력을 바탕으로 동네와 어우러지는 일련의 정감어린 벽화가 시청자들의 눈을 사로잡은 것이다. 못살고 소외당한 사람들이 사는 퇴락한 수암골에 그려진 이 벽화작업은 지역의 한 예술단체가 기획하여 작업한 것으로서 지역의 예술인들뿐만 아니라 당시 하이브캠프 레지던스 사업에 참여한 외국작가들까지 함께한 보기 드문 공공예술 사업이었다. 이 작업들은 위기에 놓인 지금의 도시의 삶 속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받고 궁벽한 달동네를 찾아가 예술가들의 상상력과 창의성을 바탕으로 작게나마 삶의 질을 바꾸고 끊임없이 주민과 결합하려는 예술가들의 노력의 일환이었다. 이러한 노력들이 운 좋게 드라마에 비쳐짐으로서 도시화된 삶 속에서 그리움의 정형으로서의 달동네가 청주의 새로운 볼거리로서 의미를 갖게 된 것이다. 수동의 수암골에서 이루어진 작은 움직임과 같이 공공예술이 이 시대의 새로운 의제로 대두되고 있다. 또한 사회에 대한 예술의 영역을 넓혀가는 창의적 예술가들의 실천이 부쩍 많아지고 있다. 옛 연초제조창 입구의 벽화나 산남초등학교의 교단과 어우러지는 벽화와 같이 우리지역에서도 이러한 공공 예술적 관점에서 이루어진 작업들이 있다. 그것이 공공예술을 표방하건, 문화예술교육의 일환으로 이루어지건 단순한 환경미화 사업이건 주민들과 예술가들이 함께 참여하는 공동체적인 공공예술을 만들어 간 것이다. 또한 그것은 삶과 예술이 결합된 삶 속에서의 상상력과 창의성을 발휘한 노력들이었다. 현대사회에서 대다수 예술적 작업은 자본에 의한 사적 과정으로 이해되고 있고 자본의 지배를 받는다고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공공예술은 예술의 사적소유개념의 왜곡을 해체하고 모든 사람에게 예술향수권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뿐만 아니라 삶과 예술의 결합을 통한 문화예술공동체의 구현을 추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공공의 장소에 모든 사람들에게 이익이 될 수 있는 사업으로서의 공공예술은 예술창작과 향유의 문제를 공론의 장으로 끌어내어 기성의 틀을 깨는 새로운 시도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물론 기존 공공예술이라 불리는 몇몇의 사업은 일회적 사업으로 이루어진 경우가 많았고 거리의 담이나 축대 등에 조악한 벽화를 그리는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 경우가 허다했다. 대부분 공공미술 프로젝트 형식으로 이루어진 이들은 실제적으로 사후관리의 문제와 주민들의 외면으로 흉물로 전락하고 그 가치의 소멸로 인하여 또 다른 소외를 가져오기도 하였다. 수동 수암골의 공공예술사업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주민들의 철저한 이해와 예술가들의 어우러짐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그것이 예술적 재해석의 과정을 거쳐 삶의 이야기를 만들어냄으로서 예술의 사회적 실천을 이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수동의 공공예술사업과 같은 예술과 사회의 통합적 시각이 마련될 때, 그리고 예술가들이 삶으로 그것을 받아들일 때, 진정 공공의 이익에 근거한 문화향유권을 주민들에게 돌려주고 삶과 예술이 통합된 공동체성이 담보된 공공예술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