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기 25장 6-15절. 비느하스의
열정(질투)
모세의 리더쉽의 무기력함이
가져온 결과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압여인들과의 성적인 타락과 우상숭배로 인한 영적인 타락이었다. 무엇
보다 안타까운 것은 바알- 브올의 사건으로 인하여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재앙을 통하여
죽어가고 있을 때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판단에 따라 하나님의
명령을 변경하기 까지 한다. 백성들을 대신 하여 중보자로서 역할과 책임을 감당해온 모세의 무능력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분노하기 보다는 좌절과 절망의 위기 속에서 망연자실 할 수 밖에 없었다. 다시 말하면, 지도자의 영적인 무력함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향한 방향, 즉 나아갈
이정표를 잃은 상태나 다름이 없었다. 게다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재앙의 고통을 가중시킨 것은 시므온 지파의 지도자. 시므리의 미디안 여인과의 성적인 타락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성적인 행위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주하고, 지켜보는
공동체의 공간 안에서 일어나고 있었다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이들의 행위에 대하여 침묵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왜 모세는
단지 방관자에 불과했을까? 그 스스로가 미디안 제사장의 딸, 십보라를
아내로 삼았다는 사실은, 만약 그가 시므리의 성적인 타락에 대하여 행동했다면, 오히려 위선자로 몰려 더 강한 비난 받을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모세는
침묵 했었을 것이다. 따라서, 지파의 백성들은 그들 자신과
모세의 무기력함에 울 수 밖에 없었다(6절).
그런데, 반전의 상황이 벌어진다. 갑자기 제사장 아론의 손자이며,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창을 들고 나타나 간음하고 있던 시므리와 미디안 여인 고스비를 함께 창으로 찔러 죽이는, 살인극을 벌린다. 그러자,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인, 염병의 재앙이 멈추었다. 분명히 비느하스의
행동은 종교적. 도덕적인 타락을 멈추었고, 하나님의 재앙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했다(9절). 그리고, 하나님은 비느하스에게 상을 주었다, “내가 그에게 평화의 언약을
주리니, 그와 그 후손에게 영원한 제사장의 직분의 언약이라 그가 그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 하였 음이라”(12-13절). 비느하스의 행동은
영웅적인 행동이었다. 분명히, 비느하스의 행동은 성적인 타락을
멈추게 한 것은 사실이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는 우상숭배를 금지시킨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의 우상과 연합 하는 과정을 보면, 1절에서
모압여인과의 음행에서 시작되었고, 여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압의 신들에게 로 초대하여 그들에게 절하게
했다고 언급한다(2). 그렇다면, 성적인 타락은 어떤 결과를
가져 왔는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특별히,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반복되는 단어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질투(개역
한글) 또는 열심 (개역 개정)으로 번역되는 단어이다. 자세히 보면, 비느하스의 행동은 질투에서 출발한 것으로, 그는 하나님의 질투를
알았고, 하나님의 질투를 위하여 극적인 살인의 행동을 한 것으로 언급한다. 여기에서 언급되는 질투는 히브리 단어, “카나”에서 온 단어이다. 이것은 구약의 여러 곳에서 사용되어, ‘시기’나 ‘질투’ 또는 ‘열정’으로 번역
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성품과 연관성을 가질 때에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의 언약적 혼인 관계의
의미를 가진다. 다시 말하면, 신랑 되신 하나님과 신부인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의 사랑의 언약을 의미하는 것이다. 호세아의 이야기처럼, 신부가 신랑을 떠나, 다른 남자(다른
신)와 혼인 한다면, 그것은 이미 간음이며, 동시에 우상 숭배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의 질투 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하는 마음이다. 비느하스는 백성들을 향한 그 하나님의 사랑하는 마음을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랑하는 백성들이 죽어가는 것을 멈추어야 했다. 그 죽음의 원인이 이방인과의 성적인 타락이었다면, 더 이상 이것을 방관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시므리와
고스비를 죽이는 최후의 결정을 했던 것이다. 분명히 비느하스 행동은 백성들의 목숨을 살리는 행동 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느하스의 살인의 행동 그 자체를 얼마나 정당화 시킬 수 있는가를 생각 해야한다. 만약, 다수의 행복을 위해 소수를 죽이는 살인을 정당화 한다면, 그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모두 살인자가 되고 말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심판은 하나님의 손에 있는 것이지, 인간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은 아니었다. 분명히 하나님은 모세에게 명령했던 것을, 모세는 그 명령을 어겼고, 새로운 세대의 한 사람인, 비느하스가 모세의 무력함을 보고 과감한 행동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칭찬 받을 반한 행동은 하나님의 생각에 단 한번으로 충분했다.
왜 하나님은 평화의 언약과
제사장의 언약을 주었을까? 단순한 하나님의 보상이었을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 보상에는 더 이상의 비느하스의 행동을 차단하는 내용이 포함된 것이다. “평화의 언약” 과 “제사장의
언약”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구약에서 평화, ‘샬롬’은 단순히 전쟁이 없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속성인, ‘온전함’을
의미한다. 이것이 사람에게 적용될 때에는 어떤 죄의 형태도 찾을 수 없는 에덴에서의 범죄 이전의 상태와도
같다. 그 샬롬을 언약으로 주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은
비느하스에게 더 이상의 살인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더욱이 하나님이 그에게 영원한 제사장의 직분을
주었다는 것은 비느하스를 다시 한번 살인과 결별하는 삶으로 묶은 것이다.
마지막으로 비느하스는 분명히
제사장 엘르아살의 아들이었다. 아론이 호르산에서 죽자 그의 아들 엘르아살이 아버지의 옷을 입었다는 것은
그가 대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비느하스는
제사장의 직분을 물려 받을 지위에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비느하스는
제사장의 지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레위지파의 한 일원으로 제사장을 돕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비느하스를 마지막에 어떻게 소개하는가? “그가 그 하나님을
위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 하였 음 이니라”, 레위지파는 하나님이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준 선물이었다(8: 19절). 그들은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봉사하고, 그리고 그들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는 역할을 하게 했으며, 성소의
경계병이다. 이미 그들 스스로가 회막의 희생제물로서 살아야 했다. 오늘
비느하스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속죄했다는 것은 레위인으로서 제사장의 지위를 내려놓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회막 으로 올 수 있는 기회의 문을 열어준 것이다. 스스로 백성들의 죄를 짊어지길 주저하지 않은 비느하스에게 하나님이 준 상은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행동에
대한 댓 가였으며, 동시에 그 열정은 다시 평화를 향한 마음으로 전환되는 순간이었다. 몇 년 후 바느하스는 이스라엘의 동쪽과 서쪽의 땅의 분할의 문제에서 평화의 중재자로서 역할을 감당했던 것을
볼 수 있다(수 22장).
신약에서 와서 비느하스와
같은 하나님을 향한 열정을 가지셨던 예수님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예루살램 성전 정화를 하는 에프소드가 네 개의 복음서에 등장한다. 유월절에 이방인의 뜰에서 소, 양,
그리고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과 환전상들을 내어 쫓으시는 장면이 등장한다. 특별히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을 향하여 “내 아버지의 집”이라는 수식어는 예수가
아버지를 향한, 그리고 아버지의 집을 향한 열정이 얼마나 간절 했는가를 보여준다. 그리고 제자들은 이 말을 듣고 시편의 이야기는 예수의 죽음을 언급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요, 2:17절). 예수는
유월절을 악용하여 비둘기를 드릴 수 밖에 없는 가난한 자들의 주머니를 터는 장사꾼들에게 새로운 성전 파괴의 예언과 자신이 성전 될 것을 예언한다. 새로운 성전은 사기꾼들과 야합한 제사장들의 배를 불리는 퇴색된 유월절이 아니라, 스스로 유월절의 어린양이 되어, 성전의 휘장을 발가벗기고,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 만 있으면, 다가올 수 있는
대상, 예수가 성전 되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예수는 사람들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일까? 채찍은
사람을 향한 것이 아니라, 동물들을 향한 것이다. 예수는
부정과 정결을 분별했고, 부정한 동물들을 내쫓은 것이다. 성전을
사모하며, 사랑한 예수는 부정한 짐승을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명시한 것이고, 이방인들의 뜰을 가로막고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장사꾼들이 스스로 부정한 동물들을 따라 성전을 떠나도록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