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경기도 화성일대를 돌아보기로 했다. 오늘 찾아갈 곳은 많은 사람들이 찾아가는 제부도 가는 길 언저리에 있는 것들로 천연기념물 제470호인 화성전곡리물푸레나무(華城 前谷里 물푸레나무), 중요민속자료 제124호 화성정용채가옥(華城鄭用采家屋), 제125호 화성정용래가옥(華城鄭用來家屋), 사적 제217호 당성(唐城)을 볼 것이다. 제부도는 예전에 다녀왔기에 이번에는 빼기로 하였다.
집에서 늦은 시각에 출발하여 외곽순환고속도로 중동IC에서 올라타 조남JC, 서서울TG에서 서해안고속도로로 들어섰다. 하지만 달려보기도 전에 비봉IC에서 나가라 한다. 그래야 제부도로, 아니 오늘의 목적지로 갈 수 있으니 말이다.
1. 화성전곡리물푸레나무(華城 前谷里 물푸레나무)
먼저 찾아간 곳은 화성전곡리물푸레나무로 천연기념물 제470호로 2006년 4월 4일 지정되었으며 주소는 경기 화성시 서신면 전곡리 149-1로 되어있다.
그러나 찾아갈 경우 주의할 것은 아직 이정표가 없으니 전곡리 마을에 가서 마을사람들에게 꼭 물어보기를 권하고 싶다. 나도 2번이나 물어서 찾아갔다. 그러나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친절히 설명해주니까 말이다.
난 아직 네비게이션의 필요성을 그다지 느끼지 못한다. 지도 하나로만 전국을 누비고 다닌다. 네비게이션으로 목적지를 정해 놓고 출발하면 도착지에 정확히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구태여 마을 사람들을 만나 목적지를 묻지 않아도 되니 사람들과의 대화가 사라져 풋풋한 사람냄새도 사라지지 않을까 염려된다.
화성 전곡리의 물푸레나무는 전곡리 웅지마을 뒤 산 밑에 위치한 수령 350여년 추정의 노거수로 나무높이 약 20m, 가슴높이 줄기둘레 4.68m로 물푸레나무로서는 보기 드물게 규모가 매우 크며 수형이 아름다운 노거수로 물푸레나무는 우리나라에서 흔히 자라는 키가 큰 나무로 목재의 재질이 단단하여 괭이자루 등 각종 농기구와 생활용품 등의 용도로 널리 사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나무껍질은 건위제, 소염제 등의 한방 재료로 사용하여 큰 키로 자라는 나무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변에서는 대부분 작은 나무만 볼 수 있다.
화성 전곡리의 물푸레나무는 6·25 이전까지 마을 주민들이 이 나무 밑에서 동제와 기우제를 지내는 등 오랜 기간 마을 주민들의 신앙적 대상이 되어 온 나무로 문화·역사적 가치가 높은 나무이다.
2. 화성정용래가옥(華城鄭用來家屋)
정용래 가옥은 1800년대 말에 지은 초가집으로 ㄱ자형 안채와 一자형 사랑채·행랑채가 모여 경기도의 전형적인 튼 ㅁ자형의 평면구조를 보이고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안마당이며, 대문의 왼쪽에 사랑채가 있고 오른쪽에 행랑채가 세로로 길게 자리잡고 있다.
안채는 사랑채가 마주보이는 곳에 대청과 건넌방을 두고, 꺾이는 왼쪽 아래로 찻방·안방·부엌을 두었다. 대청의 뒷벽에는 왼쪽으로 뒷창을 내고 오른쪽으로 벽장을 만들어서 조상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사당을 따로 두지 않는 민가에서 통상 쓰는 수법이다. 바깥마당은 사랑방 앞으로 터져 있으며 왼편에 헛간채가 있다. 전체적으로 이 집은 민가의 격식과 쓰임새를 갖추었던 부유한 농민의 집으로 추정된다.
3. 화성정용채가옥(華城鄭用采家屋)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정용래가옥 위쪽으로 있는 정용채가옥으로 중요민속자료 제124호로 1984년 1월 10일 정용채가옥과 함께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었으며 주소지는 경기 화성시 서신면 궁평리 109번지이다. 이날 찾았을 때는 이집 주인의 아들이 친구들과 하루 쉬었다가 막 떠나려고 준비하고 있을 때 찾게 되어서 친절히 안내를 해주었다. 아래에 있는 정용래가옥이 작은집이라고 이야기해주었다. 어쩐지 이름이 비슷하단 생각이 들긴하였다.
정용채가옥은 나즈막한 동산에 둘러쌓인 명당 터에 남북으로 길게 자리잡고 있는 큰 집으로 솟을대문에 적힌 기록에는 고종 24년(1887)에 문을 세웠다고 적혀 있으나, 안채와 사랑채는 이 문보다 약 50년 전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대문은 정면으로 내지 않고 북쪽 측면으로 내어 언뜻 보면 집이 커보이지 않지만 실제로는 50칸이 넘는 큰 규모이다.
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사랑마당이며, 마당의 왼쪽으로 길게 줄행랑채가 뻗어있고 오른쪽으로 사랑채가 자리한다. 사랑채 맞은편의 마당 끝에는 안채로 통하는 중대문이 있다. 중대문을 들어서면 보이는 ㄷ자형의 안채는 앞이 개방된 가운데 대청을 중심으로 왼쪽에 부엌·안방·찻방(과방)이 있고, 오른쪽에 부엌·건넌방·마루를 배치하였다. 특이한 것은 사랑채의 안사랑방 뒤에 있는 골방이 뒷마루를 통하여 은밀하게 안채의 대청으로 연결된다는 점이다. 이것은 사대부 집에서 통상 쓰는 수법이다.
길다란 행랑채는 안채와 사랑채의 앞을 가로막아 안마당과 사랑마당을 형성하고 있다. 대문채는 여기에 연결이 되어 있다. 안사람들의 아늑한 생활공간이었던 뒷뜰은 우물과 장독대를 두어 안살림의 옥외공간으로 활용하였다. 주위에 심은 감나무와 소나무는 뒷산으로 이어져 자연에 파묻힌 아름다운 공간구성을 만들고 있다.
전체적으로 평면형태가 月자형을 나타내고 있으며 전형적인 양반가옥의 모습을 보이는 주택이다.
위의 좌측 사진에서 두레박이 달린 우물이 있었으며 오른쪽에는 멧돌과 요강이 있어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곳을 나와 여기까지 왔으니 궁평항을 둘러보기로 하였다.
2007년 9월 8일 궁평항의 모습
그래서 바로 나와 당성을 찾아갔다. 그러나 여기서 또 한번 길을 잃고 헤매었다. 아스팔트 도로에서 잘 들어갔으나 산길에서 갈림길이 나오길래 좌측으로 방향을 잡아 올라가니 역시 허탕이다. 다시 내려와 우측길로 가는 데 경찰차가 나온다. 외길이어서 후진을 해주고 경찰에게 물어보니 자기들이 나온 길로 조금만 가면 된다고 알려준다. 역시 대한민국 경찰은 친절 그 자체다.
숲속 길을 얼마 안가니 주차장이 나오며 이곳이 당성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곳에서 주차장 한편에 자리 깔아놓고 오침을 즐기는 한 아저씨를 볼 수 있었다. 세상만사 걱정없이 주무시는 모습이 참 멋지다.
4. 당성(唐城)
산성의 전체 모양은 남북으로 길다란 장방형에 가까우며, 작은 계곡을 두른 포곡식에 가까운 형식을 취하고 있는 본성(本城)이 있고, 서남쪽의 남문 밖으로는 한층 낮아진 능선 대지를 다시 두른 부곽(副郭)이 이중으로 외성을 이룬다. 뿐만 아니라 이 외곽의 서남쪽 능선을 따라 토루가 계속 이어져 행성(行城)을 이루며 서남쪽의 염불산(念佛山) 봉수 쪽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 지역은 처음 백제(百濟)의 영역이었다가, 한때 고구려(高句麗)의 영토로 당성군(唐城郡)이라 하였으나, 신라(新羅)가 이 지역을 점령하게 되자 당항성(唐項城)이라 하고, 서해 바다를 건너 중국과 교통하는 출입구의 역할을 하던 곳이다.
당성을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같이 갔던 일행(마눌님과 딸래미)이 배고프다고 타령을 한다. 어디 맛있는 집이 없을까? 가도 가도 맘에 드는 집이 안 나온다. 이때 우리를 맞은 곳은 곰탕집이었는데 어딘지 생각이 안 난다. 오늘 하루도 즐거운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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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들꽃(野花) 원문보기 글쓴이: 들꽃(野花)
첫댓글 요강.. 맷돌.. ㅎㅎㅎ 어릴적에 시골에 요강있었어요. 어찌나 화장실 가기 싫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