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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움직인 미녀들의 신화[김남석]
패션과 향수의 여왕 - 코코 샤넬
한 여인의 삶이 세계여성들의 몸에서 영원한 향수(香水)로 남아 있다. 샤넬 No.19.
불행한 과거를 숨기고 과감히 부(富)와 명성에 도전한 여자 코코 샤넬. 고아로 자라나 야심과 재치로 패션계의 정점을 차지한 여자.
그러나 그 고독한 내면의 그늘은 평생 그녀를 뒤쫓고...
패션의 마술사
"밤에 잘 때 무슨 옷을 입고 잡니까?"
기자가 짓궂은 질문을 던졌다.
세계적인 섹시 스타 마릴린 먼로는 서슴없이 이렇게 대답했다.
"샤넬 넘버 5."
샤넬이 만든 옷과 향수는 세계를 장악했다. 세계의 유명 스타들이 그녀가 만든 옷을 입기 위해 몸부림칠 정도였다. 그녀는 세계의 유행을 창조하고 변화시킨 패션의 마술사였다.
명성과는 달리 그녀의 어린 시절은 매우 가난하고 불행했다. 여섯 살 때 병든 어머니가 죽었고, 그의 아버지는 오베르뉴의 이모에게 샤넬을 맡기고는 미국으로 떠나 버렸다. 그 당시 이모의 집은 가난해서 삯바느질을 하며 근근히 생활을 하고 있었다. 샤넬은 학교에 갈 나이가 되었지만, 학교 문턱에도 가지 못하고 이모를 도와 바느질에 매달렸다.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며 자란 샤넬은 열여섯의 나이에 비시 성당의 신부에게 맡겨졌다. 그러나 그녀에게 성당에서의 생활은 답답하기만 했다.
어느 날, 그녀는 경마장을 갖고 있다는 남자가 주최하는 파티에 참석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에게 첫눈에 반한 그녀는 다음날 그를 따라 무작정 나선다. 그녀는 일생 동안 많은 남자들을 만났지만 정작 자신이 사랑한 사람은 두 사람밖에 없었다고 고백했는데, 그가 바로 그 중 한 사람인 보이 카펠이었다.
샤넬이 처음 일한 곳은 모자점이다. 그것은 일하고 싶어 안달이 난 그녀를 위해 카펠이 열어 준 가게였다. 그녀가 만든 모자는 차양이 짧았는데, 그것은 그 당시 유행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하지만 이 모자는 순식간에 인기를 얻어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간다. 그녀는 카펠에게서 빌린 돈을 금방 갚을 정도로 장사 수완이 좋았다.
다음엔 양장점에서 저지라는 소재로 새로운 드레스를 만들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 당시 저지는 내의로밖에 사용하지 않던 소재였다. 여자들은 코르셋이나 고래뼈로 몸을 묶는 장식 과다의 패션에 시달리고 있던 시대였다. 저지를 사용함으로써 샤낼은 여자들의 육체를 해방시킨 것이다. 그리고 전설적으로 유명해진 '샤넬 블랙'을 탄생시켰다.
"블랙은 가장 눈에 띄는 색이에요."
샤넬은 검은색이 여성을 아름답게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하얀색을 가장 우월한 색으로 생각했다. 갖가지 색이 넘친 당시 여자들의 패션 속에서 샤넬의 단순한 블랙과 화이트는 곧바로 충격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난 늘 새로운 시대를 위해 일해 왔다."
그 당시의 디자이너들은 활동하지 안하는 한가한 여자, 하녀에게 양발을 벗기게 하는 여자들을 위해 일해 왔다. 마룻바닥을 길게 끌고 다니던 귀족풍이라든가 파리 사교계 모임에서 남자들과 춤을 추는 우아한 여성의 모습을 샤넬은 무척 싫어했다. 샤넬은 파리 사교계를 14세기와 같은 어리석음과 비현실성이 가득한 곳이라고 꼬집어 비판하였다. 물론 그녀는 단 한 번도 상류 사회의 사교 모임에 나간 적이 없었다.
샤넬은 한마디로 말해 대중적인 옷을 만들어 보급하는 데 노력했다. 긴 치마를 잘라 무릎까지 올렸고, 긴 차양이 달린 모자는 단순하게 고쳤다. 샤넬은 스커트의 길이를 짧게 하여 그때까지 긴 스커트 밑에 숨겨졌던 여자의 다리를 해방시켰다. 샤넬은 짧은 스커트가 여자의 다리를 가장 아름답게 보이게 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물론 여기에는 긴 치마보다는 짧은 치마가 생활하기에 훨씬 편하다는 생각도 있었다. 여자에게서 판탈롱을 처음으로 벗겨 낸 것도 그녀였다. 그건 순전히 여성의 아름다움을 나타내기 위함이었다.
"나는 활동적인 여자들을 고객으로 맞이했다. 드레스는 소매를 걷어 올리지 않으면 안 된다."
샤넬의 숄더백도 그런 이유에서 나온 것이다. 활동적인 여성은 두 손을 다 써야 하는데 백을 들기 위해 한 손을 활용하지 못한다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당시 그녀가 만든 셔츠가 등장했다. 우아하고 스포티하여 언제 어디서나 입을 수 있는 스타일이었다. 유행에 전혀 관계없이 점심때나 야외 활동에도 통용되는 신기한 셔츠였다. 그녀가 만든 이미테이션의 진주 목걸이도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샤넬에 관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어느 파티에 가 보니 17명의 여자들이 모두 샤넬의 옷을 입고 있었다. 그러나 한 벌도 샤넬의 가게에서 만든 진짜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샤넬이 파티에 등장하자 가짜 옷을 입은 여자들은 모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쩔쩔맸다. 그러자 샤넬이 말했다.
"여러분. 걱정하지 마십시오. 내가 입은 이 옷도 진짜 내 가게에서 만들었는지 확실치가 않으니까요."
재치 있는 유머인 동시에 통렬한 야유였다. 고아 출신의 샤넬이 세계 패션계를 움직이며 유행을 창조할 당시는 부르주아 시대와 결별하고 민주주의를 준비하는 시대였다. 여기에 샤넬의 귀족적이지 않은 실질적이고 대중적인 패션이 힘을 얻음으로써 날로 급성장을 한 것이다.
샤넬의 두 얼굴
1912년, 스물여덟 살 샤넬의 가게는 불과 여섯 명의 종업원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종업원의 수가 3,500명에 이르렀다. 그리고 향수 샤넬 넘버 19 덕택에 샤넬은 성공한 여자라는 영예와 함께 최고의 부자가 되었다. 샤넬 향수는 처음에 천연 재료를 사용하였으나, 후에는 합성에 의해 향을 내는 원료를 사용함으로써 향수를 대중화하는 데 기여했다.
"코코가 만진 것은 무엇이나 황금이 된다."
많은 사람들이 샤넬의 성공에 대해 이렇게 말하자 그녀는 세상 사람들을 비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내 성공의 비결은 끊임없이 노력하고 맹렬하게 일하는 데 있다."
실제로 샤넬은 일을 많이 했다. 하루 일과가 끝나면 손이 붓고 굳어질 정도로 필사적으로 일을 했다.
"돈이 없으면 사람은 아무 가치도 없다."
샤넬은 서슴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그건 남보다 불행하고 고생이 심했던 어린 시절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샤넬은 언제나 만족을 못하고 자신에게 화를 냈다.
"나는 마음이 고약하고 화를 잘 내며, 도둑에다 거짓말쟁이 그리고 엿듣기의 명수다. 그것이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이었다."
그것은 출생의 열등감에서 오는 것이었다. 1883년 프랑스 남부에서 사생아로 태어난 과거를 코코는 몹시 부끄러워했다. 그녀는 자신의 유년기에 대해 이렇게 말하면서 그 사실을 부정했다.
"우리 아버지는 미국에 갔다. 나는 숙모 집에서 자랐다. 아버지가 성공하고 돌아올 때까지."
그러나 아버지는 두 번 다시 코코에게 돌아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숙모 이야기도 꾸며 낸 말이었다.
샤넬은 자주 화를 냈다. 코를 벌름거리며 심장이 멎을 정도로. 이것은 소녀 때부터 아무도 돌보는 사람 없이 버려진 몸이었다는 사실과 대항해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코코는 늘 지붕 밑의 방에서 꿈을 꾸었다. 새하얀 옷, 하얀 방, 그리고 흰 커튼에 둘러싸여 사는 꿈을. 그 무렵부터 코코는 독특한 매력을 가진 여자가 되기를 원했다. 그리고 자기를 버린 아버지, 아니 아버지 같은 남자들 모두에게 복수하고 싶었다. 실제로 그녀는 그녀의 꿈이 모두 이루어진 후에 어렸을 때의 꿈대로 하얀 방에서 흰 옷을 입고 살았다.
"내 유일한 단점은 사랑을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사실 많은 남자들이 그녀를 거쳐 지나갔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그녀를 남겨 두고 떠났듯이. 어린 나이에 무작정 영국인 보이 카펠을 따라간 그녀는 함께 동거에 들어갔다. 보이 카펠은 그녀에게 일과 교양의 기초를 가르쳤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사생아를 지극정성으로 뒷바라지하여 큰 성공을 거두게 한 것이다. 두 사람은 이상할 정도로 닮은 점이 많았다. 야심에 넘쳐 있었고, 재능도 있는데다 인생의 굴욕의 맛을 알고 있다는 점에서...
10년 가까이 사랑을 나누었으나 두 사람은 결국 결혼에는 이르지 못했다. 어느 가을, 카펠은 코코와 다시는 헤어지지 말자고 굳게 다짐하면서, 그녀와 결혼하겠다는 말을 하기 위해 칸느로 향했다. 카펠의 자동차는 스피드를 내며 달리다 칸느를 얼마 안 남겨 놓고 낭떠러지로 미끄러져 저 세상으로 떠나고 말았다. 보이 카펠의 사고 소식을 들은 샤넬은 엄청난 충격 속에서 한동안 빠져나오지 못했다. 더 이상 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였다. 카펠은 그녀의 모든 희망이며 삶이었다.
"내 인생은 실패였다."
샤넬은 땅을 치면서 통곡했다. 생애를 통해 유일하게 사랑한 사나이 보이 카펠의 죽음은 그녀에게 많은 것을 느끼게 하였다. 하지만 그녀는 강한 여자였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는 충격 속에서 잠시 헤어나지 못했지만, 그녀는 일에 열중하면서 차츰 카펠의 사고를 잊게 되었다.
내게는 친구가 없다.
가장 사랑했던 사람 모이 카펠이 죽은 이듬해인 1912년 코코는 드미트리를 만나는데, 그는 러시아의 로마노프 왕조 알베르트 2세의 손자였다. 그녀가 자서전에서 밝힌, 진심으로 사랑했던 두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다.
드미트리는 샤넬보다 11년 연하로, 파리에서 망명 생활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키가 크고 귀족풍의 미남인 그는 코코를 사랑했다. 그의 가슴에 안기면 재스미니 향내가 났다. 코코를 향수의 세계로 이끌어 '샤넬 No. 5'를 낳게 한 장본인이 바로 드미트리였다.
샤넬 넘버 5는 사향노루의 분비물로 만든 샤넬 최초의 향수였다. 이 향수는 미를 탐하는 세계 여성들의 아낌없는 사랑을 받았다. 코코는 '5'라는 숫자는 좋아했다. 그래서 No.5라는 이름을 붙였다. 드미트리와 코코의 관계는 오랫동안 지속되지 못하였다. 드미트리는 다소 여성적이었고 또 매사에 무엇인가 두려워하는 기피증이 있었다. 드미트리와 헤어진 샤넬은 이번엔 웨스트민스터공과 사귀었다.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웨스트민스터라면 영국 제일의 부자로 소문이 난 인물이었다. 웨스트민스터는 샤넬에게 완전히 반해 버렸다. 그러나 그녀를 자신의 품에 잡아 두려는 다소 권위적인 남자였다. 샤넬은 과감히 그와의 결별을 선언했다. 영국의 공작부인은 많이 있지만 마드모아젤 샤넬은 한 사람밖에 없다는 이유에서 였다. 한 남자에 속해 살아가느니 자신의 영역을 펼치며 삶을 꾸려 나가겠다는 도전적인 샤넬의 면모가 잘 나타나 있다. 그밖에 위대한 사나이들이 샤넬과 염문을 뿌렸다. 그녀는 세상에 이름이 알려진 남자들과 수없이 많은 교제를 했다. 피카소, 장콕토, 스트라빈스키 등등... 유명한 시인들, 화가들, 작가들이 그녀에게 영향을 주었고, 또 그녀로부터 무엇인가를 배우면서 그녀를 거쳐갔다. 쉰 살 때 디자이너 폴 일리브라는 사람이 샤넬의 애인이 되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것이 있었다. 그러나 "일리브와의 관계를 욕정이었다."라고 코코는 솔직하게 고백했다. 여자로서 마지막 불꽃을 태운 대상으로 불행하게도 일리브가 선택된 것이었다. 세상의 유명한 남자들과 염문을 뿔리던 그녀가 그해 여름 프랑스 남부에서 처음으로 결혼한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그녀는 많은 남자들을 사랑하고 그들과 함께 연인 관계를 유지했지만 단 한 번도 결혼식을 올리지 않은 여자였다. 그러한 성격의 샤넬이 뒤늦게 연하의 남자 일리브와 결혼을 한다는 소식에 많은 사람들은 의아해했다.
코코는 그녀의 별장에서 소녀처럼 웃으며 애인인 일리브와 사랑을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나는 이제 결코 외롭지 않을 것이다. 이 사나이와 함께한다면.'
이런 행복한 생각에 젖어 있는 동안 일리브는 테니스를 쳤다. 흰 테니스 웨어를 입은 사나이가 힘차게 뛰는 모습을 보며 코코는 사랑으로 가슴이 떨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일리브가 코코 쪽으로 손짓하며 달려오는 순간 갑자기 경련을 일으키며 쓰러지더니 그대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코코는 또다시 고독한 사람이 되었다. 어쩌면 그녀에게는 평생 고독한 인생을 살라는 운명이 정해진 것인지도 몰랐다. 제 2차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코코는 파리의 가게를 닫아 버리고 13년 동안 침묵을 지켰다. 한동안 두문불출하던 그녀에게 또 다른 소식이 들렸다. 60이 된 샤넬에게 서른 살밖에 안 된 젊은 연인이 생겼다는 것이다. 그러나 샤넬이 사랑한 젊고 미남인 이 사람은 독일 정보기관원이었다. 그녀는 애인과 함께 사랑의 도피를 하기 위해 스위스로 가려 했으나 뜻대로 되질 않았다. 샤넬은 그 일로 생애 최대의 오점을 남겼으나, 적대국의 남자를 사랑한 것은 여자로서의 샤넬에게는 마지막 정렬을 불태운 것이었다.
다시 불사조처럼 일어나다
1954년 파리로 돌아와 첫 컬렉션을 열었으나 프랑스 파리에서는 실패작이었다. 그러나 샤넬 스츄는 미국에서 호평을 받았고 지금도 여성 정장의 고전으로 불리고 있다. 고희의 나이에 샤넬은 다시 소생했다. 칼라를 떼고 둥근 목선에 테두리를 댄 샤넬 투피스는 미국을 중심으로 전세계로 퍼져 나갔다. 그건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미 샤넬은 늙었고, 현대 감각에 맞는 새로운 패션이 무수히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불사조처럼 일어섰다.
어느 날 마리네 디트리히가 그녀에게 말했다.
"왜 또다시 일을 시작하나요?"
"심심하게 죽고 싶지는 않거든요."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죽기 전까지 일에 매달리는 것밖에 없었다. 끝없는 창조와 정열을 바쳐 일을 하는 것. 그것이 샤넬의 아름다운 모습이며 진정 그녀가 사랑하는 모습이었다. 그 무렵 코코는 일요일을 몹시 싫어했다. 크리스마스나 신년 휴일도 싫었다. 고독한 노파에게는 휴일이나 명절이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코코에게는 이제 남자가 없었다. 그를 거쳐간 수많은 사나이들이 있었지만 모두 요절을 하거나 아니면 그저 연인 관계일 뿐이다. 늙어서까지 연하의 남자와 함께 잠을 자야만 했던 샤넬. 그러나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직 밤이면 남자 대신 외로움을 달래 주는 약과 일만이 있을 뿐이었다. 죽기 전날 밤도 코코는 일을 했다. 그리고 이튿날인 일요일, 오랫동안 살아온 파리의 리츠 호텔에서 코코는 세상을 마쳤다. 그녀 나이 여든 일곱이었다.
장례식의 꽃은 모두가 흰색뿐이었다. 그녀가 좋아했던 색이었다. 하얀 집에서 살고 싶었던 그녀는 소망대로 집안을 온통 하얗게 꾸며 놓고 살았다. 그리고 죽어서도 역시 하얀 꽃에 묻혀 떠나갔다.
그 중에서 루키노 비스콘티만이 빨강 장미를 바쳤다. 루키노도 코코를 사랑한 사람 중의 하나였다. 대량 생산 체제의 상업주의 패션 시대가 열리기 직전 샤넬은 후배들에게 패션의 여왕 자리를 넘겨주고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그녀는 디자이너로서는 마지막 예술가이자 운동가였다고 평가되고 있다.
"진정한 디자이너라면 지나치게 기발한 착상은 피하려고 할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평균적인 여성을 위하여 옷을 만들어 왔다. 그로 말미암아 뛰어나게 아름다운 몇몇 여성들이 사장된다 하더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