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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은퇴 전에는 어떤 일을 하셨나요?
대형조선업에서 35년 근무했습니다.
세계1위 규모조선소에서 법학전공자로서 중공업분야, 수출역군의 산업현장에서 오래 근무하면서 다양한 업무를 경험해본 셈입니다. 특히, 국제표준이 된, 영국법에 의한 선박건조계약서의 권리의무를 따져가며 계약조건들 이행관리전체를 관장해본 셈입니다. 신조선박 계약서명 후부터, 선박 건조를 위한 설계단계, 생산단계는 물론 건조 완료하여 소유권을 넘겨주는 인도단계, 인도 후 사후관리까지 섭렵해봤습니다.
신조선을 발주하는 선주들이 그리스, 일본, 독일, 프랑스, 미국, 러시아, 중국, 홍콩, 인도는 물론 아프리카 나이지리아, 가나 등 대부분 외국해운사들이어서 언어는 모두 영어를 사용했고, 각국에서 우리나라조선소에 파견된 선주감독들과 매일 얼굴을 맞대면서, 또 그들의 본사와 교신을 총괄하면서 나날을 생동감 있게, 한편 세계 어느 나라 인들과도 내가 담당한 업무에 관한한 당당히 맞서는 배달민족이라는 긍지감을 가지고 집중력을 발휘해 보낸 것 같습니다.
IMF때는 부도난, 1만 명 넘는 세계5위 규모조선소의 법정관리 및 구조조정과정에서 국내 및 해외 법사업무를 총괄하면서 국내 및 국제소송도 다양하게 경험해봤고, 해외 법인정리 및 미수채권 마무리 일들로 영국, 프랑스, 러시아, 미국은 물론 베네룩스 3국, 아일랜드, 아프리카 튀니지아 등 해외출장도 꽤 다녔었습니다.
이런 경험들이 은퇴 후에도 연결되어 2011년~2018년엔 중소기업들의 국제분쟁(중재) 해결 지원과 경영위기 극복 및 소생 위한 자문활동으로 이어지는 봉사기회가 주어졌었습니다.
2. 글쓰기를 하게 된 동기가 있으신가요?
IMF와 회사 구조조정의 위기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대기업도 IMF사태로 부도가 나자, 법정관리를 받았고 극심한 구조조정의 격랑에 흔들거렸습니다. 1만 명가량 된 종업원이, 남은 인원의 반, 또 남은 인원의 7할식으로 계속 강제적으로 줄이다 보니, 주위 동료들이 대부분 떠났고 겨우 1천여 명 남더군요.
직장을 잃을 가능성이 본인의 능력이나 실적, 주인의식, 성실성과는 전혀 관계가 없음이 느껴질 2002년에, 평소 하고 싶은 것들, 해서 가치 있다고 믿는 것들을 강한 의지력을 발휘해 실천해가자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내 자리나 직장, 오래 근무하는 것에 연연하지 않고 결혼 25주년을 맞아, 집사람이 꼭 가보고 싶다던 아프리카 케냐 사파리여행과 백두산 두 배 높이보다 좀 더 높은 탄자니아 킬리만자로산 (5,895미터 및 5,685미터 두 봉우리) 등정 계획을 세웠고, 회사에 3주 장기휴가를 신청했었습니다.
평소에 메모와 일기 쓰기를 열심히 해왔고, 틈틈이 글쓰기도 해왔었는데(대학신문이나 회사 사보 등에 간간이 글 게재하면서) 이즈음 본격적으로 쓰고 싶은 글들을 써봐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97년부터 봉사해오던 결혼식 주례사들을 잘 다듬어갔고 특히 아프리카 케냐 사파리여행기와 킬리만자로산 등정 준비 및 등정 기록들을 잘 준비했던 것 같습니다.
3. 언제 문단에 등단을 하셨는지, 에피소드가 있으신지요?
백두산문학 제4호/2002년 여름호에 수필로, 백두산문학 제6호 여름호에 시로 등단했습니다.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한 초등학교 및 중학교 친구인 김윤호 친구가 1995년부터 백두산문학회를 설립하여 2000년 7월에 창간호를 내며 활동하면서 간간이 소식을 나누고 있었는데 광주광역시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우연히 이 친구의 장모님과 처남을 같이 만나게 되었었지요. 결과적으로 함평에서 농사지으면서 용접 일을 하던 이 친구의 처남을, 제가 근무하던 조선소에 취업토록 지원하여 지금까지 근무하고 있고, 이 친구 통해 백두산문학지를 통해 수필로 등단했습니다. 결혼식 상세 진행과 주례사를 영문까지 곁들여 7쪽 수필을 썼었는데, 이 친구가 과감히 영문까지 게재했었습니다.
수필로 등단한 다음, 2002년 가을 9~10월에 아프리카 3주 사파리여행과 킬로만자로 등정여행을 잘 하고 2002년 겨울~2003년에 열심히 여행기를 정리하면서 장기 구독해오던 현대문학지나 다른 문학지들을 눈여겨보니 수필장르가 많이 홀대 받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문학상과 공모전들에 수필장르가 많이 빠져있었고 특히 정부지원금에서 수필분야를 빼어버렸다는 소식도 있었습니다.(나중에 박근혜 당시 당대표가 자당 유력 국회의원을 통해 살림.)
그래서 2003년 여름에 시로 등단하였고 이후 목포대국문과 교수들과 건설회사 회장이 설립한 목포현대시인학교에 몇 년간 다니면서 시 공부를 꾸준히 했고, 이어서 목포문학관에 개설된 시 공부강좌들을 두루 섭렵하면서 시작공부를 꾸준히 했습니다.
한편, 2003년에 월간 <사람과 산>지가 제9회 산악문학상(시와 중편소설 및 문학적 등반수기분야) 원고를 공모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아프리카 3주간 여행기를 마무리하여 응모했습니다. 그리고 그해 늦가을, 회사 간부직원들과 설악산 대청봉에 거의 다 오르고 있었는데 내 여행기가 중편소설 및 문학적 등반수기분야에 당선되었다는 소식을 들었고, 선배.동료들 축하도 많이 받았습다. 이 작품은 <아웃 오브 아프리카, 킬리만자로>란 제목으로 당시 6만부 정도 발행한다는 <월간 사람과 산>잡지에 2004년 1월+2월+3월호에 연재되었습니다. 이런 <사람과 산>잡지사와의 인연으로 이후 도시근교의 산이란 주제로 광주광역시 및 전남의 산들을 취재하여 연재 게재했고 원고료도 꽤 수령했습니다. 하지만, 직장생활하면서 매주말 마다 등산해야 하고 한 개의 산을 취재하려면 방향이 다른 두 코스산행을 지속해야하고 날씨가 나쁘면 사진도 선명치 못해 중도 사양했습니다.
한편, 사단법인 한국문협 정회원 가입을 위해 백두산문학회에 서류와 사진들을 보냈었는데 관리 소홀과 요건 미흡으로, 문예한국 통권114호/ 2008년 여름호에 수필로 재 등단했고, 2008년말 첫 수필집<상처뿐인 영광>을 펴내면서 사단법인 한국문협 정회원절차도 마쳤습니다.
4. 중구문협과는 어떤 인연이 있으신가요?
서울 광진구 구의동에서 살다가, 2008년에 중구 황학동으로 이사 와서 살고 있었는데, 2012년에 당시 회장(2대)께서 휴대폰 문자로 연락을 해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사)한국문협 회원 명단책 중 서울중구에 있는 회원이라 연락해온 것이었습니다. 시화전을 한다기에 시작품도 냈고 연회비도 냈고 강화도 문학기행에도 참석했습니다. 그러나 제 시들로 시화전 작품 만든 흔적도 없어 항의하기도 했습니다. 중구문학지에도 게재되지 않아 실망했었습니다.
2013년 1월엔 임원들 임명장 수여를 한다고 하여, 중구문협 전용사무실로 쓰던 곳에 갔는데, 쌀쌀한 날씨 속에 1시간 이상을 기다리게 하면서 당시 회장께서 다른 종교단체를 위한 회의를 진행하는 것이었습니다. 급기야는 중구문협 회장을 그만 두시든지 그 다른 단체의 회장을 그만두시든지 선택하시라는 항의를 했습니다. 1차로 끝내지 않고 몇 회원들과 2차로, 멀리 있는 회장 집에까지 찾아가서 항의를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 이어 2014년에 새 회장으로 바뀌었지만 중구문학 제5호만 발행하고 도중하차하고, 중구문협 전용사무실로 쓰던 공간의 공공요금마저 지속 납부하지 않아 전기가 끊기는 상황도 겪었습니다. 2015년에도 다른 회장으로 바뀌었지만 도중하차하고 중구문학 제6호는 회장 없이 회원들이 발행하기도 했습니다. 극심한 혼란기였지요. 2016년부턴 중구문협 전용사무실로 쓰던 공간도 반납하게 되었고, 훨씬 좁아지고 조악해진 중구구민회관의 현 사무실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혼란스럽고 어려운 과정을 거치면서, 강한 주인의식을 가지고 중구문협의 맥과 활동을 꾸준히 오래 같이 이어갈 정회원들이 간절히 요구되었습니다.
5. 중구문협 회장을 하면서 아쉬웠던 점과 보람이 있는 성과를 꼽으라면 무엇이 있을까요?
가장 아쉬운 점은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문학 본연의 활동을 꾸준히, 오래 같이 이어갈 정회원들이 많이 또 간절히 요구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저는 문단활동을 많이 하셨거나 연세가 많으신 회원들께서 회장단의 직책이나 임원 등을 원하실 때는 적극 지지하고 때론 양보도 하여왔습니다. 문학 활동을 개인의 출세나 명예, 이익실현을 도모하고 자존심을 높여가기 위한 수단으로 삼아서는 더욱 안 되겠고 문학활동을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삼아서는 더더욱 안 되겠지요. 그러나 본격적으로 필요한 역할을 수행하거나 책임 있는 추진이 필요할 상황이 되면 뒤로 빠지거나 포기해버리는 게 매우 안타까웠습니다. 그걸 교묘히 방해하거나 훼방을 놓는 분들의 습성이나 아집들은 더욱 안타까웠습니다.
가장 보람 있는 성과라면, 중구문협의 맥과 활동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도록, 주인의식과 봉사정신이 강한 몇 회원들과 함께 위기상황을 지속 극복해 왔고 회장단의 바통을 이어오게 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회장임기 중 특이한 성과라면, 코로나19 장기상황과 행정기관 보조금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중구문협 활동을 중단 없이 꾸준히 이어온 것, 중구문협 창립 10주년 기념행사를 한국문협 이사장과 서울중구청장 동시 참석 하에 견실한 회원 분들과 알뜰히 가진 것, 신인문학상 7명 수여, 한국문협 정회원 약 10명 가입추천, 대통령기 전국독후감공모대회 심사를 시작하여 일반부 및중등부 서울시 최우수상 및 전국 중등부 최우수상 등을 수상토록 한 것, 중구의회 의장상 신설 및 효자효부상 수여 등이 기억에 남습니다. 중구문학 10호+11호의특별기획, 기획특집, 특별기획으로 주제를 정하여 한국문협 본부인사와 전국 지부장들 및 서울중구에 주소 가지신 한국문협 정회원들 원고도 받으며 교류를 지속해온 것도 힘이 났습니다. 꼭 하고 싶었던 충무아트홀에서의 시화전도 오래 기억되리라 봅니다.
6. 문학활동과 관련하여 현재 중구문협의 현주소는 어떻다고 생각하시나요?
이미옥 회장께서 중구문협 제4대 회장을 맡아 회장단 및 임원 분들과 다각적으로 내실을 기하면서 도약을 위한 발판을 마련했고 에너지를 많이 축적해 왔다고 봅니다. 특히, 4년간 끊어졌던 중구청 보조금을, 5월에 가진 한양도성시화전을 가지면서 회복시키고, 회원을 50명 이상 확보한 것은 대단한 성과라고 봅니다. 여러 부회장들, 자문위원들, 특별회원 분들 또한 중구문협 장래를 힘차고 밝게 할 수 있는 원동력과 다양한 축을 구축해가리라고 봅니다.
7. 중구문협이 한 단계 발전하기 위한 조언을 해주신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회원들이 수준 높고 다양한 작품집을 많이 발행하도록 서로 격려하고 도와주고, 출간한 작품집을 다양한 문학상에 최대한 추천하여 수상토록 지원함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매 모임이나 내. 외적 활동 중에도 글쓰기와 장르별 문학아카데미 활동을 생활화하여, 서로서로 얻어가는 것이 늘 생기도록 순번을 정하여 늘 준비하고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활동을 해갔으면 합니다. 최소한 ‘매 모임이나 활동이 시간 낭비나 에너지 낭비가 아니었으며, 뭔가 마음 찬 열매를 얻었다!.’는 기분이 들면 작은 성공의 연속이라고 생각합니다.
8. 문학활동과 관련하여 개인적인 소망이 있으시다면?
어떤 유명한 문호 혹은 문인에게 “어떤 작품이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십니까?”라고 여쭈면 늘 “다음에 쓰는 작품입니다!”라고 답했다고도 합니다.
저는 늘 쓰고 싶은 글들을 마음껏 쓰고, 내고 싶은 책들을 지속 펴내고 싶습니다. 1차 목표로는 장르에 구분 없이 1,000페이지를 넘기고 2차 목표는 2,000페이지를 넘기는 것입니다. 올해 출간하려던 제2수필집, 시집, 여행기 책, 나의 대형조선업 35년 책들 출간을 내년으로 넘기게 되었지만 서두르지는 않되 게으름은 스스로 힘껏 단속해갈 셈입니다.
9. 여행을 좋아하신다고 들었는데, 어떤 계획이 있으신지요?
유네스코 자연유산이나 문화유산을 낀 여행코스를 선호해 왔습니다. 차분히 몇 주~몇 달 부부여행도 선호해왔습니다. 1992년에 중국 동북3성 9남매친척들 만나며 3주 여행, 2002년에 아프리카 케냐 사파리여행 및 탄자니아 킬리만자로 등정하며 한 달 여행, 2009년에 아내, 아들, 딸과 스위스 알프스와 이태리 베네치아 및 로마 여행 약 10일, 2011년 아내랑, 인도네시아 스마랑에서 지내며 한 달 여행, 2022년 캐나다 켈거리에서 아내랑 여름 두 달 켐핑여행 등이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2020년에 프랑스남부를 거쳐 스페인 피레네산맥을 넘는 것부터 시작하는, 소위 산티아고 800킬로미터 순례여행을 40여 일간 계획했었는데 장기 코로나19상황으로 에어프랑스 비행기가 뜨질 못해 포기했었습니다. 기회가 되면 그 산티아고 순례여행과 전쟁이 끝나면 이스라엘과 이집트 여행을 고려하고 있습니다.
10. 마지막으로 중구문협과 문인들을 위해서 덕담을 해주세요.
서울대도심에서 생활하면서 늘 물질문명에 인간이, 인간성이 매몰되어가는 것은 피해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서울 중구문협에서 활동하면서는 늘 ‘대도심에 정서의 과일나무를 심어가고 맑은 정서의 옹달샘을 만들어가는 글을 써가자!’고 다짐하고 여러 큰 모임에서 강조해 왔습니다. 중구문협 회원들이 그런 글들을 많이 써감으로서 본인은 물론 대도심에 사시는 분들이 좋은 정서의 과일들을 많이 따먹거나 맑은 정서의 샘물을 많이 마시는 효과를 향유해가기를 기원해 봅니다.
11.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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