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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7월 1일 주일메시지 (사도행전 20장 강해 아산 UBF)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한 바울
말씀 / 사도행전 20 : 1-38
요절 / 사도행전 20 : 19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목자생활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수님의 제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명확하게 알고 싶어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말씀은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에베소 리더들을 불러 여러 가지 당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이 양들의 목자로써 어떻게 섬겼는지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열매가 풍성한 목자로 주 예수님을 섬기시기를 기도합니다.
1. 예루살렘에 이르려고(1-16)
1-5절을 보십시오. 에베소에서의 소동이 끝났습니다. 바울은 제자들을 불러 권한 후에 작별하고 바다건너 마게도냐로 건너갔습니다. 마게도냐 지방의 개척한 교회들을 다니며 각지의 제자들의 믿음을 다시 도왔습니다. 사도 바울은 아래로 내려가 아가야 지방에 도착했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여기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3개월을 지냈습니다. 그는 겐그레아 항구에서 배를 타고 지중해를 건너 직통으로 시리아로 가려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기근으로 인하여 어려움을 겪고 있는 유대의 믿음의 형제들에게 이방 지역 형제들이 지원하는 구제헌금도 가져가기를 원하였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모의를 하고 있음을 알게 되어 오던 길로 다시 되돌아 가고자 합니다. 마게도냐를 거쳐 터어키 소아시아 지방으로 가기로 하였습니다. 이 때 함께 한 사람들의 이름이 4절에 기록되었습니다.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 더베 사람 가이오와 디모데,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 이들은 이방의 각 지역에 개척된 교회를 대표하는 사람들입니다. 전에는 이방세계의 풍조를 따르고 마음의 원하는 대로 살았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입니다. 이제 이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믿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도 받고자 합니다. 이 사람들은 사도 바울과 함께 예루살렘에 가고자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이 이방인들에게 임하였음을 자신들을 통하여 드러내고자 합니다. 사도 바울이 가는 길에는 많은 고난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사도 바울과 동행하며 고난도 함께 받고자 합니다. 바울은 이방 교회의 구제헌금과 이방 선교의 열매인 이 사람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가서 만민 구원의 새로운 역사를 예루살렘의 형제들에게 알리고자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모두 하나가 되는 새 역사를 이루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가 되는 역사입니다. 마음이 서로 하나가 되고 뜻과 방향이 서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마음에 받아 사랑으로 서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사람들과 항구도시 드로아에서 7일 동안 머무르며 말씀을 전했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그 주간의 첫날이란 오늘날 주일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이 인도하는 주일예배는 어떠하였습니까? 바울과 성도들은 주일예배에서 떡을 뗐습니다. 교회는 성만찬을 지켜 행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사함을 위하여 그 몸을 드리셨음을 되새기고 감사드렸습니다. 바울은 예배 때 말씀을 강론했습니다. 예배는 말씀중심의 예배로 드려졌습니다. 8-12절을 보십시오. 예배 중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바울이 말씀을 오래 강론했는데, 8절을 보면 등불을 많이 켰다고 했는데, 등불이 실내 산소를 많이 소모해서인지, 피곤해서 그랬는지 청년 유두고가 졸다가 삼층에서 떨어져 숨지는 사고가 발생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하여 죽은 유두고를 다시 살아나게 하셨습니다. 이날 함께 한 성도들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 이론이 아닌 것을 체험하였습니다. 모든 지식과 철학이 아무리 다양한 이론을 내놓고 그 지혜를 자랑하여도 죽음 앞에서는 무력하였습니다. 어떤 것도 죽음 아래 힘을 쓰지 못하였습니다. 이날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계셔, 죽은 청년을 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권세와 주의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였습니다. 주 예수께서 죽음을 앞도하고 있음을 직접 보았습니다. 함께 한 성도들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여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13-16절까지는 바울일행이 거친 도시들이 나옵니다. 바울은 드로아에서 앗소, 앗소에서 미둘레네, 미둘레네에서 기오, 사모 그리고 밀레도로 내려갔습니다. 이 도시들은 지금의 터어키의 서부 지중해변 항구도시들입니다. 드로아가 가장 위에 위치하고 밀레도가 그중에서 가장 아래쪽입니다. 바울 일행은 서부 해안을 따라 남쪽 유대를 향해서 내려오고 있습니다.
2.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려 함에는(17-38)
17절을 보십시오.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바울은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을 불렀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속히 가고자 했습니다. 에베소에는 들리기가 어려웠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의 양들이 마음에 있었습니다. 에베소에 직접 가지 못하지만, 에베소의 리더목자들을 불러 중요한 당부를 하고자 합니다.
18-21절을 한목소리로 읽어보겠습니다. “오매 그들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사도 바울이 말하는 목자로써의 섬김은 ‘겸손’, ‘눈물’ ‘인내’였습니다. 말씀을 가르치고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심고자 사도 바울이 감당한 것은 이 세 가지였습니다. 우리가 ‘겸손’을 논하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낮추는 공손함을 생각합니다. 사람과 관계에서 예의 바르고 배려심 깊은 말과 행동할 때, 겸손해 보인다는 평을 받는 것 맞습니다. 이런 겸손의 모습과 함께 반드시 가져야 하는 것은 마음으로도 다른 사람을 나보다 더 낫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공손하고 예의 바른 것이 뻣뻣하고 아무에게든지 말을 만만하게 편하게 해대는 사람보다야 나아 보이지만, 겸손이 진정성이 있으려면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마음, 다른 사람을 나보다 더 훌륭하다고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마음을 갖지 못한 채 기술적으로만 겸손하고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얕잡아 보는 사람은 반드시 사람을 깔보고 낮추어보는 그 중심이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을 낮추어보는 그 생각을 감지하지 못하는 둔감한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요즘 MZ세대에 대하여 여러 말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특이하다고 보지 말고 어려 보인다고 그들을 얕잡아 보는 시각을 먼저 바꾸어야 합니다.
더 중요한 ‘겸손’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 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사람들과 관계에서 겸손해 보이는데, 하나님의 능력도 하나님의 은혜도 나타나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어서 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마음에 하나님을 높이려는 마음이 없으며, 그 마음 중심을 하나님께서 다 보시는데, 마음을 보시는 하나님을 인식하지 않으며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만함이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일하시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께서 일하심을 인정하지 않는 것보다 더 한 교만이 어디에 있습니까? 오만한 사람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줄 모릅니다. 오직 자기의 때와 자기의 주도하는 것과 자기의 계획만 최상의 것이라 여길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만한 사람에게 은혜 주시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겸손한 사람을 무시하거나 방치하는 것을 본 적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성령의 능력은 겸손한 종을 통하여 나타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자는 반드시 겸손하여야 합니다. 전도자가 겸손으로 감당하지 않고는 생명 역사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고 관계에서도 겸손함이 나타나는데, 한 가지 더할 것이 있습니다. 심정이 있어야 합니다. 본문의 눈물은 ‘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인생, 다른 영혼을 위하여 눈물 흘릴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 목자의 심정을 가질 때, 생명 역사는 출발하는 것입니다. 주의 역사를 자기 존재감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여기는 사람은 심정이 철저하게 말라버린 것입니다. 한 영혼을 귀하게 여길 줄 모르고 한 영혼, 한 인생을 자기를 돋보이게 하는 수단으로 여기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리가 없습니다. 자기만 선한 줄 알고 자기에게 남이 가지지 못한 특별함 있다고 여기느라 다른 영혼을 향하여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고,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없이 그저 큰 일 해보겠다는 것은 목자의 심정을 가진 사람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열 두 제자들조차 상황을 앞세우고 이성을 앞세울 때에 예수님께서는 목자의 심정으로 백성들을 보셨습니다. 목자 없는 양 같음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말씀과 사랑과 먹을 것을 다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죄인들 앞에 오히려 겸손하였으며, 모든 영혼들이 구원 얻기 바라는 간절한 심정, 예수님의 마음으로 양들을 섬겼습니다. 이런 사도 바울에게 주어진 것은 유대인들의 방해와 훼방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 하면서도 예수님 이름으로 이방인들이 생명 얻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주 예수님의 이름을 전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생명을 구원하는 것과 그런 역사를 섬기는 바울을 미워하였습니다.
이 땅에서 주 예수님을 사랑하는 삶을 살 때, 고난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보다 자기 이름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름 높아지는 것보다 자기 유익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 속에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고난 아래 복음 전파자가 해야 할 것은 인내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렇게 하였습니다.
겸손과 목자의 심정과 인내로 섬기는 수고 위에서 성령께서는 생명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우리도 오늘 성경말씀이 전하는 겸손과 눈물과 인내를 배우면 좋겠습니다. 이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22-27절은 바울이 감당해야 나가야 할 앞으로의 일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22,23절“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고자 합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선지자들을 통해서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결박과 투옥과 환난을 당할 것이라 예고하여 주셨습니다. 바울의 앞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고난이었습니다. 바울은 이제까지 감당한 바와 같이 또 앞으로도 그런 환난이 있다하더라도 한 가지 분명하게 감당하고자 하는 것이 있습니다.
24절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바울의 최대 관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널리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전할 수 있다면 자신은 고난을 받아도 좋고 환난을 당해도 좋았습니다. 예수님을 전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가? 그것만이 바울의 관심사였습니다.
교회에서 무엇을 해보려는 사람이 많습니다. 교회에서 큰 역사를 이루겠다는 사람, 교회에서 사람을 많이 모아보겠다는 사람, 교회에서 뛰어난 제자양성가, 주목 받는 새 역사의 일꾼으로 인정받으려는 사람이 그동안 많이 있었습니다. 이보다 더한 경우도 있습니다. 주님 생명 역사는 별책부록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양들 데려와 목자들 소개해주는 정도 합니다. 그리고 열심히 자기 일을 합니다. 남는 시간 활용해서 친구들 후배들 아는 사람들 센터로 데려오는 정도 하고 온 힘을 쏟는 것은 나의 힘, 나의 노력을 다하여 자아실현 하고자 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자기의 생명을 드리고자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의 삶은 예수님께 받은 사명에 전적으로 드려져 있었습니다.
50대가 되니까 좋은 것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무엇을 해보려는 사람들, 예수님 위하는 것 같지만 사실 자기 삶의 목표 이루려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젊을 때는 뚜렷하게 구별이 되지 않았습니다. 50대가 되니까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그런 삶을 살아온 결과, 삶의 열매가 확연해 지는 것입니다. 비극적인 것은 이제라도 회개하면 되는데 회개 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30년, 40년 해온 패턴 그대로 살아갑니다.
우리는 청년의 때에 사도바울처럼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전하는 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나의 삶을 던지는 결단을 하여야 합니다. 그런 삶을 청년의 때에 출발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에 목표를 두고 나의 삶을 드릴 때, 하나님께서 사랑하여 주십니다. 풍성한 열매를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신령한 은혜와 복을 가득하게 부어주십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하나님의 복 주심을 체험하며 사는 것보다 더 큰 복이 어디에 있습니까! 저는 목원대 개척을 시작할 때, 주의 종으로부터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라’는 방향을 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는 것,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의 능력을 드러내는 것을 바라며 사는 것이 저의 목자 삶의 방향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고 이를 드러내는 삶으로 복 주시는 하나님을 볼 때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지 모릅니다. 저더러 국회의원 공천 받아보라는 사람도 있었고, 충남 교육감 후보로 나서라는 권유를 받아 보았는데, 그런 것들이 얼마나 하찮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을 드러내 주시는 현장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은혜로운 일입니까? 이런 은혜가 있는데 이것을 마다하고 이슬처럼 사라지고 마는 것에 시간을 쓰고 힘을 쓰는 것은 인생을 허비하는 일입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오늘 전해주시는 성경 말씀이 각자의 심령에 임하시기를 기도합니다.
25-27절을 보십시오. 에베소 사람들 가운데 심판받는 일이 있다할지라도 바울은 책임이 없다고 할 만큼 바울은 최선을 다해서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이제 바울은 또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떠납니다. 에베소의 양들을 다시 보지 못할 것 같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의 리더들에게 당부의 말을 전합니다. 28-35절은 앞으로 에베소 리더목자들이 감당해야 할 사명입니다.
먼저, 에베소의 목자들은 스스로 삼가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28절을 보십시오.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목자는 자신을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목자는 양들의 본이 되어야 합니다. 남은 구원해놓고 자기는 구원에서 탈락하는 사람들이 있어왔습니다. 에베소의 목자들은 자신을 살피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다음으로, 양들을 잘 살피고 돌보아야 합니다. 29,30절을 보십시오.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말세가 다가올수록 마귀는 더 많은 사람들을 멸망에 빠뜨리고자 유혹합니다. 에베소교회에 있는 양들에게도 마귀의 공격이 있을 것입니다. 외부의 박해와 핍박이 나타날 것이며, 교회 안에서 그릇된 교리를 말하여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따르지 않고 자기를 따르게 하는 내부 시험이 있을 것입니다. 교회는 이 땅에 있는 동안 밖에서나 혹은 안으로부터 고난을 겪습니다. 이런 외부, 내부의 시험으로부터 교회를 지키고 양들을 지켜야 합니다. 기본적으로 양들을 잘 살펴야 합니다. 자기중심인 사람은 양들을 살피지 않습니다. 양들을 잘 살피는 것은 능력이나 은사와 상관없습니다. 마음 중심의 문제, 인생 방향의 문제, 마음의 열정의 문제입니다. 양을 끊임없이 잘 살펴서 양을 잘 아는 사람이 양을 잘 돌볼 수 있습니다. 양들을 끊임없이 살피고 양들을 잘 돌보는 것이 목자의 할 일입니다.
더하여, 바울이 본을 보인 것과 가르친 것을 잘 기억하며 배워야 합니다. 31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바울은 3년간 에베소에서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양들을 한 사람 한 사람 도왔습니다. 양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죄를 떨쳐내도록 섬겼습니다. 그릇된 가치관을 성경으로 바꾸도록 도왔습니다. 에베소의 목자들은 목자 바울이 어떻게 해왔는지 기억하고 그것을 잘 적용하는 일을 하여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말씀에 깊이 뿌리내리고 물질문제가 없도록 해야 합니다. 32-35절을 보십시오.“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에베소 역사는 말씀위에 세워진 역사입니다. 앞으로도 목자들 자신들이나 교회가 다 말씀에 잡힌바 되도록 해야 합니다. 말씀을 중심으로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양들에게 물질적인 짐을 지우지 말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해서 분명한 본을 보였습니다. 그는 양들에게 신수비 받으며 말씀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굳이 스스로 일을 하며 자기 생활비는 자기가 벌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일하였으므로 교회의 양적 확대에 매이지 않을 수 있었으며, 가르칠 것들을 분명히 가르쳤습니다.
36-38절을 보십시오. 사도 바울 일행과 에베소의 장로들은 서로 합심기도를 하고 서로 절절한 사랑의 마음으로 이별인사를 나누었습니다.
결론을 맺겠습니다. 하나님의 생명 역사에 자신을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빙자하여 자기 존재감 확인하려하거나 자아실현 하려는 사람, 하나님께 드리는 모양만 보이고 내 인생 내가 만들어가려고 애쓰는 사람, 사람에게는 잘하고 하나님께 인색한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을 알 수 없습니다. 체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생명 역사는 신박한 프로그램이나 교수직이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전도자의 겸손과 눈물과 인내 위에서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자기 아들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 인생을 구원하시고자 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온 힘을 기울일 때, 겸손과 눈물과 인내로 주의 뜻을 이루고자 할 때 예수님 생명역사의 비밀을 알 수 있으며,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능력 주심과 하나님의 신비롭고 놀라운 은혜를 맛볼 수 있습니다.
아산 UB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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