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대통령 박정희(1)-공적과 과오
대통령 선호도에서 박정희(1917~1979)전 대통령은 노무현 전 대통령과 1,2위를 다투다가 최근에는 1위로 반등했다.
부산시민이 가장 높은 호감도를 가진 대통령은 누굴까. 국제신문·리서치뷰 5차 조사(2021.4.1)에서 전·현직 대통령에 대한 호감도를 조사한 결과, 박정희 전 대통령이 37.9퍼센트로 가장 높았다. 두번째는 노무현 전 대통령으로 24.0퍼센트였다.
여론조사에 따라 차이가 있었지만 둘은 선두를 다툰적이 많지만 평균적으로 박정희가 앞선 경우가 많다.
더불어민주당의 이재명 대선후보조차 표심을 위한 것이겠지만 박 전 대통령의 경제 업적을 치하했다.
이 후보는 2021년11월4일 선거대책위원회 출범식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경부고속도로를 만들어 제조업 중심 산업화의 길을 열었듯이, 이재명 정부는 탈탄소 시대를 질주하며 새로운 미래를 열어나갈 에너지 고속도로를 깔겠다’고 말했다.
이어 지난달 4일 대구 경북대 학생들과 간담회에서는 ‘효율적인 정책이면 좌와 우, 김대중 정책, 박정희 정책을 따지지 말아야 한다’며 실용주의를 강조했다.
◇ 주요 이슈들
- 창씨개명 논란
군관학교 시절 박정희는 ‘다카기 마사오’(일본어: 高木正雄, たかぎ まさお 타카기 마사오)로 창씨개명을 하였고, 만주국육군군관학교 2기생 졸업앨범과 일본 육사 졸업앨범에서도 같은 이름을 사용하였음이 확인되었다.
비판자들은 창씨개명을 두고 특정 인물들의 '친일성'의 근거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창씨개명은 진보∙보수 출신 정치인들의 친일 성향과는 상관없이 일제 강점기 시대를 살아왔던 조선인들 전체가 강제로 겪은 일이었다.
창씨 개명 여부를 갖고 조상을 친일파로 낙인 찍는 것은 악의적인 정치 이분법에 지나지 않는다.
독립운동가이자 시인이었던 윤동주에게는 히라누마 도오주(平沼東柱), 대한민국 10대 대통령 최규하에게는 우메하라 게이이치(梅原圭一), 심지어 박정희의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김대중에게도 도요다 다이쥬(豊田大中)라는 창씨개명된 이름이 있었다.
성경은 요셉이 이방 나라 애굽의 총리가 되자 이름을 사브낫바네아로 바꾸고, 다니엘도 바벨론으로 붙잡혀가서 벨드사살으로 개명한 후 국무총리까지 한 기록이 나온다.
이방 나라의 지배 하에 사는 약소 민족이 그 나라 식으로 이름을 바꾸는 사례는 흔히 있는 일이다.
그런 것가지고 친일여부를 따지는 자는 어느 혹성에 사는 자들인가?
자기들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렇게 한 자를 모두 친일파, 기회주의자라고 하는 자들은 네 자신을 먼저 살펴보기 바란다.
좌파와 주.사.파는 자기들이 무슨 성전(聖戰. Holy War. 지하드)을 치르는 것처럼 내세우는 ‘내로남불’. ‘후안무치’, ‘내재적 접근법’은 이미 구역질날 정도가 되지 않았는가?
-남로당 혐의 체포 및 석방
1948 년 육군본부 작전정보국 소령으로 근무 중, 여순반란 사건과 관련된 남로당 색출 중 남로당의 군부 하부조직책을 맡은 혐의로 국군 하부책이란 혐의로 체포되었지만, 남로당 명단을 밀고 후 정상을 참작 받아 강제 예편되어 문관으로 근무했다.
- 성공하면 쿠데타, 실패하면 반란?
요즈음은 좀 수그러들었지만 한때는 박정희의 5.16 거사가 '쿠데타냐, 혁명이냐?'는 이슈로 박정희 정권이 몰락한 이후에도 말이 많았다.
박정희는 김재규의 흉탄으로 비명에 죽었기 때문에 '사법 심판'은 받지 않았다.
그러나 전두환과 노태우는 사실 상의 쿠데타에 성공하여 대통령까지 지냈지만 살아있던 탓에 '사법 심판'을 받았다.
'성공한 쿠데타도 처벌할 수 있다'는 헌법재판소 결정(1995.12.15)에 따라, 둘은 내란죄 등의 혐의로 무기 징역과 1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김영삼 대통령에 의해 사면받았다.
◇ “박정희가 옳았다”
사회주의 혁명을 꿈꾸었던 이강호는 구소련과 위성국가들의 몰락을 경험하면서 전향했다.
그는『5∙16과 10월 유신의 정치경제학-박정희가 옳았다』에서 박정희의 탁월한 선견지명과 결단을 자세히 밝히고 있다.
이강호는 ‘5∙16과 10월 유신을 정치적으로 변호하면 안되는가?’에서, 비판자들은 어떻든 5∙16은 민주헌정을 중단시킨 쿠데타일 뿐이며, 10월 유신은 민주주의를 결정적으로 유린한 반민주적 폭거일 뿐이라고 비판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말하기 전에 수천 년 동안 한국을 괴롭혀온 '절대가난'에서 벗어나 번영의 기초를 다진 ‘한강의 기적’은 박정희 시대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가 없다.
인간의 생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므로, 그 이전에는 민주주의는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인 문제일 수도 있다.
탈북자들은 대부분이 '자유' 보다는 '배고픔' 때문에 탈북했다고 한다.
정신과 육체를 가진 인간은 '사흘을 먹지 않으면 남의 담장을 넘는다' '곳간에서 인심이 난다'고 한다.
정치는 백성을 배불리 먹이고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즉 경제적 풍요와 정치적 자유를 누리게 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박정희는 탁월한 식견과 추진력으로 수천 년에 걸친 빈국 한국을 경제적 선진국의 반석 위에 올려놓았고, 그 덕분에 민주화도 제대로 이룰 수 있었다.
그런데 비판자들은 자기들이 이룬 '절차적 민주화'만 강조하고 이승만이 세운 자유민주주의 기초와 박정희가 이룬 산업화는 무시하고 있다.
지금 중공이 기세등등한 것은 비록 공산주의 독재를 하지만 '중국특색 사회주의' 즉 '박정희식 국가주도의 수출지향 경제모델'로 14억 인구를 빈곤과 기아에서 구출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좌파들은 중공의 부상은 칭송하면서 중공 발전의 모델이 된 '박정희식 성장은 독재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미국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다', '경제 개발 계획은 이전 정부에도 있었다'는 식으로 폄하한다.
그렇다면 왜 북한의 3대 세습독재에 대해선 침묵하는가?
전세계 어떤 나라든-사회주의 국가든 자본주의 국가든-경제 개발을 시도하지 않은 나라는 없다.
북한의 천리마운동, 중공의 대약진운동, 중남미의 각종 경제개발 계획이 많았지만 빈곤에서 제대로 탈출한 국가는 한국, 대만, 싱가포르, 홍콩에 불과하다.
이는 마치 사업 성공한 사람에게 '너만 사업계획 가진 것 아니다'. '너는 유명 기업 벤치마팅해서 성공한 것 아니냐'면서 폄하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실력이든 운이든 성공한 사람은 실패한 사람 보다 나은 점이 있다.
한국이 1980년 이후에 절차적 민주주의를 완성한 것은 경제 수준이 뒷받침해주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굶주림을 해결한 후에야 자유에 눈을 뜨게 된다.
◇ 경제발전과 민주화
대부분의 후진국들은 독재국가이며 국가경제 토대를 세우기 보다는 권력장악과 사익을 추구하며, 사회주의 계획경제와 정권 유지를 위한 퍼주기식 포퓰리즘에 전념해왔다.
유럽의 PIIGS, 중남미의 퍼주기식 포퓰리즘 국가들이 몰락한 이유는 국가의 경제체질을 다지기 전에 퍼주기에 전념했기 때문이다.
또한 남미에서는 쿠데타와 잦은 정권교체로 경제발전의 일관성을 유지하지 못하거나, 공산주의의 반제국주의와 반자본주의 선동에 빠져 내수 위주와 자국산업 보호정책을 통해 경제가 위축되었다.
그러나 한국의 박정희, 대만의 장제스, 싱가포르의 리콴유는 독재를 하면서도 일관성있는 수출주도형 및 산업고도화 경제개발을 통해 선진국 수준으로 올라선 국가들이다.
이들은 독재를 했지만 정권욕이 아니라 일관성있는 경제발전을 위한 독재였기 때문에 후손들에게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두 마리 토끼를 선물로 줄 수 있었던 것이다.
싱가포르는 지금도 정치적으로는 독재지만 경제적으로는 기업자유화 지수가 제일 높은 나라다.
좌파들이 이승만과 박정희를 가장 심하게 비판하는 대목은 그들이 '독재'를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주.사.파에서 전향한 모 현역 국회의원은, 3대 종신 세습 독재를 한 김일성의 독재에 비하면 그들의 독재는 '새발의 피'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런데 종/북/ 주.사.파들은 김일성을 위.수.김.동(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으로 칭송한다.
전두환 독재에 항거하다가 대학에서 제적당한 박원순 전 서울시장은 종신 독재를 하면서 6500만 명에 달하는 백성을 이런 저런 이유로 죽음으로 몰아넣은 '마오쩌둥은 존경한다'는 이율배반적 태도를 보였다.
애덤 쉐보르스키와 페르난도 리몽기는 1950년에서 1990년 사이 전 세계 모든 국가들을 조사했다 (1985년 달러화 기준).
그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1인당 국민소득이 1500달러 미만인 국가들의 정권 평균수명은 8년으로 나타났다.
1500달러에서 3000달러 사이는 18년 정도 지속되었고, 6000달러 이상의 국가들에서는 상당히 탄력적으로 나타났다.
1인당 6000달러 이상을 버는 국가에서 민주 정권이 붕괴될 확률은 1/500이었다. 일단 부유해지면 민주주의는 불멸하는 것이다.
대략 9000달러 이상의 소득이 있는 32개의 민주정권들의 지속연수는 총 736년이다. 단 한 곳도 붕괴되지 않았다.
대조적으로 69개 빈국 중 56퍼센트인 39개 민주 정부는 실패하고 말았다.
「뉴스위크」지 국제판 편집장 파리드 자카리아는 이러한 결과를 바탕으로 ‘1인당 3000달러에서 6000달러의 소득 수준에서 민주주의 전환을 시도한다면 성공하리라는 결론이 나온다’고 역설한다.
그는 ‘다수의 국가들이 1945년 이후 대략 1인당 GDP 6000달러를 전후한 시점에 안전한 자유민주주의가 되었다’면서, 지난 30년 사이에 권위주의 독재에서 자유민주주의로의 전환에 성공한 스페인, 그리스와 포르투갈을 그 예로 들고 있다.
파리드 자카리아는 한국의 민주화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그는 김대중을 바츨라프 하벨, 넬슨 만델라, 레흐 바웬사 등과 함께 '자유의 역사에서 명예로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 가운데 하나로 꼽고 있다.
그러나 자카리아는 ‘그들의 승리가 왜 가능했는가’를 묻는다.
그리고 그는 ‘혹자는 한국에서 민주주의는 1인당 소득이 아니라 '도덕의지'라며, 위의 관심에 대해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고 말한다.
아마도 그렇게 '신경질적'으로 반응한 사람은 YS나 DJ, 혹은 그 추종자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었을까?
그에 대해 자카리아는 신랄하게 따지고 든다.
‘우간다와 벨로루시, 그리고 이집트는 결의에 찬 도덕적 명사들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국에 민주주의를 실현하려는 노력이 실패로 돌아갔다.
아프리카의 여성 경제학자인 담비사 모요도 경제수준이 낮은 후진국가의 민주주의는 오히려 경제개발을 저해한다고 주장했다.
좌파들 주장대로 만일 1970년대에 내수기반과 중소기업 중심의 자립경제를 주창한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면, 민주화는 좀 빨리 이루었을지 모르지만 경제는 현재 한국의 1/10 이하인 필리핀 수준에 머물렀을 것이다.
한국의 민주화 운동가들도 1960, 1970, 1980년대에 모두 실패했다.
실제로 반체제 인사로 낙인찍힌 김대중 전 대통령 역시 그 당시 대부분 기간 동안 투옥되어 있었다.
왜 그가 1970년대에는 실패했다가 1990년대에는 성공했는가? 그가 1990년이 되자 갑자기 도덕의지를 갖게 되었는가?
자카리아는 독재정권은 여러가지 요인으로 붕괴되지만 ‘독재정권이 무너지고 민주정부가 들어섰을 때, 무엇이 민주주의를 지속가능하게 하는가'에 대한 역사적으로 가장 간단하고 훌륭한 대답은 ‘국가의 부(富)’라고 말한다.
자카리아는 ‘1인당 3000달러에서 6000달러의 소득 수준에서 민주주의 전환을 시도한다면 성공하리라'는 결론이 나온다고 말했다.
’대략 1인당 GDP 6000달러를 전후한 시점에 안전한 자유민주주의가 되었다’고 말한 것은 한국의 경우에도 거의 정확하게 들어맞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