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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하나님의 찬송이 됨
1. 너희 만민들아 손바닥을 치고 즐거운 소리로 하나님께 외칠지어다
2. 지존하신 여호와는 두려우시고 온 땅에 큰 왕이 되심이로다
3. 여호와께서 만민을 우리에게, 나라들을 우리 발아래에 복종하게 하시며
4. 우리를 위하여 기업을 택하시나니 곧 사랑하신 야곱의 영화로다 (셀라)
5. 하나님께서 즐거운 함성 중에 올라가심이여 여호와께서 나팔 소리 중에 올라가시도다
6. 찬송하라 하나님을 찬송하라 찬송하라 우리 왕을 찬송하라
7. 하나님은 온 땅의 왕이심이라 지혜의 시로 찬송할지어다
8. 하나님이 뭇 백성을 다스리시며 하나님이 그의 거룩한 보좌에 앉으셨도다
9. 뭇 나라의 고관들이 모임이여 아브라함의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다 세상의 모든 방패는 하나님의 것임이여 그는 높임을 받으시리로다
시편 46편에 이어 47편도 고라 자손이 하나님의 승리를 노래한 시편이다. 왕이 보좌에 오를 때 이 찬송을 부르기도 했지만 초대교회는 이 시편을 그리스도의 승천에 관한 찬송으로 사용했다. 내용은 하나님의 왕 되심을 찬송하는 것으로 왕의 승리(1-4절), 왕의 영광(5-7절), 그리고 왕의 통치(8-9절)에 대한 찬송이다.
하나님을 찬송함
시편에는 찬송하라는 말이 많이 나오는데 왜 찬송이 중요한가를 다시 한번 새겨보게 된다. 유다는 레아의 넷째 아들인데 그 이름의 뜻은 찬송이다. 예수가 유다 지파의 후손이라는 사실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유다는 야곱의 계획안에는 없었던 아들이다. 라헬만을 사랑한 야곱에게 레아는 외삼촌의 계략에 의해 억지로 결혼한 아내였다. 야곱은 라헬에게서 아들을 낳고 싶었지만 레아에게서만 계속 아들이 나왔다. 레아는 사랑을 못 받았지만 네 번째 아들 유다를 낳고서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유다의 이름이 찬송이 되었다.
형제들 가운데 유다는 리더십을 발휘하는 형제였다. 형제들이 요셉을 죽이려고 했을 때 죽이지 말고 종으로 팔자고 나서서 제안했던 이가 유다였다. 그래서 창세기 마지막에 야곱이 열두 아들들을 축복할 때 유다에 관하여 축복하기를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창49:8-10)라고 하였다. 유다는 열두 아들 가운데 가장 특별한 축복을 받았던 것이다.
유다라는 이름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라는 말에서 나왔다. 우리 인생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찬송이 될 때 온전케 된다. 시편은 이스라엘 민족의 열악한 삶을 바탕으로 인간이 겪는 모든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찬송이 산출된 책이다. 그래서 인류 역사 가운데서 가장 보배로운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은 누구나 아프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죽기도 하고, 생존경쟁에서 낙오자가 되기도 하고……, 많은 과정을 겪는데 어떤 자리에서까지 감사와 찬송이 나올 것인지 우리도 궁금하다. 정말 어떤 자리에서까지 찬송을 할 것인가. 내가 만약에 “배고파 죽는 한이 있더라도 주님을 찬송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배고파 죽는 자리까지 가보지 않은 사람이 저런 소리를 한다.”는 말을 들을 것이다.
그러므로 말로만 아니라 실제로 어떤 자리에서 찬송이 나오는가. 그것이 우리 생명의 한계선이고 우리의 통치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욥을 들어서 이 실험대 위에 올려놓으셨다. “생명은 해하지 말라.”고 사탄에게 말씀하셨으니까 욥은 죽지 않고 겪을 모든 고통을 다 겪는 실험대에 올려지게 된 것이다. 그래서 자식을 다 잃고 재산도 다 잃은 고백이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소유를 잃은 것에 대해서는 온전한 감사를 했던 것이다(욥1:21).
그 다음에 화를 또 당하고 욥의 아내까지도 차라리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하니까 욥은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입술로 범죄하지 않았다고 하였다(욥2:10). 그런데 그의 친구들이 와서 만신창이가 된 욥을 보고 일주일 동안 한마디도 위로할 말을 찾지 못했을 때 욥은 입을 열어 자기 생일을 저주하기 시작했다. “내가 난 날이 멸망하였더라면, 그 날이 캄캄하였더라면, 빛도 그 날을 비추지 않았더라면…….” 하면서 생일을 저주하는 일이 3장부터 시작된다. 지금 우리는 생일축하를 가볍게 하지만 욥기 3장을 읽어 보면 태어난 날을 축하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그런데 욥이 “내가 무엇을 잘못했기에…….”라며 원망해도 친구들은 “그래도 네가 무슨 잘못을 했으니 그렇지.” 하며 공방을 하다가 마지막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말씀을 하시니까 그때 욥은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라며 자기가 무지한 입을 놀렸다고 고백한다. 아무 할 말이 없는 사람임을 알게 된 것이다. 욥기를 통해서 인간이 왜 육체를 가지고 살아가면서 고난이라는 문제가 있는가에 대한 대답을 얻게 되는데 그것은 내 이유 때문이 아니라 하늘의 사정 때문이라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거나 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유 때문이라는 것이다. 인생을 지으신 하나님 앞에 사람이 온전한 찬송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욥의 과정이 필요했던 것이다.
많은 종교들이 육체를 벗어나 자유롭게 되기를 추구한다. 인간의 육체가 왜 있는가?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고 하셨듯이 육체 때문에 마음에 나쁜 생각도 하고 욕심도 생기고, 먹고 살아야 하니까 노동도 해야 한다. 거의 모든 문제가 육체 때문에 생기니 ‘육신만 없다면…….’ 그런 생각을 당연히 하게 된다. 그래서 이 육체는 영혼의 감옥이니 죽음을 육신으로부터 영원히 해방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육체를 벗어나 자유롭게 되는 것을 구원의 목표로 생각하는 종교가 많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고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라 하였다(고후5:4). 이 육체 속에서 탄식하는데 이 탄식은 육체를 벗고자 함이 아니라 덧입고자 함이라는 것이다. 덧입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는 것이다. 어차피 죽을 몸인데 왜 이렇게 고난을 당하면서 있어야 하는가? 이에 대한 대답으로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는 것이다. 육체만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 아픔과 슬픔과 사망까지도 삼켜지게 하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삼켜지게 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생명이다. 우리가 살아서 숨쉬고 있는 것이 일차적인 육신의 생명이고 이차적인 생명은 우리의 사명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목적, 그것이 우리의 참 생명이다. 그래서 육신의 모든 문제, 일차적인 생명은 사명이 있을 때 다 삼켜지게 된다. 목숨보다 귀한 것이 있을 때 목숨의 모든 문제들의 삼켜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형상대로, 우리의 모양을 따라 사람을 만들자.” 하신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에게서 나타나는 것이 목표가 되면 우리의 모든 수고가 삼켜지는 것이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해서 “내가 너희에게 그리스도의 형상이 나타나기까지 다시 해산의 수고를 한다.”고 하였다. 죽을 것 같은 수고를 하지만 그리스도의 형상이 나타남을 인해 수고가 삼켜진다는 것이다. 아이 낳는 고통을 여자들이 다 두려워하고 알면서도 왜 아이를 가지려고 하는지 신기하다. 아무리 두렵고 힘들어도 아이가 태어났을 때 그 모든 해산의 수고가 삼켜지게 되는 것이다. 육신의 모든 문제는 생명에게 삼켜진다. 이 생명이 있으면 육신은 참으로 가치 있는 것이 되고 어떤 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고린도후서 4장 7절에는 보화를 가진 질그릇을 말하였다. 육신만 보면 우리는 다 질그릇인데 보화가 있는, 생명이 있는 질그릇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보화를 질그릇에 가졌다고 하면서 그렇기 때문에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한다고 하였다(고후4:8). 이것이 바로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켜진 사람의 고백이다.
예수의 죽음을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에게서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하였다. 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사는 것이 ‘왜 이렇게 구차하게 살아야 하는가?’라고 할 것이 아니다. 육신을 가지고 죽음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 그 사람의 생명을 우리에게서 나타나게 함으로 우리도 육체를 가지고 하나님의 찬송이 되도록 하셨다.
대제사장이 예수 그리스도를 심문할 때 마지막으로 “네가 찬송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냐?”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내가 그다.”라고 대답하셨다. “네가 찬송받을 자의 아들이냐?” 이 말은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찬송이 되는 것은 누구라도 “우리가 그런 사람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찬송이 되는 사람이다.” 이런 대답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 찬송을 위해서 육체를 가진 인간, 질그릇 같은 우리를 택하신 것이다.
우리에게 현실이라는 문제가 없다면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좋은 말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찬송도 할 수 있고, 고난 받는 사람 앞에 가서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소리도 할 수 있다. 아프지만 않다면 얼마든지 그런 말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질그릇을 가졌다. 육체를 가졌다. 그렇기 때문에 공허한 말이 아니라 우리의 찬송이 온전케 되는 것이다. 질그릇의 찬송이라야 온전한 찬송이 되고 어린아이와 젖먹이 입에서 나오는 찬송이라야 하나님의 권능이 세워진다. 가장 미약한 자가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에 대해서 그것이 찬송이 될 때 그 찬송은 온전하다는 것이다. 부자가 “배고픈 것도 참을 수 있다.”고 해봐야 권세가 없다. 그런데 정말 배고파 본 사람이 “배고픈 것은 아무 문제도 아니다.”라고 할 때 권능이 세워진다. 어린아이와 젖먹이 입으로 권능을 세우신다는 말은 그런 뜻이다.
만물의 찌꺼기 같은 우리 인생에게서 인생에 대한 감사와 찬송이 나온다면 만물이 온전케 되는 것이다. 그런 위치에 놓여진 것이 인생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서 찬송이 나온다면 찬송하지 못할 존재가 없다. 우리의 찬송은 우리의 생명의 한계를 나만큼 넓히는 것이다. 내가 겪은 만큼 넓히는 것이 되는 것이다.
시편 47편에는 찬송의 이유가 다 망라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왜 찬송을 하는가. 흙으로 지어진 사람이 하나님의 안식이 되었고,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하나님의 찬송이 되게 하셨다. 하물며 만물의 찌꺼기 같은 자에게서 인생에 대한 감사와 찬송이 나온다면 찬송하지 못할 존재가 없다.
손바닥을 치고 즐거운 소리로(1절)
1절에는 “너희 만민들아 손바닥을 치고 즐거운 소리로 하나님께 외칠지어다.”라고 하였다. 우리 교회에 ‘박수치며 찬양해’라는 이름을 가진 형제도 있고 찬양을 안 하면 화가 난다는 형제도 있다.
찬양한다는 말을 다른 말로 생각해 보면 ‘경이로운 것’과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것’에 대한 반응이다. ‘우리에게 경이롭게 느껴지는 것에 대한 반응’,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것에 대한 반응’이 찬양이다. 집회 전에 20대 청년인 이시문 형제가 나와서 찬양을 하고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했는데 앞으로 살면서 경험할 좋은 일이 얼마나 많이 남았는데 무엇을 경험했기에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말이 20대에서 나오는가. 놀라운 일이다.
나이 들어도 한이 쌓일 인생인데 여한이 없다면 그것이 우리에게 찬송이 아닌가! 다른 말로 하면 경이로움에 대한 반응이다. 우리 인생을 볼 때, 하나님이 하신 일을 볼 때 경이로워하지 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게 된다.
사람은 보고 찬양할 뿐만 아니라 보고 반응함으로써 본 그 영광으로 변화된다. 좋은 것은 우리 속에 들어오게 되어 있다. 선악과를 보고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게 보였다고 하였다.
시간적으로는 이렇게 보고 그 다음에 까먹은 것처럼 보이지만 인격적으로는 좋아하면 이미 내 속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내가 뭔가를 보고 찬송하고 있으면 그 찬송이 우리 자신으로 화하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3장의 말씀이 그것이다. 우리가 주의 영광을 보면 찬송하지 않을 수 없고, 그래서 그와 같은 형상으로 화해서 영광에서 영광에 이른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어떻게 노력해서 내가 영광스러운 사람이 돼야지 하고 결심할 문제가 아니라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라고 하였다.
우리를 산 혼으로 지은 것, 아름다운 것을 보고 아름답게 느낄 수 있고 보이지 않는 인생의 근원까지 알 수 있도록 이렇게 우리를 지으신 것을 찬송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육체를 가지고 불편을 겪으면서 살지만 우리를 하나님의 영광을 인식하고 우리에게서 찬송이 나온다면 그 찬송은 온전하게 되는 것이다.
정한철 형제는 집회 끝날 때마다 간증하는 즐거움으로 오는데 그것이 그 형제의 찬송이다. 열악한 자기의 환경을 짊어지고 찬송을 하고 있다는 것은 말의 내용을 들을 것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님의 승리인 것이다. 우리에게 오는 모든 것을 인식하고 하나님의 찬송으로 바꿀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나라들을 우리 발아래에 복종하게 하심(2-4절)
3절에는 여호와께서 만민을 우리에게, 나라들을 우리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신다고 하였다. 왕위에 오르면서 나라들이 복종케 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만민이 그들에게 복종하는 소망을 가졌는데 우리는 만유가 우리에게 복종하는 약속을 가진 사람들이다. 창세기 1장에서 당신의 형상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지으신 사람으로 하여금 땅을 정복하고 모든 생물을 다스리게 하자 하셨다. 땅을 정복하고 모든 생물을 다스리는 것이 무엇인가?
그 약속은 일단 창세기에서 야곱과 요셉을 통해서 성취되었다. 땅을 정복하고 모든 것을 다스린 한 사람을 창세기 마지막에 제시한 것이다. 야곱의 험악한 세월을 축복으로 바꾸셔서 축복하는 사람으로 만드셨고 거기서 나온 요셉을 양식을 분배하는 사람으로 만드셨다. 이것이 야곱의 영화다.
4절에는 “우리를 위하여 기업을 택하시나니 곧 사랑하신 야곱의 영화로다(셀라).”라고 하였는데 이는 가나안 땅을 두고 한 말이다.
땅을 정복하라 하셨는데 땅은 일차적으로는 그냥 땅이다. 우리는 가창 헐티로 1280번지를 차지하고 앉아서 교제를 나누고 집회를 하고 있다. 그런데 성경에서 땅의 이차적인 의미는 우리의 환경이다. 땅이 정복된다는 것은 우리의 환경이 정복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야곱은 험악한 세월을 살았지만 그 모든 세월이 야곱에게 정복되었다. 야곱에게 축복으로 해석이 되게 된 것이다. 우리 인생에 지나간 모든 것이 축복으로 해석된다면 내 환경이 정복된 것이다. 그것이 땅을 정복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다스리는 사람이 된 것이다. 지나온 모든 삶이 다른 사람을 축복할 수 있는 자산이 될 때 정복하고 다스리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나고 보니까 그 일이 누군가를 살리는데 정말 필요한 일이 되어 있다고 알게 된다. 예수님은 죽어서도 모르셨다. 죽을 때까지 하나님이 어찌하여 자기를 버리셨는지 모르셨지만 그분의 죽음은 모든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그 어떤 운명을 드러내셨다. 이것을 이사야 53장의 표현대로라면 누가 알았겠는가. 그렇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모든 인간이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주님 달려 죽은 십자가 내가 생각할 때에
세상 모든 자랑 영광은 안개처럼 사라져
나의 모든 고난 의문은 이길 오기 위함이요
내 주께서 행한 모든 일 십자가로 알겠네
김현욱 형님이 만든 우리 찬송가 1절과 4절 가사다. 이렇게 될 때 고난, 의문이 없는 것보다 있는 삶이 우리를 부요하게 하고 살릴 것이 넘치는, 생명이 넘치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다.
우리가 바로가 되어서 양식을 공급하는 것이 아니라 양식과 축복이 있는 사람으로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는 것이다. 창세기 1장에서 땅을 정복하고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신 것이 창세기 마지막에 양식과 축복이 있는 사람으로 나타난 것이다.
통치자라는 완장을 채우지 않는다 해도 양식과 축복이 있는 사람에게 사람들이 모이게 되어 있다.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어지는 것이다. 죽는 소리를 들어줄 수는 있지만 죽는 소리 하는 사람을 계속 만나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그래서 만나지 않다 보면 자기를 찾아오지 않는다는 죄목까지 붙게 된다. 그런데 그 쓴물이 다 단물이 되어 우리에게서 단물이 난다.
축복이 나오고 양식이 나오는 이에게 우리는 오지마라 해도 오게 된다. 목사님 댁에 방문하지 말라고 사랑방에 그렇게 공지를 해도 계속 가는 것이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왜 안 오느냐? 왜 나를 안 챙겨주느냐?” 이럴 필요가 없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들어와서 우리의 환경이 정복되고 지배되고 다스려지면 그것이 다 양식이 되어 “오지 말라.”고 해도 오게 된다.
이 축복이 모든 것을 발아래 복종케 하는 축복이다. 우리가 다 그런 사람으로 조성되면 환경이 내 발 아래 복종케 되고 다스려져서 누구에게라도 양식으로 분배할 수 있게 된다. 우리를 이런 사람으로 바꾸셨다는 것이 찬송하지 않을 수 없다.
즐거운 함성 중에 올라가심(5-7절)
5절에는 “하나님께서 즐거운 함성 중에 올라가심이여 여호와께서 나팔 소리 중에 올라가시도다.”라고 하였다.
“즐거운 함성 중에 올라가심이여.” 이는 왕이 보좌에 올라가 앉을 때 부르는 노래이지만, 신약에서는 예수의 승천을 노래한 것이다.
승천하셨다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 그리고 높이 보좌에 앉으신 예수님 사이를 연결하는 것이 승천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어디 계시는가? 보좌에 앉아 계신다. 언제 그리로 가셨는가? “승천하셨다. 우리가 보았다.” 이렇게 제자들은 단순하게 말했다.
승천이라는 것을 문자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초대 교회 교부들 중에도 성경을 문자적으로 믿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한 사람도 있다. 문자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면 승천이 무엇을 말하는가? 시편 47편의 표현이 승천이라면 승천은 백성의 즐거운 찬송 중에 높이 올려지는 것이다.
구름을 타고 올라가셨다고 했는데 히브리서에는 구름 같은 허다한 증인들이 있다 하였다. 그냥 육신적으로 보았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죽음과 부활, 영광스럽게 되심을 증언할 수 있는 많은 증인들이 있다는 것이다.
나도 죽었던 사람인데, 나도 함께 부활한 사람이고 함께 보좌에 앉았다는 경험으로 가지고 찬송하면 그것이 예수를 보좌에 앉히는 것이 되는 것이다. 내가 예수와 합하여 죽었는데 “주님, 내 인생이 당신 앞에서 산 자가 되었습니다. 내가 무엇이길래 이렇게 나를 영화롭게 하셨는지요.” 이렇게 우리가 찬송이 된다면 그것은 우리의 주님이신 그리스도를 보좌에 앉히는 것이다.
고린도 후서 10장 6절에는 “너희의 복종이 온전하게 될 때에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을 벌하려고 준비하는 중에 있노라.” 하였다. 우리의 순종이 온전케 되면 하나님이 심판을 집행하실 수 있다. 거역을 벌하실 수 있다. 같은 원리로 우리의 찬송이 온전케 될 때 주님은 보좌에 견고히 앉으실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예수 믿고 따라왔는데 내 남은 인생은 무엇인가?” 하게 되면 보좌가 흔들리지 않겠는가. 우리 인생이 확고하게 “내게 주신 모든 삶의 자리가 하나도 버릴 것이 없는 완전한 축복입니다. 당신이 내게 하신 일이 잘못하신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다 잘하신 일입니다.” 이렇게 될 때 보좌가 견고하게 된다. 그때 높이 올리우셔서 승천하셨다고 말하게 된다. 우리의 찬송이 온전케 되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5장에는 네 생물과 천사들과 이십사 장로들의 찬양이 나온다. 어린양의 보좌를 보는데, 하나님의 보좌가 나타나는데 그 보좌를 말하기 위해서 네 생물과 천사들과 이십사 장로들이 큰 음성으로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라고 찬양한다. 이런 찬송이 땅 위에서와 하늘에서 계속 되고 있다.
그때 보좌가 확고하게 되고 어린양이 보좌에 앉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우리도 어린양이보좌에 앉자면 어린양을 찬송해야 된다. 우리의 힘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약함과 궁핍과 곤고함을 자랑할수록 어린양은 확고하게 보좌에 앉게 된다. 이 찬송은 모든 것이 다 어린양에게서 나온다는 것이다.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다.
옛날에는 구멍가게가 난립했는데 대형마트가 들어서면서 원스탑 쇼핑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한 곳에서 이것도 사고 저것도 사고 필요한 것을 살 수 있다. 그래서 대형 마트가 유행해서 작은 가게가 죽어나갔는데 이제는 논스탑 쇼핑 시대가 되었다. 백화점에 갈 필요가 없이 온라인으로 다 살 수 있다. 사람들이 마냥 좋아서 언제까지나 올 줄로 생각했지만 뉴욕 맨하탄의 그 유명한 메이시 백화점도 문을 닫는 상황이 오게 되었다.
한 곳에 모든 것이 있으면 다른 곳을 기웃거릴 필요가 없듯이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죽임 당한 어린양 안에 모든 것이 있다면 세상 영광을 기웃거릴 필요가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언제 우리의 찬송이 온전케 될 것인가? 죽임 당하신 어린양, 십자가에 못박혀 조롱받으신 분, 거기서 내려올 수 없는 분이 땅 위에서 가장 영광스럽다는 것을 알 때다.
목요일 중심부 모임에서 어느 순에 들어갔는데 그날 그 순의 닉네임이 ‘사탄의 모든 송사를 막는 방패 김영수’라고 되어 있었다. 알고 보니 순장을 비롯해 순원들 하나하나가 마치 골라서 모아놓은 것처럼 우리 교회에서 가난의 대명사들이었다. 일부러 그 순에 다 모아놓았는지 자기들이 찾아왔는지 모르지만 그렇게 모여 있었다.
그들의 간증을 듣는데 하나도 빠짐없이 녹음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자신이 처한 어려운 환경에서 신세타령이 아니라 거기서 나오는 찬송이 어찌 그리 순전한지 그 앞에 무슨 불만을 내놓겠는가.
예수님이 세상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가셨다고 한 것처럼 그 순 안에서 우리의 모든 불평과 원망이 뜨거운 용광로처럼 주님을 향한 찬송만 남을 수밖에 없는 것을 보았다. 이것이 입술의 열매고 사탄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는 방패이고 찬미의 제사가 되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심(8-9절)
9절에는 “뭇 나라의 고관들이 모임이여 아브라함의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것처럼 새 예루살렘 성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양이 그 등불이 되실 때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리라(계21:24).”라고 한 것과 같은 소망이다.
어떻게 모든 백성들이, 모든 나라의 방백들이 아브라함의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가? 복음을 전하면서 우리도 그런 소망이 있다. 우리 복음이 모든 사람에게 전파되어서 이 복을 다 누리고 다 한 자리에서 만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리 되는가? 아브라함에게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고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라고 약속하셨다.
“네가 가면 굳게 닫힌 문들이 다 열려서 네가 드나들 수 있는 대적의 문을 얻게 될 것이다. 너에게는 문이 다 열릴 것이다.” 이런 약속을 하셨다.
캠퍼스에 나가서 복음을 전하려고 해도 요즘은 말을 거는 것 자체를 불법시하고 불쾌하게 여긴다. 옛날에는 옆에 가서 “같이 이야기좀 합시다.” 하거나 “저는 교회에 다닙니다.” 하든지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하면서 “성경을 읽어보신 적 있습니까?” 하면 대화가 시작되었는데 요즘은 그렇지 않다. 대적의 문이 굳게 닫혀 있는 셈이다. 문이 안 열린다. 어떻게 이 약속대로 모든 방백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가?
세상의 지배구조는 내 힘에 의해서 다른 사람이 통제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통치자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의 지배는 내가 먹혀드는 것이다. 어디를 가든지 내가 먹힐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대적을 얻는 길이다. 내가 양식이 되는 사람, 예수님께서 “나를 먹으라.” 하신 것처럼 먹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자면 그냥 먹으라고 한다고 되겠는가. 덩치가 이렇게 큰데 먹으라고 하면 되겠는가. 사자가 토끼 앞에 가서 “나를 먹으라.” 한다고 먹어지겠는가.
작아야 먹히게 된다. 우리가 먹어야 될 양식인 만나는 작고 둥글고 서리 같은 것이다. 작아야 되고 둥글어야 되지 깨진 유리조각 같으면 속에 들어가서 상하게 한다. 둥글고 서리같이 가늘어야 스며들 수 있다. 소제는 고운 가루로 드리든지 화덕에 구운 것이나 철판에 부친 것으로 드려야 되지 통밀로 드릴 수 없다.
그래야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먹을 수 있는 양식이 되고 우리가 세상을 통치하게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라도 우리의 복음이 흘러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내가 먹혀지는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먹혀지려면 그보다 작아야 가능하다. 비지니스 할 때도 상대방보다 커 보이면 성공하기 어렵다. 전에 어떤 분을 만나서 스시 집에 갔는데 그 집 주인이 연대 상대를 나왔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하면 우리 장사 안 됩니다. 그냥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있으면서 만들어야 손님들이 편하게 먹지 그러면 손님이 부담스러워서 못 옵니다.”라고 하기에 그렇겠구나 싶었다.
뉴욕에서 보니 비지니스를 해도 카운터에는 작고 왜소한 사람을 세울수록 좋다고 한다. 덩치 큰 사람을 세워놓으면 손님들이 안 온다는 것이다. 이상하게 반듯하고 잘난 사람을 세워놓으면 손님이 안 오고 무시하거나 막말을 해도 될 것 같은 사람을 세워놓으면 손님이 끊임 없이 온다고 한다. 만만한 사람이라야 먹힌다는 것이다.
우리가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거기서 내려올 수 없는 예수를 말하는 것은 내가 누구에게 가서 큰소리치면서 무엇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먹히는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한다. 그때 만민이 복음을 받게 되고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이리로 들어올 수 있다.
이스라엘의 궁극적 소망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모든 백성의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신약의 소망은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가 되실 뿐 아니라, 만유의 주가 되는 것이다. 계시록에는 새예루살렘성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양이 그 등불이 되실 때,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리라.”(계21:24)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찬송이 됨
바울은 빌립보에 있는 형제들을 향해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한다고 하였다(빌1:11). 이 말씀은 시편 47편의 결론과도 같고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된 말씀이다.
그냥 “주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찬송을 드립니다.”라고 노래한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찬송이 된다는 말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는 것이 하나님 경륜의 완성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자랑하고 싶어 하신다. “내 종 욥을 보았느냐?” 이렇게 자랑하고 싶으셨고, 모세가 백성들에게 장대에 달린 놋뱀을 보라 했듯이 예수를 가리켜 “이 사람을 보라.”고 선포하고 싶어 하셨다.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당신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을 자랑하고 싶어 하신다. 우리를 가리켜 “보라. 이 사람이다.”라고 하실 수 있기를 원하신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장 14절에서 “우리 주 예수의 날에는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그것이라.” 하여 자랑이 되기를 원한다고 하였다. 주 예수의 날, 우리 인생이 예수 안에서 온전케 되는 그날, 그날은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고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는 이것이라고 하였다.
만약 형제들이 서로 자랑이 된다면, 어디 가서 형제를 자랑하고 싶은 사람이 되면 그의 교회 생활은 온전한 교회생활인 것이다. 그러나 ‘도저히 자랑을 못하겠다. 못 보여주겠다.’ 이러면 우리는 찬송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인생, 진토에서 우리를 불러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하신 일을 찬송하다 보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찬송이 되는 이 복된 인생을 누리게 되었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고 너희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라고 한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즐거운 찬송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고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는 이런 교회생활로 나타나기를 소망한다.
[ 기 도 ]
은혜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찬송을 받기에 합당하신 주님! 우리 인생이 무엇이길래 진토에서 불러서 흙으로 우리를 지으셔서 하나님의 형상이 되고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셨는지 우리 인생은 주의 기이한 일을 노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기를 원하고
형제를 자랑하기를 원합니다.
주님이 하신 일이 우리의 자랑이 되고 또한 우리가 주님의 자랑이 되는 사람으로 살기를 원합니다. 우리 인생에 아름다운 자랑이 넘쳐나게 하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찬송이 끊이지 않는 사람이 되게 하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