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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 모임]
소명 의식 2019. 3. 8. 김치현 목사
지난 주일 마태복음을 하면서
예수님이 침례 받으신 말씀을 했다. 거기에서 말하고 싶었던 것은 예수님의 침례, 예수님의 끝남은 무엇이고 그의 메시아로서의 소명의식은 언제 시작이 된 것이며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이었으나,
교회 형제자매들에게는 조금 어려운 부분이 있었던 것 같다.
목회자 모임에서 이야기해야 맞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 부분만
다시 나누려고 한다.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실 때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마3:15).”하시고 침례가 끝난 후에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고 내 기뻐하는 자라(마3:17).”는 하늘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
예수님은 날 때부터 자기가 메시아라는 것을 알았을 것으로 여길 수 있지만 누가복음에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눅2:52).”했으니 예수님의 소명의식도 점차 자라갔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어떤 성경학자들은 예수님이 침례 받는 사건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고 하늘에서 음성이 들린 것이 예수의 메시아 의식에 중요한 전환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성경 속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끝남과 하나님의 부르심은 동일한 과정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나의 한계와 무능함을 느끼고 내 문제가 끝나는 이런 개인적인 차원이 아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있었으니까 하나님 나라를 생각할 때 이것이 자기로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을 자각한 것이다. 성경에 선지자들의 절망이라는 것은 모두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 나라를 생각할 때 생기는 절망인 것이다. 그런 절망 가운데 발견한 것은 “사람으로서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17장에 모세와 엘리아가 변화산에서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는 얘기가 나온다. 대화의 내용이 무엇이었다는 것은 없다. 그렇지만 대화가 되는 것은 공통적인 관심과 공통적인 경험과 공통의 목적이 있을 때이다. 히브리서에 모세가 40살이 되었을 때 백성들이 모세 손을 빌어서 이스라엘 동족을 구할 것이라는 것을 자기 동족이 믿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만큼 힘도 있고 준비도 되었지만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 동족들로부터 외면당하게 되면서 이 백성들이 400년의 노예근성을 벗기가 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내가 어찌한다고 해서 이 사람들이 400년 동안 노예생활을 했던 것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자각했다.
광야로 도망한 것은 모세의 사명이 절망이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내가 설쳐봐야 아무 것도 안 되겠구나 하는 그런 절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하고 하나님 앞에 다시 부름을 받았을 때 “나는 입술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사람입니다. 보낼만한 사람을 보내소서. 사람들이 나를 믿지 않을 것입니다.”하는 이런 이야기들은 철저히 자기 경험에서 나온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백성들이 자기를 믿지 않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하나님이 보내셨다고 해도 안 믿을 것이라고 했다. 어찌되었든 그때 거기에서 떨기나무에서 여호와의 불이 타고 있는 것을 봤다는 것이다.
떨기나무 같은 자기 자신, 타려야 탈 것이 없고 불사르려 해도 불사를 것도 없는 거기에서 나무가 타지 않고 불이 계속 타고 있는 것을 본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일을 자기가 하려고 했다. 자기 가능성에 기초를 두고 하나님의 어떤 소명을 이루려고 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좌절되고 더 이상 나로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깊이 알고 그 소망마저 끝났을 때 하나님이 불러서 떨기나무에 하나님의 불이 타고 있는 것을 보여주게 되었다.
너를 불사르라는 말이 아니라 내가 한다는 것을 하나님이 그렇게 보여주셨던 것이다. 모세의 변명들은 전부 “나는 아닙니다. 나는 말을 못합니다. 사람들이 나를 믿지 않을 것입니다.” 하는 말이었다. 전부 자기가 안 된다는 이야기를 했던 것이다. 마지막에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라고 했을 때는 여호와께서 화를 내시면서 모세를 다시 일으키는 것을 보게 된다. 부르심 안에서의 소명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보는 것이다.
자기를 불사르게 내어주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불이 타고 있다는 것을 본 사람이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일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엘리아시대도 엘리아는 하나님을 위한 열심히 극심하다고 했다. 영어로는 열심과 질투를 한국 사람들은 구별하기가 힘들다. 질투는 영어로 jealousy, 열심은 zealousy이다. NIV성경에는 zealousy로 되어있고 KING JAMES버전에는 jealousy로 되어있다.
원래는 여호와를 향해서 심히 질투함이라 하는 이런 뜻이다. 엘리야는 이스라엘이 우상숭배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을 위하여 분노와 질투의 마음으로 바알선지자들과 대결해서 다 죽이는 엄청난 일을 했다. 이런 엄청난 일을 했는데도 이세벨이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더 살기등등해서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것을 보고 ‘나 한 사람이 이렇게 한다고 해서 세상이 변하지 않는구나.’하는 절망을 하게 된다. 그래서 다시 브엘세바로 도망을 갔다가 40주40야를 도망을 가서 호렙산 동굴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다시 듣게 된다.
거기에서 바람 가운데도 없고 지진 가운데도 불 가운데도 여호와의 음성이 없는데 세미한 소리가 있어서 하나님 음성을 듣게 되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을 이기는 힘이 바람 같고 불같은 그런 세상을 뒤흔드는 속에 하나님의 일이 있는 것이 아니고 세미한 음성 속에 하나님의 일이 있었다. 엘리야는 “다 죽고 나만 남았습니다. 나 혼자서 설쳐봐야 아무것도 되지 않습니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습니다.”하고 하나님 앞에 떼를 쓰고 있었는데, 하나님은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칠천을 남겨두었다.”라고 하신 것이다. 바알을 섬기는 선지자들을 다 죽이고 하나님의 불이 내려서 백성들 앞에 보여주는 그런 엄청난 일을 했는데도 그것이 세상을 바꾸지 못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기가 남겨둔 사람들을 통해서 일하실 것을 보여준 것이다. 엘리야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에 대한 열심과 하나님 때문에 질투하는 그런 사람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세상 앞에서는 나로서는 안 된다는 절망에 빠졌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엘리야가 다시 시작하게 된 것은 ‘하나님이 일하고 계셨구나. 하나님이 이런 사람들을 준비하셨구나.’ 하는 이런 것을 보게 되었을 때 엘리야의 소명이 다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사야도 마찬가지 경험을 하였다.
이사야 6장에 보면 웃시야 왕이 죽던 그 해에 하늘에 높이 들린 보좌에 않으신 하나님을 보게 된다. 웃시야 왕은 유대 왕들 가운데 선왕에 속한 왕이었다. 그 다음 요담 왕은 어리고 나라를 잃을까 큰 걱정이 되는 그런 상황이었다. 유대가 어떻게 될지 심히 걱정이 되는 이런 상황에서 이사야는 나라가 썩었다고 선지자로서 심판하고 있었다. 웃시야 왕이 죽는, 전 국민적인 절망 앞에 섰을 때 이사야에게 보여진 것이 높이 들린 하나님의 보좌였다.
땅의 보좌보다 더 높은 하나님의 보좌가 보였던 것이다. 하나님의 보좌가 있어서 통치가 되는구나 하는 것이 보였다. 유다는 웃시야 왕이 잘해서 통치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좌에서 통치하고 있었던 것이 보여 졌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사야 6장에 나오는 이야기이고 이사야의 소명이다.
우리는 땅의 사정, 이런 것이 잘못되었고 일이 안 되고 하는 이런 지적질을 열심히 하다가 하늘보좌의 통치를 봄으로써 동시에 ‘아 내 입술이 부족했구나. 화로다 망하게 되었다.’ 하면서 하나님 앞에 자기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을 내가 못했구나. 하나님의 통치를 보지 못했구나.’ 그렇게 알게 되는 것이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예레미야 33장에 보면 예레미야가 아직 시위대의 뜰에 갇혔을 때,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그때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 일을 성취하는 여호와.” 이러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된다. 전부 다 하나님의 일을 자기가 하려고 하다가 절망하고, 거기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게 됨으로써 그때부터 하나님에게 이끌려서 하나님 일을 하는 사람들이 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모세는 신명기 1장 33절에서 고백하기를 “그는 너희보다 먼저 그 길을 가시며 장막 칠 곳을 찾으시고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너희가 갈 길을 지시하신 자이시니라.”고 고백했다.
늘 그분이 앞서서 행하셨다. 40대의 실수는 하나님보다 자기가 앞서간 것이다. 모세의 열심도 특심했고, 엘리야의 열심도 특심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앞서 행하신 것을 보지 않으면 결국 사람은 하나님 일을 보아도 자기 일을 하게 되고 자기 일로 끝나게 된다. 이런 사람들의 절망은 개인적인 절망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절망이다. 오늘날도 이 시대에 교회가 정말 되겠는가 하는 절망을 해보게 된다.
지난번에도 이야기했지만 특히 대학가의 기독교인이 1%도 안 되는 상황이다. 인구도 줄고 있고, 하나님이나 예수에 대한 관심 자체가 사라지고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다 어디로 가는지 엉뚱한 것에 전부 열광을 하고, BTS(방탄소년단) 앞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보면 저 음악을 들으려고 어디서 저렇게 사람들이 모였는가를 보면 질투가 나지 않을 수가 없다.
엘리야와 같이 “여호와를 위해서 내가 심히 질투합니다.”라고 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다.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는 것을 들으려고 모여들고 있다. 사람들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있는데 다른 데 가 있는 것이다. 이 시대에 교회가 될 것인가? 하나님 나라가 될 것인가? 우리로서는 절망할 수밖에 없는 것을 경험을 하게 된다. 대구교회만 이렇게 한다고 뭐가 되겠는가? 이런 생각도 든다. 또 이것이 언제까지 가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 인생 속에서 일해 오신 하나님, 교회 안에서 일해 오신 하나님을 생각한다면 이런 저런 사정 때문에 하나님의 일이 방해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서 더 깊은 자기의 경륜을 완성해 가실 것이라는 믿음이 생긴다. 모세가 떨기나무에서 나무가 타지 않고 불이 타는 광경을 본 것과 엘리야가 호렙산 동굴에서 세미한 음성 속에 하나님을 위해서 준비된 일들을 본 것처럼 우리의 소명도 그런 자리에서 생긴다. 소명은 일이 보여서 ‘내가 이 일을 해야겠습니다.’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일하심이 보여서 따라가는 것이다.
그때는 우리가 낙심할 것도 없고 절망할 것도 없다. 하나님이 일하심만 보게 되는 것이다. 세상이 바뀔 것 같지 않은 이 절망, 어떻게 거대한 큰 세상이 그리스도 앞에 복종케 될 것인가? 표면을 보면 누구라도 암담할 수밖에 없다. 캐나다 교회에 홍**형제님이 계신다. 그분은 머리도 아주 비상하시다. 옛날에 경기고 서울대를 나오시고 캐나다로 유학을 오셔서 회사 입사 시험에서 수석해서 회장님의 특별한 총애를 받았던 분이다. 이런 분이 회사를 그만두고 캐나다에 오게 되어서 만나게 되었다. 나는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과 계획, 하나님이 형상..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런데 4차원, 외계인, 전생 등 듣도 보도 못한 이야기들을 해박한 지식으로 쏟아 내셨다. 만나고 돌아오면서 절망감이 들었다.
과연 저런 사람에게 어떻게 말씀이 들어가겠는가? 도저히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저런 사람이 어디 한 둘이겠는가? 똑똑한 사람이 어디 한 둘인가? 우리는 그 앞에 명함도 내 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세상에 널려 있고 그런 사람들이 세상을 움직이고 있다. 요즘 책 몇 권에 의해서 젊은 사람들의 생각이 얼마나 크게 영향을 받는지 모른다. 유발 하라리의 호모 사피엔스 이런 책들을 보면 종교에 대한 생각이 싹 식을 만큼 그렇게 정교하고 해박한 자료들을 가지고 인간 정신세계를 파헤친다. 몇몇 지성인들에 의해서 세상의 물결에 휩쓸려 가는 이 시대에 이런 말씀이 어떻게 세상에 들리겠는가? 그런 생각을 했다.
한 시간 반 떨어진 곳에서 차로 돌아오면서 피곤하기도 하고 막막하기도 하면서 ‘저런 사람은 안 되는구나. 가족들은 교회를 좋아하는데 저 사람이 틀면 안 될 텐데.’ 이런 생각을 하면서 내려오다가 문득 성경 말씀이 생각났다. ‘하나님 말씀은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함이라. 모든 이론을 다 파한다.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케 한다.’고 했는데 그렇게 될 것 같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그 뒤의 말씀이 문득 떠올랐다. ‘너희의 복종이 온전케 될 때 모든 복종치 아니한 것을 심판하기 위하여 예비한 가운데 있노라.’ 하는 말씀이 생각이 났다. ‘저 사람이 어떻게 복종할 것인가가 문제가 아니라 너희의 복종이 온전케 될 때 하나님은 그렇게 하신다.’는 것이다.
모든 이론을 파하고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주께 복종케 하는 일은 나의 복종이 온전케 된 이후의 문제인 것이다. 문제는 나의 복종이다. 내가 어설프게 아는 성경 지식을 가지고, 들은 말씀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내 놓고 ‘왜 저 사람이 깨어지지 않는가?’ 하는 것은 누워서 감 떨어지기 기다리는 것과 같은 일이다. ‘하나님은 저 사람의 복종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내 복종을 기다리는 구나.’ 하는 것을 알았다.
그날 그 일은 나에게 너무나 중요한 경험이 되었다. 남을 어떻게 할 것인가 생각하고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나의 복종이 온전케 되는 것이 내 일생 목표가 되어야 하는구나 생각하니까 모든 사람이 은혜가 되고 무거웠던 것이 한꺼번에 날아가는 것을 경험하였다. 목회자들은 설교를 하면 말씀을 듣고 사람들이 바뀌기를 기대한다. 그런데 사람들이 안 바뀐다.
그것이 답답해지기 시작하면 꽃으로라도 사람을 때리지 말라고 했는데 말씀으로 사람을 때리는 설교를 하게 된다. 자기도 모르게 은근히 이랬으면 하는 생각들을 내 놓으면 그것이 차곡차곡 율법적이 되어 가는 것이고 사람들에게는 자기들을 치는 말씀으로 듣게 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바꾸려는 노력은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 사람 속에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봐야 되는 것이지 내가 그 사람을 보고 그 사람을 바꾸기 위해서 말하는 것은 모세가 실패했고 엘리야가 실패했던 것처럼 그렇게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교회에서 李목사님이 말씀하실 때 ‘무엇을 가지고 언제 말씀 준비를 하십니까? 무엇을 가지고 말씀 준비를 하십니까?’ 이렇게 물으면 李목사님의 대답이 늘 ‘교회를 보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하신다. 이 말도 잘못 들으면 교회의 문제를 보고 바로 잡으려고 말씀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교회에서 하나님이 하신 일을 보고 말씀을 하면 이것이 양식이 되고 살리는 것이 되어 모든 사람에게 은혜가 된다. 그런데 안 되는 것을 보고 문제를 지적하기 시작하면 계속 무거운 짐을 사람들에게 가중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나는 근본적으로 사람을 바꿀 수 없다. 내가 사람을 바꿀 수 없다.
사람은 내가 어쩐다고 바뀌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살아야지 말씀으로 어떻게 고치려고 생각을 안 하게 된다. 내가 양식을 내 놓으면 그것을 먹고 사람들이 자라서 할 일이 보이고 자기 일이 보여서 하게 되는 것이니까 우리는 양식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양식이 되자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고 그것이 나에게 은혜가 된 그 은혜를 공급하는 것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길이 되는 것이다. 문제를 보고 접근하는 것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내 친구 하나가 나보다 몇 년 뒤에 미국에 와서 개척교회에 초대를 받아서 목회를 시작하는데 처음 하다 보니까 고칠 것이 막 보이는 것이다. ‘주시옵소서’ 하는데 ‘기도는 그런 것이 아니다.’ 하고 ‘십일조 하면 복 받는다.’고 하니까 ‘그런 것이 아니고...’ 사람들의 의식에서부터 습관까지 고칠 것이 보여서 그것을 설교로 하니까 교인들에게 혼란이 오기 시작한 것이다. 자기 속에 생명이 자라서 그런 껍질이 벗겨져야 정상적인데 껍질부터 깨부수려고 하니까 그렇다. 달걀이 안에서 병아리가 자라지도 않았는데 껍데기를 깬다고 병아리가 나오는 게 아니다.
껍질은 어느 순간까지 다 필요해서 있는 것이다. 닭도 지혜로워서 빨리 나오라고 껍질을 안 깨고 계속 알을 품어주기만 하는데 거기서 자라서 자기가 껍질을 깨고 나온다. 어릴 때 할아버지 집에서 병아리를 키우는 것을 봤는데 알을 품어서 병아리가 나올 때 자기가 깨고 나온다고 하였다. 병아리가 안에서 자라 그 껍질 속에 더 이상 담겨져 있을 수 없을 때 깨져서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병아리가 안 된 것들이 몇 개씩 있다. 그래서 할아버지가 귀에 대 보고 조금이라도 꿈틀거리고 소리가 나는 것은 병아리가 되었는데 힘이 없어서 못나온 것이라 깨 주니까 병아리가 젖은 채로 나온다. 또 어떤 것은 깨어 보면 썩어 있다.
정말 못 나올 때는 깨 줘야 할 필요가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병아리들은 병아리를 키우는 송**형제의 말에 의하면 나와도 약골이고 제대로 자라지 못한다고 한다. 그런데 자기가 깨고 나온 병아리들은 그냥 놓아두어도 제대로 자라게 된다고 한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우리의 소명 의식은 하나님이 일하심이 보여서 따라가는 것이니까 사람에 대해서도 그 사람 속에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내가 보고 즐거워하고 그것을 말하는 것이 사역이다. 그것을 내가 어떤 눈으로 봐서 만들고 고치고 싶어 하면 40세의 모세처럼 그렇게 될 수밖에 없게 된다. 나를 바꾸려는 노력도 마찬가지다.
나를 바꾸려고 ‘나는 이런 사람이 되어야지, 이런 사람이 되어야지.’ 말씀을 듣고 그렇게 하면 결국 율법으로 나를 다듬는 노력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이것도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게 된다.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생명은 주셔야 되는 것이지 내가 만들어 갈 수 없다. 목사님 인생 중의 큰 전환점 중의 하나가 에베소서 5장 25절 이하의 말씀이었다고 하셨다.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 없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신부로 세우사’ 이런 것들이 없이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신부로 세우신다. 거기서 ‘내가 나를 씻는 것이 아니구나.’ 내가 나를 하나님 앞에 잘 보이려고, 옳게 보이려고 ‘내가 이런 사람이 되어야지, 저런 사람이 되어야지.’ 하는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씻기는 주체가 신랑이구나. 자기 보기에 아름답도록 물로 씻고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시는 구나.’ 이렇게 하면서 자기를 고치려는 노력을 다 내려놓게 되었다고 하셨다. 자기는 하나님 앞에, 예수 그리스도 앞에 신부가 되고 그렇게 살다 보니까 형제들 앞에는 자기가 신랑이 되어 이런 삶을 살게 되었다.
하나님이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어떻게 쓰시는 지 봐야 되는 것이지 내가 ‘이런 사람이 되어야지.’ 하고 만들 수가 없는 것이다. 성경에 있는 법 중에서 가장 쉽고도 가장 어려운 법이 안식일을 지키라는 법이다. 규례만 해도 200가지 넘게 생겨날 정도로 안식일의 법이 복잡해지고 어렵다. 쉬라고 하면 쉬면되는데 쉬는 게 그렇게 어려워서 사람들이 못 지키는 율법이 되었다. 그래서 쉬우면서 가장 어려운 율법이 되었다.
히브리서 4장 10절에 있는 말씀대로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하였는데 몸은 일을 하지 않을 수 있지만 사람의 일이 끝나지 않는 것은 자기 일이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안식일을 지킬 수가 없는 것이다. 자기 일이라는 것이 내 밥 먹고 내 돈 벌고 하는 이것만이 아니고,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는데 자기가 하는 것은 자기 일이다.
하나님의 일은 항상 우리가 볼 때는 안 될 것 같은 일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볼 때 될 것 같으면 ‘이렇게 하면 되겠다. 교회를 이렇게 하면 되겠다. 복음을 이렇게 하면 되겠다.’ 하는 것은 그렇게 생각 되는 것은 자기가 하게 되어 있다. 자기 일인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일은 우리가 생각할 때는 도저히 안 될 일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말하였다. 그러면 누가 천국에 들어가겠는가?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이렇게 하니까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할 수 있느니라.’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일생 ‘내 아버지가 일 하시니 나도 일한다.’ 이 정신으로 사신 것이고 지금까지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산 사람들은 전부 ‘내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그런 마음으로 산 사람이다. 이것이 가장 쉽고도 가장 어려운 일이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처럼 말이다. 교회가 이렇게 하면 잘 될 것 같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그렇게 해 보면 꼭 분란이 일어나고 싸움이 일어난다. 나로서는 도저히 방법이 없을 때 우리는 잠잠한 사람이 되게 되고 우리가 잠잠할 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게 되는 것이다. 바람과 폭풍과 지진과 불 가운데서는 우리가 그 소리를 듣지 못하는데 조용한 가운데서 하나님이 일하신 것을 듣게 된다는 것이다. 교회도 마찬가지로 교회가 이렇게 되고, 대구교회도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이라고 그림을 그리게 되면 도저히 그림이 안 그려진다. 그런데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실지 모른다.
예수님 이후에 제자들에게 그림이 그려졌겠는가? 우리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해서 ‘너는 안디옥 교회로 가고 너는 골로새 교회로 가고 에베소로 가고’ 이런 그림이 안 그려졌다. 그런데 전혀 생각지 못했던 사람이 나타나서 우리가 생각지 못한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어 가신 것을 볼 때 나도 이 목회자 모임을 통해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겠다고 하는 생각을 늘 하게 된다. 우리는 대를 이어서 고스란히 가기를 원하지만 하나님의 배열은 꼭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다.
워치만니가 李목사님을 어떻게 알았겠는가? 자기 앞에 있는 사람들 밖에 몰랐다. 그런데 전혀 알지도 못했던 다른 나라에서 뭔가 빛을 보고 그것보다 더 풍성하게 계시를 열어 놓고 이렇게 될 줄은 워치만니로서는 도저히 모르는 일이었다. 우리가 보면 ‘아! 생명은 이렇게 이어지는구나.’ 이렇게 생각이 되고 또 앞으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이 된다. 우리가 모르는 데서 하나님이 어떤 일을 준비하실지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침례 후에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임하신 모든 것은 우리로서는 아무 방법이 없는 사람이 될 그 때에 하나님이 일하심을 보게 하셔서 우리는 그것을 따라가는 사람으로 사는 것이며 이것이 참 소명자의 모습으로 생각을 한다.
예수님은 그분에 앞서 하나님의 일하심이 보여서 일하셨다. 우리도 그렇게 살면 우리 인생도 풍성해지고 절망할 것도 낙심할 것도 없다. 보통은 나의 그림을 그려 놓았기 때문에 잘 안 되면 낙담을 하게 되는 것이다. 교회에서 몇 번 이야기를 했지만 내가 처음 토론토 교회에서 모임을 한다고 하니까 머리속에 그림이 싸악 그려졌다. 이런 모임을 하고 이런 말씀을 해야겠다는 그림이 그려졌는데 첫날 그 그림이 완전히 망가지게 되었다. 한 사람이 다 판을 헤집어 놓는 바람에 그렇게 되었다.
그런데 후에 그것이 나에게는 참 너무나 다행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 그랬다면 배운 속성상 ‘교회’ 하면 그림이 자동으로 그려지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 그림이 없이 아무 형상이 없이, 아무 형상도 만들지 말라는 이것이 교회에 대해서 하신 말씀이신 줄 그때 처음으로 적용되었던 때였다.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하고 형제들을 섬기는 데 아무 형상이 없어야 되는구나.’ 하는 것이 알아졌다. 교회도 ‘사람들이 많이 모여야 된다.’ 이런 그림이 있으니까 피곤한 것이지 내 앞에 있는 사람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내가 보고 즐거워한다고 하면 피곤한 일이겠는가? 그저께 은퇴하신 목사님과 잠깐 만나서 이야기를 했다.
우리 교회도 한 번 오셨다 가셨다고 하여 다녀간 소감도 들었다. ‘다시 목회를 하신다면 무엇을 하고 싶으십니까?’ 하고 물으니까 자기는 ‘작은 공동체를, 작은 교회를 하고 싶다.’ 고 하셨다. 100명만 넘어가도 사람들과 깊은 관계를 못한다는 것이다. 이분은 목회를 성공하신 분이다. 사람들에게 얼마나 신뢰를 받았는지 전도사 때 그 교회를 갔는데 담임 목사가 되어서 30년이 넘게 목회를 하시고 은퇴하셨다. 말씀을 들어봐도 깊으시고 좋으시다. 그런데 자기 교회가 크다 보니까 이름도 다 기억하지 못하고 관계도 다 못 가졌다고 한다. 그래서 정말 하나님이 내 앞에 두신 사람들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살고 싶다. 다시 한다면 그렇게 살고 싶다고 그런 이야기를 하셨다. 이것은 교회라는 목회라는 그림이 없이 ‘하나님이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는 마음으로 살면 수고로움이 없고 내 일생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고 살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소명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