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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어천서각공방 원문보기 글쓴이: 우광성
1.4.4. 황해도 海西
강원도의 지산이 서쪽으로 뻗고 평안도의 지산이 남쪽으로 뻗어서 황해도의 경락이 된
다. 동쪽으로 강원도와 경계하고 남쪽으로 경기도와 접해 있으며, 서쪽으로 모두 끝없는
바다이고 북으로는 평안도와 경계한다. 금천金川으로부터 황주黃州까지 대로大路의 동
쪽으로는 모두 산간 지대의 읍들이고, 대로의 서쪽으로는 평야 지대의 읍들이 많다. 해주
海州의 수양首陽과 문화文化의 구월九月 같은 것은 우뚝 솟아 있지 않은 것이 없다. 단지
평야 가운데에서 홀로 서 있는 것이므로 총괄적으로 말한다면, 수토遂兔와 신곡新谷의
골짜기와 깎아지른 바위처럼 넓적하게 얽히고 울창하게 치솟으며 산과 들이 서로 섞여들
뿐이니, 온 도의 산천山川이 무겁고 탁한 것이 많고, 빼어나고 아름다운 태도가 적다. 그
러므로 이곳 출신 사람들은 장대하고 둔탁한 사람이 많고 청아한 사람은 적다. 땅이 결함
이 많으므로 옛날부터 맹인이 많이 나왔다. 흙의 성질이 딱딱하고 비옥하며, 누렇고 검은
것이 서로 섞여 찰기가 있고 미끄럽다. 물맛이 담백하고 탁하다. 절후節候가 경기도에 비
해 5일 정도 늦다.
백성들의 습속은 대로大路의 동쪽 지역이 어리석지만, 근검하며 매우 인색하다. 화전火
田도 하고 수누水耨도 하였으며, 노동력에만 의지해서 살아간다. 무리지어 마시고 즐겁
게 놀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비록 같은 경내에 있다고 해도, 인척이나 친척 간이 아니면
찾아 방문하지 않고 출입하는 일이 드물며, 서울에 줄을 대서 세력에 의지하려 하지 않는
다. 무기武技와 문예文藝 중에서 일컬을 만한 것이 없다.
대로大路의 서쪽 지역에는 근면하고 인색하며, 또 어리석어 분을 넘는 습속이 많다. 비록
농사에 힘쓰는 것을 일삼는다고 하더라도, 상업에 힘쓰는 부류가 많다. 무예를 숭상하는
사람도 많고 볼만한 문화도 많다. 무리지어 술을 마시고 즐겨 노는 것을 좋아하고, 서울의
대가들과 인연을 맺어 세력에 의지하여 이익을 좇는 것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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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탁을 통해 향임鄕任 등을 다투는 풍조는 황주黃州·봉산鳳山이 평안도보다 더 심하다.
해주海州의 이습吏習은 완악하고 과람하니, 다른 도에서 찾아 볼 수 없다. 안악安岳·신
천信川·장연長淵·풍천豐川의 백성들은 결혼할 때의 나이가 남자가 적고 여자가 많으
니, 남자는 겨우 10살에 불과한 데에도 30살 가까운 신부를 얻는다. 여자는 30세 가까이
되어서야 마침내 의혼議婚82)하였으니, 이것은 대개 농사를 지어 밑천으로 살아가는 계획
에서 나온 것이다. 참으로 우둔하고 탐욕스러운 풍조다. 황주·봉산과 장연·풍천 사이
에는 문도 아니고 무도 아닌 사람들이 서울과 고을에 출몰하며 무리를 짓는데 이것도 폐
단이다.
평산平山·해주海州·연안延安·배천白川은 황해도의 양반 고을로 일컬어진다. 문물文
物도 다른 읍보다 뛰어나고, 명분도 평안도에 비해 약간 낫다. 그러나 서울 사람들은 평안
도와 함께 양서兩西로 아울러 일컬으니 기호 지방만은 못하다.
황해도의 농업農業은 대로大路의 동쪽 지역에는 밭이 많고 논이 적다. 산의 밭에는 화전
민들이 많아서 밭에는 보리·콩·팥·조·기장·면綿·삼·메밀·귀리를 심고, 그 중
에서도 조를 심는 데 힘쓴다. 논은 모두 파종播種만 하고 모내기는 하지 않는다. 풀을 자
르기도 하고 혹은 불살라 갈아엎기도 하며, 밭에 거름을 쓰는 데 힘쓴다. 대로大路의 서쪽
지역에는 화전火田은 없고 밭과 논이 절반씩이다. 신천信川·재녕載寧·연안·배천은
논이 가장 많지만, 파종播種만 하고 모내기는 하지 않는다. 밭의 작물은 대로의 동쪽 고을
들과 대체로 같아서, 조와 목면에 가장 힘쓰고 참깨·비해·삼을 서로 돌려짓기하고 파
종한다. 봉산·재녕·신천·안악의 사이는 아득히 수백 리 떨어져 있으며, 큰 평야는 모
두 비옥하며 모두 관개를 한다. 가뭄과 흉년만 만나지 않으면, 가을걷이 때마다 벼알이 낭
자하고, 소고기 안주에 술을 먹고, 퉁소를 불고, 북을 치며 온 들에서 즐기며 논다. 이것은
전국의 농장에서 가장 장관이다.
황해도는 경기도에 비해서는 열심히 농사를 짓지만, 다른 지방보다는 게으르다. 밭에는
겨릿소를 써서 경작하고, 또한 모를 심은 뒤에는 호릿소가 쟁기를 싣고 모 사이의 흙을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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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의혼議婚: 혼사를 의논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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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살짝 갈아서 곡식의 뿌리를 배양하기를 단지 한 번만 한다. 그러므로 흙이 두텁게 덮여
지지 못하여, 큰 바람을 만나면 이삭이 무겁고 줄기가 약하여 쪼개지고 쓰러지는 근심이
많기도 하고, 가뭄을 만나 메말라 죽는 탄식도 있지만, 경기도에서 애초에 사이짓기를 않
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밭은 두 번 김을 맬 뿐이고, 논은 세 번 김을 매는 경우가 많으며,
목화밭은 3~4차례 김을 맨다. 흙의 성질이 비옥하므로 밭의 하루갈이에서 수확한 것은
많게는 수십 섬에 이르고, 적어도 14~15섬 밑으로는 내려가지 않는다. 결부結負는 경기
도에 비해 대단히 가벼우니 농가의 낙원이다. 해주 근방부터는 전차田車를 사용하기도
한다.
생리는 바닷가 각 고을들에 어염의 이익이 있고, 산간 지대 고을들은 대부분 뽕나무와 삼
의 업이 많았다. 황주와 봉산의 배, 배천白川의 돗자리는 국내에서 이름나 있으며, 신계新
溪·곡산谷山·수안遂安·토산兎山도 배를 많이 심어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 그 밖의 각
고을은 삼·기름·면綿·솜·방적紡績을 돈벌이로 삼는 경우가 많다. 진맥眞麥·참깨·
적두는 모두 토산물이고, 해로海路를 통하므로 장사하는 자산이 된다. 과일의 품종은 모
두 있지만 홍시만은 없다. 대로大路의 동쪽 지역은 담배를 심고 양봉한다. 신천信川·수
안遂安의 사이에도 금맥과 은맥이 많다.
황해도는 경기도와 평안도 사이에 위치해 있으며, 토질이 가장 두텁고 비옥하므로 곡식
의 생산량이 가장 많다. 절기는 기후가 경기도보다 약간 이르거나 늦지만 경작하고 씨를
심고 수확하는 일자는 평안도와 함경도보다 훨씬 덜 촉박하니, 농사에 마땅하다고 할 만
하다. 거주 인구와 물산이 많고, 군사와 말이 정갈하고 강하여 비록 평안도에 미치지는 않
지만 경기도와 강원도에 비한다면 두 배나 다섯 배 쯤 낫다고 할 수 있다. 고을이나 마을
을 가릴 것 없이 대체로 말 안 듣고 우둔한 풍조가 많다. 만일 수령이 법 밖의 정사를 하여
백성들의 성정을 거스른다면, 참으로 뜻밖의 염려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공평으로 자기
를 규율하고, 충실하고 두텁게 풍속을 이끌어야 마땅하다. 백성들과 직접 만나 송사를 들
을 때에는 반드시 정성을 다하고 의리를 분석하여, 그 어리석은 풍속을 깨우치고, 은혜와
위엄, 밝은 판결로써 구제하면 풍속을 통해 통치하는 정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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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의 관액과 형편을 논한다면, 황주黃州와 봉산鳳山의 동쪽 지역부터 수곡遂谷 지계
의 산은 안변安邊에서 온다. 회령灰嶺과 관서關西의 양덕陽德·성천成川, 관동關東의 이
천伊川 등의 고을들이 서로 접하였고, 큰 골짜기와 긴 계곡이 얽히고 깊어 험하니, 비록
나그네들이 통행하는 길이 있더라도 모두 태행산太行山이 심하게 구불구불 험한 것과 같
다. 황주의 서쪽에 있는 안악安岳 장연長連 등의 고을은 평안도의 평양, 강서의 용강龍崗
과 물을 사이에 두고 경계를 나눈다. 물의 힘이 험하고 완고하며, 매번 주즙舟楫이 있었
다. 황주黃州가 직로의 요충이 되는 것은 걱정스러우므로 옛날부터 병영을 설치하니, 지
리의 이점을 이용하였다고 할 만하다. 동선洞仙에 관關을 설치하고 정방定方에 진을 둔
것도 변방을 지키는 방책을 깊이 터득한 것이다. 다만 역산䔉山에 진을 조치하는 방도는
오히려 미진한 점이 있다.83)
대개 본진本鎭은 산에 의거하여 있고, 들에 접해 있다. 신천信川과 재녕載寧 사이의 강이
굳게 얼 때에 사변이 일어난다면, 적의 예봉이 기성箕城의 서쪽을 뺑 돌아 패강浿江의 하
류를 직접 건너서, 몰래 강영岡營 서쪽 지역의 평야에까지 뻗쳐 곧장 봉산과 재녕 사이로
나오면, 저 역산의 잔약한 진鎭이 장차 어떻게 절충의 지위로 적에 대적할 수 있겠는가?
하물며 근년 이래로 강등되어 오랫동안 근속하는 자리가 되었으니, 더욱이 절제를 호령
하고 여러 읍을 탄압할 수 없다. 이것은 마땅히 특별히 조치하여, 그 자품을 높여주고 그
봉록을 우대하고, 교졸校卒을 더 정하여, 신절제新節制로 하여금 신천과 재녕 부근의
2~3면에 군졸을 이획하여 신재 두 읍에 절제를 행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 이후 민호들이
즐비하게 한 다음에야 사변이 일어났을 때 신뢰할 수 있을 것이다.【청석동靑石洞에 성을
쌓고 진을 두는 방책은 아래 관방조關防條를 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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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두주: 역산진의 터는 지형의 띠가 줄어드니 길지가 아닌 듯하다. 그 근방에서 터를 보아 이전하는 것이 방어하는 계책에 합당
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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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
1.4.5. 강원도 關東
철령鐵嶺 이남에서 갈라진 지맥支脈과 간맥幹脈은 강원도의 경락이 된다. 바다를 따라
곧게 뻗은 간맥은 오대산五臺山, 태백산, 소백산이 되어 영동과 영서 여러 군의 경계를 이
룬다. 북쪽으로는 철령鐵嶺을 경계로 하고, 동쪽으로는 끝없는 바다와 접해있으며, 남쪽
으로는 경상도와 접해 있고 서쪽으로는 경기 바다를 만난다.
강원도 전체가 큰 골짜기이니 가파른 산세를 벗어날 수 없으므로, 이곳 출신 사람들은 우
둔한 자가 많다. 원주·춘천·강릉·철원·홍성·횡성 등의 고을만은 산의 기운이 부드
럽고 빼어나며, 훤히 트이고 밝아서 양반 고을이라고 일컬어진다. 영동嶺東은 모든 군들
이 바닷가에 있거나 산에 있으며, 그 사이에 넓은 들이 있고 땅은 일출하는 쪽으로 접해
있으므로 절후는 영서에 비해 보름쯤 빠르다. 영서 지방은 절기가 경기도에 비해 거의 열
흘 쯤 늦다.
일기의 차고 따뜻함은 기후에 달려있지만, 지기地氣의 오르내림을 따라 산간 지대의 고
을들과 평야 지대의 고을들 간에 차이가 있는 것은 당연하다. 산 하나를 두고 말하더라도
남쪽과 북쪽이 다르다. 이것은 영서의 절후가 영동보다 더 늦은 이유다. 흙의 성질은 딱딱
하고 척박하며, 물맛이 차다.
백성들의 풍속은 검소하고 질박하고 어리석지만 두텁다. 팔도 중에서 오직 관동만이 태
고의 순박한 풍습이 있어서, 절대로 교활하게 헤아리거나 임기응변의 태도가 없다. 사람
들을 접대하는 데에 질박하며, 실질적인 것을 숭상하는 데 힘쓴다. 다만 어리석기 때문에
완악하고 혼미한 풍습이 많다. 오직 농사에만 근면히 힘쓰고 상업의 이익을 돌아보지 않
으며, 무리지어 술 마시고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혼례·상례·장례·제례 때에만
상하가 한자리에 모여 술 한잔 먹는 것을 두터운 풍속으로 삼고 등급을 두지 않는다.
만일 장례와 제례에 인근 사람들이 함께 모였을 때, 주인이 객을 잘 접대하지 않으면 크게
욕을 먹으므로, 가난한 사람들은 손님을 접대할 물건을 마련할 수 없어서 장례의 기일을
어기기도 한다. 이것은 산간 지대 백성들의 두터운 풍속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나, 실로 무
식하고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이다. 산간에서 나서 자라니 의복과 음식이 사치할 우려가
없고, 조밥과 나물국으로 넉넉하고 한가하게 산다. 늙어서야 따뜻한 아랫목을 생각하니,
세상의 명리에 대해 전혀 모른다. 남자는 돌밭을 갈고 여자는 실과 삼을 잡으며, 산에 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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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나물 뜯고 수렵하니, 오직 먹고 사는 데에만 뜻을 둘 뿐이다. 혹시 산수 중의 넓은 곳에
서는 봄에 꽃 피고 가을에 낙엽이 지니 흡사 무릉도원과 같은 풍미가 있고, 다른 도와는
달리 관장을 두려워한다. 궁박한 골짜기라서 목판과 목피를 쓰는 경우가 많으니, 기와 대
신에 이것으로 집을 덮는다.
농업을 보면, 농사짓는 땅이 대부분 산간 지대의 밭이므로, 원주原州·횡성橫城·춘천春
川·철원 등의 고을은 넓은 평야가 있더라도 논이 극히 비싸서, 대농大農이라고 일컬어
지는 집도 1섬지기가 안 될 정도이다. 모두들 파종을 하고, 모내기하는 경우가 적다. 궁박
한 골짜기의 백성들은 논을 밭만 못하다고 여기고, 밭농사에만 전력한다. 화전火田은 1년
씩 교대로 진전陳田과 기전起田을 바꾸어서 보리·귀리·조·기장·콩·밭·메밀 등을
심는다. 산골은 바람이 차므로 목면이 본디 흙의 성질에 맞지만, 오직 들 가까이에 있는
읍에서만 사이심기를 한다. 산골짜기에는 본디 황무지가 많아서 풀과 나무가 무성하고
빽빽하니, 묵정밭을 불태우고 경작하고 파종하며, 모를 심고 김매기할 때에 힘을 들이는
일이 많지 않다. 비록 도랑을 열어 논을 만들 수 있는 곳이라도 버려두고 개간하지 않는
다. 땅은 본디 자갈이 많고 메말랐으므로, 이른바 원전元田에서 수확한 것도 적다. 그러나
결부가 지극히 가벼워서 백성들이 전부田賦를 걱정하지 않는다. 영동嶺東은 지세地勢가
모두 산을 따라 가고, 바닷가에는 탁 트인 들이 있으므로 논이 많고 벼농사에 힘쓴다. 영
동, 영서를 막론하고 밭은 모두 겨릿소를 쓴다.
수입원은 농업 이외에 삼과 베, 담배 등이 있다. 또한 양잠에 힘쓰고 집집마다 양봉을 치
며, 산채山採·산렵山獵·목물木物·마혜麻鞋·산용山茸·석청石淸으로도 이익을 낸
다. 삼蔘을 기르는 곳도 있으나, 이는 도리어 민간에게 고질적인 폐단이 되기도 한다. 과
일은 홍시 외에도 산 열매나 집 과일이 모두 있다. 영동嶺東은 바닷가이므로 고기와 소금
으로 업業을 삼으며, 소금에는 철염이 많으므로 맛이 쓰다. 영서嶺西의 근기 지역 강가에
는 땔나무·숯·목판으로 상업을 하고, 골짜기의 백성들은 칡뿌리를 캐고 상수리 열매를
따서 흉년에 보탠다.
대체로 온 도에는 모두 트인 곳이 적으므로, 옛날부터 위인과 걸출한 선비들이 굴기한 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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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없었다. 간혹 과거급제로 이름난 사람과 사업으로 이름난 사람이 있기는 하였다. 산은
높고 물이 쏟아지며 풍기風氣가 쓸쓸하고 차므로, 큰 부자는 없지만 이곳 사람들은 부지
런히 힘쓰는 것으로 먹고 산다. 밭농사에만 주력하므로 밭곡식이 흉년이 들면 유리도산
하는 근심이 다른 도의 배나 된다. 산밭에서의 파종은 4월마다 하는데, 만일 3~4월에 비
가 자주 오면 화경火耕의 기한을 놓쳐 농사를 망치게 된다. 또 5~6월 사이 한 달 동안 장
맛비가 오면 곡식이 모두 녹아버린다. 이것은 모두 논농사에만 좋고 산골의 농사에는 해
가 되니, 골짜기와 들의 농사에 차이가 있다.
예컨대 산과 들이 절반씩인 다른 도에서는 밭에서 흉작이면 논에서 풍작이고, 논에서 흉
작이면 밭에서 풍작이니, 오히려 농민은 이 때문에 살아간다. 강원도 산골만이 밭농사를
망치면 바로 유리도산하게 되어, 서울이나 어촌·농촌에 들어가면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
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오늘날 서울을 보면, 그곳에 머물러 살면서 임금을 받고 고용된
사람들의 태반이 강원도 사람들이다.
군정軍丁이 전국에서 가장 가벼운데, 군총軍摠은 다른 도들에 비해 원래부터 극히 적다.
그리고 산골 백성들의 마음은 오히려 분수를 지키는 경우가 많고, 자신의 계파를 허위로
변개하여 양반의 족보에 투탁하여 교묘히 역을 모면하고자 하는 습속이 드물다. 그러므
로 군역에 응하는 자가 많아서 군정이 자연 헐하였다. 그러나 먹고 사는 일이 모든 읍중에
서 가장 어려웠다. 순박하고 열심히 복무하고, 놀며 입고 먹는 것만 일삼으므로, 풍년에는
굶주림과 추위를 요행히 면하지만 저축이 없어 흉년을 만나기 쉽다. 거주민들은 본래 이
곳을 낙원이라고 여기지 않고, 풍속도 어리석어서 선동되기 쉽다. 관장이 만일 불법적인
가렴주구苛斂誅求로 그들의 본성을 거스르면, 원래 있던 풍속이 흩어지게 될 것이다. 마
땅히 관대함과 자애로움을 갖추어, 백성들의 송사를 들을 때에 반드시 상세하고 분명하
게 깨닫게 하여 혼미한 풍속을 열고, 품어서 무마撫摩한 뒤에 바야흐로 풍속으로 통치하
는 정치를 한다.
강원도의 관액 형편을 논한다면, 이 지방의 9개 군郡은 큰 바다 가까이에 접해 있고, 일본
과 연결되어 있어 걱정할 만하다. 그러나 바람과 파도가 험하여 배와 노가 이롭지 않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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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으므로, 옛날부터 뜻밖의 위급한 일은 호남·영남보다 더 심한 곳이 없었다. 남으로는
죽령竹嶺과 접해 있고, 본도의 지계는 아니지만 원영原營이 있으니 따로 다시 더 조치할
것이 없었다.
오직 철령鐵嶺만이 북로 전체의 요충지다. 분수령分水嶺은 원래 험한 곳이다. 대개 평강
平康으로부터 안변安邊의 용지원龍池院에 이르기까지 170리이고, 분수령分水嶺은 그 사
이에 있다.84) 분수령分水嶺으로부터 용지원까지 120리니, 모두 한 명이 1만 명을 감당하
더라도 아무도 열 수 없는 곳이며, 삼방三防이 더욱 험하다.85) 수백 파把 둘레의 성을 쌓고
관을 건설하여, 일진을 두고 또 평강 수령을 주진관主鎭官으로 삼아, 어떤 일이 있더라도
협력하여 지키게 한다. 게다가 철령鐵嶺에 중관重關을 설치하여 서로 기대어 지키게 한
다면 함경도 지역은 전혀 걱정할 게 없을 것이다.【철령鐵嶺에 성을 쌓아 지키는 방책은
아래 북도의 관방關防 형편形便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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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두주: 고려조에 세 곳의 방어지가 있었으므로, 그것으로 지명을 삼았다.】
85) 【두주: 삼방三防과 철령鐵嶺 두 곳은 흙과 돌이 구비되어 있어서, 만일 그 지형에 따라 건축한다면 경비도 지나치게 많이
들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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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 충청도 湖西
강원도의 큰 줄기가 오대산의 주봉이 되고, 방향을 바꾸어 속리산에 이르러 여러 갈래로
갈라진 것이 충청도의 경락이 된다. 동쪽으로는 경상도와 큰 고개를 사이에 두고 경계를
나누며, 남쪽으로는 호남지방과 인접해 있고, 서쪽은 망망한 바다가 있으며 북쪽으로는
경기도와 접해 있다. 직산稷山부터 은진恩津까지 대로의 동쪽 지역에는 산간 지대의 고
을이 많고, 그 서쪽 지역에는 평야 지대의 고을이 많다. 전체적으로 산과 들이 섞여 있고,
산천이 맑고 수려하며 밝게 툭 트여 있다. 이곳 출신 사람들은 문예가 있고 재주가 있는
사람이 많으니 대대로 양반 고을이었다. 흙의 성질은 비옥하고 단단하며, 물맛은 평이하
고 담박하다. 경기 지역에 비해 절기가5 일 빠르다.
충청도는 백성들의 습속이 근면하면서도 화사하여서, 사치하는 사람과 검소한 사람들이
절반씩이다. 농사에 힘쓰고 근본을 중시하면서도, 놀고먹는 무리가 많다. 물산이 풍부하
여 장시場市가 성황을 이루므로 장사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면서도 양반의 거족들이 고
을마다 있으므로, 명분이 대단히 분명하고 문화가 빛난다.
명색名色과 명분名分을 따지는 것이 어릴 적부터 풍속이 되어서, 입방아 찧는 폐단이 다
른 도에 비해 더 심하다. 문예를 숭상하고 무예를 숭상치 않으므로, 무예의 기술이 크게
모자란다. 경화京華에서 흘러 나와 떠돌다가 정착한 집은 본토 사족들이 사치를 숭상하
였으므로 여기에 익숙해져, 소박하고 야한 풍속이 없어서 외모를 꾸민다. 사람을 응접하
는 풍조가 다른 도보다 낫고, 여항閭巷의 소민小民86)들도 세족世族들 사이의 논의와 평론
에 점차 물들어 있으며, 여러 색목色目의 양반 벌족들이나 높고 낮은 관리들도 유세가들
과 인연을 맺고 있는 자들이 많아서, 청탁하여 향임鄕任 자리를 다툰다. 각 당파에 속한
문벌과 지위 고하를 막론한 관리들이 세력 있는 자에게 연줄을 대고 앞 다투어 자리를 청
탁하려는 일이 많다.
마을의 부녀들은 방적에 힘쓰며, 면·뽕·마·모시를 모두 재배한다. 속리산 근방의 4~5
개의 고을은 산골짜기 가까이에 있으므로 백성들의 습속은 매우 순박하다. 산과 들을 막
론하고 매년 7월 15일에 농가農家의 남녀는 술과 찬을 차려놓고 모여서 노니, 이것을 호
미씻이[세서연洗鋤宴]87)라고 한다. 4개의 고을은 충청도의 귀퉁이에 있고, 강원도와 서
로 접해 있으며, 또 산골짜기 고을이다. 그곳 백성들의 습속은 호속湖俗의 화려하고 사치
스러움에 물들지 않으니 강원도와 대단히 비슷하다.
충청도 농업農業은 산간 지대와 평야 지대의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밭이 적고 논이 많아
서 벼농사에만 힘쓴다. 올벼만 파종하고, 그 밖의 벼는 모내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모판은
여러 번 갈고 거름을 준 뒤에 모내기하고, 모내기하기 전에 논을 두세 번 번경反耕88)하고
거름을 준 뒤에 옮겨 심는다. 동부 지방의 산간 지대에서는 거름이 없으면 풀을 베어 논에
펴고 모내기하며, 뿌리가 내린 뒤에 서너 차례 김을 맨다. 따라서 토질이 비옥해질 뿐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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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소민小民: 민은 국의 입장에서는 대민과 소민으로 구성되며, 대민은 양반을, 소민은 상민을 각각 가리킨다.
87) 호미씻이: 음력 7월경에 농가農家에서 날을 잡아 하루를 즐기며 노는 일. 이때쯤에는 밭매기와 논매기가 거의 끝나, 호미가 필
요 없게 되어 씻어 둔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다.
88) 번경反耕: 논이나 밭을 여러 차례 갈아 뒤집거나, 논이나 밭을 번갈아 바꾸어 경작하는 것을 말한다. 가뭄이 심할 경우 논의 물
이 부족하면, 논을 번경하여 밭작물을 경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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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라 사람들이 근면한 결과, 수확량이 경기도의2 배나 된다.
충청도 동부 지방에서는 관개하는 수가 많고, 서부 지방은 물이 풍부해서 도랑을 열어 물
을 끄는 것이 풍속이 되었다. 낭떠러지와 절벽에도 올라 흙을 밀어내고 물을 끌어댔다. 밭
에는 보리·콩·팥·기장·조·사탕수수·귀리·율무를 심는다. 서부 지방의 평야 지
대에 있는 고을들에서는 보리·콩·팥만을 심고, 동부 지방에서는 목면과 참깨를 심는
경우도 많다. 밭은 두 번 갈고2 ~3차례 김매기하며, 목화밭은 5~6차례 김매기한다.
땅이 협소하고 사람이 많으므로 농사는 광작이 없고, 농사에 힘쓰는 일에 전념하여 지력
을 얻는다. 논에서 종자 1말로 수확하는 양이 2~3섬에 이른다. 수확하는 양이 비록 많지
만 토지세가 자못 무거워, 역에 응하기 어렵다. 산골짜기 지대의 고을만이 부賦가 가벼운
데, 땅이 비옥하지 않아서 화전도 많다. 산간 지대에서는 밭에 겨릿소를 써서 경작하였고,
평야 지대의 고을에서는 밭과 논에 겨릿소나 호릿소를 쓴다.
충청도 바닷가의 여러 고을들에서는 고기잡이와 소금구이에 종사하여 이익을 낸다. 내포
內浦 지방의 각 고을에서는 모시풀을 많이 심는데, 그 중에서 임천林泉과 한산韓山이 제
일이다. 동부 지방의 각 고을에서는 삼을 심고 양잠이 많다. 청산靑山·보은報恩 등의 읍
은 대추만을 업으로 삼았다. 서부 지방에는 홍시가 많고 또 올감[조홍早紅]도 있다. 그 밖
에 호도胡桃·배·밤 등 각종 과일이 도내에 섞여 있고, 담배·닥·옻은 토질이 마땅한
곳에서 재배한다. 산간 지대에는 양봉·산용·목피가 많아서 모두 살림살이에 도움이 된
다. 또 소를 키우는 일이 많으며, 살진 소는 내포內浦에서 나온 것이 많다. 땅이 경기와 호
남 사이에 있어서 수로와 육로의 요충지다. 의식衣食이 풍요롭고 온갖 물산이 모두 모여
있으며, 팔도의 상인들과 판매하는 물건들이 폭주하여 사족이 거주할 만한 곳으로 국내
에서 가장 유명하다.
충청도의 산천은 비록 산간이긴 하지만 깊고 가파른 산이 없고, 평야이긴 해도 광막한 평
야가 없다. 샘이 깊고 흙이 비옥하며 수재와 한재를 입는 일이 적어 인민이 많다. 또 경기
도와 경계를 접하고 있어 수로와 육로가 모두 편리하므로, 서울에서 대대로 이어오는 큰
집안들이 이곳에 향장鄕庄과 분산墳山을 두고 차지하고 있으니, 시골의 가난하고 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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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사람들은 그 사이에서 버틸 수가 없다. 간악한 백성들과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세
력 있는 사람들에 투탁하여 군보軍保89)를 면할 것을 도모하므로, 군정들은 극히 힘들어도
하소연할 곳이 없고, 궁한 사람들은 서너 가지 역을 겸하였다.
세족世族과 마을 사람들은 태반이 놀고먹는 사람들이었고, 수령이 일단 폐단을 바로잡고
자 한다면 쌓인 폐단이 사방에서 일어나서 끝내 낭패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옛날 그대로
고수하는 일이 많아 폐단을 고칠 날이 없었다. 환곡還穀과 전부田賦는 사족들 때문에 폐
단이 생겼다. 팔도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이지만, 고을의 갖가지 폐단도 팔도에서 가장 심
하다. 고을의 수령은 마땅히 겸손과 공평함으로 자기를 규율하고, 정직함과 공적인 것을
우선시하여 뇌물도 통하지 않게 하고 간활함도 부리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런 뒤라야 호
족들을 누르고 정교를 제대로 베풀 수 있을 것이다.
충청도의 관액과 형세를 논한다면 죽령竹嶺·조령鳥嶺·화녕化寧·추풍秋風이 산의 등
과 배를 이루며 경상도와 경계를 이룬다. 옛날부터 방어하는 정책은 오히려 지리의 요점
을 다하지 않음이 있다.
충주忠州는 조령과 죽령 두 큰 고개의 사이에 있다. 인물이 도내에서 제일이다. 설치한 진
영은 비록 미리 대비하고자 하는 뜻에서 나왔으나, 내 의견을 말하자면 길을 가로막는 것
은 하나의 진영으로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본 고을에 방어영을 설치하여 영장營將
의 일을 겸행하게 하고, 절제사를 두어 전담하게 해야 사변이 일어났을 때 그곳을 신뢰할
수 있게 된다. 화녕化寧은 병영과 서로 거리가 멀지 않으니 상주와 표리를 이루어 응접하
고, 추풍령은 병영과 약간 멀다.
병영 밖에서 변란이 있으면 병영兵營은 힘을 분산시키기 때문에 저 황간黃磵을 지켜야
한다. 이렇게 해야 잔약한 고을이 병영 아래에 끼어들 수 있기 때문이다. 급한 일을 당하
고서 그때가서 제도를 바꾸려 하면 이미 때는 늦은 것이다. 만일 황간黃磵·영동永同을
합하여 하나의 현縣을 만든 뒤에 겸진兼鎭으로 두어 절제사節制使90)의 권한을 부여한다
면, 위급한 때를 대비할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홍주洪州는 호우湖右의 큰 읍으로, 요
충지이기도 하니 마땅히 방영을 설치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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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군보軍保: 조선조 때 정병正兵을 돕기 위하여 둔 조정助丁. 원래는 병역兵役을 면제받는 대신에 현역병의 농작農作에 노동력
을 제공하도록 하였으나, 후에 군대의 비용으로 쓰기 위하여 역役을 면해주고 그 대가로 삼베나 무명 따위를 받아들였다.
90) 절제사節制使: 조선 시대에, 절도사가 관할하던 거진巨鎭에 둔 정삼품 벼슬. 정식 이름은 병마절제사 또는 수군절제사로, 부윤
府尹이 겸하였다.
우하영의 천일록 --도읍의 건립 建都 중에서....
첫댓글 천일록 도읍의 건립. 네번째자료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