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비달마장현종론 제26권
6. 변수면품②
6.3. 수면의 계박(繫縛)관계와 생기[1]
수면의 불선과 무기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1) 3세에 걸친 수면의 계박관계
여기서 마땅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니,
어떠한 수면이 어떤 사(事)를 계박(繫縛)하는 것인가?
무엇을 일컬어 ‘사’라고 한 것인가?
‘사’는 비록 한 가지가 아니지만, 여기서는 [‘계박되는 것’이라는 의미의] 소계사(所繫事)에 대해 분별한다.23)
여기에는 다시 두 가지가 있으니, 이를테면 의연(依緣, 즉 소의ㆍ소연)과 부류(部類)에 근거하여 분별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의연에 근거한 것’이라고 함은,
이를테면 안식(眼識)과 함께 존재하는 수면은 오로지 색처(色處)에 대해서는 소연계(所緣繫)가 되고,
자신과 상응하는 온갖 심ㆍ심소인 의처(意處)와 법처(法處)에 대해서는 상응계(相應繫)가 되며,
나아가 신식(身識)과 함께 존재하는 수면은 오로지 촉처에 대해서는 소연계가 되고,
자신과 상응하는 온갖 심ㆍ심소인 의처와 법처에 대해서는 상응계가 된다.
그러나 만약 의식(意識)과 함께 존재하는 수면이라면, 12처에 대해 소연계가 되고,
자신과 상응하는 온갖 심ㆍ심소인 의처와 법처에 대해서는 상응계가 된다.
그리고 ‘부류에 근거한 것’이라고 함은,
이를테면 견고소단의 변행수면은 5부의 법에 대해 소연계가 되고,
자신과 상응하는 온갖 심ㆍ심소에 대해서는 상응계가 되며,
견고소단의 비변행수면은 오로지 자부(自部)의 법에 대해서만 소연계가 되고,
자신과 상응하는 온갖 심ㆍ심소에 대해서는 상응계가 되는데,
이와 같이 일체의 법에 대해 상응하는 바에 따라 마땅히 설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먼저] 3세에 걸친 [수면의 계박관계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니,
어떠한 유정의 어떠한 수면이 어떠한 사(事)를 능히 계박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만약 이러한 [소계]사(事) 중에 존재하는
아직 끊어지지 않은 탐ㆍ진ㆍ만으로서
과거ㆍ현재에 이미 일어난 것은 [과거ㆍ미래를 계박하고]
미래의 의식상응의 그것은 [3세에] 변행(遍行)하지만
5식상응으로서 생겨날 수 있는 것은 미래[自世]를 계박하며
생겨나지 않는 것은 역시 [3세에] 변행한다.
그 밖의 수면(見ㆍ疑ㆍ무명)으로서 과거ㆍ미래의 그것은 변행하며
현재의 그것은 지금의 경계대상을 반연할 때 능히 이를 계박한다.24)
논하여 말하겠다.
만약 유정류가 이러한 [소계]사(事) 중에서 수면을 수증하는 경우, 이를 일컬어 ‘이러한 사를 계박[繫]한다’고 하는데, 그럴 때 [수면이 이러한 ‘사’를] 능히 계박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아직 끊어지지 않은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앞의 [본송(제2구)에서] ‘아직 끊어지지 않은[未斷]’이라고 하는 말은 상응하는 바대로 이후에도 두루 적용되어야 한다.
바야흐로 온갖 수면에는 모두 두 종류가 있는데,
첫째는 자상혹(自相惑)으로 탐(貪)ㆍ진(瞋)ㆍ만(慢)이 바로 그것이며,
둘째는 공상혹(共相惑)으로 견(見)ㆍ의(疑)ㆍ치(癡)가 바로 그것이다.25)
탐ㆍ진ㆍ만의 세 가지가 바로 자상혹이라고 하는 것은 여러 성교(聖敎) 중의 곳곳에서 분명한 문구로써 증명하고 있으니,
바야흐로 경에서
“[부처님께서] 의대모(衣袋母)에게 고하기를,
그대의 눈이 색을 보지 않을 때, 그 같은 색을 반연하여 욕탐을 일으키는가, 일으키지 않는가?
일으키지 않습니다, 대덕이시여,……(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설한 바와 같다.
또한 계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였다.
“부처님께서 대모(大母)에게 말하였다.
그대의 생각은 어떠한가?
존재하는 모든 색으로서 그대가 지금 눈으로써 보는 것도 아니며, 그대가 일찍이 본 것도 아니며, 그대가 앞으로 볼 것도 아니며, 보려고 희구한 것도 아니라면,
그대는 이것으로 말미암아 욕(欲)을 일으키고, 탐(貪)을 일으키고, 친(親)를 일으키고, 애(愛)를 일으키고, 아뢰야(阿賴耶)를 일으키고, 니연저(尼延底)를 일으키고, 탐착(耽著)을 일으킨다고 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고 할 것인가?26)
그렇지 않습니다, 대덕이시여,……(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27)
따라서 이러한 [소계]사 중에 존재하는 탐ㆍ진ㆍ만으로서, 과거세에 이미 생겨나 아직 끊어지지 않은 것과, 현재 이미 생겨난 것은 능히 이러한 ‘사’(과거ㆍ미래의 소계사)를 계박하니(제1~제3구), 탐ㆍ진ㆍ만은 바로 자상혹이기에 [3세의] 모든 유정이 결정코 두루 일으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28)
어찌 이미 끊어진 것에는 계박의 뜻이 없다고 하지 않겠는가?
[앞에서] ‘계박[繫]한다’는 말을 설명하면서 [능히 계박하기 위해서는] ‘아직 끊어지지 않은 것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이미 나타내었다.
어떠한 이유에서, 이러한 ‘사’는 아직 끊어지지 않은 수면에 의해 계박되는 것이라고 설하였으면서, 다시
“과거에 이미 생겨나 아직 끊어지지 않은 것에 의해 [계박된다”고] 설하는 것인가?
[그럴 경우] ‘아직 끊어지지 않은 것’이라고 하는 이 같은 말은 마땅히 쓸모없게 될 것이다.29)
쓸모없게 되는 과실은 없으니,
‘아직 끊어지지 않은 것’이라고 하는 이 같은 말은, [번뇌에는] 품류에 차별이 있으며, 점차적으로 끊어진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 같은 논의 바로 다음의 글에서도 역시
“미래의 의식[상응으로서 아직 끊어지지 않은 것이라면] 변행한다(다시 말해 3세의 ‘사’를 능히 계박한다)”는 등으로 설할 것인데,30)
말하자면 그러한 탐 등은 9품(品)으로 동일하지 않기에 수도(修道)에 의해 끊어질 때에도 9품이 별도로 끊어질 뿐더러 이러한 ‘사(事)’를 [각기 별도로] 반연하는 것이다.
즉 상품의 수면이 이미 일어났고 이미 소멸하였고 이미 그것의 영단(永斷)을 획득하였더라도, 아직 일어나지 않았고 아직 소멸하지 않았고 아직 그것의 영단을 획득하지 못한 미래의 그 밖의 다른 품류의 수면은 여전히 남아있어 그것이 이러한 ‘사’를 능히 계박하는 것이다.31)
그렇기 때문에 본론(本論)에서도 이 같은 뜻에서, 비록 미래의 애(愛) 등에 의해 계박된다고 설하였을지라도 과거의 그것에 대해서는 ‘아직 끊어지지 않은’이라는 말을 설하였던 것이다.32)
따라서 ‘아직 끊어지지 않았다’는 말은 매우 유용한 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과거세의 이러한 품류의 수면이 영원히 끊어질 때, 미래의 그것도 역시 끊어지지만, 그 밖의 다른 품류의 미래수면은 능히 이러한 ‘사’를 계박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기에 [그 밖의 다른 품류의 과거수면도] 아직 영원히 끊지 못한 것이다.
미래세의 의식상응의 탐ㆍ진ㆍ만 세 가지는 3세를 두루 반연하기 때문에, 비록 이러한 ‘사’에 생겨나거나 혹은 생겨나지 않을지라도, 다만 그것이 아직 끊어지지 않은 때라면, 그것들은 모두 [3세의 ‘사’를] 능히 계박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33)(제4구)
그러나 미래세의 5식 상응의 탐ㆍ진으로서, 만약 아직 끊어지지 않은 것이면서 생겨날 수 있는 것이라면 오로지 미래세의 ‘사’만을 계박한다.(제5구)
이 같은 사실에 따라 5식과 상응하여 생겨날 수 있는 수면으로서, 만약 과거에 이른 것이라면 오로지 과거의 ‘사’만을 계박하고, 현재에 이른 것도 역시 그러하다는 사실을 이미 나타낸 셈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치에 준하여 볼 때,
만약 의식과 상응하여 생겨날 수 있는 수면의 경우도 그것이 과거와 현재에 이를지라도 아직 끊어지지 않은 것이라면, 자신과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법[非自世法]이라도 계박할 수 있으니, 오로지 의식 상응의 수면으로서 미래세에 존재하는 수면만이 능히 3세의 ‘사’를 계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미래세의] 5식과 상응하는 온갖 수면(탐ㆍ진)으로서, 만약 [끊어지지 않은 것이면서] 결정코 생겨나지 않을 것이라면, 역시 3세의 ‘사’를 계박한다.(제6구)
즉 그것의 경계대상이 미래에 존재하는 것이든, 혹은 현재에 존재하는 것이든, 혹은 과거에 존재하는 것이든, 그것이 비록 필경(畢竟)의 불생(不生)을 획득하였을지라도 아직 끊어지지 않았을 때라면 그 성질상 능히 [그러한 3세의 ‘사’를] 계박할 수 있는 것이다.34)
그 밖의 일체의 견(見)ㆍ의(疑)ㆍ무명의 경우, 과거ㆍ미래의 그것이면서 아직 끊어지지 않은 것은 두루 3세의 ‘사’를 계박한다.(제7구)
즉 이러한 세 종류의 수면은 바로 공상혹이어서 일체의 유정을 다 같이 두루 계박하기 때문이다.35)
그러나 만약 현재세의 그러한 수면이라면, 바로 지금[正]의 경계대상을 반연할 때만 상응하는 바대로 능히 이러한 ‘사’를 계박한다.(제8구)
탐(貪) 등의 번뇌가 과거 등 3세의 경계대상을 반연하여 생겨나며, 능히 그것을 계박한다는 사실은 무엇을 증인(證因)으로 삼아 알게 된 것 것인가?
성교(聖敎)의 증인(즉 經證)에 의해 알게 되었으니,
계경에서는 [이같이] 말하고 있다.
“욕탐처(欲貪處)의 법에는 모두 세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과거의 욕탐처의 법이며,
둘째는 미래의 욕탐처의 법이며,
셋째는 현재의 욕탐처의 법이다.
만약 과거의 욕탐처의 법을 반연하여 욕탐이 생겨났다면, 이러한 욕탐은 그러한 과거 제법에 계속(繫屬)되어 생겨난 것으로, 계박을 떠난 것이 아니라고 마땅히 말해야 한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또한 계경에서 말하기를,
“만약 과거ㆍ미래ㆍ현재에 관찰된 색에 대해 애탐를 일으키고 진에를 일으키면, 여기서는 색이 안근을 계박하는 것도 아니고, 안근이 색을 계박하는 것도 아니다.
여기서는 욕탐이 바로 진실로 능히 계박하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고 하였으니,
이와 같은 등의 내용을 전하고 있는 성교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2) 삼세실유론
① 삼세실유의 이론적 근거
[그렇다면] 과거와 미래[의 ‘사(事)’]가 존재한다고 하여야 그것들에 대한 계박을 설할 수 있을 것이다.36)
마땅히 말해야 할 것이니, 그것들은 존재한다.
그렇다면 존재의 특성[有相]은 어떠한가?
[그것들은] 절대적 비존재[畢竟無]나 현재의 존재[現在有]와는 다른 것으로, 실유(實有)라고 해야 할 것인가, 가유(假有)라고 해야 할 것인가?
마땅히 말해야 할 것이니, 그것들은 바로 실유이다.
실유와 가유의 특성[相]은 어떠한 것이라고 마땅히 알아야 하는가?
경계대상이 되어 앎[覺]을 낳는 것, 이것이 바로 모든 존재(즉 실유와 가유)의 특성이다.37) 즉 만약 더 이상 근거하는 바[所待]를 갖지 않는 것에 대해 앎을 낳았다면, 이는 바로 실유의 특성이니, 이를테면 수(受)ㆍ상(想)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만약 근거하는 바를 갖는 것에 대해 앎을 낳았다면, 이는 바로 가유의 특성이니, 이를테면 항아리나 군대 등이 바로 그것이다.38)
[이 같은 점에서] 결정코
“과거와 미래는 오직 가유일 뿐이다”라고는 주장할 수 없으니, 가유의 소의[假依]가 [과거와 미래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며,39) 또한 더 이상 근거하는 바[所待]를 갖지 않고서 능히 앎을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과거ㆍ미래ㆍ현재세의 세 가지 경계대상을 반연하여 다른 어떠한 것에도 근거하지 않고서 순서대로 숙주념(宿住念)과 미래를 희구하는 원(願)과 타인의 마음을 요별하는 앎[了他心智]을 낳으니, 과거ㆍ미래는 이미 설한 바대로 실유이다. 즉 그것은 실유의 특성[相]이기 때문에 결정코 실유인 것이다.
그렇지만 실유의 법에는 다시 두 가지가 있으니,
첫 번째는 작용을 갖는 것[有作用]이며,
두 번째는 오로지 [법]자체로서 존재하는 것[有體]이다.40)
작용을 갖는 [실유의 법]에도 다시 두 가지 종류가 있으니,
첫 번째는 공능(功能)을 갖는 것[有功能]이며,
두 번째는 공능을 결여한 것[功能闕]이다.41)
그리고 이에 따라 오로지 [법]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도 이미 해석한 셈이다.
모든 가유의 법에도 역시 두 가지가 있으니,
첫 번째는 실유에 근거하는 것이며,
두 번째는 가유에 근거하는 것으로,
이 두 가지는 순서대로 항아리와 같고 군대와 같다.42)
그런데 ‘공능을 갖는 것’에 대해서는 ‘작용을 갖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지만, ‘작용을 갖는 것’은 역시 또한 ‘공능을 갖는 것’이라고도 이름하기에 앞에서 [작용을 갖는 실유의 법에는] 별도의 공능에 근거하여 그것을 갖는 것과 결여한 것이 있다고 설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이치(즉 ‘유’의 특성)를 마음에 새겨 마땅히 ‘과거ㆍ미래는 결정코 존재한다’는 종의를 확고하게 세워야 한다.
즉 [과거ㆍ미래의 제법도] 원인과 결과, 염오와 염오에서 떠난 것[染離]으로 존재하며, 자성이 허망하지 않기 때문에 ‘실유’라고 설하였지만, 현재와 같은 [의미의] 실유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43)
지금 바로 세간을 관찰하건대, 체상(體相)은 비록 동일할지라도 동시에 성[류](性類)가 다른 법이 존재하니,44)
예컨대 지계(地界) 등은 내외의 성[류]가 다르고, 수(受) 등은 자신이나 다른 이의 낙(樂) 등의 성[류]로 차별되는 것이다.45)
그리고 이러한 성[류]와 ‘존재하는 것[有, 즉 법체]’는 이치상 결정코 어떠한 차이도 없는 것으로, 성[류]가 이미 다르다고 하였으므로 존재하는 것에도 필시 [현실상의] 차별이 있다고 해야 한다.
이에 따라 지계 등의 경우, 체상은 비록 동일하다고 할지라도 내외의 성[류]가 차별된다고 말할 수 있으며, ‘수’ 등의 경우, 영납 등의 체상은 비록 동일할지라도 낙 등의 성류로 차별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안근 등이 동일한 상속에 존재할 경우, 청정한 소조색(즉 淨色)이라는 체상은 동일할지라도 거기에 성류(性類)의 차별이 존재하는 것과 같으니, 보고 듣는 등의 공능(功能)이 다르기 때문으로,46) [이는] 이러한 [체상] 중에 존재하는 공능의 차이가 아니라 성[류] 등에 존재하는 공능의 차별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견(見) 등의 공능은 바로 안근 등에 존재하는 것으로, 공능이 다르기 때문에 성류에도 결정코 차별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동일한 시간에 존재하는 제법에도 체상(體相)의 차별은 없을지라도 성류(性類, 존재양태)의 차별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이미 체상에는 어떠한 차별도 없으면서 동시에 성[류]의 차별을 갖는 법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지금 바로 관찰하였기 때문에, 제법의 경우도 3세의 시간을 거치면서 체상에는 어떠한 차별도 없지만 성류에는 차별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ㆍ미래의 ‘유’와 현재의 ‘유’는 다른 것이다.47)
② 삼세실유의 논증
3세[법]이 모두 실유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3세의 실유는 교설과 두 가지와,
경계대상과 과보가 존재하기 때문으로
3세의 실유를 설하였기 때문에
설일체유부로 인정되는 것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과거ㆍ미래ㆍ현재는 실유이니, 요의(了義)의 성교와 정리(正理)상으로 다 같이 지극히 잘 이루어지기 때문이다.48)
현재가 실유라고 하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사실이지만, 어떠한 성교와 정리로써 과거ㆍ미래의 실유를 논증하는 것인가?
바야흐로 계경 중에서 세존께서 설하였기 때문이다.
즉 세존께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ㆍ미래의 색도 무상한 것인데 하물며 현재의 색을 말해 무엇 할 것인가?
만약 능히 이와 같이 색이 무상한 것임을 관찰한다면, 모든 다문(多聞)의 성(聖) 제자들은
과거의 색에 대해 부지런히 그것의 염사(厭捨)를 닦을 것이며,
미래의 색에 대해 부지런히 그것의 흔구(欣求)를 끊을 것이며,
현재의 색에 대해서는 부지런히 염리(厭離)하여 멸하고자 할 것이다.
만약 과거의 색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면, 다문(多聞)의 성 제자들은 마땅히 과거의 색에 대해 부지런히 그것의 염사를 닦지 않을 것이지만,
과거의 색이 존재하기 때문에 다문의 성 제자들은 마땅히 과거의 색에 대해 부지런히 그것의 염사를 닦는 것이다.
만약 미래의 색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면, 다문의 성 제자들은 마땅히 미래의 색에 대해 부지런히 그것의 흔구를 끊지 않을 것이지만,
미래의 색이 존재하기 때문에 다문의 성 제자들은 마땅히 미래의 색에 대해 부지런히 그것의 흔구를 끊는 것이다.”49)
또한 계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업이 비록 과거로 [낙사(落謝)하여] 멸진(滅盡) 변괴(變壞)하였을지라도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라면, 어떠한 인연으로 이를 알 수 있을 것인가?”
즉 여기서 인용된 계경은 과거ㆍ미래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설한 것으로, 이는 결정코 요의경(了義經)이니, 일찍이 다른 곳에서 이 같은 사실을 결정적으로 부정[遮止]한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예컨대 보특가라 등과 같은 경우이기 때문에 [요의경이 아니다]. 이를테면 비록 곳곳에서 ‘보특가라가 존재한다’고 설하였을지라도, 실로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계경 등에서 [보특가라를] 분명하게 부정하고 있기 때문에, 이에 따라 ‘보특가라가 존재한다’고 설한 계경은 모두 요의가 아닌 것이다.
또한 예컨대 경에서 ‘마땅히 부모를 해쳐야 한다’고 설하였다면,
이치상 역시 마땅히 불요의경이라고 해야 할 것이니,
그 밖의 다른 경에서
‘이는 바로 무간업으로, 반드시 무간에 나락가(捺落迦, 지옥)에 떨어진다’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예컨대 경에서
‘욕탐을 익힌 모든 이[習欲者]는 어떠한 경우에도 악업을 갖지 않을 뿐더러 능히 짓지도 않는다’고 설하였다면,
이 역시 마땅히 불요의경이라고 해야 할 것이니,
그 밖의 다른 경 중에서
‘모든 성자는 고의적인 의사[故思]에 의해 온갖 악업을 짓는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50)
이와 같은 등의 유형에 따라 이
것(앞서 인용한 계경)도 ‘과거ㆍ미래세가 존재한다’고 분명하고도 결정적으로 설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즉 이미 다른 곳에서 다시 ‘과거ㆍ미래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고도 결정적으로 부정하고 있으니, 이에 준하여 [인용한] 이 같은 경도 요의경이 아님을 알 수 있는 것이다.”51)
그렇지만 이는 결정코 바로 요의설이니, 그 밖의 다른 경이 갖는 불요의의 특성[相]을 벗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어찌 과거ㆍ미래를 부정하는 경도 역시 존재한다고 하지 않겠는가?
예컨대 『승의공계경(勝義空契經)』 중에서 ‘안근이 생겨날 때 온 곳이 없으며, 안근이 멸할 때 조작 집기된 곳[所造集](다시 말해 그것이 생겨나게 된 곳)으로 [가는] 일도 없다. 그것은 본래 존재하지 않다가 지금 존재하며, 존재하다가는 다시 사라진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52)
그러나 만약 미래세에 일찍이 안근이 존재하였다면 [경에서] 마땅히 ‘본래 존재하지 않다가 지금 존재한다[本無今有]’는 등의 말을 설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53)
이러한 경설의 뜻은,
“안근이 [생겨날 때] 화륜(火輪)으로부터, 혹은 자성(自性)으로부터, 혹은 자재천(自在天)으로부터 오며, 안근이 멸할 때에는 다시 집기 조작된 그곳으로 돌아간다”는 [주장을] 부정하려는 것이다.54)
그리고 정의(正義)를 나타내기 위해 다시
“그것은 본래 존재하지 않다가 지금 존재하며, 존재하다가는 다시 사라진다”고 말한 것으로,
원인 중에 결과가 존재하지 않기[因中無果] 때문에 ‘본래 존재하지 않는다’고 설한 것이며,
혹은 작용에 근거하였기 때문에 ‘지금 존재한다’고 설한 것이다.55)(이상 삼세실유의 첫 번째 經證)
또한 식(識)은 두 가지 연(緣)을 갖추어야 비로소 생겨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계경에서는
“식은 두 가지 연에서 생겨난다”고 설하였기 [때문으로],
예컨대 계경에서는
“안(眼)과 색(色)이 연이 되어 안식(眼識)을 낳으며,
……(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의(意)와 법(法)이 연이 되어 의식(意識)을 낳는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56)
그런데 만약 과거ㆍ미래세가 실유가 아니라고 한다면, 능히 그것을 반연하는 식은 마땅히 두 가지 연 [중의 하나]를 결여한 것이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미 [계경에서] ‘두 가지 연(緣)이 능히 식(識)을 낳는다’고 설하였으니, 이는 바로 오로지 ‘실유와 가유의 근거[依]를 근(根)으로 삼고 경계대상으로 삼아야 비로소 능히 식을 낳을 수 있다’는 사실을 설한 것이다.57)
[이렇듯] 두 가지 연은 오로지 그것(실유와 가유)을 자성으로 삼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 것[無]’은 두 가지 연에 포섭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이에 따라 부처님께서는 이미 방편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을 소연으로 하는 식도 역시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였음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이미 과거ㆍ미래를 반연하는 식 역시 생겨날 수 있기 때문에, 과거ㆍ미래는 그 자체 실유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이상 삼세실유의 두 번째 經證)
일체의 식(識)에는 반드시 경계대상이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존재하는 경계대상[有境]을 관찰할 때 비로소 식은 일어날 수 있는 것으로,
세존께서
“이러저러한 경계대상의 상(相)을 각기 요별하는 것을 식취온(識取蘊)이라 한다.”고 설한 바와 같다.
[그렇다면] 요별되는 것은 무엇인가?
이를테면 색[경] 내지 법[경]이 바로 그것으로,
그 경에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경계대상을 갖지 않은 식도 존재한다[有識無境]’는 사실을 설한 것이 아니다.
이에 따라 과거ㆍ미래를 반연하는 식에는 결정코 경계대상이 존재하기 때문에, 과거ㆍ미래가 실유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58)(이상 삼세실유의 첫 번째 理證)
또한 이미 [과거로] 낙사(落謝)한 업에는 당래의 과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즉 이전에 조작된 선ㆍ불선의 업은 연(緣)에 근거하여 당래 좋거나 좋지 못한 결과를 초래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업을 사택(思擇)하는 곳에서 이미 널리 성립시켰다.59)
그런데 이숙과는 업과 무간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당래 결과가 생겨날 때, 이숙인이라는 현재 혹은 과거법 자체가 이미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마땅히 원인 없이 결과가 생겨난다고 하든지, 혹은 마땅히 그 결과는 필경 생겨나지 않는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이 같은 사실에 따라 실로 과거ㆍ미래는 존재하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60)(이상 삼세실유의 두 번째 理證)
온갖 유정으로서 세속에 처한 이든 출가인이든 앞에서 분별한 바대로 3세[법]이 존재하며, 아울러 진실(眞實)인 세 종류의 무위가 존재한다고 믿어야 비로소 스스로를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라고 칭할 수 있으니, 오로지 이와 같은 [일체의] 법(즉 3세의 유위법과 세 종류의 무위법)이 존재한다고 설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바로 설일체유종(說一切有宗)으로 인정되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그렇지 않으니(다시 말해 ‘설일체유종’으로 인정할 수 없으니), [실유의 법을] 더 많이 주장[增益]하거나 더 적게 주장[減損]하기 때문이다.
즉 더 많이 주장하는 증익론자(增益論者)들은 진실(眞實)인 보특가라(補特伽羅)와 아울러 앞서 언급한 제법이 존재한다고 설하고 있으며,61)
분별론자(分別論者)들은 오로지 현재법과 아울러 과거세의 법 중에서 아직 결과를 낳지 않은 업만이 존재한다고 설하고 있다.62)
또한 찰나론자(刹那論者)들은 오로지 현재 1찰나 중의 12처의 법체만이 존재한다고 설하고 있으며,63)
가유론자(假有論者)들은 현재세에 존재하는 제법도 역시 다만 가유일 뿐이라고 설하고 있다.64)
그리고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도무론자(都無論者)들은,
“일체법은 모두 무자성(無自性)으로 공화(空花)와 같다”고 설하고 있으니,65)
이들은 모두 ‘설일체유종’이 아닌 것이다.
경에서는 오로지 대체적으로
“일체의 존재[一切有]란 말하자면 12처(處)이다”라고 설하였을 뿐, 일찍이
“오로지 현재[의 12처]만이 존재하고, 어떠한 경우에도 과거와 미래의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별도로 설한 일이 없다.66)
나아가 곳곳의 여러 경에서
“과거ㆍ미래도 존재한다”고 설하고 있다.
따라서 일체의 존재를 설한 경우, 3세[법]과 무위법 모두에 통하는 것으로, 오로지 현재[의 12처] 일부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면서 스스로를 설일체유종이라고 일컬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67)
예컨대 현재[법]도 오로지 가유라고 주장하는 논자나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도무론자들이 스스로를 설일체유종이라고 일컬을 수 없듯이,
그들(경부) 역시 마땅히 그러하다고 해야 할 것이니, 그들이 말한 바는 성교와 정리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범지(梵志)를 위해 이와 같이
“일체의 존재[一切有]란 오로지 12처이다.”라고 설하였던 것은
실유의 보특가라를 부정하기 위해서였으며, 아울러
“알려진 법[所知法]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전체적으로 드러내기 위해서였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ㆍ미래는 결정코 실유인 것이다.
③ 삼세차별에 관한 4대 논사의 학설
이와 같이 인정된 ‘일체[법]이 존재한다’는 종의[一切有宗]에는 옛 논사[古師]로부터 계승되어 온 [3세의] 차별에 몇 가지가 있으며, 누구의 주장이 3세의 [차별에] 관한 가장 뛰어난 것으로 의지할 만한 것인가?68)
게송으로 말하겠다.
이 부파 중에는 네 종류의 학설이 있어
존재[類]ㆍ양상[相]ㆍ상태[位]ㆍ관계[待]가 다르지만
세 번째 작용[하는 상태]에 근거하여 말한 것이
3세에 관해 가장 잘 정립된 것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존자 법구(法救)는 다음과 같이 설하였다.
“현상적 존재[類, bhāva]가 동일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3세에 차이가 있다.”
즉 그는 말하기를,
“제법이 세간[世,즉 3세]에 현행할 때, 현상적 존재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3세라는 시간적 차별이 있는 것으로,] 본질 자체에는 어떠한 차이도 없다.
마치 금으로 만들어진 그릇이 깨어져 다른 물건이 될 때, 비록 형태상의 변화는 있을지라도 [금] 자체에는 어떠한 차이도 없듯이,
또한 우유가 변하여 낙(酪)이 될 때, 맛 등은 버리더라도 현색(顯色)은 버리지 않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제법이 세간에 현행할 때, 미래로부터 현재에 이르고, 현재로부터 과거로 들어가는 동안 비록 현상적 존재[類]를 버리고 획득할지라도 본질 자체[體]를 버리고 획득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존자 묘음(妙音)은 다음과 같이 설하였다.
“양상[相, lakṣaṇa]이 동일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3세에 차이가 있다.”
즉 그는 말하기를,
“제법이 세간에 현행할 때, 과거법은 바로 과거의 양상과 화합한 것으로, 그렇더라도 현재ㆍ미래의 양상을 여의었다고는 말하지 않으며,
미래법은 바로 미래의 양상과 화합한 것으로, 그렇더라도 과거ㆍ현재의 양상을 여의었다고는 말하지 않으며,
현재법은 바로 현재의 양상과 화합한 것으로, 그렇더라도 과거ㆍ미래의 양상을 여의었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이는 마치 어떤 사람이 한 명의 부인[妻室]을 더럽힐 때에도 그 밖의 다른 무희나 계집종 등의 여인에 대해 염오함을 떠났다고는 말하지 않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69)
존자 세우(世友)는 다음과 같이 설하였다.
“[작용하는] 상태[位, avasthā]가 동일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3세에 차이가 있다.”
즉 그는 말하기를,
“제법이 세간에 현행할 때, 어떤 상태로부터 어떤 상태 중에 이르면서 [3세상의] 차이가 있다고 설한다.70)
즉 [작용하는] 상태에 차별이 있기 때문에 [3세라는 시간적 차별이 있는 것으로,] 본질 자체에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니,
마치 수를 헤아리는 산가지[籌]가 일의 위치에 놓이게 되면 일로 불리고,
백의 위치에 놓이게 되면 백으로 불리며,
천의 위치에 놓이게 되면 천으로 불리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존자 각천(覺天)은 다음과 같이 설하였다.
“관계[待, apekṣā]가 다르기 때문에 3세에 차이가 있다.”
즉 그는 말하기를,
“제법이 세간에 현행할 때, 전후의 상호관계[相待]에 따라 [3세라는] 명칭에 차이가 있는 것으로,
마치 어떤 한 여인이 자신의 앞의 사람(즉 어머니)과의 관계에서는 딸로 불리고,
자신의 뒤의 사람(즉 딸)과의 관계에서는 어머니로 불리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제법이 세간에 현행할 때,
현재ㆍ미래와의 관계에서는 과거라고 불리고,
과거ㆍ현재와의 관계에서는 미래라고 불리며,
과거ㆍ미래와의 관계에서는 현재라고 불리지만,
[제법 자체는 어떠한 차별도 없다]”라고 하였다.
[경주(經主)는]
“설일체유종에서 전(傳)하여 설(說)하는 이러한 네 종류의 학설 중 첫 번째(법구의 설)는 법의 전변(轉變)을 주장하는 것이기 때문에 마땅히 수론(數論)의 무리 중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하였지만,71) 그렇지가 않다.
그 존자는
“유위법은 그 자체 상주하는 것으로, 3세라는 시간을 거치면서 법이 숨기도 하고 법이 나타나기도 한다”는 사실을 설한 것이 아니다.
그는 다만
“제법이 세간에 현행할 때 법체의 상[體相]은 비록 동일할지라도 그것의 현상적인 존재유형[性類]이 다르다”고 설하였을 뿐으로,
이는 [세 번째인] 존자 세우의 설과 부분적으로 동일한데, 어찌 수론외도와 동일한 것이라고 판석(判釋)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두 번째 [존자 묘음의] 설과 네 번째 [존자 각천의] 설은 [3]세를 서로 뒤섞어 설정한 것이기 때문에,72) 이 네 가지 설 중에 세 번째의 설이 가장 뛰어나다.
즉 작용에 근거함에 따라 상태에 차별이 있는 것으로, 작용하는 상태[位]가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3]세에 차이가 있는 것이다.
내가 [이미] 분별한 바와 같이 과거ㆍ미래가 실유라는 사실은 법성(法性) 즉 법의 성류에 어긋나지 않을 뿐더러 성교에서도 인정하고 있는 바이다.
그러나 만약 과거ㆍ미래[의 실유]를 부정한다면, 이는 바로 법성에도 어긋날뿐더러 성교를 훼손하고 비방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여기에는 많은 과실이 있다.
이 같은 사실에 따라 존자 세우께서 건립한 과거ㆍ미래의 실유설은 정리(正理)에도 부합하고 경에 수순하여 능히 경동(傾動)할 수 없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즉 저 존자께서는 이와 같이 말하였다.
“부처님께서는 계경 중에서 ‘3세가 존재한다’고 설하였는데, 이 같은 3세의 차별은 어떻게 건립되는 것인가?
작용에 근거하여 3세의 차별을 설하는 것으로,
이를테면 일체행으로서 작용을 갖지 않은 때를 일컬어 ‘미래’라 하고,
작용을 갖는 때를 일컬어 ‘현재’라 하며,
작용이 이미 소멸한 때를 일컬어 ‘과거’라 하지만,
법체로서는 어떠한 차이도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작용이란 명칭은 무엇에 근거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결과를 인기하는 유위법의 공능에 근거한 것이다.
다시 말해 그 밖의 다른 존재가 생겨날 때, 능히 원인적 존재[因性]가 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만약 능히 이것(결과를 인기하는 공능)에 근거하여 시간의 차별을 설정하거나, 혹은 그 밖의 다른 사실을 주장할 경우, 여기에는 어떠한 과실도 없을 뿐더러, [3세의] 차별을 분별하는 지자(智者)라면 마땅히 그를 ‘이치에 밝은 사람[鑑理人]’이라고 말해야 것이다.
그러나 만약 어떤 사람이, [3]세의 차별을 설정하는 이치에 미혹하여 다른 이의 비난을 두려워한 나머지 성언(聖言)을 버리거나,
혹은 요의경을 부정하여 불요의경이라 하여, 현재의 존재만을 인정하고 ‘과거ㆍ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거나,
혹은 오로지 현재 또한 가유로서만 인정하거나, 혹은 3세[법]을 모두 비난 부정하여 ‘[그것들은] 다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73)
이러한 주장은 모두 성교(聖敎)와 정리(正理)에 어긋나는 것으로서, 지자라면 마땅히 그들을 배척하여 ‘이치에 미혹한 사람[迷理人]’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바야흐로 존자 세우의 ‘작용에 근거하여 3세의 차별을 설정한다’는 논의에 의거하여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능력에 따라 [저들의] 온갖 허물과 힐난을 배척하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삼세실유의 뜻은 성취될 수 있는 것으로, 지혜 있는 모든 이라면 응당 마땅히 따라 믿고 배워야 한다.74)
무엇이 작용을 장애하며, 작용이란 무엇인가?
[작용이 법체와] 다르지 않다면, 3세[의 차별]은 바로 허물어질 것이며
[미래ㆍ과거가] 실유라면, 무엇이 아직 생겨나지 않았고 이미 소멸한 것인가?
[그러나] 이러한 법성은 참으로 깊고도 깊은 것이로다.
이 중 앞의 3구는 작용에 근거한 세우(世友)의 3세의 차별을 비판한 것이고, 제4구는 비바사사(毘婆沙師)의 해명인데,
이에 대해 중현은 그의 『순정리론』(제52권)에서 이러한 비판 자체가 무지의 소치라고 하면서 다시 자세하게 비판하고 있다.
‘수면은 이와 같은 상태에서 이와 같은 소연의 경계[事]를 계박한다’는 사실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7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