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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꿈, 느티나무
느티나무의 삶과 한국인의 꿈
한 존재의 삶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만큼 어려운 것도 드물다. 특히 다른 존재의 삶을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한 존재는 자신마저 정확하게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나무에 관심을 가진 지도 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앞이 막막한 것은 알면 알수록 깊이를 알 수 없는 게 나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인간보다 먼저 이 지구상에 나타난 나무를 이해하려면 무엇보다도 관찰이 중요하다. 관찰은 어떤 사물을 아주 자세하게 보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서 만날 수 있는 수많은 나무 중 느티나무는 매일 만나면서도 도저히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나무다. 관찰하지 않으면 느릅나뭇과의 갈잎큰키나무인 느티나무에 잎이 긴 긴잎느티나무, 잎이 둥근 둥근잎느티나무 등이 있는지도 모른다.
한국 사람들에게 느티나무는 아주 각별하다. 21세기를 맞으면서 느티나무를 ‘밀레니엄 나무’로 선정한 것만 봐도 한국 사람들이 이 나무를 얼마나 애지중지하는지 알 수 있다. 느티나무의 가치는 왕의 관(棺)을 만들거나 부석사와 도동서원 등 고건축에서 이 나무를 사용한 것만 봐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이 나무를 회화나무를 의미하는 한자인 괴(槐)와 혼용하고 있다. 한자 ‘괴’의 경우 중국에서는 회화나무를 의미하지만, 한국에서는 느티나무로 이해한다. 그 이유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이 나무의 누른 잎, 껍질이 회화나무와 닮아서 차용했다는 설이 나돌고 있다. 그래서 느티나무를 ‘버금회화나무’라 부르기도 한다. 때론 느티나무를 이 나무의 부모인 느릅나무와 관련해서 청유수(靑楡樹) 혹은 황유수(黃楡樹)라 부른다. 중국에서는 느티나무를 거()라 표기한다. 둥근느티나무는 규(槻)이다. 이처럼 중국에서 사용하는 느티나무의 한자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면 중국 사료에 등장하는 괴를 느티나무로 오역할 수 있다. 이러한 오역은 중국 측 자료의 한국어 번역본에서 종종 발견된다.
느티나무는 한국인들에게는 신령스러운 나무, 즉 신목(神木)이다. 이 세상에 어떤 나무인들 신령스럽지 않겠냐만, 유독 특정 나무를 신령스러운 존재로 인식하는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느티나무는 대부분 신령스러운 나무로 평가하는 나무들이 더디게 자라는 것과 달리 빨리 자라면서도 오래 사는 나무이다. 보통 빨리 자라면 오래 살지 못하는 게 한 존재의 특성이다. 그러나 느티나무는 그렇지 않다. 그래서 느티나무의 내공은 가히 짐작하기 어렵다.
다른 신목과 달리 느티나무는 가지가 많은 게 매력이다. 느티나무가 짧은 시간에 사람들을 한 몸에 품어버리는 ‘마력’을 가진 것도 많은 가지 덕분인지 모른다. 한국 사람들이 신목으로 추앙하고 있는 은행나무는 느티나무보다 오래 살지만 가지가 많지 않아 느티나무처럼 짧은 시간에 사람들을 품을 수 없다. 그래서 예부터 많은 사람들이 동네 어귀에 느티나무를 심고 그곳에서 희로애락을 나눴다. 한국인들은 봄에 씨앗을 뿌린 후 느티나무 아래서 풍년을 빌었고, 여름에 모심기를 끝낸 후 느티나무 아래서 막걸리 한 사발을 마시면서 병충해 없이 벼가 잘 자라길 기원했고, 가을에 추수를 끝낸 후 느티나무 아래서 감사의 제사를 지냈고, 겨울에 찬바람이 불면 느티나무 아래서 무사히 겨울을 보낼 수 있길 고대했다.
느티나무의 꽃과 열매를 보았나요?
한국인들이 아주 좋아하는 느티나무지만 정작 이 나무의 꽃과 열매를 본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대부분 사람들이 느티나무에 꽃이 피는지, 열매가 맺는지에 대해 애초부터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봄철 야외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꼭 느티나무의 꽃을 보여준다. 느티나무의 꽃을 본 학생들은 모두 놀랍다는 반응이다. 이 세상에 태어나 수 없이 많은 느티나무를 보았지만 한 번도 느티나무의 꽃을 본 적 없는 학생들에게는 놀라운 발견이 아닐 수 없다. 봄철 느티나무를 가까이에서 살펴보면 생각보다 많은 꽃이 피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느티나무에 그토록 많은 꽃이 피는데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꽃을 보지 못한 것은 한 존재에 대해 관찰하지 않기 때문이다. 관찰은 깨달음의 출발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나무를 가까이서 보지 않고 그저 멀리서 본다. 나무를 멀리서 보는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느티나무의 꽃과 열매를 볼 수 없다. 그런 사람들은 느티나무에 꽃과 열매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평생을 보낼지도 모른다. 나무를 가까이서 보면 멀리서 보는 것과는 아주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다. 나무를 멀리서 보면 그 나무의 전체 모습을 볼 수 있을지언정 속을 볼 수는 없다. 나무의 속을 보지 않고 그 나무를 평가하는 것은 오만이자 편견이다. 나는 야외수업시간에 어김없이 ‘나무안기’를 강행한다.
나무를 안는 행위는 일반인들에게는 아주 낯설다. 그래서 나는 낯선 행위를 즐긴다. 나무를 안으면 낯선 존재를 안는 것처럼 참 부끄럽다. 그러나 자주 안다보면 아주 편안하면서도 한 존재의 진면목을 알 수 있다. 나무를 안는 행위는 한 존재의 내면을 만나는 시간이다. 내가 학생들에게 나무안기를 강행하는 것도 바로 한 존재의 내면을 이해시키려는 의도다. 그러나 나무를 안는 시간은 단순히 상대의 내면을 알기 위한 게 아니다. 무엇보다도 내가 나무안기를 통해 추구하려는 것은 자신의 내면을 살피기 위해서다. 자신의 내면을 알지 못하면 다른 존재의 내면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가을에는 느티나무의 화려한 겉모습이 사람들을 유혹한다. 그래서 이 나무의 열매를 볼 겨를도 거의 없다. 이런 와중에도 느티나무의 열매에 눈길을 줄 수 있다면, 이런 와중에도 느티나무의 열매를 생각한다면, 느티나무는 분명 그런 사람을 사랑할 것이다. 자신을 1년 동안 바라본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느티나무는 꽃과 열매를 잎 속에 감추고 있다. 사람들이 느티나무의 꽃과 열매를 잘 볼 수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느티나무가 꽃과 열매를 잎에 감추고 있는 것도 오래 살기 위한 고도의 전략이다. 누군들 아름다운 모습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을까. 그런데도 잎 속에 감추고 있는 것은 느티나무가 내성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성적인 존재를 사랑한다. 겉으로 드러내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내성적인 존재는 겉으로 드러내고 싶지만 참는다. 억지로 참는 게 아니라 그런 모습이 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성적인 존재는 말이 적은 반면 속이 깊다. 내성적인 존재는 다른 존재의 얘기를 잘 듣는다. 느티나무도 그런 존재다. 그렇지 않고서야 다른 존재에게 끊임없는 사랑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느티나무 잎과 색즉시공
느티나무는 가을날 나를 환장하게 만든다. 누군가를 환장하게 만들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위대하다. 가을에 내가 느티나무 때문에 환장하는 이유는 각양각색의 잎 때문이다. 다른 신령스러운 나무와 달리 느티나무는 가을에 하나의 색깔이 아니라 여러 색깔로 물든다. 다양한 색이 곧 느티나무의 색깔이다.
한자 색(色), 무릎 꿇은 사람 위에 사람이 있는 모습을 본 뜬 회의(會意) 글자이다. 이는 곧 남녀간의 애정표현을 드러낸 글자이다. 남녀간의, 암컷과 수컷간의 애정관계는 생명체의 가장 기본적인 존재방식이다. 그래서 이 관계는 아름다운 모습이다. 나무의 색이 아름다운 것도 색이 가지고 있는 본래의 의미에서 파생했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세상에 드러난 현상을 색이라 한다. 그러나 처음부터 고정된 색은 없다. 그래서 색은 언제나 공이다. 그러나 공 역시 항상 같은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공은 언제나 색이다. 색과 공은 분리할 수 없다. 그래서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다. 색 밖에 공이 존재하지 않고, 공 밖에 색이 존재하지 않는다. 느티나무의 색깔은 곧 느티나무의 모습이다. 느티나무의 각양각색도 느티나무의 잔면목이다.
일본의 식물학자 마키노(牧野富太郞, 1862~1957)가 붙인 느티나무의 학명 중 종소명인 ‘세라타(serrata)’는 ‘톱니가 있는’이라는 뜻이다. 이는 느티나무의 잎을 강조한 것이다. 영어에서도 톱니 있는 잎(Sawleaf)을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느티나무의 특징은 잎이다. 느티나무를 사랑하는 사람은 떨어진 잎을 주워 톱니가 몇 개인지 세어볼 것이다. 느티나무를 진정 아끼는 사람은 추위에 떨어진 잎을 주워 앞뒷면이 같은지 다른지도 관찰할 것이다. 더운 여름에 느티나무 덕분에 더위를 피한 사람은 집으로 돌아가다 잎을 주워 잎의 길이와 폭이 어느 정도인지 자로 재어볼 것이다. 추운 겨울날 느티나무가 어떻게 보낼지 걱정하는 사람은 잎을 주워 책에 끼웠다가 다음 해 봄에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내는 편지 속에 넣을 것이다.
느티나무 잎이 바람에 떨어지는 이유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어디엔가 떨어진다. 그 누구든 떨어지지 않고서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떨어지지 않고서는 올라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모든 식물도 잎을 떨어뜨린다. 떨어뜨리지 않고서는 잎을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떨어뜨리지 않고서는 성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의 가을은 산과 도심 어디든 나뭇잎이 지천에 깔려 행복하다. 잎이 바람에 뒹구는 모습은 참 쓸쓸하다. 나는 쓸쓸한 걸 좋아한다. 쓸쓸하지 않고서는 기쁠 수 없기 때문이다. 쓸쓸하면 슬픔도 밀려온다. 슬픔이 밀려오면 행복도 밀려온다. 행복은 언제나 슬픔의 발효로 생기기 때문이다.
가을날 느티나무의 각양각색의 모습은 나를 무척 행복하게 한다. 그러나 그 많던 잎들도 때론 한꺼번에, 때론 천천히 바람에 눈물처럼 뚝뚝 떨어진다. 느티나무 잎은 왜 가을바람에 떨어질까. 많은 나뭇잎들이 가을바람에 떨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히 겨울을 견디기 위해 물을 차단했기 때문일까. 바람이 불지 않아도 잎은 떨어질까.
나는 느티나무가 가을에 잎을 떨어뜨리는 이유가 궁금해서 10년 동안 관찰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느티나무가 바람에 잎을 떨어뜨리는 것이 단순히 물을 차단해서가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느티나무가 가을에 바람이 불면 잎을 떨어뜨리는 것은 바람에 대한 ‘예의’ 때문이기도 했다. 느티나무는 1년에 한번밖에 만날 수 없는 가을바람을 무척 사랑했던 모양이다. 느티나무는 잎을 떨어뜨릴 모든 준비를 끝내고 가을바람이 오길 기다린다. 그래서 가을바람이 오면 반드시 잎을 떨어뜨린다.
느티나무는 가을바람에 잎이 떨어지지 않으면 가을바람이 얼마나 무안할지 잘 아는 존재다. 우주의 좋은 기운을 가지고 1년 만에 찾아오는 가을바람에 잎이 떨어지지 않는다면 가을바람의 존재가치는 없다. 이 세상 누구든 존재의 가치를 혼자서 유지할 순 없다. 어떤 존재든 다른 존재의 가치를 인정할 때만 자신의 존재를 간직할 수 있다. 느티나무가 가을바람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느티나무가 가을바람에 잎을 떨어뜨리지 않는다면, 결코 성장할 수 없을 것이다. 느티나무가 바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후손을 결코 번성케 할 수 없을 것이다. 한 존재는 때론 다른 존재에게 안길 때 성숙할 수 있다. 느티나무가 가을바람에 잎을 떨어뜨리는 것도 자신의 일부를 바람에 맡기는 것이다. 자신의 일부를 가을바람에 맡기는 것은 상대에 대한 관심이자 배려이다. 그래서 느티나무는 상대를 인정하는 속 깊은 존재이다.
곽재우와 느티나무
느티나무 중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것도 어렵잖게 볼 수 있다. 나 역시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느티나무를 적지 않게 만났다. 어느 것 하나 신령스럽지 않은 게 없다. 어느 것 하나 새롭지 않은 게 없다. 모든 나무는 한 그루 그루마다 제 각각 매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만나는 나무마다 나를 흥분시킨다. 내가 나무를 사랑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나는 나무를 만나면서 자신이 새로운 것을 갈구하는 존재임을 알았다. 사계절 각각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나무만큼 나를 행복하게 만든 것도 드물다. 그래서 신령스러운 느티나무를 찾아가는 과정은 한 편의 드라마와 같다.
천연기념물 느티나무 중 내가 가장 많이 만난 것은 경상남도 의령군 유곡면 세간리의 ‘현고수(懸鼓樹 천연기념물 제493호)’이다. 이곳의 느티나무는 다른 느티나무와 달리 ‘현고수’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이곳 느티나무는 최근에야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나는 이곳 느티나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기 전부터 여러 차례 찾았다. 그 이유는 이곳이 내 고향과 그다지 멀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곳 느티나무가 특별한 사연을 담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현고수’는 ‘북을 맨 나무’라는 뜻이다. 누가 이곳에 북을 매달았는가 하면 바로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 1552~1617)이다. 곽재우는 이곳의 느티나무에 북을 매달고 의병을 모집했던 것이다.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의 제자였던 곽재우가 북을 매달고 의병을 모집한 마을 어귀의 느티나무가 최근에서야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것은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아주 다행스러운 일이다.
나는 여름에 누른 보리가 익을 때, 가을에 누런 벼가 익을 때 이곳을 즐겨 찾았다. 지금 이곳의 느티나무는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많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있다. 이곳의 느티나무는 몸 한가운데가 움푹 패여 수술 흔적이 선명하다. 더욱이 현고수는 세월과 북의 무게를 견디기 힘들었는지 남쪽으로 기울어 있다. 얼핏 보면 ‘요가’라도 하는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장애인의 모습이다. 그러나 현고수에는 곽재우의 구국의 정신만은 싱싱하게 살아 있다. 마을 사람들의 쉼터이기도 한 현고수에서 자라나는 어린이들도 그의 구국정신을 은연중 배울 것이다.
현고수 근처에는 곽재우의 정신을 담고 있는 또 한 그루의 신령스러운 나무가 있다. 마을 안쪽에는 곽재우의 기념관이 있고, 기념관 앞에는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302호)가 살고 있다. 이곳의 은행나무는 곽재우가 어릴 때부터 보고 자랐을 만큼 나이가 많다. 곽재우가 살았던 이곳에 천연기념물이 두 그루나 살고 있으니, 세간리 사람들은 아주 행복하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도 함께 행복할 것이다.
글·사진 / 강판권 (계명대학교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