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5:20)
제가 신학교 학생들에게, “예수를 믿는 자라 할지라도 그의 삶이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갈 수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랬더니 학생들이 강력히 반발을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날 예수 믿는 자 중에 구원 받을 자가 몇 명이나 되겠느냐?”는 것이 논지였습니다. 다음의 영국 존 라일의 말은 저들의 질문에 대한 적절한 대답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구원 받기를 바라는 모든 이에게 경고합니다. 세상의 신앙기준으로 만족하지 마십시오.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라면,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기독교 신앙이 지금 신앙을 고백하는 대부분의 사람이 가진 신앙보다 훨씬 깊고 높다는 사실을 잘 알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원 받을 사람의 수가 적다 하여 당신의 구원의 기준을 낮추시지 않습니다. 노아 때에는 단지 여덟 명만 구원 받았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실 때는 롯과 두 딸만이 구원 받았습니다.
엘리야 시대에는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고 남겨진 자 오직 칠천 명 만이 구원 받았습니다(롬11:3~4). 그 당시 이스라엘 인구를 칠백만 명으로만 어림잡아도 천 명 중 한 사람 꼴로 구원 받은 것입니다. 구원의 문이 결코 넓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존 라일의 말대로 ‘세상의 신앙기준이 결코 구원의 기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도 비슷한 질문과 대답이 오갔습니다. “혹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 저희에게 이르시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눅13:23~24).
존 라일이 언급하고 있는 세상의 신앙기준이 아닌 성경이 말하는 구원 받을 사람에 대한 신앙기준은 어느 수준일까요?
이러한 질문에 대해 미국의 유명한 조직신학자 찰스 하지도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그는 그의 책 조직신학개요에서 믿음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어떠한 사람들인지를 다음과 같이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육체를 정과 욕심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이요, 몸을 쳐서 복종시키도록 만드는 것이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새로움을 입어서 거룩해진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고,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또한 그의 자녀로서 그와 관계를 가지며 그 속에서 즐거워한다.
이들은 순종하는 자녀들로서 과거의 육욕에 따라서 살지 않고, 그들을 부르신 이가 거룩하시듯 그들도 모든 대화에서 거룩한 모습이 드러난다. 정의로우시고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의 형상을 입고 있기 때문에, 이들은 이웃을 향하여 정직하며 자비를 베풀며 자기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한다.
어떤 사람은 이것이 신앙이라면 어느 누구도 신앙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으나 택함을 받은 자는 적으니라” 혹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7:14) 는 말씀이 사실이라는 것이 여기서 드러난다. 신앙에 관한 관념을 성경에서 찾아야지, 신앙이 있다고 이야기 하는 사람들의 삶에서 찾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성경이 ‘신앙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데 있다고 말씀 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이 경외와 헌신과 순종, 그리고 사람에게 자비와 공의를 행하며 그들을 사랑하는 데서 나타난다는 것도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항하여 그렇게 경건하고 순종하며 또한 형제들을 향하여 그렇게 정의롭고 자비하며 또한 우리 자신을 향해서는 그렇게 순정하고 자기를 부인하는 모습이 없다면, 아무리 겉으로 모양을 갖추었다 해도, 아무리 입으로 고백한다 해도, 아무리 종교적인 봉사에 열심을 낸다 해도 우리가 그리스도인임을 주장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의 양심이 증거 해 준다.
여러분은 위의 구원 받기에 합당한 신앙기준에 비추어보아 어떻습니까? 찰스 하지가 제시한 성경이 말하는 신앙기준이 너무 높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너희 의가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을 흘려듣는 사람들은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도 들어가지 못할 사람이 많다고 말씀하셨는데,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고 힘쓰지도 않는 사람이 어떻게 들어갈 수 가 있겠습니까?
과연 저의 학생들의 질문처럼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 중에 찰스 하지가 서술한 신앙의 기준에 합당한 자가 얼마나 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 구원받을 사람들의 수가 적다는 이유로 오늘날 하나님께서 말씀을 변경시켜야 하실 처지에 놓이게 됐습니다.
만약 말씀을 변경시킬 수 있다면야 오늘날 “예수를 믿노라” 하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죄를 짓고 사는 사람들에게 문제 될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속성상 그럴 수 없으시니 어찌하면 좋을까요? 다른 방도는 전혀 없습니다. 속히 깨닫고 회개하십시오. 더 이상 주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지 마십시오. 더 이상 죄와 짝하며 살지 마십시오. 롯과 같이 빨리 죄악의 도성에서 도망치십시오. 롯의 처처럼 죄를 그리워하며 미련을 버리지 못하여 죄악 된 세상을 뒤돌아보지 마십시오. 그것이 구원 얻는 참된 믿음을 갖는 유일한 길입니다.
위클리프 성경 번역 선교회 부대표이신 정민영 선교사는 바리새인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분을 핍박하고 십자가에 못 박는데 앞장선 바리새인을 매우 사악한 자들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지만, 당시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들은 오늘의 기준으로도 상당히 인정받는 집단이었다.
바리새인은 진리의 수호를 위해 엄청난 대가를 지불한 집단이었다.
사실 예수님만 십자가게 달려 돌아가신 게 아니었다.
주님이 오시기 전, 즉 중간기에 바리새인은 믿음의 정절과 가치를 수호하고 하나님을 부인하지 않기 위해 수 백 명씩 십자가게 달려 순교했다.
에베소 교회도 비슷한 평가를 받았다. 환란과 핍박을 꿋꿋이 견뎌내고 진리가 아닌 것과 타협하지 않은 채 예수님보다 앞서 장렬히 십자가게 달려 순교한 수많은 바리새인들을 생각하면서 “우리 의가 바리새인보다 더 나아야 한다”(마5:20)는 예수님의 질책을 떠 올린다면, 과연 현대 교회의 영성이 그들보다 낫다고 주장할 수 있을 지 의문이다. 오히려 예수님의 이런 바리새인을 향해 ‘회 칠한 무덤’(마23:27 참조)이라고 혹평하셨던 것을 보면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평가를 받게 될지 의문이 든다.
정 선교사의 위 글은 마음대로 죄 지으면서도 예수 믿고 천국 갈 수 있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을, 그들의 양심이 만약 살아 있다면, 더욱 당혹하게 만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