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라 태종무열대왕 김춘추가 삼국통일에 관한 작전회의를 하고 있는 그림. 사서에는 딸 고타소의 죽음이 그를 통일로 몰아가는 동인이었던 것으로 나온다. [사진 민족기록화] |
삼국통일 도화선은 김춘추 맏딸 고타소의 죽음 |
① 신라 태종무열대왕
한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은 무엇일까? 필자는 한국 · 한국인을 만든 삼한통합(소위 삼국통일)을 꼽는다. 신라의 삼한통합은 다양하게 전개될 수 있던 한국사를 하나의 방향으로 결정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시리즈를 신라의 삼한통합으로 시작하는 이유다. 삼한통합은 생각지도 않은 사건에서 시작됐다. 서기 642년 8월 김춘추(金春秋)의 딸 김 고타소(古陀炤)의 죽음이 그것이다. 1914년 오스트리아의 제위 계승자인 페르디난트(Ferdinand) 대공 부처의 피살이 제1차 세계대전의 불꽃이 된 것과 같다고나 할까?
대장부가 어찌 백제를 삼키지 못하겠는가!
“선덕여왕(善德女王) 11년, 임인(642년) 가을 8월에 백제 장군 윤충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공격했다. 이에 앞서 도독 품석(대야성 성주, 춘추의 사위)이 막객(幕客)인 금일의 아내가 얼굴이 아름다움을 보고 이를 빼앗으므로 금일이 원한을 품고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백제와 내응하여 창고를 불태웠다. 그로 인해 성을 굳게 지킬 수 없게 되었다.”
위기에 처하자 품석의 보좌관인 서천이 성 위에 올라가 ‘성민들을 죽이지 않는다면 항복하겠다’고 했다. 윤충은 ‘그대들과 잘 지내지 않는다면 밝은 해가 내려다볼 것’이라 했다. 그때 품석을 보좌하던 또 다른 관리인 죽죽(竹竹)이 ‘백제는 이랬다 저랬다 하는 나라이므로 믿을 수 없는데, 윤충의 말이 달콤하니 반드시 속이려는 것이기에 용감하게 싸워 죽는 것만 같지 않다’고 했다.
품석은 그 말을 듣지 않고 성문을 열어 사졸들이 먼저 나가니, 백제에서는 복병을 내어 모조리 죽여버렸다. 품석은 나가려 하다가 장수와 병사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먼저 아내와 자식을 죽이고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이때 품석이 죽인 자기 아내가 춘추의 딸 고타소다. 『삼국사기』 41, 『김유신』전에 “백제가 대량주를 깨뜨리니 춘추공의 딸인 고타소 아가씨가 남편 품석을 따라 죽었다. 춘추가 이를 원통히 여겼다”고 나온다. 고타소는 김춘추의 장녀로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니 사랑하는 딸의 죽음을 전해 들은 김춘추는 말할 수 없이 큰 슬픔에 잠겼을 것이다.
『삼국사기』 5, 선덕여왕 11년(642) 조의 기사는 이렇게 표현한다. “고타소의 죽음을 들은 춘추는 기둥에 기대 서서 종일토록 눈도 깜짝이지 않고, 사람이나 물건이 앞을 지나쳐도 그것을 알아보지 못했는데 얼마 후 말했다. ‘아! 대장부가 어찌 백제를 삼키지 못하겠는가!’ 그는 곧 왕에게 나아가 말했다. ‘신은 원컨대 고구려에 사신으로 가서 군사를 청해 백제에 대한 원수를 갚고 싶습니다.’ 왕은 이를 허락했다.”
이를 갈며 백제를 멸망시키기로 다짐한 춘추는 그해 겨울 신라를 끈질기게 침범해 들어오던 백제에 이은 또 다른 적국 고구려에까지 손을 내밀었다. 길을 떠나기 전 춘추가 유신에게 말했다.
“‘나와 공은 일심동체로서 나라의 기둥이오. 내가 만약 고구려에 들어가 불행한 일을 당한다면 공이 무심할 수 있겠소?’ 유신이 대답하였다. ‘공이 돌아오지 못한다면 저의 말발굽이 반드시 고구려 · 백제 두 왕의 궁정을 짓밟을 것이오. 이렇게 못한다면 무슨 면목으로 백성들을 대하겠소?’ 춘추가 감격하고 기뻐하여 서로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마시며 맹세하였다. ‘내가 60일이면 돌아올 것이오. 만일 이 기한이 지나도록 오지 않는다면 다시 만날 기약이 없을 것이오.’ 그들은 작별하였다.”(『삼국사기』 41, 『김유신』)
고구려에 간 김춘추는 보장왕(寶藏王)을 만났다. 그는 642년 10월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일으켜 영류왕을 시해하고 내세운 왕이다. 김춘추는 연개소문도 만났다. 그런데 복수심에만 불타 있던 김춘추는 준비도 없이 ‘덜컥’ 청병을 했지만 고구려 왕은 과거 장수왕이 정복했던 마목현과 죽령 이북의 땅을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들어주기 어려운 요구였다. 결국 거짓으로 “신라에 돌아가 왕에게 청해 돌려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것으로 춘추의 청병외교는 실패로 끝났다. 게다가 어떤 이가 고구려 왕에게 “춘추는 보통 사람이 아니니 죽여서 뒷날의 걱정을 없애라”고 했다. 춘추의 목숨마저 위태로운 상황에 처했었던 것이다.
그런데 김유신은 약속을 지켰다. 『삼국사기』 41, 『김유신』전에 따르면 60일이 지나도 춘추가 돌아오지 않자 유신은 용사 3000명을 뽑아 고구려로 쳐들어가기로 했다. 기세가 무서웠다. 첩자가 이 사실을 알리자 고구려 왕은 춘추가 이미 죽령 이북의 땅을 돌려주겠다는 약속을 했고, 유신의 각오가 대단하니 춘추를 더 잡아둘 수 없다고 생각해 후하게 대접하여 돌려보냈다.
642년 백제 의자왕의 공격으로 비롯된 딸의 죽음에 대한 춘추의 사적(私的) 복수심은 이렇게 백제 · 신라 · 고구려를 사생결단의 공적(公的) 관계로 몰아간 것이다. 18년 뒤 신라는 백제를 정복했고, 26년 뒤 고구려를 정복했다. 신라인들은 숙망 (宿望)인 삼한통합(소위 삼국통일)의 꿈을 이루었고 춘추 일가는 원한을 갚았다.
| | | 2008년 춘분 때 태종무열왕릉 앞에서 제사를 지내는 후손들. [사진 이종옥 교수] |
양신(良臣) 거느린 김춘추, 충신 만든 의자왕
삼국의 운명이 엇갈리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고구려나 백제보다 군사력이 강한 것도 아니었고, 토지나 백성이 많은 것도 아니었던 신라가 삼한통합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 군주다운 군주, 신하다운 신하를 가졌는가에 그 답이 있다.
성군(聖君)에게는 충신(忠臣)이, 폭군(暴君) 밑에는 간신(奸臣)이 있게 마련이다. 죽음을 무릅써야 하는 직언보다 세 치 혀를 이용해 나라를 어지럽히기는 쉬운 일이다. 그러면 군주다운 군주와 신하다운 신하란 어떤 것일까?
한국인에게 고구려를 침략했다 안시성 싸움에서 한쪽 눈을 잃은 황제로 알려진 당 태종 이세민(李世民)은 중국 역사상 선정(善政)과 태평성대를 이룬 이상적인 왕으로 평가된다. 당 태종과 그의 신하 위징(魏徵)은 충신과 양신을 구분하는 말을 남겼다.
위징이 제(帝·당 태종)에게 말하기를, “폐하께서는 신을 양신(良臣)이 되게 해주시고 충신(忠臣)이 되게 하지 마십시오.” 제가 물었다. “충(忠)과 양(良)은 무엇이 다른가?”
위징이 말하기를 “… 양신은 (신하인) 자신은 아름다운 이름을 얻고 군주는 성군의 칭호를 갖도록 하고 자손에게는 대를 이어 복을 받고 관직을 갖게 하고, 충신은 (신하인) 자신은 주살되고 군주는 대악에 빠지고, 집안과 국가는 모두 사라져 이름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그 차이가 아주 큽니다” 했다. (『구당서(舊唐書)』 권71, 『위징열전(魏徵列傳)』)
한국사에도 양신과 충신은 많다. 그 예를 보겠다. 특히 신라 태종무열대왕(춘추)은 양신을, 백제 의자왕은 충신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신라 태종은 양신을 거느렸던 대표적 군주다. 그는 칠성우(七星友)라는 양신을 거느렸다. 『화랑세기』에는 612년부터 유신이 춘추를 “삼한의 주인(三韓之主)입니다”라며 받든 것으로 나온다. 그 이후 유신에 의해 결성된 칠성우는 춘추를 왕으로 세우기 위한 장기 프로젝트를 수행한 결사체였다.
그 장기 프로젝트가 얼마나 어려웠겠는가. 비담의 난을 진압한 것이 그 한 예다. 『삼국사기』 5, 선덕여왕 16년(647) 조와 진덕여왕 원년(647) 조를 보자.
646년 11월 상대등(上大等, 지금의 국무총리)에 임명된 비담은 647년 1월 초 ‘여왕이 나라를 잘 다스리지 못한다(女主不能善理)’며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1월 17일 유신을 중심으로 한 칠성우들이 비담 등 30명을 죽여 비담의 반란은 끝이 났다. 이 난을 계기로 칠성우들이 신라의 왕정을 장악했다. 그 와중인 647년 1월 8일 선덕여왕이 죽고 진덕여왕이 즉위했다. 2월 칠성우 중 나이가 많았던 알천(閼川)은 상대등이, 춘추는 진덕여왕의 뒤를 이을 동궁(東宮)이 됐다. 『삼국사기』 41, 『김유신』전에는 “유신이 재상인 알천과 의논해 이찬 춘추를 왕위에 오르게 했다”고 나온다. 태종대왕은 칠성우를 양신으로 만들었다.
『삼국유사』 『김유신』전에 “유신은 칠요(七曜, 즉 태양·달·수성·화성·목성·금성· 토성)의 정기를 타고난 까닭에 등에 칠성(七星)의 무늬가 있고 신이함이 많았다. 칠성우에는 알천공 · 임종공 · 술종공 · 호림공 · 염장공 · 보종공 · 유신공이 속했다. 알천공은 나이가 많고 완력이 대단해 윗자리에 앉았으나 모든 공들이 유신공의 위엄에 복종했다”고 한다.
칠성우는 군사(알천공·임종공) · 행정(술종공) · 재정(염장공) · 불교(호림공) · 선도(仙道·보종공) 등에 전문적 능력을 갖춘 사람들이었다. 칠성우는 아들 대에 이르기까지 능력을 달리하며 춘추를 모신 삼한통합의 주역들이다. 칠성우들은 높은 관직에 올랐고 태종은 성군의 칭호를 가지게 되었으며, 자손들은 대를 이어 복을 받게 된 것이다.
현재 한국인의 다수가 신라인을 시조로 하는 성을 가진 씨족들로 자처하는 것은 삼한통합으로 이룬 신라 중흥의 역사가 지금까지 이어지는 것을 뜻한다. 경주시 서악동에 있는 태종무열대왕릉에서는 김씨 후손들의 제사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러면 백제의 충신은 누가 있을까. 의자왕, 그는 충신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 충신이 백제를 멸망으로 이끌었으니 그 어찌 역설의 주인공이 아니겠는가. 다음 호에서 살펴본다
- 중앙선데이 | 이종옥 교수 | 제356호 | 2014.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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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唐)의 수도였던 장안(長安·지금의 시안)성의 한 성문(城門). 1371년 전 김춘추가 청병(請兵)외교를 위해 당으로 갔을 때 이 문 안의 성에 머물렀을 것이다. [사진 권태균] |
당과 ‘麗 · 濟 분할 밀약’ 으로 신라 구했지만 중국화 길 터 |
② 김춘추의 두 모습
서기 642년 8월 춘추의 딸 고타소의 죽음은 동아시아에 유례없는 대형 국제전쟁을 불렀고 결국 신라의 삼한통합으로 끝났다. 그 중심에 태종무열대왕(김춘추)이 있었다. 장녀의 죽음에 절치부심한 춘추는 그해 말 백제를 멸망시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고구려에 청병하러 갔다. 평양성에서 오히려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 처했던 춘추에게 고구려는 멸망시켜야 할 또 다른 적국이 됐다. 위와 옆에서 압박하는 적국 고구려와 백제. 신라의 운명은 풍전등화에 처했다. 비상수단이 필요했다. 그것은 당나라에 대한 청병(請兵)외교였다.
신라는 643년 9월 사신을 당 태종에게 보냈다. 『삼국사기』 5, 선덕여왕 13년(643)조엔 “당 태종을 만난 신라 사신이 고구려와 백제가 이번 9월 크게 군사를 일으키려 하므로 하국(下國, 신라)의 사직은 틀림없이 보전되지 못할 것이므로 삼가 배신(陪臣, 제후의 신하)을 보내 대국에 말씀드려 일부 군사를 빌려 구원받기를 원하는 바입니다”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당 태종이 “신라는 어떤 기이한 꾀를 써서 망하는 것을 면하고자 하는가”라고 묻자 사신은 “저희 임금은 사세가 궁하고 계책이 전혀 없으므로 오직 급함을 대국 (大國, 당나라)에 알려 사직(社稷)을 보전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당 태종은 세 계책을 말하며 어느 것을 따르겠는가 하니, 사신은 “예”라 할 뿐 대답이 없어 황제는 그가 용렬해 군사를 청하고 급함을 알릴 만한 재간이 아닌 것을 탄식했다고 나온다. 당시 당은 세계를 지배한 글로벌 파워. 그러니 제국의 정점인 태종 앞에서 모든 이는 주눅 들어 꼼짝을 못한 것이다.
사실 당군을 끌어들여 고구려·백제를 정복한다는 구상은 실현이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칠성우(1회 참조)들이 왕정을 장악한 진덕여왕 2년(648), 비상한 일이 벌어졌다. 왕위계승권자인 춘추가 당 태종을 만나는 사신이 된 것이다. 그만큼 절박했다.
| 시안 근교의 당태종 무덤 소릉. 산 중간에 구멍을 뚫어 시신을 안치했다. [사진 권태균] |
김춘추, 아들과 함께 對唐 청병외교 나서
당의 수도 장안(長安, 현재의 시안)에 간 춘추는 보통 사신과는 달리 당당했다. 여느 사신들처럼 태종 앞에서 “예, 예”만 하지 않았다. 춘추는 603년 진평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를 용수의 아들. 왕궁에서 태어나 612년까지 살며 왕자(王者, 왕과 그 일족)의 생활을 익혔고, 언제인가 용수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를 준비를 하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당 태종 앞에서 당당할 수 있었지 않았을까. 게다가 고구려 외교의 실패를 반추한 춘추는 준비를 했다. 당(唐)도 신라와의 동맹이 필요했을 것이란 계산도 했을 것이다. 고구려 원정 실패로 절치부심할 테니까.
‘준비된 대당(對唐)외교’에 나선 춘추의 모습이 『삼국사기』 5, 진덕여왕 2년(648)조에 그려진다. 태종은 셋째 아들 문왕(文王)을 포함한 사절단과 함께 온 춘추를 광록경 유형을 보내 교외에서 맞는다. 당 태종은 춘추의 영특하고 훌륭한 모습을 보고 후하게 대우했다. 춘추가 왕위계승권자라는 점을 파악했었기 때문일 것이다.
춘추는 서두르지 않았다. 먼저 국학(國學)에 가서 석전(釋奠, 공자에게 제사 지내는 큰 제사)과 강론을 참관하기를 청했다. 당 태종은 허락하면서 손수 지은 『온탕비(溫湯碑)』와 『진사비(晉祠碑)』 그리고 새로 편찬한 『진서(晉書)』를 줬다. 왜 춘추는 ‘느긋하게’ 움직였을까.
당나라 성세(盛世)를 창시했다고 하는 당 태종의 흠 중 하나가 3년 전인 645년 고구려 정벌이었다. 당 태종은 직간(直諫)을 잘하던 위징(魏徵)을 기리며 “살아 있었다면 고구려 정벌이 잘못된 일이라 했을 것”이라며 한탄했다. (『당서』 97, 『위징』) 춘추는 당시 그런 태종의 심리와, 고구려를 협공하기 위해 신라의 협조가 필요한 당의 사정을 면밀히 분석했을 것이다. 그런 초조함을 읽고 춘추는 당 태종의 마음을 조급하게 만들려 하지 않았을까. 그런 계산이 먹힌 듯 당 태종은 춘추를 초대해 잔치를 베풀었다. 그리고 물었다.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가.” 춘추는 무릎 꿇고 말했다.
“신의 본국은 바다 모퉁이에 치우쳐 있는데도 엎드려 천자의 조정을 섬겨오기를 여러 해 동안 해왔습니다. 그런데 백제는 강하고 교활해 여러 차례 제 나라를 침탈 했습니다. 더욱이 지난해에는 대거 깊이 쳐들어와 수십 성을 함락해 당에 조공하는 길을 막았습니다. 만약 폐하께서 군대를 빌려 주시어 흉악을 잘라버리지 않는다면, 저의 나라 인민은 모두 포로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 바다 건너 직공(職貢)을 바치는 일을 다시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당 태종은 출병을 허락했다.
그때 태종이 춘추에게 한 약속이 『삼국사기』 진덕여왕 2년조에는 안 나오고 671년 7월 26일 당나라 총관 설인귀가 문무왕에 보낸 편지에 대한 답신의 첫머리에 나온다.
“선왕(춘추)께서 정관 22년(648)에 중국에 들어가 태종 문황제(文皇帝)의 은혜로운 조칙을 직접 받았는데 ‘짐이 지금 고구려를 정벌하려는 것은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너희 신라가 두 나라 사이에 끼여 매번 침략을 당해 편안할 때가 없음을 불쌍히 여기기 때문이다. 산천과 토지는 내가 탐내는 것이 아니고 옥백(玉帛)과 자녀들은 내게도 충분하다. 내가 두 나라를 평정하면 평양(平壤) 이남의 백제 땅은 모두 신라에 주어 영원히 평안하게 하겠다’ 하시고 계책을 가르쳐주고 군사의 기일을 정해 주셨다…”(『삼국사기』 7, 문무왕 11년)
춘추와 당 태종의 밀약은 태종이 죽은 후 태자 치(治) 즉 고종(高宗) 대에도 작동했다. 이 약속은 한국사의 방향을 결정한 무엇보다 중요한 사건이었다.
문무왕, 당과 9년전쟁으로 영토 확장
춘추는 당 태종의 마음을 사기 위해 여러 조치를 했다. 당 태종은 춘추가 신성한 사람이라며 곁에서 숙위(군주를 호위하며 지킴)하라고 했지만 춘추는 이를 사양하는 대신 “신에겐 일곱 아들이 있는데 원컨대 폐하 옆을 떠나지 않고 숙위하게 해 달라” 했다. 당 태종은 문왕과 대감 1인을 숙위토록 했다. (『삼국유사』 1, 『태종춘추공』조) 태종은 춘추를 특진(特進, 제후 중 공적 있는 자에게 주는 명예칭호)으로 삼았다. 귀국 때는 3품 이상 신료들에게 송별 잔치를 베풀었다.
춘추는 그때 동시에 중국문명과의 고속도로를 뚫는다. 춘추는 신라인의 장복(章服, 옷)을 중국의 제도에 따르겠다고 했다. 당 태종은 진귀한 옷을 춘추와 그의 일행에게 주었다. 649년 정월 신라의 신료들은 중국 조정의 의관을 입었다. 664년 정월에는 문무왕의 명으로 여자들도 중국의 의복을 입는다. 중국 옷을 입는 것은 신라의 의식과 문화를 바꾸는 작업이었다. 이후 한국인의 겉모습은 확 달라졌다. 대신라(소위 통일신라) 시대에 축조된 고분에서 출토된 토용(土俑)들은 당나라 사람의 옷을 입고 있다.
춘추는 당의 유학(儒學)이 문화의 정통이라는 것도 파악했다. 오자마자 국학에 나아가 석전과 유교경전 강론을 참관하겠다고 요청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신라의 국학은 682년 설치되었지만, 그 안의 대사(大舍)라는 관직은 651년 설치되었다. (『삼국사기』 38, 『직관』 상) 한국식 유교 국가의 길은 춘추가 연 것이다. 650년엔 당나라의 영휘(永徽) 연호를 채택했다. 이런 중국화 정책을 실현하는 것은 쉽지 않았겠지만 당을 안심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그리고 칠성우를 양신(良臣)으로 거느린 춘추의 리더십이 작동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청병과 문물 수용이 자주를 포기한 종속과는 엄연히 다른 것.
신라는 통일 이후 당군을 몰아낸다. 668년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고구려를 정복한 당나라 장군 이세적이 신라가 군사 기일을 어겼으므로 계책을 써서 다스린다거나, 또 왜국(倭國)을 친다고 핑계를 대면서 실은 신라를 칠 것이라는 것이었다.(『삼국사기』 7, 문무왕 11년)
그러나 문무왕은 668~676년 당과 9년 전쟁을 치르며 신라의 토지를 패강(浿江, 청천강)까지로 넓혔다. 필자는 그 전쟁에서 신라가 승리한 것은 고구려 을지문덕 장군이 수나라 양제의 대군을 물리친 것이나, 안시성 성주와 성민들이 단합해 당 태종의 공격을 물리친 것보다 역사적 의의가 크다고 본다. 고구려, 백제와 마찬가지지만 신라의 국력도 당에 비교할 상대가 안 됐기 때문이다.
태종무열대왕(춘추)과 문무왕은 대당 청병외교로 국가의 최우선 과제인 생존을 실현했고 당나라의 신라 지배 야욕을 물리쳤다. 나아가 중국화 정책으로 정치 · 사회 · 문화 등 다양한 면에서 신라 왕국을 새롭게 디자인했다. 신라의 현명한 두 국왕의 냉정한 판단이 나라를 살려내고 삼한통합을 이뤄 한국사의 물줄기를 고구려나 백제가 아니라 신라 중심으로 흘러가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6·25전쟁 이후 정전(停戰) 상태가 계속되는 지금, 춘추의 청병외교를 외세를 끌어들여 동족의 나라를 멸망시켰다고만 비난할 것인가. 오히려 남의 힘을 빌려 나라를 지켜내고 왕국을 국제화로 거듭나게 한 춘추의 판단에서 위기 관리의 역사적 교훈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 중앙선데이 | 이종욱 교수 | 제357호 | 2014.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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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유신의 영정. 그는 18세 화랑 때 열 살짜리 김춘추를 만나 즉각 주군임을 알아보고 모셨다. 아무리 고대 왕조시대였다 해도 꼬마였을 춘추의 재목을 한눈에 알아본 유신의 안목이 날카롭다. |
18세 김유신, 10세 김춘추에게서 왕의 자질을 보다 |
③ 춘추를 성군으로 만든 칠성우
나라의 흥망성쇠는 사람에게 달렸다. 『삼국사기』 12, ‘경명왕’ 조의 사론에 “『초서(楚書)』에 ‘초나라에는 보배로 삼는 것이 없고, 오직 선(善)한 이를 보배로 삼는다’고 했다”고 나온다. 춘추와 칠성우(七星友)를 가진 신라는 중흥(中興)의 열쇠를 준비했다.
『삼국유사』 2, ‘태종춘추공’ 조에는 태종무열대왕에 대해 “성 중의 물건 값은 베 한 필에 벼 30섬, 혹 50섬이었으니, 백성들은 성대(聖代)라 했다. 『화랑세기』 ‘18세 춘추공’ 조의 찬(贊)에는 “세상을 구제한 왕이고, 영걸한 군주이며…”로 이어지는 극찬이 나온다. 태종대왕(춘추)은 어떻게 이렇게 대단한 평을 받았을까?
태종대왕은 한국 역사상 누구보다 준비된 왕이었다. 최근 나타난 『화랑세기』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이다. 춘추는 제29대 왕(재위 654~661)으로 진지왕의 손자다. 『삼국사기』에는 이찬 용춘(또는 용수)과 진평왕의 딸 천명(天明) 부인의 아들로 되어 있지만 『화랑세기』에 새로운 내막이 나온다.
이에 따르면 춘추는 왕궁에서 출생했고 10년을 궁에서 살았다. 아버지 용수(龍樹)가 천명공주와 혼인해 진평왕의 맏사위가 되었기 때문이다. 579년에 왕위에 오른 진평왕에겐 두 동생 진정갈문왕과 진안갈문왕이 있었다. 그런데 삼형제에겐 아들이 없었다. 603년, 진평왕은 왕위 계승자를 정한다. 『화랑세기』 ‘13세 용춘공’ 조엔 “대왕(진평왕)은 적자가 없어 용수 전군(殿君, 후궁에게서 태어난 왕자)을 사위로 삼아 왕위를 물려주려 했다”고 나온다. 그해 춘추가 태어났고, 왕궁에는 오랜만에 사내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이모 선덕 공주는 춘추를 사랑했다.
궁에서 보낸 10년 … 자신감 · 당당함의 원천
아버지 용수가 진평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면 춘추는 자연스럽게 왕위를 계승한다. 춘추는 왕궁에서 10년간 미래 군주(君主)의 삶을 준비했다. 이 시기 춘추의 가슴속에는 제세(濟世), 즉 세상을 다스릴 군주로서의 자신감과 당당함이 자라났고 평생 지워질 수 없는 힘이 되었을 것이다. 이것이 후일 당 태종을 만나 당당함을 보여준 배경이기도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612년, 운명이 흔들렸다. 진평왕이 다른 선택을 했기 때문이다. 친자식인 선덕 공주가 자라자 용봉의 자태와 태양의 위용이 왕위를 이을 만했다. 그때 마야 황후(진평왕의 정부인)가 이미 죽었고 왕위를 이을 아들이 달리 없었다. 그러므로 (진평)대왕은 (천명) 공주(춘추의 어머니)에게 왕위를 양보하고 출궁하도록 권했다. 공주는 효심으로 순종하고 출궁했다(『화랑세기』 ‘13세 용춘공’). 이로써 용수와 천명 공주 그리고 춘추는 새로운 운명을 맞았다.
그런데 궁 밖에서 춘추는 삼한통합의 주역으로 잘 알려진 김유신을 만났다. 『화랑세기』 ‘15세 유신공’ 조에 “용춘공이 (김유신을) 사신(私臣)으로 발탁했다. 유신공은 은혜에 보답하기로 맹세하고 시석(矢石)을 피하지 않고 따랐다. 용수공(용춘의 형) 또한 그 아들(춘추)을 맡겼다. 유신공은 크게 기뻐하며 ‘우리 용수공의 아들(춘추)은 삼한지주(三韓之主)입니다”라고 한 것으로 나온다. ‘삼한지주’의 주(主)는 주인 또는 임금을 뜻한다. 김유신이 왜 춘추에 대해 이런 말을 했을까?
612년, 춘추는 10세, 김유신(595~673)은 18세였다. 요즘으로 따지면 초등학교 학생과 고등학교 학생 사이. 그런데 당시 진평왕을 중심으로 한 성골 집단에 권력을 이어갈 아들이 없다는 사실과 춘추가 성골왕과 가장 가까운 혈족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었다. 김유신은 춘추가 왕궁에서 태어나 왕이 될 훈련을 잘 받았고 성골들이 사라지면 춘추가 왕위계승의 영순위라는 사실을 주목했을 것이다.
이때부터 춘추와 김유신의 특별 관계가 발전했다. 김유신을 중심으로 한 칠성우가 춘추를 왕으로 세우기 위한 장기 프로젝트 가동에 들어간 것이다. 『화랑세기』에 “(풍월주, 우두머리 화랑) 18세(대) 춘추공은 우리 무열대왕이다. 얼굴이 백옥 같고 온화한 어투로 말을 잘했다. 커다란 뜻이 있고 말이 적었으며 행동이 치밀하고 법도가 있었다. 유신공이 (춘추를) 위대한 인물로 여겨 군(君)으로 받들고 있었지만 왕(춘추)이 겸양으로 부제(副弟)가 되었다. 유신공이 퇴위하였으나 보종과 염장공이 아직 있었기에 왕(춘추)이 양보하여 기다렸다”고 나온다.
이 관련 기록을 통해 세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 18세 유신이 스스로 신(臣)으로 자처하고 10살 춘추를 군(君)으로 받들어 군신(君臣)관계를 가졌다. 신라에서 왕이 아닌 사람의 신하는 사신(私臣)으로 불렸다. 유신을 포함한 칠성우는 사신(私臣)으로 있다. 654년 춘추가 왕이 된 후 신(臣), 즉 왕의 신하가 됐다.
둘째, 612년 화랑도의 우두머리 풍월주가 된 유신은 10세 춘추를 제2인자인 부제로 삼는 파격을 감행했다. 『화랑세기』, ‘15세 유신공’ 조에 “유신이 춘추에게 말하기를 바야흐로 왕자나 전군(殿君)이라도 낭도가 없으면 위엄을 세울 수가 없습니다”라고 나온다. 춘추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낭도의 교육과정을 배우고 또 추종 세력들을 거느리도록 배려한 것이다.
셋째, 풍월주의 지위는 부제에 넘기게 돼 있었으나, 춘추는 일단 보종공과 염장공에 양보하고 기다렸다가 626년 18세(대) 풍월주가 됐다. 춘추의 양보와 기다림을 통해 보종공과 염장공은 칠성우에 들어오게 됐다. 칠성우에는 유신공을 비롯해 모두 진골인 알천공·임종공·술종공·염장공·보종공이 있었다. 이들 칠성우가 아니었다면 춘추는 왕위에 오를 수 없었을 것이다.
| 이모로서 김춘추를 사랑했지만 한때나마 춘추의 대권을 방해했던 선덕여왕 |
칠성우들과는 인척 관계로 이어져
『삼국사기』 41, ‘김유신’ 전에 642년 춘추가 고구려에 청병하러 갈 때 춘추가 유신에게 “나는 공과 더불어 동체(同體)로 나라를 위하여 팔과 다리가 되었으니…” 라고 나온다. 춘추와 김유신을 포함한 칠성우는 한 몸이라 한 것이다. 그럼에도 춘추는 군(君), 칠성우는 신(臣) 또는 사신(私臣)이었음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춘추는 칠성우와 인척(姻戚) 관계를 맺었다. 널리 알려진 이야기 한 토막이 있다. 유신이 딸 문희를 춘추와 연결시킨 일이다. 그런데 춘추는 문희를 정궁(正宮)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정궁부인(正宮夫人)은 보종공의 딸 보라였기 때문이다. 보라는 아름다웠고 춘추와 잘 어울렸는데 딸 고타소를 낳아 춘추가 몹시 사랑했다.(『화랑세기』 ‘18세 춘추공’). 춘추와 보라 사이에 출생한 딸이 642년 대야성에서 죽은 고타소였다. 그래서 후일 보라가 아이를 낳다 죽은 뒤에야 문희가 정궁이 될 수 있었다. 칠성우 사이에 얽히고 설킨 중복된 혼인관계가 이들을 하나로 묶는 장치가 됐다.
칠성우는 능력을 달리하며 춘추를 도왔다. 그중 염장공. 『화랑세기』 ‘17 염장공’ 조에 “선덕(여왕)이 즉위하자 조부(調府· 조세 거두는 관부)에 들어가 영(令)이 되어 유신과 춘추 양공에게 재물을 공급하여 주었고 자신도 부를 쌓았다”고 한다. 오늘날 잣대론 문제겠지만 그런 게 허용됐던 당시 염장공은 왕위 계승 프로젝트에 실탄을 공급한 것이다.
칠성우는 춘추의 마음도 헤아렸다. 춘추가 당 태종을 만나러 갔을 때 압량주의 군주가 된 김유신은 전투에서 백제 장군 여덟 명을 사로잡고 1000명을 죽였다. 김유신은 사자를 보내 백제 장군에게 “우리 군주(주의 장관) 품석과 그 아내 김씨의 뼈가 그대 나라 옥중에 묻혀 있다… 이제 그대는 품석과 그 아내, 두 사람의 뼈를 보내어 산 여덟 사람과 바꾸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라고 했다. 백제는 품석 부부의 뼈를 널에 넣어 신라로 보냈다. 김유신은 백제 여덟 사람을 살려 돌려보냈다(『삼국사기』 41, ‘김유신’).
648년 당나라에 가서 당 태종을 만난 춘추는 동궁(東宮)으로 나온다(『삼국유사』 1, ‘태종춘추공’). 왕위 계승자를 의미하는 ‘동궁’이란 지위는 칠성우 때문에 가능했다.
진덕여왕의 즉위는 춘추를 왕위 계승권자로 만들었다. 647년 1월 비담의 난을 칠성우들이 단결해 진압하고 진덕여왕을 세운 후 왕정을 장악했다. 진덕여왕 즉위 직후 알천이 상대등(국무총리)으로 됐다. 그는 김유신과 함께 춘추를 왕으로 세우는 주역이 되었다. 임종공은 국력을 강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실천한 인물이다. 보종공은 화랑도가 받아들이고 있던 신선(神仙) 사상에 정통했으며 의술에도 탁월하여 김유신 등의 병을 고치기도 했다.
칠성우의 아들들도 춘추를 위하여 활동했다. 651년 왕정을 총괄하는 관부로 설치된 집사부(執事部)의 장관인 중시(中侍)는 술종공의 아들 죽지(竹旨)였다. 칠성우의 아들이 행정 관서를 총괄한 것이다. 그런가 하면 후에 자장(慈藏) 율사로 불리게 된 호림공의 아들은 643년 당나라에서 돌아와 이웃 나라의 침해를 진압할 수 있다고 하여 황룡사 9층탑을 세우도록 건의했으며 탑은 645년 완공됐다. 그 자신은 황룡사 2대 주지가 되었다(『삼국유사』 3, ‘황룡사 9층탑’). 칠성우들은 대를 이어 다양한 면에서 최고의 정치세력으로 활동한 것이다.
647년 선덕여왕이 세상을 떠나기까지 춘추와 칠성우는 양보하고 기다리며 준비했다. 654년 3월 진덕여왕이 세상을 떠나고 이루어진 춘추의 왕위 계승은 칠성우를 양신으로 만들었고, 태종대왕은 성군의 칭호를 갖게 됐으며 신라는 중흥의 길에 들어섰다. 준비된 자만이 미래를 개척하듯 준비된 왕 춘추는 신라 대평화의 시대를 열었다.
- 중앙선데이 | 이종욱 교수 | 제358호 | 2014.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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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제의 세 충신, 성충 · 흥수 · 계백을 모신 사당. 모두 의자왕 시절 신라 · 당 연합군의 공격을 예견했거나 맞아 싸운 대신들이다. 그런데 의자왕이 사치와 방탕에 빠지지 않고 그들의 충간을 들었다면 세 사람은 충신이 아니라 양신(良臣)이 되지 않았겠는가. [사진 권태균] |
충신 많은 백제, 양신 많은 신라를 당할 수 없었다 |
④. 의자왕 덕에 탄생한 충신들
“8월 2일 큰 술자리를 벌여 장사(將士)를 위로했다. 문무왕(文武王)과 소정방 그리고 여러 장수는 마루 위에 앉고, 의자왕(義慈王)과 아들 융(隆)은 마루 밑에 앉혀 때로는 의자왕에게 술을 치게 하니 백제의 좌평 등 여러 신하들은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삼국사기』 5, 태종무열왕 7년)
660년 7월 18일 백제 의자왕이 항복한 후, 문무왕과 소정방이 사비성에서 벌인 승리의 잔치 장면이다. 그때 의자왕은 무엇을 생각했을까? 충신들의 말을 안 들었다는 회한에 목이 메지 않았을까?
백제 제30대 장왕(璋王, 600~641 재위, 시호 무왕)은 재위 33년(632) 1월 맏아들 의자를 태자로 삼았다. 태자인 의자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에게 우애가 있어 사람들은 그를 효성이 지극했던 공자의 제자 증자(曾者)에 빗대 해동증자로 불렀다. 641년 3월 장왕이 세상을 떠나고 의자가 왕이 됐다.
의자왕은 처음엔 당과의 관계를 잘 유지했고, 국내 정치에 힘을 쏟았으며 신라 정복도 활발하게 했다. 그런 사정은 『삼국사기』에 잘 나온다. “정월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했다. 642년 2월에 주·군을 순무한 왕이 죄수의 정상을 고려해 죽을 죄가 아니면 모두 용서했다. 7월에 왕이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를 공격해 미후성 등 40여 성을 함락시켰다.”(『삼국사기』 28, 의자왕 2년)
| 부여 능산리에 있는 의자왕의 묘. 당에 끌려가 거기서 죽은 왕의 혼만 이곳에 모셔져 있다. |
642년 8월에는 장군 윤충에게 군사 1만을 줘 신라의 대야성(大耶城)을 공격하게 했다. “성주 품석이 처자와 함께 나와 항복했는데, 윤충은 이들의 머리를 베고, 남녀 1만 명을 사로잡아 서쪽 주·현에 나누어 살게 하고 군사를 남겨 그 성을 지키게 했다. 왕은 윤충의 공을 표상하여 말 20필과 곡식 1000섬을 주었다.” (『삼국사기』 28, 의자왕 2년) 그때 머리가 베인 품석의 처 고타소(古陀炤)의 죽음은 삼국관계를 새 국면으로 몰고 간 사건이었다.
고타소를 누가, 어떻게 죽였는가보다 그가 백제 때문에 죽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장녀 고타소의 죽음을 접한 김춘추는 “대장부가 어찌 백제를 삼키지 못하랴”라고 했다. 복수심은 춘추의 아들 법민(法敏)에게도 이어졌다. 660년 7월 18일 웅진성으로 도망갔던 의자왕이 항복하기 전인 7월 13일, 백제 태자 부여륭이 사비성을 들어 신라 태자 법민 앞에 나와 항복을 했다. 법민은 부여륭을 꿇어앉히고 얼굴에 침을 뱉었다. “너의 아버지가 나의 누이를 부당하게 죽여 옥 안에 묻었다. 그로 인해 나로 하여금 20년간 슬프고 괴롭게 했다. 오늘 네 목숨은 내 손아귀에 있다.” (『삼국사기』 5, 태종무열왕 7년)
660년 8월 2일 승리의 잔치를 베풀 때 일이다.
“… 검일(黔日, 품석에게 아내를 빼앗겼던 대야성의 관리)을 잡아 죄를 일일이 들추어 말했다. 너는 대야성에 있으면서 모척(신라를 배반하여 백제로 갔던 자)과 모의했다. 백제 군사를 인도해 창고를 태워 없애 성중에 식량을 부족하게 하여 패전을 불러온 것이 첫째 죄다. 품석 부처를 핍박해 죽였으니 죄의 둘째고, 백제와 함께 본국을 쳤으니 죄의 셋째다. 팔다리를 찢어 시체를 강물에 던졌다.” (『삼국사기』 5, 태종무열왕 7년) 김춘추 일가는 고타소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했다. 백제를 삼키겠다는 사적 복수심은 백제의 멸망을 불러왔다.
의자왕은 재위 15년(655)까지는 왕정을 장악하고 정치를 잘했다. 특히 신라를 공격하는 데 성공적이었다. 655년 8월 의자왕은 고구려, 말갈과 함께 신라의 30여 성을 공파하였는데, 신라왕 김춘추가 사신을 보내 당나라에 조공하고 글을 올려 “백제가 고구려, 말갈과 함께 우리의 북쪽 경계를 침범하여 30여 성을 함락시켰다”(『삼국사기』 28, 의자왕 15년)고 했다.
그런 그가 변했다. 656년에 벌어진 일이다. “봄 3월 왕이 주색에 빠져 마음껏 즐기고 술 마시기를 그치지 않았으므로 좌평(佐平) 성충(成忠)이 극력 간하였는데 왕이 노해 성충을 옥에 가두었다… 성충은 몸이 여위어 죽게 되었는데 죽을 때 글을 올려 말했다. ‘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아니하오니, 한 말씀 드리고 죽을까 합니다. 제가 늘 시세의 변화를 살펴보건대 반드시 전쟁이 있을 듯합니다. 대개 군사를 부림에 있어서는 반드시 그 지세를 잘 가려야 되는 것이니, 상류에 머물면서 적병을 대적하면 능히 보전할 수 있습니다. 만약 다른 나라 군대가 오거든 육로로는 침현(沈峴)을 넘어서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伎伐浦)의 언덕에 들어오지 못하게 할 것이며, 험한 곳에 웅거하여 적병을 막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왕은 그 말의 뜻을 알지 못했다.” (『삼국사기』 28, 의자왕 16년)
충신(忠臣)이란 무엇인가. 나라와 임금을 위하여 충성을 다하는 신하다. 그런데 임금이 나라를 위하지 못하면 어쩌는가. 목숨 걸고 바른말을 해야 한다. 의자왕은 충신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당 고종이 소정방에게 군사 13만을 거느리고 백제를 치게 했고, 신라 태종무열대왕은 김유신에게 5만 병력을 거느리고 백제를 치게 했을 때, 의자왕은 군신(群臣)을 모아 물었다. 먼저 좌평 의직(義直)이 진언하기를 “당나라 군사는 멀리 바다를 건너왔으므로 … 먼저 당나라 군사와 결전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에 대해 달솔 상영 등이 “아닙니다. 당나라 군사는 먼 곳에서 왔으므로 속히 싸우려 할 것이고 … 신라 군사는 우리 군사에게 여러 번 패전했으므로 … 먼저 일부대의 군사로써 신라군을 쳐서 그 예기를 꺾은 후 편의를 엿보아 합세해서 싸운다면 군사를 한 사람도 죽이지 않고 나라를 보전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왕은 망설이며 어찌할 줄 몰랐다.(『삼국사기』 28, 의자왕 20년)
이때 귀양 가 있던 흥수(興首)에게 사람을 보내 물었다. 흥수는 “백강(白江)과 탄현(炭峴)은 우리나라의 요충입니다. … 당나라 군사는 백강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신라 군사는 탄현을 지나지 못하게 하시고, 대왕께서는 성문을 닫고 지키다가 그들이 식량이 떨어져서 사졸들이 피로해지기를 기다린 후에 이를 급히 친다면 반드시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에 대신들이 “흥수는 죄를 지어 귀양 중에 있으므로 임금을 원망하고 애국(愛國) 하지 않을 것이오니 그 말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라고 왕이 그렇게 여겼는데, 당나라와 신라의 군사가 백강과 탄현을 지났다는 말을 듣고, 계백을 보내 황산(黃山)에 나가 싸우도록 했다.(『삼국사기』 28, 의자왕 20)
660년 7월 9일 신라의 태자 법민과 김유신 등 장군들이 거느린 5만의 신라군과 맞서 싸운 것은 계백 장군이 거느린 백제의 사사(死士) 즉 결사대 5000명이었다. 결투에 앞서 계백은 “나의 처자들이 잡혀서 노비가 될까 염려되니, 그들이 살아서 욕보는 것보다 죽는 것이 마음 편하다”며 처자를 다 죽이고 말았다. 황산벌에서 백제군은 힘을 다해 최후까지 싸웠는데 한 사람이 천 명을 당해내지 않은 이가 없었다. 이 같이 진퇴를 네 번이나 했는데 마침내 힘이 모자라 모두 전사했다.(『삼국사기』 47, 『계백』)
의자왕이 성충 간언의 의미를 깨닫게 된 것은 660년 7월 당나라와 신라의 군대가 사비성을 공격해올 때였다. 의자왕은 탄식하여 말하기를 “성충의 말을 시행하지 않다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을 뉘우친다”고 했다.(『삼국사기』 28, 의자왕 20년)
의자왕이 성충이나 의직, 흥수의 말을 들었다면 백제는 멸망으로 몰려가지 않았을 수도 있었고, 그러면 성충 등은 충신이 아니라 양신(良臣)이 되었을 것이다. 의자왕 때문에 충신이 된 것이다. 양신과 충신은 동전의 양면. 잘못된 리더의 잘못된 행동이 양신으로 하여금 충신의 길을 걷게 만든 것이다. 당 태종에게 “충신이 아니라 양신이 되게 해 달라”고 한 위징의 ‘충신론’의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1회) 의자왕 때문에 충신이 된 성충·의직·흥수 그리고 계백은 모두 죽고, 의자왕은 나라를 멸망으로 몰아간 대악에 빠졌고, 집과 국가는 모두 사라져 백제(百濟)라는 이름만 남게 된 것이다.
부여에 있는 백제탑인 정림사지 5층 탑에 『대당평백제비명(大唐平百濟碑銘) 』 이라는 명문과 함께 660년 당 고종(高宗)이 태종무열대왕과 동맹하여 백제를 토파(討破)한 내용을 기록한 글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비문에는 소정방, 김인문, 유인원 등 여러 명의 공을 기록하고 있다.
660년 9월 3일 소정방이 의자왕과 왕족, 신료 93명, 백성 1만2000여 명을 데리고 사비에서 배를 타고 당나라로 돌아갔다.(『삼국사기』 5, 태종무열왕 7년) 소정방은 모든 포로를 이끌고 당 고종을 알현하니, 당 고종은 조서를 내려 죽이지 말고 놓아주라 명했다.(『당서』 220, 『백제』) 의자왕은 당나라 서울에 간 지 며칠 안 되어 세상을 떠났는데, 구신(舊臣, 백제에서 함께 잡혀간 신하들)의 곡(哭)을 허락하고, 묘를 만들어주고 비석도 세우게 해주었다.(『구당서』 199상, 『백제』) 의자왕은 시호도 가질 수 없었다. 의자왕의 아들로서 한때 백제 태자였던 부여륭은 682년에 세상을 떠나 낙양 북망(北茫)에 묻혔다.(『부여륭 묘지명』) 이로써 백제 왕실도 사라졌다.
642년 고타소의 죽음으로 맺어진 백제의 의자왕과 신라의 춘추(태종대왕)의 악연(惡緣), 두 군주의 서로 다른 판단력과 통치력, 두 군주가 만든 충신과 양신. 그리고 그 결과로 역사는 엇갈린 두 나라의 운명을 보여준다.
- 중앙선데이 | 이종욱 교수 | 제360호 | 2014.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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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수왕이 427년 평양으로 도읍을 옮길 때까지 425년간 고구려의 중심지였던 국내성 서문. 장수왕이 수도를 옮길 때 연개소문에 이르러 고구려의 목숨이 끊어지게 될 것임을 짐작이라도 했을까. [사진 권태균] |
후대에 영웅 대접 연개소문, 당대엔 잔인한 권력자 |
⑤ 연개소문의 두 얼굴
668년 9월 연개소문(淵蓋蘇文)의 큰아들 남생(男生)이 당나라군의 길잡이인 향도가 되어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보장왕을 포로로 하는 공을 세웠다. 그 때문에 그해 12월 당 고종(高宗)이 보장왕 등에게 벼슬을 줄 때 남생은 향도(鄕導)한 공이 있다고 했다(『구당서』 199상, ‘고려’). 남생은 연개소문이 죽은 후 정권쟁탈전에서 밀려 당나라에 몸을 의탁한 것이다.
『삼국사기』 49, 『개소문(蓋蘇文)』편엔 연개소문의 삶과 정치에 대한 평가가 압축적으로 표현돼 있다.
“개소문의 성은 연(燕)씨다. 그는 스스로 물에서 났다고 하여 뭇 사람들을 미혹시켰는데, 의표가 씩씩하고 뛰어났으며, 의기가 장하여 작은 일에는 구애받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 동부 대인인 대대로가 죽자 개소문이 마땅히 그 뒤를 이어야 했으나 국인(國人)들이 그의 성품이 잔인하고 포악하여 그를 미워하였기에 뒤를 잇지 못했다. 개소문이 머리를 굽혀 절하고 사과하면서 관직을 이어받기를 청하고 만약 잘못이 생기면 비록 폐하더라도 후회하지 않겠다고 하자, 여러 사람들이 그를 가엾게 여겨 마침내 지위를 이어받도록 허락했다.
그러나 (연개소문이) 흉악하고 잔인함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여서 여러 대인들이 (영류)왕과 비밀히 의논하여 개소문을 죽이려 하였는데, 일이 누설되었다. 개소문은 그의 부(동부)의 군사를 다 모아 사열하는 것처럼 하고, 아울러 성 남쪽에 술과 음식을 성대히 준비하여 여러 대신을 함께 와서 보도록 했다. 초대된 손님들이 이르자 이들을 모두 죽였으니, 무릇 100여 명이나 되었다. 곧 달려가 궁궐로 들어가서 왕을 죽여 몸을 잘라 몇 동강을 내어 구렁에 버렸다. 그는 왕의 아우의 아들 장(臧)을 세워 왕으로 삼고 스스로 막리지(莫離支)가 되어 … 원근을 호령하여 국사(國事)를 전제(專制)했다. 그는 매우 위엄이 있었으며 몸에는 칼 다섯 자루를 차고 다녔고 좌우의 사람이 감히 쳐다보지 못했다. 매양 말을 타고 내릴 때에는 항상 귀인과 무장들을 땅에 엎드리게 하여 이를 밟고 오르내렸다. 밖으로 나갈 때에는 반드시 대오를 정렬시키게 하고 앞에서 인도하는 사람이 큰 소리로 외치면 사람들은 모두 달아나서 구덩이나 골짜기를 가리지 않고 숨어야 했으니, 국인이 심히 괴롭게 여겼다.”
| 낙양 근교에 있는 연개소문의 아들 남생의 묘지석 앞 · 뒷면 |
당 태종, 영류왕 사망 소식에 조문 사절
후대에 연개소문은 영웅이다. 그러나 당대 인식은 달랐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영류왕과 대인들이 연개소문이 흉악하고 잔인하여 죽이려 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연개소문은 정변을 일으켜 고구려 5부 중 4부의 지배세력을 모두 죽였다. 나라를 이끌 인재 풀을 괴멸시켰다. 거기에 더하여 백성들에게 포악하여 나라의 운명을 재촉했다.
주목할 사실이 있다. 당 태종이 이세적(고구려 침공 총사령관)에게 “내가 들으니 안시성은 험하고 군사가 강하며, 성주는 재주와 용기가 있어 막리지(연개소문)의 난에도 성을 지켜 복종하지 않아 막리지가 이를 쳤으나 능히 함락하지 못하였으므로 그대로 성을 주었다고 하오”라 한 말이다 (『삼국사기』 21, 보장왕 4년). 같은 이야기가 『당서』220, ‘고려전’에도 나온다.
당 태종의 말만으론 연개소문이 언제 안시성을 공격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642년 10월 영류왕을 죽이고 권력을 쥔 뒤부터 645년 8월 당 태종이 안시성을 공격하기 전일 것이다. 연개소문이 정권을 장악한 후 안시성을 제압하러 갔으나 실패하고 성주에게 성을 그대로 장악하도록 했다. 그렇다면 다른 성들은 어땠을까? 고구려의 모든 성들이 안시성과 같이 쿠데타를 일으킨 연개소문에 맞선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연개소문이 지방의 성들을 완전 장악하지 못한 것도 분명하다.
당 태종은 영류왕 사망 소식을 듣고 슬퍼하며 사자를 통해 조문하고 제사를 지내게 했다. 그리고 644년 고구려에 신라와 잘 지낼 것을 권하고 “신라를 공격하면 내년에 고구려를 칠 것”이라 했다. 그런데 연개소문은 대당 강경책을 폈다. 이에 당 태종이 신하들에게 “대개 군사를 일으켜 백성을 위로하고 죄인을 친다는 것은 모름지기 명분이 있어야 하는데, 그(연개소문)는 임금을 시해하고 아랫사람을 학살한 구실을 내세운다면 무너뜨리기가 매우 쉬울 것”이라 했다(『구당서』 199, ‘고려’). 당 태종은 많은 준비를 하고 고구려 침공에 나섰다. 645년 4월 이적(이세적)의 군대가 요하(遼河)를 건너 개모성을 함락하고, 5월 16일 당 태종과 합세해 요동성을 함락하고 요주로 삼았다. 5월 28일 백암성을 공략해 6월 항복을 받았다. 당 태종이 안시성을 공격할 때, 북부 욕살(褥薩, 지방장관) 고연수와 남부 욕살 고혜진이 고구려와 말갈병(靺鞨兵) 15만 명을 거느리고 안시성을 구원하러 나섰다. 기록엔 ‘연개소문이 자신에게 항복하지 않은 안시성을 구원해주러 군대를 보냈다’고 했지만 실제론 당 태종의 야욕을 물리치려고 군대를 보낸 것이다. 그런데 이들 구원병은 패했고 고연수와 고혜진은 당 태종에게 항복했다. 당 태종은 욕살 이하 3500명을 가려 당나라 군직(軍職)을 주어 내지(內地, 당나라)로 옮겼고, 말갈인 3300명은 구덩이를 파서 묻고, 나머지는 평양으로 돌려보냈다(『구당서』 199, ‘고려’).
우리가 아는 개소문, 역사 기록과 달라
8월에 군영을 옮겨 안시성을 공격했는데, 성민이 당 태종의 깃발을 볼 때마다 반드시 성에 올라 북을 치며 저항을 했다. 이를 보고 당 태종이 노여워하자 이적이 “성을 함락하는 날 남자는 다 죽여 버리십시오” 했다(『구당서』 199, ‘고려’). 성안 사람들이 이를 알고 죽음을 무릅쓰고 싸웠다. 안시성 전투를 여기서 이야기하지는 않겠다. 당 태종은 군량이 동나고 사졸들이 추위와 동상에 시달리게 되자 철군을 명했다. 당나라 군대가 성을 지날 때 성안에서는 소리를 죽이고 깃발을 누인 채 성주가 성 위에 올라 손을 모아 절을 하며 하직을 했다. 당 태종은 그들이 성을 굳게 지킨 것을 가상히 여겨 비단 100필을 주고 임금을 섬기는 절개를 격려했다고 한다(『구당서』 199, ‘고려’). 무섭게 전투를 벌이던 안시성주와 당 태종이 서로에게 예를 표한 것이다. 그때 안시성을 지킨 것은 보장왕이나 연개소문이 아니라, 안시성의 성주와 성민이었다.
연개소문이 전제(專制)하던 고구려는 기본적으로 당나라에 강경 정책을 폈다. 649년 당 태종이 죽으며 고구려와의 전쟁을 그만두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러나 전쟁은 계속됐다. 연개소문의 고구려는 당나라와 평화롭게 지내지 못했다. 연개소문과 그 일족은 고구려를 멸망으로 몰아갔다.
연개소문은 쿠데타에 성공했으나 왕국 전체의 세력들을 장악하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국사를 전제하다가 666년 죽었다. 이후 668년 고구려가 망할 때까지 연개소문의 아들인 남생 · 남건 · 남산 사이에 정권쟁탈전이 벌어졌다. 얼마나 숨가쁘게 망해가는지를 『삼국사기』 22는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먼저 맏아들 남생이 아버지를 대신해 막리지가 됐다. 남생이 여러 성을 순시하러 나가자 두 동생이 왕명으로 불렀다. 자신을 제거하려는 것을 안 남생은 돌아가지 못했다. 그러자 남건이 스스로 막리지가 되었다. 남생은 국내성에 웅거하고 그 아들 헌성을 당나라에 보내 목숨을 구걸했다. 6월 남생은 당나라로 도망갔다. 8월 보장왕은 남건을 막리지로 삼아 내외 병마사를 맡도록 했다. 9월에 당 황제가 남생을 요동도독에 임명하고 평양도 안무대사를 겸하게 하고 현도군공을 봉했다. 12월에는 연정토가 12성, 763호, 3543명을 이끌고 신라에 항복했다(『삼국사기』 6, 문무왕 6년). 667년 9월에 이적이 신성(新城)을 공격하자 성 사람들이 성주를 묶고 항복했다. 이적의 군대가 진격하니 16성이 모두 항복했다. 연개소문이 죽은 후 고구려의 여러 성들이 당나라와 신라로 넘어가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668년 2월 이적 · 설인귀 등이 고구려의 부여성을 빼앗았다. 그렇게 되자 부여천(夫餘川) 안의 40여 성이 모두 항복했다. 9월 21일 보장왕은 남산을 보내 이적에 항복했다. 남건이 성문을 닫고 싸웠으나, 5일 만에 승려 신성(信誠)이 성문을 열어놓자 당군이 들어갔다. 남건은 스스로 목을 찔렀으나 죽지 않았다. 고구려의 항복을 받은 이적은 보장왕과 왕자 복남 · 덕남 및 대신 등 20만 명을 이끌고 당나라로 돌아갔다 (『삼국사기』 6, 문무왕 8년).
이로써 보장왕의 일족들과 연개소문의 아들들도 당나라에 무덤을 만들게 되었다. 『당서』 220, ‘고려전’에 “보장은 영순 초에 죽으니 위위경(衛尉卿, 임금을 호위하는 벼슬)을 추증하고, 힐리(힐利, 당에 포로가 된 동돌궐의 군장)의 묘 왼쪽에 장사 지내고 비석을 세워주었다. (고구려의) 옛 성(城)들은 왕왕 신라로 편입되었고, 유민들은 흩어져 돌궐(突厥)과 말갈(靺鞨)로 달아났다. 이로써 고씨(高氏) 군장은 다 끊겼다” 라 나온다. 역신(逆臣) 연개소문 일족이 고구려 왕실, 나아가 고구려인 자체를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게 만든 것이다.
앞에서 그동안 은폐돼온 사료(史料)를 통해 연개소문의 정체를 드러냈다. 이는 지난 100여 년 동안 만들어진 연개소문 상과는 다르다. 이제 642년에 만났던 두 사람, 즉 양신을 거느렸던 신라의 춘추(태종대왕)와 역신인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한국사에 남긴 역사의 발자취를 옳게 이야기할 때가 됐다. 신라의 춘추(태종대왕)가 외세(당나라)를 끌어들여 동족의 나라인 고구려를 멸망시켰기 때문이 아니라 연개소문과 그 일족이 고구려를 멸망으로 몰아갔기에, 한국사의 무대가 패강(浿江, 청천강) 이남으로 위축됐다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 중앙선데이 | 이종욱 교수 | 제362호 | 2014.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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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라통일 후 백제·고구려인은 하층민이 됐다. 신라인은 각종 논공행상으로 부유층이 됐다. 성주사의 낭혜화상탑은 통일 후 김인문이 받은 봉토가 200년 동안 후손들에게 어떻게 세습됐는지를 알려준다 [사진 권태균] |
국경 허문 신라, 피정복민 통합정책 대신 극심한 차별 |
⑥ 통일신라의 논공행상
신라의 삼한통합은 한국사의 진로를 신라 중심으로 이끌었다. 통일 신라에는 중요한 두 과제가 놓였다. 하나는 백제·고구려 피정복민을 신라인으로 편제하는 인사정책. 다른 하나는 삼한통합에 동원된 신라인들에 대한 논공행상이었다.
태종무열대왕 7년(660년) 11월 22일 통일신라의 논공행상이 있었다. 백제를 정벌하고 온 뒤였다. 백제인들이 재능에 따라 임용됐다. 좌평(佐平, 백제의 1등 관위) 충상과 상영 그리고 달솔(達率, 백제의 2등 관위) 자간에겐 일길찬(신라의 7등 관위)을 주어 총관으로 삼았다. 충상과 상영은 660년 7월 9일 황산벌 전투에서 포로가 되었던 사람들이다(『삼국사기』 7, 태종무열대왕 7년). 그중 충상은 648년 백제로 가져갔던 품석과 고타소의 뼈와 백제 비장 여덟 명을 바꾸도록 의자왕에게 말한 사람이었다(『삼국사기』 41, 김유신 상). 상영은 660년 7월 신라와 당나라의 대군이 백제를 침공할 때 충신인 좌평 의직의 진언을 반대하였던 인물이다. 은솔 무수는 대나마(신라의 10등 관위)를 주어 대감으로 삼고 은솔 인수는 대나마를 주어 제감으로 삼았다(『삼국사기』 5, 태종무열왕 7년). 고구려인도 관직을 받았다. 문무왕 때인 670년 8월 1일 연정토의 아들 안승은 고구려왕이 됐고 이어 674년 9월 보덕왕이 됐다. 680년 3월 문무왕은 안승에게 누이동생(혹은 김의관의 딸)을 아내로 삼게 했다. 신문왕 3년(683년) 10월 안승을 불러 소판으로 삼고 김씨 성을 주어 서울에 머물게 하고 훌륭한 집과 좋은 땅을 주었다. 고구려인 중 안승은 특별히 진골 대우를 한 것이다.
그러나 안승과 충상 · 상여 같은 사례는 극히 드물다. 신라 왕경인(신라의 서울인 지금의 경주 사람들. 당시에는 대경 · 왕경으로 부름)으로 편입된 고구려인의 수는 많지 않았다. 안승의 후손들은 시간이 지나며 도태되어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백제 출신으로 관직을 받은 이들은 어떤 면에서 백제의 멸망을 도운 사람들이다. 실제로 피정복민으로서 왕경인이 되어 대우를 받은 이들은 신라를 위해 간첩활동을 하는 등의 공이 있었던 소수일 뿐이다.
| 삼국의 언어는 같았다. 그러나 사는 모습은 너무 달랐다. 공통성은 없었다. 다른 형식의 무덤이 그 한 예다. 왼쪽부터 신라의 대능원, 공주 무령왕릉 내부(백제), 지안 환도산성 아래 떼무덤(고구려). |
같은 말 쓰는 동족이지만 신라인만 특권
고구려 · 백제 · 신라 사람들을 동족(同族) 또는 단일민족으로 보는 한국인들은 신라가 피정복국 사람을 잘 대우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삼국 관계는 특별한 면이 있었다. “고구려 · 백제 · 신라 · 물길을 포함한 동이(東夷) 중 말갈(靺鞨)이라고 부르는 물길(勿吉)의 언어는 홀로 다르다” (『북사』 94, 물길)고 한 것을 보아 삼국인은 말이 통했던 하나의 종족(種族)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왕의 호칭, 정치조직, 신분제도 등 모든 면이 달랐다. 또 5~6세기께 축조된 고구려의 장군총, 백제의 무령왕릉, 신라의 천마총이나 황남대총은 구조가 달랐다. 사실 삼국은 초기국가 형성 때부터 독립국이었고 하나로 뭉친 적이 없어 정치 · 사회 · 문화 등 모든 면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신라의 삼한통합을 통해 비로소 신라 중심의 국가로 통합되었다.
정복자인 신라인들은 피정복민을 무섭게 차별화했다. 신라인은 우대해 정복자로서의 특권을 누리게 했다.
먼저 백제인과 고구려인을 차등화해 신라인으로 만드는 작업을 보자. 신라는 그들을 동등하게 대했을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우선 백제와 고구려의 지배세력들. 백제와 고구려의 왕과 그 일족 그리고 대신들은 신라인으로 삼을 수 없었다. 태종대왕이 보낸 5만 신라군과 당 고종이 보낸 13만 당군이 660년 7월 백제를 멸망시켰던 그해 9월 당나라 장수 소정방은 의자왕과 왕족, 신하들 93명과 백성 1만2000명을 배에 태워 당나라로 돌아갔다 (『삼국사기』 5, 태종무열대왕 5년). 668년 이적이 거느린 당나라 군사와 신라군이 평양을 포위하자 고구려왕은 항복했다. 이적은 보장왕과 왕자 복남과 덕남 등 대신과 20여만 명을 이끌고 당나라로 돌아갔다(『삼국사기』 6, 문무왕 8년). 그 때문에 두 피정복국의 왕과 그 일족, 고위 신료들과 많은 백성은 당나라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그럼 포로는? 668년 문무왕은 고구려인 포로 7000명을 왕경으로 끌고 왔고, 문무 신료들을 거느리고 선조의 묘에서 제사를 지냈다 (『삼국사기』 6, 문무왕 8년). 포로들의 운명에 대해 『삼국사기』에 나오는 구서당(九誓幢)은 실마리를 준다. 구서당의 아홉 군단 중 세 번째인 백금서당은 문무왕 12년(672) 백제민, 다섯째인 황금서당은 신문왕 3년(683) 고구려민, 여섯째인 흑금서당은 말갈국민(靺鞨國民), 일곱째인 벽금서당과 여덟째인 적금서당은 보덕성민, 아홉째인 청금서당은 백제 잔민(殘民)으로 당(幢, 부대)을 이룬 것으로 나온다(『삼국사기』 40, 무관). 문무왕의 7000포로는 지배세력들의 노비로 나눠주거나 후일 구서당과 같은 부대의 병사로 편입한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안승은 진골, 충상과 상영은 골품제의 6두품 대우를 받았지만 구서당에 편입된 피정복민들은 평인(백성)이거나 하급 두품 신분을 가진 정도였다.
정복된 백제·고구려 옛땅에 사는 피정복민은 말하자면 면장 정도로 대우했다. 정복된 땅을 지방행정조직으로 새로 편제해 주군현(州郡縣)의 지방관인 총관(도독)·태수·현령에는 기본적으로 신라인을 임명했다. 그리고 그 밑 행정촌(현재의 ‘면’에 해당, 장은 5두품 대우를 받던 진촌주)과 자연촌(현재의 ‘이’에 해당, 장은 4두품 대우를 받던 차촌주)에는 피정복민을 촌주로 임명했다. 면장쯤으로 임명한 피정복민을 통해 통치 효율을 기할 수 있었다. 게다가 말도 같아 신라인들은 통치하기도 쉽고 더 강력하게 다룰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백제·고구려인들은 과거의 영광도 잃고 사회·정치적으로 도태돼 갔다.
반면 삼한통합 전쟁에 공을 세운 신라인은 산 자와 죽은 자 모두에 걸쳐 광범위하게 논공행상을 했다. 원조 신라인들의 지위는 한층 높아졌다.
고구려 · 백제인은 하층 신분에 편제
668년 9월 21일 고구려를 평정한 뒤 10월 22일 김유신에게 태대각간(太大角干)을 내렸고 김인문에게 대각간(大角干)의 관위를 내렸고, 그 밖의 이찬으로서 장군이 된 사람들에게는 각간(角干)을 주고, 소판 이하는 모두 관위를 1등급씩 올려주었다 (『삼국사기』 7, 문무왕 8년). 김유신에겐 660년 백제 평정 뒤 대각간을 내렸었다(『삼국사기』 38, 잡지 7).
관위(官位)에 따라 토지도 줬다. 669년에 문무왕은 전국의 마거(馬?) 174곳을 아홉 구분해 나눠 주었는데 내성(內省, 왕궁의 일을 담당)에 22곳, 관부(왕정을 담당하던 관청)에 10곳, 태대각간 유신에게 6곳, 대각간 인문에게 5곳, 각간 7인에게 각 3곳, 이찬 5인에게 각 2곳, 소판 4인에게 각 2곳, 파진찬 6인과 대아찬 12인에게 각 1곳을 주고 이하 74곳은 편의에 따라 나누어주었다 (『삼국사기』 7, 문무왕 9년). 이런 토지는 세습됐다.
성주사 ‘낭혜화상탑비(朗慧和尙塔碑)’에서 그런 사정을 알 수 있다. 태종무열대왕은 낭혜화상 무염(無染·800~888)의 8대조다. 낭혜화상은 845년에 당나라에서 귀국한 후 성주사에 머물렀는데, 성주사는 김흔(金昕)의 조상인 임해공(김인문)의 수봉지소(受封之所, 봉토로 받은 곳)에 세워진 절이다. 탑비의 기록을 보면 삼한통합의 공으로 김인문 등이 받았던 토지가 거의 200년간 여러 대에 걸쳐 그의 후손에게 세습된 것을 볼 수 있다. 삼한통합에서 공을 세운 신라인의 후손이 번성한 이유가 여기에도 있다.
668년 9월 고구려를 정복했을 때 신라의 병사들이 모두 말하기를 “정벌을 시작한 지 9년이 지나 인력이 모두 다하였는데 마침내 두 나라를 평정하여 여러 대의 오랜 바람을 오늘에야 이루게 되었다. 반드시 나라에서는 충성을 다한 인정을 받아야 하고, 우리 군사들은 힘을 바친 상(賞)을 받아야만 할 것이다”라 했다(『삼국사기』 7, 문무왕 11년 조). 참전병사에겐 고구려 평정 후 관위를 1등급씩 올려주었다(『삼국사기』 7, 문무왕 8년). 관위가 오르면 보수가 늘어났고 신라인들의 생활은 한층 여유가 생겼다.
전쟁에서 죽은 자에게도 논공행상이 이뤄졌다. 669년 2월 21일 내린 교(敎)에 “지금 두 적(백제·고구려)이 이미 평정되었고, 사방이 안정되어 태평하다. 전쟁에 나아가 공을 세운 사람에게는 다 같이 이미 상을 주었고, 전쟁에서 죽어 혼령이 된 이에게는 명복을 빌 비용을 추증해 주었다”고 나오는 것으로 그러한 사정을 알 수 있다(『삼국사기』 7, 문무왕 9년).
신라인들은 옛 백제인과 고구려인에게 빚이 없었다. 신라인들은 피정복민을 차별화하고 도태시키는 정책을 율령으로 만들어 펼쳤다. 당시 이루어진 논공행상은 삼한통합을 이룬 신라인 그들의 잔치였다. 옛 백제인과 고구려인들은 그 잔치에 끼어들 틈이 없었고, 기본적으로 하층 신분으로 편제돼 한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 중앙선데이 | 이종욱 교수 | 제364호 | 2014.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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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일신라의 성(姓)은 이후 한국인 성의 주류가 됐다. 소위 이·정·손·최·배·설의 6부성과 왕을 배출한 박·석·김이다. 『삼국사기』 엔 석씨와 관련, “탈해가 왕위에 오를 때 나이가 62살이었는데 성은 석(昔)이고 왕비는 아효부인”이라고 나온다. 사진은 석탈해 왕릉. [사진 권태균] |
고구려 · 백제 고유 성씨, 망국과 함께 점차 사라져 |
⑦ 통일신라의 차별정책
삼한통합은 여러 갈래로 전개될 수 있던 한국사의 방향을 하나의 길로 이끈 한국사상 가장 커다란 역사적 사건이다. 삼한통합을 통해 백제·고구려 오리진이 아닌 신라 오리진의 한국·한국인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고려묘지명집성』(제3판, 김용선 편저, 2001)에는 고려인 317명의 묘지명이 수록되어 있다. 그중 백제인·고구려인을 시조로 하는 이름은 없다. 대신 신라인을 조상으로 하는 이름은 다수다. 박씨나 김씨의 시조 탄생신화나 이씨의 시조 알평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고려 충숙왕 12년(1325)에 사망한 박전지(朴全之) 묘지명에는 “가계는 죽주(竹州)에서 나왔고, 그 선조는 신라 시조인 박혁거세로 자줏빛 알에서 태어났다. 그 알이 박(瓠)과 같았으며 하늘에서 내려왔는데, 향인들이 박(瓠)을 박(朴)이라 하였기에 성을 박이라 하고, 그 능을 봉하여 천흥(天興)이라 했다. 군(君, 박전지)은 자(혁거세)의 계통을 이은 삼한벽상공신 박기오의 13세손이다”고 나온다.
김봉모(金鳳毛) 묘지명에는 ‘김씨 가계는 신라 왕실에서 나왔다’고 하며 탈해왕이 김씨의 시조가 되는 장면을 생생하게 전한다.
| 김유신의 김씨도 왕을 배출한 신라 3성의 하나이며 현대 한국의 가장 큰 성(姓)의 하나다. |
“시조는 금궤에서 나왔기에 김(金)을 성으로 삼았다. 김씨 자손이 이어져 왕에 오른 이가 50여 명이 되었다. 우리 태조가 통일하려고 하니, 왕은 형세가 힘껏 싸우지 못할 것임을 알고 나라를 들어 귀부했다. 태조가 상보(尙父) 정승공으로 봉하고 지위를 태자보다 위에 두었으며 장녀 산란 공주를 처로 삼게 했다.”
희종 5년(1209)에 세상을 떠난 김봉모는 경순왕의 후손으로 나온다.
1376년 사망한 이제현의 묘지명에는 “공의 이름은 제현(濟賢)이고 자(字)는 중사 (仲思)이며 아버지의 성은 이씨(李氏)다. 신라 시조 혁거세 때의 좌명대신(佐命大臣)으로 이알평(李謁平)이라는 분이 있었다”고 나온다. 고려 묘지의 많은 인물의 시조는 신라인으로 적혀 있다.
『한국의 성씨와 족보』(이수건, 2003)를 통해 대신라 이후 한국 지배세력의 실상을 볼 수 있다. 태조 왕건이 고려를 세우고, 신라의 항복을 받고 후백제를 멸망시키며 많은 공신을 책봉했다. 이들 삼한 공신은 고려의 각 주·부·군·현마다 토성(土姓)을 가진 몇 개의 세력을 인정해 주고, 해당 지역을 본관으로 삼게 했다.
고려 지배 세력도 신라인이 시조
신라 말 왕경인도 고려 초 여러 곳으로 이주하면서 토성을 받았다. 전주로 이주한 종성 중 김씨는 전주 김씨가 되고, 육부성 중 이씨는 전주 이씨가 됐다. 원래 신라인들을 포함해 토성을 가진 세력들은 고려 지배세력인 향리층이 되었다. 고려의 향리층은 조선의 양반층으로 이어졌다. 고려는 물론이고 조선의 많은 본관이 신라인을 시조로 하는 김씨·이씨·최씨·박씨·정씨 등의 성을 가졌다. 백제나 고구려인을 시조로 하는 성이나 본관을 찾기는 어렵다.
6회에서 신라는 피정복민 차별정책을 펴서 지방에 살던 옛 백제와 고구려 사람들은 진촌주층(신라 왕경의 5두품에 해당하는 대우, 현재의 면장 정도 지위)까지만 대우했다고 했다. 지방에는 그 이상 줄 자리도 없었다. 거기에 전국 주·군·현·소경의 하부 지방조직인 행정촌(현재의 면 정도)에는 왕경인을 내시령(內視令)으로 임명해 촌주를 통제했다.
이렇게 하여 원래 신라의 지방민뿐 아니라 옛 백제와 고구려 지방의 피정복민들까지 왕경인들과의 사회·정치적 간격을 ‘좁힐 수 없을 만큼’ 벌려 놓은 것이다. 그것이 신라 골품제 사회였다.
대신라(소위 통일신라) 시대에는 왕국 전체의 주요 관직과 상층 신분은 신라의 모체가 되었던 서라벌 소국(또는 사로국 등으로 불렸음) 사람들의 차지였다. 진한 소국들을 정복한 서라벌 소국은 신라 왕국의 서울인 왕경이 되었고, 서라벌 소국 사람들을 주축으로 하여 왕경인(서울사람)들이 탄생했다. 532년에 신라에 항복한 금관가야의 왕 구해(또는 구형)와 그 일족과 같이 신라에 항복했거나 정복당한 피정복민들 중 일부가 왕경으로 옮겨져 왕경인이 되기도 했다.
원래 왕경인은 육부성(六部姓)과 종성(宗姓)으로 구성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삼국유사』에 나오는 육부성부터 보자. “진한(서라벌)의 땅에는 옛날에 6촌이 있었다. 첫째는 알천양산촌인데 그 남쪽은 지금의 담엄사 방면이다. (촌)장은 알평이며 그가 처음 표암봉에 내려왔으며 급량부 이(李)씨의 조상이 되었다. 둘째는 돌산고허촌인데 장은 소벌도리이며 그가 처음 형산에 내려왔다. 이가 사량부 정(鄭)씨의 조상이 되었다. 셋째는 무산대수촌인데 장은 구례마이며 처음 이산에 내려왔다. 점량부 또는 모량부 손(孫)씨의 조상이 되었다. 넷째는 자산진지촌인데 장은 지백호이며 처음 화산에 내려왔고 본피부 최(崔)씨의 조상이 되었다. 다섯째는 금산가리촌인데 장은 지타이며 처음 명활산에 내려왔고 한기부 배(裵)씨의 조상이 되었다. 여섯째는 명활산고야촌인데 장은 호진이며 처음 금강산에 내려왔고 습비부 설(薛)씨의 조상이 되었다.” (『삼국유사』 1, 기이 2, 신라시조 혁거세왕)
『삼국사기』에는 사량부에 최씨, 본피부에 정씨로 바뀌어 있지만 신라 건국신화를 통해 우리는 한국인의 다수가 사용하고 있는 육부성(이씨·정씨·손씨·최씨·배씨·설씨)의 시조를 알 수 있다. 혁거세가 등장하기 이전 6촌장들이 각 촌의 최고 지배세력으로 있을 때 한자(漢字) 성을 사용했을 리 없다. 6촌의 촌락민들은 알평 등 시조를 기억하고, 촌장들을 기억하며 그 씨족을 유지해 나갔다. 후에 한자식 성을 사용할 때 비로소 이씨 등의 성을 갖게 되었다.
다음은 신라의 왕을 배출했던 박씨·석씨·김씨의 종성(宗姓) 또는 천강성(天降姓, 왕을 배출한 성)의 기원이다. 『삼국사기』엔 “(신라) 시조의 성은 박씨이고 이름은 혁거세다. 전한 효선제 오봉 원년 갑자(기원전 57년) 4월 병진에 왕위에 오르니 왕호는 거서간이다. 그때 나이는 열세 살이었다. 나라 이름을 서나벌(徐那伐)이라 했다”고 나온다.
『삼국사기』 탈해왕 즉위조에는 “탈해가 왕위에 오를 때 나이가 62살이었는데 성은 석(昔)이고 왕비는 아효부인”이라고 나온다. 또 탈해왕 9년 조에는 금성 서쪽 시림의 작은 나뭇가지에 걸려 있던 금궤에서 나온 알지에 대하여 이야기하며 그가 금궤에서 나왔기에 성을 김씨라 한 것으로 나온다.
신라 통일로 한국사 무대 좁아져
1985년 ‘인구 및 주택 센서스 조사 결과’에 따르면 신라 초기의 왕을 배출한 박씨·석씨·김씨의 종성(宗姓)과 건국신화나 유리왕 9년에 주었다는 이씨·정씨·손씨·최씨·배씨·설씨의 육부성(『삼국사기』의 순서)이 한국인의 다수임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 신라인 김유신을 중시조로 하는 김해 김씨까지 포함하면 한국인의 태반이 신라인의 후손이 되는 셈이다. 이 통계를 그대로 믿자는 게 아니라 이를 통해 역사의 대세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통일신라로 합류한 백제·고구려인은 어떻게 됐단 말인가. 피정복민이 됐다 해도 피는 계속 흐를 것 아닌가. 진촌주층으로 편입된 피정복민은 혈족을 유지할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원래 신라인들과 혼인해 혈연적 유대를 맺고 시간이 지나며 정체성을 유지하기보다 신라인이 되어 갔다.
평인(백성)이 된 사람들은 도태의 흐름에 쓸려 갔다. 당시 평인의 삶은 힘들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48, ‘효녀지은 조’엔 궁핍한 사정이 나온다.
“한기부 백성 연권의 딸 지은은 아버지를 여의고 홀로 어머니를 봉양했는데, 나이 서른둘에 시집을 가지 못했다. 품을 팔고 밥을 얻어 어머니를 먹였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피곤함을 견디지 못하고 쌀 10여 섬에 몸을 팔아 부잣집의 종이 됐다. 낮에는 종일 주인집에서 일하고 밤에 돌아와 밥을 지어 어머니를 봉양했다. 어머니가 그런 사정을 알고 두 사람이 통곡을 했다.” 신라인이 그럴 정도다.
일본 정창원에서 발견된 『촌락문서』도 참고할 만하다. 신라 촌락에는 노비가 된 평민들이 있다. 촌주의 일족들이 평인으로 신분이 떨어지기도 하고, 평인들은 결혼을 못해 가족을 구성하지 못하거나 노비로 몸을 파는 일도 벌어졌다. 그런 이들 가운데 백제·고구려 사람들의 피가 흐르긴 할 것이다. 그러나 대신라시대에 신라인으로 정체성이 바뀌면서 피가 흐려지거나 사라져 간 것이 피정복민의 운명이었다. 그래서 고조선·백제·고구려인을 시조로 하는 성을 가진 씨족들은 대신라·고려·조선을 거쳐 현재도 찾기 어려운 것이다.
고구려가 삼국통일을 이루었다면 한국인은 고구려인을 시조로 하는 사람들로 채워져 있을 것이 아닌가? 그러면 신라인을 시조로 하는 현재 한국인은 없을 것이고, 한국사를 이어 온 왕국들도 신라·고려·조선이 아니라 고구려를 이어 또 다른 나라들이 이어졌을 것이다.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결과 한국사의 무대가 좁아진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신라인을 시조로 하는 성을 가진 사람들이 그 혈족을 유지해 왔다는 사실에서 어떤 의미를 찾아야 할 것인가?
현재도 경주에 있는 신라의 종성(박씨의 숭덕전, 김씨의 숭혜전, 석씨의 숭신전)과 육부성 등 시조나 조상을 모신 사당이나 태종무열대왕왕릉 등에서 전국에서 온 후손들이 모여 정기적으로 제향을 올리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우리들은 한국·한국인·한국사회·한국문화의 오리진이 신라라는 역사적 코드를 무시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 중앙선데이 | 이종욱 교수 | 제366호 | 2014.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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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제국주의는 한·일 고대사에 대한 일본 제국주의의 왜곡은 와세다대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 교수가 출발점이다. 그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내물왕 이전 역사, 『일본서기』 『고사기』에 나오는 고대 일왕의 기록을 근거가 없다고 비웃었다. 일본 민족의 한반도 도래설을 차단하고 지배의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서다. 그런 학설을 한국인 학자들도 받아들였다 |
임나설 정당화 노린 일본 “내물왕 이전 기록은 허구” 억지 |
⑧ 일제가 더럽힌 우리 고대사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왜(倭)·왜인(倭人)에 관한 기사가 풍부하게 들어 있다. 『고사기(古事記)』 『일본서기(日本書紀)』와 함께 일본 상대(고대)사를 밝힐 수 있는 사료다. ‘신라본기’의 기록을 보자.
“왜인들이 군대를 끌고 와 변경을 침범하려다가 시조에게 뛰어난 덕이 있음을 알고 돌아갔다.”(혁거세왕 8년, 기원전 50년)
“왜인이 쳐들어와 금성을 포위했다. 왕이 친히 나가서 싸우니 적이 달아나므로, 날랜 기병이 뒤쫓아 1000여 급을 베었다.”(조분왕 3년, 232).
왜인 · 왜병들은 신라 왕도의 금성 · 월성 · 명활성을 기습하기도 했다. 눌지왕 24년(440)에는 왜인이 남쪽 변경을 침범하여 사람을 약탈해 갔는데 6월에도 동쪽 변경을 침범했다고 나온다. 이러한 기록들은 소지왕 22년(500)까지 30여 건 나온다. 기록에 등장하는 왜인 · 왜병들은 소규모 도둑들이었고, 거의 잡혀 죽었다.
『일본서기』에는 스잔오존(『역주 일본서기 1』)의 신라 방문 신화가 나온다. 또 『고사기』에는 신라 왕자 아메노히보코가 일본에 도래했다고 써 있다. 이런 신화는 고대 일본이 한반도와 교류했고 일본이 한반도 고대국가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같은 역사의 진실들은 2000여 년이 지난 20세기 초 일본 식민지학자와 그들의 교육을 받은 한국인 학자에 의해 왜곡됐다. 왜 그랬는가.
1910년 8월 22일 일본은 한국을 폐멸(廢滅)시키는 조약을 비밀리에 체결하고 8월 29일 공표했다. 폐멸이라는 단어는 너무 과격했던지 당시 잘 쓰지 않던 병합 이란 단어를 써 ‘병합조약(倂合條約)’이라고 꾸몄다. (요시노 마코토, 한철호 역, 『동아시아 속의 한·일 2천년사』, 2005) 이후 일본 식민학자들은 실증사학을 내세우며 한국사 폐멸 작업을 했다. 소위 식민사학이라 불러왔던 것인데 필자는 이를 폐멸사학이라 불러도 좋다고 본다.
이들의 대표적 죄악이 신라 내물왕(재위 356~402년) 이전의 역사에 침묵하고 은폐한 것이다. 그 역사는 신라 천년사의 5분의 2나 된다. 신라뿐 아니라 한국사에 영향을 미친 정치·사회·문화의 구조적 틀이 이때 만들어졌다. 현재 다수의 한국인이 사용하는 종성(宗姓)과 육부성(6部姓, 김·이·박·최 등)의 시조 모두 내물왕 이전에 등장한다. 한국인의 정체성이 그 시기에 들어있는 것이다. 일본인들이 꼬집어 밝히지는 않았지만 한국사 폐멸을 추구하던 일본인 연구자들이 이 대목을 지나칠 리 없었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왼쪽), 경주에 있는 내물왕릉. |
『삼국사기』 ‘신라본기’ 내물왕 이전 신라의 역사를 침묵시킨 최초의 일본인은 일본 최고의 역사가라는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1873~1961))다. 와세다대 교수로 있으면서 그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대하여’ (『고사기』 및 『일본서기』의 신연구, 1919; 『쓰다 소키치전집』(이하 『전집』) 별권 1, 1966) 라는 논문에서 장황하게 신라의 기록을 짓밟는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상대(고대) 부분에 왜·왜인 기사가 풍부하게 포함돼 있다. 이 중에는 『고사기』 『일본서기』와 함께 일본 상대사를 밝힐 수 있는 귀중한 사료인 것처럼 생각된 것이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의 상대 부분은 역사적 사실을 기재한 것으로 인정하기 어렵다. (이 점) 동방 아시아 역사를 연구하는 현대 학자 사이엔 이론이 없어 왜에 관한 기록들도 마찬가지로 사료적 가치가 없다….”
그러면서 당시 유행한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료를 근거로 비판의 대상이 되는 사료를 비판하는’ 방법을 썼다.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료’로 『삼국지』 ‘위서(魏書) 한전(韓傳)’과 그 안에 인용된 ‘위략(魏略)’을 꼽았고 그것을 최초의 기록이라고 했다. 그는 이를 근거로 3세기 신라는 진한 12국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 소부락이라 못 박았다. 나아가 ‘신라본기’의 내물왕 이전 기록 전체가 조작된 것이라 했다.
정리해보면 이렇다.
▶건국신화에 나오는 ‘조선유민’은 기자나 위만 조선계 중국인이다. 신라인에 중국인이 안 나타나는 것이 문제다. ▶혁거세가 알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설화이므로 믿기 어렵다. ▶3세기까지 진한의 한 소부락이었던 신라가 파사왕대(80~112)에 음즙벌국 · 실직국 · 압독국 등을 병합했다는 것은 『삼국지』 ‘한전’의 기록에 배치된다. 그러므로 영토 관계 기록은 모두 사실이 아니다. ▶왕실 계보도 혁거세 · 탈해 · 알지의 출생 이야기는 모두 설화이지 사실이 아니다. ▶왕에 덕이 있다는 등 정치에 대한 이야기도 중국 사상의 소산으로 사실이 아니다. ▶신라의 기년과 역대 국왕의 세계(世系)도 모두 허구다. ▶그래서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상대 부분 기사는 거의 공허하다. ▶4세기 후반~5세기에 걸쳐 일본(왜)이 가야를 근거로 삼아 신라와 대적했다는 명백한 사실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 때문에 ‘신라본기’에 나오는 왜인에 관한 기사를 취할 수 없다. 이는 쓰다 소키치가 소위 임나일본부가 가야에 설치되었다는 주장의 배경이다. ▶실성이사금(402~417) 무렵에도 허구적 기사가 있고, 이전 내물이사금(356~402) 무렵, 즉 왜병이 처음으로 신라를 압박했다고 추측할 수 있는 기사도 다른 확실한 사료의 기록과 비교할 대상이 없어 신용할 수 없다. ▶어느 나라의 상대사도 특수한 의도에 따라 조작되는 경우가 있음은 『삼국사기』 ‘신라본기’로도 알 수 있다.
요약하면 크게 10대 주장이다.
그런데 쓰다의 ‘신라본기’에 대한 비판은 애초부터 잘못된 것이다. 그가 ‘믿을 수 있다’고 여긴 『삼국지』 ‘위서 한전’은 일종의 인문지리서일 뿐 신라 내물왕 이전의 역사를 재구성할 만한 자료가 아니다. 사료 비판 방법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쓰다가 그렇게 한 데는 목적이 있다. 내물왕 이전 기록을 사료로 인정하면 신라는 1세기 중반~3세기 중반까지 현재 경상북도 일대를 정복한 왕국이 된다. 그런데 그런 사실(史實)이 쓰다에겐 유감이다. 내물왕 이전 · 이후 왜는 신라에 비교할 수 없는 약한 세력이었고 그러면 임나일본부설은 성립할 수 없다. 이에 신라의 성장을 은폐하기 위해 ‘신라본기’의 내물왕 이전 기록을 조작된 것이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쓰다의 주장에 영향받은 한국 연구자 때문에 1930년대부터 현재까지 『삼국사기』 ‘신라본기’ 내물왕 이전의 기록은 기본적으로 불신받고, 『삼국지』 ‘위서 한전’을 근거로 삼한론이 펼쳐져 왔다. 필자는 두 사서를 모두 중요한 사서로 이용해 왔다. 서로 다른 면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둘을 종합하면 역사는 한 권만 볼 때보다 전혀 다른 것이 된다.
여전히 한국사 연구자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쓰다 소키치는 어떤 역사가였을까. 세키네 히데유키(關根英行)의 ‘쓰다사학(津田史學)의 신대사(神代史·고대사) 해석과 한·일 민족의 계통관계’(일본사상 12, 2007)를 보면 몇 가지 특성을 볼 수 있다.
첫째, 쓰다는 황국사관에 강력히 맞선 연구자처럼 돼 있지만 실제론 “…황실과 국민은 본래 일체이며 멀리 떨어진 대립관계에 있는 것은 아니다. 양자는 뼈와 살처럼 내적인 것이기 때문에 본래 끊을 수 없는 관계, 끊어서는 안 되는 관계이며 그러므로 만세일계다” (『전집』 별권 1, 2)라는 말을 했다. 황국사관으로 천황제를 옹호한 것이다.
둘째, 쓰다는 “4~6세기 한반도와 이에 연결된 대륙의 민족 할거의 형세 때문에 어느 민족도 바다 건너 일본으로 진격해 온 적이 없다”(『전집』 3권)고 했다. 일본의 단일민족성을 지키기 위해 한국과 일본을 단절시키는 역사를 만들었다.
셋째, 쓰다는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나오는 제1대 진무천황(神武天皇 · 기원전 660~585)에서 추아이천황(仲哀天皇·기원후 192~200)까지의 고대사나 초기천황 기사에서 역사적 사실을 밝히려는 시도는 의미가 없고 다만 고대인의 사상을 밝히는 데만 의미가 있다고 했다. 소위 ‘쓰다사학’으로 학계에 수용돼 일본 정복자가 한국에서 왔다는 ‘도래설’의 근거를 차단한 것이다.
결국 ‘신라본기’ 내물왕 이전의 왜·왜인 관계 기록, 나아가 그 전체 기록을 조작된 것이라고 외면하는 것은 일왕(천황)제를 옹호하고 일본 민족의 한반도 도래설을 차단시키려는 목적 때문이었다.
그렇게 내물왕 이전 역사를 말살함으로써 한국인의 역사인식을 말살의 길로 끌고 갔다. 첫째, 일선동조론을 도왔다. 그는 일선동조론을 부정했지만 한국인의 신라 오리진에 대한 역사를 잘라냄으로써 일선동조론을 펼 바탕을 마련했다. 둘째, 창씨개명을 도왔다. 일본은 1940년 2월 11일 한국인에게 창씨개명을 강요했다. 한국인이 강력하게 유지해온 부계나 종족 의식을 파괴하고 일본의 가(家)를 단위로 한 씨(氏)를 만들어 천황제의 가족들로 편제시킨 것이다. (요시노 마코토 지음, 한철호 옮김, 앞의 책)
역사가의 조그만 논문 하나가 큰 후과를 초래했다. 쓰다가 침묵을 강요했던 신라 내물왕 이전 역사는 ‘오리의 각인’이 돼 지금까지 남아 있다. 삼한론의 문제 그리고 한국인에게 특별한 역사인 내물왕 이전 역사는 다음 편에 언급한다.
- 중앙선데이 | 이종욱 교수 | 제368호 | 2014.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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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발표한 서울 풍납토성 출토 자료에 대한 연대측정에 따르면 성 안에서 출토된 자료로는 기원전 199±5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는 『삼국사기』의 백제 건국 연대인 기원전 18년보다 훨씬 앞서 백제가 건국됐음을 의미한다. 대방태수 궁준(왕준)을 전사케 한 고이왕도 풍납토성을 왕성으로 삼았다. 사진은 현재 남아있는 풍납토성 전경. |
246년은 백제 융성기 … 『삼국지』선 ‘멸망’ 엉터리 기록 |
⑨ 고려 『삼국사기』 와 중국 『삼국지』
임진왜란을 엊그제 벌어진 낭만의 전쟁으로 여기는 일본인들은 지금도 일제의 한국 강점에 대한 망상을 키워간다. 그런데 2014년 현재, 우리는 일제의 한국사 폐멸 흔적을 모두 청산했을까? 아니다.
지난 호에서 황국사관으로 무장된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가 1919년 발표한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대하여’(『진전좌우길전집』, 별권 1)라는 논문에서 ‘신라 건국신화부터 16대 흘해왕(訖解王·310~356)까지 역사는 사료에 따른 게 아니라 편자의 머릿속에서 구상된 것’이라는 주장을 보았다. 일왕을 옹호하고 일본 단일민족설을 지키려고 쓴 이 논문은 한국인을 폐멸시키는 도구로 사용됐다. 내물왕 이전의 역사를 허구로 만들어 일선동조론이나 창씨개명의 고속도로를 뚫었다.
쓰다는 신라 · 백제의 고대사를 말살하는 근거를 중국의 『삼국지(三國志)』 ‘한전’에서 끌어왔다. 그래서 ‘한전’과 우리 손으로 신라 · 백제의 역사를 쓴 『삼국사기』와 비교해보려 한다.
1145년 왕명에 의해 김부식 등이 편찬한 『삼국사기』는 신라·고구려·백제의 역사를 기록했다. 중국 진(晋)나라의 진수(陳壽)가 쓴 『삼국지』는 위·촉·오 삼국의 역사(220~265)를 다룬다. 그중 위나라를 다룬 ‘위지(魏志)’ 끝에 ‘동이전’이 있고 그 안에 부여·고구려·동옥저·읍루·예·한에 대한 ‘전(傳)’이 있다. 그 ‘한전’에는 삼국시대와 그 이전인 기원전 190년대에 위만에게 쫓겨난 고조선의 마지막 왕 준왕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따라서 『삼국지』 ‘한전’의 기록으로 한반도 삼국의 역사를 이야기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거듭 말하지만 ‘한전’은 인문지리서여서 신라·백제 역사를 다룰 중심 자료가 될 수 없다. 1919년 쓰다의 사료 비판이 있기 전까지는 내물왕 이전 역사는 당연히 『삼국사기』로 다루는 것이 정통이었다.
| 백제의 고대사가 담겨 있는 『삼국사기』‘백제본기’. |
이제 『삼국사기』 ‘신라본기’와 『삼국지』 ‘한전’의 차이를 볼 순서다. 마침 두 사서에 하나의 전쟁에 대한 서로 다른 기록이 나온다. 『삼국사기』 24, ‘백제본기’ 2에 나오는 고이왕 13년(246)의 기록이다.
“8월에 위(魏)나라 유주자사 관구검이 낙랑태수 유무, 삭방(朔方)태수 왕준(王遵)과 함께 고구려를 치므로 왕(고이왕)은 낙랑의 허술한 틈을 타서 좌장(左將) 진충을 보내어 낙랑 변방의 백성들을 빼앗았다. 유무는 이 소식을 듣고 노하므로 왕은 침범당할까 두려워서 그 백성들을 돌려보냈다”라고 나온다.
『삼국지』 ‘한전’은 이렇게 기록한다.
“부종사 오림은 낙랑이 본래 한국을 통할했기에 진한 8국을 분할하여 낙랑에 속하게 했다. 그때 통역하는 관리가 말을 전하는 과정에 잘못이 있어, 신지(『삼국지』에 나오는 관직명)가 한인(韓人)들을 격분시켜 대방(帶方)의 기리영을 공격했다. 이때 대방태수 궁준(弓遵)과 낙랑태수 유무가 군사를 일으켜 이들을 정벌하였는데, 궁준이 전사하였다. 2군(낙랑과 대방)이 마침내 한(韓)을 멸했다”고 나온다.
여기서 삭방과 대방은 대방군이고 왕준은 궁준과 같은 인물이다. 그런데 이 246년의 전쟁을 놓고 두 사서의 기록에 차이가 난다.
첫째, 『삼국지』와 달리 『삼국사기』엔 궁준의 전사에 대한 내용이 없다. 백제군은 대방의 태수인 궁준의 전사 사실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백제인들은 그들이 아는 전쟁만 충실히 기록했다. 그래서 『삼국사기』의 사료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둘째, 『삼국지』는 “궁준이 전사했다. 낙랑과 대방이 현재 황해도 지역에 있는 기리영을 공격해온 한(韓, 백제)을 낙랑군과 대방군의 2군이 멸(滅)했다”고 한다. 거짓된 기록이다. 백제는 246년에 망하지 않고 더 강성해지는 단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셋째, ‘한전’은 백제(百濟)를 삼한 수십 개 소국 중의 하나인 백제국(伯濟國)으로 기록한다. 그렇다면 그렇게 작은 백제국이 대방군 기리영으로 쳐들어가 낙랑과 대방의 군대와 전투할 수 있었을까? 불가능한 이야기다. 실제 백제는 『삼국사기』의 기록대로 기원전 1세기 말부터 마한의 여러 소국을 정복하기 시작했고, 246년 당시에는 이미 현재의 경기도와 충청도를 정복한 커다란 왕국으로 성장해 있었다.
『삼국지』의 찬자인 진수는 백제나 신라에 대한 제대로 된 자료도 구할 수 없어 그런 엉터리 얘기를 기록한 것이다. 그래서 ‘한전’을 높이 평가하는 것은 위험하다. 그러나 ‘한전’에는 중국과의 관계, 그들이 파악한 한의 정치조직, 한의 습속, 산물 등에 대한 기록도 나온다. “귀신을 믿어 국읍(國邑)에 각기 한 사람을 세워 천신에 제사를 주관하게 했는데 이를 천군(天君)이라 부른다” “꼬리가 긴 닭이 나는데 그 길이가 5척 남짓 된다” “국(國)에서 철이 생산되는데 한(韓)·예(濊)·왜인(倭人)들이 모두 와서 사간다. 시장에서의 모든 매매는 철로 이루어져서 마치 중국에서 돈을 쓰는 것과 같다”는 기록도 있다. 『삼국사기』에는 없어 당시 한반도 남부의 사회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다. 그런데 거기까지다.
백제의 정치사나 사회사를 재구성할 때 『삼국지』 ‘한전’은 도움이 안 된다. 신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신라 내물왕 이전의 역사도 ‘한전’이 아니라, 신라인 스스로가 기록한 『삼국사기』 ‘신라본기’로 다뤄야 한다.
‘한전’과 달리 실제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엔 전혀 다른 신라의 모습이 풍성하게 기록돼 있다. 유리왕 19년(42) 이서국(伊西國, 현재 청도)을 정복한 이래 탈해왕 대(57~80)에는 우시산국(현재 울산)과 거칠산국을 병합했다. 그리고 파사왕 대(80~112)에는 음즙벌국·실직곡국·압독국(현재 경산)·다벌국·비지국·초팔국을 병합했다. 벌휴왕 2년(185)에는 조문국(현재 의성), 조분왕 2년(231)에는 감문국(현재 김천), 첨해왕 대(247~261)에 사벌국(沙伐國, 현재 상주)을 병합함으로써, 즉 1세기 중반에 시작된 신라의 진한 소국 정복이 3세기 중반 일단락된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풍성한 한국 고대사를 쓰다는 폐멸시켰다. 그런데 현재 한국 역사가, 그리고 그들이 만들고 있는 한국사는 그와 무관할까? 아니다. 1945년 8월 일본 패망 뒤 한국에는 정체성과 자긍심을 일으킬 수 있는 제대로 된 한국사 개설서가 한 권도 없었다. 당시 한국사의 교육과 연구를 주도한 역사가는 쓰다가 교수로 있던 와세다대를 졸업한 이병도(1919년 졸업)와 손진태(1927년 졸업)였다.
실증사학의 태두로 불렸던 이병도는 1930년대 중반에 ‘삼한문제의 신고찰’(『진단학보』 1·3·4·5, 1934~36)이라는 논문으로 내물왕 이전 역사를 『삼국사기』가 아니라 『삼국지』 ‘한전’으로 다루며 삼한론을 폈다. 그는 『한국사』(고대편, 1959)에서 “‘백제본기’에 열재(列載)된 고이(왕) 이전의 제왕(諸王) 기사를 어떻게 볼 것이냐… 그들은 대개 부락국가 시대의 세습적 거수로, 개국 후에 추존된 왕들이거나 혹은 진위반잡(眞僞半雜)의 세계(世系)를 후세의 사가가 개국 이래의 왕통과 같이 윤색한 바일 것이다. 따라서 그들에 관한 『삼국사기』의 기재는 신용을 둘 수 없는 것이 많다”고 했다. “(신라) 내물 이전의 세차(世次)가 얼마만큼 확실성을 가진 것인가 하는 의문은 역시 백제를 고이왕 이전의 그것에 대한 의문과 마찬가지여서 담보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그대로 신용하기는 어렵다…원시국가로서의 지지(遲遲)한 걸음을 걸어온 신라가 부근의 군소 제국을 병합하여 중앙집권의 정치체제로 발전하기는, 전술한 바와 같이 마립간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한 내물왕(제17대)시로 보지 않으면 아니 되겠다”고 했다.
소위 한국 실증사학의 뿌리는 쓰다의 한국사 폐멸 사학에 닿아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결과 해방이 돼도 내물왕 이전 역사는 또 축소·은폐됐다.
손진태는 “민족을 발견했다”며 단군을 시조로 한다는 순수 혈통의 한민족을 주장했다(『조선민족사개론』, 1948). 단군은 20세기 들어 대종교에서 받들기 시작했고 임시정부에서 개천절을 기념하다가, 대한민국 정부에서 1949년 양력 10월 3일을 국경일인 개천절로 정하며 민족의 시조로 공식화됐다. 개천절을 만드는 데 손진태의 역할이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단군은 한국 사상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을 세운 건국세력일 뿐이다. 고조선의 멸망과 더불어 단군을 시조로 하는 씨족이 사라져 현재 한국인과 단군의 연결고리는 일찍이 끊겼다.
쓰다에서 시작된 신라 역사 왜곡은 지금도 한국사 교과서에 이어지고 있다. 2002년 편찬된 국정교과서 고등학교 『국사』에는 ‘신라는 진한 소국의 하나인 사로국에서 출발하였는데, 경주 지역의 토착민 집단과 유이민 집단이 결합해 건국됐다(기원전 57)…유력 집단의 우두머리는 이사금(왕)으로 추대되었고, 주요 집단은 독자적 기반을 유지하고 있었다. 4세기 내물왕 때, 신라는 활발한 정복활동으로 낙동강 동쪽의 진한 지역을 거의 차지하고 중앙집권 국가로 발전하기 시작했다’고 나온다. 고등학교 『한국사』(2014) 중 하나는 ‘신라는 진한의 한 소국에서 출발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박혁거세가 신라를 건국했다(기원전 57년). 초기의 신라는 6부족 연맹체였는데, 박·석·김의 세 성씨가 연합하여 이사금을 선출했다. 4세기 후반 내물왕은 밖으로 활발한 정복활동을 벌여 낙동강 동쪽의 진한 지역을 장악하였다”고 했다(주 미래앤컬쳐). 모두 내물왕 이전의 역사를 의미 있게 보지 않는다. 현대 한국사학은 식민사학의 청산을 외쳐왔지만 스스로 일본의 한국사 폐멸 사학(소위 식민사학)의 틀 속에 머물며 교과서까지 왜곡시키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필자는 일본의 한국 고대사 연구자인 다케다 유키오(전 도쿄대), 기무라 마코토(도쿄 도립대학), 이성시(와세다대) 교수에게 제국 일본의 선학이 날조한 한국사를 비판하고 넘어서라고 주문했었다.
- 중앙선데이 | 이종욱 교수 | 제370호 | 2014.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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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주에 있는 성씨의 본거지. 1 박씨의 조상인 박혁거세의 알이 발견됐다는 신화가 서린 나정. 2 김씨의 조상인 김알지의 탄생신화가 서려 있는 계림. 3 급량부 이씨의 조상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표암봉. [사진 권태균] |
성씨로 본 현대 한국인, 절반 이상은 신라인의 후손 |
⑩ 신라 · 신라인의 유산
한민족의 시조는 누구인가? 단군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역사 인식은 신라 내물왕 이전 역사를 은폐하고 만들어낸 잘못된 것이다. 은폐 · 축소됐던 신라 내물왕 이전 역사를 떠나면 신라 · 신라인이 한국 · 한국인에게 전해준 역사적 유산 두 가지를 우선 찾을 수 있다.
하나는 한국인의 다수가 신라인을 시조로 한다는 사실이며 다른 하나는 현재 한국의 사회적 · 정치적인 틀이 신라시대에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이번 回에선 먼저 신라인이 다수 한국인의 조상이라는 매우 특별한 사실을 주목하겠다.
1985년(경제기획원 조사)에 있었던 인구 및 주택센서스 결과를 보자. 당시 274개 성(姓)이 조사됐는데, 전체 인구 4044만여 명 中 김씨(878만여 명, 그중 경주 김씨는 152만여 명, 김해 김씨는 376만여 명) · 이씨(598만여 명, 그중 경주 이씨는 152만여 명, 전주 이씨는 237만여 명) · 박씨(343만여 명, 그중 밀양 박씨는 270만여 명) · 최씨(191만여 명, 그중 경주 최씨는 87만여 명) · 정씨(178만여 명, 그중 경주 정씨는 30만여 명, 동래 정씨는 41만여 명)가 5대 성으로 나타났다. 2000년에도 286개 성 중 같은 성이 5대 성으로 나타났다. 5대 성은 전체 인구의 반이 넘었다. 김씨와 이씨의 비율은 어느 경우에도 전체 인구의 3분의 1이 넘었다. 그러니 위와 같은 문답이 생겨난 것이다.
5대 성은 여러 본관으로 나뉜다. 그중 신라인을 시조로 하는 본관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여기서 신라인을 시조로 하는 5대 성의 출발을 보자. 내물왕 이전으로 돌아가야 한다.
신라의 건국신화에 이씨 · 최씨 · 정씨를 포함한 육부성의 조상이 모두 나온다. 『삼국유사』 2, 『신라시조 혁거세왕』조에는 “진한의 땅에는 옛날에 6촌이 있었다. 첫째는 알천양산촌이니 남쪽으로 지금(고려)의 담엄사로 촌장은 알평(謁平) 이다. 처음에 하늘에서 표암봉에 내려오니 급량부 이씨(李氏)의 조상이 되었다. 둘째는 돌산고허촌으로 촌장은 소벌도리(蘇伐都利)다. 처음에 형산에 내려오니 이가 사량부 정씨(鄭氏)의 조상이 되었다. … 넷째는 자산진지촌이니 촌장은 지백호(智伯虎)다. 처음에 화산에 내려오니 이가 본피부 최씨(崔氏)의 조상이 되었다”라 하여 구체적인 내용이 나온다. 『삼국사기』에는 사량부의 성을 최씨, 본피부의 성을 정씨라 했으나, 『삼국유사』에는 사량부를 정씨, 본피부를 최씨라 하여 바뀐 것을 볼 수 있다. 현재 경주 이씨는 알평을 조상으로, 경주 정씨는 지백호를 조상으로 보고 있다. 최치원을 조상으로 삼고 있는 경주 최씨는 소벌도리의 자손이 된다.
다음은 박씨와 김씨의 종성(宗姓). 박씨는 『삼국사기』 1, 『시조 혁거세거서간』조와 『삼국유사』 2, 『신라시조 혁거세왕』조에 나온다. 현재 박씨들 중에는 혁거세를 시조로 하는 밀양 박씨를 본관으로 한 사람들이 많다. 김씨 중에는 김유신 장군을 중시조로 하는 김해 김씨가 많다. 그러나 신라인 김유신과 그 일족이 아니었다면 김해 김씨는 번성할 수 없었다. 알지를 시조로 하는 경주 김씨도 적지 않다. 한편 신라의 왕을 배출했던 석씨 세력은 16대 흘해왕(310~356)을 마지막으로 신라의 왕위계승에서 밀려나 그 세력이 줄어 그 후손들이 5대 성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이를 그대로 믿자는 것은 아니다. 5대 성의 각 성은 여러 본관으로 나뉜다. 많은 본관들 중 적지 않은 수가 신라인을 조상으로 하고 있다. 5대 성에 포함되지 않은 종성 석씨와 육부 성인 손씨·배씨·설씨를 포함하거나, 원래 신라 종성인 김씨를 가졌던 안동 권씨 같은 성을 포함하면 신라인을 시조로 하는 사람의 비중은 더 커진다.
주목할 사실은 현재 한국인 中 고조선 · 부여 · 백제 · 고구려인을 시조로 하는 성을 찾기 어렵다는 것이다. 또 신라인을 시조로 하는 성을 가진 한국인이 다수라는 사실에 대해 무엇인가 설명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이야기해 온 것과 같이 신라의 삼한통합으로 옛 백제와 고구려인들은 이후 신라에서 사회적 · 정치적으로 도태되었다.
대신 대신라(소위 통일신라) 시대에 종성과 육부성을 가진 신라인들은 그 수가 크게 늘어나게 되었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삼한통합으로 늘어난 토지와 인민을 지배하기 위해 새로운 정치 조직을 편성했고, 그에 따라 보다 많은 관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관직에는 종성과 육부성을 가진 사람들이 진출하였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따르면 신라가 삼한통합을 한 후 옛 신라 땅에는 상주 · 양주 · 강주, 옛 고구려 땅에는 한주 · 삭수 · 명주, 옛 백제 땅에는 웅주 · 전주 · 무주의 9주를 설치한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삼한통합 후 신라의 통치 영역과 통치 인구가 3배 정도 늘어난 것을 뜻한다. 그리고 685년에는 영(令)-경(卿)-대사(大舍)-사(史)의 4단계 관직체계를 영-경-대사-사지(舍知)-사의 5단계 체계로 바꾸어 신료의 수를 늘렸다. (『삼국사기』 38, 직관 상) 요즘으로 보면 계장 단계를 하나 더 늘린 것이다. 그 밖에도 삼한통합을 전후하여 조부(調府)의 경(卿)을 한 명 더 늘리는 식으로 관부에 따라 복수의 관직을 설치하는 일이 벌어졌다. 문무왕 18년(678)에 선부(船府)를 새로 설치한 것은 그 한 예다.(『삼국사기』 38, 직관 상) 이는 대신라 시대에 한국역사를 이끌어 가던 지배세력으로서 종성과 육부성을 가진 사람들의 수를 늘리는 결과를 가져왔고 그 층을 두텁게 만들었다.
대신라 시대에 종성과 육부성을 가진 사람들은 왕경에만 머물러 산 것이 아니라 지방으로 이주하는 일들이 많이 벌어졌다. 원성왕계 후손들의 왕위계승전 때 적지 않은 사람들이 지방으로 이주하여 정착하고 지방 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원성왕과 왕위계승 다툼에서 밀려 명주(현재 강릉)로 이주한 김주원(강릉 김씨의 시조가 됨)이 그 예다.(『삼국유사』 2, 『원성대왕』)
『삼국유사』 2, 『처용랑·망해사』조를 보면 헌강왕대(875~886)에는 왕이 포석정에 행차했더니 남산의 신이 임금 앞에서 춤을 추었고, 금강령에 행차하니 북악의 신이 나타나 춤을 추었고, 동례전의 잔치 때에는 지신이 나타나 춤을 추었다고 한다. “『어법집(語法集)』에는 그때 산신들이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되 ‘지리다도파도파(智理多都波都波)’라 한 것은 대개 지혜로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들은 사태를 알고 많이 도망했으므로 도읍이 장차 파괴된다는 말을 한 것이다”고 나온다. 헌강왕 대에 이르면 이미 신라 왕경의 지배세력들(현재 5대 성을 포함한)은 그들이 토지나 노비를 갖고 있던 지방으로 내려가 자리 잡고, 소위 후삼국 시대라고 하는 전국(戰國)의 상황을 헤쳐 나가, 후일 고려의 지배세력이 될 준비를 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고려는 역성혁명을 통해 건국된 나라로 건국 초부터 신라의 지배세력과 지방행정 조직 등 신라의 사회적 · 정치적 유산을 바탕으로 나라를 경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삼한통합을 이룬 신라인들이 옛 백제와 고구려인들을 사회적·정치적으로 도태시킨 것과 달리 고려에서는 옛 신라인들을 통하여 왕정을 펴나갈 수밖에 없었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들어선 것도 역성혁명으로 고려의 사회적 · 정치적 유산을 바탕으로 나라를 세운 것이다.
고려에서는 신라의 골품세력들이 향리층이 되고, 조선에서는 고려의 향리들이 양반세력으로서의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신라인을 조상으로 하는 5대 성을 가진 사람의 수가 역사적 과정을 거치며 늘어난 것이다.
신라인을 시조로 하는 5대 성을 가진 사람들이 고려와 조선의 각종 과거시험에 다수가 합격하는 등 정계 진출을 하며 그 수가 늘어나게 되었다. 5대 성을 가진 세력들이 번성한 이유를 생각할 수 있다. 『세종장헌대왕실록』 151, 『전주부』 조를 보면 토성(土姓)이 아홉인데 그중에 이씨가 있다. 여기 나오는 전주 이씨는 알평을 시조로 하는 경주 이씨에서 갈라진 본관으로 보인다. 전주 이씨는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이래 왕을 배출한 세력으로서 전주 이씨는 급격하게 번성해 나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5대 성은 아니나 조선시대 양반가문의 결속력을 보여주는 예가 있다. 『양반의 사생활』(하영휘 저, 2008)의 주인공 조병덕(1800~1870)을 주목할 수 있다. 조병덕은 양주 조씨(趙氏) 20세손으로, 19세손인 영의정까지 지낸 조두순(1796~1870)과는 13촌 관계에 있었다. 조병덕은 족숙(族叔)인 조두순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조병덕의 둘째아들 조장희의 진사 합격에 조두순의 영향력이 행사되었고, 1858년 4월 토색질을 한 범인을 잡으려고 교졸(校卒)들이 조병덕의 집에 난입하자 집에 있던 사람들이 교졸들을 결박하고 구타하는 사건이 발생했을 때도 조두순에게 알려 사건을 해결하는 등 많은 도움을 받았다. 이는 지방에 머물던 조병덕이 영의정까지 지낸 조두순의 도움으로 그 세력을 유지한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일은 다른 씨족이나 본관을 가진 가문에서도 마찬가지 일이었을 것이다.
현재 한국의 5대 성을 가진 사람들은 신라의 진골과 6두품을 거쳐 고려의 향리층, 조선의 양반층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오랜 기간 동안 일족들이 서로 밀고 끌어주며 그 세력을 번성시킨 것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물론 어떤 가문(종족, lineage)은 번성하고 어떤 가문은 사라졌지만 결과적으로 신라인을 시조로 하는 5대 성 (씨족, clan)은 번성한 것이 사실이다.
여기서 성씨나 따지고 족보나 이야기하자는 것이 아니다. 신라의 삼한통합으로 신라인을 시조로 하는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 대신라를 거쳐 고려와 조선에서 번성했다는 사실을 은폐하지 말자는 것이다. 혹 5대 성에 속하지 않는 한국인들의 경우 신라의 유산을 잇지 않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분들도 윗대의 여러 조상, 어머니, 할아버지 대의 세 분, 증조할아버지 대의 일곱 분 중에는 확률적으로 반 정도가 5대 성을 가진 분들일 것이라 생각해 본다. 이에 거의 모든 한국인은 신라 오리진과 무관하지 않다고 하겠다.
- 중앙선데이 | 이종욱 교수 | 제372호 | 2014.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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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주시 오야리의 지석묘. 한국의 초기 국가인 소국 형성 이전 촌장이 정치 지배자로 있던 촌락 사회(추장 사회)의 표지적 유적이 지석묘다. [사진 이종욱] |
내물왕 이전 형성된 지방편제, 지금의 군·면·리로 발전 |
⑪ 신라 · 신라인의 또다른 유산
군(郡)·면(面)·이(里)는 현재 한국 지방 행정구역상의 단위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런 편제의 기원은 신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것도 제17대 내물왕(356~402) 이전 신라 때다.
신라가 정복했던 경상북도 지방의 진한(辰韓) 소국(小國) 중 이서국은 청도군으로, 골벌국은 임천현을 거쳐 현재 영천시로, 압독국은 장산군을 거쳐 현재 경산시(경산군)로, 조문국은 문소군을 거쳐 현재는 의성군으로, 사벌국은 상주(尙州)를 거쳐 현재 상주시(상주군)로, 감문국은 개령군을 거쳐 현재의 김천시가 되는 역사적 유산을 남겼다. 피정복 소국 지역의 촌들은 면(面)에 해당하는 행정촌으로 편제되었고, 행정촌 안의 마을들은 이(里)와 비슷한 자연촌으로 편제됐다. 현재 한국의 사회적 · 정치적 틀은 신라 초기, 내물왕 이전 국가 형성 과정에 그 기원이 이미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역사는 일제가 한국을 강점한 이후 침묵을 강요받았다. 1945년 광복 후 한국사 교육과 연구를 주도한 한국인 연구자들은 일본인의 주장에 따라 내물왕 이전의 역사를 은폐 · 왜곡시켜 왔다. 그와 달리 필자는 처음부터 당당하게 내물왕 이전의 역사를 재구성해 왔다.
신라는 내물왕 이전에 몇 단계의 초기 국가 형성 과정을 거쳤다. 아래에 그 정치 발전 과정을 제시하고, 그러한 단계가 현재 한국사에 어떤 역사적 유산을 남겼는지 보겠다.
서라벌소국 이전 단계는 추장사회.
『삼국유사』 1, ‘신라시조 혁거세왕’조에는 “진한의 땅에는 옛날에 6촌(六村)이 있었다. … 전한 시절 원년(기원전 69년) 임자 3월 1일 6부(六部, 당시는 6촌)의 조(祖)들이 각기 자제(子弟)들을 거느리고 알천의 언덕 위에 모여 의논을 하였다”고 나오는 신라 건국신화가 있다. 그때 6촌의 촌장(村長)들은 군주(君主)를 모셔 나라를 세우자는 의논을 했다. 이 기록에서 서라벌소국 형성 이전에 서라벌 지역에 6촌이 있었고 각 촌에는 촌장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서라벌소국이라는 국가가 형성되기 이전 서라벌 지역에 등장했던 6촌이라는 정치체는 어떤 의미를 지닌 존재였을까? 필자는 이를 인류학에서 말하는 국가(state) 이전 ‘추장사회(酋長社會, chiefdom)’에 해당한다고 보아 왔다 (Conrad Phillip Kottak, 『Cultural Anthropology』, 2002). 신라 건국신화에 나오는 촌의 촌장들이 조상으로 받들어졌고, 촌장들이 자제를 거느렸고, 후일 촌을 단위로 그 안에 살던 사람들에게 하나의 성(姓)을 준 사실 등으로 혁거세가 국가를 세우기 전에 현재 경주 지역에 있던 촌락사회(또는 촌장사회)는 인류학에서 말하는 추장사회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필자는 서라벌 6촌, 촌락사회에 대해 다룬 바 있다(『신라국가형성사연구』, 1982). 서라벌 6촌의 각 촌은 동서와 남북이 각기 10㎞ 내외의 공간으로 구성됐다. 이 정도는 교통수단의 보조 없이 정치적 · 사회적 활동을 하기에 쾌적한 공간이라고 한다. 각 촌은 농경 등의 이유로 직경 2~3㎞ 정도 되는 몇 개의 마을로 나뉘었다. 촌락사회에서는 촌장이 하나의 촌 전체를, 마을의 장이 마을을 다스리는 2단계 정치조직이 편성되어 있었다. 지석묘를 표지적 유적으로 하는 이러한 촌과 마을은 한반도 거의 모든 지역에 걸쳐 존재했다. 그중 촌들은 현재 면(面)이라는 역사적 유산을 남겼다. 촌을 나눈 마을들은 현재 이(里)에 해당한다. 지금까지 역사학자들은 지석묘를 축조하던 촌락사회(추장사회)의 존재를 주목하지 않았다.
소국 면적 1000㎢ 백성은 1만
| ▲ 신라 제17대 내물왕릉 추향대제. 지금도 내물왕 후손들이 왕릉 앞에서 때맞춰 제사를 지낸다. ▼ 신라 제4대 석탈해왕을 모신 사당인 숭신전(崇信殿). 신라는 석씨 왕인 제12대 첨해왕(247~261)대에 사벌국(沙伐國)을 정복함으로써 진한 소국을 모두 정복했다. 기존 견해보다 100년 정도 앞섰던 것이다. |
서라벌소국은 서라벌 6촌을 통합해 형성됐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신라 건국신화에는 기원전 69년에 6촌장들이 모여 “우리는 위로 군주(君主)가 없어 백성들을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에 백성들이 모두 방자해 저 하고자 하는 대로 하니 어찌 덕이 있는 사람을 찾아 군주로 삼고 입방설도(立邦設都 · 나라와 도읍을 세우는 일)하지 않겠는가” 했다고 나온다. 그때 나정(蘿井) 근처에 나타난 알에서 혁거세가 태어났는데, 6촌장들이 기원전 57년에 혁거세를 군주로 삼아 입방(立邦)과 설도(設都)를 했다고 한다. 실제 역사에서는 혁거세 집단이 서라벌소국이라는 나라를 세운 것이 입방이다. 서라벌소국의 군주가 되었던 혁거세 세력은 남산 서쪽 산록에 왕실의 보호시설로 금성(金城·『삼국유사』에는 나정 근처에 위치한 창림사(昌林寺)로 나옴)이라는 왕성과 그 안에 왕궁(후일 사량궁)을 축조했다. 이 같은 왕성의 축조는 설도를 의미한다. 이렇게 형성된 서라벌소국은 대체로 1000㎢ 정도의 토지와 1만 명 정도의 백성으로 형성됐다. 6촌을 모체로 해 편성된 6부가 서라벌소국의 지방행정구역으로 되었다. 이때 촌락사회의 2단계 위에 소국 전체를 다스리는 3단계의 통치조직을 갖추었다.
시간이 지나며 왕성 주변에 주택과 관청들이 들어섰다. 『삼국사기』 1에는 제5대 파사왕(婆娑王, 80~112)이 월성을 축조하고 그 안에 또 하나의 왕궁(후일 대궁)을 지어 왕들의 거처로 삼았다. 이로써 왕성을 둘러싼 도시로서 왕도(王都)가 확대되었다. 후일 왕도로 발전한 서라벌소국의 도읍은 6촌(후일 6부로 개편됨) 중 일부 촌에 걸쳐 만들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한 도읍의 주인공인 왕과 그 일족들은 소국을 세울 때부터 6촌의 세력집단인 촌장(후일 부장) 세력 위에 군림하는 존재였다. 530년대까지 신라의 왕들이 6부 중 한 부의 부장이었다는 한국 역사학계의 주장과는 달리, 신라의 왕은 처음부터 6촌의 세력이 된 일이 없다. 마치 현재 대통령이 종로구청장이 될 수 없는 것과 같은 일이다.
서라벌소국 형성 후 6촌장을 시조로 하는 육부성(六部姓)과 왕을 배출한 종성(宗姓)은 현재 한국인의 다수가 사용하는 성이라는 역사적 유산을 남기게 되었다. 한편 서라벌소국이 형성될 무렵 한반도 남부에는 수십 개의 소국이 거의 동시에 형성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각 소국의 구조는 서라벌소국의 그것과 비슷했다고 하겠다.
| ▲ 경주 조양동38호분에서 출토된 한경(漢鏡). 삼한소국의 왕들은 한경 등 중국제 물품을 가지고 위세를 과시했다. |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는 기원전 108년 낙랑군이 설치된 후 내군(內郡·중국 본토의 군)에서 온 고인(賈人·상인)들이 한반도 남부 지역을 왕래하며 원거리 교역을 했다고 나온다. 그 과정에 한반도 남부 지역에 형성됐던 소국들이 크게 세 개의 교역권을 구성했다. 『후한서』나 『삼국지』에 나오는 마한·진한·변한의 삼한이 형성된 것은 낙랑군이 설치된 후였다. 그 하나가 현재 경상북도 일대의 소국들로 형성된 진한이었다.
기원전 1세기에는 한반도 남부의 세력들은 중국의 상인들로부터 선진 문물을 수입했고 원자재에 해당하는 물건들을 수출했다. 그 과정에 삼한 소국의 지배자들은 중국의 선진 문물을 가지고 정치적 권위를 내세우게 되었다. 비록 신라의 경우보다 2세기 이상 늦기는 하지만 『삼국지』 ‘왜인’ 조에는 239년에 중국 측에서 왜왕(倭王)이 보낸 사신에게 동경(銅鏡) 백매 등의 물품을 보내며 나라 안의 사람들에게 보여주라고 한 사실이 나온다. 이는 중국제 물품으로 지배자의 권위를 과시하라는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며 진한의 정치세력들은 스스로 낙랑군에 사람을 보내 원거리 교역을 했다. 이러한 원거리 교역체제를 위세품(威勢品) 교역체제라고 할 수도 있다. 낙랑군 지역에서 받아들인 중국제 위세품으로는 경주 조양동 유적, 영천 어은동 유적 등에서 출토한 것과 같은 동경·동탁·철제 무기·철제 농기구 등이 있다. 신라의 경우 위세품 교역은 소국 정복을 하기 시작한 1세기 중반 이후 점차 의미가 없어진 것으로 여겨지는 것과 다른 현상이다. 신라는 그러한 위세품을 스스로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중 소백산맥 남쪽 낙동강 하류 지역에서 성장한 변한의 북쪽 지역에 있던 소국들은 지리적인 이유로 서라벌소국을 원거리교역의 창구로 삼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진한이라는 소국연맹으로 소국연맹의 각 소국에는 왕들이 있었다. 소국의 백성들은 각 소국 왕의 통치를 받았다. 당시 진한연맹의 공동 시민권은 없었다. 그리고 진한의 맹주국이었던 서라벌소국도 연맹 내의 다른 소국을 지배할 수는 없었다. 단지 서라벌소국의 왕은 진한 연맹의 맹주로서 원거리 교역을 주관했고 외적 방어의 구심점이 되었으며 소국 간 분쟁을 조정하는 역할을 했다. 진한은 기본적으로 현재의 경상북도로 그 역사적 유산을 남기고 있다.
한국사 교과서 서술도 바꿔야 할 때
1세기 중반부터 3세기 중반까지 진한 소국들이 서라벌소국에 정복됐다. 『삼국유사』에는 제3대 유리왕(儒理王, 24~57) 19년에 이서국(伊西國)을 정벌해 멸했다고 나온다. 그후 신라는 제12대 첨해왕(247~261)대에 사벌국을 정복할 때까지 진한의 모든 소국들을 정복했다.
『삼국사기』 2에는 제11대 조분왕(助賁王, 230~247) 7년 2월 “골벌국왕 아음부가 내항해 제택(第宅)과 전장(田莊)을 주어 편히 살게 하고 그 땅을 군(郡)으로 삼았다”고 나온다. 신라는 한반도 남부 지역에 형성됐던 소국들을 단위로 군을 편성하는 정책을 폈다. 그때 군으로 편제된 과거 소국의 영역에 성주(城主)를 칭하는 지방관을 파견했다. 그리고 『삼국사기』 2에 나오는 것과 같이 몇 개의 군을 통합해 다스리던 지방관으로는 185년에 지방관으로 처음 파견됐다고 하는 좌군주(左軍主)와 우군주(右軍主)를 들 수 있다.
이웃한 소국들을 정복하며 서라벌소국 영역은 신라의 서울인 왕경으로 바뀌었다. 그 안의 6촌은 6부로, 촌 안의 마을들은 이(里)로 편제됐다.
이제 우리는 빼앗긴 역사를 찾아야 한다. 8회에서 본 것과 같이 내물왕 이전 역사를 폐멸시킴으로써 제국 일본은 일선동조론과 창씨개명 정책을 펴며 한국인 폐멸 정책을 펼 수 있었던 것을 밝혔다.
그리고 9회에서는 광복 후 한국인 연구자들은 식민사학 청산을 외쳐왔으나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 나오는 신라 내물왕 이전 역사는 일제가 만든 한국사 폐멸의 내용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는 사실도 보았다. 우리는 일제의 한국사 폐멸의 고리를 끊고, 한국인의 오리진과 한국 사회체제의 구조적 틀이 신라의 내물왕 이전 역사의 유산을 이어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한국사 교과서의 내용도 바꾸어야 한다.
- 중앙선데이 | 이종욱 교수 | 제374호 | 2014.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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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주시 신평동의 여근곡. 『삼국유사』 『선덕왕 지기삼사(善德王 知幾三事)』조에 나오는 여근곡(女根谷)으로 알려진 곳이다. [사진 권태균] |
성골 남자 씨 마른 신라, 선덕 내세워 왕통 신성함 지켜 |
⑫ 신라 여왕의 탄생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며 누구든지 성별 등으로 차별을 받지 않는다.” 대한민국 헌법 제11조 1항은 성차별 금지를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 역사의 모든 왕국에서는 엄연히 남녀 차이가 존재했다. 그런데 유독 신라에만 3명의 여왕이 있었다. 제27대 선덕(善德)여왕(632~647), 제28대 진덕(眞德)여왕(647~654) 그리고 제52대 진성(眞聖)여왕(887~897)이 그들이다.
제26대 진평왕(眞平王)의 차녀 선덕(덕만이라고도 함)공주가 첫 여왕이 되는 과정은 짐작이 가듯이 결코 간단치 않았다. 물론 진평왕과 마야(摩耶)왕후 사이에 아들이 없었다는 것이 출발점이 됐다. 진평왕의 남동생들인 진정갈문왕 (眞正葛文王)과 진안갈문왕(眞安葛文王)이라도 아들을 낳았더라면 성골 남자의 왕위 계승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차녀 선덕공주는 처음부터 1순위가 될 수 없었다. 언니인 장녀 천명(天明)공주보다 서열이 뒤진 데다 이전에 공주가 여왕이 된 전례도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서부터 복잡한 방정식이 전개됐다. 603년 진평왕은 37살 때 결단을 내려야 했다. 폐위된 제25대 진지왕(眞智王·재위 576~579)의 아들인 용수(龍樹) 전군 (殿君·후궁에게서 태어난 왕자)을 장녀 천명공주와 결혼시켜 사위의 자격으로 일종의 태자를 삼는 방법이었다. 용수가 왕위계승권자가 될 수 있는 정당성은 성골 신분을 갖고 있던 천명공주에 기인한다. 모계제 사회에서도 여자는 그러한 정당성을 갖지만, 실제 왕위 등의 자리는 남자가 차지하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었다.
『화랑세기』 『13세 용춘공(용수의 동생)』조는 이렇게 적고 있다. “그때 (진평)대왕은 적자(嫡子)가 없어 (용춘)공의 형인 용수전군을 사위로 삼아 왕위를 물려주려 했다. … 전군이 사양했으나 마야왕후가 들어주지 않았고, 마침내 (용수)전군을 사위로 삼았으니 곧 천명공주의 남편이다.”
용수와 천명공주 사이에는 김춘추(金春秋)가 태어났다. 하지만 용수는 결국 왕이 되지 못했다. 진평왕이 마음을 바꿨기 때문이다.
천명공주가 동생 선덕에게 양보
| ▲ 신라 제27대 선덕여왕 초상. 선덕은 아들이 없었던 진평왕의 딸로 신라의 첫 여왕에 올랐다. |
“선덕공주가 점점 자라자 용봉(龍鳳)의 자태와 태양(太陽)의 위용이 왕위를 이을 만했다. 그때는 마야왕후가 이미 죽었고 왕위를 이을 아들이 달리 없었다. 그러므로 진평대왕은 용춘공에 관심을 두고 천명공주에게 그 지위를 양보하도록 권했다. 천명공주는 효심으로 순종했다. 이에 지위를 양보하고 출궁(出宮)했다.” 612년의 일이다.
천명공주의 출궁은 그가 성골을 버리고 진골로 족강(族降·신분 강등)됐음을 의미 한다. 왕위 계승의 정당성이 선덕공주 쪽으로 넘어간 것이다. 용춘은 선덕공주를 감당하기 어려운 것을 알고 (선덕과의 혼인을) 사양했으나 어쩔 수 없이 받들게 됐다. 하지만 용춘은 자식이 없어 물러날 것을 청했다. 진평왕은 용수에게도 선덕을 모시도록 했으나 또 자식이 없었다. 왕위계승자가 된 선덕공주는 612년부터 21년간 왕정을 익혔다. 선덕이 왕위에 오를 때인 632년엔 40살이었다.
| ▲ 신라 문무왕이 세운 사천왕사 터. 선덕여왕은 사후에 도리천에 장사 지내달라고 했다. 나중에 문무왕이 사천왕사를 선덕여왕 무덤 아래에 세움으로써 이 말이 실현됐다. 도리천은 불교의 욕계(欲界) 6천(六天)의 제2천으로 사천왕 하늘 위에 위치한다. |
『삼국유사』 1, 『왕력』편 중 제27 선덕여왕조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성골 남자가 모두 죽어(聖骨男盡) 왕위에 올랐다…이상은 중고(中古·제23대 법흥왕~제28대 진덕여왕)로 성골이고, 이하는 하고(下古·제29대 태종무열왕~제56대 경순왕)로 진골이다.” 이런 대목도 있다. “국인들이 혁거세(赫居世)에서 진덕(眞德)까지 28왕을 일컬어 성골이라 하고 무열(武烈)에서 마지막 왕까지를 진골(眞骨)이라 했다.”(『삼국사기』 5, 선덕여왕 8년조)
이러한 기록을 통해 두 가지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먼저 선덕여왕의 즉위는 성골 남자가 모두 죽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은 성골이라는 점이다.
선덕공주를 왕위계승권자로 선택한 것은 성골종족(聖骨宗族)의 왕위 계승 원리에 어긋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인류학에서 말하는 부계제사회(父系制社會)에서 여자도 한 대(代)에 한해 부계성원권을 가지는 것으로 나오기 때문이다(Ernest L. Schusky, 『Manual for Kinship Analysis』·1972). 다만 그 여자가 혼인을 하여 남편의 집으로 가면 부계(父系)성원권을 잃게 된다. 천명공주가 출궁한 것은 성골 신분을 가진 부계성원권을 잃고 용수의 부계혈족집단으로 들어간 것을 의미한다. 그와 달리 선덕공주는 혼인을 한 후에도 성골 거주구역인 왕궁을 떠나지 않았기에 성골 신분을 유지할 수 있었고, 성골로서 왕위계승권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 경우 선덕공주가 혼인했던 용춘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 사이에 출생한 아들은 용춘의 부계성원이 되어 성골 신분을 가질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여자는 한 대에 한해, 그것도 아버지의 거처를 떠나지 않았을 때 부계성원권을 가질 수 있었다.
진평왕은 진지왕의 폐위와 동시에 진골로 족강된 용수보다 왕으로서의 자질을 보인 성골 선덕공주를 선택했다. 당시 선덕공주는 용춘 외에도 여러 남자들과 관계를 가졌지만 혼인을 하여 남편의 부계혈족으로 소속을 바꾼 것은 아니었다.
선덕 즉위 뒤 중국선 측천무후 등장
선덕여왕이 즉위한 후인 690년 중국 당나라에서는 측천무후(則天武后)가 중국에서 유일하게 여자로서 황제의 지위에 올라 705년까지 15년간 재위했다. 측천무후의 즉위는 당 고종의 황후로서 황제가 된 것으로, 당 황실의 왕위계승원리와는 무관한 권력장악이었다. 그렇더라도 측천무후의 즉위는 신라의 선덕여왕·진덕여왕과 같은 여왕의 즉위에서 힘을 얻은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
선덕의 왕위계승 막바지 과정에도 반발이 있었다. 『삼국사기』 4, 『진평왕 53년(631)』조는 이찬 칠숙(柒淑)과 아찬 석품(石品)의 반란을 서술하고 있다. 진평왕이 세상을 떠나기 몇 달 전 일어난 사건이었다. 진평왕은 그들이 반란을 도모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칠숙을 잡아 구족을 멸했다. 칠숙 · 석품이 난을 일으킨 이유가 구체적으로 나오지는 않지만, 선덕공주라는 여자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반대한 것일 수 있다.
첫 여왕의 위엄을 높이려는 시도도 있었다. 『삼국유사』 3, 『황룡사9층탑』조에 따르면 636년 당나라에 유학 간 자장법사(慈藏法師)가 태화지 옆을 지나다 신인(神人)을 만나 대화했다. 자장은 신라에 말갈 · 왜국이 인접해 있고 고구려 · 백제가 번갈아 변경을 침범하여 구적(寇賊)이 횡행하는 것이 백성들의 걱정이라고 했다. 그러자 신인은 “지금 너의 나라는 여자가 왕이 되어 덕은 있으나 위엄이 없기에 이웃 나라들이 침략을 도모하니 그대는 빨리 본국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황룡사(皇龍寺) 안에 9층탑을 세우면 이웃 나라들이 항복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643년 귀국한 자장은 선덕여왕에게 황룡사9층탑 건축을 제안하여 탑을 건축하게 되었고 645년 완공했다. 황룡사9층탑은 선덕여왕의 위엄을 높이는 면이 있었던 것이다.
여왕 위엄 높이려 황룡사탑 건립
| ▲ 경주시 배반동에 위치한 선덕여왕릉. 사적 제182호. 사천왕사 근처 낭산의 남쪽 언덕에 있다 |
정작 ‘여주불능선리(女主不能善理·여왕이 나라를 잘 다스리는 것은 어렵다는 뜻)’라고 하여 반란을 일으킨 것은 선덕여왕 16년(647) 1월 상대등으로 있던 비담(毗曇)의 무리였다(『삼국사기』 5). 비담은 스스로 왕이 되고자 했다. 그래서 비담 일당은 춘추(春秋)를 왕으로 세우려 오래전부터 활동해온 결사인 칠성우(七星友)와의 대결이 불가피했다.
선덕여왕이 647년 1월 8일 세상을 떠나기 전 말년엔 칠성우들이 여러 부문에서 왕정을 장악하고 있었다. 1월 17일 김유신을 중심으로 한 칠성우들이 마지막 남은 성골인 승만(勝曼·진덕여왕)을 왕으로 세우고, 비담의 난을 진압하였다. 진덕여왕은 진평왕의 막내동생인 진안갈문왕의 딸로 혼인하지 않고 왕궁에 살며 성골 신분을 유지했다. 654년 3월 진덕여왕이 세상을 떠났을 때 성골 여자도 모두 소멸되었다. 그러자 춘추가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고, 진골왕 시대가 열렸다.
신라인들은 선덕여왕의 왕위 계승을 정당화하기 위한 신비화에도 공을 들였다. 『삼국유사』 1 『지기삼사(知幾三事)』조에 나오는 미리 알아낸 세 가지 조짐이 그것이다. 당 태종이 보내온 모란꽃 그림을 보고 나비가 없어 향기가 없을 것이라 한 것, 경주 여근곡(女根谷)에 숨어든 백제 군사의 존재를 알아내고 잡아 죽이도록 한 일, 자기가 죽을 날을 미리 알고 도리천에 장사 지내라고 한 일이 그것이다.
선덕여왕은 당 태종의 그림이 자신이 배우자가 없음을 업신여긴 것이라고 설명했다. 여근(女根)은 여자의 옥문(玉門·생식기)으로 그 빛이 흰색이며 흰색은 서방이므로 서방의 군사 즉 백제 병사가 왔음을 알았고 여자의 생식기에 들어갔으므로 반드시 죽게 될 것을 알았다고 했다. 그리고 문무왕대에 낭산 밑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지었는데 불경에 도리천(刀利天)은 사천왕 위에 있어 선덕여왕이 한 말이 맞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이야기는 왕위에 오르기 전, 왕위에 오른 후, 세상을 떠난 후 선덕여왕의 특별함을 말하는 스토리텔링이었던 것이다.
여자이지만 성골인 선덕여왕의 즉위는 신라 골품체제의 운용원리를 따른 왕위 계승이었다. 성골과 성골의 왕위 계승 등에 대해서는 다음 호에서 밝히기로 한다.
- 중앙선데이 | 이종욱 교수 | 제376호 | 2014.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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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라 제23대 법흥왕에서 제28대 진덕여왕까지 성골 종족이 살던 일종의 신성 공간(성역) 이었던 경주 월성(제5대 파사왕 22년인 101년부터 왕성의 하나가 됨)의 궁궐 터. 성골의 거주 구역이었던 삼궁(三宮)은 월성의 대궁(大宮), 금성의 사량궁(沙梁宮), 만월성의 양궁(梁宮)이다. 왕의 누이, 왕과 왕의 형제의 딸들도 혼인해 삼궁을 떠나기 전까지는 성골 신분을 가질 수 있었다. [사진 권태균] |
율령 반포 법흥왕, 왕과 형제 · 자녀만 성골로 규정 |
⑬ 신라 성골의 탄생
신라 골품제도의 최상위 신분인 성골(聖骨) · 진골(眞骨)이란 말은 21세기 한국에서도 통용되고 있다. 어떤 조직에서 출신이나 성분을 따질 때 단골로 사용된다. “저긴 성골이잖아” 이런 식이다. 하지만 정작 성골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성골과 진골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삼국유사』와 『삼국사기』는 성골 왕의 시작에 대해 서로 다르게 기술하고 있다. 『삼국유사』 ‘왕력’ 편에는 제23대 법흥왕(法興王)에서 제28대 진덕여왕 (眞德女王)까지를 중고(中古) 시대라 하고, 성골이 왕위를 이은 것으로 나온다. 『삼국사기』 진덕여왕 8년조에는 “국인(國人)들이 시조 혁거세(赫居世)에서 진덕(眞德)까지 28왕을 성골이라 일컫는다”고 적고 있다. 두 사서 모두 제29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부터는 진골이 왕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부모 양쪽이 왕족이면 성골이 되고 한 쪽이 왕족이 아니면 진골이 된다는 견해가 널리 퍼졌다(이병도, ‘고대 남당고’, 『서울대 논문집』, 1954). 그런가 하면 제24대 진흥왕(眞興王)의 장남인 동륜(銅輪) 태자(제26대 진평왕의 아버지)의 직계비속으로 구성된 소가계 집단이 성골을 주장해 만들어졌다는 의견도 있다(이기동, ‘신라내물왕계의 혈연의식’, 『역사학보』 53?54합, 1972).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삼국유사』를 따르더라도 법흥왕에서 제25대 진지왕(眞智王)까지 성골 왕의 존재를 무시한 것이어서 문제가 된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 기록엔 차이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의 차이는 법흥왕 이전의 왕들도 성골 출신이었느냐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법흥왕대의 변화가 중요하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법흥왕이 율령(律令)을 반포하면서 새로운 성골 종족(宗族·집단)이 만들어졌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다.
『삼국사기』는 법흥왕 7년(520) 율령이 반포되고 처음으로 백관의 공복(公服)과 그 주자(朱紫)의 질서가 정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골품 신분에 따라 관리가 입는 공복의 색깔이 주색(붉은색·성골), 자색(자주색·진골), 비색(붉은색·6두품), 청색(청색·5두품), 황색(누른색·4두품)으로 달랐다. 율령 반포 이전과 이후 사이에 커다란 변화가 생긴 것을 뜻한다. 법흥왕이 신라 서울인 왕경의 지방행정구역인 6부에 사는 사람들(六部人)의 복색과 주자의 질서를 정한 것은 성골 · 진골과 6두품에서 1두품까지의 왕경인의 신분을 정하고 그에 따른 규정을 만든 것을 의미한다. 이는 신라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온 개혁이라 하겠다.
필자는 왕과 그 형제의 자녀들로 이루어진 종족을 성골로 보아왔다 (이종욱, ‘신라 중고시대의 성골’, 『진단학보』 50, 1980). 종족은 인류학에서 이야기하는 리니지(lineage)에 해당하며, 공동 조상을 가진 살아 있는 혈족을 의미한다. 그런데 종족의 범위는 몇 대의 조상을 시조로 하느냐에 따라 그 규모가 달라진다. 중요한 사실은 종족에 속한 성원들은 정치·경제·종교적 지위나 권한이 개인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종족집단에 속한다는 것이다 (Ernest L. Schusky, 『Manual for Kinship Analysis』, 1972). 신라인들은 기본적으로 부계(父系) 종족을 유지했다.
신라의 성골 종족은 왕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왕의 아버지(세상을 떠났지만)를 시조로 하는 살아 있는 사람들로 구성된 부계종족이 성골이 됐다. 구체적으로 성골은 왕과 그의 형제, 그리고 그들의 자녀들로 구성된 형제 공동가족이었다. 거기에 더해 왕과 형제의 딸들로 출궁하지 않고 있던 사람들이 포함됐다(이종욱, 『신라골품제연구』, 1999). 이때 정치적 지위인 왕위는 성골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장치가 됐고, 친족 집단인 성골 종족은 왕을 배출하는 확고한 사회적 집단이 됐다.
실제로는 법흥왕의 아버지인 제22대 지증왕(智證王)을 시조로 하는 형제 공동가족이 첫 성골 종족이 됐다. 이에 따라 법흥왕과 그의 동생인 입종(立宗) 갈문왕이 성골이 된 것은 분명하다. 『화랑세기』에 따르면 법흥왕에게 진종(眞宗, 어머니가 확실치 않아 성골인지 단정하기 어려움) 전군(殿君)과 보현(普賢) 공주라는 두 동생이 더 있었다. 보현 공주는 법흥왕이 재위하고 있는 동안, 그것도 혼인을 해 남편의 집으로 가기 전 왕궁에 거주할 때에 한해 성골이었다.
법흥왕이 세상을 떠난 뒤 조카인 진흥왕이 일곱 살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며 (『삼국사기』 4) 그의 아버지인 입종 갈문왕을 시조로 하는 새로운 성골 종족이 만들어졌다. 진흥왕에게는 만호라는 누이동생과 숙흘종이라는 남동생이 있었다. 그런데 『화랑세기』를 보면 이들은 입종 갈문왕과 지소 사이에 출생하지 않았기에 성골 신분을 가질 수 없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진흥왕과 사도황후 사이에는 동륜(銅輪)과 금륜(金輪)이라는 아들이 출생했다. 이 두 아들은 성골이었다. 진흥왕은 566년 동륜을 태자로 삼았다(『삼국사기』 4). 동륜은 572년 3월 진흥왕의 후궁 중 한 명이었던 보명을 범하러 보명궁에 들어가다 큰 개에게 물려 죽었다(『화랑세기』 『6세 세종』 조). 그래서 금륜(제25대 진지왕)이 태자가 되었다.
김춘추는 진골로 강등된 용수의 아들
576년 8월 진흥왕이 세상을 떠나고 진지왕이 왕위에 오르면서 진흥왕을 시조로 하는 새로운 성골 종족이 만들어졌다. 동륜의 아들이었던 백정(후에 제26대 진평왕·眞平王), 백반(후에 진정 갈문왕), 국반(후에 진안갈문왕)이 성골이 됐고, 진지왕의 아들이었던 용수와 용춘도 물론 성골이 됐다.
진지왕이 그의 어머니인 사도태후 등에 의해 폐위되고, 왕위는 동륜 태자의 아들이며 진지왕의 조카인 백정(진평왕)에게 넘어갔다. 579년 진평왕이 즉위하면서 진평의 아버지 동륜을 시조로 하는 새로운 성골 종족 집단이 만들어졌다. 진평왕이 즉위하는 순간 동생인 진정 갈문왕, 진안 갈문왕과 그들의 자녀들(선덕·천명·진덕 등을 포함)이 성골이 된 것이다.
폐위된 진지왕과 그의 아들인 용수와 용춘은 성골에서 진골로 신분이 떨어졌다. 이것이 족강(族降)이다. 진지왕계 종족인 용수와 용춘은 살아있는 동안 성골과 진골 두 신분을 가졌다. 그리고 603년 용수와 진평왕의 장녀 천명(天明)의 아들로 태어난 김춘추(金春秋·태종무열왕)는 아버지의 신분을 따라 태어나며 진골이 됐고, 654년 왕위에 올랐지만 성골이 되지 못하고 진골 신분을 가지게 되었다.
진평왕과 진정 갈문왕 그리고 진안 갈문왕의 삼형제는 딸은 낳았으나 아들을 낳지 못했다. 그 결과 『삼국유사』 ‘왕력’ ‘제27 선덕여왕’조에 성골의 남자가 사라졌다(聖骨男盡)고 나오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비록 여자지만 성골 신분을 유지하고 있던 덕만(제27대 선덕여왕)과 승만(진덕여왕)의 즉위가 가능했다.
법흥왕에서 진평왕까지는 성골 종족의 남자를 왕으로 삼았다. 왕위 계승은 왕의 아들만이 아니라 성골 종족으로 왕의 다음 세대에 속한 사람이면 가능했다. 실제로 진흥왕 · 진평왕의 즉위는 부자 간이 아니라 조카에게 왕위가 계승된 것이다. 성골 종족의 왕위 계승 원리에 따르면 아들에게 왕위가 넘어가거나 조카에게 넘어가는 데에는 차이가 없었다.
성골 남자와 정실 사이 자식이면 성골
성골의 거주 구역은 성역(聖域)이었다. 신라 골품제의 특징 중 하나로 거주지에 따른 신분 편성을 들 수 있다. 성골의 거주 구역은 대궁(大宮) · 사량궁(沙梁宮) · 양궁(梁宮)의 삼궁(三宮, 『삼국사기』 39, ‘직관’ 중). 삼궁은 성골이 거주하던 신성 공간 즉 성역이었다. 대궁은 월성(月城), 사량궁은 금성(金城), 양궁은 만월성(滿月城)에 있었다(이종욱, 『신라의 역사 I』, 2002). 왕의 누이, 왕과 왕의 형제의 딸들도 혼인해 삼궁을 떠나기 전까지는 성골 신분을 가질 수 있었다. 월성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황룡사는 성골 왕들의 신성함을 보장하는 사찰이 되었다.
성골의 경우 성골 남자들의 정궁(正宮) 부인들이 생산한 자녀들이 성골이 되었다(이종욱, 『화랑세기로 본 신라인 이야기』, 2000). 그 결과 성골 종족은 그 규모가 작아졌기에 종족을 유지하기에 매우 취약한 면이 있었다. 부계제 전통사회의 경우 아이를 못 낳거나 여자만 생산해 부계 종족을 이어나갈 수 없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삼국유사』에서 구분한 신라 중고시대(법흥왕~진덕여왕)의 경우 진평왕을 마지막으로 성골 종족 내에 남자가 모두 사라졌다. 이로써 성골의 왕위 계승에 비상조치가 이루어진 것을 볼 수 있다. 여왕의 즉위가 그것이다. 그리고 진덕여왕을 마지막으로 성골이 모두 사라졌다. 왕위는 비워둘 수 없는 자리였기에 성골과 가장 가까운 혈족이었던 김춘추가 칠성우의 도움으로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성골이 만들어지기 전에도 신라인들에게는 엄격한 신분제가 있었다. 실제로 성골 신분을 만든 율령반포 이전에는 “옛날부터 진골(古之眞骨)들이 왕위를 이었다”(『화랑세기』 ‘6세 세종’ 조)는 이야기가 나온다. 596년 용춘공이 화랑 중 우두머리 화랑인 풍월주가 되었을 때 “골품이란 것은 왕위(王位)와 신위(臣位)를 구별하는 것”이라고 한 말이 나온다(『화랑세기』 ‘13세 용춘공’조). 여기서 말하는 왕위는 성골이, 신위는 진골 이하 신분을 가진 자들이 차지하는 자리였다.
- 중앙선데이 | 이종욱 교수 | 제378호 | 2014.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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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라인의 모습을 묘사한 기마인물형 토기들. 신라시대에는 성골 · 진골과 6개 두품(頭品)으로 나누어진 엄격한 신분제도인 골품제가 있었다. 신분에 따라 취할 수 있는 관직 · 관등이 구분됐고 사용할 수 있는 옷 · 도구 · 주택과 탈것도 달랐다. 사진 왼쪽은 장식이 많은 것으로 보아 신분이 높은 사람일 것으로 보인다. 가운데는 장식이 비교적 적고 오른쪽은 거의 장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왼쪽보다 상대적으로 신분이 낮은 사람들로 추정된다. [사진 권태균] |
육두품 설계두, 당나라서 전공 세워 대장군까지 올라 |
⑭ 신분의 벽, 신라 골품제
신라 제26대 진평왕 때 설계두(薛계頭)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벗들과 술을 마시면서 이런 말을 한다.
“신라에서는 사람을 등용할 때 골품(骨品)을 논한다. 아무리 큰 재주와 뛰어난 공이 있어도 신분에 따라 법이 정해놓은 한도를 넘어 승진할 수 없다. 나는 서쪽 중화국 (中華國·당시 당나라)으로 들어가 세상에 드문 지략과 비상한 공을 세워 영달의 길에 나아가 (관직을 가져) 천자의 곁에 출입해야 만족하겠다(『삼국사기』 권47).”
타고난 신분 때문에 신라에서는 더 이상 큰 뜻을 펼칠 수 없어서 당나라로 가겠다는 말이다. 골품제 사회의 한계를 지적한 것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설계두는 621년 몰래 큰 배를 타고 신라를 떠났다. 그는 당 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하러 나섰을 때 자천하여 좌무위(左武衛) 과의(果毅)가 됐으며 요동 주필산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가 세운 공(功)은 일등이었다. 당 태종은 “우리나라 사람도 죽음을 두려워하여 형세를 보고 전진하지 않는데, 외국인으로서 나를 위하여 전쟁에서 죽었으니 무엇으로 그 공에 보답하겠는가” 라고 신하들에게 물었다. 설계두의 소원을 전해 들은 당 태종은 자신의 옷을 벗어 그에게 덮어준 뒤 대장군의 직을 주고 예를 갖추어 장사 지냈다.
설계두의 일화에서 보듯 신라는 골품제라는 매우 엄격한 신분제도를 가지고 있었다. 성골(聖骨) · 진골(眞骨)의 2개 골(骨) 신분과 6두품(頭品)에서 1두품까지의 6개 두품 신분이 있었다. 설계두는 성골이나 진골 같은 최고의 신분이 아닌 그 아래 6두품 정도의 계급 출신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화랑세기』 ‘13세 용춘공’ 조에는 왕위(王位)와 신위(臣位)를 구별하는 것이 골품이라는 말이 나온다. 법흥왕은 520년 율령을 반포, 신분에 따라 백관 공복(公服)의 옷 색깔을 달리 정했다(『삼국사기』 권4). 또 6부인(六部人 · 왕경 6부의 사람들로 왕을 포함한 왕경인) 복색(服色)의 존비(尊卑)제도를 만들었다(『삼국사기』 권33 ‘색복’ 조). 여기서 말하는 존비 제도는 골품 신분을 구별한 것을 뜻한다. 성골 · 진골과 6개 두품 외에 지방인의 신분으로 진촌주(眞村主)와 차촌주(次村主)가 있었다. 그 밑에 평인(平人·백성) 신분을 편제했다(이종욱, 『신라골품제연구』, 1999). 이 같은 골품 신분은 출생에 의하여 결정되고 신분 상승은 불가능했다.
신라에서 사람을 등용할 때 논했던 골품의 기준은 족(族)이었다. 족에는 종성(宗姓, 박 · 석 · 김씨)과 육부성(六部姓, 이·정·손·최·배·설씨)을 떠올릴 수 있다. 각 성(姓)은 하나의 씨족(clan)을 뜻한다. 각 씨족에는 서라벌 소국 형성 전후에 활동한 시조들이 있다. 그런데 법흥왕이 골품 신분을 정했을 때는 각 씨족이 만들어진 지 수백 년도 더 지났기에 씨족 성원 수가 크게 늘어났다. 그동안 씨족이 종족 (宗族·lineage)들로 나누어졌다. 종족 중 중심 종족은 신분적 지위를 유지했고 방계로 된 종족들은 신분이 떨어지는 족강(族降)을 당했다. 신라 중고시대(법흥왕~진덕여왕)에 새로운 왕을 중심으로 새로운 성골 종족이 만들어졌던 것이 그 예라 하겠다.
성골 · 진골은 종성을 가진 족을 대상으로 한 신분이었다. 그 이전 왕을 배출하던 종족은 진골이라 하였다. 그중 석씨족은 제16대 흘해왕 이후로는 정치적으로 도태되었다. 따라서 520년 당시의 진골은 성골이 되지 못한 김씨족과 박씨족의 종족 중 두품 신분으로 족강이 되지 않은 종족들이 차지한 신분이었다.
두품 신분은 육부성을 가진 사람들을 대상으로 편성했다. 6두품은 왕경을 구성한 6부의 각 부의 지배세력을 배출하던 종족들의 몫이었다. 5두품은 부를 나눈 구역인 리(里)의 지배세력을 배출하던 종족들이 차지했다. 4두품은 리를 나눈 마을의 세력들이 되었다. 6두품·5두품·4두품은 각기 독자적인 영역을 직할했다. 그러한 직할지 중 6두품이 살던 부의 중심 구역의 일반 백성은 3두품, 5두품이 살던 리의 중심 구역의 일반 백성은 2두품, 4두품이 살던 마을의 일반 백성은 1두품이었다고 짐작해본다(이종욱, 『신라골품제연구』, 1999). 두품 신분은 육부성을 대상으로 편성된 신분이었다. 분명히 말하지만 왕을 배출했던 종성에 속한 세력들은 왕국 전체의 지배세력으로 6촌이나 6부의 세력이 된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지방 신분인 진촌주는 행정촌(직경 10㎞ 정도 공간, 왕경의 부 정도의 규모)의 지배세력이고 차촌주는 자연촌(직경 3~4㎞ 정도, 왕경의 리 정도의 규모)의 지배세력들이었다.
이렇게 보면 신라의 골품 신분은 지역적인 편제와 무관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성골은 월성의 대궁, 금성의 사량궁, 만월성의 양궁으로 이루어진 3궁에 거주했다. 진골은 3궁을 둘러싸고 만들어진 도시인 왕도(王都)에 살았다. 6두품은 부(部)의 중심 마을에, 5두품은 리(里)의 중심 마을에, 4두품은 리를 나눈 마을에 살았다. 그리고 지방의 진촌주는 행정촌의 중심 마을에, 차촌주는 자연촌의 중심 마을에 살았다.
설씨의 시조 호진의 후손으로 이루어진 습비부(習比部·옛 명활산고야촌)의 설씨족의 경우 세대를 지나며 여러 종족으로 나뉘었다. 일부 종족은 신분적 지위를 유지해 부의 지배세력으로 남았다. 족강한 종족은 리의 지배세력이 되기도 했다.
골품 신분층 자체에 역사적 변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진덕여왕을 마지막으로 성골이 소멸된 것이 그 하나이고, 삼한 통합을 전후하여 왕경인의 3두품·2두품·1두품이 통합되어 평인 신분으로 된 것이 다른 하나다.
설계두는 습비부의 세력가인 6두품으로 습비부의 중심 마을에 살았을 가능성이 있다. 그를 배출한 족은 또 다른 경로를 통해 두품 신분을 가졌을 수 있다. 『삼국사기』 2권 점해왕 3년(251) 조에는 “한기부(漢祇部) 사람 부도(夫道)가 가난하지만 아첨함이 없고 글과 계산을 잘해 이름이 알려졌기에 왕이 불러 아찬(阿?)으로 삼고 물장고(物藏庫)의 사무를 맡겼다”는 대목이 나온다. 이런 예에 따라 설계두의 조상 중 누군가의 능력으로 조정의 관직을 갖게 되었고 그에 따라 두품 신분을 받았을 수도 있다.
| 신라 제23대 법흥왕은 율령을 반포하고 골품제 등 각종 정치·사회제도를 정비했다. 법흥왕의 능이라고 전해오는 경주시 효현동의 고분. 사적 제176호. |
설계두가 당나라행을 결심하게 된 것은 신분 상승에서 차별을 받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신라에는 골품 신분에 따른 관직(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주어지는 직)과 관등(왕정에 참여한 대가로 보수를 주는 기준)의 상한선이 있었다. 법흥왕 7년(520) 율령이 반포된 이후 령(令 · 장관에 해당)-경(卿 · 차관에 해당) -대사(大舍)-사(史)의 4단계 관직이 설치됐다.
신문왕 5년(685)에는 사지(舍知)라는 관직이 추가돼 령-경-대사-사지-사의 5단계 관직체계를 갖추었다. 령은 진골만이 오를 수 있던 관직이다. 경은 진골은 물론 6두품도 오를 수 있었다.
관등은 왕경인에게는 17등급의 경위(京位)가(『삼국사기』 38권), 지방인에게는 11등급의 외위가 각각 설치·운용됐다(『삼국사기』 40권). 왕경인 중 진골은 1등급인 이벌찬(각간)까지 오를 수 있었다. 6두품은 6등급인 아찬(阿?), 5두품은 10등급인 대나마, 4두품은 12등급인 대사까지 오를 수 있었다.
지방인 중 진촌주는 외위 술간(경위로 8등급인 사찬), 차촌주는 외위 5등급인 선간(選干·경위로 11등급인 나마)까지 오를 수 있었다. 신라에서는 왕경인과 지방인을 엄격하게 차별대우했다. 무관(武官)의 경우 장군(將軍)-대감(大監)-대두(隊頭)-항(項)-졸(卒)의 5단계 직이 설치·운용되었다. 장군은 진골만이 차지할 수 있던 무관직이었고, 6두품인 설계두가 오를 수 있던 무관직은 대감까지였다.
6두품이라는 신분적인 제한, 설씨라는 족적인 한계로 인하여 설계두는 령이나 장군이 될 수 없었다. 대아찬의 관등을 받을 수도 없었다. 당나라에 간 설계두는 큰 공을 세웠다. 비록 전사했지만 그 공으로 인하여 당나라의 대장군이 되어 설계두가 원하던 영달을 하게 되었다. 당나라에 설계두의 가족들이 있었다면 대장군에 맞는 신분적인 대우를 받았을 것이다.
신라는 정치·사회·경제·종교·문화 등 모든 부문을 포함한 사회체제가 서로 얽히고설켜 연결되어 작동하던 골품체제 사회였다. 골품 신분에 따른 특권과 의무의 굴레는 신라가 멸망하며 사라졌다.
- 중앙선데이 | 이종욱 교수 | 제380호 | 2014.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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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라인의 모습을 묘사한 기마인물형 토기들. 김유신이 살았던 재매정택. 17세 풍월주인 염장공은 김유신과 김춘추(태종무열왕)에게 정치자금 성격의 돈을 대준 것으로 기록돼 있다. [사진 권태균] |
하급관리, 목숨 건 생계형 절도 … 권력층은 대놓고 뇌물 |
⑮ 신라의 작은 도둑, 큰 도둑
신라는 골품 신분에 따라 특권과 의무가 달리 정해졌던 사회다. 당연히 경제력도 차이가 났다. 왕이 하사하는 곡식의 양에도 차별을 두었다. 제33대 성덕왕은 716년 성정왕후를 궁에서 내보내며 벼 1만석을 주었다. 712년 성덕왕은 삼한통합 때 제 일의 공을 세웠던 김유신이 죽고 난 뒤 그의 아내를 부인으로 삼고 매년 곡식 1000석을 주기로 했다(『삼국사기』 8). 제31대 신문왕은 삼한통합 때 당나라 황제의 조서에 회답하는 표문을 잘 지었던 강수가 죽자 그의 아내에게 벼 100석을 주었다.(『삼국사기』 46).
| | | 신라시대 유물인 굽다리 접시. 성골 · 진골 · 두품 신분 등에 따라 사용하는 용기와 재질이 달랐다. | 진골 중 왕실의 일원이었던 여자에게는 1만석, 진골 김유신의 처에게는 1000석, 6두품 강수의 처에게는 100석의 곡식을 준 사실을 알 수 있다. 신분에 따라 10배의 차이가 나는 셈이다. 5두품의 처에게는 10석, 4두품의 처에게는 1석의 벼를 준다는 계산이 가능하다. 그 이하 신분의 백성(평인)들은 세금과 부역의 의무를 가졌다.
신라 골품사회에도 도둑질이 있었다. 왕의 측근에서 활동하던 신료들이나, 하급 관리를 막론하고 도둑질은 널리 행해졌다.
『삼국사기』 48, 「검군(劒君)」전은 하급 관리의 도둑질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검군은 대사(大舍) 구문의 아들로 사량궁(沙梁宮)의 사인(舍人, 궁중의 일을 맡은 하급 관리)이 되었다. 왕궁의 사인은 4두품이거나 잘해야 5두품 정도 신분을 가진 자들로 경제적 보수를 제대로 받지 못하던 관리들이다. 제26대 진평왕 49년(627) 8월 서리가 내려 흉년이 되자 이듬해 봄과 여름 백성들은 자식을 팔아먹고 살았다. 그때 궁중의 모든 사인들이 모의하여 창예창(唱?倉)의 곡식을 도둑질하여 나눠가졌는데 검군 홀로 이를 받지 않았다.
사인들이 그에게 “여러 사람이 다 받는데 그대만 홀로 물리치니 무슨 까닭인가. 만약 적은 것이 문제라면 다시 더 주겠다”고 했다. 검군이 웃으며 “나는 근랑(近郞)의 낭도로 이름을 올리고 풍류도를 수행하고 있다. 의리에 어긋나면 천금의 이익이 있더라도 마을을 움직이지 않는다”고 답했다. 근랑은 화랑이 된 대일(大日) 이찬의 아들이다.
사인들은 검군을 죽이지 않으면 자신들의 행위가 누설될 것을 우려했다. 검군은 그들이 자기를 죽일 것을 알고 근랑에게 작별 인사를 하며 “오늘 이후에는 다시 서로 만나볼 수 없겠습니다”라고 했다. 근랑이 그 이유를 묻자 검군이 경위를 간략히 설명해줬다.
“어찌 담당 관리에게 말하지 않느냐.”(근랑) “제가 죽음이 두려워 여러 사람에게 죄를 지게 하는 것은 인정상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입니다.”(검군) “그러면 어찌 도망가지 않는가.”(근랑) “그들이 잘못됐고 내가 옳은데 오히려 제가 도망한다면 장부가 아닙니다.”(검군)
여러 사인들이 술자리를 베풀고 사과하는 체하면서 검군을 불렀다. 그리고는 검군의 음식에 은밀히 독약을 넣었다. 검군은 그것을 알면서도 억지로 먹고 죽었다.
검군의 사건에 나타난 사인들의 도둑질은 흉년에 가족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저지른 ‘생계형’으로 보인다. 궁의 창고 곡식을 턴 이러한 행위는 분명히 범죄였다. 그렇기에 이들은 검군을 죽이지 않을 수 없었다.
| | | 경주 남산신성(南山新城)에 세워진 비. 성을 축조한지 3년 이내에 파괴되면 성을 쌓은 사람들이 벌을 받는다는 서약을 하도록 하는 내용이 있다. 신라의 율령에는 도둑질에 대한 처벌 내용이 틀림없이 있었을 것이다. | 신라시대에는 도둑질한 자를 처벌하는 규정을 찾을 수 없다. 그러나 고조선이나 부여에서는 도둑질을 엄벌에 처했다는 기록이 있다.
“남의 물건을 훔칠 경우 남자는 데려다 그 집의 노(奴·종)로 삼고, 여자는 비(婢·여자 종)로 삼는다. 다만 스스로 속죄하려는 자는 1인 당 50만 전(錢)을 내야한다(『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 8하).“ 널리 알려진 (낙랑)조선의 8조 금법(禁法) 중 한 조목이다.
“절도한 자는 12배로 갚아야 한다(『삼국지』 30, 「부여(夫餘)」 전).” 이는 부여의 법률이다. 미루어 짐작하건대 신라에서도 도둑질은 엄벌에 처했을 것이다. 이러한 도둑질은 신라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고려·조선 때도 행해졌다.
신라에서는 사인과 같은 하급관리뿐 아니라 조정에서 충분한 보수를 받던 진골 신료들도 도둑질을 한 예가 있다. 17세 풍월주(화랑도의 수장)를 지낸 염장공(廉長公 · 586~648)은 김춘추를 왕으로 세우려 활동한 결사인 칠성우 중 한 사람이었다(『화랑세기』 「17세 염장공」 조). 그는 16세 풍월주 보종공의 부제(副弟)로 6년간 있으며 그 집안일을 해주고 재물을 취하여 사용했다. 염장공은 15세 풍월주 유신공의 부제였던 춘추공(김춘추)을 자신의 부제로 삼았다가 풍월주의 지위를 물려주었다. 김춘추는 유신공의 뒤를 이어 16세 풍월주가 됐어야 하는데 두 번 양보하여 18세 풍월주가 됐다. 염장공은 선덕공주에게 몰래 붙어 631년 5월 일어났던 칠숙의 난을 다스리고 그 공으로 발탁되었다. 632년 정월 진평왕이 세상을 떠나고 선덕여왕이 왕위에 오르자 염장공은 조부(調府·호별로 토산물을 거두던 관청)에 들어가 령(令)이 되어 유신공과 춘추공 양공에게 재물을 공급하여 주었고 또한 사적으로 치부를 했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염장공은 유신공과 춘추공에게 정치자금을 댄 것이다.
그런데 그때 사람들이 염장공의 집을 가리켜 수망택(水望宅, 35금입택 중 하나)이라 했다. 금이 들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면 홍수와 같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염장공은 미생공(10세 풍월주를 지낸 사람으로 조부의 령이 되어 치부함)과 비교 되기도 했다. 미생공은 극도로 사치를 했으나 염장공은 검약을 몸소 실천했으니 그 부유함이 미생공보다 컸다고 한다. 신라 사람들은 염장공이 국가에 들어오는 조세를 빼돌려 부를 축적하고 그것을 정치자금으로 제공한 사실을 다 알고 있었는데 이를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19세 풍월주를 지낸 흠순공(欽純公 · 유신공의 동생)은 재물에 어두워 늘 염장공에게 구했다. 염장공은 웃으며 “네가 나를 곳간으로 삼는데 나의 아이를 네가 기르지 않는다면 나는 손해다”고 했다. 흠순공은 이에 여러 아들에게 염장공의 딸을 아내로 맞게 하여, 그 딸들이 염장공의 재산을 나누어 시집오게 했다.
흠순공의 아내 보단(菩丹)은 “염형(廉兄, 염장공)은 색(色)을 좋아하고 재물을 탐하니 그 딸을 맞으면 가풍(家風)을 손상하게 될까 염려됩니다”고 했다. 흠순공은 “색을 좋아하는 것은 성품이다. 나 또한 그대가 없었다면 곧 염형과 같았을 것이다. 내가 재물을 탐했다면 곧 집이 부유해져서 그대로 하여금 고생을 하지 않게 했을 것이니, 호색탐재(好色貪財) 또한 할 만하지 않는가”라고 했다.
보단은 막을 수가 없었다. 염장공의 딸들은 과연 행실이 없었다. 흠순공 또한 심하게 책망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염장공은 정처인 보단과 사이에 여섯 명의 아들을 두었고, 보단의 언니 이단(利丹)과의 사이에 세 아들을 두었다. 그 중 셋째 아들 반굴공(盤屈公)만 염장공의 딸이 아니라 유신공의 딸 영광(令光)을 아내로 맞아 영윤(令胤)이라는 아들을 낳았다.
흠순공은 여러 차례 큰 전쟁을 치렀으나 패한 일이 없었고, 사졸(士卒)을 사랑하기를 적자(赤子, 어린아이)같이 했다. 조정에서는 흠순공을 삼보(三寶)의 한 사람으로 삼았다. 흠순공의 아들 중 세 명이 집사부(執事部)의 장인 중시(中侍)가 되었다. 흠순공의 예를 보면 염장공이 도둑질한 재물을 받았어도 그 아들들의 정치적 출세에 지장이 없었던 것이다. 염장공이나 흠순공은 잘만 살았다.
역사상 관리들에게 도덕적인 측면에서 비난받지 않는 불법적 수익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존재했다. 그러한 수익은 뇌물이라 할 수도 있으나, 선물이거나 감사의 표시라 할 수도 있는 것들로 이 경우 ‘양심적 수뢰(honest graft)’ 정도로 부를 수도 있겠다(Gerhard E. Lenski, 『Power and Privilege』, 1966).
그런데 현대 사회의 뇌물수수는 역사상 관리들의 뇌물수수나 도둑질과는 그 결과가 다른 것이 사실이다. 지난해 한국에서 원전비리 사건이 터졌다. 원전 핵심 부품인 제어케이블의 시험성적서를 위조해 불량 케이블 180억원 어치를 납품한 사실이 드러났다. 검찰과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에 따르면 원전 가동 중단 · 연기 등으로 인한 국가·사회적 손실은 납품액의 677배에 달하는 12조 2000억 원이나 됐다. 더 공포스러운 것은 이 원전제어 케이블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으면 일본의 후쿠시마(福島) 원전 사고처럼 대재앙으로 번질 수 있다는 점이다.
당시 설비 · 부품을 납품하기 위해 원전 관련업체들이 정권과 한국전력 · 한수원 고위층 · 간부들에게 금품을 준 권력형 비리 사건이 함께 적발됐다. 뇌물 액수를 1억8000만 원으로 계산하면 6만7700배의 국가·사회적 손실을 발생케 하는 셈이 된다. 한국 사회의 도처에서 작동하고 있는 뇌물 경제를 단숨에 뿌리 뽑아야 하는 이유가 분명하다. 우리 헌법 제7조 1항은 “공무원은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이며, 국민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현대 사회 공직자의 뇌물수수를 역사적 전통을 이은 것이라고 하여 그대로 넘어갈 수 있는 일은 결코 아니다. 그나마 이 시대의 검군이 도처에 있어 다행스럽다.
- 중앙선데이 | 이종욱 교수 | 제382호 | 2014.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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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종욱 교수 서강대학교 사학과 졸, 문학박사, 서강대 사학과 부교수, 교수, 서강대 총장 역임, 현재 서강대 지식융합학부 석좌교수. 『신라국가 형성사연구』 등 22권의 저서와 다수 논문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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