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천주교 성지순례- 치명자산성지
누이여, 천국에 가서 다시 보자!
김 대 원
dk9595@anmal.net
주일인 오늘은 전주의 천주교 성지인 ‘치명자산성지致命者山聖地’를 찾아갔다. 전북 전주시 전주 한옥마을 동남쪽 완산구 대성동 치명자산의 가파른 산등성이에 우뚝 세워진 십자가가 선명하게 보이는 산정부근에 자리하고 있는 치명자산성지는 전라북도 기념물 제63호이다. ‘치명자致命者’는 ‘목숨을 바친 자’라는 뜻으로 가톨릭에서 ‘순교자’를 이르던 말이다. 산의 본래 이름은 중바위산(승암산)이라고 불렸었는데, 순교자묘가 조성된 다음에 천주교에서 순교자를 의미하는 치명자산致命者山이라 부른다.
안내소에 비치된 팸플릿을 들고 순례를 시작했다. 성지는 치명자산 산길을 따라 500m 정도 올라가면 당시 초남이에서 복음을 전하다 신유년(1801) 천주교박해로 순교한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의 가족 순교자 일곱 명의 합장묘가 있다. 이 묘소는 1914년 3월에 보두네 신부(Francois Xavier Baudounet, 尹沙勿, 1859~1915. 전주 전동성당 건축한 신부)가 소속 본당 신자들과 함께 전라북도 김제군 용지면 재남리 바우백이에 가매장 되었던 묘소를 파묘하여 그해 4월19일 지금의 자리로 이장하였다. 묘지 아래에는 절벽에 붙여서 성지순례성당을 지어 놓았고, 오르내리는 산길에는 십자가의 길 기도처를 조성하였으며 입구에는 성직자 묘역도 조성되어 있다. 그리고 치명자산 아래쪽에는 순교자의 언덕이라는 의미의 파리 몽마르뜨 언덕처럼, 야외 음악회와 소풍지로도 사랑받는 몽마르뜨 광장과 신도들이 손수 조성한 기도 꽃길은 조용히 명상하며 정상까지 오를 수 있어 나처럼 천주교 신자가 아닌 이들도 즐겨 찾고 있다고 한다.
나는 여직 지지 않은 벚꽃이 남아 있는 ‘몽마르뜨 광장’을 지나 ‘파티마 성모동산’에 이르러 두 손을 모아 목례를 한 후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며 기도하는 ‘골고타 십자가의 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이 길은 예수님께서 사형선고를 받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가 내려져 무덤에 안치되기까지의 행로와 “한국 순교사의 가장 찬란한 진주”라고 칭송을 받는 동정 부부 순교복자 이순이 루갈다를 묵상하며 걷는 길이다. 겨우 한 사람이 걸어 올라갈 수 있을 정도의 좁은 길이지만, 코너마다 세워진 십자가에는 ‘제1처 예수 사형선고 받으심’이라 새겨진 동판이 달려있는 것을 시작으로 ‘제14처 예수님께서 무덤에 묻히심을 묵상합시 다.’까지 이어져 있다. 안내 팸플릿에는 각처마다 이순이 루갈다의 심경을 독백의 형식을 빌려 적어 놓았는데, 절절히 가슴을 울리며 그 곧은 신심信心에 저절로 두 손을 모으고 머리 숙이게 했다.
‘제1처 예수님께서 사형선고 받으심을 묵상합시다.’편을 보면, “구세주 예수님, 저희를 위하여 아무런 죄도 없이 극심한 모욕과 사형선고를 받으셨으니 죄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영원한 벌에서 저희를 구원하소서.’라고 적혀 있고 그 밑으로 이순이 루갈다의 말이 독백처럼 이어졌다.
“시월 삼십일에 이 죄인을 관청의 노비로 정하여 벽동으로 멀리 유배시키기로 하였는데, 다시 관청에서 데려가 자기들끼리 이러니저러니 하면서 ”너희들이 천주를 공경하니 나라의 법에 따라 죽어 마땅하다” 하더라. 그러자 다른 사람들과 함께 “천주를 위하여 죽겠노라.” 하면서 바삐 앞다투어 관원 앞으로 나가서 더욱 바짝 다가앉아 수령에게 큰 소리로 말하기를 “나라의 녹을 먹으면서 왜 나라의 명에 순종하지 않느냐?”하고 치명자들이 여러 가지로 말하였다. 그러나 관원들이 들은 체도 아니 하고 끌어 내치므로 어쩔 수 없이 길을 떠날 때, 길을 가면서 치명하고자 하는 바가 더욱 간절하더니, 백여 리를 겨우 나가다가 다시 끌어들이니 이는 더 할 수 없이 극진한 은총이라.”
그리고 마지막 ‘제14처 예수님께서 무덤에 묻히심을 묵상합시다.’ 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집에서 기별이 오기를, 유중철의 시신을 내어다가 입었던 옷을 보니, 그 누이(이순이)에게 편지를 부치면서 나를 권면하고 위로하여 ‘누이여, 천국에 가서 다시 보자.’ 하였다고 하시더라.
뜻을 정하고 사 년 동안 살면서 동정 부부로 살자던 약속을 어길까 서로 염려했는데, 저 사람의 평생 품행을 살피건대 구태여 애달파 할 일이 없구나! 즐겨 삼가고, 열심히 사랑하며, 성실하게 살던 자세는 영원히 복되다 하리다!
봄뜻이 스며오기 시작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오늘은 초여름 같은 날씨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을 겨를 도 없이 한 구비 한 구비 마다 세워진 십자가 앞에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묵상하며 걸어 올라갔다.
치명자산 산길을 따라 500m 정도 올라가니 드디어 산상기념성당에 도착했다. 산정 근처에 자리한 지금의 성지는 해방 이후 천주교 전주교구가 1987년부터 1994년까지 약 8년 동안 조성한 성지이다. 나는 ‘순교복자 가족 묘역’으로 올라갔다. 대형십자가가 세워진 정상의 예수 마리아 바위가 올려다보이는 곳에 둥글게 조성된 묘에 합장 배례하였다. 이곳에는 호남에 처음 복음을 전하고 선교사 영입과 서양 선진 문화 수용을 하다가 국사범으로 처형된 유항검(아우구스티노)과 그 부인 신희, 동정 부부로 순교한 큰아들 유중철(요한)과 며느리 이순이(루갈다), 둘째 아들 유문석(요한), 제수 이육희, 조카 유중성(마태오) 7분이 하나의 유택에 모셔져 있다. 유항검은 완주군 이서면의 초남 부락이 출생지로 전라도에서 첫 번째로 세례받은 천주교 신자이다. 그는 남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며, 그의 아들이며 호남의 사도라 일컫는 세계에서도 사례가 없는 유중철 요한과 며느리 이순이 루갈다는 활동적이며 독실한 신앙생활을 위해 4년 동안 동정 부부로 지내다가 처참하게 처형당해 순교하였다. 이렇듯 바로 당시 초남이에서 복음을 전하다 순교한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의 가족 순교자 일곱 명의 합장묘인 것이다. 이분들은 1801년(순조 1년) 신유박해 때인 9월부터 4개월여에 걸쳐 전주 남문 밖(현 전동성당), 전주옥, 숲정이에서 처형되어 멸족되었다. 살아남은 노복과 친지들이 은밀하게 시체를 거두었으나 고향인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 초남 땅에 묻히지 못하고 들 건너 재남리 바우백이에 가매장되었다.
이 순교자들 중 다섯 명은 2014년 교황 프란치스코에 의해 시복諡福되었다. 시복은 로마교황청의 엄격한 심사를 거쳐 결정되며 거룩한 삶을 살았거나 순교한 이에게 복자 칭호를 허가하는 교황의 공식선언을 말한다.
묘지 앞 상석위에는 ‘시복사성기도문’이 적힌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거룩한 순교자로써 십자가의 신비를 놀랍게 드러내시는 하느님, 찬미 받으소서.(생략)
특별히 청하오니, 현세의 온갖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신앙을 지킨 이 나라의 첫 순교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 성체께 대한 사랑으로 신망애 삼덕의 길을 항구하게 걸은 동정 부부 순교복자 유중철 요한과 이순이 루갈다, 교회를 위해 자신과 가정을 오롯이 봉헌한 이 고장의 첫 사도, 복자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와 동료 순교자들에게 시복 〮시성의 영광을 베푸시어 저희 모두 그들의 신앙을 본받아 순교자의 삶을 이어가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치명자산 전망대에 올라서니 전주 시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어 가슴이 탁 트이는 것 같았다. 이곳은 일몰 풍경을 담으려는 사진작가들도 많이 찾고 있다고 한다. 묘역 아래 있는 산상기념성당을 참배했다. 성당에는 이순이 루갈다 옥중편지를 담은 책자와 예수 마리아상 사진 등 각종 자료가 비치되어 있다. 전주교구 순교복자 24위의 사진과 당시 나이와 참수되거나 옥사한 날짜 등이 적혀 있어 숙연해지는 마음이었다.
내려올 때는 성직자 묘지를 거쳐 순례길을 걸었다. 그런데 예수 마리아 바위와 그 아래 묘지가 눈에 남아 자꾸 뒤돌아보게 했다. 특히 오순도순 금슬 좋은 젊은 부부로 살아보지도 못한 채, 독실한 신앙생활을 위해 동정 부부로 지내다 처형당한 유중철 요한과 이순이 루갈다 젊은 부부와 10살 미만의 어린 나이에 부모 형제를 잃고 각각 외딴 섬으로 유배된 어린아이들 생각에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아픈 가슴을 가눌 수가 없었다. (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