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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사(Histoire de la philosophie, 1926-1946?),
브레이어(Bréhier, 1876—1952)
- 제6권. 19세기, Le XIXe siècle 507-788
제6권. 19세기: 체계들의 시대(1800-1850)
제8장 셸링과 낭만주의자들–Schelling et Les romantiques 626-643
[간략한 생애와 작품들]
셸링(Friedrich Wilhelm Joseph von Schelling, 1775-1854)은 가정교사를 지낸 후에 1798년에 예나 대학에 교수로 지명 받았다.여기는 그는 1803년까지 머문다. 이 당시에 그는 뷔르쯔부르크 대학에 불려갔으며, 그는 1806년에 이 대학을 떠나 뮌헨으로 갔다. 거기서 그는 예술과학아카데미 비서(사무장)를 지냈다. 1920년에는 에를랑겐 대학에 자리를 차지하였다. 1827년에 뮌헨으로, 1841년 베를린으로 간다. 그의 주요 저작들 처음에 자연철학에 관한 것인데, 자연철학을 향한 이념들(Ideen zu einer Philosophie der Natur, 1797)(Idées pour une philosophie de la nature 1797), 세계영혼에 대하여(Von der Weltseele, 1798)(De l'Âme du monde, 1798), 체계의 초안(Entwurf eines Systems, 1799(Introduction à l'Esquisse d'un système de philosophie de la nature, 1799) 등이 있다. 그러고 나서 동일성 철학으로 나의 체계 서설(Darstellung meines systems, 1801)(Exposition de mon système de la philosophie, 1801), 브루노(Bruno 1803)(Bruno ou Du principe divin et naturel des choses 1802) 등이 있다. 그 다음에는 그의 생애에서 몇몇 짧은 글들만을 출판하였을 뿐인데, 철학과 종교(Philosophie und Religion 1804), 인간 자유의 본질에 관한 철학적 탐구와 그에 얽매인 대상들(Philosophische Untersuchungen über das Wesen der menschlichen Freiheit und die damit zusammenhängenden Gegenstände. 1809)(사후출판?)(Recherches philosophiques sur l'essence de la liberté humaine et les sujets qui s'y rattachent, 1809), 그리고 몇몇 작품들은 사후에 출판될 것인데, 예술철학(Philosophie der Kunst, 1803)(Vorlesung)(Philosophie de l'art, 사후출판), 세계 시대들(Weltalter, 1811)(Les Âges du monde), 신화의 철학(Philosophie der Mythologie, 1842)(Vorlesung), 계시의 철학(Philosophie der Offenbarung, 1854)(Vorlesung) 등이 있다. (626) (47NMF)
제1절 자연 철학 La philosophie de la nature 626
1803년에 셸링이 뷔르쯔부르크 대학으로 가기 위해 예나대학을 떠나는 그 때, 그의 나이 스물여덟(28살)이었다. 그는 이미 6년 전부터 유명해져 있었다. 이제 1802년에 대부분 작성했던 예술철학(Philosophie der Kunst, 1803)을 제외하고도, 그는 5년 내에 적어도 철학의 체계적인 여섯 편들을 출판했다. 그는 낭만주의학파의 잘 알려진 철학자였다. 그는 단호하게 [1801년] 피히테에 반대하는 방략을 취했다. 그는 청년기의 열정적인 폭발이 지속적이지 못했다. 또한 그는 그러고도 51년을 더 살았다. 그 동안에 그는 중요한 두 소품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출판하지 않았다. 이 시기의 대부분의 중요 작품들은 뮌헨의 강의, 에를랑겐의 강의, 베를린의 강의의 수고본들이다. 그의 영감의 근원도 또한 변한다. 초기에 라이프찌히와 예나에서 짧은 시기에는, 자연의 생명(삶), 즉 가장 하찮은 것에서 유기체적 생명에 이르기까지 삶의 권능들(ses puissances)의 위계질서는 예술과 더불어 그의 성찰의 주제였다. 1803년 이후 그는 뵈메(Böhme, 1575-1624)의 글을 읽었다. 그는 신비주의 신학자인 바아더(Baader 1765-1841)와 관계가 이어졌다. 그는 세계 속의 정신적 힘들의 작용으로 영성주의(spiritisme)의 이미지에 가까운 구체적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그의 노력 일체는 위대한 신적 드라마를 상상하는 데 있으며, 자연과 인간은 신적 드라마의 잡다한 국면들이라 한다. (627)
그의 이러한 진화는 우리를 놀라게 하지 않는다. 그의 자연 철학은 현상들의 법칙의 실험적 탐구인 베이컨(1561-1626) 또는 뉴턴(1642-1727)의 물리학과 거리가 멀다. 그 철학은 중세의 연금술을 거쳐서 고대 철학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르네상스의 전통을 다시 파악한 것이다. 이것은 셸링의 앞서 선(先)낭만주의 시대부터 특히 상-마르땅(Saint-Martin, 1743-1803)에게서 매우 생생한 전통이다. 상-마르땅의 저술들은 이미 독일에 널리 퍼져 있었다. 그에 따르면, 연속적으로 변하는 물질적 물체들은, 보이지 않고 소멸하지 않으며 변질하지 않는 씨앗들의 하찮은 생산물들이다. 그런데 이 자연 철학은 신지학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비물질적 힘들의 단순한 도구일 뿐인 물체들과 그 힘들 자체들을 혼동하는 유물론보다 더 위에 높이 있는 이 철학은, 정신적이고 신적인 실재성들과 인척관계인 생명에 도달한다. 만일 사람들이 어떤 놀라움을 다시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은 그 자연철학자가 매우 늦게서야 신지학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설명을 요구하는 것, 그것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그렇게 믿는 것처럼, 셸링의 사유의 진화라기보다는 이 진화가 지체된 것이다. (627)
자연철학의 전통적 도식은 아주 단순하다. 온자연(la Nature)은 다시 젊어지려는 무한한 권능(une puissance) 덕분에 독립적이고 자치적이다. 이 권능은, 이 힘들 중의 어느 하나의 우월성으로 인해 이 평형이 파괴될 때마다 매번, 대립되는 힘들 사이에서 평형을 취하려 한다. 이런 본질적 주제를 우리는 상-마르땅에서 발견한다. 그에게서 이 주제는 아마도 파라셀수스(Paracelse, 1494-1541)로부터 나온 것일 것이고, 그 당시 셸링의 사상을 지배하고 있었다. 매카니즘[기계주의](데카르트의 것이거나 뉴턴의 것이거나)이 정확한 규칙들에 따라서 실재성의 한 몫에서 다른 몫으로, 정신에게 지나가게 하는 허용하는 상응법칙들을 지배한다고 하는 하며, 반면에 이 [자연]철학은 자연을 하나의 전체로서 간주한다. 그 전체는 상호 파괴하는 경향이 있는 대립되는 힘들의 작용을 규제한다. 이것은 대립자들의 규제자인 로고스(Logos)에 대한 고대 이오니아적 사유의 공격적인 귀환[회귀]이다. (628)
셸링은 이 도식을 자기 시대의 과학에서 빌려온 이미지들로부터, 특히 화학과 생물학에서 빌려온 이미지들로 채웠다. 자연철학을 향한 이념들(Ideen zu einer Philosophie der Natur, 1797)(Idées pour une philosophie de la nature)에 따르면, 산소(파라셀수스에서 수은처럼)는, 연소라고 하는 본질적인 화학적 작용 덕분에, 땅에서 잠자고 잠들어 있는 에너지들을 깨우며 다시 젊어지게 하는 원리이다.이 작용은 끊임없이 자가의 고유한 조건들을 새롭게 하는데, 그것은 이 조건들을 붕괴시키는 동물세계와 대기에 산소를 회복시키는 식물세계의 서로 상반된 조합의 작용들에 의해 보증된 대기(공기)의 영속성 덕분이다. (노발리스의 단어에 의하면) 보편적[우주적] 산소론(l'oxygénisme)은, 세계영혼에 대하여(Von der Weltseele, 1798)(De l'Âme du monde)에서, 전자기 극성의 이중화(dédoublement)의 개념에 의해 대체되었다. 이 극성이란 전기와 자기가 그 전형을 제공한다. 태양 빛과 산소는 그들의 생산에서 서로 서로 대립되었듯이, 생기(l'air vital, 생명의 공기, 산소)도 양전기와 음전기가 있는 전기처럼 대립된다. 이번에는 산소도 양성적인 것과 음성적인 것이 대립되듯이 플로지스톤에 대립된다. 연소란 이 두 대립 항들의 통합이며 회귀이다.살아있는 존재의 활동성은 보상하는 리듬들의 덕분이다. 보상리듬들은 균형을 잡으면서 대립을 다시 생성하게 한다. 이리하여 호흡에서 산소화작용은 영양에서 플로지스톤 물질을 도입함으로써 보상 받는다. 이리하여 산소의 과도함이란 무매개적으로 대립항의 과도함에 해당한다. 이리하여 살아있는 존재는 유기체적 존재들로부터 구별된다. 유기체적 존재에서, 결과는 두 상반된 힘들의 작용에만 의존하지만, 살아있는 존재에서, 상반된 힘들의 쌍보다 더 높은 권능이 필요하다. 여기서 쌍보다 상위의 권능은 생명존재의 도구로서도 역할을 하고 그리고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방식으로 이 도구들을 굴절시키기도 한다. (628)
사람들은 세계영혼에 대하여(Von der Weltseele, 1798)에서 독일의 물리학자 리터(Ritter, 1776-1810)의 것과 매우 가까운 개념작용을 인정한다. 리터는 1797년에 갈바니즘[근육운동의 전기성]을 막 발견했고,그리고 1798년에 모든 [생명있는] 물체를 무한히 작으며 셀 수 없이 많은 갈바니 연쇄들의 체계로서 묘사했다. [비유하자면] 그에게 있어서 우주는 하나의 동물이며, 하늘의 천체들은 [동물의] 핏기있는 소립자들이며, 은하수는 그것의 근육이며, 반면에서 천상의 에테르는 마치 신경의 흐름처럼 모든 곳을 침투한다. (628)
그 자연철학은 현상들의 해석에서 가치 없이 절대적으로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셸링이 관심가진 것은 아니다. 그의 주의는 점점 더 내밀한 친근성(la parenté intime)에 의해 매료되었다. 그는 이 친근성을 지식학(Wissenschaftslehre, 1801)(사후 출판)에서 피히테(1762-1814)가 행한 변증법적 방법과 그 도식 사이에서 주목했다. 만일 사람들이 자아 대신에 자연을 대체한다면, 그의 자연철학은 바로 무한한 활동성으로 나타난다. 이 무한한 활동성은 자기의 대립자를 제시함으로서 긍정되며(칸트의 역동론에서 확장적 힘은 반동적 힘에 대립되는 것처럼), 또 활동성 자신이 파괴했던 대립 작용들을 끊임없이 다시 회복시키는 점에서 무한하다. 그러면 셸링이 추구했던 생각, 그것은 방법론으로서 간주했던 지식학과 동일한 수준의 추상작업을 유지하는 것이며, 자연철학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그의 철학은 이 방법론의 응용인 셈이다. 그러나 이 구도는, 전통적 자연주의가 그를 데려갈 거라고 한 신비주의로부터 그만큼 그를 멀리하게 했으며, 전통적 자연주의로 되돌아가길 기대하던 그는 아주 다른 길로, 즉 1803년에 그를 동일성의 철학으로 이끈 길로 갔다. 이러한 것이 피히테와 셸링을 통합하는 지적인 관계이면서 폭풍 같은 복잡한 관계들의 결과이다. 이 관계들이 양자의 각 각의 사유에 많은 부담을 지웠다. 이들은 서로 떨어질 수도 서로 합의할 수 도 없는 적대적 형제였다. 이 불화는 둘 사이에 점점 심해져서 1804년에는 공공연하게 결별에까지 갔으며, 셸링의 상황에서는 필연적 귀결이었다. 이때에 [체계의 초안(1799)이 나온다. (629)
그가 피히테의 학설을 가지고 만들어낸 용도에서 보면, 셸링의 인위성은 자아와 비자아 대신에 자연의 구성적이고 역동적인 대립자들을 대체하는 것이었다. 이 대립자들로부터 내적 변증법이 태어나게 된다. 이 변증법은 종합들과 새로운 대립 작용들을 진행하면서 모든 자연적 현상들을 구축할 것이다. 동질적 흐름(un fluide)으로 향하는 자연의 보편적 활동성에 인력적인 힘과 같은 어떤 한계가 대립된다. 이 인력은 흐름 속에서 여러 정도의 차이에 맞는 응집을 생산한다. 이 활동성과 응집은, 활동성이자 동시에 사물이며, 또는 활동성이 침투한 사물인 유기체 안에서 종합된다. 그러나 유기체는 비유기체를 자기의 활동성의 조건으로 삼는다. 그래서 유기체는 자극반응성(l'excitabilité)의 측면에서는 비유기적인 것에 의해 규정된다. 반대로 비유기적인 것은 유기체에 의해서 규정된다. 이 유기체와 대립 작용에서 보면, 비유기적인 것은 단순한 병치, 또는 단순한 덩어리(une masse)일 뿐이나, 그것은 그자체로서는 활동적이다. 그리고 이 덩어리 속에서도 대립작용들과 연결작용들이 생산된다. 우선 무게(le pesamteur)라는 것은, 즉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성질을 어떤 방식에 부여하는 뉴턴의 중력이 아니라, 오히려 덩어리들[질량들]의 상호 대립 작용에 기인 상반된 전기성의 인력과 동일한 자연의 인력이다. 그 무게에서 이 대립자들은 서로 침투하는 경향이 있으나, 이 경향은 병치에 머문다. 화학적 조합[혼성] 속에서 이 침투가 일어나고, 반면에 전기성은 극점에 의해서 대립자들의 이원론을 재확인한다. 유기체의 편에서 보면, 유기체의 내적 활동성은 대립작용들과 연결작용들(des liaisons)에 의해 표출된다. 이 활동성는 감각성과 감응성[자극과 반응] 사이에 전적으로 왔다 갔다 한다. 감성 속에서 유기적 주체는 자신의 활동성을 수동성에 의해서 제한한다. 감응성 또는 근육수축의 능력 속에서는 이질적인 것이 동질적인 것으로 귀환이다. 즉 주관적 활동성은 대상 속에서 스스로를 상실하는 경향이 있다. (630)
따라서 자연의 힘들의 생산적 운동은 대립들과 종합들의 놀이이며, 놀이의 논리적 리듬 상으로 피히테의 의식의 발생(la genèse)과 동일하다. 오직 피히테만이 자기 방법을 자기 학설과 분리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했다. 만일 그 변증법이 풍부하다면, 그에 따르면, 왜냐하면 출발에서 대자(pour soi)로서 제기된 자아(Moi)의 행동(l'action)이 있기 때문이다. 자아 대신에 자연으로, 살아있는 행동 대신에 객관적 산물로 대체해보라, 그러면 당신은 운동의 원리도 갖지 못할 것이다. 셸링은 자연철학을 향한 이념들(Ideen zu einer Philosophie der Natur, 1797)의 주장을 무엇에 대립하게 하는가? 자연은 마치 또한 피히테가가 믿었던 것처럼 살아있는 행동이며, 죽은 생산물이 아니다. 피히테의 주제, 그것은 자연의 타율성이다. 그 타율성은 표상의 대상 자격으로 현존했을 것이고, 또 도덕적 행동에 적용하는 관점에 쓰이는 것만을 목적으로 삼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의 모든 세부사항들은 가장 피상적인 목적성만을 설명하는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 만일 자연이 그 자체로 자치적이고 구축적인 활동성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최상일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이 활동의 직관을 소유해야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피히테에게서, 모든 직관은 자기에 관한 반성에 연결되어 있으며, 셸링은 자연의 직관을, 즉 자기와 다른 것의 직관을 도입하면서, 따라서 그에 따르면, 칸트보다 앞선 독단론으로 되돌아간다. 사람들은 피히테의 정신에 더 이상 충실할 수도 동시에 더 이상 불충실할 수도 없었다. (630)
셸링에게서 지식학은 보편적 기호들(des signes)로 만들어진 일종의 형이상학적 대수학이다. 사람들은 이 기호들에게 개별적 문제의 해결책에 알맞을 구체적 가치들을 부여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히테의 의도에서 그것을 상기해본다면, 지식학은 자의식의 발생이다. 또한 의식의 발생과 그 의식의 모든 기능의 발생으로부터, 지식학과 구별된, 또한 자연철학과 동일한 자격으로 지식학의 적용이 이루어질, 특별한 문제의 대상을 만든다는 생각, 이 생각은 피히테의 관점에서 보면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그것이 셸링이 선험적 관념론의 체계(System des transzendentalen Idealismus, 1800)(Système de l'idéalisme transzendental)에서 기획했던 바로 그러한 것이다. 그러면 그는 어떻게 그것을 이해하였는가? 우선 처음에는 그것이 피히테 그 자체이다. 즉자에서 무한정한 것인 활동성의 제한에서 생겨[태어]나는 충돌들의 해결 덕분에, 자의식을 갖는 자아를 제시하는 것이 중요하다. 오직 이론적 부분에서만 사람들은 표상적 역량들의 연역에다가, 물질의 구성적 힘들의 연역이 덧붙여지는 것을 보게 된다. 여기서 표상적 [인식]역량들이란 감각작용, 생산하는 직관, 반성, 판단들을 말하며, 물질의 구성적 힘들이란 자기작용, 전기성, 화학작용, 유기체작용 등을 의미한다. 그리고 지성의 작동들에게(aux actes) 정확하게 물질의 구축작업들의 찰나들이 대응한다. 물질 속에 잠자고 있는 힘들은 표상적 힘들과 동일한 성질이며, 이것은 헴스터휘스(Hemsterhuis 1685-1766)와 라이프니츠(Leibniz, 1646-1716)가 예상했던 대로, “물질은 자기 활동성의 균형에서 정신이외 아무것도 아니다”. 실천적인 부분이 차이가 덜 나는 것도 아니다. 표상적 역량들의 연역에 자연철학이 매어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실천철학에 역사 철학이 연결되어 있다. 역사는 자유의 표출인 동시에 신의 점진적인 계시이다. “왜냐하면, 만일 사람들이 객관적 세계에서 서술되는 무엇으로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신은 결코 [이제] 있지않는(n'estjamais)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일 신이 [어제] 있었다면(était), 우리는 [아제]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신은 점진적으로 드러난다. 인간은 자기의 역사를 통해서 신의 현존의 증거를 내보인다. 그러나 그 증거는 역사 전체를 통해서만 완성될 수 있을 뿐이다.” 상-마르땅(1743-1803) 다음으로 그는 헤르더(Herder 1744-1803)를 피히테에게 걸쳐 놓았다. 그러나 더 많은 것이다. 즉 선험적 관념론의 체계는 [피히테의] 지식학에 완전히 알려지지 않은 두 부분을, 즉 신학과 예술철학을 덧보탰다. 이 첨가는 왜인가? 자아에 의한 비자아의 침투는 의지의 요청으로, 직관의 대상이 아닌 의지를 위한 규칙으로 남았다. 셸링은 직관을 위한 이 요청을 효과적으로 실현하는 대상에 도달하기를 바랐고, 대상에는 이상적인 것이 실재적인 것을 침투한다.그러한 것이 자연 속에서는 살아있는 유기체들이고, 정신 속에서는 예술 작품이다. 천재적 예술가는 영감 속에서 무의식적이고 비인격적인 힘들이 예술작품의 생산에서 의식적 힘들에게 통합되는 것을 느낀다. 예술은 정신과 자연의, 의식과 무의식의, 이상적인 것과 실재적인 것의 동일성을 증거한다. (632) (47NMI) (57RLA)
제2절 동일성의 철학 - La philosophie de l'identité 632.
이 새로운 사상들의 합류점, 즉 피히테 방법과 자연철학의 결합, 역사와 예술의 결합은 동일성 철학의 이름으로 알려진 그의 관념들을 체계화를 요구했다. 셸링은 이 동일성철학을 나의 체계 서설(Darstellung meines systems der Philosophie, 1801)(Exposition de ma philosophie), 브루노(Bruno, 1802)(Bruno ou Du principe divin et naturel des choses), 장차의 서술(Fernere Darstellungen, 1802)(Exposés ultérieurs)에서 시도했다. 사물[만물]들의 제일 꼭대기에 주체와 대상의 동일성인 절대자가 있다.철학의 꼭데기에는 이 절대자의 지적 직관이 있다. 절대자는 주체도 대상도 아니고, 정신도 자연도 아니다. 왜냐하면, 절대자는 동일성이며, 마치 플라톤의 파르메니데스편의 일자처럼 또는 플로티노스의 일자처럼, 두 대립자의 무차별이다. 그것은 ‘있다’와 ‘안다’의 종합이 결코 아니다. 이것은 ‘있다’와 ‘알다’가 따로 떨어져 현존할 것이라는 것을 가정하였으리라. 그러면 모든 존재는 자기의 긍정이기 때문에, 이미 ‘안다’이다.그리고 모든 안다는 것은 주장되었고 제기되었기에 이미 ‘이다’[있다]는 것을 가정하였으리라. 그러나 피히테가 그렇게 가르쳤듯이, 모든 활동성의 근원이 대립 속에 있다는 그게 진실이라면, 사람들은 플라톤과 플로티누스를 넘어서, 파르메니데스의 생산성 없고 무기력한 존재에까지 올라갈 위험에 처하게 되지 않는가? 자연과 정신이, 자신들의 규정들을 아주 풍부하게 하면서, 절대자로부터 도출하는 그 방식은 그 체계의 미묘하고 새로운 점이다. 셸링은 절대자 속에 어떤 자기 출구도, 어떤 타율적 활동성도, 어떤 진실한 생산작용도 인정하고자 원하지 않았다. 이것을 인정하는데서 오는 오류가 있는데, 그 오류는 셸링의 눈으로 보면, 절대자로부터 떨어진 두 조각들처럼, 정신을 주체로서 온자연을 대상으로서 간주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연철학은 [온]자연이 절대자처럼 주체-대상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그리고 선험적 관념론은 절대자가 정신과 마찬가지라는 것을 증명한다. 절대자가 아닌 이것들[자연과 정신]은 우선 따로 현존하는 두 항들의 종합이 아니라 오히려 이 양자의 동일성이다. 그러면 이것들은 절대자로부터 무엇에서 다른가? 주제-대상인 자연에서는 객관성의 과도함이 있다는 점에서, 정신에서는 주관성의 과도함이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 여기서 객관성의 과도함이란 마치 직관이 스스로 소멸하고 그리고 직관이 관조하는 존재 속에서 스스로 견고화되는 것과 같은 것이고, 주관성의 과도함이란 자기에로 귀환한의 과도함이며 반성적 활동성의 과도함과 같다. 자연과 정신 사이 편차가 벌어짐은 절대자와 연관해서(셸링이 절대자의 “권능들, les puissances”이라고 불렀던 것처럼), 그것들의 총체 속에서는 절대자체와 다른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동일한 추론이 자연이라는 상대적 동일성과 정신이라는 상대적 동일성에 관해서[동시에] 반복될 수 있는지를, 그리고 어떻게 이들의 각각에게 연관하여 주관성 또는 객관성의 과도함들이 자연과 정신의 여러 다양한 모습들(les faces)을 그리는 지를, 쉽게 이해한다. (633)
따라서 그 철학은 절대자로부터 또는 이법(la Raison)으로부터 결코 나오지 않는다. 그 이법/이성은 절대자에 대한 인식 기관(l'organe)이다. 셸링은 스피노자(Spinoza, 1632-1677)와 브루노(Bruno, 1548-1600)에게서, 그리고 르네상스 시대의 플라톤주의자에게서 동시에 자신의 선구자를 발견하기를 좋아한다. 브루노에서 그는 매우 야릇한 천문학들 중 일종의 형이상학적 천문학을 세우고, 그 천문학에서 그는 거대한 천체들의 각각, 행성들의 각각, 태양 등을 가지고 자치적이고 자유로운 여러 종류의 [개별]절대자들을 만든다. 이 절대자들은 각자 그자체적으로 운동의 법칙을 갖는다고 한다. 그 어느 곳에서도, 사람들은 그 자연철학이 뉴턴(1642-1727)의 과학과는 어떤 관점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이[책의] 몇몇 쪽에서보다 더 잘 볼 수는 없다. 뉴턴 과학은 단지 존재들의 상호 관계 만에 의해서 그 존재들을 규정할 뿐이다. 동일성의 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가 해소할 수 없었던 결국 오래된 문제에 대한 해결의 시도이다. 또한 그 오래된 문제란, 과학은 그것을 이미 포기해버렸고 그리고 자연철학이 그것을 다시 문제 삼는다. 그것은 존재들의 특별한 규정의 문제이다. 이 철학은 개념의 분류작업의 오랜[낡은] 방식 대신에 직관의 방법으로 대체했다. 이 직관 방법은, 괴테(Goethe, 1749-1832)가 식물의 모든 기관들 속에서 잎사귀의 변형형성들을 따른다고 하듯이, 다른 것 속에 동일한 것의 변형형성들(les transformations)을 따른다.셸링의 동일성 체계는 그 당시 매우 널리 퍼진 탐구 경향의 완전한 일반적 표현이며, 과도한 추상의 표현일 뿐이고, 이 탐구 경향은 라이프니츠의 말에 따르면, 현상들을 연결하는 시공간적 관계들이라기보다 “형태[형상]들의 연속성”(la continuité des formes)의 탐구이다.(633)
그럼에도 불구하고, 셸링은 직관 속에 자의적인 어떤 것도 남기지 않았고, 권능들에 대한 자기의 개념 덕분에 직관에게 진실한 방법을 부여했다고 자부했다. 권능들의 각 삼원성은 주체-객체(le sujet-objet) 속에서 세 가지를 - 실재적 또는 객관적 국면(l'aspect), 이상적 또는 주관적 국면, 이것들의 동일성, - 계속적으로 돋보이게 한다. 이리하여 온자연(la Nture)은, 그것의 실재적이고 객관적인 국면에서는 무게(pesenteur)와 응집(cohésion)이며, 그것의 이상적인 국면 하에서는 빛이다. 그리고 마치 동일성처럼 [온]자연은 빛이 침투한 무게 즉 유기체이다. 자연의 측면(son côté)을 옆에 젖혀두고, 정신은 그것의 실재적 국면에서는 지식(Savoir)이고, 그것의 이상적이고 주관적인 국면에서 행동이고, 두 개의 동일성에서는 예술이다. (633)
이 권능들의 각각은 그 자체적으로 절대자의 직접적 표현이다. 이 각각에는 권능의 동일한 삼원성이 반복되어야 한다. 거기에 예술의 철학(Philosophie der Kunst(1803 강의, 1859 출판)의 출발점이 있다. 이 강의는 셸링이 예나의 낭만주의 환경에서 얻었던 미학적 교육의 모든 결과물들과 더불어, 동일성의 체계의 마지막 형식을 포함하고 있다. 음악적인 문화의 전반적 부재, 16세기의 이탈리아 회화의 독점적 사랑, 그리스 사원에 자리를 차지한 건축물의 이상, 호머(Ὅμηρος, 기원전 9세기)시대의 숭배와 단테(Dante, 1265-1321)시대의 숭배, - 이 숭배는 세르반테스(Cervantes, 1547-1616) 또는 괴테(Goethe, 1749-1832)의 소설과 비슷한 인접 관계를 겪는 숭배이며 - [스페인 극작가] 깔데론(Pedro Calderón, 1600-1681) 또는 셰익스피어(Shakespeare, 1564-1616)의 드라마 등, 이러한 모든 것은 예술적인 취향을 보여주는데, 이 취향의 옹색함(l’etroitesse)이 놀랍다.그럼에도 이것들은 모두 그의 재료들이다. 그가 피히테에서 자기의 자연철학의 도식을 발견했던 것처럼, 슐레겔 형제의 미학적 이론들 속에서 자기 철학에 추상적 정식들에게 내용을 부여할 실체를 찾으러 갈 것이다. 예술은 유한 속에서 무한의 표현이다. 영원한 이념은 상상작용 속에서 살아있게 된다. 따라서 만일 신화가 임의적 창조가 아니라 일종의 체계적 상징이라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 상징 속에서 신들과 상상의 관계는 이념들과 사유의 관계와 같으며, 그렇다면 신화는 예술의 기초이다. 사실상 크리스트교는 신화에 적대적이다. 무한을 유한한 형식 속에 굳어버리게 하는 경향에 반대하는 필연적인 반작용으로서 크리스트교는 무한[자] 앞에서 유한[자]를 겸손하게 만든다. 유한자가 더 이상 무한자를 표현하지 못하는 것은 왜냐하면 유한자는 [여기] 있기[현존] 때문이지(마치 미네르바가 직접적으로 지혜를 표현하는 것처럼), 오히려 유한자가 의미하기 때문이 아니다(크리스트의 십자가는 그자체로서는 불명예이지만 [의미상] 영광이다). 크리스트교와 프로테스탄트는 형식들로부터 자유이며 파괴이다. 셸링은 슐레겔처럼, 새로운 예술의 영감이 될 새로운 신화에 준하는 신화의 탄생을 믿었다. 그것이 자연철학이다. 이 자연 철학은, 그 철학이 사물 속에 도입한 불가사의한 모든 소통을 통해서, 크리스트교와 더불어 상실했던 깊이와 상상적 흥취(la saveur)를 세계에게 다시 부여한다.(634)
이리하여 이교도 신화, 크리스트교, 새로운 신화는 예술사의 세 가지 찰나들, 즉 그 역사의 과거, 현재, 미래를 표시한다. 이것은 크리스트교의 대립[크리스트교와 프로테스탄트의 대립] 이후에 자연의 신성함에 대한 이교도적인 주장의 회귀이다.게다가 이 역사적 도식은 여러 종류의 체계적인 규정 속에서 아무런 분명한 영향 없이 [남아] 있다. 무한과 유한의 동일성, 즉 주체와 객체의 동일성은 완전하게 만들어야할 정식들 중의 하나이다. 이 정식은 역사 속에서 신화의 발생과 크리스트교의 발생(la genèse)을 제시하는 데 좀 전에 사용했다. 그리고 이 정식은 예술의 심층적 통일을 보게 하는데 사용할 것이다. 예술의 여러 류들[장르들]은, 그 과도함[초과]들에 대한 이런 종류의 보상법칙에서 생겨나는데, 사람들은 이 과도함으로부터 절대자의 모든 권능들을 연역해 낸다. 조형예술과 시, 이것들은 예술의 두 극한이다. 하나는 조각상과 사원의 대리석 속에 예술적 직관을 고정시켜 움직이지 않게 하는 것이고(객관성의 과도함), 다른 하나는 정신을 가다듬어 예술적 직관을 반성적 정신에서만 현존하는 서사시 또는 드라마의 연속적 운동 속에 내재화하는 것이다(주관성의 과도함). (635) (47NNA)(57RLC)
제3절 셸링에게서 만년의 철학 La derniere philosophie de Schelling 635
그것은, 셸링과 피히테를 아주 근본적으로 구별하는 구체적인 것의 취향(le goût)과 더불어, 완전하게 만들어야할 정식들 중의 단조로움이 아니었을까? 피히테는 셸링에게 에쉔메이어(Eschenmayer, 1768-1852)의 저술 철학에서 비철학으로 이행의 철학(Die Philosophie in ihrem Ubergange zur Nichtphilosophie, 1803)(La philosophie dans son passage à la non-philosophie)에 주의를 기울이게 했을 것이다. 에쉔메이어(1768-1852)는 불평한다. 절대적 동일성의 광채가 빛남에서, 신이 그 자신으로부터 갖는 의식이 사라짐과 동시에 의지를 갖고 있고, 그 귀결로서 도덕성도 갖춘 명백한 유한 존재[자]들도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는 결국, 스피노자의 합리주의에 대해 맹렬한 부정으로 야코비(Jacobi, 1743-1819)를 끌어었던 것을 셸링에게 잊지 않게 했다. 철학과 종교(Philosophie und Religion, 1804)에서 셸링은 유한 존재가 즉자로서만 남아있는 절대자로부터 태어날 수 없어서 전적으로 자유로운 작동(l’acte)에 의해 제안되어야(se poser) 한다는 것을 이미 인정했다. 이 작동은 플로티노스가 말한 작동과 유사한다. 플로티노스는 그 자체적으로 살기를 원하면서 세계의 영혼과 떨어져 나온 영혼들에게 그 작동을 부여했다. 이 자유로운 작동, 즉 절대자로부터 간격, 그것은 정신적 존재들에게서 타락이다. 그런데 마치 일리아드(Iliade, Ἰλιάς)와 오뒤세이아(Odyssée, Ὀδύσσεια)처럼 한편 중심으로 멀어지고, 다른 한편 중심으로 되돌아오는 그의 이중 서사시와 함께 하는 역사(l'Histoire)는 타락의 귀결과 최종 회복을 포함하고 있다. 셸링은 시작에서부터 절대자의 배타적 선입관으로부터 벗어나 있다. 그는 1806년에 “예나 시절 이래로 나는 종교, 대중적 신앙, 국가에서 삶, 이 세 가지가 그 주위에 사람들이 살아가는 축이라는 것을 보았다. 이 축에는 타성에 젖은 인간 대중을 동요하게 했던 지렛대가 당연히 고정되어 있었다.”라고 썼다. 1809년에 뵈메(1575-1624)에 읽고 난 다음으로, 인간 자유의 본질에 관한 철학적 탐구(Philosophische Untersuchungen über das Wesen der menschlichen Freiheit, 1809)(Recherches philosophiques sur l'essence de la liberté humaine 1809)는 방향전환이 일어난다. 셸링은 더 이상 연역하지 않고, 이야기 한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는 체계적이다. 신비적인 드라마인 이야기는 여러 세기들을 넘어서 우리를 뵈메(1575-1624)에게 그리고 에크하르트(Eckhardt, 1260-1327)에게로 데려간다. 우선, 빛도 없고 의식도 없는 현존의 깊은 곳(un arrière-fond, Grund)에 공허하고 빈약한 욕망이 있다. 사랑에 의해 움직였던 신의 정신은 오성에 연결되어 있고, 욕망은 현존의 모든 형식들을 포함하고 있어서 자연의 창조적 의지가 된다. 이것이 우주발생론적 생성(le devenir cosmogonique)이다. 그 정점에 인간이 있다. 자연 상태에서 각 존재의 고유한 의지는 보편적 의지에 통합된 채 있다. 지성적인 존재로서 인간에게서, 고유하게 발전되고 계몽된 의지는 자기를 위하여(pour soi) 현존하기를 원하고, 자기 자신에 맞는 자기 우주가 되기를 원한다. 이러한 것이 자연의 밑바탕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보편적 사랑에 갇혀있는 계몽된 의지로부터 나온다. 신의 바깥에서 토대는 자연과 역사를 매개로 해서만 현존에 도달한다. 창조적 신, 자유로운 인간, 인간과 신의 최종통합, 이러한 것은 유신론(un théisme)의 세 가지 항목들이며, “정의와 질서가 제대로 있는 모든 제도들의 공식적인 믿음”인 유신론을 그는 더 이상 포기하지 않아야 했다. (636)
세계의 시대들(Weltalter, Les Âges du Monde)(1811-1815)은 [위와] 같은 정신으로 통찰되어 있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도 뵈메(1575-1624)를 표본으로 삼아서 자연의 생성뿐만 아니라 신 자체의 생성을 이야기한다. 모든 생성은 승리이다. 그 생성은 자기 생성에 기초로서 쓰였던 맹목적이고 파괴적인 힘들을 극복한다. 조건적이고 절대적인 ‘맞아’(oui)는 없다. 긍정작용은 부정작용 위에서만 정립되고, 즉 영원한 과거 속에서 모호하고 혼란한 형식들을 거부하면서만 정립되는데, 그 형태들은 존재로 향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데 시작하는 생명만큼이나 어둡고 위험에 둘러싸여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이 승리 자체는, 권능들 그 자체들로서 있어야할 원초적 권능들의 재시작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이 권능들은 상위 의지의 기관이 되면서 스스로를 거부한다. 우선 이 생성은 신 그 자체의 생성이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생성[신]은 비존재로부터, 즉 자기의 최초의 권능인 원초적 배아로부터 와야 한다. [그러고 나서] 이 배아에 대립으로써 신은 [이제] 있는 존재(l'etre qui est, das Seyende)이며, 그것은 따라서 그의 둘째 권능이다. 마지막으로 생성[신]은 통합 존재와 비존재의 위계적 통합이며, 그것은 따라서 그의 셋째 권능이다. 이 권능의 각각은 [이제] 있기[존재]를 바라며, 이 각각은 차례로 다른 두 권능들을 억제하는데, 이것은 마치 씨앗에서 식물로 가는, 그리고 식물에서 씨앗으로 가는 순환 생성에서 일어나는 것과 같다. 이런 교대 순환(cette rotation)은, 상위 의지를 위하여, 어떠한 존재 형식의 의지도 아닌 의지에 대해 거부하는 공통 의지를 통해서만,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의지를[무의지를] 그만 둘 것이다. 왜냐하면 순환은 모든 차별의 그 위에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연을 토대로 갖는 초신성[상위신성](la surdivinité, Uebergottheit)이며, 세 가지 권능으로 구성되어 있다. 신은 절대적 자유이며, 모든 존재 형식으로부터 그리고 모든 자연으로부터 자유롭다. (637)
이리하여 신의 생성은 완성되었고, 우주의 생성이 시작한다. 신의 세 가지 권능은 이것들을 구성하는 것으로부터 해방되어 미래 창조 작업들의 질료/재료(la matière)가 된다. 첫째는 자연의 재료가 되며, 둘째는 정신의 재료가 되며, 셋째는 세계의 영혼의 재료가 된다. 이 모든 효과적인 생성이 되기에 앞서서, 이미 세 가지 권능들 사이에 이상적 위계가 성립한다. 이는 마치 그 각각의 권능은 자기보다 상위의 권능의 이미지가 되고자 애쓰는 것과 같다. 자연은 정신을 반영하기 위하여 풍부하게 형태들을 생산하며, 그리고 정신은 마치 일련의 청사진(la vision 통찰)처럼, 보편적 영혼 속에 있는 관념들의 이미지를 자신 속에 생산한다. 이리하여 일종의 [신플라톤주의의] 강신술(la théurgie)에 의해, 상위 권능은 하위권능을 규정하기 위해 하위 권능으로 내려간다. 이런 것이 창조의 이상적 지도[구도]이다. 그러나 이 이상적 지도는 스스로를 실현하기 위한 어떤 힘도 그 자신 속에 가지고 있지 않다. 더욱이 절대적 자유 또는 초신성은 어떠한 창조적 의지도 가지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 절대적 자유는 모든 규정작용의 그 위에 있가 때문이다. 첫째 권능의 모호하고 설명할 수 없는 의지가 없다할 지라도 창조란 절대 자유의 출발점이다. 첫째 권능은 자연의 형성자이며, 이것의 가차 없는 파괴적인 힘들은 우선 별들의 세계를 탄생하게 하고. 그리고 유기적 존재를 탄생하게 한다. 자연은 분노(la Colère)의 결실[열매]이거나 또는 신의 부정적 권능이다. 그리고 사랑 또는 긍정적 권능은 정령[정신]들의 세계의 창조자이다.이 정령들의 세계를 통하여, 셸링은 정령들이 듣는 것을, 그리고 불가사의한 힘들에 의해 소통하는 존재[자]들이 듣는 것도 여기서 듣는다. 의식적 세계는 그 정령들 세계의 연약한 부분만을 표현한다. 결국, 사랑이 세계의 영혼의 지혜를 창조하기 위하여 분노에 통합된다. (636)
앞선 두 세기의 합리적 신학의 정태적 신 대신에, 즉 보편적이고 움직이지 않는 존재 대신에, 셸링은 내적 생성에 속하는 신비주의의 신을 대체했다. 하나의 존재 속에 생성은 그 생성을 구성하는 힘들이 그것들의 진실한 위치에 있지 않다는 사실로부터, 그리고 이 힘들이 마땅히 억제되어야 한다는 사실로부터 온다. 과정에서 신이 실현되는 신발생론적 과정(le procès théogonique)은 일종의 앉은뱅이저울로 달기 과정이다(universio). 그리고 이런 신발생론적 과정에서 우선 권능으로(en puissance, 잠재적으로) 남아 있어야할 것이 작동으로(en acte, 실현태로) 있으며, 반면에 미래 작동의 존재가 집중화된다. 이 과정 속에서 우리 우주의 역사가 포함되어 있다. (638)
셸링은 1815년부터 관심을 갖기 시작한 신화의 연구 속에서, 신지학에 대한 확신을 찾는다. 이전에는 셸링이 슐레겔(Schlegel, 1767-1845)에 만족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 신화는 우리[프랑스]에게 있어서 원시적 종교들의 사회학적 연구의 대상인 신화와 약간 가깝다. 크뢰저(Georg Friedrich Creuzer, 1771-1858)는 고대 민족에서, 특히 그리스민족의 상징과 신화(Symbolik und Mythologie der alten Völker, besonders der Griechen, 1812)에서 이 전통적 주제를 다시 다룬다. 이 주제 속에서 그는 원초적 일신론을 지워버림으로서 도출된 신화들의 진실한 학설들을 본다. 그리고 크뢰저는 이집트의 숭배, 아시아 종교, 그리스 종교, 이탈리아 종교들에 관한 세부적 탐구들을 통해서 이 주제를 확신하고자 애썼다. 이 주제는 그의 친구이며 신비가인 괴레스(Johann Joseph von Görres, 1776-1848)에서 나왔는데, 그 주제는 문헌학자들에 의해 심하게 공격을 받았으며, 반대로 신화 속에서 인간의식의 역사를 보았던 쉘링에 의해 채택되었다. 신화는 인간 의식 안에서 서로를 파괴하고자 하는 적대적인 힘들의 국면이다. 이 국면을 이어서 크리스트교의 유일신앙의 국면과 정신의 국면이 마땅히 계승된다. 원시 인류의 신은 하나도 여럿도 아니며 미분화되어 있다. 인류는 이 무형의 상태에서 다신론의 여러 정형으로 따로 떼어놓게 된다. 다신론은 여러 다양한 신앙들의 결과로 인민들과 종족들의 신앙을 생산한다. (638)
신을 그 권능들의 다양성에서 파악하는 자연적 종교로서 다신론에 대립하여, 초자연 종교로서 또 그 권능들을 뛰어넘는 통일성의 계시로서 크리스트교가 있다. 크리스트교가 결정적 상태는 아니다. 일단 다신론이 정복되면, 크리스트교는 스스로를 고정하여, 이교도만큼이나 맹목적인 권능을 지닌 카톨릭교회에서 자기의 고유한 자유를 한정한다. 철학은 크리스트교를 넘어서서, 그리고 자신으로부터 완전히 정신적인 종교가 마땅히 태어나야 한다. (638)
따라서 셸링은 자신의 고유한 사유를 표현하기 위해서 상-마르땅, 피히테, 슈레겔, 뵈메, 크뢰저의 언어를 계속해서 사용했다. 그는 이성이 지적 직관과 더불어 존재, 자연, 정신의 모든 형식들을 구축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부터 출발했다. 1806년부터 그는 합리적 구축의 대상인 보편적인 것과 효과[결과]적으로 현존하는 개별적인 것 사이의 구별을 깨달았다. 이 구별은, 현존자를 근본적으로는 우연적인 것으로서, 또한 본질과 가능에 비추어 상대적으로는 자유로운 것으로서, 생각하도록 그를 만들었다. 이리하여 그의 경력을 쌓아가는 마지막에, 그는 두 개의 철학을 “순수하게 추론적 철학”과 “실증 철학”으로 분리했다. 전자는 가능적인 것을 구축하는 것이고, 후자는 절대적 자유의 순수 사실로부터, 즉 자기를 위하여 그리고 다른 것들을 위하여[대자로서 또 대타자들로서] 현존의 원리로부터 출발한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긴 진화[과정]에서 모든 시기들마다에 공통하는 특징을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피히테의 마니교주의(le manichéisme)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 어느 것도 투쟁에 의해서만 그리고 그것의 대립자에 대한 승리에 의해서만 제기 제기될 수 있을 뿐이다. 무매개는 빈 것이고 무일 수 밖에 없다. (639) (47OKC) (57RLC)
제4절 낭만주의자들 Les romantiques 639
낭만주의자들과 철학자들 사이, 특히 셸링(1775-1854)과 헤겔(1770-1831) 사이의 인간적 관계들은 독일 형이상학의 발전에 역할을 했다. 튀빙겐에서 지낸 시기에[1790년경], 횔덜린(1770-1843)은 이 두 철학자의 젊은 시절 친구였으며, 그리고 그는 피히테의 찬미자였다. 그러고 나서 새로운 세기의 초에 예나의 낭만주의 서클에서, 셸링은 노발리스(Novalis 1772-1801), 슐레겔(1772-1829), 티에크(Tieck, 1773-1853)와 가까이 지냈다. 이런 사상적 교류들은 문학자와 철학자들 사이에 계속되었다.(639)
노발리스는 “낭만주의의 고유한 본질, 그것은 절대적이고자 하는 것이고, 개인적 찰나와 개인적 상황을 보편화하고 분류하는 것이다.”(éd. Minor, III, 343)이라고 썼다. 따라서 소설, 꽁트, 시 등은 각각들 속에서 철학적 가치를 갖는다. (639)
시와 철학 사이에서 횔덜린(Hölderlin, 1770-1843)은 내밀한 연결을 보았다. 시는 철학의 시작이자 끝이다. “그 마지막에, 철학적으로 말하자면 양립할 수 없는 무엇이 시의 불가사의한 근원 속에서 통합된다… 철학은 순수오성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철학은 주어진 것(le donné)의 제한된 인식 이상의 것이기 때문이다. 철학은 단순한 이성[이법]으로부터 오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철학은 통합과 구별 속에서 끝없는 진보의 요청 그 이상의 것이기 때문이다(이러한 것은 분명이 피히테가 목표로 한 것이다). 그러나 신적인 단어, 즉 ‘자기 스스로에게 차이나게 하는 일자’(헨 디아페론 헤아우토이, ἕν διάφερον ἑαυτῷ)를 밝혀보시라, 그러면 철학은 맹목적으로 요구하지 않으며, 철학은 무엇을 요구하는지 왜 요구하는지를 안다”(선집(Ausgewählte Werke), éd. Schwab, p. 234-235). 이리하여 횔덜린에게 있어서 철학은 마치 시처럼 모순들의 통일의 헤라클레이토스적인 인식이다. 이 인식의 기관은 정신이며, 정신은 모든 것을 정당화한다. 히페리온(Hypérion)이 말하기를, “오 친구여, 결국에는 정신이 우리를 모든 것과 화해시킨다네,” 그것은 아직도 자연이며, “이 거친 자연은 이성[이법]에 대해 우습게 여기고, 열광에 연결되어 있다.”(위 책, p. 415) 그것은 오히려 자연이 결합했던 것과 오성이 분리했던 것을 새롭게 재통합하는 일종의 정신들의 조화이다. 모든 것이 자발적으로 통합되는 순진무구와 사랑의 상태, 모든 것이 따로 떨어지는 분산의 상태, 원초적 통합으로 귀환하는 마지막 상태. 이러한 것이 횔덜린의 항목이며, 한편으로 독일 신비주의에, 다른 한편으로 헤겔의 삼각 논법에, 매우 깊숙이 연결되어 있다. 둘째 계기는 셋째 계기를 준비하게 한다. “우리는 더 많이 통합되기 위하여, 모든 사물들과 우리들 자체들과 더욱 더 신적인 평화 속에 있기 위하여, 스스로를 분리할 뿐이다.” 횔덜린에게 있어서, 이 평화는 생명과 존재의 순수하고 추상적인 감정을 의미하는 것 같다. “존재하다, 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거기에 신의 명예가 있다. 단지 살아있는 모든 것이, 신적 세계 속에서 자기 자신과 동등하다. 그리고 거기에는 주인도 노예도 없다. 자연들은 마치 연인들처럼, 서로 서로를 위해서 산다. 자연들은 아주 공통적으로 정신, 환희, 영원한 청춘이다”(같은 책, p. 248) 횔덜린의 낭만주의는, 독일을 지배적인 결함인 흩어짐에 반대하여, 충만한 조화로운 삶을 바라는 것으로서 생긴 것이다. “독일에서 사람들은 직업적 소시민들을 보지만, 그러나 인간들이나 사상가들, 그러나 [인격적] 인간들을 보지 못한다… 자기의 감각성이 성숙하기에 앞서 이미 지성적이어야 한다… 어린이가 되기에 앞서서 [이미] 교묘한 어른이…[되어야 한다]” (640)
노발리스(Novalis, 1772-1801)는 칸트의 비판주의에 대해 낭만주의의 해석을 부여한다. 그는 말하기를(éd. Minor, III, 343), “[우선] 일방향적이면서도 안티노미인 판단들이 있다. 이 판단들에 대해 실재론은 한 종류를 생각하고, 관념론은 반대 종류를 생각한다. [그리고] 종합적인 판단들도 있다. 이것은 천재(le génie)의 판단들이다. 이것은 비판주의를 생각하는 판단들이다. 또한 대학주의(l’académisme)와 절충주의 속에 빠지는 공통적 비판주의가 있고, 종합주의로 고양되는 상위의 비판주의도 있다.” 상위 비판주의란 모든 실재성과 소통하게 하는 비판주의이다. 그 비판주의에서 “비자아는 자아의 상징이며, 자아 자신을 위하여 자아의 지적작용에만 쓰인다. 그러나 반대로 비자아는 자아에 의해 대표[표상]된다. 그리고 자아는 비자아의 상징이다… 세계는 보편적 비유(un trope)이며, 정신의 상징적 이미지이다.” 피히테는 무의식적 마술을 발견했다. 그 마술의 주문에 의해 외적 세계는, 세계를 생산했던 정신에 독립적인 실재성으로서 나타난다. 이 마술은 당연히 의식적이고 의지적이 된다. (641)
이 낭만주의는 특히 노발리스에서 종교적 각성으로부터, 또 백과전서적 정신에 대항하는 반작용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이 반작용은 프랑스에서 그리고 독일에서 계시주의 운동에서 표출된다. 노발리스의 영감을 받은 설교, 즉 유럽(Europa, 1799)(Die Christenheit oder Europa, 1826)을 읽으면, 거기서 샤또브리앙(Chateaubriand, 1768-1848)의 기독교의 정수(Le Génie du Christianisme, 1802)와 메스트르(Maistre 1753-1821)의 성-페테스부르그의 야회(Les Soirées de Saint-Pétersbourg, 1821)를 창작한 것과 동일한 정신을 발견하게 된다. “곧 이어 유럽에서는 진실로 성자 같은 수많은 영혼들이 있을 것이 아닌가? 진실로 종교적인 사람들 모두들은 지상에서 천국을 보는 욕망으로 가득 찰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들은 재통합하고 성스런 합창들을 노래할 것이 아닌가? ... 유럽의 한 종교회의 가운데에서 크리스트교가 새롭게 탄생할 것이다.” (641)
슐레겔(Friedrich von Schlegel, 1772-1829)의 경력은 아주 특징적이다. 그 경력은 제약없는 자유의 이상으로부터 1804년 이래로 카톨릭주의의 개종으로 나아갈 것이다. 자유의 이상은, 신성이 자기 속에서 말하기 때문에, 재능있는 자가 모든 규칙을 뛰어넘는 것으로 간주한다. 특히 이 재능적 태도는 아이러니이며, 정신의 성향이다. “이 성향은 모든 것을 뛰어넘는다. 또는 모든 조건지워진 것을 그 위로 고양된다.” 그런데 이런 것에 대하여 언어와 개념의 철학에 관한 특별히 행한 철학적 서설(Philosophische Vorlesungen insbesondere über Philosophie der Sprache und des Wortes(1828-1829)에 관한 그의 강의에서 계시의 철학을 주장하기에 이르는 것은 틀림없었다. 그 계시의 철학은 교회 안에서, 국가 안에서, 예술 속에서 살아있는 신을 파악했다. 이리하여 낭만주의적 비합리주의 속에는 극단적인 (시의) 파격이 극단적인 규율 속에 동맹을 맺고 있다. (641) (47OKE)
제5절 셸링에게 속하는 체계들 Les systemes apparentes à Schelling 641
셸링의 주위에 모든 것이 자연의 철학자들과 연관되어 있다. 이 철학자들에게서 계시주의(l'illuminisme)와 비의주의(l'occultisme)는 과학적 정신과 더불어 다양한 비례로 뒤섞여 있다. 독일 자연철학자인 오켄(Lorenz Oken, 1779-1851)은 생식(Die Zeugung, 1805)이란 저술을 쓴 1805년부터 유기체의 세포구조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셸링의 신지학에 매우 적대적이며, 자연철학 기본서(Lehrbuch der Naturphilosophie, 1809–1811)에서는 셸링의 브뤼노(Bruno, 1802)의 범신론에 버금가는 범신론을 서술했다. 즉 모든 것은 신의 사유이다. 철학은 자연과 인간을 통하여 이 사유의 변형들을 느낀다. 그런데 영원한 세계, 완전한 동물로서 간주된 인간, 이러한 것들은 이제는 잘 알려진 환상(환타지)들이다. [한편] 영원한 세계란 면에서, 그 영원한 세계의 발전은 신이 자기에 대해 취하는 의식이며, 자연적인 거대한 힘들을 이런 의식의 찰나들에게 동화이다 (에테르란 신의 입장이며, 빛은 의식의 작동이다). [다른 한편] 완전한 인간이란 면에서, 인간은 신적 오성의 소재지이며, 모든 종류의 동물들은 마치 그 오성의 분해된 부분들처럼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덧붙여야 할 것이 있다. 이 환상(환타지)들은 보다 나은 그리고 신적인 인간과 같은 전쟁의 영웅을 생각하면서 끝나게 될 것이다. 카알라일(Carlyle, 1795-1881)과 니체(Nietzsche, 1844-1900)에서처럼 낭만주의는 초인(최상)인간이라는 귀결에 이를 것이다.
슈베르트(Gotthilf Heinrich von Schubert 1780-1860)는 위와 반대로 신지적이고 신비적인 체계의 측면으로 나아간다. 그의 작품으로는 자연과학의 어두운 면에 대한 견해(Ansichten von der Nachtseite der Naturwissenschaft, 1808), 영혼의 역사(Die Geschichte der Seele, 1830)가 있다. 그리고 독일 시인이며 의사인 케르너(Justinus Kerner, 1786-1862)는 최면의 상태에서 정통함의 현상 또는 영감의 현상을 보았다. 카루스(Karl Gustav Carus 1789-1869)는 저술 프쉬케: 영혼의 발전사(Psyche. Zur Entwicklungsgeschichte der Seele, 1846, 1851)에서 영혼의 무의식적 영역 속에서 의식적 현상의 기원을 찾았다. 그리고 그는 의식이 무의식으로부터 출현하는 찰나를 파악하려 시도했다. 자기의식은 자기감정보다 앞서있으며, 자기감정은 낮은 정도에서 그 대상과는 겨우 구별될 뿐이다. 이 분리되지 않은 의식은 세계의 의식(la conscience du monde, Weltbewusstsein) 이다. 그 의식의 발전 조건은 신경체계에 의한 인상들의 집중화, 외적 세계에서 오는 새로운 인상들의 유입, 그리고 기억에 의한 인상들의 견고화이다.
다른 사람들 중에서 슈테펜스(Heinrich Steffens ou Henrik Steffens, 1773-1845)는 나는 무엇을 경험하는가(Was ich erlebte)(10권, 1840-1845)에서 그 당시의 지적 환경에 대해 매우 생생하게 서술했다. 그리고 그는, 마치 셸링이 세계영혼에 대하여(1798)에서 서술하려 했던 것처럼, 태양계의 체계에서부터 인간의 출현에 이르기까지 진화를 서술하려 애썼다. 광물학자이며 지구과학자이기도 한 슈테펜스는 (마치 나중에 스펜서처럼) 진화란 개별화로 향하는 것이라고 제시했다. 이 개별화는 인간에서 완전히 실현된다고 보았다. 인간 욕망의 폭력성 때문에 자연 속에서 충돌이 일어난다. 이 충돌은 은총에 의해서만 평온하게 된다. (642)
1806년에 프란쯔 바아더(Franz Baader, 1765-1841)가 셸링을 알았을 때, 그는 셸링 속에서 피히테와 스피노자가 너무 많이 들어있음을 발견했다. [반면에] 셸링은 그에게 야콥 뵈메와 상-마르땅 너무 경도되어 있다고 비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아더는 셸링의 세계영혼에 대하여(Von der Weltseele, 1798)를 “죽음의 잠 속에 침잠해 있는 원자론자의 자연 깨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셸링은 바아더가 지적했던 의미에서 자연철학을 교정했으며, 그는 자연 속에는 충돌하는 긍정적이고도 부정적인 두 개의 힘들 이외에도, 이 둘을 함께 유지하게 하는 셋째의 힘의 필연성을 인정했다. 적어도 바아더가 부여한 신적 진화의 서술은 야콥 뵈메의 서술에 매우 가깝다. (643)
졸거(Karl Ferdinand Solger, 1780-1819)(서른아홉)은 그의 저술 엘빈: 미와 예술에 대한 네 가지 담론(1815)와 철학적 담론(1817)에서 보여주듯이,자신의 비극적 아이러니의 이론 속에서,그 시대의 철학의 본질적 측면을 매우 잘 밝혔다. 그리고 세계 전체는 지상에서 신의 계시이다. 따라서 종교는 그처럼 개인의 부정이다. 아름다움은 현상들 속에서 신의 가장 완전한 표현이다. 그러나 관념과 지상의 요소 사이의 완전한 통합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예술, 종교, 도덕성은 신을 계시함과 동시에 신을 부정하는 것이며, 그러한 점에서 사물들[만물들]의 본질적 아이러니가 있다. (47OK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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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Bibliograph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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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ritische F. Schlegel Ausgabe, von E. Behler, 22 vol., Munich-Paderborn. (15:14, 47OKF) (수정, 정리, 57RKI) (옮김, 14:15, 57R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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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2 노발리스(Friedrich von Hardenberg, 필명 Novalis, 1772-1801), 독일 시인 철학자. 1798년에 쓴 소설(미완성) 『Die Lehrlinge zu Sais (Les Disciples à Saïs)』(사후 1802년 전집속에) 다른 번역들 『Les Disciples à Saïs, Hymnes à la nuit, Chants religieux』, 『밤의 찬가(Hymnen an die Nacht』. 『유럽(Europa 1799)』(Die Christenheit oder Europa, 1826)
1821 하임(Rudolf Haym, 1821-1901), 독일 철학자. Die romantische Schule, Berlin, 1870.
1842 하르트만(Eduard von Hartmann, 1842–1906) 독일 철학자.
1869 쟝켈레비치(Samuel Jankélévitch, 1869-1951) 의사, 번역가. 프로이트와 20년대 편지교환이 있었으나 남아있지 않다. 러시아국적으로 생애 대부분을 프랑스에서 보냈다. 자식이 셋인데 이다(Ida, épouse de Jean Cassou), 블라디미르(Vladimir, le philosophe), 레옹(Léon, diplomate en Extrême-Orient)이다.
1876 브레이어(Émile Bréhier, 1876-1952), 프랑스 철학사가.
1879 메쯔거(Wilhelm Metzger, 1879-1915), 1795년에서 1802년까지 셸링철학에서 시대(Die Epochen der schellingschen Philosophie von 1795 bis 1802, 1911).
1883 야스퍼스(Karl Theodor Jaspers, 1883-1969) 독일정신과의사 철학자.
1888 발(Jean André Wahl, 1888-1974) 프랑스 철학자. 유태인, 이차대전 중 미국으로 그 외에는 소르본 교수였다. La pensée de Heidegger et la poésie de Hölderlin, 1953.
1889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 독일 철학자. 횔더린 시의 주석(Erläuterungen zu Hölderlins Dichtung, 1936–1968) M. Heidegger, Approche de Hölderlin, trad. H. Corbin 1962.
[1894 젤리히(Carl Seelig, 1894-1962) 스위스 작가 독일어로 쓴다. 노발리스 전집(Novalis: Gesammelte Werke, 1945/46)(5권)]
1903 꼬르방(Henry Corbin, 1903-1978) 프랑스 철학자, 번역가, 동양학(이슬람)전공. 이슬람 철학사(Histoire de la philosophie islamique, 1964)
1903 쟝겔레비치(Vladimir Jankélévitch, 1903-1985), 셸링의 만년의 철학에서 의식의 여정(L'Odyssée de la conscience dans la dernière philosophie de Schelling, 1933).
[1906 강디약(Maurice de Gandillac, 1906- 2006) 프랑스 철학사가. 소르본교수, 푸꼬, 데리다, 리요타르, 알뛰세, 들뢰즈 등을 지도했다. 세기를 관통하며: 90년의 추억(Le Siècle traversé. Souvenirs de neuf décennies, 1998)] ,
1928 가르니에(Pierre Garnier, 1928-2014) 프랑스 시인, 작가, 번역가. 노발리스(Novalis, 1962)(présentation, choix et traduction: collection Écrivains d'hier et d'aujourd'hui, Seghers), no 9, 1962.
1928 벨러(Ernst Behler, 1928-1997) 독일 철학자. 고전아이러니, 낭만적 아이러니, 비극적 아이러니: 이 개념의 기원(Klassische Ironie, romantische Ironie, tragische Ironie: zum Ursprung dieser Begriffe(1972, 1981: 170쪽) - Kritische F. Schlegel Ausgabe, von E. Behler, 22 vol., Munich-Paderborn. [들뢰즈가 의미논리(LS, 1689)에서 세 가지 아이러니를 다루었는데 독일에서도 다루고 있군.
1936 슐랑제(Judith Epstein Schlanger, 1936-) 프랑스 여성 철학자. 예루살렘 헤브류대학교수. 셸링과 유한 실재성: 자연과 동일성의 철학에 관한 시론(Schelling et la réalité finie, essai sur la philosophie de la nature et de l'identité, 1966).
?-?, 쾨버(Richard Koeber, s.d.), 셸링의 자연철학의 근본원리(Die Grundprinzipien der schellingschen Naturphilosophie, 1881). - [Korber는 오타이며, Koeber이다. - 쾨버(Richard Koeber, s.d.)이다. // 쾨브너(Richard Koebner, 1885–1958)는 역사가이며 그런데 철학작품과 셸링의 작품이 없다.]
?-?, 페리(Ettore de Ferri, s.d.), 셸링의 동일성의 철학(La filosofia dell'identitia di Schelling, 1925)(Turin).
?-?, 가이거(J. Ph. Geiger, s.d.), 서핑에서 전혀 찾을 수 없다. 1795년으로부터 1809년까지의 셸링의 신관(神觀)(Schellings Gottes auffassung von 1795-1809, 1938)(Frankfurt a. M.).
(17:24, 57R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