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7일과 28일 전남 진도군 초청으로 여행블로거기자단 팸투어를 다녀왔다.
팸투어 일정중 한곳으로 찾아간곳이 대몽항쟁으로 유명한 남도석성이었다.
국가지정 사적 제127호로 지정된 남도 석성은 고려 원종때 배중손이 이끄는 삼별초가 진도를
떠나 제주도로 향하기 직전까지 마지막 항전을 벌였던 유적지로 대몽 항전의 역사와 함께 진도
군민의 애환이 깃든 역사 유적지이다.
남도석성은 삼국시대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며, 현재의 남도석성은 조선시대에 재축성한
것으로 짐작된다.
고려시대 고종 이후에는 왜구들이 침범하여 연해 지방을 노략질을 일삼아 해안과 섬지역이
쑥대밭이 되자 공도정책을 펼쳐 충정왕 2년 (1350)에는 진도의 관부와 백성들이 내륙 영암지방
으로 옮겨 조선시대 세종 19년(1437년)까지 피난생활을 할 정도로 국가가 국가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비운의 시기였다.
남도석성은 평탄한 대지 위에 축조한 평지성으로서 현재 남동마을의 대부분을 감싸고 있다.
남동리는 서방 및 남방으로 돌출한 서망산 및 망대산 사이의 내해에 자리 잡고 있다.
남도석성은 망대산 하록의 북단에 위치해 외부에서 보면 S자형으로 구부러져 있다. 따라서
외부로부터는 가려져 있어 보이지 않으면서 남도석성 남서쪽의 망대산과 서망산에서는 적을
감시하기에 좋은 지형조건을 갖추고 있다.
이런 천혜의 조건을 갖춘 요새가 있음에도 진도라는 큰섬을 버리고 백성들을 육지로 이주시키
는 황당한 전술을 택한 권력층이었으니 그 폐단과 실정이 얼마나 컸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다.
공도정책이후 왜구의 침입으로부터 가장 피해가 심했던 경상도 및 전라좌수영 관하의 수군진
들이 1488년 (성종 19년)에서 1490년(성종 21년)까지 3년간에 걸쳐 성을 축성하고 전라우수영
관하의 수군진들이 연산군 - 중종 연간에 축성된 점으로 미루어 볼때 성종 - 연산군 연간에
남도석성이 오늘날과 같은 형태로 축성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kbs2 주말드라마로 채시라, 김석훈, 최재성, 이덕화, 김호진, 신애 등이 출연하고 있는 천추
태후에서 고려건국초 고구려의 맥을 잊는 황제국임을 천명했던 고려는 중국의 유교를 신봉하는
신라계가 권력을 독점하기 위하여 지역갈등을 조장하고 중국 송나라에 사대하면서 고려를
제후국으로 전략시키고 거란의 침략하게 빌미를 제공함으로써 치욕의 역사 한 장을 만드는
비극을 연출하게 된다.
고려 무신정권이 들어선 이후에는 무신들간의 끊임없는 권력투쟁으로 국력이 소모되고 국가가
안정되지 못하여 몽고의 침략을 받아 자초하게되고 권력을 지키기 위한 왕과 대신들은 몽고에
투항하고 치욕의 강화조약을 맺게 되고 이에 반대하는 무신들이 대몽항쟁의 기치를 높이
올리면서 진도의 용장산성과 남도석성이 역사의 무대에 우뚝 서는 역사가 펼쳐진다.
역사 이래로 정부의 무능과 외세의 침입속에서 진도에 살고 있는 거주민들은 숱한 고난과 역경
에 처하게 되고 이를 문화를 승화시킨 절정의 전승민속이 진도씻김굿과 진모만가로 전해지고 있다.
진도군 임회면 남동리 149번지에 위치한 남도석성의 본래 규모는 그 둘레가 1,233자, 높이가
8자, 샘과 우물이 각각 1개씩 있었다. 그리고 영조때는 석축 둘레 1,040자, 높이 12자였다고
전해온다. 현재는 성의 총 길이는 610m, 높이는 5.1m이고 동문, 서문, 남문터가 남아있다
남도석성 성벽위에 올라서면 성벽안에 있는 마을을 볼수가 있는데 요즘 부쩍 관광객들이 찾기
시작한 남도석성 관청자리에 복원한 관리인도 없는 텅빈 관아건물과 텃밭옆에 허술한 민가
들은 슬픈 역사를 이야기 떠올리게 하는 묘한 부조화를 이루고 있다.
남도석성의 중요성과 역사성이 대두되면서 진도군에서 남도석성 복원 계획을 세우고 원래의
모습을 되찾기 위해 남도석성 마을안에 복원된 관아와 객사 및 내아를 비롯해하나하나씩 복원
해 가고 있는 중이다.
남도석성의 남문 앞으로는 동에서 서쪽으로 천이 흐르고 있는데, 주민들은 이 천을 ‘가는골
(세운천)’이라 한다. 이 개천에는 두 개의 홍교가 있는데 남문 바로 앞에 단홍교가, 이로부터
9m 거리에 쌍홍교가 위치하고 있다.
남도석성에 있는 쌍교와 홍교는 석성의 외곽을 건너다니기 위하여 축조한 것인데, 편마암의
자연 석재를 사용한 것으로는 전국적으로 보기 드물어 학계에서 큰 관심을 모으고 있는데 다리와
석성사이로 아스팔트도로가 깔려 있어 서로 동떨어진 별개의 시설물로 보일정도여서 이에대한
대책이 시급해 보인다.
남도석성이 진도에서의 최후격전을 벌인 곳이라면 국가지정 사적 제126호로 지정된 용장산성은
수전에 취약한 몽고군을 방어하기 위하여 해안가를 방어선으로 하여 석성을 쌓고 왕궁으로
삼았던 성이다.
진도군 군내면 용장리 106번지에 위치한 용장산성은 대부분의 원형이 사라진 상태이며, 성지가
부분적으로 남아 있으며, 성내의 용장사지 및 행궁지가 보존되고 있다.
1270년 (원종 11) 배중손과 노영희 등이 몽고에 굴복한 고려 정부에 반발하여 삼별초와 그 지지
자들을 이끌고 강화도에서 진도로 내려와 이곳에서 부서(部署)를 정하고 관부(官府)를 열었으며,
궁궐과 성곽을 쌓고 몽고 침략자와 개경 정부에 반기를 들어 승화후 온(承和侯溫)을 왕으로
추대하여 왕실과 대립되는 정권을 세웠는데, 이 때 쌓은 성이 용장성이다.그 나라의 이름이
오랑(五狼)이었다
용장산성의 북벽과 서벽 및 동벽의 일부는 바다와 접하고 나머지 구간은 산 능선을 통과하고
있다. 북쪽은 우리나라에서 유속이 가장 빠른 곳으로 잘 알려져 있는 명량해협과 접해 있고
3개의 만과 곶으로 이루어져 있다. 현재 성벽은 곶 지형에만 남아 있다.
성의 길이는 군내면의 용장리, 세등리, 고군면의 도평리, 벽파리, 오류리를 잇는 산등성을
따라 총 12.75km이며 높이는 4m내외이다.
원종 12년(1271) 5월 고려 정부는 김방경 등을 내세워 몽고군과 연합군을 형성하여 용장산성을
공격하였고, 김통정을 중심으로 한 삼별초의 잔여 세력은 진도를 떠나 제주도로 갔다.
제주도에서는 1273년(원종 14) 4월까지 지탱하다가 정부군의 공격으로 소멸하였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성의 둘레는 38, 741척(尺), 높이 5척이라 하였을 뿐, 그 이상의 상황은
밝혀지지 않았다.
[관련자료]
http://www.jindo.go.kr/
http://jindo.grandculture.net/
http://www.cha.go.kr/
[진도맛집]
<통나무횟집> 돌게장백반
전남 진도군 군내면 녹전리1-6 / 061-542-6969
<기와섬> 회정식
전남 진도군 진도읍 쌍정리 168번지 / 061-543-5900
<삼거리식당> 찌개백반
전남 진도군 조도면 창유리(조도섬, 조도면사무소소재지) /061-542-50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