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잘 쓴다는 것 - 구효서, 발터 벤야민 /리버티
오전 내내 구효서의 <풍경소리>를 읽었다. 올해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작품, 그가 하는 어떤 말도 신뢰할만한 한 비평가가 '한국소설이 여기까지 왔다' 라는 헌사를 열납한 작품. 읽는 내내 귓가에 풍경소리와 큰 적요(대적)가 시간을 빗살무늬 대칭으로 자아낸 작품, 그리고 어느 가을 내가 떠나가 머물던 산사의 낮과 밤을, 거기서 만났던 산 안과 산 밖의 사람들을 떠오르게 해준 작품. 내가 읽은 구효서의 두번째인지 세번째인지 다소 햇갈리는 작품. 이 단락의 나머지 문장들에 '이다'라는 종결형 조사를 붙이고 싶지 않게 만드는 작품. 내가 읽은 작품 중 가장 느리게 읽은 작품. 읽다 말고 소파에서 한 시간 잠에 빠졌다 깨어나 다시 읽은 작품. 누워서 읽다가 앉았다 읽다가, 서서 읽다가, 화장실까지 가져가서 읽다가, 읽다가 중간에 이 소설을 읽고 꼭 글을 쓰리라고 다짐하게 한 작품. 구효서의 <풍경소리>.
<풍경소리>의 많은 문장들에는 종결조사 '이다'가 빠져있다. 예를 들면, '미와. 예, 성불사 기와 같은.', '좌자가 이상하다는 생각도 전혀 안들었고.', '그런 사람이었던 엄마.', '그리고 이 모두가 예정된 일인지도 모른다는 것.' 그런데 이 문장들의 예외적이고 간단없는, 뜻밖의 마침은 울림을 남긴다. 풍경소리의 여운같은 울림. 이 여운을 느끼는데 가장 좋은 방법. 다른 사람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그것이, 누워서 책을 읽는 것이다. 나른한 듯, 몸을 소파에 눕히고, 책을 두손으로 바쳐들고, 키 큰 부처님의 상호를 올려다 보듯, 활자를 올려다 보며 소설을 읽는 것이다. 그렇게 두 세 페이지를 읽으면 팔이 아파오는데, 그러면 책을 얼굴에 덮고 잠시 잠에 빠지듯 여운에 지각을 맡긴다. 구효서 독서에 이르러 나는 누워서 읽는 독서가 독서의 고답한 한 경지라는 걸 체득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눈을 감고 잠시 어떤 소리들을 듣는 독서.
소설에는 소리들이 많이 나온다. 풍경소리, 고양이 소리, '슥삭슥삭' '땡강땡강, 쓰쓰쓰쓰, 스와와와, 이오이오...사람과 짐승과 벌레와 바람과 별들이 내는 소리. 고양이 소리, 새소리, 목탁소리, 염불소리, 공양간 도마질 소리, 쓰르라미소리, 팽나무 이파리가 바람에 쓸리며 내는 쏴와, 바닷소리, 그리고 젊은 경찰공무원이 권총을 건드리며 나는 더걱더걱 소리까지. 그런데 소설을 읽는 이에게 가장 깊이 다가온 소리는, 소리가 너무 커서 들을 수 없는 소리. 대적大寂이었다. 소설의 배경은 성불사였고, 대적광전은 거기 있었다.
이 소리는 계룡산 갑사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축물인 대적전으로 나를 데리고 간다. 계룡산 갑사 대적전. 대웅전 같은 위세있는 건물들에서 길 하나 물길 하나를 건너 눈에 뵈지 않을 만큼 멀찍이 떨어진 데 대적전은 있다. 대적전은 관음봉에서 흘러내려오는 물줄기를 등 뒤로 두르고 스스로 깊은 적요에 빠져 있다. 대적 전 저 아래로는 대나무가 궁륭을 이룬 돌계단이 높이 십여미터에 이르는 철당간 지주를 향해 나 있고, 대적전 저 너머는 천황봉에서 흘러 내려온 산줄기의 마지막 봉우리가 수평으로 부드럽게 드리워 있고, 그 위로는 허공이다. 맑은 날에는 푸르디 푸른 허공, 비가 오는 날에는 무채색의 허공, 그리고 가끔씩 비행운이 가슴을 긋고 지나가는 허공. 대적전의 오래되었고, 아담하면서도 기품을 잃지 않은 품격. 그것은 침묵의 깊은 둘레와 대적전의 미와가 바라보는 허공의 아득함에서 온 것이다. (미와 : 아름다운 기와. 풍경소리의 주인공 이름이기도 하다) 구효서는 <풍경소리>의 중간 즈음, 그렇게 쓰고 있다. '하늘보다 가깝지만 하늘보다 아득한 것. 그런 것이 허공이라고' 너무 커서 들을 수 없는 소리, 대적은 하늘보다 가깝지만 하늘보다 아득한 허공의 소리인가보다.
글을 쓰고 싶다. 구효서처럼. 구효서는 글을 잘 쓰는 작가다. 그것은 최근 내가 읽은 발터 벤야민의 글로 내 상상력을 옮겨가게 만든다. 벤야민은 글에서 말한다. 아는 것만 쓰라고. 아는 것에 스타일을 부여하는 것. 많은 생각을 하지 않는 것. 생각을 멈추는 생각. 생각이 끊어진 자리. 그것을 구효서 식으로 하자면 <풍경소리>, 혹은 <적요> 아니겠는가.
죽이지 않는 소설, 그런 소설도 있느냐는 주승의 질문에 미와는 큰 소리로, '있어요! 그런 소설.'이라고 답한다. 그리고,
'그리고 생각했다. 어떤 것을 소설이라 여기기에 주승은 저런 말을 하지? 또 생각했다. 주승이 읽은 소설은 뭘까? 어떤 거지? 그러다 아무 생각 않기로 했다. 아무 생각 않기로 하면 아무 생각도 않났다. 주승도 아무 생각 없이 물은 건지도 모르잖아, 라는 식으로 받아들이면 쉽게 생각이 멈추었다. 정말 그랬다. 과연 달라지고 있는 걸까, 나는. 생각이 멈추다니. 생각을 멈추다니. 사흘째 풍경소리를 들으니까? 그러니까?'
오늘 아침 부산에 계신 어떤 분과 카톡을 나누었는데, 나는 거기서 말했다. 혼란스러운 오늘의 상황을 큰 마음으로 잘 헤쳐가야겠노라고. 구효서의 <풍경소리>를 읽고 나서 바뀐 생각. 큰 마음이 아니라 맑은 마음. 요란한 소리가 아니라 적요. 아득한 허공을 오래오래 바라보는 깊은 마음. 생각을 멈추고 나니, 그것이 요체다. 글을 쓴다는 것도. 글의 요체도.
발터 벤야민의 <글을 잘 쓴다는 것>이라는 글을 옮겨본다.
글을 잘 쓴다는 것 / 발터 벤야민
훌륭한 작가는 그가 생각한 것 이상은 더 말하지 않는다. 말한다는 것은 이를테면 표현하는 것만이 아니라 동시에 사고의 실현을 뜻하는 것이다. 따라서 걷는다는 것도 어떤 목적에 도달하고자 하는 욕망의 표현일 뿐만 아니라 그러한 욕구의 실현인 것이다. 그러나 그 실현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질지는 - 그것이 목적에 맞추어 정확하게 이루어지든 아니면 마음내키는대로 부정확하게 이루어져 소기의 목적에서 벗어나든 - 길을 가는 사람의 평소 훈련이 어떠한가에 달려 있다. 그가 자제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또 불필요하게 샛길로 어슬렁거리는 움직임을 피하면 피할수록 그의 행동 하나하나는 충분히 제 구실을 하게 되고 또 그의 일거수 일투족은 목적에 더 부합하게 되는 것이다.
나쁜 작가에게는 많은 생각이 떠오르는 법이다. 그는 이러한 많은 아이디어 속에서 마치 훈련을 받지 못한 조악한 주자가 스윙이 큰 암팡지지 않은 육신의 동작 속에서 허우적대듯 자기 자신의 정력을 탕진해버린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그는 그가 생각한 바를 한번도 냉철하게 얘기할 수가 없는 것이다. 훌륭한 작가의 재능이란, 그의 사고에 정신적으로 철저하게 훈련된 어떤 육체가 제공하는 연기와 그 연기의 스타일을 부여하는 일이다. 그는 그가 생각했던 것 이상을 절대로 말하지 않는다. 따라서 글을 쓰는 행위는 그 자신에게서가 아니라 다만 그가 얘기하고자 하는 것에만 도움을 주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