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된 스승의 삿된 생각에 훈습되지 말라”
<54> 이참정에게 보낸 별도의 편지
[본문] 부추밀이 지난날 삼구에 있을 때 일찍이 편지를 보내와서 도를 물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설명을 해서 한번 보냈는데 뒷말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묵조선에 떨어져 막혀있으니 틀림없이 삿된 스승을 만나서 귀신의 굴속에 이끌려 들어간 것이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요즘에 또 편지를 받아보니 다시 또 고요함을 집착하여 훌륭한 공부라고 여깁니다. 그가 이처럼 꽉 막혀 있으니 어떻게 경산(徑山, 대혜)의 간화선을 참구할 수 있겠습니까?
[강설] 이 편지는 이참정을 통해서 부추밀의 고요함에 빠져있는 참선에 대한 병을 고치기 위해서 특별히 쓴 글이다. 앞에서 부추밀에게 보낸 글에서도 보았듯이 부추밀의 가장 큰 문제는 묵묵하고 고요한 경지에 떨어져 있으면서 그것을 공부의 즐거움으로 삼는다는 점이다.
고요함을 즐기는 참선은 소극적이며 소승적인 삶이다. 대혜선사의 간화선 불교는 보다 적극적이며, 대승적이며, 활동적인 생활선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죽은 참선과 살아 움직이는 참선의 차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묵조선이니 간화선이니 하는 선입견을 갖기 이전에 무엇이 인간본연의 모습에 잘 맞는 공부인가가 중요하리라 생각한다.
묵조선 간화선 선입견 갖기 전에
인간본연 모습에 맞는 공부 중요
[본문] 이번에 또 다시 그 사람(부추밀)에게 답장을 하면서 번거롭게 서로 상반되는 소리를 하여 구업(口業)을 아끼지 아니하고 심하게 다스렸습니다. 기꺼이 머리를 돌이켜서 일상에서 화두를 살펴보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옛 성인이 말씀하시기를, “차라리 수미산과 같이 크게 파계를 할지언정 조금이라도 삿된 스승의 삿된 생각에 훈습되지 말라. 겨자씨만치라도 의식 속에 들어가면 마치 기름이 밀가루 속에 들어가는 것과 같아서 영원히 빠져나오지 못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사람이야말로 바로 그와 같은 경우입니다.
[강설] 참선과 염불에 대한 견해에도 사람들이 서로 다르다고 집착을 하다보면 결코 헤어나지 못한다. 묵조선과 간화선에도 역시 한번 치우치면 절대로 그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돈오돈수와 돈오점수에 대한 견해도 물론 같다.
보수니 진보니, 민주주의니 공산주의니 하는 문제도 역시 같은 경우이다. 사람에게서 사상의 문제란 참으로 무서운 것이다. 같은 피를 받아 타고난 형제들도 사상의 차이에는 함께하지 못한다. 본문에서 비유를 든 것은 참으로 타당한 말씀이다. 대혜선사는 구업을 아끼거나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진정한 자비심을 발휘하여 사정없이 꾸짖고 비판하며 배척한다.
[본문] 만약 그 사람과 더불어 서로 만나거든 시험삼아 그에게 시시비비하여 보낸 편지를 얻어서 한번 보고 그것으로써 방편을 삼아 이 사람을 구제하십시오. 사섭법(四攝法) 가운데에 동사섭(同事攝)을 가장 으뜸으로 여깁니다.
그대는 마땅히 이러한 법문을 크게 열어서 그 사람을 믿어 들어가게 한다면 산승의 힘을 반쯤 덜어줄 뿐만 아니라 또 저 사람에게 믿게 해서 기꺼이 옛 굴속(묵조선)을 떠나게 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강설] 사섭법(四攝法)이란 사람을 포섭하여 교화하는 네 가지 방법을 말한다. 보시섭(布施攝), 애어섭(愛語攝), 이행섭(利行攝), 동사섭(同事攝)이다. 그 가운데서 같은 일을 함께하면서 그를 교화하는 방법인 동사섭(同事攝)을 가장 으뜸으로 여긴다.
이를테면 부추밀이 묵조선에 빠져있으므로 이참정도 우선은 방편으로 함께 묵조선에 빠져서 같이 공부하다가 어느 날 묵조선에는 오류가 많음을 함께 생각하고 논의하면서 그곳으로부터 함께 빠져나오는 방법을 의미한다.
대혜 선사는 부추밀을 애석하게 생각한 나머지 이참정에게 이와 같은 방편을 써서라도 구제하기를 바라는 간절한 자비심이 잘 드러나 있는 내용이다.
[출처 : 불교신문 2012.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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