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마오에 가는 길" 렘브란트, 1648년, 캔버스에 유채, 파리, 루브르
명화해설
누추함이 배어 나오는 실내 한가운데 식탁이 차려져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향하는 길을 침통한 표정으로 터널터널 걷는 중 자신들에게 다가온 한 나그네의 하룻밤이 걱정되어 자신의 집으로 초대한 글레오파와 그의 친구는 손님을 가운데 두고 식탁에 앉아 있으며 소년 하나가 음식을 나르며 시중을 들고 있습니다. 음식이 차려지자마자 감사기도를 드리고 빵을 떼어 나누어주는 그 나그네의 모습에 고요한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듯한 모든 빛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바로 그제서야 눈이 열린 두 제자는 그 나그네가 바로 자신들의 스승인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아보았습니다. 화면 왼쪽에 등을 보이는 제자는 화들짝 놀라 손을 얼굴에 대는 모습이고 오른편의 제자는 몸을 뒤로 젖히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듯이 그려졌습니다. 반면 빵을 나르는 소년의 표정은 아무런 미동이 없습니다. 두 제자와 달리 반응이 없는 이 소년은 이전에 예수님을 한 번도 본적이 없다는 것을 은근히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 그림에서 예수님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시키면 마치 그 안에 빨려 들어갈 것만 같습니다. 렘브란트는 이 예수님의 모습을 자신이 힘겨울 때 도움을 주었던 한 유다인 의사에게서 찾았습니다.미술사에서 갈채를 받는 화가 렘브란트의 위대함은 작품이 갖는 조형적인 우수함이 아니라 바로 이웃의 모습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영혼의 눈’을 가졌다는 점일 것입니다. 주님, 제 눈이 열려 당신의 모습을 삶 속에서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정은진 / 기쁨을 전하는 그림중에서)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루가 24, 13 - 85) 바로 그 날 거기 모였던 사람들 중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한 삼십 리쯤 떨어진 곳에 있는 엠마오라는 동네로 걸어 가면서 이 즈음에 일어난 모든 사건에 대하여 말을 주고 받고 있었다. 그들이 이야기를 나누며 토론하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다가 가서 나란히 걸어 가셨다. 그러나 그들은 눈이 가리워져서 그분이 누구신지 알아 보지 못하였다. (13-16)
부활 주일에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한 삼십리쯤 떨어진 엠마오라는 동네로(예루살렘 북서쪽) 가고 있었다. 그들의 모든 생각들이, 그들의 이야기가, 그리고 그들의 토론이 예수님을 화제로 삼고 있었고, 이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라는 것을 보여 주었다. 예수께서는 조용히 따르시다가 그들에게 다가가셨다. 예수께서는 그들과 함께 여행하셨다. 여행하시는 분, 이것이 예수님에 대한 루가 복음서 전체의 묘사이다.
예수께서 나타나셨을 때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처럼(요한 20,14), 그 두 제자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 제자들의 눈을 완전히 가린 그 힘은 부활 메시지의 불가해한 특징이었다. 예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것은 하느님의 개입을 통해서, 하느님의 능력을 통해서였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어떤 사람에게 나타나시어, 볼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선물에 의해서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삶은 단순히 지상 생활의 연장이 아니었다. 그분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계시되었을 때, 제자들이 그분을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알아본 것은 오직 하느님의 은혜에 의해서였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길을 걸으면서 무슨 이야기들을 그렇게 하고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러자 그들은 침통한 표정인 채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글레오파라는 사람이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던 사람으로서 요새 며칠 동안에 거기에서 일어난 일을 모르다니, 그런 사람이 당신 말고 어디 또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 "무슨 일이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이렇게 설명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에 관한 일이오. 그분은 하느님과 모든 백성들 앞에서 그 하신 일과 말씀에 큰 능력을 보이신 예언자였습니다. 그런데 대사제들과 우리 백성의 지도자들이 그분을 관헌에게 넘겨 사형선고를 받아 십자가형을 당하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실 분이라고 희망을 걸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이미 처형을 당하셨고, 더구나 그 일이 있은 지도 벌써 사흘째나 됩니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 몇몇 여인이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새벽에 무덤을 찾아 가 보았더니 그분의 시체가 없어졌더랍니다. 그뿐만 아니라 천사들이 나타나 그분은 살아 계시다고 일러 주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동료 몇 사람이 무덤에 가 보았으나 과연 그 여자들의 말대로였고 그분은 보지 못했습니다." (17-24) 그 두 제자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운명은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인간적 차원의 토론으로는 그 신비를 결코 해명할 수가 없었다. 그들의 슬픈 표정은 그들의 환멸을, 그들을 짓누르던 절망을, 그리고 그들의 넋잃은 슬픔을 드러내 주었다. 이것이 성금요일 사건으로 겁에 질린 제자들이 갖게 된 정신 상태였다.
예수님의 죽음은 그 두 제자가 예수에게 걸었던 희망의 종말을 의미하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능력을 부여 받은 예언자 이상의 분처럼 보였다. 그들은 그분이 이스라엘의 큰 희망을 실현하고 이스라엘을 미워하는 모든 사람들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하시리라고 희망하였다. 예수님의 능력에 찬 행동을 보았던 수많은 제자들은 예수님을 메시아 왕이라고 환호하였고 예수께서 당장에 예루살렘에서 하느님의 다스림을 시작하실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그런 메시아가 십자가 위에서 비참하게 고난을 받으면서 삶을 마감해야 한다는 것은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메시아 시대에 관한 모든 희망들과는 모순되는 것이었다. 그 자신이 원수들에게 예속 당한다면 어떻게 그가 원수들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해 낼 수 잇다는 말인가?
그 두 제자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메시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사흘 만에 부활할 것이라는 예수님의 예언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그 여인들이 가져온 메시지를 들었었다. 그들은 빈 무덤을 보았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분을 보지 못하였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발현은 부활 메시지를 확증해 주었다. 예수께서는 여기서 이 제자들과 함께 걷고 계셨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어떻게 해서 인간이 예수께서 살아 계시다는 것을, 그분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믿을 수 있게 되는가?
그 때에 예수께서 "너희는 어리석기도 하다!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그렇게도 믿기가 어려우냐? 그리스도는 영광을 차지하기 전에 그런 고난을 겪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 하시며 모세의 율법서와 모든 예언서를 비롯하여 성서 전체에서 당신에 관한 기사를 들어 설명해 주셨다. (25-27)
어찌하여 그 제자들의 마음은 부활 메시지에 대하여 폐쇄적이었나? 그들의 분별력은 콱 막혀 있었고, 그들의 마음은 무디고 둔감하였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예언자들로 하여금 부활메시지를 선포하게 하셨었다. 믿음의 정신으로 그들의 말을 귀 기울여 듣는 사람은 그 누구나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아무런 환멸도 느끼지 않을 것이었다. 예수에 대한 그의 희망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었다. 그렇지만 믿음은 하느님에 대한 어떤 이해와 하느님의 메시지에 대한 열린 마음을 포함한다. 그 제자들의 눈은 가려져 있었고,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과 함께 걷고 계시는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마찬가지로, 그들의 마음은 닫혀 있었고, 그래서 그들은 예언자들이 한 말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인간이 부활 신앙을 받아들일 수 있으려면 우선 그의 마음이 열려 있어야 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그 제자들을 위하여 성서를 풀이해 주셨다. 성서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영광이 주제이다. 부활한 그리스도가 성서의 핵심이다. 성서의 말씀들은 그분에 관한 것이다. 성서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며,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성서를 알지 못한다. 오직 주님께 의지해 온 사람만이 성서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그 사람은 먼저 나자렛 예수님은 약속된 메시아요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여 영광에로 들어 높여지신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믿음의 정신으로 깨달아야 한다. 그들이 찾아 가던 동네에 거의 다다랐을 때에 예수께서 더 멀리 가시려는 듯이 보이자 그들은 "이젠 날도 저물어 저녁이 다 되었으니 여기서 우리와 함께 묵어 가십시오" 하고 붙들었다. 그래서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묵으시려고 집으로 들어 가셨다. 예수께서 함께 식탁에 앉아 빵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나누어 주셨다. 그제서야 그들은 눈이 열려 예수를 알아 보았는데 예수의 모습은 이미 사라져서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길에서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서를 설명해 주실 때에 우리가 얼마나 뜨거운 감동을 느꼈던가!" 하고 서로 말하였다.
그 두 제자와 함께 식탁에 앉으신 예수께서는 빵을 떼심으로써 그 집의 가장 역할을 하셨다. 손님으로서 그 역할을 부여 받으신 것이다. 역사의 차원에서 그날 저녁 엠마오에서 있었던 일은 일상적인 식사였을 것이다. 그러나 루가는 이를 보다 높은 차원에서 표현한다. “빵을 뗌”이 그에게는 성찬의 거행을 의미하였다. 엠마오의 제자들의 이야기는 단지 교화적인 목적을 가진 일화가 아니다. 그것은 한 가지 중요한 진리를 담고 있다. 성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증언하지만, 성찬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살아있는 형상으로 현존케 한다. 성찬은 주님의 부활의 가장 큰 표징, 그것으로써 우리가 주님이 살아 계시고 현존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는 그러한 표징이다. 성찬은 단순히 주님의 죽으심만이 기념이 아니라 또한 그분의 부활하심의 기념이기도 하다. 성찬의 거행은 십자가 희생을 다시 한 번 현존케 하지만 그것은 또한 영원히 살아 계시는 주님의 부활에 대해서도 같은 작용을 한다. 그것은 그로써 우리가 예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다는 것을 알게 되는 표징이다. 우리에 주님을 알아보는 능력을 주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머무르실 때에, 주님은 단순히 그들과 함께 계시는 것이 아니다. 그분의 현존은 구원을 가져다 주는 활동적인 현존이다. 그분은 구원적 활동의 한 가지 요소는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볼 수 있게 되는 은사이다. 엠마오에서 그 제자들은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발현이 이루지 못한 것을 성찬의 거행이 이루었다. 성서의 풀이도, 그 말씀에 대한 제자들의 이해도, 이것을 이룰 수가 없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자마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 부활 이후 당시에 그러하셨듯이 예수께서는 더 이상 사람들 가운데 거처하지 않으신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영광에 드셨다. 하느님의 은사에 의하여 예수님은 부활의 증인으로 미리 정해진 사람들에게 나타나 보이셨다. 그 밖에 경우에는 그분은 눈으로 볼 수 없는 분이시다. 이제 제자들은 예수께서 길에서 그들에게 성서를 설명해 주셨을 때 그들 내면에 일어났던 일도 또한 이해하게 되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성서를 풀이해주셨을 때에 그들의 희망이 되살아났으며, 성찬의 거행은 그들에게 예수님은 살아 계시다는 것과 그들과 함께 여행한 그분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성서는 그들의 무디어진 마음에 불을 지폈으며, 성찬은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무능력을 없애 주었다. 성서의 말씀들이 부활 사건에 비추어 풀이되고 성찬의 식사가 거행될 때, 신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을 이해하게 된다. 그들의 마음이 불타오르고 그들은 그분을 알아본다.
출처 – 루가복음 영적독서 (성요셉출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