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민의 해독제
뉴질랜드의 7월은 겨울의 한 가운데다. 습한 기운에 비바람까지 몰아친다. 밤새 세차게 쏟아진 소낙비에 도로는 물청소를 해놓은 듯 말끔하다. 깨끗한 도로 위를 달리는 기분이 사뭇 가볍다. 겨울의 뒷자락에서 성급하게 피었다 진 자 목련 꽃잎이 비바람에 흩날려 허공에서 소용돌이를 친다.
그런 가운데 이른 아침부터 공항으로 향하는 발길들이 부산하다. 이른 아침부터 택시 손님을 태우고 여러 차례 공항을 드나든다. 11시를 넘어서는데도 국제선과 국내선 출발지 입구가 활기 넘친다. 인구 100만 도시, 오클랜드 공항이 뉴질랜드를 대표하는 관문답게 분주하다.
공항을 빠져 나오다 근처 주유소에 들러 택시에 연료를 가득 채운다. 운전하는 사람도 좀 생각해 달라며 배에서 꼬르륵 하는 신호를 보내온다. 스스로에게 고용된 이 몸을 누가 챙겨주나. 마음 씀씀이가 잠시 쉬었다 가 잔다. 커피 한잔을 들고서 창 밖을 내다본다. 내리던 비가 그치고 선명한 무지개가 공항 활주로에서 뻗쳐 나오고 있다.
창 밖 풍경을 보며 생각에 잠긴 동료 운전기사가 커피를 들며 빙그레 웃는다. 택시 기사의 대 원로 격인 앤드류 할아버지다. 뭘 생각하세요? 인사말을 건네니, 이번 주말 아홉 번째 증손 돌 선물로 뭘 줄까 생각 중 이란다. 그냥 손자가 아니란다. 손자는 15명 이미 다 장성했단다. 아들 딸 5명에 손주 15명에 증손이 9명이라니… . Great grandson! 어마 어마하다. 실례인줄 알면서도 궁금해서 조심스레 다시 묻는다.
먼저 내 나이를 밝히자 당신은 84세란다. 84세? 원 세상에나 평소 그렇게 안 봤는데. 잠자코 들어보니 택시운전 이력이 엄청나다. 1950년 그러니까 우리 고국 6.25 전쟁 때 26세 나이로 20년 택시운전대를 잡은 것이다. 그리고 직업을 바꿔 잔디 깎기 기계 만드는 회사 기술자로 60세까지 근무하다 정년 퇴직을 하고 은퇴에 접어 들게 되었다고.
그 뒤, 그냥 생활하기에는 무기력 한 것 같아 다시 택시 운전을 시작해 일하다 보니, 24년이 흘러 84세에 이른 것이다. 택시 운전 경력 44년! 84세? 아직도 정정해 보이는데, 안경을 쓰지 않고도 운전이 가능한 상태이고 요즘도 아침 일찍 5시에 시작해 점심 때 집에 들러 쉬다가 오후 5시쯤에 일을 마친단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주 5일. 낮에 운전하는 규칙적인 생활이다.
택시 인생 이력을 들으며 의아해 하고 신기한 듯 바라보며 묻는 후배가 기특해 보였는지 등을 두드려 준다. 나이로 봐도 난 새까만 후배요. 택시 운전 경력으로 봐도 그는 하늘 같은 선배다. 어디 감히 견주기나 할 군번인가? 자기 주변 친구들은 모두 저 세상으로 먼저 돌아갔다고 한다. 이유를 물으니 노후에 자기 몸에 맞는 꾸준한 일거리가 없어서였을 거란다. 때아닌 인터뷰를 술술 한다.
“택시를 그렇게 오래 하면서 좋다고 느끼는 점은 뭐가 있어요?”
매일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세상을 구경 할 수 있는 점. 이젠 생존 수단의 택시 운전이 아니라 생활의 길잡이로 여겨진다고. 별별 사람, 참 안쓰러운 모습, 온갖 일들을 만나다 보니 좋을 때도 있지만, 가끔씩은 자기 연민(憐憫)같은 것도 일어난단다. 적당한 수입이 있어 가족들이나 종친 모임, 교회에서 역할을 할 수 있어서 보람을 느낀다는 것. 많은 책도 읽고, 하늘을 우러러 보는 시간이 많아서 괜찮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일을 마치고 쉴 수 있어 자유로워서 편안한 점. 해마다 한 달씩은 아내와 여행도 한단다.
얘기를 듣고 보니 할 일이 있는 것 자체가 행복이고 축복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너무 한가하면 딴 마음이 생기기 쉽고, 생활리듬이 깨지게 마련이라고. 언제 은퇴를 할지 여쭈니, 손님의 안전을 최우선 책임 져야 되는 일이기에 택시 운전 면허증 갱신에 따른 건강에 문제가 없다면 여건이 허락하는 한 계속 일하겠다고 한다.
84세에도 현역으로 일한다? 아직껏 땀 흘려 일할 수 있고 세금도 내며 건강도 따라줘서 고맙단다. 온화한 얼굴이 비에 씻긴 나뭇잎 같다. 말간 잎이 햇살에 반짝거리듯 얼굴에서 빛이 난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게 있다면요?”
가족과 건강 그리고 감사면 다가 아닌가, 하며 빙긋 웃는다. 아직도 저녁 무렵 동네를 걸으며 그날 일을 생각해보고 신체 건강도 다진단다. 오랫동안 안전 운전을 한 비결은 흐름운전에 따르는 것. 길을 알면 흐름에 맡기고 자연스런 운전이 된다고. 마무리 말로 맺는다.
“That’s enough!”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세 가지가 있다고 들었던 게 마침 생각난다. 그 하나가 곤충의 눈이고, 그 다음이 새의 눈이고, 마지막이 물고기의 눈이라고. 곤충의 눈은 바로 눈앞만 바라보는 좁은 시야라면, 새의 눈은 멀리 넓게 볼 수 있는 것이며, 물고기의 눈은 세상 흐름을 파악 할 수 있는 통찰력까지 가진 상태라고 한다. 앤드류 할아버지야말로 이 세가지 눈을 가진 분이라 생각이 든다.
나이가 들수록 입은 닫고 귀는 열고 주머니는 내어주라는 옛말처럼 생활 속에서 그대로 살아가고 계신 분이다. 겸손하게 낮은 자리에서 묵묵히 듣는 마음으로 세상을 대하니, 하늘 소리도 듣고 땅의 소리도 들으며 천수를 누리는 것 같다. 이야기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자, 선명한 무지개 옆에 또 한 줄기 무지개가 피어 오르고 있다. 쌍무지개다. 긴 여운의 짧은 글, 한 자락이 아름다운 쌍무지개 위에 걸려있다.
"자기 연민의 해독제는 바로 감사한 마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