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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은 자는 사람 죽은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준비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교독한 말씀의 내용은 거라사에서 돌아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무리들이 환영하는 장면을 보여주면서 시작 됩니다.
이런 말씀이 있죠?
눅 8:40 “예수께서 돌아오시매 무리가 환영하니 이는 다 기다렸음이러라”
지난 번 우리가 함께 나눈 거라사 지방과 대조가 되죠? 거라사 지방에서는 가주기를 바랐고요? 갈릴리 지방에서는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성도님들 여러분들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어느 바쁜 일 철이 되었습니다.
시골 농부들에게 모내기 철은 정신 없이 바쁜 시간입니다.
그런데 안식일이 옵니다. 벌써 안식일이네? 아랫 논에 모내기를 하여야 하는데.
우리들은 모내기를 할 일이 없기 때문에 그런 생각은 하지 않으실지 모르지만 그 비슷한 생각이 우리의 마음에 있다면
예수님 내 마음에 계신 것이 불편하다는 증거입니다.
또 화요일이네, 안식일 시작하는 저녁이 오네! 저녁 집회 이야기를 들으니 가야 하고
마음은 콩 밭에 있고요, 우리 성도님들 여러분들 마음에 예수그리스도를 억지로 모시는 마음들이 되지 않길 소망합니다.
거라사 거민들처럼 예수님이 또 누구집 돼지때들을 몰살 시키면 어쩌나 라는 생각을 가지면 우리 마음에 예수께서 계실 곳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믿는 척은 할지 모르지만 나름대로 믿고 있다고 자부할지는 모르지만 예수님 때문에 불편한 마음이 있다면 예수님 계실 곳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성도님들 우리 모두의 마음이 거라사 마음이 아니라 갈릴리의 마음 언제나 예수님을 환영하는 마음들이 되길 소원합니다.
저는 아버님께서 그래도 연약한 모습이 있었지만 안식일이 올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보고 배우게 되었습니다.
역시 바쁜 모내기 철입니다. 가뭄이 와서 물이 적어서 개울 물이지만 너도 나도 모내기를 하려고 서로 끌어 사용하려 하죠,
그래서 차례를 정하였습니다. 그런데 내일 우리 집 차례입니다. 우리가 물을 사용할 차례입니다. 그런데 안식일입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차례에 모내기를 하지 못하면 다음 차례까지는 한주가 있어야 하는데 동네 사람들의 관심이 저희들 집에 있었습니다.
금요일 들에서 일을 하는데 물관리 하시는 책임자가 와서 묻습니다.
내일 어떻게 하실 것인가요? 내일 우리는 일하지 않습니다. 한 마디로 딱 잘라 대답을 했습니다.
그해 어떻게 되었을까요? 다음 우리 차례가 되었을 때에는 물이 너무나 적어서 모내기를 할 수가 없어서 저희들은 모내기를 포기 하였습니다.
그리고 조를 심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 조를 아시나요?
이게 조입니다. 그런데 가을이 되었습니다.
물이 없어 억지로 심은 논의 벼들은 가뭄을 이기지 못하여서 타들어가고 하여서 벼 수확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저희들 논에 심은 조는 얼마나 잘 되었는지 보는 사람들 마다 한 마디씩 합니다. 조를 심기를 참 잘 했다는 것입니다.
조를 심고 싶어서 심었습니까? 모내기를 할 수 없어서 왜요? 안식일이 걸려서.
저는 그날 안식일을 어떻게 지켜야 한다는 것이 저의 머리에 각인이 되었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안식일은 포기할 수가 없는 날이다.
제가 임지혜 집사 이야기를 자주 드렸댔지요? 이제는 할 수 있는 기회도 아마 없을 것입니다.
안식일과 명절이 겹쳐질 때 어떻게 했습니까?
남편이 무슨 말을 하여도 시어머니가 어떤 말을 하여도 어떻게 했습니까?
안식일 먼저 교회 와서 예배를 드리고 오후에 시부모가 계신 곳에 갔습니다.
그리고 죽도록 일을 하였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습니다.
저는 하늘은 그런 사람들이 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런 자들의 마음에 주님께서 계시기를 원하지 않을까 합니다.
우리 성도님들 예수님을 거절한 거라사인들이 아니라 언제나 환영하였던 갈릴리 사람들처럼 살아가길 축복합니다.
그 가운데 누가 있었습니까?
41절은 이런 말씀을 보여 줍니다.
눅 8:41 “이에 회당장인 야이로라 하는 사람이 와서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려 자기 집에 오시기를 간구하니”
간구하는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그 다음절이죠
눅 8:42 “이는 자기에게 열두 살 된 외딸이 있어 죽어감이러라”
무슨 말입니까? 지금 자기 딸이 다 죽어 가니까 자기 집에 오시어서 딸을 살려 달라는 간구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일행은 야이로의 집을 향해 갑니다.
예수님의 걸음이 빨랐을까요? 빨리 가고 싶어도 예수님 주변에는 항상 군중들이 많아서 빨리 가실 수가 없었습니다.
야이로의 속이 다 타죠? 그런데 가다가 또 한 사람 목적을 가지고 접근한 한 사람을 만납니다. 누구를 만났습니까?
오늘 본문 교독한 말씀을 보면 40절에서 42절까지 있고 그 다음 49절이 나옵니다.
43절부터 48절까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우리 모두 다 잘아시죠?
혈류증을 앓고 있는 여인을 만납니다.
그러면서 또 시간이 지체 됩니까? 누구의 속이 다 타들어갑니까? 야이로의 속이
그런데 예수님은 바쁘신 것 같습니까? 바쁘시지 않은 것 같습니까?
저는 언제나 이러한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길 소원합니다.
특히 차를 몰고 다닐 때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몰고 다니길 정말 소원합니다.
집사람의 말에 저는 차만 타면 바쁘다고 합니다.
빨리 가지 않아도 되는 일에도 핸들만 잡으면 바쁜 사람처럼 행동한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어느 순간 그러한 저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바빠도 숨이 넘어가는 사람이 있다 하여도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자 라는 마음의 다짐을 많이 합니다만 잘 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저의 그 나쁜 습관을 고쳐 주시길 소원합니다.
그런데 야이로는 정말 급하였습니다.
이제 그 중간에 만난 여일을 고쳐주신 예수님의 발길은 야이로의 집을 향하여 갔습니다만 곧 야이로가 우려 하였던 일이 발생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눅 8:49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말하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선생님을 더 괴롭게 하지 마소서 하거늘”
딸이 어떻게 되었다고요? 죽었다. 그 소리를 들었을 때 야이로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야이로의 마음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예수님께서는 그 말을 들으시고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눅 8:50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시고”
그런 말씀을 하시고 집안으로 들어가시니 집안 사람들이 아이의 죽음을 인하여 통곡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울음소리를 들으신 예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눅 8:52 “모든 사람이 아이를 위하여 울며 통곡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그런 말씀을 하시니 울던 사람들이 어떻게 했다고 합니까? 그 다음 말씀입니다.
눅 8:53 “그들이 그 죽은 것을 아는 고로 비웃더라”
예수께서는 무엇이라 하셨다고요? 잔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무엇이라 하고요
죽었다, 우리 성도님들 예수께서 죽은 것을 모르시고 자는 것을 모르시는 것입니까?
성경이 말하는 언어들에 대하여 바른 이해가 필요합니까?
야이로의 딸은 그 다음의 말씀에 보면 일어나라는 말씀으로 살려 주셨습니다.
오늘은 그 내용보다 잠과 죽음에 대한 말씀을 좀 드리려 합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마 8:21-22 “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님의 제자 되기를 원하는 사람이 예수께 무슨 청을 하였습니까?
지금 저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장례를 치르고 와서 주님을 따르게 하소서 라고 하니까 예수님의 말씀은 무엇이었습니까? 죽은 자들이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라 하셨죠?
죽은 자가 어떻게 죽은 자를 장사를 지낼 수가 있습니까?
이 말씀은 분명 죽었다 라는 의미가 두가지 의미가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말씀이라고 볼 수 있습니까?
성경이 말하는 죽음의 의미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진짜 숨이 끊어진 죽음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진 죽음입니다.
이 두 가지의 죽음 중 어느 것이 진짜 죽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지는 것과 호홉이 끊어지는 것, 둘 중에 어떤 죽음이 진짜 죽음인가 하는 것입니다.
저의 질문의 형태가 호홉이 끊어지는 것보다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지는 것이 진짜 죽음이라고 하는 것 같습니까?
세상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진짜 죽음을 어떤 것이라고 할까요? 그들은 호홉이 끊어지는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호홉이 끊어지는 죽음을 어떤 것으로 비유했습니까? 자는 것으로 비유 했습니다.
그러나 호홉이 끊어지는 죽음을 잔다라고만 표현해서는 안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성경은 그러한 죽음도 죽음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계 2:11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무엇이 나옵니까? 두 번째 사망이라고 합니다.
그럼 첫 번째 사망도 있다는 말씀입니까? 그 첫 번째 사망은 어떤 사망인가요?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우리의 호홉이 끊어지는 사망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그럼 두 번째 사망은 어떤 사망입니까?
하나님께서 첫 번 사람 아담을 창조하시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셨습니다. 먹으면 어떻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까?
창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습니다.
근데 먹는 날에 죽었습니까? 누가 먼저 먹었습니까?
창 3: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여자가 먼저 사탄이 사용하는 뱀의 미혹에 빠져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었습니다. 먹는 즉시 죽어 버렸으면 누가 먹을 일이 없었습니까? 아담이 먹을 일이 없었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의 결과를 보고 같은 일을 즉시 행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오늘날도 그렇습니까?
그래서 성경은 이런 말씀을 주고 있습니다.
전 8:11 “악한 일에 관한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아니하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는 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
악한 일에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아니한다고 하죠?
제가 한번은 담배와 관련 된 전도지를 나무아래에 쉬고 있는 젊은 사람들에게 준 일이 있습니다.
그 전도지를 받아 든 사람이 콧방귀를 뀌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담배가 사람의 생명을 단축한다고요? 웃기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뒷집 할머니는 하루에 담배를 두 갑씩 피우는데 100세가 다 되어 갑니다.
그래도 담배가 수명을 단축 시킨다고 할 수가 있습니까 라고 합니다.
우리 성도님들도 그런 말을 들은 적 있습니까?
설탕이 건강에 해롭다고 하니까, 나는 설탕물에 밥을 말아서 먹습니다.
거의 매일 그렇게 먹어도 이렇게 건강합니다 라는 말 하시는 분들이 있죠.
커피 해롭다고 하니까 나는 커피 하루에 다섯잔 이상 먹지 않으면 잠을 못잡니다 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까?
악한 일에 속히 징벌이 따르면 아무도 악한 모습으로 살지 않을텐데 왜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 13:30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무슨 말씀에 대한 답입니까?
곡식중에 가라지도 보이는데 우리가 뿝으리이까 라고 하니까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 주셨습니까? 둘다 추수때까지 두라고 하셨죠?
그 전절 29절을 보면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을 뽑을 수도 있기 때문이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었어도 그 징벌이 속히 이르도록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먹는 날에 그들이 죽었다면 어떻게 될뻔 했습니까?
이곳에 계신 우리 모두는 없는 사람들이 될뻔 하였습니다.
그렇습니까? 아담의 옆구리에 우리 모두가 있었는데 아담이 죽어버렸다면 우리는 어디서 태어납니까?
그래서 구원의 경륜을 반포하시고 예수께서 사람되어 오시고 인류를 위해 창조주가 대신 죽으시고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감사한 일입니까?
그럼 먹는 날에 죽으리라 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거짓말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먹는 날에 죽으리라고 하셨습니까? 다시 창세기 보겠습니다.
창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언제 죽으리라 하셨습니까? 먹는 날에는 죽으리라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날에는 죽지 않았어도 약 900년 후 죽은 아담의 죽음을 말씀하신 것이라고 해석들 하십니다. 성경을 그렇게 보와도 됩니까?
그것이 우리 방식 성경해석이죠?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성경에는 죽음 가운데 이런 죽음이 있다고 합니다.
엡 4:18-19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이 말씀 중에는 죽음이라는 말씀이 전혀 없지만 말씀은 죽음을 가르쳐 준다고 이해할 수 있는 많은 정보들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요?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난 상태입니다.
전기를 보시는 분들이 전기 선을 보시다가 이 선은 죽은 선입니다 라는 말을 하죠?
그렇게 하시는 말들을 들어 보셨습니까?
그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이 선은 전기 회사로부터 공급되는 그 전기로부터 어떻게 되었다는 말입니까? 끊어 졌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어떤 선이라는 말입니까? 죽은 선이다.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는 순간 어떻게 되었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난 존재가 되었다.
제가 군위에 있을 때 자두 나무 접과 작업을 하는 일을 해보았습니다.
제가 도와 주는 사람이 인력 사무실을 하다 보니까 일손이 모자랄 땐 으레가 저를 부릅니다. 인력 사무실에서 나오는 일은 하지 않는다고 하여도 힘든 일이 아닌 것 가운데 사람이 모자라면 저를 부릅니다.
그래서 생전 처음 자두 나무에 달린 자두를 접과 했습니다.
자두 나무가 그렇게 연한지 몰랐습니다. 제가 연하다고 하니까 어떤 분은 그것은 연한 것이 아니고 너무 강한 나무라고 하드라고요.
접과를 하다가 높은 곳에 있는 가지를 잡으려고 당시다가 자두 나무를 잘라 버렸습니다. 잡아 당기니까 그냥 부러 져 버렸습니다.
엄청 큰 가지라고 가지에 자두도 많이 달려 있었습니다.
밭 주인이 보고 신경쓰지 마세요 라고 했지만 엄청 미안했습니다.
그래서 일을 더 열심히 했더니만 주인 눈에 들었는지 저를 보고 내일도 와서 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곳에서 안 와요 라고 하지 못하고 그냥 돌아 와서 그 이튿날은 사람이 좀 많이 나와서 다른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그 밭 주인이 왜 그 사람 오지 않았느냐고 하드랍니다.
잘려 나간 자두 나무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순간 말라 버립니까? 하루 종일 푸른 잎 그대로 있어서 마음을 더 아프게 하였습니다.
그러한 나무를 보면서 저는 창세기 2장의 말씀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난 것이 이런 상태이구나 떨아져 나가도 자기를 보면 떨어져 나간줄을 모르겠구나 생각하였습니다.
오늘 우리 성도님들의 모습이 하나님의 생명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길 바랍니다.
사탄이 우리를 하나님의 생명에서 떨어 뜨리려 할지라도 넘어가지 않길 소망합니다.
에베소의 그 다음 말씀은 하나님의 생명에서 떨어져 나간 사람들의 모습을 우리에게 이렇게 보여줍니다.
엡 4:19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무엇이 없는 자가 되어 라고 합니까? “감각 없는 자가 되어” 라고 합니다.
감각이 무엇을 가지고 감각이라고 합니까?
감각에 좀 더 발전된 용어가 오감이죠? 오감은 무엇을 가지고 오감이라고 합니까?
시각, 청각, 미각, 후각, 촉각, 이러한 다섯가지 중 부분적으로 감각이 없으신 분들은 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장애인이라고 하죠?
시각장애인, 청각장애인, 후각과 미각은 없어도 살아가는데 큰 지장을 받지 않아서 그런지 미각 장애인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습니다만 그것도 장애이죠.
그리고 촉각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피부에 무엇이 닿아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이렇게 다섯 가지를 다 잃은 사람은 의학적으로 죽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호홉이 끊어 질 때 이런 것을 다 잃을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죽은 사람 보니까 그런 것 같습니까? 죽은 사람 앞에서 아무리 울고 야단을 하여도 시끄럽다 좀 조용히 해라 라고 하는 말 하던가요?
이제 우리의 영혼을 진단 좀 해보길 원합니다.
우리 성도님들 우리의 영혼은 죽은 것이 아닌지 살펴 보자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저에게 교회에서 자장가만 부르지 말라고 하십니다.
성도들에게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말씀을 먹이라고 합니다.
이제 그런 기회는 저에게 공식적으로는 오늘과 다음 주 저녁에 두 시간 뿐입니다.
그동안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그런 말씀을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저는 이 다음에 다시 시간이 주어 지드래도 저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씀을 전하게 될 것입니다.
죽은 자에게 불로 지저도 소리치지 않습니다.
냉동창고에 넣어도 춥다고 하지 않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의 모습이 그렇지 않은지 살펴보자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예배 시간에 관심을 가져 달라고 그렇게 호소하여도 제가 우리 성도님들을 볼 때는 무반응인 것 같습니다.
무엇이 없다는 것입니까? 감각이 없다는 것이죠?
어떤 상태라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있는 상태다,
우리 성도님들 인정하시나요? 나는 인정 못하겠다고 하시렵니까?
그래도 괜찮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절망을 말해 주지 않고요 희망을 말해 주기 때문입니다.
에스겔이 볼 때 교회 모습은 마른 뼈들이 가득찬 해골 창고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이적이 일어납니다.
겔 37:9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하셨다 하라”
에스겔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대언합니다. 그랬더니 생기들이 바른 뼈들에게 임하고 살아 납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런 말씀을 줍니다.
겔 37:13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에서 나오게 한즉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지금 우리를 가두어 둔 무덤 문을 하나님께서 열어 주실 때 나오지 않는 사람들은 주님 오시는 날 그 무덤을 열고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성경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주님 오시는 날은 자는 성도를 깨우로 오시지 죽은 자를 깨우로 오시는 것이 아니고요 주님 안에 산 자들을 데리러 오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도님들 나라고 하는 무덤에서 나오게 되길 바랍니다.
내 생각의 무덤에서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길 바랍니다.
교회가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느끼시길 바랍니다.
언제까지 이런 상태로 갈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죽은 우리를 살려주시기 위하여 당신께서 창조주 께서 우리가 죽어야 할 죽음을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죄의 심판을 예수님께서 받으셨습니다.
이제 우리 일어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그리스도의 보혈로 열어 놓으신 무덤에서 나오시길 바랍니다.
장유에 죽어 있는 20만의 영혼의 부르짖음이 들리지 않습니까?
우리 모두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진 고리를 이어주기 위해 오신 예수그리스도의 보혈로 다시 살아나게 되길 바랍니다.
받아 들이면 살아 납니다. 그리고 그 생명 안에서 살아갑시다.
그리고 예수님 오시는 날 기쁘게 환호하면서 예수님을 맞이하길 축복합니다.
기도
하늘에 계시는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감각없는 자로 살았던 우리의 허물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우리에게 무덤을 열고 나와서 살라고 하신 아버지의 말씀을 따라 살려 합니다.
우릴 도와 주시어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그리고 예수님 오시는 날 기뻐 찬양하며 주님을 영접케 하옵소서
우릴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눅 8:49-56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말하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선생님을 더 괴롭게 하지 마소서 하거늘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시고
그 집에 이르러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아이의 부모 외에는
함께 들어가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
모든 사람이 아이를 위하여 울며 통곡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그들이 그 죽은 것을 아는 고로 비웃더라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불러 이르시되 아이야 일어나라 하시니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나거늘 예수께서 먹을 것을 주라 명하시니
그 부모가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경고하사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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