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국의 영웅 녹도 만호 이대원 장군의 충절을 기리며
인묵 김형식
●.1. 구국의 영웅 이대원 장군/
인묵 김형식
임진왜란 발생 5년 전인 1587년 2월 전남 흥양(오늘날 전남 고흥)의 녹도 만호(조선시대 수군의 지역 부대장)였던 이대원 장군은 남해안을 침범해 해적질을 일삼는 왜구들을 대상으로 두 번의 해전을 치렀다. 장군은 그해 음력 2월 10일 왜구의 흥양 침입 소식을 접하자마자 즉각 출병하여 왜선 여러 척을 격퇴하고, 적장의 목을 들고 개선하였다. 그런데 직속상관이었던 전라 좌수사 심암은 장군의 전공을 자신이 한 것처럼 해달라는 부당한 요청을 했고, 이에 응하지 않은 강직한 장군에 대하여 성을 내며 앙심을 품게 된다.
음력 2월 17일 왜구는 왜선 18척으로 손죽도 근해를 침범했는데, 다분히 일주일전 패배를 보복하려는 성격이 짙은 공격이었다. 이 때 심암 좌수사는 병력을 더 모아 다음 날 공격하게 해 달라는 장군의 요구를 묵살하며, 지쳐있는 수군 100여명만으로 왜구를 당장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장군은 후발대로 지원군을 보내달라는 요청을 남긴 채 출병하여, 적들과 3일간 혈전을 벌이지만, 중과부적으로 끝내 사로잡히고 만다. 왜구들은 이 장군을 돛대에 매단 채 사정없이 때리며 항복을 요구했지만, 장군은 오히려 적들을 꾸짖으며 장렬한 최후를 선택했다. 왜구들과의 혈전 중 애타게 기다렸던 지원군이 끝내 오지 않게 됨을 안 후, 자신의 속적삼에 혈서로 썼다는 절명시(絶命詩)는 읽는 사람에게 애절한 마음을 느끼게 해준다. 기대하였던 지원군이 오지 않는 데 따른 절망(絶望)이 흠뻑 배어있고, 임금과 부모에 대한 충정이 깊이 어려 있는 시이다.
해 저무는데 적선 왜구들이 바다를 건너오니 / 日暮敵船渡海來
병사는 외롭고 힘은 다하여 이 내 삶이 서글프다 / 病孤勢乏此生哀
임금님과 어버이에 대한 은혜 모두 갚지 못하니 / 君親恩義俱無報
한 맺힌 저 구름도 흩어질 줄 모르네 / 恨入秋雲結不開 (원문 및 번역 / 이충헌)
손죽도 해전에서 이대원 장군과 수군을 사지에 몰아넣었던 심암 좌수사는 이후 한양으로 압송되어 조사를 받고, 이대원 장군 사후 44일 째 되던 그해 음력 4월 4일 당고개에서 효수되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이 역사적 기록이다. 파직되어 한양에 끌려간 심양은 조사기관인 의금부 관리의 비호를 받은 행위도 적발되어, 해당 관리도 파직 당한다. 부하는 사지에 몰아넣고, 자신은 살아보려고 애쓰는 이중인격의 극치라 할 것이다. 안타까웠던 점은 영흥 해전에서의 공적으로 조정에서는 심암 좌수사를 파직하고 그 자리에 이대원 녹도 만호를 임명한다는 교지를 내렸으나, 그 교지를 받기도 전에 손죽도 해상에 쳐들어온 왜구들과의 싸움에서 장군이 이미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이때 장군 나이는 한참 젊은 22세였으니, 짧지만 선이 굵은 삶을 마감한 것이다.
세상에 묻힐 수 있었던 이대원 장군의 장렬했지만 억울한 죽음이 당시 민중들의 슬픔과 분노, 장군이 혈서로 남긴 절명시, 송강 정철의 장남 정기명이 남긴 ‘녹도가,’ 한천 정협의 조사(弔辭) 등을 통해 진상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어 사후에나마 명예를 회복하고 사회정의가 회복되는 반전이 가능하게 된 것은 다행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장군에게는 사후에 병조참판에 추증되고,
☆.충렬(忠烈)이라는 시호와 충신정문이 내려진다. 평택 확충사, 고흥 쌍충사, 여수 손죽도 충렬사, 여수 영당(影堂) 등 여러 사당에 안치된 영정 앞에서
장군의 충절을 기리는 방문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평택 확충사 앞에는 숙종 25년 1699년에 세워진 신도비가, 우측 산자락에는 장군의 애끓는 절명시가 쓰여 진 속적삼으로 썼다는 장군 묘가 자리 잡고 있다.
충렬공 이대원 장군과 심암 좌수사는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지만, 극명하게 대조적이었던 그들의 삶은 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무엇이 값진 삶인가에 대한 귀중한 교훈을 주고 있다. 시대는 바뀌었더라도 조직 사회에서 이대원 장군 그리고 심암 좌수사 같은 부류는 여전히 존재한다고 본다. 심암 좌수사보다는 이대원 장군 같은 사람들이 인정받고 제 역할을 할 수 있을 때 사회정의가 확보되며 국가안보가 더욱 더 굳건한 토대 위에 서 있을 수 있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충렬(忠烈)이라는 시호와 충신정문이 내려진다. 평택 확충사, 고흥 쌍충사, 여수 손죽도 충렬사, 여수 영당(影堂) 등 여러 사당에 안치된 영정 앞에서 장군의 충절을 기리는 방문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2.鹿島歌/
인묵 김형식
(고흥 녹도만호鹿島萬戶
이대원(李大源)<1566~1587> 장군을 기리는 노래 )
인묵 김형식
1587년(선조 20) 정기명<송강 정철의 아들>이 전라남도 여수시 삼산면 손죽도 해상에서 왜구와의 전투 중 순절한 이대원을 애도하며 지은 한시.
이대원(李大源)[1566~1587] 장군이 고흥 녹도만호(鹿島萬戶)로 있을 때인 1587년(선조 20) 2월, 남해안에 왜구가 나타나 양민을 괴롭히자 그들과 일전을 벌였다. 이대원 장군은 적장을 사로잡아 전라좌수사 심암(沈巖)에게 넘겼다. 그러나 전공을 자기 것으로 하자는 전라좌수사 심암의 부탁을 거절하는 바람에 그의 미움을 샀다.
또다시 왜구가 대규모로 손죽도에 쳐들어왔다. 이대원 장군에 대한 감정이 가시지 않았던 전라좌수사 심암은 단지 병사 1백여 명을 이대원 장군에게 주어 싸우도록 명했다. 중과부적의 위기에 몰린 이 장군은 절명시를 남기고 그만 전사했다. 이 소식을 들은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아들 화곡(華谷) 정기명(鄭起溟)은 전라좌수사 심암의 잘못과 이 장군의 억울한 죽음을 알리기 위하여 「녹도가」를 지었다.
원래 한문으로 되어 있다. 구성은 세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단락에는 1차 전투의 승리와 전라좌수사와의 관계, 둘째 단락에는 전라좌수사의 명령으로 인한 부당한 죽음, 셋째 단락에는 이대원 장군에 대한 애도 등이 담겨있다.
●.내용
"우리 임금 20년 1월 16일/ 섬 오랑캐 몰려와서 해변 지방 놀라게 하고 우리 인민 덮쳐잡아 저희 배에 올려 싣고/ 무서움도 거리낌도 없이 훌쩍 돌아갈 제/ 녹도 이 장군 이 소식 듣고 칼 짚고 일어나니/ 시절은 추운 때요 눈비조차 많이 내려 바다 위 군사들은 손가락이 얼더니라/ 장군은 활을 당기며 조각배 저어 만길 창파 속으로 몸소 뚫고 들어/ 수많은 적병들을 풀 베듯 무찌르고 본영으로 돌아와 보니 군사 하나 안 없앴네/ 적의 목을 바치면서 수사에게 보고할 제 수사는 불러들여 귀에 대고 소근소근/ 장군이 거절하면서 정중히 대답하자 수사는 고개 숙이고 분하게 여겼었네/ 승첩장계 위에 아뢰자 임금께선 칭찬하며 6품 벼슬 내리시어 장군의 공로 표창했네
그러나 다시 많은 적병 또 들어오니/ 뜰락 잠길락 하는 것이 30여 척이나 되었는데/ 날 저물고 군사 적어 싸우지 말자하니 장군의 염려함은 나랏일에 있었건만/ 억지로 위협하며 적진으로 가게 하니 수사의 속마음은 죽을 땅으로 보낸 걸세/ 장군은 떠나가며 수사에게 아뢰는 말, “힘을 합쳐야 이기리다. 뒤따라 와 주시오.”/ 장군은 치고들어가 벽력같이 떨칠 적에 왜적들 서로 보며 울부짖고 기운 질려/ 이같이 전쟁 형세 다 이기게 된 무렵 적군들 사방에서 우리 배를 에워싸니/ 패한 군사 찔린 군사 다 흩어져 도망가고/ 슬프다! 장군만이 섬 물가에서 홀로 재앙 만났구나/ 새 깃 화살 다 쏘고 칼조차 쓰러지고/ 맨손에 빈주먹으로 이일을 어찌하리/ 곁으로 치고 위로 찔러 비 오듯 흐르는 피, 적의 기세 꺾을수록 더 많이 달려들 제/ 수사는 바로 그때 지척에 있으면서 바라보고 달게 여기니 무슨 의리 저러하고/ 장군은 힘이 다해 고개 돌려 종더러 묻자, 종은 대답하되 “수사는 벌써 물러갔소이다.”/ 아득한 바다 끝에 지는 해조차 쓸쓸한데/ 장군은 병부인(兵符印) 찬 채 북향하여 세 번 부르고/ 고대 거기서 왜적에게 붙잡힌 몸 되었기로, 참혹한 그 뒷일이야 자세히 알길 없거니/ 그 충성 이제껏 밝히지 못했는데 악한 자는 살아있네, 법조차 어기고도/ 우리 임금이야 거룩하고 밝건마는 그 밑에 누구 있어 이 사이를 가리는고
아아! 장군의 죽음이야 이 해변 남녀 모두 만입으로 같은 말하고/장군의 돌아옴을 바라나니 한양 남쪽에 사는 아내와 자식일세/장군! 장군! 어드메 계시온지/원컨대 장군의 몸 긴 고래 되어 바닷가에 숨었다가/왜놈들 혹시 우리 강토 가까이 오거들랑 성난 지느러미 기다란 어금니로 물어 삼켜 죽이옵소서"
●.의의와 평가
「녹도가」는 이대원 장군 순절에 대하여 가장 먼저 창작된 작품이다. 이대원 장군의 전사에 대한 전말을 알 수 있는 사실적인 내용이 담겨 있기 때문에 후일 조정에서 이대원 장군과 심암과의 관계를 논의할 때 중요한 참고 자료가 되었으며, 『이장군전(李將軍傳)』도 이를 바탕으로 쓰여 졌다.
[참고문헌]
ㅡ.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여수시청사이트 소개저작권 정책
ㅡ.디지털여수문화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