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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저자의 허가를 받고 종교간 평화 촉진 한국협회 (KSUNIPAR)의 국제협력실장 김진화 선생의 번역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 원문은 최근 가을에 전재 되였다가 사고로 삭제 되어 다시 올리게 된 것이다. ksunipar 자료실 ]
예수는 불교도였을까? (A)
제임스 핸슨(James M. Hanson)
불교-기독교 연구, 2005년 V25 P75(15)
예수는 불교도였을까? 그는 참으로 다양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 유태인, 예언자, 치유자, 도덕주의자, 혁명가였으며 스스로 메시아로 불렀고, 대다수 기독교인들에게 그는 신의 아들이자 구세주였다. 또한, 그가 불교도였다는 설득력 있는 증거가 있다. 그 증거는 역사적 맥락과 문헌상의 맥락 이 두 가지 독자적 갈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예수가 불교에 정통했었다는 역사적 증거가 있다. 설혹 예수가 인도에 가지 않았다 해도, 인도가 고대 유대지방과 예수를 찾아 간 증거를 찾을 수 있다. 예수가 불교를 공부 했는가 하는 점 보다 어디서, 어느 정도 연구 했는가, 특히 흔히 말하는 예수의 “잃어버린 세월”로 알려진 기간 동안 그의 행적이 역사적 관심사인 것이다.
역사적 증거 외에도 여러 가지 문헌상에 나타난 것을 보면 예수와 부처의 가르침,그리고 예수의 예언과 고대 불교 문헌 사이에는 놀랄만한 유사점이 두드러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예수는, 그럴만한 이유 때문에 자신이 불교도라고 공언하지는 않았으나, 불교도처럼 말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앞서 지적한 유사점은 놀랄 정도로 비슷해서, 설사 역사적 증거가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예수가 부처의 가르침을 연구했으며 그의 예언들이 부처와 관련된 설화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고대 유대지방에 불교가 존재했다는 역사적 증거
예수와 불교가 같은 시대 고대 유대지방에 존재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가 불교에 관해 알고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시사하고 있다. 그밖에 다른 증거들은, 비록 그 출처가 불분명 하기는 하나 흔히 말하는 “예수의 잃어버린 세월” 동안 그가 오랜 시간을 유대지방을 벗어나 아마도 Kashmir(카슈미르) 등지에 가서 불교에 관해 연구했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위 문제와 관련 나의 친구 Dale Bengtson(데일 뱅츤)의 가시 돋친 듯 하나 유익한 논평을 들어 보자.
유대 지방의 불교를 논하기 위해서는 예수가 그 당시 타 종족과 유리된 목가적 시대와 장소에 살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오히려, 당시 유대지방은 해운의 중심지로 인도와 서방세계와의 무역 루트 및 육로를 통한 이집트 공략 거점으로 타 지역의 비유태적 문화와 정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었다. 수세기 동안 예루살렘을 통해 해상 및 육상 무역 루트가 이어져 있었던 것이다. 이보다 360년 앞서 Alexander(알렉산더) 대왕의 인도 서부 침공 이후 페르시아와 인도 서부로 이어지는 육로가 활발해졌는데, 이집트, 그리스와 로마의 부유한 도시를 이어주는 루트가 예루살렘을 통해 이어졌고, 이곳에서 지중해를 거쳐 그리스와 로마로 가는 물품들이 운송되었다. 인더스 강 하구와 봄베이에서 시작되는 뱃길이 페르시아 만과 홍해를 지났고 – 인더스강과 티그리스강, 그리고 유프라테스강 하구 사이의 거리는 300마일 정도 - 무역량의 대부분이 Aqaba(아카바)만을 통해 육로로 지중해의 선적지였던 예루살렘(실제로는 근처 Jappa(쟈파)항)으로 운송되었다.
예수 생존 당시 유대는 로마의 속령이었고 거의 모든 무역이 로마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가장 부유한 제국이었던 로마는 인도와 다른 지역의 물품을 사들이기 위해 엄청난 양의 도금한 세스테르티우스(로마 화폐)를 동쪽으로 이동하였다. 거의 모든 무역이 지중해를 거쳐 유대지방을 통과했고, 당시 예루살렘은 국제적 선적 중심지였다. 유대인들은 무역을 통해 Zoroaster(조로아스터)교와 불교에 관해 잘 알고 있었다. 외국에 관한 소식은 이들에게 큰 관심사였다. 상인들의 교역로에 위치한 도시와 국가에 관한 상세한 이야기는 유려한 문체로 전해지곤 했다. 페르시아와 인도 서부에 거주하던 유태인들과 마찬가지로 유대지방의 동방인 들도 새로운 소식에 목 말라 했다.
교역을 하면서 조로아스터교도들과 불교도들은 메소포타미아에서 불과 200마일 떨어진 북부아라비아 지역(유대지방 포함)에 정착했다. 예수 탄생일에 찾아 왔다는 세 동방박사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조로아스터인들과의 빈번한 교류를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BC 330년 이후, 특히 Alexander 대왕의 동방정복전쟁 중에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정착했다. 정착민중에는 이집트 지배자를 무너뜨린 Alexander를 환영하여 그의 군대에 자원한 유태인들도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침략 루트를 따라 페르시아를 통과해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카슈미르/푼잡 지방에 정착했고 알렉산더는 이를 통치 수단의 하나로 권장했다. 그로부터 약 360년 후, 예수는 그의 가장 가까운 제자 Thomas(도마)를 기독교 전파를 위해 인도로 보냈다. 당시 그 곳으로 갔던 유태인 후손들이 지금도 카슈미르와 푼잡 지방에 살고 있다.
인도에 유태인들이 살았던 것처럼 유대지방에도 불교도들이 살고 있었을까? 시기적으로 불교는 예수보다 500년 앞서 있었고 인도로부터 전파되어 예수 생존 당시에는 동쪽으로 동남아시아, 북으로 중앙아시아, 서쪽으로는 중동에까지 퍼져 있었다. 서쪽으로 향하는 육로는 지금의 아프가니스탄과 북부 페르시아와 바그다드를 관통했고, 동쪽으로 팔레스타인과 이집트로, 또는 북동쪽으로 보다 한적한 루트를 따라 시리아, 터키와 그리스 등으로 향했다. 알렉산더의 동방 정복 이후 인도의 Ashoka(아쇼카)대왕은 “불교 선교사들을 인도와 스리랑카 전 지역, 그리고 시리아, 이집트와 그리스에까지 파견했다. 아마도 이들 불교선교사들이 그리스도 가르침의 토대가 되었을 것이다”라고 Will Durant(윌 듀란트)는 그의 저서에서 기록하고 있다(1). Max Muller(막스 뮬러)는 한발 더 나아가 Ashoka 통치 30년 전에 이미 선교사들이 파견되었다고 주장한다: “BC 300년에 시작된 놀라운 선교 활동을 통해 아시아 각 지역에 불교 신앙 전파를 위해 헌신코저 하는 선교사들이 연이어 파견되었다”(2). Philo(필로)의 기록에 의하면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도 불교도들이 거주하고 있었다는 것이다(3).
불교와 예수의 연결 관계는 Gnostics(역자 주: 영지주의자들)로 알려진 Essenes(주: 고대 유대의 금욕주의적 Essenese파 신도들)를 비롯한 Mandeans와 Mithraites등 여러 종파를 통해 불교와 예수의 연결 고리를 살펴 볼 수 있다. 이들 비주류 종파의 구성원들은 유태인이었으나, 구약과 Torah(주: 유대교 율법)에 기초한 유대교 주류의 세속적, 논리적, 낙관적 사고방식을 거부했다. 그들의 믿음은 세례 요한과 그의 수제자 예수도 일부 가르친 바 있는 금욕주의, millenarian(주: 천년왕국설), otherworldly(저승세계)와 상식적 지성과 이성을 초월한 신의 존재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Malamed는 이런 차이를 논하며 결론 내리기를 “오래 전 많은 학자들이 요한 복음서의 불교적 요소를 찾아 냈고 예수에게 큰 영향을 끼친 에세니파 교리의 불교적 배경을 인정한 바 있다. 소아시아의 여러 지역처럼 팔레스타인 역시 BC 2세기 동안 불교 전도 영향권에 들어 있었다”(4). Rosser(로서)의 기록에서도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비슷하게 묘사하고 있다. 즉, “알렉산더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상거래와 다양한 사상의 교차로였던 이 지방에 거주하던 불교 승려와 철학자들이 당시 철학 사상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예수 탄생 당시 팔레스타인 지방의 신앙 세계의 일부를 점했던 Essenes파 같은 유태인 금욕주의자들과, 불교 승려들의 가르침 사이에는 유사점이 많았다(5).
Derrida(주: 프랑스 철학자, 1930~?)의 현대적 해석에 따르면 예수의 가르침과 유대교 전통 사이에는 근본적 괴리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해석은 경외성서 상의 Gnostics들이 강조한 고전적 테마와 상통하는 면이 있다. 첫째, 예수는 영혼이 개인의 마음 또는 양심에 존재하는 것이라 함으로서 전통적 교회와 교리를 비켜 갔다. 둘째, 덕을 정의 위에 두었고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갚는다는(마태복음 5:38-39) 구약 성서의 경고와, 원수에 앙갚음하는 행위(마태복음 5:43-44)에 대하여 명백히 경고하고 있다. 셋째, 자선행위와 여러가지 선행은 남이 모르게 행 할 때 하나님의 은총을 입을 수 있다고 예수는 말했다.(마태복음 6:1-4)(6).
Essenese들의 기원에 관해 역사학자들이 알고 있는 바는 별로 없다. Philo, Pliny 그리고 Josephus에 따르면 이들 Essenese는 예수 탄생 150년 전 경에 존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Ashoka왕이 보낸 불교특사들이 인도에서 건너 온 직후다. “Essene”이라는 이름은 인도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Serrano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즉, “Essene”이라는 단어는 인도어 “Eeshani”의 외지인 발음에서 온 것 일수도 있는데 Eeshan은 Shiva(시바: 힌두교 신)를 뜻하며, Eeshani는 Eeshan 또는 Shiva를 숭배하는 자를 말한다”(7).
Mithraism(미트라 교)은 인도에서 비롯된 것이 분명한데 Mithras(주: 빛과 진리의 신)는 힌두 Vedas(주: 고대 브라만교의
경전)에 등장하는 신이다. 유대지방에서 잘 알려진 조로아스터교의 신 Ahura Mazda와 함께 Mithras 역시 페르시아에서 널리
신봉되었다. 2-3세기 경 Mithraism은 로마제국의 가장 중요한 종교로서, 당시 크리스천 교리 재해석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 모든 동-서간 교역과 정착 패턴을 볼 때 예수가 충분히 불교에 접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가 10대 때에 이미 Zoroaster교와 불교에 관해 알고 있었을 것이다. 성경에는 예수와 그 가족이 유월절 축하행사 기간 중 예루살렘 방문에 관한 구절이 있다. 누가복음(2:47)은 예수가 열두살 무렵 예루살렘 성전에서 여러 학자(doctors)들과 대화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그의 말을 듣는 자 모두가 놀라워했다.” 어린 예수는 분명 불교를 포함한 그 시대의 생각과 관심사를 논했을 것이다.
예수가 불교 사상에 어느 정도 노출되었는가를 알기 위하여는, 그가 잃어버린 세월 동안 어디에 살았는지 알 필요가 있다. 예수가 유대지방에서만 살았다면 불교와 최소한도의 접촉만 있었을 것이다. 만약 그가 유대를 벗어나, 특히 메소포타미아 등지로 여행했다면 그는 불교의 영향에 더 크게 노출되었을 것이다. 성경은 젊은 시절 예수가 어디에 살았는지 밝히지 않고 있다. 마태복음(2:23)과 마가복음(1:23)은 예수를 “Nazarene(나자렛 사람)”이라 부르고 있고 다른 문헌에서는 “Nazoraean”으로 부르고 있다. 나자렌(Nazarene)이라는 도시는 AD 400년경에야 성서에 등장한다. 아마도 Nazarene은 세례 요한과 예수의 형제 James(제임스)를 포함하는, 일명 “Nazirites”라고 불리는 또 다른 유태계 종파를 지칭하는 말이었을 것이다. 사도행전 24:5은 Paul(바울)을 “Nazarenes Sect(나자렛 교파)의 리더”로 칭하고 있다(8).
성서 외 다른 역사 기록에도 예수가 유대지방을 벗어나 여행했다고 언급되어 있다. 옜 무슬림 기록은 예수를 “순회하는 선지자” 또는 “순회자 들의 지도자”로 칭하고 있다. 다른 문헌은 “예수가 메시아로 불리운 이유”를 그가 한 곳에 머물지 않고 떠돌았기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9). 예수가 여행하면 할수록 불교 사상에 접할 기회가 그 만큼 더 많았을 것이다.
성경에는 예수의 13-29세 사이 잃어버린 세월에 관한 기록이 나와 있지 않다. 잃어버린 세월 동안 예수는 과연 어디에 있었을까? 누가 복음 2:40은 이렇게 간단히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하여 아이는 자라면서 강해지고 현명해 졌으며 하나님의 은총이 그에게 임하셨다.” 열두 살 예수에 관한 마지막 기록인 무가복음 2:51에는 예수가 부모와 함께 예루살렘을 떠나… “부모에 순종하는 삶을 살았고… 세월의 흐름과 함께 현명해졌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Luke(누가) 자신이 묘사한 바 있는 예루살렘의 현인들과 당당히 대화하는 열두 살 예수의 모습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무렵 예수는 부모의 염려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소명 의식이 확실했다고 볼 수 있다. 누가 복음 2:49에 기록된 것을 보자. 사흘 동안 행방이 묘연했던 예수를 걱정하는 어머니에게 그는 간명하게 대답한다. “내가 아버지의 성전에 있었을 것이라는 걸 모르셨습니까?” 이 말은 부모에게 “고분고분”한 삶을 살며 목수일로 소일하는 젊은이의 모습이라고는 볼 수 없다.
잃어버린 세월 중에도 예수가 학문과 복음 전도에 매진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열 두 살 무렵 어머니에게 준 그의 확신에 찬 태도로 미루어 볼 때 예수가 전도를 멈추었을 리 없다. 성서 외에 다른 문헌을 통해서 증명된 바와 같이 타 지역으로 여행하며 복음을 전했음이 거의 확실하다. 인류를 축복한 가장 위대한 정신적 예언자의 한 사람이었던 예수가 그의 인격 형성기인 젊은 시절을 자신이 태어난 동네에서 목수일을 하며 세월을 보내는 것에 만족 했을 리 없지 않았겠는가. 만일 그렇게 행동했더라면 예수의 메시아적 예언, 구세주의 탄생, 비범했던 어린 시절 등, 이 모든 것을 인정할 수 없게 된다.
잃어버린 세월 동안 예수가 유대를 떠나 있었을 것이라는 점이 성경에 암시되어 있다.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기 위해 29살의 예수가 잃어버린 세월을 뒤로 하고 갑자기 나타났을 때 사람들은 그의 말에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마가복음 6:2-3을 보자. “(예수가) 어떻게 이렇게 변했는가? 어떻게 이같은 지혜를 얻었으며 손으로 이런 기적을 행한단 말인가? 이 사람이 정말 마리아의 아들, 목수란 말인가?”라고 사람들은 놀라워 물었다. 이것은 이들이 한번도 이와 같은 예수의 모습을 본 적이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평범한 목수가 이 같은 가르침을 전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예수가 집중적으로 수련을 했던가, 아니면 너무 오랜 세월이 흘러 그들이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예수가 인도에 갔었다는 역사적 증거
인도에서의 예수에 관한 대부분의 기록은 Nicholas Notovitch(니콜라스 노토비치)의 ‘예수 그리스도의 알려지지 않은 삶’이라는 책에서 비롯된다. 러시아 의사 출신의 Notovitch는 1888년 Ladakh(카슈미르)지방 Leh 근교에 있는 Himmis 수도원을 방문 했다고 주장한다(10). Notovitch의 주장에 따르면 그가 수도원 방문시 그 지방에서 “Issa”라고 불렸던 예수에 관한 기록을 보았다고 한다. 예수의 인도 기행, 가르침, Shudras(주: 힌두교의 최하층 계급) 및 Untouchables(불가촉 천민)과의 교제, 브라만 계급 및 페르시아 조로아스터교 신부들과의 갈등에 관한 기록들이었다고 한다. 14세부터 29세까지의 자세한 예수의 인도 생활, 그 후 유대지방으로의 복귀에 관한 기록도 있었다는 것이다(11).
1894년 Notovitch가 발표한 이 내용들은 즉시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기독교계는
이를 가짜라고 비난했다. 당시 영국성공회의 인도선교부는 Notovitch가 묘사한 기록들을 찾아내 없애 버리라고 지시했다. 영국성공회는 옥스포드대학 교수이던 저명한 독일학자 Max Muller(막스뮬러)의 입을 빌려, 그 같은 주장을 일축했다. Muller는 증거가 되는 두 개의 문헌 – 즉 14개 chapter(장)로 구성된 문헌과, Saddhus of Yoga Nath에 의해 보존된 Nath Namavali라는 문헌 - 의 신뢰성을 문제 삼았다. Muller는 또 Himmis 수도원 원장과의 인터뷰를 인용하여 예수 관련 문헌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Notovitch가 수도원을 방문한 사실도 없었다고 주장한 점을 들었다(12).
19세기 중반 인도의 Vedas(경전)이 처음 번역 출판되면서 유럽 사람들은 인도와 유럽인 사이에 존재할지 모르는 역사적 연관성 - BC 2000년에 시작된 Aryan(아리안)족의 이주와, BC 1500년경 인도 북부지역 점령 등 – 과 관련하여 지대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거의 모든 유럽 언어가 부분적으로나마 Sanskrit어에 그 어원을 두고 있는데 Aryan족이 인도(이전의 Harappa 또는 Saraswati 문명)에서 발견한 언어를 다듬은 후 퍼뜨렸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의문시 되는 점은 후세에 유대지방과 이집트에 정착하게 되는 Semite족이 Aryan족 중에 섞여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Notovitch의 Himmis수도원 탐사보다 25년 앞선 시점에 Muller가 쓴 글을 보자. “부처와 그 제자들의 언어, 그리고 그리스도와 그 제자들의 언어를 비교해 보면 이상하리만치 유사한 부분들이 있다. 많은 불교 설화와 우화는 기독교시대 이전에 이미 존재했던 것들인데 마치 신약성경에서 인용한 것 같아 보인다”(13). 다른 학자들도 Muller와 같은 생각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De Bunsen은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우리에게 알려진 가장 오래된 불교 문헌에 기록되어 있는 Gautama Buddha의 삶과 교리에 관한 글을 보면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교리를 다룬 부분과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14).” Doane(돈) 역시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신약성경이 전하는 나자렛 예수의 역사는 부처의 역사에 타 지역의 신화를 가미하여 전하는 복사판일 뿐이다”(15).
Notovitch는 당대의 호기심을 이용한 사기꾼이었을까? 그를 따르는 어리석은 자들과 사기꾼이 많기는 했다. 그 중에 Hazrat Mirza Ghulam Ahmad가 주창한 무슬림 Ahmadiyya운동이라는 단체가 있다. 이 단체는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지 않고 살아나 인도로 갔다고 주장했다. 또 한 사람은 Levi Dowling이다. 그는 1911년 첫 출판되어 New Age Aquarian(주: 물병자리 복음서를 믿는 사람들)들이 지금도 숙독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Aquarian 복음서’의 저자다. 예수가 인도에 있었다는Dowling의 주장은 Notovitch에서 인용한 것이 확실해 보인다. 그러나, Dowling은심령술사들만이 해석할 수 있는 우주에 존재하는 사상, 즉 “Akashic Records”(주: Sanskrit어로 하늘, 하늘의 기록, 우주도서관, 별을 초월해 우주의 모든 역사가 기록된 것)를 통해 찾아낸 사실이라고 주장하고 있다(16).
Notovitch의 지지자중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사람으로 아마도 Fida Hassnain을 들 수 있다. 그는 Srinagar 대학교수 출신으로 고고학과장과, 카슈미르 도서관장을 역임한 바 있다. Dahan Levi와의 공저 ‘The Fifth Gospel’(다섯번째 복음서)에서 Hassnain은 Notovitch의 주장을 그대로 되풀이 하고 있다. 즉: 예수는 13세에 유대를 떠나 상인들과 함께 Damascus, Babylon, Kharax를 거쳐 페르시아와 카슈미르까지 여행하여 그 곳에서 연구 및 전도활동을 했다. 예수는 인도에 약 16년 동안 머물렀다; 이 시기 대부분을 카슈미르에 살면서 불교와 Vedas 경전과 기타 인도 문헌을 연구하고 인도 전역을 여행하며 설교하였다. 예수는 29세에 인도를 떠나 유대로 돌아와 목회를 시작했다. 예수가 카슈미르에서 보낸 시간은 복음서에서 말하는 “잃어버린 세월”과 정확히 일치한다 는 것이다.
Hassnain은 예수의 인도 체류와 관련, 다음과 같은 아시아 문헌을 인용하고 있다.
1. “유리 거울” 이라는 티베트어로 보존된 중국 기록은 Yesu(예수)에 관해 일렇게 적고 있다. ”그는 종교의 창시자이며 선생님이시고 기적을 통해 이 세상에 태어 나셨으며 스스로를 구세주라고 칭하시는 분이다.” 예수는 또 불교 원리를 따랐다.”
2. 아랍어로 쓰여진 21개의 무슬림 역사 문헌에 Issa(이사)에 관한 언급이 있다.(Issa는 Yuz Asaph 등 다양한 이름으로도 불린다.)
3. Said-us-Saddq(사이두스 사디크)가 쓴 ‘페르시아인 Kamal u-Din(카말 웃딘)’에 예수에 관한 부분이 있다.
4. 카슈미르인들의 힌두어 텍스트 “Bhavisha Maha Purana”에 Shalivahana 왕(AD 80년 경)과 Ishvara Putaram(신의 아들)이라고 자칭하는 이방인과의 만남을 얘기한 부분이 있다(17).
불교 기록은 흔히 예수를 Issa-Masih라 불렀고, 무슬림들은 Yasu-Masih, 또는 그 비슷한 이름으로 불렀다. 카슈미르에서 예수가 행한 설교에 관한 기록은 AD 115년 Sutta(수타)가 저술한 Bhavishya-maha-purana에서 볼 수 있다(18). 예수가 카슈미르에서 행한 설교에 관한 또 하나의 기록은 그 후에 쓰여진 무슬림 Mulla Nadri(물라 나드리)가 쓴 Tarikh-I-Kashmir(주: 카슈미르로 가는 길)에 나오는데 그는 여기서 예수를 Yuz-Asaph(유즈 아사프)라 칭하고 있다(19). 무슬림 기록으로: Al-Shaikh Al-Said-us-Sadiq(쉐이크 알-사이두스 사디크); Ikmal-ud-Din(이크말 웃딘)이 있다(20). 또 다른 기록은 AD 1148년 경 Kalhana가 저술한 카슈미르의 역사서로, 여기서 예수는 Samdhi-mati(삼디 마티)왕을 크게 감동시킨 “위대한 guru” Isana로 지칭되고 있다(21). 인도에서 보낸 예수의 행적에 관해 페르시아인의 관점에서 본 기록으로는 BC 900년경 Al Shaikh Said-us-Sidiz(알 셰이크 사이두스 씨디즈)가 쓴 ‘Mamal-ud-Din’(마말 웃딘)이 있다(22). 마지막으로 베드로의 묵시록은 아쇼카왕이 10개의 돌기둥(석주)중 한 기둥 위에 앉아 있는 예수에 관해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As the Savior was sitting in the temple in the three hundredth(year) of the covenant and the agreement of the tenth pillar.”(23) Natha Yogas가 노래한 ‘요기들의 노래’의 한 구절은 “나의 친구 Ishai는 아라비아로 떠났네.” Puranas중의 한 구절은: “내가 Eeshai(신)의 성스러운 이미지를 내 가슴속에서 발견했으니 이 땅에서 나의 이름은 Eesah Mashi라 불릴 것이다”(24).
Hassnain 외에, Notovitch의 충실한 지지자로는 세계적 명성을 지닌 화가이자 안무가이며 Roerich Pact – 1935년 시작되어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는 역사적 예술작품 보존에 관한 국제협약 - 의 창시자인 Nicholas Roerich(니콜라스 뢰리히)를 들 수 있다. 1923-1928년 인도에 체류했던 Roerich는 자서전적 기록에서 Notovitch의 주장에 관해 아무런 사전 지식이 없는 카슈미르와 티베트 사람들과 나눴던 “Issa”에 관한 여러 가지 설화를 얘기하고 있다(25). Roerich는 구체적인 문헌을 들지 않았으나 아시아에 살았던 “Issa”에 관한 많은 설화와 문헌이 아시아에 존재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Roerich의 주장에 대해 Edgar J. Goodspeed(주: 성서학자)는 또 하나의 설득력 있는 반론을 내 놓았다(26). 여기서 한가지 문제점은 예수가 잃어버린 세월 동안 카슈미르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일부가 동시에,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후 살아남아 카슈미르로 돌아갔다고 주장하고 있는 점이다. 이중 가장 널리 알려진 주장은 2세기 초 사도 도마의 서신을 바탕으로 Leucius가 저술한 이른바 Gospel of Thomas(도마 복음서)이다. 푼잡 지방 Taxila에서 선교 활동을 한 사도 도마는 예수가 49세 무렵 카슈미르에 머물렀다고 전하고 있다. 그 밖에도 Hassnain, Levi, Ahmad, Faber의 문헌에도 비슷한 내용이 담겨 있다(27). 예수가 십자가에서 살아 남아, 회복한 후 Kashmir로 도피, 전도 활동을 계속했다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인도 Srinagar의 Rozaball 지방에 Yousa-Asaf(예수의 무슬림식 이름)의 유골이 매장되어 있다고 믿는 순례자와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그치지 않고 있다(28).
이 같은 예수의 십자가 ‘처형 후’ 시기에 관한 주장은 ‘잃어버린 세월’을 둘러싼 주장과는 다르다. 예수가 로마인들의 처형에서 살아남아 별 뚜렷한 이유 없이 인도로 떠났고, 100세 넘게 살았다는 주장 등은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많은 증거나 증언과 모순되는 것이다. 반면, 예수가 젊은 시절 인도에 갔다는 주장은 일부 불분명한 자료를 제외하고는 반대나 모순점을 발견할 수 없다. 비평가들은 물론 이 두 가지 논쟁을 섞어서, 한가지 주장을 매장시키기 위해, 다른 주장을 기꺼이 이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 인도 체류설의 문제점은 그 설의 주창자 Notovitch가 사기꾼일지도모른다는 점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J. Archibald Douglas가 Himmis 수도원장과의 인터뷰에서 Notovitch가 수도원을 방문한 사실이 없다고 수도원장이 밝혔다는 점이다. 또한 그 지역에서 Pali어가 쓰인 적이 없는데도 Notovitch는 Pali어에서 불어로 번역된 글을 인용했다고 말한 점이다. Notovitch 에 앞서 Himmis 수도원을 방문했던 다른 서양인들이 있었으나 그들 중 아무도 Issa에 관해 들어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오래된 정통 Sutra(주:불교경전)에 예수가 인도에 머물렀다는 기록을 찾을 수 없다(29).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Hassnain과 그와 동조하는 지지자들이 인용한 문헌들이 예수 사망 훨씬 후의 기록들이란 점이다. 예수가 유대지방을 벗어나 여행한 것은 사실로 보이나 Kashmir로 향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