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1일 출항준비의 나날들
오전 4시 30분. 아침 일찍 잠이 깼다. 항해 중 야간 견시의 습관이 남아 한밤에도 잠이 깬다. 한번 떠난 잠은 다시 올 것 같지 않아 커피를 끓인다. 윈디 일기예보와 김기자님의 방문을 고려해, 5월 18일 오전을 D-Day로 잡는다.
말레이시아 랑카위 입항허가 서류들을 작성하고, ETA를 5월 18일 출항, 5월 26일 도착으로 잡아서 보낸다. 스코틀랜드 선장 존은 5월 16일 출항 예정이라고 한다. 그는 몰디브 말레로 가서 다리 건설 공사를 하고, 만약 재계약이 안 되면 나랑 항해해도 되냐? 고 한다. 농반 진반이다. 당연하다! 고 답해준다. 머잖아 나도 스코틀랜드로 가게 되면 좋겠다. 시애틀 사는 여동생에게 말하니 자기부부 여행과 일정을 맞춰 보잔다.
아침 일찍 폴과 조셉 패거리 에게 디젤 300리터를 사서 나른다. 하필 땡볕 더위다. 간신히 배에까지 옮겨 놓고, 배의 엔진을 켠다. 약 20분정도 엔진을 켜서 엔진을 데워야 엔진오일이 잘 빠진다. 그러나 마리나안에 쓰레기가 많이 떠다녀 오래 켜지는 못한다. 쓰레기가 흡수구를 막을까 두렵다. 그러면 이 더러운 물에 잠수해야 한다. 끔찍하다.
중간에 마트에 가서 선풍기를 고쳐왔다. 중국산이라고 다들 숙덕숙덕한다. 나는 한국 제는 이런 거 한 번사면 10년, 20년 쓴다고 큰 소리 치고 왔다. 잘한 짓인지는 모르겠다.
엊그제 제네시스를 밧줄로 끌어 나를 때 돕다가 핸드폰을 빠뜨린 일꾼이 왔다. 에이전트에게 물어보고 처리 할랬더니 에이전트가 오지 않는다. 그래서 그 핸드폰 새 거가 얼마냐고 물으니, 7,000 루피라고 한다. 그래서 달러로 줬다. 작은 거라곤 하지만 3만원 짜리 핸드폰이라니. 정말 대단하다.
한창 일하는데, 누군가 안녕하세요! 한다. 바라보니 한국서 일한 적 있는 스리랑카 인들이다. 반갑게 수다 떨다가 보니, Galle에 한국 식당이 있단다. 뭐라고라고라? Korean Lanka Restaurant - ‘코리안 랑카’ 라고 여기서 툭툭으로 8분 거리다. 해장국, 삼겹살, 김치찌개도 판다. 조만간 해장국이나 김치찌개도 먹고, 김치를 좀 사러 가야겠다.
Korean Lanka Restaurant Address: Southern Expy Access Rd, Walahanduwa Phone: 076 672 2967
빌려온 엔진 오일 석션기로 엔진 오일을 뺀다. 생각보다 잘 안 나와서 유튜브로 영화 요약판을 보며 하 세월 뺀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오일이 다나오고 공기 빨리는 소리가 난다. 대략 8리터 이상 나온 것 같다. 다시 8리터를 채운다. 시동을 걸어보니 엔진 소리가 아주 부드럽다. 유수분리기 필터가 올 때까지, 엔진을 오래 켜지는 않는다. 연료 라인을 보호해야 한다.
카레 파스타로 점심을 하고 어제 빗방울이 새던 해치에 실리콘 작업을 한다. 작업을 마치자 곧 비가 왔다. 역시 다행이다. 비가 아주 약간만 와서 제대로 된 건지는 잘 모르겠다. 오늘 저녁 폭우가 오면 알겠지.
곧 GAC 사무실에 가서 내일 디젤 200리터 더 살 것 계산을 하고 와야 한다. 에이전트가 게으르니 여러 가지로 피곤하다. 그러면서 제 자식 한국 가도록 도와 달라니, 뭐가 좀 앞뒤가 안 맞는다. 내가 호구로 보인건가? 좀 더 조심해야겠다.
오후 2시 40분. GAC 사무실로 가서 디젤 200리터를 선 계산한다. 리터당 1.29 달러다. 이래저래 막 붙여먹어도 많이 비싸지는 않다. 다른 나라는 1.4~1.6 달러였다. 그냥 계산해 준다. 디젤은 내일 아침 배달까지 해 준다니 잘 됐다. 그대로 슈퍼마켓으로 갈려니 툭툭 운전수 폴이 기다리고 있다. 그 차를 타고 Arpico 마켓으로 간다
하나하나 개별적으론 싸다. 그러나 통조림이나 우유, 콜라 같은 수입 제품들은 한국이나 비슷하다. 물도 12병사고, 작은 콜라 24병. 고기 통조림을 몇 개 샀더니 한국 돈 8만원이다. 여기나라 사람들 한 달 월급이다. 그러니 스리링카 사람들이 얼마나 한국 가고 싶을까? 스리랑카와 한국의 월급이 20배 차이난다. 한국서 200만원 받는 사람 기준으로 월급 4,000만원 받는다고 생각해보라, 눈이 뒤집히지 않을까? 나는 필요한 물품을 사는 것이지만, 며칠사이에 막대한(그들 입장에서) 돈을 쓴다고 소문나면 범죄의 대상이 될지도 모른다. 별걱정을 다하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조심하자.
오후 3시 문자가 왔다. Our agent will take us for dinner tonight, you will join us please. (우리 에이전트가 저녁을 사주러 오늘 저녁에 옵니다. 제발 참석해 주세요.) 아니 공짜로 저녁 준다면서 제발 오라니. 이런 정중한 초대가 또 있나. 당연히 가겠습니다.
이래저래 오전 4시부터 지금까지 디젤 제리캔 13개를 300미터 가량, 수레로 3번 나르고, 배에도 옮겨 실었다. 엔진 오일을 교환하고 쓰레기를 버리고 세탁을 했다. 또 물과 콜라 식료품도 수레로 날랐다. 안하던 노가다를 하니, 등 쪽 근육이 뻐근하다. 해치 실리콘 작업도 다시 하고, GAC 사무실도 가고 김기자님 부자의 방문 요청서도 만들어 보냈다. 정말 하루 종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나도 모르게 몸이 먼저 출항준비를 하고 있는 거다. 이러다 정말 세계일주 하게 생겼다.
오후 4시 30분. Gac 에이전트에게 5W 40 디젤오일 6리터짜리 하나를 구해달라고 했다. 한국에서는 10,300원이다. 에이전트는 130,000원을 부른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엔진오일이다. 여분으로 가지고 있으려는 것이니 나는 거절한다. 말도 안 되는 가격이다. 그러니까 에이전트는 내일 다른 가게도 가보자고 한다. 아마 바가지에 미련이 남았나 보다.
오후 5시에 존 일행이 왔다. 잠시 나와 에이전트의 대화를 듣더니, 빨리 가잔다. 나는 에이전트에게 내일 다시 말하자고 한다. 에이전트와 헤어지자, 존이 엔진오일이 얼마나 필요하냐? 묻는다. 10리터 정도라고 대답하니, 내일 아침 자기 배로 오란다. 자기 배에 5W40 엔진오일이 7,000리터도 넘게 있단다. 참. 이렇게 까지 챙겨주다니 너무 감사하다.
함께 바나나 비치로 가서, 맥주 한잔을 하고 에이전트를 기다린다. 웬일인지 오늘은 해변에 사람도 많고 서핑하는 젊은이들도 많다. 보드 1시간 빌리는데 500루피(2,126원), 레슨 1시간에 3,500루피(14,882원)다. 정말 싸다. 그래서 유럽인들이 여기 많이 오나보다. 존 일행은 비키니 아가씨들이 많아서 자꾸 여기 오는 건가? 사내들이니 뭐.
오후 7시에 존이 거래하는 에이전트가 왔다. 이들은 동남아시아를 중심으로 국제적인 선박들을 대상으로 에이전트를 하는 회사다. 그런데 20~30대의 젊은이들이다. 이들이 우리를 샤프런 호텔 옥상으로 데려가 식사 대접을 한다. 젊지만 자신감이 넘치는 친구들이다. 돈과 비전이 있으니 그것이 몸에 배어나오는 거다. 물론 영어도 잘 하지만, 아마 운이 좋거나 좋은 멘토가 있었나보다. 이런 직업을 가지다니.
보니까 호텔레스토랑은 1인당 5,000루피(21,000원) 정도 하는 아주 비싼 곳이다. 맥주와 브랜디도 주문한다. 한국으로 보면 대단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이들은 여기서 굉장히 고소득자다. 아마 한국 돈으로 월 200만원은 버는 것 같다. 그러면 그게 여기 기준으로는 20배, 월 약 4,000만원을 버는 셈의 젊은이들이다. 그러니 자신감 뿜뿜은 자연스럽다.
만약 나도 젊을 때 이런 세계에 눈을 떴다면? 아마 상당한 재력가가 되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래서 괴물이 되었을 수도 있다. 개인 적인 능력보다는, 어떤 곳에 서 있느냐? 어떤 일을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마치 <총 균 쇠>에서 어디서 태어났느냐가 중요한 것처럼. 한국의 젊은이들아, 취직 타령하지 말고 먼저 세계여행을 해라. 그리고 나서 어디서 무엇을 할까? 결정해라. 적당한 자리에 서면 일반 급여의 수십, 수백 배를 버는 노다지를 발견할 수도 있다.
오후 9시가 넘어 술 한 잔 걸치니 다들 노래하고 춤추고 난리다. 사내들 노는 모습은 전 세계가 비스한가보다. 정말 신기하다. 4일전까지 인도양에서 죽을둥살둥 혼자 항해하다가, 연고도 없는 스리랑카에서 좋은 친구들을 만나 고급호텔서 근사한 저녁식사를 대접받고 있다. 18일 말레이시아로 출항하면 또 어떤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까? 아마 예상도 못한 일들이 펼쳐질 거다. 기대가 된다.
오후 10시 30분. 파티를 마치고 미쯔비시 트럭(우리나라 1톤 트럭같이 생겼다)으로 우리를 마리나에 데려다 준다. 오늘은 굉장히 많은 일이 있었고 굉장히 많은 짐을 날랐다. 온몸이 뻐근하다. 샤워하고 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