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여요전쟁 첫 번째 이야기----- 안융진 전투
여요전쟁(麗遼戰爭) 또는 고려-거란 전쟁(高麗-契丹戰爭)은
993년 (성종 12년)부터 1019년(현종 10년)에 이르기까지
26년 동안 세 차례에 걸쳐 요가 고려를 침략한 전쟁을 가리킨다.
아들아, 앞에서 10세기~11세기 동북아의 주요 행위자인 고려, 송, 요, 여진의 영역과
활동상황 그리고 이들간의 관계에 대해서 말했다.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고려와 요와의 전쟁(여와 요의 전쟁) 이야기 속으로 한번 들어가 볼까?
제1차 여요전쟁(고려와 요의 전쟁)은 993년 고려 성종 12년때의 일이었다.
고려의 6대 왕인 성종(成宗.960~997, 재위981~997)은 묘호인 성종에 어울리게
광종대왕 사후 경종에 들어와 잠시 흔들렸던 왕권을 안정시키고 문물을 정비하며,
유교를 국가통치의 기본이념으로 삼아 정착시킨 임금으로,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성군 중의 한명으로 꼽히는 인물이지.
재미있는 것은 요의 경우도 6대 황제이고 묘호가 한자만 다른 성종이야.
성종(聖宗, 耶律隆緖, 971~1031, 재위 982~1031)으로 요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걸출한 임금이었어. 요 성종 야율융서는 모후인 예지황후 소씨도 대단한 여걸이어서
재위 초반에는 소씨 황후가 대리청정하였으나 이때에 이르러서는 장성하여 황제로서
자기 자리를 잡고 자신의 정치를 펼치고 있었지.
요 성종은 981년 발해의 후예가 압록강에 세운 정안국이 고려와 연결하려고 하자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위구르 정벌, 1004년 대대적으로 송을 침공하여 전연의 맹을
맺게한 장본인이기도 해.
거란이 세운 요 제국 2백년 역사 속 태조 야율아보기 이후 유일하게 황제다운 황제라는
평가를 받는 인물이기도 하지.
고려는 전성기에 오른 당대 동북아 최강의 제국인 요와 전쟁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으니..고려 건국 이후 최악의 위기상황에 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단다.
누가봐도..영토와 인구, 군사력 등 모든 면에서 고려의 열세임은 분명했으니까.
여요전쟁의 발발원인은..고려가 꾸준히 추진해온 북진정책에 대한 경계심과
공공연한 요에 대한 적대정책 그리고 송과의 교류가 요의 신경을 건드렸고,
요의 입장에서 보면 송에 대대적인 공격을 하여 대제국을 이루려 하는데,
그전에 후방의 위협을 미리 제거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야.
이런 성격의 전쟁은 여몽전쟁과 정묘호란, 병자호란때도 그대로 적용되어 반복되고
있더구나. 그러니까 북방민족이 일어나 중원진출 전에 그들 입장에서 후방을 다지는
예방적 성격의 전쟁, 침공은 정해진 수순이라고 봐야 될 것 같아.
즉, 중국과 우리 북방에서 이런 비슷한 유형의 국제정세 변화는 곧 전쟁의 전조이므로
미리 대비하라는 말이 되는 것이지.
아들아, 조선 세종대왕 때에 절재 김종서 선생 등이 명을 받아 편찬한 고려시대 역사를
정리해 편찬한 사서인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가 있다.
고려사절요 제2권 성종 문의대왕 12년 993년 당시 기록을 한번 따라가 보자.
993년 5월에 서북계의 여진에서 보고하기를 거란이 군사를 이끌고 침공할 모의를
하고 있다고 했지만, 고려 조정에서는 믿지 않고 그냥 넘겼다고 했다.
나라의 안위에 관한 일인데..면밀하게 살필 생각은 않고 고려와 요 사이를 오가는
여진이라 믿을 수 없다고 넘긴 당시 고려 조정의 대응은 상당히 안일했지.
국가 기무를 맡는 사람들 수준이 이 정도라면 문제가 심각해지는데..
그렇게 전쟁에 대비할 1차 기회를 허비했다.
993년 8월에서 10월 사이, 여진에서 다시 보고가 올라왔는데..
이번엔 침공모의가 아니라 거란의 군사가 이르렀다는 내용이었고, 그제서야 일이
급함을 알고 부랴부랴 준비했지만..이미 때는 늦었지.
993년 10월, 고려 성종은 시중 박양유(朴良柔, ?~?)를 상군사(上軍使),
내사시랑 서희(徐熙,942~998)를 중군사(中軍使),
문하시랑 최량(崔亮,?~995)을 하군사(下軍史)로 삼아 북계를 방비하며
요의 대군에 맞서도록 하고
성종도 서경으로 행차한 후, 장병을 독려하고자 안북부(현재의 안주)로 나아가
머물렀어.
성종의 군 지휘부 인사도 당시 최상위 사령은 문관이 담당하는 것이 관례라
그에 따른 것으로 보이고, 그 비중에 비추어 이유있고 적절해 보여.
그리고 왕이 후방인 왕도에 머무르지 않고 서경 그리고 최전방 가까운 안북부까지
직접 나와 군을 독려한 것은 국왕으로서 아주 훌륭한 모습이었다고 봐.
요의 대군을 이끄는 자는 요 황실의 부마이자 동경유수 소손녕(蕭遜寧, ?~997).
요의 5경 중 하나인 동경 요양부(東京遼陽府, 현재의 중국 랴오닝성 랴오양시)를
다스리는 고위지방관으로 우리로 치자면 부산 정도되는 광역시장이나 도지사급은
되는 인물이지.
국경을 넘은 요의 대군을 상대로 봉산군(蓬山郡, 평안북도 태천과 구성사이)에서
초전을 치루는데 이 전투에서 고려군이 패전하고 선봉장인 윤서안이 포로가 되고
말았어.
초전에서의 패배로 막연했던 요, 거란족에 대한 일종의 공포감이 걷잡을 수 없이
퍼지며 혼란에 빠졌지. 한번의 패전 치고는 여파가 상당히 컸어.
이때문에 어떤 일이 생겼냐면..안북부까지 가있던 성종이 급히 서경으로 피신했고,
요의 진영에 와서 침략의 이유를 묻는 고려 사신에게,
소손녕은 80만 대군이 이르를 것이고 속히 군신 이 강까지 나와서 속히 항복하라.
만약 화친하려면 속히 항복하라. 그렇게 답했지.
이는 소손녕의 고려왕실을 흔들어 놓으려는 심리전의 일환이다.
동경유수가 고위직이긴 하지만, 황제도 아닌자가 이끌 수 있는 군사의 수가 80만이
될 수 없다. 아마도 요나라 전병력을 통틀어도 그런 수는 나올 수 없을 것이다.
실제 소손녕이 이끌고 온 거란군은 10만 안팎이라고 많은 분들이 보고 있지.
또 항복하라 해놓고선 또 화친하려면 항복하라..이런 앞뒤 안맞는 말을 하고 있다.
항복과 화친은 엄연히 다른데 같이 언급하고 있는 것은 다른 의도가 있다는 뜻이지,
그런데 이런 전후 사정과 적장의 의도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고 고려는 임금인 성종을
비롯해서 조정 대신 대다수는 그야말로 공황상태에 빠져서 한심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어.
성종이 군신회의를 소집해서 나온 말인데..
첫째 성종이 개경으로 돌아가서 군사를 거느리고 속히 항복해야 한다는 항복론이 있었고
둘째 황주~절령까지를 국경으로 삼아 그 이북의 땅을 넘기자는 할지론이 나왔단다.
성종이 할지론을 따르려는 입장을 보이자 서경의 창고를 열어 백성들이 마음대로 곡식을
가져가도록 하게 했는데..
이에 대해서 중군사 서희와 전민관어사 이지백이 반발하여 항전할 것을 주장했어.
한번 싸워보고나서 안되거든 항복하거나 다른 방법을 찾을 일이지 가벼이 땅을 내어주어
수치를 당하고 역사에 비웃음을 사지 말라고 경고하면서..맞섰지.
결국 성종은 항전론의 입장을 따르기로 마음을 바꿔 먹었어.
이때에 소손녕은 봉산군에서 이겼고, 80만 대군 운운해서 협박했으니 알아서 고려가
알아서 항복하고 나올 것이라 생각하고 기다렸는데 어찌된 일인지 회답은 없이
시간만 지나가고 있으니 초조해져서 고려를 압박하기 위해 다음 공격목표를 정해.
그곳은 청천강 하류의 작은 방어진인 안융진(安戎鎭)이었지.
수비병 겨우 1천여 정도의 작은 성이니 가볍게 제압할 줄 알고 공략했는데..
이게 왠걸. 고려군이 얼마나 완강하게 저항하는지, 거란군이 패전하여 크게 당황했어.
안융진의 진장(鎭將)이 중랑장 대도수와 낭장 유방인데..대도수는 발해유민의 후예,
이미 거란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단다.
아들아, 불의의 일격을 당한 소손녕은 당황했다.
생각과는 달리 80만 대군 운운한 그의 협박에 흔들리지 않은 고려에 당황했지.
사실 그가 이끌고 온 군사로 고려를 제압하는 것은 무리이고, 실제로 싸워본 고려군이
만만찮아 당혹스러웠고, 나아가고 싶어도 그게 쉽지 않아서 주저할 수 밖에 없었어.
병력수도 그렇지만 보급문제도 있어서 고려 땅 깊숙이 들어갈 수 없는 현실과
싸움을 길게 끌 수 없다는 것도 고민스러웠고.
또 무엇보다 가장 소손녕이 두려워 하는 것은 그래도 수만의 대군으로 작은 나라를
친다고 기세좋게 침공해 놓고 성과없이 빈손으로 돌아가게 되면..
이른바 대국의 위엄에 먹칠을 한 중죄인이 되니 황제에게 문책받게 될 것도 두려웠지.
그래서 그는 계속해서 주저앉아 항복을 요구하고..
여의치 않으니 결국 소손녕이 고려에서 대신을 보내 만나자 요구하게 된 것이란다.
아들아, 1차 여요전쟁의 첫번째 이야기는 여기쯤에서 마무리하며 정리해보자.
먼저 전쟁 직전에 여진의 행보..이때의 여진은 우리에게 중요한 정보를 주었는데
정작 우리가 그것을 제대로 따져보고, 알아보려는 노력없이 못믿겠다고 무시했던 것은
국가안보에 대한 일에 너무도 안일하고 무책임했다고 볼 수 있다.
여진에 대한 신뢰여부와는 관계없이 그것이 고려의 미래에 관한 것이라면 최소한
간자를 풀어서 정보를 취합하는 등 사실을 알아내려는 노력은 하는게 맞는 일이야.
둘째, 봉산군 전투에서의 패전이후 보인 고려 성종과 조정 대신들의 한심한 작태도
짚고 가야할 대목이다.
특히 심각한 것은 할지론인데..영토를 패전 한번에 그냥 내주자는 이런 주장이 어떻게
쉽게 나올 수 있는지 이해도 안가고, 이 할지론이 조정의 대세를 이루고..
거기에 다른 사람도 아닌 국왕인 성종까지 흔들리다니..더욱 한탄스럽고 수치스런 일.
나라를 이끌어가는 군신이 다함께 그 정신이 썩었다는 것을 절감하니..
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게다가 할지론에 포함된 땅이 황주와 절령 이북인데 그럼 서경을 포함해서 영토가
대동강보다 훨씬 남쪽으로 후퇴하게 되는 상황으로 왕도인 개경이 그만큼 국경에
더 가까워 위험에 노출되게 되는 상황이 된다. 그뿐인가.
오래전 신라가 삼한일통하며 이룬 영토보다 오히려 더 후퇴한 것이다.
서경이 어떤 곳이냐. 고구려의 후예를 표방하는 고려의 상징으로 수십년 넘게
피땀흘려 개척한 땅이다. 훈요십조에서도 이르기를 서경을 중시하라 했고.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닌 성종이 이걸 승인할 생각을 했단 말인가?
아빠는 이 대목에서 안타깝지만 고려의 대표적 성군 중 하나라는 성종이
과연 국왕으로서 자질이 있는 것인지, 그리고 성군으로 불릴 자격이 있는지
의심하게 된다.
영토란 것은 싸워 져서 뺐길 순 있어도 그냥 넘길 수 있는게 아니란다.
우리가 오랜 기간 지켜온 확정된 우리 영토라면 이 경우엔 죽기 살기로 싸우고
버텨내는 것이 답이다. 적어도 나라를 이끄는 자에게 이런 의식이 없다면 그것은
문제다. 성종과 여러 대신들의 그런 무책임함과 결기없음에 실망스럽지만..
그래도 다행인 것은 중군사 서희와 전민관어사 이지백 선생의 존재였다.
셋째, 1차 여요전쟁의 전세를 대역전시킨 결정적인 전투..
바로 안융진 전투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제1차 여요전쟁의 서전인 봉산군 전투에서의 패전으로 가라앉은 고려군의
분위기를 한순간에 뒤집고, 오히려 거란군에게 불리한 상황을 강요하며..
전쟁의 흐름 자체를 바꾼 전투였다.
겨우 1천여의 병사가 수만의 거란군을 상대로 선전한 결과였지.
안융진 전투가 있어..곧 이어질 중군사 서희 선생의 외교전에서의 승리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이니..크게 평가되어 마땅하다.
아들아, 다음에는 제1차 여요전쟁의 두번째 이야기 서희 선생의 외교전과
그 의미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 작성자:방랑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