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더스 크리스 젠센"(Anders Kristian Jensen : 全善)선교사는
1897년 3월 14일 덴마크 "네스보그"(Naesborg)에서 출생하여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전자회사에서 일하다가 1914년 미국으로 이민했다.
덴마크에서 초등학교 과정을 마치기까지 "Jensen"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전자회사"에서 일했다고 전해지나, 그곳에서 무엇을 했는지는 모른다.
"Jensen"은 16세 되던 해 혈혈단신으로 미국행 배에 몸을 실었다.
뉴욕 항에서 친척아저씨를 만나면서 그의 미국 생활은 시작되었다.
친척의 공장에서 일하던 "Jensen"은 얼마 지나지 않아 "Iowa"州로 도망하였다.
"Jensen"은 의지할 데 없이 농장에서, 도시 주변에서
허드렛일로 생계를 꾸리면서도 공립학교에 진학하여 배움에 힘썼다.
1차 세계대전 때 미 육군으로 참전하여 1818년 11월 11일 미국 시민권을 받았다.
그리고는 공부를 더하기 위해 1924년 아이오와주 코넬 대학에 입학한다.
코넬 대학 재학 시절, "Jensen"의 인생을 결정짓는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다.
"학생 자원 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에 가담한 것이다.
"학생 자원 운동"은 1880년대부터 1920년대 초반까지
신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대학생들 사이에서 뜨겁게 일어난 선교운동으로,
조선에 온 초기 선교사들 중에 이 운동에 자극 받아
해외 선교에 뜻을 세운 이들이 많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Jensen"은 1924년 대학졸업과 동시에 당시 선풍적 인기를 모으고 있던
하기 야외강습회(Chautauqua)의 지도자로 활동을 시작하였고,
본격적인 신학 수업과 선교사로서의 훈련을 위해 보스톤대학 신학부에 입학하였다.
신학훈련을 받으면서 여름방학마다 아이오와로 돌아가 하기 야외강습회의 일을 관장하였다.
1927년 보스턴대학교 신학부를 졸업하고 미 감리회 국내선교부에서 일했다.
그 무렵 "Jensen"은 뉴욕에서 열린 "학생자원운동"의 한 집회에서
조선 선교사로 활동 중인 "메드"(Maud Keister Jensen)라는 여성을 만났다.
1928년 결혼한 "Jensen"과 "Maud"는 이듬해 부부선교사로서 조선에 들어왔다.
"Jensen"은 수원, 인천, 원주, 한양 등지를 순회하며 전도 사업에 힘썼다.
다음의 글은 그의 순행 모습을 잘 보여준다.
“그는 한양에 살고 있었으나 한시라도 그곳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최소한의 식량이 담긴 봇짐 하나 메고서 논둑 밭둑 지나
이 마을 저 마을 시골 벽지로 전도여행을 다녔다.
몇 주씩 집을 떠나 조선인들이 먹는 음식을 먹고,
흙토담집 마루에서 잠을 청하며 지내다가 몸무게가 15~20파운드씩 빠져
집으로 돌아오곤 했노라고 그의 아내가 말해주었다.
그러면 그의 아내는 다시 남편의 몸무게를 늘리기 위해 몇날 며칠 고심해야 했고,
아내의 정성으로 건강을 되찾고 원기가 회복되는 즉시 그는
또다시 봇짐을 등에 메고 논길로 산길로 여행을 떠났다.”(Newton E. Moats, "The Jensen, Story"中에서)
봇짐 하나 등에 지고 매인데 없이 바람처럼 자유롭게
산 넘고 물 건너 들판을 가로지르는 그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그는 정착생활이 가져다주는 소유와 집착, 관성 그리고 안락함 등
모든 것을 끊임없이 내려놓으면서 복음 전하는 일 하나에
오로지 자신의 인생을 실었던, 진정 가난한 영혼의 소유자였다.
"Jensen"에게는 이런 일화도 있다.
“저곳에 흙더미 보이지? 조선 농부의 무덤이라네. 내가 아는 사람이네.
그는 자기 땅에 묻힌 거지. 조선은 나의 나라이기도 하다네.
나는 바로 이 나라에서 내 인생을 마치고 이 땅에 묻히기를 원하네.”
"젠센"(Anders kristian Jensen)을 찾아 온 그의 둘도 없는 친구
"모츠"(Newton E, Moats)가 시골 전도여행에 함께 나섰다.
1936년의 조선 농촌풍경, 농촌사람들, "Jensen"의 선교사역을 옆에서 지켜보던 "Moats"는
“참 엄청난 일이구만, 이곳에서 자네가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시간만 헛되이 보내고 말 걸세.
미국으로 돌아가세, 가서 과거에 함께 동역했던 것처럼 함께 일해보세.”라고 설득하였다.
그러나 "Jensen"의 대답은 확고하였다.
조선에서 인생을 마치고 조선 땅에 묻힐 것이라고.
내한하여 7년간 선교 활동을 하다가 1934년 안식년으로 귀국했다가,
1년 후 다시 돌아와 수원, 인천, 원주, 서울 등지의 순회 선교사로 시무하다가
1940년 일제의 추방령으로 강제 출국되었다.
8·15 광복 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서울에서 일하던 1950년 6월 "개성"으로 출장 중에 6·25 전쟁을 만난다.
1947년 다시 문을 연 개성 스테이션(station, 각 지방 선교지부)의 선교사업에 많은 관심을 쏟았다.
38선의 경계면에 위치하여 정치적으로도 예민하고 위험한 지역이었다.
1950년 6월 25일 "Jensen"은 "개성"에 있었다.
25일 아침 "Jensen"은 다른 다섯 명의 선교사들과 함께 이유도 모른 채 투옥되었다.
"Lawrence Zellars", "Bertha Smith", "Nell Dyer", "Helen Rosser", "Ernest Kisch"등,,,
"D. N. 클락"의 기록에 의하면
"로렌스 알프레드 젤러스"(Lawrence Alfred Zellers)와 같이 북한군 포로가 되었다.
"Jensen"은 동료선교사들과 함께 평양으로 끌려가 잡혀온 다른 선교사들과 합류하였다.
약 70명의 일단이 되어 끌려 다니는데 성공회 감독, 구세군 사령관,
천주교 신부와 수녀들, 심지어 태어난 지 아홉 달 된 어린 아기도 끼어 있었다.
추운 겨울, 여름옷을 입은 채 헛간에서, 밭고랑에서 쪽잠을 자야했다.
덮을 것 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식량도 좁쌀과 물 뿐이었으나 그것조차 부족하였다.
병이 나도 약이 없었다.
1952년 봄, "Jensen"은 평양에서 북쪽 국경 압록강(만포진)까지 끌려갔다.
이른바 "죽음의 행렬"이였다.
한번은 호송병들의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조금 멀리까지 걸어가 보았다.
그때 한 무리의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Jensen"에 대한 소문을 듣고 그가 지나갈 길목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신앙인들이였다.
감시의 눈을 피하여 "Jensen"은 그들과 반가운 대화를 나눌 수 있었고,
자신을 쓰러지지 않도록 지켜주는 신앙의 고귀함을 전하면서 그들과 함께 속삭이듯 기도하였다.
포로생활이 끝나갈 무렵 호송병들의 태도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그들은 밤바다 찾아오는 기독교인들과 수풀 속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Jensen"을 못 본 체 딴전을 부렸다.
핍박하고 때리는 모든 해악을 가하는 자신들을 오히려 더욱 사랑하는 "Jensen"을 보면서
이제는 도리어 그들이 "Jensen"을 존경하고 사랑하게 되고 만 것이다.
"Jensen"은 평양에서 만포진으로, 거기서 또 중강진으로, 다시 자성(慈城)으로,
이리 저리 끌려다니며 죽음보다 더 잔혹한 3년간의 억류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Jensen"은 그 3년을 인생 최고의 순간으로 회고한다.
“나는 3년간의 휴가를 누렸다. 내 인생 최고의 날들이었다.
하나님은 나를 버리시지 않았다. 그 어느 때보다 더 가까이 내 곁에 계셨다.
이전에 나는 주님을 안다고 생각했으나,
죽음의 행군 속에서 비로소 나는 진정 주님을 알게 되었다."라고 술회하였다.
3년간의 억류 생활을 하다가 1953년 5월 휴전으로 석방되어
모스크바를 경유하여 5월 13일 뉴욕에 도착했다.
뉴욕에 도착했을 때 공항에 마중 나온 선교부 대표자들을 향해
그가 던진 첫마디는 한국 사랑을 담고 있었다.
“언제 나의 동족에게로 돌아갈 수 있습니까?”
"동족의 나라" 한국으로!
몇 개월 동안 건강을 추스른 "Jensen"은 록펠러재단의 후원을 받아 "동족의 나라"로 돌아왔다.
건강이 온전히 회복되지 않았지만 전후 한국의 정황을 돌아보고
재건사업을 위한 협력 방안들을 모색하고자 함이었다.
한국에 잠시 머무는 동안 "Jensen"은 다음과 같은 감사의 글로
한국의 교우들과 만남의 기쁨을 나누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북한에서 포로생활을 하는 동안 여러분은 날마다 나의 기도의 중요한 제목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석방을 당하고 보니 여러분이 그리고 형편이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의사는 아무 집회도 하지 말라는 조건부로 1개월간의 여행을 허락했습니다.
속히 한국에서 여러분과 같이 일할 수 있게 되기 위해서 건강을 회복하고저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을 일일이 심방해서 보고 싶은 마음은 태산 같으나
10월 10일에 일단 귀국했다가 내년 4월에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그 동안 한국교회를 위하여 기도하겠습니다. 뵈올 때까지 안녕하시기를 빌며“
(Jensen목사내한”, 『감리회보』, 1953. 10.1)
그리고 1954년 10월 부인과 함께 다시 내한하여 한국 전쟁의 잿더미 위에서
재건하려는 교회에 도움을 주면서 전후(戰後) 복구사업에 진력했다.
1955년 연세대학 재단이사로 활동하고, 1956년 11월 20일 한국을 방문한
"미국고문단" 일행과 주한 미국대사관에서 회담을 마치고 귀가 중 심장마비로 별세했다.
11월 23일 감리회 정동제일교회에서 장례예배를 마치고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묘비 중간에는 "GREATER LOVE HATH NO MAN"
JOHN15:13.
"이에서 더 큰 사랑은 없느니라" 라고 하였고,
맨 아래에는
"BECAUSE MAN GOETH TO HIS LONG HOME, AND THE MOURNERS GO ABOUT THE STREETS.
THEN SHALL THE DUST RETURN TO THE EARTH AS IT WAS.
AND THE SPIRIT SHALL RETURN UNTO GOD WHO GAVE IT." ECCL 12.
"사람은 자기의 영원한 집으로 돌아가고, 조문객은 거리를 왕래하게 됨이니라.
육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전도서12 라 기록하었다.
"Jensen"선교사도 "프리메이슨"(Freemason)회원이였다.
여기에 특이한 것은 "프리메이슨" 표식위에 "HAN YANG"라고 씌어 있다.
그 당시 서울에 "프리메이슨"지부가 있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한국인도 "프리메이슨"회원이 상당수 있었던가보다.
묘비의 뒤에는 "牧師 全善 之墓"라고 하였다.
"젠센 부인"
감리회 첫 여성 목사 "매드 키스터 젠센"(Maud Keister Jensen)목사는
1904년 9월 27일 미국 뉴저지에서 출생하여 1926년 5월 감리회 선교사로 내한했다.
1928년 7월 13일 "젠센"(A. K. Jensen)과 결혼하여 한국에서 딸 "클레어 리 젠센"(Clair Lee Jensen)과
아들 필립(Philip,성장하여 미국에서 교수와 감리교 목사로 활동함)을 낳았다.
내한 초기에는 인천지방에서 선교하다가 감리회 초기 여성 목사로 안수 받았으며
"드루"(Drew)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 선교부 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56년 남편과 사별한 뒤에도 한국에 남아 선교활동을 계속했다.
"정동제일교회의 역사(유동식)"에 따르면 1958년 8월 17일 조직된 정동교회건축기성회 임원으로 위촉되었다.
남편 "젠센"을 기념하는 사업으로 미국에서 7만$를 모금하여 "젠센기념관"을 2층 양옥으로 건립했다.
이 건물은 1960년 12월 3일 선교 75주년 행사 때 정동제일교회에 헌증되었으나
1977년 정동제일교회 본당 신축으로 철거되었다고 한다.
이 기념관은 교육관으로 사용하도록 하였으며 특별집회나 부인회 등의
모임장소로 제공되고, 학생들을 위한 활동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총리원 주최 회의 장소나 특별집회 용도로 제공하도록 하였다.
1969년 9월 미국으로 돌아가 1970년 2월 28일 선교사직을 정년퇴임하고
뉴저지州 "매디슨"(Madison)에 살다가 1998년 10월 12일 별세하여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젠센 부인"인 "MAUD KEISTER JENSEN"의 묘비.
한국사람은 "젠센"이라 부르지만 그들은 "크리스"(Kris)고 부른다.
"젠센" 부부의 딸 "클레어 리 젠센"(Clair Lee, Jensen)은 1929년 10월 11일 서울에서 출생했다.
서울 외국인학교에서 오랫동안 교사와 교장으로 봉직하다가,
미국 "뉴저지"에서 사회봉사 사업가로 복지와 장애인을 위해 일했다.
1996년 2월 26일 미국에서 별세하여 유해는 양화진 부모님 옆에 안장되었다
"젠센"부부의 딸 "클레어 리 젠센"(Clair Lee, Jensen)의 묘비.
이분들의 한국 사랑이 얼마나 큰지 이것만으로도 알 수 있을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