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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재 성가정 성지 - 한국 천주교회의 요람이자 빛나는 성가정의 모범 |
마재 마을과 정씨 가문
마재 성가정 성지의 주소는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116 (다산로 698-44)인데 속칭 마재〔馬峴마현〕, 말고개이다. 마재는 북한강과 남한강이 마주 서로 만나는 양수리에서 이룬 팔당호 북쪽, 호수 안으로 불쑥 튀어나온 지형에 위치한다.
마을 이름의 유래는 일반적으로 ‘말을 타고 넘는 재’라는 뜻이라지만 전혀 다른 유래도 있다. 임란시 왜구가 민족의 정기를 끊기 위해 이 명당에 ‘쇠로 쥐 만한 말(철마)’을 만들어 묻었는데 이로 인해 마을에 질병 등 안 좋은 일이 일어나 주민들이 철마에게 제사를 드리게 되었다 하여 마재라고 했다는 것이다. 실제 마을 뒤쪽에 쇠말산(鐵馬山)이 있다는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다산 정약용도 실제 예로부터 동제 (洞祭)를 지내는 풍습이 있었다고 하였으며 자신의 호의 하나로 ‘철마산인(鐵馬山人) ’이라고 한 바 있다.
이 마을에서 5대를 살아온 집안이 있으니 곧 나주 정(丁)씨의 일가다. 영조 때 진주 목사를 지낸 정재원(鄭載遠, 1730-1792)에게는 5남이 있었다. 전처 의령 남씨에게서 약현, 후처 해남 윤씨에게서 약전, 약종, 약용, 셋째 처 잠성 김씨에게서 약황을 두었으며 딸도 정혜 등 5녀가 있었다.
정약현(鄭若鉉, 1751 - 1821)
정씨 가문의 장남으로 경주이씨와 혼인하였는데 그의 가족은 조선말 천주교 박해의 격랑 속에서 한국천주교 초기 핵심적인 인물들과 혈연관계에 있었다. 이복 여동생이 이승훈(李承薰)과 혼인하였는데 이승훈은 우리나라 최초 천주교 세례를 받은 핵심 인물이다. 또한 처남인 광암 이벽(曠菴 李檗)은 한국 최초로 천주교를 창설하고 신봉한 인물이었다. 정약현은 1773년 맏딸 정명련를 두었는데 명련은 황사영(黃嗣永)과 혼인하였고 사위 황사영은 천주교도로 신유박해(辛酉迫害)가 일어나자 제천 배론으로 피신하여 백서사건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정씨 집안의 형제들이 다들 천주교와 연루되었으나 정약현은 천주교에 입교하지 않았으며 고향 마재에서 집안을 지켰다.
정약전(鄭若銓, 1758 ~ 1816)
남인계(南人系)의 학자들과 교유하여 천진암 강학회에 참여하였으며 천주교에 입교한 후 신앙을 하는 중 1801년 신유박해 때 흑산도로 유배되었고, 유배지에서 생을 마쳤다. 대표저서로 《자산어보(玆山魚譜)》가 있다.
정약종(鄭若鍾, 1760-1801)
형제 중 가장 늦게 천주교를 접했다. 세례명은 아우구스티노. 천주교 교리를 신봉하여 집안의 제사를 거부하였고 이 때문에 가족과 떨어져 강 건너 분원리에서 살면서 천주교를 신봉하고 전파하였다. 1795년(정조 19) 이승훈(李承薰)과 함께 중국 청(淸)나라 신부 주문모(周文謨)를 맞아들이고, 1799년 서울로 옮겨와 한국 최초의 조선천주교우 모임인 명도회장을 지냈다. 전도에 힘쓰면서 《성교전서(聖敎全書))》를 집필 중인 1801년 2월 신유박해(辛酉迫害)가 일어나자 체포되어 서소문 밖에서 참수, 순교하였다. 저서로는 한자(漢字)를 모르는 신도를 위해 우리말로 쓴 교리서 《주교요지(主敎要旨)》가 있다.
정약용(丁若鏞,1762-1836)
자(字)는 미용(美庸), 호 다산(茶山) 또는 철마산인(鐵馬山人), 세례명은 사도요한, 당호는 여유당(與猶堂)이며, 시호는 문도(文度)이다.
1776년 이가환, 이승훈과의 만남으로 성호 이익의 학문에 연을 맺었다. 자연스럽게 남인 소장파 학인들과 교류하게 되면서 이들이 천주학과 서양 학문을 많이 연구하는 터라 정약용도 자연스럽게 이를 접하게 되었다. 1779년 형 정약전, 이벽, 권일신, 이가환, 이승훈 등과 함께 주어사와 천진암을 오가며 권철신이 주도한 천진암 강학회에 참여하였다.
1784년 이벽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명례방 사건에도 가담하였다. 진산사건과 신유박해를 거치면서 노론이 주도한 정계에서 몰리고 생명이 위태롭자 자명소(自明疏)를 올리는 등 이승훈, 이가환, 정약전 등과 함께 배교하여 죽음을 면했다. 신유뱍해 시에 18년간 경상도 장기, 전라도 강진 등지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실학을 집대성하여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5백여 권의 주옥같은 저서를 남겨 오늘날 우리나라 역대급 최대의 학자라는 명성을 얻었다. 1818년 귀양에서 마재로 돌아온 후 은둔과 묵상, 고행과 기도로 보속의 삶을 살다가 1836년 75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정하상(丁夏祥, 1795-1839)
약종(若鍾)의 둘째 아들 세례명은 바오로. 아버지 약종에 이은 한국교회 재건의 주역. 역관(譯官) 유진길(劉進吉)ㆍ조신철(趙信喆) 등과 함께 9차례나 베이징에 드나들면서 신부 파견을 강력히 요청하여, 파리 외방전교회(外邦傳敎會) 산하에 새로이 조선 대리 감목구(朝鮮代理監牧區)를 설치, 브뤼기에르(Bruguitère) 주교(主敎)를 그 초대 감목 대리(監牧代理)로 임명케 하는 데 성공했다. 1833년(순조 33) 중국인 신부 유방제(劉方濟), 1836년 프랑스의 모방(Maubant) 신부를 맞아들였다. 이해 모방 신부의 지시에 따라 김대건(金大建)ㆍ최양업(崔良業)ㆍ최방제 3명을 성직자(聖職者) 양성을 목적으로 동행케 해서 마카오로 보냈고, 다음해 샤스탕(Chastan) 신부와 조선 교구 제2대 감목 대리로 임명된 앵베르(Imbert) 주교를 맞아들였다. 1839년 기해박해(己亥迫害) 때 가족과 함께 체포되어 서소문 밖 형장(刑場)에서 순교하였다. 그가 체포되기 전에 집필하여 잡힌 후에 우의정 이지연(李止淵)에게 올린 《상재상서(上宰相書)》는 당시 우리나라 유일한 호교론(護敎論)이다.
마재 성지 개발
마재 정씨 형제들 중 유일하게 배교하지 않고 천주교를 꿋꿋이 지켜낸 사람은 셋째 복자 약종이었다. 그는 1세대 천주교 창설자들이 무기력하게 물러난 후 박해로 위축되고 망가진 한국 천주교회를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다가 자신을 하느님의 제물로 바쳤다. 그런데 그 아버지에 그 가족이라고 할까? 그의 부인 성녀 유선임(柳仙任) 체칠리아, 맏아들 복자 철상 카롤로, 둘째 아들 성 하상 바오로, 딸 성녀 정혜 엘리사벳도 모두 남편과 아버지를 따라 순교의 영광을 안았다.
그야말로 교회사에서 찾기 어려운 성가정이었다. 특히 정하상은 성 김대건 신부와 함께 망가진 한국 천주교를 재건하는 으뜸지도자가 되어 순교 성인에 품에 올랐으니 이보다 더한 가문의 영광이 어디 있으랴? 마재 성가정 성지는 바로 이러한 복자 정약종의 성가정을 본받기를 바라는 취지에서 이루어진 결실이다.
마재에서는 또한 천진암이 있는 앵자봉 능선을 멀리 바라다볼 수 있다. 그리고 천주교회의 큰 초석이 된 권철신 암브로시오 5형제의 집터가 있는 양근(陽根) 성지와도 지척이다. 이처럼 마재는 위치적으로 한국 천주교회의 요람이자 신앙의 태동지라 할 수 있다.
경기도 남양주시는 마재 사적지의 중요성을 인식해 1999년부터 다산 정약용 생가를 중심으로 정약용 유적지를 본격적으로 개발해 다산의 생가 권역에 여유당을 복원하고 기념관 등 여러 시설을 조성하고, 인근에 실학 박물관을 건립하는 등 주변 환경을 대대적으로 정비하였다
의정부교구 또한 2006년 순교 사적지인 마재 성지에 전담 사제를 임명하고 성역화에 나서 2007년 3월 장약용 생가에서 약 500m 떨어진 이곳 새로 마련한 현 부지에 전통 한옥 양식의 성당과 명례방(만남의 방) 등을 완공하였다. 한옥 성당에는 한복을 입은 예수상과 성모자상을 모셨으며 제대 밑에는 정약종 순교자 무덤의 흙을 넣기도 했다. 이어 2008년 9월 28일 이한택 주교의 주례로 마재 성지 축복식을 가졌고, 2012년 2월 9일에는 마재 성지를 덕소 본당에서 분리해 남양주시 조안면 전체와 와부읍 팔당리 전체를 관할구역으로 하는 본당으로 신설했다.
2014년 8월 16일 정약종과 그의 아들 정철상 가롤로가 복자품에 올라 정약종 일가모두가 시복 시성되었다. 교구에서는 성가정 성지로의 도약을 위해 2년간 한국적 성화(聖畵)를 개척한 심순화(카타리나) 작가와 함께 성가정 성지 조성작업을집중적으로 실시하였다. 그리하여 2017년 5월 27일 의정부교구 이기헌 주교는 마재 성가정 성지 선포식을 거행하고 축복했다.
마재 성가정 성지
마재 성가정 성지에 도착하니 벌써 5시 반이 가까웠다. 여기 말고도 가야할 성지가 한 곳이 더 남았기에 서둘러 성당 경내로 들어갔다.
넓은 마당 가운데 돌을 깐 길이 있고 왼쪽에 도마성전이라는 이름의 성당 건물이 있는데 전통한옥이었다. 성전 정면 처마 밑에는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는 토마스가(도마)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신앙고백을 한 말이다. 이 말에 대해 예수님은 “너는 꼭 보고야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이는 행복하다”라고 하셨다. 신앙은 따지는 믿음이 아니다. 논리적으로 따진다면 그것은 과학의 영역이다.
문은 성전의 오른쪽 측면에 찾을 수 있는데 그나마 오늘은 문이 꼭꼭 잠겼다. 그런데다 ‘문을 여지 마세요, 경비(세콤)이 작동 중입니다.’라는 쪽지도 붙어 있다. 아무리 개방 시간이 아니라서 사무원이 성당을 비웠더라도 우리처럼 멀리서 찾아온 순례객들도 있을 터인데 꼭 이런 경고의 표현을 써야하는지 의문이다.
출입문 앞에는 성모상과 소원을 비는 십자가가 있다.
성전의 오른쪽 옆에는 고해소가 아담하게 자리하고 있고 왼쪽에는 명례방이라고 하는 성물방을 겸한 ‘만남의 집’이 있다. 건너편 언덕에 사무실 건물이 내려다 보고 있고 그 아래 마당에는 한복에 쪽머리를 한 성모상이 무엇을 전구하는지 두 손을 모으고 서 계신다.
성화(聖畵)나 성상(聖像) 하면 줄곧 흰 피부를 가진 예수성심상이나 성모상을 연상하지만 그렇지 않는 경우도 많다. 스페인의 몬세라트 수도원의 검은 성모상이나 중남미 과달루페의 혼혈 성모상이 이를 대표한다. 특히 오늘날은 더욱 그런 경향이 있어 그 나라 그 민족의 고유한 복장과 모습으로 창조되어 정서적 공감을 자아낸다.
비록 문화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은 다르지만 근본적으로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며 이러한 다양한 문화적 표현이 우리의 신앙을 더욱 풍요롭게 해 주고, 가톨릭이 세계적인 종교라는 보편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재 성가정 성지의 모든 성화나 성상은 이러한 의미를 살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성모상 역시 우리의 전통적인 미인형이다.
성전에 들어갈 수 없어서 내부가 어떤지 궁금하여 집에 돌아와서 성지 사이트를 찾아보고 올린다. 예수님 상도 모두 한복 차림을 했다.
다시 성당 입구로 나가면 약종동산이라는 뜰이 있다. 아치문을 통과하면 바로 약종과 철상의 부자 동상이 있다.
그 뒤편에는 순교현양비와 성모자상이 있고 그 앞에는 야외 성전인 듯 제단과 몇 개의 벤치가 놓여있다. 가장 뒤쪽에는 나리꽃으로 둘러싸인 대좌 위에 자비의 예수성심상이 서 있다. 그리고 오른쪽으로는 십자가의 길이 이어진다.
주차장 건너에는 성가정 정원이라고 부를 만한 휴식처가 있다. 입구에 들어가면 마당에는 한복 두루마기를 입으신 예수님 동상이 손을 잡고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자세로 서 계시고 좌우에는 꽃과 십자가, 빨마 가지로 수놓은 꽃담으로 싸여서 담 자체만으로도 너무나 아름답다.
오른쪽 담벽 앞에는 벤치가 몇 개 놓여있고 여러 명의 순교자의 얼굴이 클로버 잎에 싸인 형상으로 두 줄로 서 있다. 그리고 왼쪽 담벽에는 성가정 성인 성녀 세 사람이 각각 그려져 있다.
안쪽에는 유교 사당으로 들어가는 신문(神門)과 같은 기와지붕의 문이 나타난다. 문의 좌우에는 각각 성화가 있는데 왼편 그림의 제목은 “나를 따라 오너라”인데 정약종이 두 아들 철상과 하상을 교회의 일꾼으로 부르는 장면이다. 성서에 예수님이 고기 잡는 어부들을 보고 제자로 삼고 자신을 따라 오라고 한 내용을 연상할 수 있다.
오른편에는 정약종 철상 부자상인데 수탉 한 마리가 그려져 있다. 닭이 울기 전에 세 번 예수님을 부인했던 베드로의 약한 마음을 경계한 것일까? 그림 제목은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이다. 아들의 약한 마음에 굳건한 용기를 불러 넣어주는 장면이라고 생각된다
문을 통과하니 왼쪽 담벽에는 십자가를 든 복자 정철상이 꽃담 속에 그려져 있고, 오른쪽 담벽에는 정약종 성가족화가 왼쪽과 대칭적으로 그려져 있다. 모두 6명인데 가운데 한복 성모님이 손을 모으고 있고, 성모님의 오른쪽에 ‘주교요지’라는 책을 끼고 십자가를 들고 있는 분이 정약종, 그 뒤가 맏아들 정철상, 그리고 성모님의 왼쪽에 ‘상재상서’라는 책을 들고 있는 분이 둘째 아들 정하상, 그 앞에 부인 유선임, 맨 오른쪽이 딸 정정혜이다.
뒤편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힌 순교성심상 서 있고 더 뒤에는 형틀 모양의 구조물 위에 PX(키로)가 얹히어 있은데 이는 그리스도의 승리를 상징한다. 모진 고난에도 결국 승리하는 순교자의 영광을 상징하는 뜻이리라.
오늘은 계속하여 시간과의 싸움이다. 벌써 오후 5시 40분. 차를 타고 나오다가 꽃담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일행에게 양해를 구하고 다시 내려서 몇 장을 더 찍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담장을 본적이 없다.
다산 정약용 유적지
서둘러 다산 유적지를 향했는데 차로 불과 2-3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정약용 유적지 입구 안내 표지판을 지나 유적지 출입문 앞에 이르니 벌써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관리인이 있는 시설은 오후 5시까지만 개방한다고 한다.
정약용 유적지 정문에는 실학연수(實學淵藪)(淵藪란 물고기처럼 많은 무리가 모여드는 곳)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안내도를 보니 이 안에는 생가인 여유당(與猶堂)이 복원되어 있고 다산의 사당인 문도사(文度祠), 다산 기념관, 다산 문화관, 서화관(書畵館) 등이 세워져 있다. 그리고 여유당 뒷산에는 다산의 묘소가 있다.
유적 경역 밖의 다산 문화의 거리에는 거리에는 천일각(天一閣), 기념탑, 거중기 등 갖가지 조형물이 조성되어 있고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실학박물관이 있다.
일단 유적지 안내도에 따라 경내의 시설물에 대한 관련정보를 정리할 뿐, 내부는 볼 수가 없어 담 너머로 보이는 사진만 덧붙인다.
▲여유당(與猶堂) - 정약용 선생의 생가
정약용 선생의 생가인 여유당은 조선시대에는 이곳을 소내(苕川) 또는 두릉(杜陵)이라고 했고 정약용 선생의 5대조부터 여기에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당호(堂號)인 여유(與猶)는 조심하고 경계하라는 뜻으로, 노자(老子)의 “조심하기를(與) 겨울의 냇물을 건너는 듯 하고, 겁내기를(猶) 사방을 두려워하는 듯 하라(與兮若冬涉川 猶兮若畏四隣)”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며 선생이 1800년(정조 24년) 봄, 노론 벽파에게 몰려 관직을 버리고 가족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와서 집을 지은 뒤 붙인 당호이다.
여유당은 앞에 시냇물이 흐르고, 뒤에는 낮은 언덕이 있어 선생이 여유당을 수각(水閣)이라고 부르기도 하였으며 꽃과 나무가 어우러져 ‘채화당(菜花堂)’이라는 또 다른 명칭도 갖고 있다. 현재의 여유당은 1925년에 일어난 을축년 대홍수로 유실되었던 것을 선생의 사후 150주년이 되는 1986년에 복원한 것이다.
▲다산 정약용의 묘소
여유당 오른쪽 뒤편 계단길을 올라가면 “집 뒤 동산에 매장하라.”는 정약용의 유언대로 그의 무덤이 있다. 정약용은 62세 때 스스로 묘비명을 지었으며 머릿글에서 “이 무덤은 열수(冽水) 정약용의 묘이다.”라고 썼는데 열수는 한강의 옛 이름이다.
정약용 묘는 1972년 5월 4일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었으며 부인인 풍산 홍씨와 함께 합장되었는데 묘소에는 묘비, 상석, 망주석 1쌍이 설치되었고 상석 밑에 좌우로 석단이 있어 봉분과 앞 공간을 구분하였다. 묘비는 팔작지붕 모양의 옥개석을 갖추고 있고 오석제(烏石製) 비신(碑身)과 비좌(碑座)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비신에는 '文度公茶山丁若鏞 淑夫人豊山洪氏之墓'라고 적혀 있다.
다산의 묘소에서 내려다보면 마을과 한강을 넘어 천진암이 있는 앵자봉 계곡이 펼쳐지고 그 오른쪽은 정약종이 분가하여 살았던 분원리 배알미리(拜謁尾里)다. 지금은 팔당댐으로 물길이 바다처럼 넓어졌으나 2백 년 전의 능내리(마재)와 배알미리는 강을 사이에 두고 있는 이웃 마을이었다.
▲다산 기념관
다산 기념관은 1990년에 건축되었으며 정약용 선생의 친필 간찰(簡札), 산수도 등과 대표적 저서인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 《흠흠신서(欽欽新書)》 사본(寫本)과 수원 화성의 건축 현장을 재현한 디오라마, 실물 크기의 4분의 1 과 2분의 1크기의 거중기(擧重機)와 녹로(轆轤)가 있다. 녹로는 활차(滑車 : 도르래)를 이용하여 무거운 물건을 들어 올리는 데 쓰이던 기구이다. 이들은 모두 정약용이 실학정신을 바탕으로 고안한 장비들이다. 또한 기념관 벽면에는 정약용 선생의 가계도, 귀양 경로, 일대기 등이 설명된 자료와 영상들이 상설 전시되어 있다.
▲다산 문화관
다산 문화관은 정문을 통하지 않고 도로에서 바로 들어갈 수 있다. 문화관의 내부는 유품을 전시하는 다산 기념관과는 달리, 다산의 인간적 고뇌와 삶의 철학을 현대적 시간으로 재조명하여 ‘정약용 선생의 꿈’, ‘새로운 학문의 세계로’, ‘유배지에서 그리운 마현’, ‘새로운 조선의 발견’, ‘다산 근대의 길’ 등 다섯 가지 주제를 가지고 그래픽 패널로 전시하고 있으며 다산 선생의 사상과 살의 철학 담긴 ‘다산의 삶’이라는 애니메이션이 상영되고 있다.
▲문도사 - 다산 정약용 사당
문도사(文度祠)는 정약용의 위패와 영정이 모셔진 사당으로써 선생의 사상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으며 매년 선생의 기일에 후손들이 제사를 지내고 있다. 대한제국 시기에 나라에서 죄인으로 낙인찍혔던 인물을 복권하고 시호를 내려주는 등의 작업을 했는데 고종이 1910년에 정약용에게 문도(文度)라는 시호를 하사하게 되어 사당은 문도사가 되었다.
▲실학박물관 - 실학자의 삶과 실사구시의 정신
다산 정약용 선생의 생가 옆에 자리 잡은 실학박물관은 국내 유일의 실학 관련 박물관이자 문화복합공간이다. 실학과 관련된 유·무형의 자료를 수집·연구하고 이를 바탕으로 기획한 전시와 교육 프로그램 등을 통해 도민에게 실학의 가치를 전파함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조선 후기 사회 및 실학을 살펴볼 수 있는 각종 서책류와 자료, 과학과 관련된 중요한 유물 및 실학적 관점으로 작성된 지도류, 사전류 등 1,800여 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실학의 형성과 탄생 과정, 실학자들의 저술, 실학과 과학을 주제로 3개의 상설전시실과 실학자의 삶, 실학 정신, 문화 등에 관련된 다양한 주제의 기획전시를 매년 선보이고 있다고 한다.
다산 문화의 거리
이름 그대로 정약용 유적지 앞길에 있는 정약용과 관련된 다양한 건축, 조형물이 세워져 있는 길이다.
▲천일각(天一閣)
천일각(天一閣)은 다산이 전남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할 때 지내던 다산초당에서 약 100m쯤 떨어진 곳에 지은 정자를 그대로 재현한 정자이다.
안내문에 의하면 다산초당 부근 이곳에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고 소일했다고 한다. 다산 초당에서 다산은 해배(解配)를 앞두고 다산 사경(茶山四景)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자취를 이곳에 남기려 했다고 한다. 첫째 바위에 새긴 정석(丁石)이라는 글자, 둘째 솔방울을 지펴 차를 끓이던 넓적한 바위 다조(茶竈), 바닷가의 돌을 주워다 만든 작은 연못의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 그리고 바위 틈에 솟아나는 약천(藥泉)을 이른다.
원래 천일각(天一閣)은 중국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개인 장서각으로, 중국 절강성(浙江省) 영파시(寧波市) 천일거리(天一街)에 위치하고 있다고 한다. 명(明) 가정(嘉靖) 40년(1561) 당시 병부우시랑(兵部右侍郎)을 맡고 있던 범흠(范欽)이 처음 지었다. 여기서는 정약용의 저서를 기념하는 탑이 있어 그 의미를 살린 것 같다.
▲저술 기념탑 - 꺼지지 않는 불꽃
정약용 선생이 저술한 500여권의 서책으로 쌓은 탑 모양 조형물로 그 속에서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타오르는 실학사상의 정신을 형상화한 것이다.
▲대표 저작물 소개 조형물들
정약용이 저술한 대표적인 저작물을 소개한 비석이다. 대표작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 등을 간단하게 소개하고 있다. 목민심서의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군자의 학은 수신이 그 반이요 나머지는 목민인 것이다. 성인의 시대가 이미 멀어졌고 그 말씀도 없어져서 그 도가 점점 어두워졌으니, 오늘날 백성을 다스리는 자들은 오직 거두어들이는 데만 급급하고 백성을 기를 바는 알지 못한다. 이 때문에 하민(下民)들은 여위고, 시달리고, 시들고 병들어 서로 쓰려져 진구렁을 메우는데 그들을 기른다는 자는 바야흐로 고운 옷과 맛있는 음식으로 자기만 살찌우고 있으니 어찌 슬프지 아니한가?
이것은 진실로 내 덕을 쌓기 위한 것이요, 어찌 꼭 목민에만 한정한 것이겠는가, ‘심서(心書)’라 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목민할 마음은 있으나 몸소 실행할 수 없기 때문에 ‘심서’라 이름한 것이다. (1821)
▲다산의 사상 소개 조형물
일반적으로 정약용 선생을 “실학의 집대성자”라고 부르고 있다. 이익에서 유형원으로 이어지는 학통을 계승하며 탈주자학적 경학체계를 세워 19세기 초 실학파의 철학적 입장을 확립했다. 그는 일명 “경세치용학파(經世致用學 派)”라 지칭하고 있는 성호학파와 “이용후생학파(利用厚生學派)”라 지칭하고 있는 북학파의 주장을 한데 묶어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용광로 안에 녹여 자신만의 독창적 학문의 영역을 개척했다.
이곳 전시물에서는 그의 정치, 사회, 교육, 문학 등에 나타난 핵심 내용이 담겨져 있다. 정치사상의 예는 다음과 같다.
‘정치사상’의 핵심은 “임금은 백성을 위하고(위민정치) 군자는 자기 자신을 올바로 세운 뒤에 남을 다스려야 한다.(수기치인)“는 다산의 정치사상은 오늘날의 정치 지도자가 걸어야할 올바른 길을 제시해주고 있다.
▲시문(詩文) 소개 조형물
딸에게 보낸 시이다. 다산이 유배 간 지 10년, 부인 홍씨는 생이별한 남편이 못내 그리웠을까. 살아서는 다시 못 볼 것 같은 남편을 그리워하며 시를 짓고, 30년 전 시집올 때 입었던 치마를 남편에게 보냈다. 다산은 아내의 시와 빛바랜 붉은 치마(하피·霞帔)를 받고, 그 치마를 여러 폭으로 마름질해 4권의 서첩을 만들어 아들 학연과 학유에게 보냈다.
그리고 남은 천에는 매화가지 위에 정겹게 앉은 두 마리 참새를 그리고 그 아래에 시를 적어 딸에게 보냈다. 유배로 인해 몸은 떨어져 있지만, 딸에 대한 아버지의 깊은 마음에 애잔함을 느끼게 한다. 어머니 치마에 아버지가 사랑을 담아 쓴 글씨와 그림, 세상에서 이보다 값진 보물이 있을까?
아래의 시가 위의 조각에 새겨져 있다.
가볍게 펄펄 새가 날아와
우리 뜰 매화나무 가지에 앉아 쉬네
매화꽃 향내 짙게 풍기자
꽃향기 사모하여 날아 왔네
이제부터 여기 머물러 지내며
가정 이루고 즐겁게 살거라.
꽃도 이미 활짝 피었으니
그 열매도 주렁주렁 많으리 (1813 강진에서)
다산의 시문 세 개가 새져진 조형물이다. 맨 처음것은 정약용이 38세 때 정조의 명에 의해 형조참의에 제수 받았으나 두 달 만에 떠나기로 하고 올린 사직소이다. 당시 천주교 박해의 험한 파도가 자신과 형제들에게 미칠 것임을 예견한 것이다. 형 약전이 잡혀가자 자신도 관직을 떠난다. 눈물을 머금고 올린 상소이다.
둘째는 18년 귀양살이 끝에 마재로 돌아와 부모님 묘소를 찾은 감회를 읊은 글로 진한 효심이 배어있다.
마지막은 귀양지에서 어린 딸이 보고 싶어 지은 글이다. 단오날을 맞아 옥 같은 살결 위에 녹의홍상으로 단장하고 창포를 머리에 꽂은 어린 딸을 연상하는 아비의 마음을 실었다
아들에게 쓴 편지이다. 다산은 아들에게 여러 통의 편지를 썼는데 이 편지는 학문의 방법을 말한 중요한 내용이다. 먼저 경전을 배워 밑바탕을 다진 후에 다음으로 고금의 역사를 읽어 정치의 득실과 치세와 난세의 이유를 고찰하고, 학문을 하되 실용의 학문 곧 실학을 할 것을 권면했다.
수령의 책무에 대해 쓴 글로서 수령이 백성을 위해 있는가? 백성이 수령을 위해 있는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백성이 곡식과 옷감을 내어 수령을 섬기고 말과 수레와 하인들을 내어 수령을 맞이하고 보내며 피와 기름과 골수를 다 짜내어 수령을 살찌우고 있으니 백성은 수령을 위하여 생겨난 것인가? 아니다. 수령이 백성을 위해 있는 것이다.
▲거중기, 홍이포
거중기(擧重機)가 눈길을 끈다. 1792년 정조의 명에 따라 정약용이 수원 화성(華城)을 쌓을 때 만든 운반도구로, 역학적인 원리를 이용하여 밧줄과 활차(滑車, 도르래)로무거운 물체를 들어올리는 데 사용되었다. 원래 독일선교사 슈레크가 저술한 《기기도설(奇器圖說)》을 보고 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녹로(轆轤) 역시 이 원리로 만든 일종의 크레인인데 다들 실학정신에 바탕을 둔 기계로써 백성의 노고를 덜어주고자 한 다산의 마음이 담겨있다.
홍이포(紅夷砲)는 호16세기 네델란드 인에 의해 중국에 전해진 서양대포이다. 붉은 오랑캐란 바로 네델란드 인을 말한다. 네델란드를 홀랜드라고도 하여 홍이(紅夷)라고 표현했다는 설도 있다. 인조 때 정두원(鄭斗源)이 청나라에 갔다가 선교사로부터 얻어 왔다고 한다.
벌써 6시가 넘었다. 아직 가는 길에 양근 성지에 마지막으로 들러야 한다. 하지만 가는 데만 30-40분이 걸린다. 하절기라 낮이 길어 순례야 가능한 시간이지만 성지 사무실이 문을 닫기 때문에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6시 40분 경에 성지 입구에 도착하니 문은 닫혀 있었다. 연락처가 있기에 전화를 했더니 퇴근 후라 어쩔 수 없다고 한다. 시간 관리를 잘못한 우리의 불찰이기에 누구를 탓할 입장도 아니다. 그래서 정문에서 바라보이는 성당 건물만 한 장 찍고 돌아섰다.
지금 출발해도 경주에는 10시가 넘어야 도착한다. 그런데 저녁식사도 해야 하니 더 늦어진다, 남한강 도로변에 있는 매운탕 집에 들어가서 식사를 하고 빗방울이 더러 떨어지는 속에 어둠을 뚫고 내려왔다. 여주 이포 보에서 휴식.
무엇보다 이번 순례에 차량 봉사를 해주신 김 라파엘님께 너무나 많은 수고를 끼쳐 죄송한 마음과 함께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함께 한 일행은 말할 것도 없다. (김요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