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59. 서역남도 - 니야(民豊) 체르첸(且末)
구도승 목숨 앗았던 모래폭풍 만나다
|
<타클라마칸 가로지른 사막공로> |
사진설명: 유전때문에 새로 만든 도로로 잠시나마 편히 갈수 있었다. 모래가 넘어오지 못하게 도로 가장자리에 짚으로 엮어 놓았다. |
“호탄에 불교는 없다”는 위구르족 안내인 알리씨 말에 답답해진 가슴을 안고, 호탄을 떠나 니야(民豊)로 출발했다. 그 때가 2002년 9월16일. 현장스님의 〈대당서역기〉에 나오는 ‘불교적 호탄’을 상상하고 왔는데 - 이슬람화 된 것을 모르지는 않았지만 - 막상 본 호탄은 ‘그 호탄’이 아니었다. 쓰라린 가슴만 쓰다듬으며 백옥강 다리를 넘었다. 옥을 찾아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차창(車窓) 밖으로 보였다. “저들의 선조들은 불교를 믿었지만, 저들은 불교를 모르겠지”하는 생각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그렇게 호탄을 뒤로 한 채, 차는 달리고 또 달렸다. 호탄을 떠난 지 1시간 쯤 되니 글자 그대로 사방에 아무것도 없고, 오직 ‘사막의 모래’와 ‘황량한 대지’만 보였다. “밖은 지금 50도를 넘었다”며 “계란을 삶을 수 있는 온도”라고 한족(漢族) 운전사 주지휘(朱志輝)씨가 말했다.
잠깐 창문을 열고 손을 내밀었다. 뜨거운 기운이 그대로 손바닥에 느껴졌다. 마치 불에 댄 사람처럼 얼른 손을 오므렸다. 창을 닫고 모래와 대지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각종 문명의 이기(利器)들이 발달한 오늘날도 이렇게 고생스러운데, 오직 걸어서, 아니면 낙타를 타고 황량한 사막과 대지를 건너야 했던 그 옛날엔 어떠했을까. 구도자들은 과연 어떻게 타림분지를 건너갔을까. 별의 별 생각이 다 스쳤다.
그 옛날 구도자들의 ‘사막 길’은 과연 어떠했을까. 법현스님(317~419. 399~412 인도순례)의 〈불국기〉부터 보자. “사하(沙河)에는 원귀(寃鬼)와 열풍(熱風)이 심해 이를 만나면 모두 죽고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한다. 위로는 나는 새 한 마리 없고, 아래로는 달리는 짐승도 없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망망하여 가야할 길을 찾지 못한다. 어디로 가야할지 알 수가 없고, 오직 언제 이 길을 가다 죽었는지 모를 사람의 해골(骸骨)만이 길을 가리키는 표지가 되어준다.” 얼마나 무섭고 힘들었으면, “죽은 사람의 해골만이 표지가 되어준다”고 했을까. 그 무섭고 험난한 길을 법현스님은 “율장이 부족함을 개탄하며, 천축에 가서 계율의 책을 구해오기 위해” 걸어갔다.
죽은 사람 해골이 길 표지판 역할
|
<니야에서 만난 포도장수 > |
당나라 현장스님(?~664. 629~645 인도순례) 또한 마찬가지 길을 ‘거의 죽을 뻔하며’ 지나갔다. 〈대당서역기〉의 기록. “앞선 여행객들의 흔적은 이내 지워져 버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방향을 잃고 정처 없이 헤맨다. 그들은 동물의 뼈를 표지판 삼아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물도 풀도 식물들도 보이지 않는 곳에 이따금 열풍만 휘몰아친다. 열풍이 일면 사람과 짐승들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그저 멍하니 넋을 잃고 바라볼 뿐이다. 가끔 열풍 속에서 울부짖고 애원하는 슬픈 비명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이 소리를 들은 나그네는 혼백이 빠진 것처럼 길을 잃고 더 이상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조차 알지 못한다. 모든 것이 악귀(惡鬼)와 마귀(魔鬼)들의 소행이다.”
고승들의 구도기(求道記)를 검토하는 사이 갑자기 차가 멈췄다. “펑크가 났다”고 운전사가 말했다. 순간 “사막의 악귀와 마귀들이 장난을 쳤나” 아니면 “사막이 내는 소리에, 사람의 혼이 빠지듯 자동차 타이어도 펑크가 나나”하는 생각이 스쳤다. 내려가 타이어를 보니, 표면에 자갈이 박혀있다. 비포장도로를 달리던 중, 뾰족한 돌이 바퀴에 박힌 것이다. “시속 140km로 달렸으니 그럴 만도 하다”고 여겨졌다. 호탄과 니야의 중간쯤 되는, 인적 없는 도로 변에 차를 세우고 타이어를 갈았다. 이따금 니야와 호탄을 왕래하는 버스와 짐을 가득 실은 화물차가 지나갔다. 그것뿐이었다. 말 그대로 하늘에도 땅에도 움직이는 동물의 그림자조차 없었다.
머리 위에 사정없이 꽂히는 햇볕을 견디기 힘들었다. 시원한 나무 그늘은 커녕, 풀 한포기 없었다. 머리와 얼굴에서 순식간에 흐르기 시작한 땀이 대지를 적셨고, 가슴에 고인 땀은 옷을 축축하게 만들었다. 짜증이 가슴 속에서 치밀어 올랐다. 그제서야 바퀴를 갈아 끼우는 주지휘씨를 도와야겠다고 생각됐다. 30분 만에 바퀴를 갈고 다시 달렸다. 끝없이 달렸다. 달리고 또 달렸다. 그래도 니야는 나타나지 않았다. 지도상에는 가까운데 막상 차를 타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저녁도 먹지 못하고 그렇게 달리기만 했다. 예상대로 사막의 밤은 무서웠다. 대지를 달궜던 열기가 식자, 기온 차로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급기야 회오리바람이 도로 주변에 휘몰아쳤다. 앞을 분간하기 힘들 만큼 먼지가 날리고, 헤드라이트를 최고도로 켜도 길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끙끙대며 달린지 6시간 만에 니야에 다 달았다. 호탄을 출발한 시간이 오후 4시30분, 니야에 도착한 시간이 저녁 10시30분이었다. 예약된 보서빈관(寶瑞賓館)을 찾았다. 이리 묻고, 저리 물어 겨우 찾아 들어가니 식당 영업이 이미 끝났다고 한다. 할 수없어 호텔 측이 준 빵과 커피로 요기했다.
“이제는 고된 길이 끝났겠지”하며 잠들었다. 다음날인 지난해 9월17일 화요일. 더 큰 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차를 수리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주지휘씨는 차를 몰고 수리 점으로 가고, 우리들은 하릴없이 시내를 돌아다녔다. 수리 점에 간 차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오늘은 차르클릭까지 가야 되는데…. 못 가는 것은 아닐까. 어제처럼 모래 폭풍에 휩쓸리면 큰일인데….” 별의별 생각이 다 뇌리를 스쳤다.
오후 1시가 되자 마침내 기다리던 차가 호텔에 왔다. “차 수리 점이 없어 겨우 수리했다”고 덧붙였다. 점심 먹는 것도 잊고 달렸다. “어제처럼 그런 모래 폭풍을 만나지 않아야 하는데….” 하는 생각뿐이었다. 니야에서 곧바로 차르클릭(若羌)으로 간 것이 아니었다. 민풍에서 쿠차까지 새로 난 도로인 사막공로(沙漠公路. 총길이 522km)를 탔다. 사막공로를 타고 달렸다. 정말 모래뿐이었다. 타클라마칸 사막 한 가운데를 차는 달렸다. ‘타클라마칸’은 본래 “한번 들어가면 다시는 나올 수 없다”는 뜻. 그런 사막 가운데를 지나갔다. 하늘은 우중충했고, 모래 먼지가 대지(大地)에 가득했다.
그렇게 달리길 300km, 거기서 다시 동쪽으로 꺾었다. 달리는데 오른쪽으로 유전(油田)이 보였다. 타클라마칸 사막을 중국이 포기 못하는 이유가 군사적 측면과 경제적 측면 때문인데, 막상 유전을 보니 새롭게 느껴졌다. 도로 가장자리엔 모래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짚을 열십자(十) 모양으로 엮어 모래 깊숙이 박아놓았다. 도로에서 사막으로 5m 거리까지 ‘열십자 짚’을 박은 다음, 나무를 심어 놓았다. 그 때문인지 도로엔 모래가 쌓여있지 않았다.
공포의 타클라마칸 모래폭풍 카라브란
|
<체르첸 거리> |
사진설명: 말이 지나다니고 간판 역시 서역주점. 서역임이 실감난다 |
그런데 엄청난 일이 그 도로에서 생겼다. 한참 달리는데 갑자기 온 세상이 깜깜해지더니 엄청난 모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이게 뭐지. 왜 이래요” “카라브란인 것 같은데. 차를 길 옆 모래 언덕에 정차해야겠습니다.” “카라브란이 뭔데요?”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부는 검은 모래 폭풍입니다.” 순간 숨이 탁 막혔다. 카라브란의 위험은 책에서 여러 번 읽은 적이 있다. 타클라마칸 사막 일대에선 카라브란의 무서움을 보여주는 노래까지 있다. 그 바람을 직접 마주치게 되다니. 앞이 캄캄했다.
“카라브란이여! 카라브란!/ 아아, 무서운 카라브란/
내 고향을 뺏어버리고/ 내 고향을 매몰시키고/ 내 처자식을 흩어지게 했네.
흑풍(黑風)이여! 흑풍/ 내 과수원에/ 모래가 산을 이루었네./
가련하고, 가련하도다!/ 얼마나 괴롭고 심란한가.
카라브란이여! 카라브란!/ 일망무제한 사막이/ 천지를 매몰해 버렸네./
내 아름다운 고향이여/ 다시 볼 수 없구나.”
그 카라브란을 우리가 만난 것이다. 차를 사구(砂丘) 옆에 대고 아무 탈 없이 지나가기만 기다렸다. 온 세상을 암흑천지로 만들고, 우리를 겁박하던 카라브란은 1시간 만에 지나갔다. 어느 정도 모래가 가라앉자 차는 다시 달렸다. 차 안은 물론이고, 머리에도, 신발 안에도 온통 모래투성이였다. 우회전해 200km 정도 가니 체르첸(且末)이 나왔다. 마치 지옥에 떨어졌다 살아온 기분이었다. 호텔 앞에 정차하고 따뜻한 차와 커피를 마셨다. 따뜻한 한 잔의 차가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다. 그때 그 맛은 카라브란을 겪은 사람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삶도 행복도 별게 아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한 잔의 차, 커피 한 잔의 소중함을 새삼 깨달았다.
털고 일어나 다시 달렸다. 차르클릭까지 가야만 되는 일정 때문이었다. 체르첸에서 차르클릭(若羌)까지는 350km. 지나온 만큼 가야만 했다. 정신없이 달렸다. 비포장도로를 몇 시간 달렸는지 모른다. “죽자 살자 달렸다”는 표현이 오히려 맞을 정도로 달렸다. 사막의 밤을 보는 것도 잠시. 이상한 바람이 불었다. 요상한 소리를 내며, 현장스님이 말한 “울부짖고 애원하는 듯한” 바람이, 차를 따라 다니며 불었다. 귀를 막고 싶을 정도였다. 운전사는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정신없이 달린 끝에 차르클릭에 도착했다. 그 때 시간이 밤 11시30분. 니야에서 오후 1시에 떠났으니, 10시간30분 만에 목적지에 온 셈. 차에서 내리니 온 몸에 힘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차르클릭의 첫 밤을 그렇게 맞았다.
중국 = 조병활 기자. 사진 김형주 기자
[출처 : 불교신문]
☞'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목차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