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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자연생태가 어우러진 길... 밀양 아리랑길
밀양 옛이야기 간직하고 현대인과 만난다
영남알프스라 불리는 산들로 둘러싸인 밀양은 강과 기름지고 넓은 들이 많아 밀양의 최초 이름으로 추정되는 미리미동국 때부터 살기 좋은 곳으로 유명하다. 천혜의 자연경관을 이어온 밀양. '영남대로 밀양 옛길' 걷기에 이어 '밀양아리랑길'이 활짝 열렸다.
세 갈래로 이루어진 '밀양아리랑길'은 지난해에 조성됐다. 옛길을 걸으며 귀를 기울여보면 태곳적 밀양 이야기가 들리는 듯하다. 강과 숲, 산이 어우러진 길 위에서 밀양 이야기와 문화유적지를 만나볼 수 있는 여정이다. 오늘은 3코스를 걸어보기로 하고 향토사학자 손흥수 선생과 오전 10시에 나섰다. 글 황해령 수필가·자유기고가 사진 밀양시 제공
큰 비 올 때 둘러가던 애환과 추억의 아리랑길
금시당 수변 시작 길에 있는 용두보에서 바위와 어우러진 수려한 강 풍광과 맞닥뜨렸다. 1906년 당시 최신 토목 기술의 효시였던 수리시설이다. 굴곡을 그리며 좁다랗게 옛길이 이어진다. 나무와 꽃이 주는 은은한 향 따라 자연과 호흡을 맞추며 걷는다. 밭을 일군 석축 흔적들이 곳곳에 보인다. 좁고 비탈진 이곳에다 밭을 일구었다. 섶 다리와 나룻배로 강을 건너던 시절에 큰비가 내리면 이 길로 염소와 소를 몰고 장에 갔다. 단장면이 고향인 손흥수 선생도 책 보따리를 어깨에 두르고 이 길을 걸어 학교에 다녔다고 한다. 참외나 수박을 이고 가곡동 장에 팔아 석유를 사서 돌아가던 애환과 추억의 아리랑 길이다.
아카시아와 하얀 은사시나무가 숲을 이루고 신우대가 많이 자라 있다. 뿌리 번식이 강한 이런 나무들이 바위와 어우러져 이 비탈길을 오늘날까지 지켜주었으리라.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가야와 신라의 접경 지역이었던 밀양은 10여 개의 산성이 있을 정도로 전투가 잦았다. 화살을 만들던 신우대가 많은 것도 이와 연관이 있을 것이다. 아이를 동반한 가족이 있는가 하면, 혼자 걷는 사람들의 모습도 자주 눈에 띈다.
'옛 선비 별장' 금시당에서 조경과 정자 감상
시야가 트여오고 적송들이 선비의 기개와도 같이 등장하더니 금시당이 나타난다. 금시당 선생의 16대손인 이용정 선생이 작업복 차림으로 정원을 손질하다 반겨주신다. 마침 손흥수 선생과는 친구 사이라 금시당에 앉아 다과를 들며 잠시 이야기를 나눈다. 금시당 선생이 심었다는 460년 수령의 은행나무와 백송, 매화, 단풍나무의 조경이 정자와 어우러져 고궁에 든 느낌이다.
금시당은 조선조 명종 때 좌승지를 지낸 금시당 이광진 선생이 학문을 닦고 수양하기 위해 1566년 창건한 *별업이다. 밀양의 여주 이씨가 있기까지 공이 컸던 백곡 이지운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지었다는 백곡재가 정원 너머로 보인다.
금시당 선생이 말년에 병환으로 거동을 못하게 됐을 때 학문과 효행으로 이름난 아들 이경홍 선생이 아버지를 업고 밀양의 명소를 찾아다녔다고 한다. 그리고 아버지를 위로하기 위해 밀양의 주요 명소 12곳을 그렸는데, 바로 밀양 12경도다. 임란 전 그림이라 밀양의 옛 모습을 재현하는 자료로 사료적 가치가 높다. 그동안 집안에서 소중하게 보관해오다 1995년 이용정 선생이 기탁해서 밀양시립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영화 '똥개' 촬영지 용평터널 지나 월연정 시작
활성교를 건너 손씨 재실인 용호정을 지나자 튼튼한 축대가 이어진다. 일제강점기에 단선 철도가 지나던 길이다. 강 쪽으로 잘 보면 장선나루터 소로를 볼 수 있다. 용호강변 나무데크 길을 걸어 용평터널에 닿았다. 정우성이 나오는 영화 '똥개'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용평터널은 야경이 아름답기로 유명한데 터널로 조금 들어가면 뚫린 천장에 하늘 숲 정원이 볼만하다. 터널 입구에서 월연정이 시작된다.
월연정은 한림학사를 지낸 월연 이태 선생이 기묘사화를 예견하여 관직을 버리고 고향에 내려와 1520년에 세운 정사(亭舍)다. 담양의 소쇄원과 비교되는 월연정은 조선시대 전기의 대표적인 전통 정원의 하나로 바위에 붙어 자란 백송, 오죽과 같은 희귀한 조경수들로 기품이 서려 있다. 절벽 바위에 돌을 쌓아 지대를 높여 사방 돌아가며 마루를 놓아 월연대를 세우고, 계곡을 사이에 두고 건너다보이는 곳에는 쌍경당 영역을 두었다. 정자들을 받치고 있는 석축의 오묘한 미에 심취한 후에야 월연정 일원을 제대로 보았다고 할 수 있다.
밀양의 강은 엉기기를 반복하는 '아리랑강'
밀양의 강은 시작과 끝이 엉겼다가 갈라지고, 또 엉기기를 반복하며 흐른다. 그래서 응천(凝川)강이라 했다. '아리랑강'이 있다면 이 같지 않았을까. 강물과 달이 함께 맑은 것이 마치 거울 같다는 쌍경당에 앉아본다. 담을 터고 북천과 동천이 엉겨 만나 이루는 호수를 정원으로 끌어놓은 듯하다. 쌍경당의 멋은 무엇보다 강 언덕에 바위가 산재한 지형을 그대로 살려 건물을 지었다는 것이다. 작은 돌을 쌓아 마당과 정원을 내고 돌계단을 두어 오르내리며 걷는 멋을 살려놓았다.
세상이 혼탁하면 청사(淸士)를 볼 수 있다고 했던가. 미리 깨끗한 정자를 정하고 마음을 다스렸으니, 이곳은 선현의 지혜가 깃든 곳이기도 하다. 깊숙이 대숲을 열고 들어와 낮은 곳에 깃든 정자는 그윽이 고요해서 속세를 씻기에는 이만한 데가 없었을 것이다. 선생은 이곳에서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힘썼고 월연집을 남겼다. 관객 1200만명을 끌어들인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에서 광해군도 월연정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장면을 연출했다. 경남 유형문화재 제243호인 월연정 일원은 현재 명승 제87호로 지정돼 있고, 밀양 8경에도 들어있다.
소나무 숲 지나 추화산성에서 밀양시내 조망
월연정 뒤로 '밀양아리랑길'이 나 있다. 오늘날을 손꼽아 기다린 것 같은 소나무가 호위병처럼 둘러싼다. 쭉쭉 뻗은 소나무 사이를 걸으면 절로 어깨가 펴지고 당당해진다. 밀양아리랑 고갯길이다. 밀양아리랑은 우리나라 3대 아리랑 중에서도 세마치장단에 신명이 많은 노래다. 서민의 삶 깊숙이 자리 잡고 흘러온 밀양아리랑. 아리랑이 유네스코에 등재된 후 밀양아리랑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밀양아리랑대축제, 밀양아리랑보존회, 밀양아리랑길, 밀양아리랑마라톤대회, 밀양아리랑가요제와 같은 명칭이 이를 잘 말해준다.
월연정에서 25분간 산으로 올라가니 추화산성이다. 1430m 둘레의 추화산성은 해발 243m인 추화산의 8부 능선쯤에 있다. 삼국시대 초기에 축조된 성으로 경남 기념물 제94호다. 재현해 놓은 산성에 올랐다. '아랑전설'이 서린 영남루 아동산이 밀양강 위에 떠있는 듯이 앉아 있다. 엉기며 흐르는 밀양강이 만들어내는 밀양시내 '물돌이동'도 제 모습을 드러내 보인다.
잘 보존되어온 석축 흔적들을 살피면서 시내를 조망하고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삼사백 미터쯤 걸어 북으로 꺾어지는 지점에 들어서면 길 가운데 일렬로 박혀있는 성의 흔적이 나온다. 30분 정도 성의 윤곽을 따라 한 바퀴 돌며 솔향과 흙 내음을 맡으며 걸을 수 있는 이런 산성길이, 밀양아리랑길이 있다는 것이 기쁘고 감사하다.
'이야기가 있는 아리랑길' 박물관에서 마무리
손흥수 선생과 동행할 수 있어서 '이야기가 있는 밀양아리랑길' 걷기가 되었다. 선생은 지금도 걸어서 유적을 찾아다니며 모르면 묻고 배우곤 하신다. 이 시대 마지막 걸어 다니시는 향토사학자다. 길 표지판과 안내문이 곳곳에 설치되어 있어 옛길을 느끼며 편안하게 걷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봉수대까지 구경하고 밀양대공원 표지판을 따라 내려오는 오솔길도 아주 쾌적하다. 대공원 입구에서 무궁화동산으로 내려간다. 밀양대공원은 큰골 유적지와 6.25전쟁과 관련한 자료가 다양하게 전시되어 있어 아이들을 데리고 많이 찾는 곳이다. 넓은 부지에 조경이 아름다워 공원에서 충분히 휴식한 다음 바로 인접한 시립박물관을 찾았다.
밀양시립박물관은 경남 도내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공립박물관이다. 밀양독립운동기념관이 함께 자리하고 있어 밀양 이야기를 잘 마무리 지을 수 있다. *별업 원래 사는 집 외에 주로 휴양을 위해 주변 경관이 좋은 곳에 따로 마련한 집.
밀양아리랑길은
'밀양아리랑길'은 밀양시가 시민건강과 관광자원 개발을 위해 조성한 길이다. 밀양 도심에서 시작해 근교로 이어지는 이 길은 주변에 역사유적지와 자연생태 및 문화자원이 어우러져 있어 체험과 휴양을 동시에 즐길 수 있다. 세 갈래로 조성된 이 길은 코스마다 각각의 특징을 갖고 밀양의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1코스 밀양관아에서 출발해 오리배선착장-조각공원-삼문송림-야외공연장-밀양교-아랑각-무봉사-박시춘생가-천진궁-영남루로 이어지는 도심형 구간이다. 밀양의 대표적인 역사와 문화를 느끼며 걷는 코스다. 6.2㎞에 2시간 정도 소요된다. 2코스 밀양교에서 시작해 손씨고가-박물관-봉수대-추화산성-충혼탑-대공원을 돌아보는 산지형이다. 간단한 등산을 겸한 트레킹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세 구간 중 길이가 가장 짧은 4.2㎞에 2시간 정도 걸린다.
3코스 용두목을 시발점으로 금시당 수변길-금시당-월연정-추화산성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밀양강을 따라 걷다가 옛 선비들의 별장과 정원을 만나고 소나무 숲의 맑은 공기를 마시며 걸을 수 있다. 길이는 5.6㎞이나 산지 구간이 있는데다 볼거리가 많아 3시간 정도 잡아야 한다.
밀양에 가면 이런 곳도 있다
01 우리나라 3대 누각 '영남루'
진주 촉석루, 평양 부벽루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누각인 영남루는 야경이 밀양 8경에 들 만큼 밀양의 대표적인 관광명소.
사방이 탁 트인 누각 난간에 서서 경부선 철교가 시원하게 지나가는 용두산과 마암산·종남산 앞으로 펼쳐 보이는 풍광이 절경이다. 경내에는 단군을 비롯한 창국 8왕조의 위패를 모신 천진궁이 자리한다. 문을 나서자마자 밀양아리랑 비석에서 밀양아리랑이 울려 퍼진다. 옆에 재현해 놓은 박시춘 작곡가의 생가에서는 선생의 주옥같은 명곡을 감상하며 돌아볼 수 있다. 아리랑전설이 잠들어 있는 아랑각과 아랑비석은 강가를 향하고 있어 애잔함을 더해준다. 신민아·이준기가 열연한 드라마 '아랑사또전'의 배경이기도 하다.
천년 고찰 무봉사에 보물 제493호 석조여래좌상을 만나보고, 아동산 정상을 향해 오르다 밀양이 고향인 사명대사 동상에 잠시 머문다. 마지막으로 밀양읍성을 밟게 되는데, 읍성 정상인 무봉대에 서면 읍성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02 케이블카와 함께 새롭게 각광받는 '얼음골'
밀양의 3대 신비에 드는 얼음골은 천연기념물 제224호이다. 오랜 옛날부터 시례빙곡이라 불리던 이곳은 재약산 북쪽 중턱 해발 600~750m의 계곡에 1만㎡ 정도의 돌밭이다. 삼복더위에 바위 사이사이 얼음이 얼고, 처서가 되면 냉기가 점점 줄어든다. 오히려 겨울에는 얼음 대신 뱀고사리나 이끼를 볼 수 있는 풍경이 연출된다. 이맘때면 차가운 냉기와 함께 시원한 바람이 불어 계곡을 따라 발을 담근 피서객들로 진풍경을 이룬다. 계곡물은 발을 담그고 2분 이상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차다.
최근에는 케이블카가 운행하면서 얼음골은 새롭게 각광을 받고 있다. 얼음골 케이블카는 선로가 1751m로 국내 최장거리 케이블카다. 타고 오르내리는 동안 얼음골 계곡의 비경과 스릴을 맛볼 수 있다. 상부 승강장에 내리면 '하늘정원길' 데크로드가 기다린다. 280m 산책길을 15분 정도 걸으며 영남알프스 양산과 울산 쪽 산들을 두루 조망할 수 있다. 고도가 높다보니 기온 차이로 늦게 찾아온 계절을 체험하는 일도 큰 묘미라 할 것이다.
03 좁은 바위사이에서 물줄기 뿜는 '가마볼 협곡'
얼음골에서 왼쪽으로 난 길을 조금만 오르면 가마볼 협곡이 나온다. 비 온 후 물이 많을 때 찾으면 더 좋다. 가마솥을 걸 수 있을 정도로 골짜기가 좁다고 해서 가마볼 협곡이라 부른다. 암수 가마볼을 찾아 비교해보는 일도 재미있고, 하트 모양의 기암을 감상하는 일도 즐겁다.
돌이끼와 녹음이 짙게 드리워진 기암에서 뿜어져 나오는 폭포 물줄기는 한번 다녀가면 여름 내내 생각만으로도 피서가 될 정도로 인상적이다.
04 바위 하나가 계곡을 이룬 '오천평반석'
호박소 가기 전 계곡다리를 건너 호젓한 오솔길을 20여 분쯤 걸어 올라가면 만날 수 있다. 해발 1240m 가지산에서 발원한 차가운 물이 이곳에 오면 급하게 쓸다시피 흘러내려 자잘한 폭포수를 수없이 이룬다. 바위 하나가 계곡 전체를 덮고 있는데, 그 크기가 넓다고 해서 오천평반석이다. 주변 숲의 전경이 아름다운데다 얕고 깨끗한 물이 평평한 바위를 덮으며 흐르고 있어 어린아이를 동반한 가족 물놀이에 안성맞춤이다.
05 조여정 주연 영화 '방자전'에 등장하는 '호박소'
얼음골에서 4km쯤 북쪽에 있는 호박소는 밀양 8경 중 하나다. 조여정이 주연한 영화 '방자전'에 등장하는 호박소를 보고 관광객들이 일부러 찾아와서는 비경 앞에서 감탄을 금치 못하는 명소다. 계곡물이 백운산 자락의 백옥 같은 화강암에 폭포와 소를 만들며 미끄러져 내려오는 모양이 장관을 이룬다. 명주실 한 타래를 풀어 넣어도 끝이 닿지 않는다는 짙푸른 소는 마치 절구(臼)의 호박같이 생겼다 해서 호박소 또는 구연(臼淵)이라 한다. 가뭄이 계속될 때는 기우제를 지내던 기우소 역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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