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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스터즈는 이난영과 김해송의 세 자매가 어린시절인 1953년에 결성한 대한민국의 여성 보컬그룹이다.[1][2]
김해송과 이난영의 두 딸(김숙자ㆍ김애자)과 이난영의 오빠 작곡가 이봉룡의 딸(이민자)로 구성된 김시스터즈는 악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며 노래와 함께 춤까지 췄는데 미8군 무대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던 김시스터즈는 1959년 아시아 걸그룹으론 처음으로 미국에 진출했다고 당시 기사가 전하고 있다. 참고로 최초 미국진출 한국 여가수는 옥두옥이다.[3]
김시스터즈는 1967년 50만 달러를 세금으로 내 라스베이거스에서 유명한 고액 납세자였다. 1인당 국민소득이 2,076달러였던 시절 김시스터즈가 스타더스트 호텔에서 받은 주급은 무려 1만 5,000달러였다고 한다.[2]
이렇게 미국에서 활동하던 김시스터즈의 멤버 김애자는 1987년 4월 18일 라스베이가스 메모리얼병원에서 폐암으로 숨졌다.
2015년 김대현 감독의 다큐멘터리 "다방의 푸른꿈 :Try To Remeber"이 2015년 제천국제음악영화제 개막작과 제12회 EBS다큐멘터리페스티발에서 상영되었는데 김시스터즈에 관한 다큐멘터리로서 이난영에 의해 김시스터즈가 만들어진 배경과 연습, 음악가 집안에 따른 천부적인 음악적인 감성,공연감, 미국 라스베가스 등을 건너가는 과정, 1년만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된 과정을 김(이)민자의 이야기로 펼쳐지며 김숙자의 인터뷰 등 주변 인물들의 다양한 증언으로 김시스터즈의 활약상을 영화전반에 보여준다.
한국 최초의 걸그룹은 1939년 결성된 저고리시스터로 알려지면서 저고리시스터부터 소녀시대까지 한국 걸그룹 역사는 73년째 이어지고 있다고 전한다. 저고리시스터는 '목포의 눈물'을 불렀던 이난영, '오빠는 풍각쟁이야'로 유명한 박향림, '연락선은 떠난다'의 장세정, 민요가수 이화자로 구성된 4인조 걸그룹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6·25전쟁의 와중에 미 8군 무대에 서다 1950년대 말 미국 라스베이거스로 진출했던 3인조 여성 보컬 김시스터즈나 1960~80년대 지구 마을을 돌며 한국의 선율과 가락을 선사한 선명회 합창단은 한류(韓流)의 원조로 꼽을 수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2]
한국 최초의 걸그룹은 1939년 결성된 저고리시스터로 알려지면서 저고리시스터부터 소녀시대까지 한국 걸그룹 역사는 73년째 이어지고 있다고 전한다. 저고리시스터는 '목포의 눈물'을 불렀던 이난영, '오빠는 풍각쟁이야'로 유명한 박향림, '연락선은 떠난다'의 장세정, 민요가수 이화자로 구성된 4인조 걸그룹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6·25전쟁의 와중에 미 8군 무대에 서다 1950년대 말 미국 라스베이거스로 진출했던 3인조 여성 보컬 김시스터즈나 1960~80년대 지구 마을을 돌며 한국의 선율과 가락을 선사한 선명회 합창단은 한류(韓流)의 원조로 꼽을 수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김시스터즈는 김해송과 이난영의 두 딸(김숙자ㆍ김애자)과 이난영의 오빠 작곡가 이봉룡의 딸(이민자)로 구성된 김시스터즈는 악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며 노래와 함께 춤까지 췄는데 미8군 무대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던 김시스터즈는 1959년 아시아 걸그룹으론 처음으로 미국에 진출했다고 당시 기사가 전하고 있다. 참고로 최초 미국진출 한국 여가수는 옥두옥이다.
김시스터즈는 1967년 50만 달러를 세금으로 내 라스베이거스에서 유명한 고액 납세자였다. 1인당 국민소득이 2,076달러였던 시절 김시스터즈가 스타더스트 호텔에서 받은 주급은 무려 1만 5,000달러였다고 한다. 이렇게 미국에서 활동하던 김시스터즈의 멤버 김애자는 1987년 4월 18일 라스베이가스 메모리얼병원에서 폐암으로 숨졌다.
2015년 김대현 감독의 다큐멘터리 "다방의 푸른꿈 :Try To Remeber"이 2015년 제천국제음악영화제 개막작과 제12회 EBS다큐멘터리페스티발에서 상영되었는데 김시스터즈에 관한 다큐멘터리로서 이난영에 의해 김시스터즈가 만들어진 배경과 연습, 음악가 집안에 따른 천부적인 음악적인 감성,공연감, 미국 라스베가스 등을 건너가는 과정, 1년만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된 과정을 김(이)민자의 이야기로 펼쳐지며 김숙자의 인터뷰 등 주변 인물들의 다양한 증언으로 김시스터즈의 활약상을 영화전반에 보여준다.
이난영과 김시스터즈
한국가요계에서 실력파 여가수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이 아마도 이미자, 페티킴, 김추자, 현미, 정훈희 정도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보다 전에 한국 최고의 실력파이면서 미모까지 갖춘 불세출의 여가수라고 하면 이난영씨가 아닐까... 불멸의 명곡 "목포의 눈물"을 불렀던 이난영....
싸이를 미국에 한국을 가장 효과적으로 알린 인물이라고 하지만 이미 1960년대,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에 전쟁으로 못살고 못먹고 사는 후진국 한국으로만 알던 우리나라를 싸이에 필적할 만큼 가장 효과적이고 아름답게 알려준 가수들이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김시스터즈.
요즘 싸이만큼이나 미국을 뒤흔들었던 원조 미국한류를 말하라면 김시스터즈의 미국진출. 김시터즈는 1960년대 미국에서 악기를 다루며 댄스까지 겸비한 새로운 "인스트루먼트 댄싱 그룹" 장르를 미국에 최초로 도입한 당시엔 엄청난 가수들이었죠. 미국 전역이 떠들석 했고 각종 TV쇼에선 김시스터즈를 모시기 위해서 혈안이 되었다고 하니...가히 그 인기가 싸이를 찌를정도. 1년치 공연예약이 이미 완료될 정도. 싸이 보다 어떤 면에서 더 위대한 점이라면 싸이는 반짝 1 년간 공전의 히트를 쳤지만 김시스터즈는 무려 10년간 그랬다하니..
그런데 이러한 김시스터즈의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고 기획하고 미국진출을 추진했던 이가 바로 김시스터즈의 어머니 이난영이었으니..
(* 김시스터즈가 다룰줄 아는 악기가 20 여개였다고 함. 기타, 올갠, 피아노, 첼로, 바이로린, 가야금, 거문고, 만도린, 드럼, 트럼펫, 트럼본, 섹스폰, .. 등. 이는 어머니 이난영씨가 남들과 똑같이 하면 성공하기 어려우니 다룰수 있는 악기는 모두 연습하여서 사람들이 지루하지 않게 해야 한다는 기획에 의해서 조카딸과 딸들이 악기를 배우기 시작했다함.)
미국에서 김시스터즈와 그의 어머니가 함께 노래를 부르는 매우 귀한 동영상. 맨 왼쪽은 오빠 딸 (이민자. 유럽인과 결혼후 유럽거주)이고 오른 쪽 둘이 이난영의 두 딸들 (김애자 (87년 폐암으로사망), 김숙자 (현재 75세. 미국인과 결혼후 라스베가스 거주). 1963년 미국의 최고 인기 TV 쇼인 "버나드쇼"에 출연. 1963년 김시스터즈가 어머니와 함께 출연한 후 정확히 1 년 후에 버드나쇼는 비틀즈를 미국에 최초로 소개해서 세계적인 락 밴드로 성공시키는데 일등 주역이다.
김시스터즈는 라스베가스 무대에서 성공한 뒤 어머니를 초청해서 8-9개월 함께 생활했고, 이난영의 비자를 마련하는 데에도 도움을 준 (당시엔 미국비자는 외교관 아니면 발행을 거의 안해주던 시절) 에드 설리번이 이들을 자기 쇼에 출연시켰다(김시스터즈는 에드 설리번 쇼에 무려 22번이나 출연할 만큼 단골 게스트였다).
영상에서 들뜬 표정의 김시스터즈는 즉흥적 노래 가사로 그들의 어머니 이난영을 이렇게 소개한다. 여러분들께 소개합니다. "한국에서 온 실력있고 매력적인 우리 어머니를요 그녀는 한국 무대에서 늘 정상에 있었답니다." "우리가 아는 모든 것을 어머니가 가르쳐주었지요."
이들의 소개말에는 과장이나 거짓이 없다. 김시스터즈는 사실상 이난영(그리고 그녀가 일제시기 장세정 등과 함께 결성했던 한국 최초의 걸그룹‘저고리 시스터즈’)의 복제품이다. 이난영은 그 해 가을에 한국에 돌아왔고, 다시 아들 셋을 엮어 김브라더스(Kim Brothers)를 조직한 뒤 미국으로 보냈다.
그녀는 미국에서 8개월간 딸들과 함께 있었으나 향수병과 한국음식이 그리워서 병이 생겨 미국에서 귀국후 2년 후 1965년 31절 기념공연을 마친후 회현동의 아무도 없는 집에서 홀로 쓸쓸히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었다. (*참고: 김시스터즈는 1959년 아시아 걸그룹으론 처음으로 미국에 진출했다고 당시 기사가 전하고 있다. 김시스터즈는 1967년 50만 달러를 세금으로 내 라스베이거스에서 유명한 고액 납세자였다. 1인당 국민소득이 2,076달러였던 시절 김시스터즈가 스타더스트 호텔에서 받은 주급은 무려 1만 5,000달러였다고 하니 당시에 미국에서 김시스터즈의 인기는 미국내 당대의 최고였고 어느정도였는지 가늠할수가 있을 것이다.)
닐리리아를 이렇게 감칠나게 편곡을 한 1950년 후반의 김시스터즈. 정통 가요만이 인정을 받던 당시에 이런 파격적인 편곡은 이난영의 머리에서 나왔다하니..
1936년 일제 강점기 때 최초로 녹음된 "목포의 눈물". (이난영 옆이 신카나리아. 뒷줄 왼쪽에서 두번째가 재혼한 남인수씨). 흥얼 흥얼 비음을 넣은 창법이 당시엔 파격적이었다고 하니.. 숨겨진 이야기 하나: 1939년에 발표된 이 '다방의 푸른 꿈'이라는 곡은 한국 최초의 블루스 곡이다. 남편인 김해송씨가 이난영씨를 위해 작곡해준 곡이기도 하다. 옛날 노래치고는 정말 세련되었다.
(*참고: 이난영의 남편 김해송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서 음악공부를 하고온 당시엔 보기드문 엘리트였고 천재 작곡가였음. 일제시대 때 수 많은 명곡을 만들어냈으며 고정관념을 깨는 파격적인 새로운 쟝르를 만들어낸 유명한 작곡가였음. 그러나 625전쟁 때 북한군이 납치해가서 지금도 생사를 모름. 북한군 위문공연을 강요했으나 거절해서 현장에서 총살당했다는 설도 있음.)
1939년 조선악극단 일본 순회공연 당시 주요 여성 멤버들의 도쿄 왕궁 앞 기념 촬영 (왼쪽부터 홍청자, 왕숙낭, 박향림, 이난영, 한 사람 건너 김능자, 장세정, 이화자). (* 맨오른쪽 이화자는 인천 기생출신으로 노래를 잘해서 손님이 발탁해서 대성한 카수. 부모님도 출생도 심지어는 죽은 때도 모름.)
이난영
본명은 옥례(玉禮). 목포공립보통학교(지금의 목포북교초등학교)를 4학년까지 다니다가 집안이 어려워서 중도에 자퇴했다. 어머니와 함께 제주도에서 생활하던 중 극장을 경영하는 주인집 아이를 돌보면서 노래를 흥얼거렸는데, 집주인이 그 노랫소리를 듣고 추천하여 순회공연 중이던 삼천가극단의 막간가수로 서게 되었다.
그후 무대에서 노래 실력을 인정받아 극단을 따라 나섰다가 1932년 목포에서 태양극단에 입단, 단역가수로 노래를 불렀다. 이난영이라는 예명은 이 무렵 얻게 되었다.
극단이 일본에서 순회공연을 할 때 작사가 강사랑(姜史郎)이 이난영의 재질을 발견하여 오케 레코드 사장 이철(李哲)에게 추천하여, 오케 레코드 전속가수로 〈향수 鄕愁〉·〈종로 鐘路〉를 취입하며 정식으로 데뷔하였다.
1933년 11월 〈불사조〉·〈고적 孤寂〉으로 인기를 얻기 시작했고, 1934년 2월에 발표한 〈봄맞이〉로 정상급 가수로 부상하였다. 그해 가사 모집에서 입선된 문일석(文一石)의 작품에 손목인이 곡을 붙인 〈목포의 눈물〉을 불러 '가왕'(歌王)이라 불릴 만큼 높은 인기를 얻게 되었다,
비음이 섞인 경쾌한 창법이 특징으로, 트로트와 신민요를 비롯하여 다양한 스타일의 음악에 모두 능했다. 1936년에는 오카 란코[岡蘭子]라는 이름으로 일본에서 음반을 발표한 데 이어, 대중가요 작곡가 겸 가수로 활동하던 김해송(金海松)과 혼인하였다.
태평양전쟁이 끝난 이후에는 무대 활동에 주력하면서 김해송이 이끄는 KPK 악극단에서 활동하였다.
그러나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김해송이 실종되어 혼자 자녀들을 키우면서 어려운 생활을 해야 했다.
1958년 동료 가수 남인수가 이혼한 뒤 사실혼 관계로 지내다가 1962년 남인수가 사망하여 다시 혼자가 되었다. 1963년 미국에 건너가 딸들이 결성한 그룹 김시스터즈와 함께 공연을 하였으며, 한국에서의 공연은 1965년 삼일절 기념공연이 마지막이었다. 1969년 목포 유달산에 '목포의 눈물 노래비'가 건립되었으며, 1986년 목포시민의 상이 수여되었다.
김시스터즈의 "Try to remember". 오리지날 곡 보다 더 낫다는.
"목포의 눈물" 가사에 숨겨진 뒷 얘기
2절의 첫 대목은 유난히도 문제를 불러 일으켰다. 이 노래를 음반으로 만들어 일제의 검열을 받으러 갔을 때 「삼백 년 원한 품은 노적봉」 이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검열 담당자는 노랫말에 나오는 원한이 필시 日本을 겨냥한 것이라며 소란을 피웠다. 이때 이철 사장은 기지를 발휘, '원한'은 인쇄과정에서 착오가 일어나 '원앙'을 잘못 표기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원컨대 삼백연(三栢淵)의 바람이 사이좋은 원앙새처럼 노적봉으로 편안하게 분다는 뜻으로 ..... 사실상 <목포의 눈물>은 가사 그대로 한민족의 설움과 일제에 대한 분노를 노래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레코드사에서는 황급히 歌詞紙(가사지)를 다시 인쇄하여 들고 갔다. 거기에는 「삼백연(三栢淵) 원안풍(願安風)은 노적봉 밑에」로 바뀐 내용이 들어 있었다
흔히 대중가요라는 것이 몇 차례 거듭 들으면 곧 식상이 되는 경우가 일반이나 이 교수는「木浦의 눈물」은 연거푸 다섯 번까지 반복해서 들어도 그 고유하고 독특한 맛 이 줄곧 지속된다고 칭찬하고 있다. 어떤 대학교수는 ‘목포의 눈물’을 50번 연속 들었는데도 감회가 다 다르다고 술회하며 노랫말이나 사연을 알고 들으니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감칠맛이 난다고 했다. 이제까지는 「목포의 눈물」노래말을 지었던 이가 문일석이라고 전해졌었는데 사실은 윤재희다.
윤재희(1916년생)는 원래 해남윤씨로 목포시 북교동 157번지에서 윤경하씨(1972년 목포에서 사망)의 1남 2녀의 장남으로 태어나 목포북교국민학교를 졸업한 후 전주고등학교를 나와 일본와세다대학 문학부를 졸업한 후 목포에서 살고 있었는데 마침 목포를 주제로 하는 노랫말 가사를 공모한다기에 24세에 습작으로 지어 응모하였고, 당시 윤씨집안에서는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아 문일석이라는 필명으로 응모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윤재희씨는 아깝게도 단명하여 다른 작품을 더 쓰지 못하고 26세때(1942년) 작고하였던 것이다.
이제까지는 문일석이라는 필명만 알았지 본 이름이 윤재희 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목포의 눈물」 가사 내용은 다분히 나라를 잃은 설움을 표현한 글로서 특히 2절 '삼백년 원한품은 노적봉 밑에'의 가사는 그때로부터 3백년전에 정유재란때 명량대전과 고하도에 이순신장군이 진을 치고 있었다는 점을 상기시키면서 일본인이 그때에는 꼼짝도 못했던 곳이었다는 점을 담은 내용이었다. 이 내용 때문에 윤재희는 일본경찰에 끌려가서 호된 문초를 받기도 하였다고 한다.
'울밑에 봉선화'는 가곡으로써 당시 우리나라를 상징시키고, '목포의 눈물'은 유행가로써 나라 잃은 슬픔을 달래는 노래말이었다.
그녀의 고향 목포에 만들어진 "이난영 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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