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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론 - 윤오영
1. 습작과 수련
글을 읽지 않고 글을 쓰려는 것은 밑천 없이 장사하려는 것과 같다. 그러나 아무리 많이 읽어도 써 보지 아니하면 안고수비(眼高手卑)격이어서 좋은 글을 쓰지 못한다. 목수(木手)나 석공이 되려면 먼저 끌 구멍 파고 대패질하는 데, 징을 대고 망치질하는 데, 많은 수련을 쌓은 뒤라야 비로소 공예품이나 조각에 착수할 수 있다. 글을 쓰려면 우선 많은 습작과 수련이 필요하다. 소설이나 시는 3회의 추천을 받아서 문단에 등장한다. 추천제가 좋고 나쁜 것은 별개 문제로 하고 추천을 받기 위해서는 많은 수련을 거쳤을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수필이라고 대번에 써서 될 리가 없다. 이것이 현재 수필다운 수필이 드문 이유의 하나다.
구양수는 단 다섯자를 쓰기 위해서 수십 매의 원고를 버렸고, 육방옹은 만 수천 수의 시를 쓴 시인이지만 8천 수가 넘은 위에야 남 앞에서 서슴지 않을 시를 쓸 수가 있었다고 술회하고 있었다. 이태백이 쇠절구공이를 갈아서 바늘을 만든다는 말을 듣고 다시 들어가 공부했다는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하지 아니한가.
천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서투른 글을 빨리 발표할 것이 아니다. 자기의 글이 처음 활자화됐을 때의 기쁨은 크다. 그러나 두고두고 후회하게 되는 수가 많다. 반드시 직업문인이 될 필요는 없다. 문단인과의 교유, 문학단체에 참가함으로써 문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 분투하고 스스로 생각하는고독의 길만이 스스로 자기를 키워나가는 길이다. 원래 수필은 고독의 소산이다. 이것이 싫으면 정치활동이나 사회활동을 할 일이다.
그러면 수필이란 현실도피의 문학인가 하고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그야 참여문학일 수도 있고 비판, 투쟁, 혁명의 문학일 수도 있다. 그러나 문예란 기술이 필요하고, 기술이란 연마가 필요하다. 연마를 하는 데에는 일정한 기간이 필요한 것이다. 혹 어떤 사람은 이런 말을 한다. 저 혼자 대성하기를 기다리고 있으면 이미 두각을 나타낼 기회를 놓친다. 우선 한 자리 뚫고 앉아서 정진해야 한다고. 그 말에도 일리는 있다. 그러나 당선작가나 출세한 작가들이 그 후에는 매너리즘에 빠지는 예가 많고, 기성 작가들도 얼마 안 가서 관록으로 한몫 보고 있는 예가 적지 않다는 사실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또 당나라 때 시인 최호는 황학루(黃鶴樓) 시 한 편으로 이백을 압도하고 당시단의 제 일인자로 후세에 길이 빛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단 한 편이라도 걸작을 낼 수만 있다면 많이 발표하지 못한 것을 한할 것도 없다.
지금 우리 나라에 문학수필다운 수필이 별로 없는 것도 오로지 기초적인 수련의 과정을 밟지 아니했다는 데 중대 원인이 있는 것이다. 세계적으로도 수필이 다른 문학보다 수준이 낮다고 할 것이니 이것도 소설이나 시나 평론을 쓰는 문학가가 그 여세를 빌어 쓴 것 외에 전공가가 드물다는 데 원인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기초적 수련에서부터 출발한다면 일약 웅비하여 수필문학의 개척자로서의 영광을 거둘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초심자들이 커다란 야망을 갖고 원대한 출발을 하기를 바란다.
다음은 글을 썼으면,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퇴고를 거듭할 것이다. 일사천리의 속필이 재주가 아니다. 한 자 한 자 쪼고 쪼아서 정밀하게 다듬어 나가야 한다
또 방망이를 못 맞은 글이란 자기만족에 그치고 때를 벗지 못한다. 소설이나 시는 평론가의 입에 오르내리기도 하지만 수필은 평가하는 이가 드물기 때문에 항상 자기류에서 만족하고 만다는 것도 수필의 발전하지 못하는 또 하나의 원인이다. 그러므로 친구나 선배의 비평을 듣기에 인색하지 말아야 한다.
만일 칭찬하는 이가 있으면 두 번 찾아갈 필요가 없지만, 결함을 지적해 주는 사람이 있다면 진심으로 고마워 해야 한다. 사람의 마음이란 간사해서 칭찬받기를 좋아하고 헐뜯기는 것을 싫어하는 까닭에 이것이 항상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자기 글의 결함을 밝혀 주는 사람을 찾아야 한다.
[윤오영의 수필론] 곶감과 수필 소설을 밤[栗]에, 시를 복숭아에 비유한다면 수필은 곶감[乾柿〕에 비유될 것이다. 밤나무에는 못 먹는 쭉정이가 열리는 수가 있다. 그러나 밤나무라 하지, 쭉정나무라 하지는 않는다. 그러고 보면 쭉정이도 밤이다. 복숭아에는 못 먹는 뙈기 복숭아가 열리는 수가 있다. 그러나 역시 복숭아나무라 하고 뙈기나무라고는 하지 않는다. 즉 뙈기 복숭아도 또한 복숭아다. 그러나 감나무와 고욤나무는 똑같아 보이지만 감나무에는 감이 열리고 고욤나무에는 고욤이 열린다. 고욤과 감은 별개다. 소설이나 시는 잘못 되어도 그 형태로 보아 소설이요 시지 다른 문학의 형태일 수는 없다. 그러나 문학 수필과 잡문은 근본적으로 같지 않다. 수필이 잘 되면 문학이요, 잘 못 되면 잡문이란 말은 그 성격을 구별 못 한 데서 온 말이다. 아무리 글이 유창하고 재미있고 미려해도 문학적 정서에서 출발하지 아니한 것은 잡문이다. 이 말이 거슬리게 들린다면 문장 혹은 일반수필이라고 해도 좋다. 어떻든 문학작품은 아니다. 밤은 복잡한 가시로 송이를 이루고 있다. 그 속에 껍질이 있고 또 보늬가 있고 나서 알맹이가 있다. 소설은 복잡한 이야기와 다양한 변화 속에 주제가 들어 있다. 복숭아는 살이다. 이 살 자체가 천년반도(千年蟠桃)의 신화를 연상케 하는 아름다운 형태를 이루고 있다. 시는 시어 자체가 하나의 이미지로 조성되어 있다. 그러면 곶감은 어떠한가. 감나무에는 아름다운 열매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그 푸른 열매가. 그러나 그 푸른 열매는 풋감이 아니다. 늦은 가을 풍상을 겪어 모든 나무에 낙엽이 질 때, 푸른 하늘 천 서리 바람에 비로소 붉게 익은 감을 본다. 감은 아름답다. 이것이 문장이다. 문장은 원래 문채(文采)란 뜻이니 청적색(靑赤色)이 문(文)이요 적백색(赤白色)이 장(章)이다. 그 글의 찬란하고 화려함을 말함이다. 그러나 감이 곧 곶감은 아니다. 그 고운 껍질을 벗겨야 한다. 문장기(文章氣)를 벗겨야 참 글이 된다는 원중랑(袁中郞)의 말이 옳다. 그 껍질을 벗겨서 시득시득하게 말려야 한다. 여러 번 손질을 해야 한다. 그러면 그 속에 있던 당분이 겉으로 나타나 하얀 시설(柹雪)이 앉는다. 만일 덜 익었거나 상했으면 시설은 앉지 않는다. 시설이 잘 앉은 다음에 혹은 납작하게 혹은 네모지게 혹은 타원형으로 매만져 놓는다. 이것을 곶감을 접는다고 한다. 감은 오래 가지 못한다. 곶감이라야 오래 간다. 수필은 이렇게 해서 만든 곶감이다. 곶감의 시설은 수필의 생명과도 같은 수필 특유의 것이다. 곶감을 접는다는 것은 수필에 있어서 스타일이 될 것이다. 즉 그 수필, 그 수필마다의 형태가 될 것이다. 그러면 곶감의 시설은 무엇인가. 이른바 정서적, 신비적 이미지가 아닐까. 이 이미지를 나타내는 신비가 수필을 둘러싸고 있는 놀과 같은 무드다. 수필의 묘는 문제를 제기하되 소설적 테마가 아니요, 감정을 나타내되 시적 이미지가 아니요, 놀과도 같이 아련한 무드에 쌓인 신비로운 정서에 있는 것이다. *허무주의적 달관과 그리움의 미학 - 윤오영의 수필세계 - 김창식 1. 수필계의 비틀스와 롤링스톤스 대중음악가 비틀스(The Beatles)와 롤링스톤스(The Rolling Stones) 이야기로 시작하자. 비틀스야 팝 음악사를 통틀어 첫 손에 꼽는 아티스트다. 롤링스톤스는 대중성은 그에 미치지 못할지 모르지만, 마니아나 음악평론가 사이에선 노래의 완결성과 록 정신의 구현에서 오히려 윗길로 치는 사람들도 많다. 활동시기와 장르가 겹치는 두 밴드지만, 비틀스는 해체된 지 오래고 롤링스톤스는 현역으로 활동한다. 우리 근‧현대 수필계의 양대 산맥인 피천득 선생과 윤오영 선생을 떠올릴 때마다 비틀스와 롤링스톤스의 성과, 그리고 엇갈린 행보가 겹친다. 피천득은 비틀스에, 윤오영은 롤링스톤스에 비교할 수 있다. 한 분은 수필계 최고의 스타플레이어로 높은 대중적 인기를 누리며 큰 영향력을 행사했고, 또 다른 한 분은 생전엔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최근에 이르러서는 수필계 일각에서 더 높은 평가를 받으며 재조명되고 있다. 2. 대표작 산책 가. 달밤 낙항하여 윗마을로 마실을 간 화자가 사랑채에서 촌로를 만나 막걸리 한 사발을 얻어 마시며 나누는 대화가 전부인 짧은 글이다. 시간의 흐름에 따른 서사가 아니라 극적인 한 순간을 포착했다는 점에서 레싱의 *<<라오콘>>을 떠올리게 한다. 한 폭의 정갈한 수채화를 보는 듯하다. 회화적인 묘사만 있고 설명은 없다. 의미부여, 주의, 주장을 배제한 간결한 글쓰기에서 선적이고 도교적인 경지가 배어난다. 분위기와 정서에 초점을 맞춘 ‘보여주기’의 진수이자 시적인 산문의 전형으로 평가되지만, 주제의식은 상대적으로 깊지 않은 편이다. 즉, “그래서(외출하여 만나고 헤어졌다 하자) 어쨌다는 것인가?”에 대한 의미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느낌이다. ‘시골 풍경에서 드러난 훈훈한 인정’이라든가‘ 우연히 이루어진 만남과 교감’이 주제일 수도 있지만 미흡함을 지울 수 없다. 이 작품에서 전통적인 달이 갖는 함의(그리움, 소망, 기원, 연인)는 배제되었다. 달은 배경과 미장센의 도구로만 사용되었다. 나. 방망이 깎던 노인 가장 널리 알려진, 윤오영 수필을 대표하는 완성도 있는 작품이다. 40여 년 전 조우한 방망이를 깎던 노인에 대한 회고담(후일담)이자 빼어난 인물 수필이다. 방망이라는 토속적인 소재를 빌려 무뚝뚝하고 데데한 노인에게서 최선을 다하는 장인정신의 극치를 보여준다. 이 글의 좋은 점은 툴툴거리는 문체에 해학이 배어 있어 고지식한 노인이 독자에게 친근하게 다가온다는 점이다. 인물 수필의 전범(典範)이라고 할 만하다. 과거-현재-과거-현재의 병치형 서술 방식(Cross-cut)을 택했고, 느긋한 품성의 장인(과거)과 이기적이고 조급해하는 나(현재)를 대비해, 윤오영 표 수필의 코드인 옛 것의 가치와 근원적인 그리움을 부각했다. 한편 대화, 묘사, 서술, 사유와 인용을 적절히 배합하여 지루하지 않고 생생한 느낌을 준다. 이 글은 정보 수필의 본보기이기도 하다. 정보 위주의 글은 자칫 교훈적이거나 현란한 지식 자랑에 머물기 쉽다. 하지만 이글은 ‘소라붙이기(부레를 녹여 죽기에 대쪽을 붙이는 방법)’나 정성을 다해 약재를 아홉 번 쪄서 아홉 번 말린다는 ‘구증구포(九蒸九曝)숙지황(熟地黃) 조제법’ 등이 본문 내용과 겉돌지 않고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글의 깊이를 더하고 거부감 없이 읽히는 장점이 있다. 다. 참새 윤오영 수필 중 매우 독특한 사례이다. 다른 글들이 건조체에 가까운 극단적인 간결체로 쓰인 대 비해, <참새>는 세련된 문장에 의태어, 의성어가 두루 쓰인 심미적인 작품이다. 정갈한 느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열거법, 비교법, 인유법 등 화려한 수식이 풍부하다. ‘참새이야기’인데도, 제비, 까치, 까마귀, 부엉새 등 온갖 잡새들이 대거 출연할 뿐 아니라 논어, 김소월, <<구운몽(九雲夢)>>의 양소유까지 거론된다. 주제는 글의 후반부에 내비친다. 삭막한 세상에 처한 화자는 소년 시절로 표상되는 ‘순수의‘ 시대’를 그리워한다. 도시문명에 대한 가벼운 비판을 담은 이 수필의 감동적인 대목은 뭇 새들로 가득한 새장수의 조롱에 참새가 없다는 발견과 그에 뒤따르는 깨달음이다. 친숙한 새로서의 참새를 형용할 뿐 아니라 작가의 휴머니즘 적인 체취가 엿보여 독자의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참새만.“ "없네." 하다가 즉시 뉘우쳤다. 실은 참새가 잡히지 않아서 다행인 것을. 라. 쓰고 싶고 읽고 싶은 글 윤오영은 수필 평론가로도 일가를 이루었다. 의고체(擬古體), 한문 투의 <쓰고 싶고 읽고 싶은 글>에서 개진한 이론은 피천득 유의 ‘누에의 입에서 액(液)이 나오듯 그저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란 주장과는 사뭇 다르다. 윤오영 수필론은 보다 현대적이어서 오늘날의 수필 쓰기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윤오영은 표제 글에서 현대수필작법의 금과옥조(金科玉條)를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1) 옛 사람이 높은 선비의 맑은 향기를 그리려 하되, 향기가 형태 없기로 난(蘭)을 그렸던 것이다. 아리따운 여인의 빙옥(氷玉) 같은 심정을 그리려 하되, 형태 없음으로 매화(梅花)를 그렸던 것이다.(구체적 형상화) (2) 작자와 독자 사이를 잇는 사랑은 시대(時代)의 공민(共悶)이요, 사회(社會)의 공분(公憤)이요, 인생(人生)의 공명(共鳴)이다.(소재와 주제) (3) 자연은 내 프리즘을 통하여 재생된 자연인 까닭에 새롭고, 감정은 여과된 감정이라야 아름답고, 사색은 발효된 사색이라야 정(情)이 서리나니.(삶의 재해석) (4) 사랑이 깊은 여인은 밤새도록 하소연하던 사연도 만나서는 말이 적으니, 진실하고 깊이 있는 문장이 장황(張皇)하고 산만(散漫) 할 수가 없다.(문장의 간결성) (5) 물밑의 흙과 같이 그림자 밑에 더 넓은 바닥이 있어 글의 배경을 이룸으로써 비로소 음미(吟味)에 음미를 거듭할 맛이 나는 것이다.(깊이와 결미의 여운) 3. 염소에 대한 명상 가. 왜 하필 <염소>인가? 윤오영 수필 중에서도 특별히 <<염소>>를 거론하고 싶다. <염소>는 개별자(個別者)이자 유한자(有限者)인 인간 존재에 대한 존재론적 성찰과 다방면의 인문학적인 소양이 내비치는 작품이다. 윤오영 수필을 규정짓는 옛것에 대한 그리움, 소년시절에 대한 향수, 도교적 관조와 명상, 인물에 대한 묘사, 여성과 관능에 대한 헛헛한 경도(傾倒)와는 궤를 달리하여 드물게 깊이 있는 주제를 담고 있으며 이를 헛헛하고 처연한 필치로 구체화했다.. 나. <염소>의 취할 점 염소 장수와 뒤따르는 염소 무리의 행각에서 염소와 나 자신을 동일시하고 인간의 운명을 꿰뚫어보는 이 글은 윤오영 수필을 통틀어, 아니 당대를 풍미한 다른 작가들의 수필을 포함하더라도, 주제의식이 예외적으로 강렬하고 핍진성(逼眞性)이 있어 깊은 울림을 준다. 대수로울 것 없는 일상의 풍경과 개인의 체험에서 근원적 담론을 이끌어내 인간 존재의 유한성이라는 보편적 주제로 나아가는 귀납적 서술 방식이 공감을 자아낸다. 그뿐 아니라 철학적 관점을 뒷받침하는 다방면의 인용과 인문학적 소양이 글의 지평을 넓히고 깊이를 부여한다. 다만 이 대목은‘양날의 칼’로서 이론의 여지가 있다.(아래 ‘다’항 참고) 그렇다고 이 수필이 메시지의 전달에 치우쳐 문학적 형상화를 소홀히 한 것은 아니다. ‘기저귀처럼 차복차복 갠 염소 껍질’ ‘전족(纏足)한 청녀(淸女)의 쫓기는 종종걸음’ ‘연하고 검푸른 항문’ 등 ‘살 떨리는 비유’가 적재적소에 배치돼 있다. 은유와 직유로 염소의 모습을 형용하고 가없는 슬픔을 읽어낸다. 다음의 묘사를 보도록 하자. -- 주인의 뒤를 따라 석양에 보도 위를 걸어가는 어린 염소의 검은 모습은 슬프다. 짧은 다리에 뒤뚝거리는, 굽이 높아 전족(纏足)한 청녀(淸女)의 쫓기는 종종걸음이다. 조그만 몸집이 달달거려 추위 타는 어린애 모습이다.. 이상스럽게도 위로 들린 짧은 꼬리 밑에 감추지 못한 연하고 검푸른 항문이 가엾다. 다. <염소>의 아쉬운 점 이 수필은 내용과 형식이 조화를 이룬 작품은 아니다. 10매에 못 미치는 글인데도 등장인물이 많아 수선스럽다. 주인공인 염소(3마리)와 염소 주인, 내레이터인 나, 조연 격인 소파 방정환, <페이터의 산문>을 쓴 페이터, 베틀의 여인 클로우도우 등. 짧은 글에 여러 인물이 등장하면 시선이 분산돼 통일된 인상을 주기 어렵다. 내용의 흐름으로 보면, 화자는 거리에서 어느 한순간 염소 무리를 뒤따르며 이런저런 상념을 전개하는 것일 뿐, 염소 일행과 하루를 함께 지낸 것이 아니다. 그런데 무엇을 근거로 아침에 일곱 마리가 따라왔을 것이라고 단정 지을 수 있는지 의문이 든다. ‘옥(玉)의 티’ 일는지 모르지만, 디테일의 허술함은 작품의 완성도를 해칠 수 있다. 보다 더 큰 문제는, 페터의 관점을 빌려 염소를 ‘페이터의 사도’에 비유한 대목이 핵심 단락을 이루는데, 교시(敎示)적으로 장황하게 소개했다는 점이다. 장점으로 조명한 인문학적 배경 지식과 다 방면의 인유는 글을 다채롭게 할 수 있지만, 지나치게 그에 의존하면 현학적인 느낌을 줄뿐더러 정작 화자의 고유한 관점은 무엇인지 고개를 갸웃하게 한다. 그러므로 위 (나) 항에서 ‘양날의 칼’이라고 경계한 것이다. -- 페이터는 일찍이 사람들에게 “무한한 물상 가운데 네가 향수한 부분이 어떻게 작고, 무한한 시간 가운데 네게 허여된 시간이 어떻게 짧고, 운명 앞에 네 존재가 어떻게 미소한 것인가를 생각하라. 그리고 기꺼이 운명의 직녀, 클로우도우의 베틀에 몸을 맡기고, 여신이 너를 실 삼아 어떤 베를 짜든 마음을 쓰지 말라.” 했다. 이 염소는 충실한 페이터의 사도다. 그리고 그는 또 “네 생명이 속절없고, 너의 직무, 너의 경영이 허무하다 할지라도, 적어도 치열한 불길이 열과 빛으로 변화시키듯 하잘 것 없는 속사나마 그것을 네 본성에 맞도록 동화시키기까지는 머물러 있으라.” 했다. 소파 방정환의 ‘어린이 예찬’ 역시 선뜻 수긍하기 어려운 인용이다. 사이코패스가 칼날로 찌르려는 데 위험에 노출된 것을 모르고 벙글벙글 웃고 있는 어린에게서 ‘천진난만한 성스러움’을 떠올리는 것은 문제가 있다. 보통의 양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 장면에 부딪히면 우선 안타까워하고 끔찍해할 것이다. 나아가 사안(事案)의 그로테스크함에서 오는 무력감과 그로 인한 참담함(증폭된 슬픔)을 느낄 것이다. -- 방 소파의 어린이 예찬에는 ‘어린이는 천사 외다.. 시퍼런 칼날을 들고 찌르려 해도 찔리는 그 순간까지는 벙글벙글 웃고 있습니다. 얼마나 천진난만하고 성스럽습니까, 그는 천사 외다.’ 했다. 그렇다면 나도 ‘염소는 천사 외다.’ 할 것이다. 4. 윤오영 수필의 성과와 유산 대표작 중심으로 살펴본 윤오영 수필은 탈속한 선비정신과‘절차탁마한 간결하고 세련된’ 문장이’ 두드러진다. <순아> <붕어> <조약돌> <부끄러움> <하정소화(夏情小話)>등 지면 관계로 다루지 않은 다른 작품을 포함해도 마찬가지다. 만연체, 화려체의 난삽한 문장이 득세하던 당시 수필계에서 윤오영의 현대적인 문체는 이채롭기만 하다. 아쉬운 점은, <방망이 깎던 노인>과 <염소>를 제외하면 실존적 자각, 인간 본성에 대한 통찰, 공동체 정신의 구현, 사회적 약자인 이웃에 대한 연민, 엄혹한 시대상황 등에 대한 직간접 언급이 없다는 점이다. 개인적인 정서와 과거의 기억에 함몰되어 지나간 소년 시절과 두고 온 고향, 언젠가 한 번 스쳐 지나간 여인을 그리워한다. 글 속에 삶에 대한 의미화나 성찰이 결여되었다거나, 사회성이나 시의성, 역사인식이 떨어지는 문제점은 윤오영에 한한 것은 아니다. 동시대 다른 수필가에게도 적용된다. 이러한 문제점은 양적 팽창을 거두어 수필 인구가 수천을 헤아리는 현대에 와서도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다. 전승되고 답습되었을 뿐 아니라 강화된 측면도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동라(銅)와 바이올린의 G현, 횔덜린의 시, 아이헨도르프의 가곡, 크누트 함순의 이삼 절, 날아가는 한 마리의 창로(蒼鷺), 새의 주검 위에 떨어진 초추(初秋)의 양광(陽光)’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마찬가지로, 삶에 대한 해석이 뒤따르지 않는 자연 예찬, 슬픔을 강요하는 파란만장한 삶의 곡절, 신변의 그렇고 그런 일을 적은 생활 글, 나와 가족에 대한 자랑 아닌 자랑(그러니까 결국 자랑), 그저 선행(善行) 일뿐인 감동적인 이야기의 범람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윤오영 수필이 이룬 문학적 성과와 유산을 기리면서도 마음 한쪽에 돌멩이가 앉은 듯한 답답함이 가시지 않는 소이(所以)다. ‘수필의 주제는 시나 소설의 그것과 도대체 다른 것이란 말인가?’ 고매한 수필가 윤오영은 우리에게 과제를 남기고 성찰의 계기를 제공한다. 한층 분발을 촉구하는 것 같기도 하다. 뒤따르는 고전적인 질문. ‘문학은 해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림[畵]과 그림자[影]의 세계를 부단히 열어 보일 뿐인가?’ * <<라오콘>>: 1976년 간행된 독일 비평가 레싱(Lessing, 1729~1781)의 이론서. 원 제목은 <<라오콘: 회화와 시의 한계에 대하여, Laocoon: oder ueber die Grenzen der Malerei und Poesie>> **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안톤 슈낙, 김진섭 번역)에서 따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