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_bg6p7eY8YQ?si=x_ymDOzRTE82PGoa
톰 라이트는 성경을 관통하는 이미지를 소개합니다.
이 영상에서 톰 라이트는 '떡'(Bread)에 대하여 설명합니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이 언급하신
떡의 이미지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예수께서는 누룩에 대하여 경고하시면서
떡이 바로 자신이 선포하고 보여주는
하나님 나라임을 암시하셨습니다.
떡에 대한 다른 의미는 예수님 자신입니다.
그것은 세상의 생명을 위하여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산 떡이라는 말을 설명할 때
톰 라이트는 구약성경에서 진설병을 소개합니다.
그것은 결국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성만찬의 새로운 의미가 여기서 부각됩니다.
그것은 떡을 떼는 바로 그 자리에
주님이 임재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성만찬의 개념에 대한
루터의 견해를 생각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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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라이트와 함께 성경에서 이미지를 읽어내기
성경의 이미지 10
떡 – 하나님의 임재
성경에는 많은 이미지가 있습니다. 그 이미지는 어떤 주제를 보여주며 성경 이야기 전체를 관통합니다. 우리들은 이 이미지들을 하나씩 면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것은 이 이미지들이 어떻게 우리들에게 더 큰 이야기를 보여주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 이미지를 읽어내야 합니다.
마가복음 8장에는 이상한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경고하셨는데 그것은 바리새인과 헤롯의 누룩을 조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만약에 제가 그 본문을 아무런 설명 없이 교회에서 낭독한다면 그것을 듣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마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지금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지?’ 틀림없이 제자들도 제가 생각하기에는 난감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걸까?’
사실 제자들은 누룩이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의 유월절 이후로 그 때는 과거로 거슬러 가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이집트 위에서 건지셨을 때인데요. 유월절 식사의 특징은 누룩을 넣지 않은 떡을 먹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누룩을 완전히 제거했습니다. 왜냐하면 떡은 급하게 준비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그들이 이집트를 서둘러 떠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날 이후로 누룩은 어떤 것을 가리키는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원래 있었던 것의 특성을 희석시키는 어떤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누룩은 떡을 다른 모습으로 만듭니다. 누룩은 그 이후로 비유적인 의미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누룩을 어떻게 사용하는가 하면, 진짜가 있다고 할 때 누룩을 더하면 그것은 어떻게든 망가지게 됩니다.
제자들은 처음에 의아하게 생각했습니다. 제자들이 말한 것을 보면, ‘주님이 떡을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떡을 가져오는 것을 잃어버렸잖아!’라고 말합니다. 예수께서는, ‘그게 문제가 아니다.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일이 있기 조금 전에 예수께서는 떡과 구운 생선을 많이 불어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예수께서는 그 일을 행 하셨습니다. 마가복음 6장과 8장을 보면 다음과 같은 일이 두 번 일어났습니다. 군중들은 굶주렸고 예수께서는 그들을 먹이셨습니다. 그 처음 시작은 매우 적은 양이었는데 많은 양으로 불어나서 모든 사람이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예수께서 누룩으로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 걸까요? 주님이 경고하시면서 바리새인들과 헤롯을 조심하라고 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헤롯 안티파스를 진짜 왕으로 지지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훼손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떡을 사용하셔서 하나님 나라 이미지를 나타내셨습니다. 예수께서 시작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최고의 통치자와 구원자로서 하늘에서와 같이 땅을 통치하시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그 하나님의 나라가 퇴색되는 것을 우려하셨습니다.
누룩이 부풀게 하는 것이라고 유대인의 은유로는 표현됩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오려면 모든 사람들이 율법을 완벽하게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헤롯의 조력자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때가 언제인가 하면, 모든 사람이 헤롯을 진짜 유대인의 왕으로 인정하는 날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렇지 않다고 하시면서 그 둘 다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누룩 없는 떡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가복음을 보면 이 일로부터 바로 다른 사건으로 전개됩니다. 그 때 예수께서 제자들을 북쪽 가이사랴 빌립보로 데리고 가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더냐?’ 그러자 제자들은 말하기를, ‘어떤 사람들은 엘리야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예언자 중에 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등 여러 말이 있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기를, ‘당신은 메시 아이십니다!’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설명을 하셨습니다. 자신이 이제 곧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고 그리고 제3일에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들은 결코 생각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그런 식으로 임하는 것에 대해서 생각을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경고하신 것은 하나님 나라의 특징을 훼손하지 말하는 것입니다. 그 대신에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의미를 가리켜 보이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장차 올 왕이심으로 제자들은 그분을 그렇게 인식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메시아의 모습과는 달랐습니다. 메시아적 승리와 영광을 향한 그분의 길은 이내 매우 역설적인 모습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고난과 죽음의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그것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 사용하신 표현은 하나님 나라의 떡이었습니다.
우리는 같은 이야기를 요한복음 6장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거기에 나오는 이야기는 좀 더 길게 묘사되었는데 그 내용은 예수께서 군중들과 대화를 나누시는 것입니다. 때는 예수께서 군중에게 광야에서 떡을 먹이신 뒤의 일입니다. 이 일은 요한복음 6장 이야기 앞부분에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일이 일어난 후 즉시로 군중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피하여 산으로 가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그 후로 무리를 다시 만나셨을 때 그들은 예수님께 질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질문은 ‘당신은 스스로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하는 것이었고, ‘모세가 광야에서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을 주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일은 출애굽기 26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거기를 보면 하나님이 하늘에서 만나가 내리게 하셔서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서 떡을 먹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광야를 방황하는 내내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예수께서는 이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너희에게 진짜 양식을 준 것이 아니라 내가 너에게 주는 것이 진짜 떡이며 진짜 양식이다.’
그렇게 예수께서는 말씀을 이어가셨습니다. 마가복음 8장에서 그렇게 하신 것과 같습니다. 내가 너에게 주는 떡은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다.’ 여기서 떡의 이미지는 단지 하나님 나라를 가리키는 것만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며 주님이 장차 하실 모든 일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떡은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세상의 생명을 제공합니다. 그것은 만나와 같지만 그 형태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요한복음 6장 33절의 말씀입니다. 초기 교회는 으레 그 약속을 성만찬이라는 표현으로 가르쳤습니다. 떡과 포도주라는 표현은 매우 강렬하게 받아들여졌습니다. 지금도 그 말씀은 강렬하게 받아들여집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으로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드러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양식으로 자신을 주신다는 생각은 이교도의 신앙에 나타납니다. 이교도들은 신전을 만들고 그곳에서 희생제사를 지냅니다. 그들에게서 계속적으로 나타나는 이미지는 굶주린 신의 모습입니다. 이교도들은 자기 신들에게 인간을 양식으로 제공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어느 시편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굶주린다 하여도 나는 너희에게 말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만물이 나의 것이기 때문이다’ 시편 50편 12절 말씀입니다. ‘언덕에 사는 모든 동물이 나의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것은 나에게 별일이 아니다. 나는 너의 문을 두드리며 양식을 달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기본적으로 이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 이야기를 새로운 형태로 바꾸셨습니다. ‘이제 진짜 떡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사람이다. 그가 세상에 생명을 줄 것이다.’ 다시 한번 같은 이야기를 우리는 다른 곳에서 만납니다. 인간은 자연적으로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우리의 임무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위로 올라 가는 길을 찾는 것이다. 어쩌면 도중에 그 분께 선물을 바쳐야 할 것이다.’ 반면에 성경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하나님 이 땅에 내려오셔서 자기 백성과 함께 거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백성에게 자신의 생명과 사랑이라는 양식으로 먹이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진리를 찬양하는 구약성경의 이미지 중에 하나는 성막에 있습니다. 광야의 성막에서 제사장이 자신의 일상적인 업무를 했는데 그들은 두 덩이의 떡을 특별한 탁자 위에 두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뜻하는 떡이었습니다. 그 떡은 옛날 성경에서는 진설병(Show Bread)으로 번역되었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표현 방식으로서 의미가 무엇인지를 우리가 다 알 수는 없지만 그것은 거기에 진열해 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히브리어로 그 말의 의미는 ‘얼굴의 떡’(Bread of Face)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얼굴 또는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합니다.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그 떡 덩이가 거기에 진열되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예수께서 자기 몸을 세상의 생명으로 주신다고 말씀하시고 떡에 대하여 ‘이것은 너희를 위한 나의 몸이다’라고 말씀하시며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리고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먹고 그 피를 마시라고 말씀하셨을 때, 이것은 진설병과 동일한 역할을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둘 사이에 차이점이 있기는 합니다. 성막은 광야에 있었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의 계속되는 삶은 교회에 있습니다.
최후의 만찬에서 먹는 성만찬의 떡은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먹을 수 있는 것으로서 그것이 우리에게 생각나게 하고 전달해주는 것은 바로 예수님 자신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얼굴의 떡이며 임재의 떡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성만찬의 찬송을 부를 때 우리는 자주 이런 노래를 부릅니다. ‘들으소서. 온 나의 주님. 저는 주님을 얼굴과 얼굴로 뵈옵나이다.’ 여기서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을 느끼고 만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떡이 의미하는 진정한 뜻입니다. 그것은 가장 평범한 것으로서 인간의 양식으로 만든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그것은 하나님의 손에 들려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 비범한 것을 전달하는 수단이 됩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시는 그곳은 떡을 떼는 바로 그 자리라는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