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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22~23)
* 김삿갓의 수작
아침을 거르고 나선 길이라 오전이 지나니 몹시 시장기가 들었다.
게다가 날씨마저 춥고보니 따듯한 불기운이 더욱 그리웠다.
하늘과 땅을 번갈아 보며 시름없이 걷고있는데 삼거리가 나타났다.
오른쪽 길 저만치에 주막이 보였다.
김삿갓은 반가운 마음에 그쪽으로 행했다. 사실 , 수중에는 엽전 한 닢 없지만 그곳으로 가면 무엇인가 생길것 같았다.
주막은 마당도 넓고 마루도 넓었다. 한데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반쯤 열려있는 사립문으로 성큼 들어섰다.
"게 아무도 없소 ? "
비록 가진 돈은 없었지만 우선 호기롭게 주모를 찾았다.
아무런 대답이 없자 그는 다시 한번 주모를 불렀다.
잠시후 안쪽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여인 하나가 나타났다.
삼십이 넘었을까, 아니면 조금 못 되었을까 ? 첫 눈에 , 보기 드문 미인이었다.
"어찌 오셨어요 ? "
여인은 시답지 않게 대꾸했다.
"주막에 나그네가 찾아 온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거 무슨 말을 그리 하시오 ?"
김삿갓은 마루에 걸터 앉으며 여유있게 수작을 부렸다.
"미안하지만 요즘 영업을 하지 않습니다."
"장사를 안 하신다니 , 외상술이라도 먹어대는 건달이 많습니까 ? "
"그런것은 아니지만 하여튼 장사를 하지 않으니 다른 집으로 가세요.
여기서 한마장쯤 더 가시면 좋은 주막이 있습니다."
말을 마친 여인은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주막이 있든 없든 상관 없소이다. 댁이 주막이 아니었더라도 나는 왔을 것이니까요."
여인은 무슨 말인지 언듯 이해하지 못하고 돌리려던 몸을 멈추고 김삿갓을 바라 보았다.
"그렇게 무서운 눈으로 보시지 마시오. 나쁜 사람은 아니니까요. 다만 문전걸식을 하면서 떠돌아 다니는 사람입니다. 어차피 주막을 찾더라도 돈 주고 술을 마실 형편은 못되는 몸이니 , 찬술 한사발이라도 얻어 마시면 고맙겠습니다."
"보셔요 손님. 우리집에는 지금 일이 있어 손님을 대접할 형편이 못 되니 훗날 다시 오신다면 그때는 잘 대접해 드리지요."
여인의 말씨는 차분하면서도 위엄이 서려 있었다.
주막이라면 의례 주모가 있어 적당히 수작을 부려도 슬그머니 받아주기 마련인데, 주모같지도 않은 이 여인은 미모로 보나 위엄있는 행동거지를 보나 , 뭇 사나이들에게 술이나 팔고 있을 여인같지가 않았다.
해서 김삿갓은 더욱 흥미를 느꼈다.
"나는 떠돌아 다니기는 하지만 한번 지나간 곳을 다시 들리지 않습니다.
후일 다시 찾아오라 하셨지만 다시 뵐 일이 없을것 같으니 오늘의 인연은 술 한잔으로 끝내시면 되겠습니다."
여인은 김삿갓의 요모조모를 뜯어보고 있었다.
차림새는 그렇다치고 , 생김새나 말씨가 그냥 허투로 떠돌아 다니며 걸식하는 낭인은 아닌것 같았다.
(혹시 암행어사 ? ... )
여인의 상상은 이렇게 비약 되었다.
새카만 눈썹아래 두눈은 범인과 다른 총명한 정기가 서려있었다.
여인은 속 마음을 감추고 퉁겨보았다.
"미안합니다만 지금 머슴도 없고 주모도 없어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니 어서 떠나심이 좋을것 같습니다."
여인의 말을 듣고 김삿갓은 깜짝 놀라는 시늉을 했다.
그러나 속으론 과연 생각대로 주모가 아니었구나 하고 자기의 추측이 맞았다고 생각했다.
"아니 주막에 주모가 없다니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시오 ? "
김삿갓은 말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야기를 끌고 나가야만 무슨 수가 날것 같아서였다.
"저를 주모로 알고 계시는 모양인데 이 주막을 맡아서 장사하는 분은 따로 있어요. 그러니 전들 어쩌겠어요 ?"
"허 참 딱하게 되었소이다. 실인즉 아침도 거른터이라 이제는 발길을 옮길 기력조차 남아있지 않습니다. 따듯한 숭늉이라도 주셨으면 합니다만 ..."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여인은 갑자기 수심어린 얼굴을 하면서 입을 열었다.
"사정이 정 그러시다면 대접할 것은 없지만 저쪽 방으로 드십시요. 시장기나 면하게 해드리지요."
"고맙소이다."
김삿갓은 일이 잘 되어 간다고 내심 기뻐하면서 여인이 가르킨 마루가 이어진 방으로 성큼 들어갔다.
방은 어제밤 사람이 유 했던듯 아랫목은 따듯했고 훈기가 돌았다.
그는 바람벽에 등을 기대고 다리를 쭉 폈다.
이사이 여인은 안채로 들어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무슨 곡절이 있는 집 같았다.
우선 사람이 보이지 않는것 부터가 이상한 일이었다.
한참후에 여인이 밥상을 들고 들어왔다.
김삿갓은 깜짝 놀라며 얼른 일어서 밥상을 받아 잡았다.
"차린 것은 변변치 않으나 시장하실 터이니 어서 드시지요."
김삿갓은 밥상을 앞에 놓고 공연히 가슴이 뛰었다.
조금전에 밥상을 건네 받을때 여인의 머리와 자신의 머리가 가까워지면서 여인의 야릇한 체취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여인은 보기드문 미인이 아닌가 ?
집을 떠난 이래로 아내말고 이토록 젊고 예쁜 여인과 마주 대하는 것은 처음일성 싶었다.
"고맙소이다."
김삿갓은 정중히 예의를 차리고 수저를 들었다.
차린것 없다는 여인의 말과 달리 소반에는 김이 무럭무럭 나는 쌀밥이 주발에 가득 얹혀 있고 갖 끓인 동태국까지 놓여 있었다.
"음식 맛이 이집 마나님 성품을 닮은 모양입니다."
동태국을 한숟가락 입에 떠 넣은 삿갓이 수작을 걸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 "
"정갈하고 감칠맛이 있어 해본 소리입니다."
여인은 엷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디서 오시는 길이세요."
나갈 생각은 하지 않고 문쪽으로 옷깃을 여미며 앉은 여인이 물었다.
"바람이 어디서 불어 오는지 부인은 아십니까 ?
소생은 바람과 같은 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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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23)
* 차일피적 적막강산 금백년 ..
"저는 바람처럼 거침없고, 머물지 않고, 흘러가는 인생을 살고 있지요.
여인은 고개를 끄덕해 보였다.
김삿갓은 정색을하고 물었다.
"주막에 주모도 없고 심부름 하는 머슴도 없는 모양인데 무슨 곡절이라도 있습니까 ? "
"곡절은 무슨 곡절이 있겠습니까. 그저 세상만사 모두가 귀찮아 잠시 문을 닫은 것 뿐입니다."
"그래요 ?"
그러나 김삿갓은 어딘지 석연치 않은 기미를 느꼈다. 그는 묵묵히 밥을 모두 먹었다.
" 잘 먹었습니다."
여인은 무슨 말을 할듯 하다가 단념한듯 상을 들고 나가려 한다.
"잠깐만 ! "
김삿갓은 여인을 불러 세웠다.
"제가 보기에 부인에게는 필시 절박한 일이 있으신듯 한데. 말씀 좀 들어볼 수 있겠습니까 ? "
여인은 상을 다시 놓고 자리에 앉았다.
"그걸 어떻게 아셔요."
"부인의 얼굴에 그렇게 씌여 있습니다."
"제 얼굴에요 ?"
"그렇습니다. 바깥 양반도 안계신 모양인데 소생이 해드릴수 있다면 오늘 밥값으로라도 도와 드리고 싶습니다. 각별히 바쁜 몸도 아니니까요."
여인은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아니 , 관상을 보실줄 아세요 ? "
"허허 , 관상을 볼줄 안다기 보다 어려서 부터 주역과 역서를 읽어 세상살이에 지친 사람의 삶을 조금 들여다 볼줄 알지요."
김삿갓은 여인이 자신의 말에 흥미를 느끼자 이렇게 말했다.
"맞았어요. 저는 이년전에 혼자가 되었지요. 오늘은 큰집에 제사가 있어 집안 식구들은 모두 그쪽으로 보내고 지금은 저 혼자 있지요 . 그리고 ......."
여인은 한숨을 쉬면서 말끝을 흐렸다.
"복잡한 일이 있으신 모양인데 말씀을 해주십시요. 대단히 어려운 일이 있으신것 같은데."
여인은 삿갓의 말을 듣고 잠시후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사실 처음부터 예사분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하지만 처음 뵙는 분에게 집안의 사정을 이야기 한다는 것이 꺼려졌는데 저의 긴박한 사정을 짐작하고 계신듯 하여 의논차 말씀드리겠습니다."
"집안에 복잡한 일이란 다름이 아니라 산송(山訟)이 한 건 있습니다."
"산송이라면 묘자리에 얽힌 송사를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 "
"예, 이년전 춘삼월에 어느 고명한 지관 한 분이 우리집에 묵은 일이 있습니다. 그때 제 남편은 병석에 누워 오늘 내일 하고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을 때였지요. 그래서 저희 남편을 위해 좋은자리 하나를 보아 달라고 그 지관에게 청을 하였습니다. 지관은 우리집에 열흘경 머물면서 이 근방
산야를 두루 살펴보고 마침내 한 자리를 택해 주더군요. 여기서 이십리쯤 북쪽으로 가면 갈매봉이란 산이 하나 있는데 그 산 중턱 남향 자리였지요.그때 지관에게는 쌀 열섬을 사례로 주었습니다.
이런 일이 있고난 후 한달쯤 지난후에 남편은 세상을 떠났어요. 물론 그 명당자리로 장례를 모셨지요."
"그렇다면 일이 잘된 것이 아닙니까 ? "
김삿갓은 흥미를 느끼며 다음 말을 재촉했다.
"거기까지는 일이 잘 되었지요. 정말 명당자리 덕분인지 주막에 장사가 부쩍 잘 되지 않겠어요 .
애초부터 주모를 따로 두고 하는 장사였지만 장사가 잘 되어 남편 죽은 시름을 잊고 지냈지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지난 가을 부터 장사가 잘 되지 않는거예요. 대신 저 위에 주막이 잘 된다는 소문이 들리더군요."
"하지만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장사란 잘 될때도 있고 안 될 때도 있으니까요.
한데 지난 여름 어느날 밤, 꿈에 죽은 남편이 나타나 '여보, 내집 울타리에 침법한 자가 있어 도무지 잠을 잘수 없다'며 말을 하는 것이에요. 그 꿈을 깨고나서 하도 이상해 남편 산소를 찾아가 보았지요.
그런데 가보니 이게 웬일이래요 ! "
여인은 여기까지 말을 하고 한숨을 쉬었다.
"아니 무슨일이 있었소이까 ? "
"남편 묘 옆에, 그러니까 봉분 오른쪽 우청룡(右靑龍) 쪽으로 웬 묘가 하나 생기지 않았겠습니까 ?"
"그래서 하도 기가막혀 알아보니까 새로생긴 이 묘는 건너마을 안 진사 아버지 묘였던 것이예요.
해서 급히 가서 따졌지요."
"그래 어떻게 되었습니까 ?"
"그집 말이 , 지관에게 후히 돈을 주고 자기네 부친 묘자리 하나를 부탁하였더니 그곳에 모시라 하기에 묘를 썻노라고 능청스럽게 말을 하는 거예요. 그래 이장을 하라 하였더니 오히려 비용을 물을 것이니 우리보고 이장을 하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 세상에 이런 무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관가에 송사를 내었지요. 그런데 관가에서는 지금까지 차일피일 하면서 해결을 미루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지관이 양쪽 집에다 같은 묘자리를 팔아먹은 게로군요. 하지만 산소는 이쪽에서 먼저 썼으니 나중에 쓴 안 진사네가 마땅히 쓰지 말았어야 하는 것이 도리이고 , 썼더라도 파가는 것이 법이거늘 , 그나저나 송사를 받은 안진사네는 지금 어떻게 나오고 있습니까 ?"
"우리가 송사까지 내니까 파가겠다고 하는데 , 어디 실천에 옮겨야지요. 관가에서도 이렇다할 결정도 하지 않고요. 아무래도 관가에서 뇌물을 받아 먹고 어물정 미루고 있는듯 싶네요."
"그렇다면 사또께 직접 송사를 해야 하겠군요."
"그렇게 할수 있을까요 ?"
여인의 얼굴이 갑자기 밝아졌다.
"아무렴요. 이쪽에도 사람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가만히 계십시오. 내가 송사를 하지요."
"선비님 께서요 ? 고맙습니다. 너무 고맙습니다."
"쓸것을 준비해 주십시요."
여인은 불이낳게 밖으로 나가더니 종이에 붓과 벼루를 가지고 들어왔다.
그러자 김삿갓은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붓을 들었다.
掘去掘去 彼隻之恒言 , 捉來捉來 本守之例題
(굴거굴거 피척지항언 , 착래착래 본수지예제)
<파간다 파간다 함은 저쪽이 늘 하는 말이고, 잡아오라 잡아오라 함은 이고을 사또님이 겉으로만 하는 이야기인데>
今日明日 幹坤不老 月長在, 此日彼頃 寂莫江山 今百年
(금일명일 간곤불노 월장재 , 차일피적 적막강산 금백년)
<이토록 오늘 내일 미루기만 하니 천지는 늙지않고 세월만 흐를 것 이오 , 이핑게 저핑게 하는 사이 쓸쓸한 강산은 어느덧 백년이 될것 이로다.>
김삿갓이 이렇듯 쓰고 붓을 놓으니 여인이 경탄을 한다.
"제가 생각했던 대로 과연 선비님은 명문장가 이시군요."
이 말을 듣고 김삿갓도 놀랐다.
여인이 글을 보고 뜻을 알았다는 것인데 흔치않은 일이었다.
그러면서 여인이 말을 하는데
"내일 사또가 이 글을 보시면 저희 집 산송 처리를 더이상 미룰수 없다것을 알게 될것 입니다.
고맙습니다." 여인은 고개를 숙이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렇게 보아주시니 써드린 보람이 있소이다. 헌데 실례의 말씀 같소이다만, 주막이나 하시면서 지내실 분 같지는 않은데요 ... "
김삿갓이 이쯤 말을 해놓고 여인을 빤히 쳐다 보았다.
여인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자랑스럽게 말할 것은 아니지만 본래 시댁은 대대로 벼슬을 하던 집안이었지요.
허나, 윗대에 이르러 뭔가 잘못되어 삭탈관직을 당하여 불운에 빠졌습니다.
그로 인해 원래 황해도가 고향이나 이곳까지 살림을 옮겨오게 되었지요.
이곳은 강원도와 함경도가 접한 곳으로 봄과 가을에 금강산 유람을 떠나는 길손들이 많아 주모를 두고 심부름 하는 머슴을 서넛 두고도 장사는 잘 되었지요.
안진사네 그 일이 있기 전 까지는 말입니다."
여인의 말씨는 무척 차분했다. 그러나 벼슬은 어떤 벼슬을 하였었고
이름은 어떻게 되는지 밝히려 하지 않았다.
"내 처음부터 내력이 있는 집안분 이라고 생각하였는데 그 생각이 맞았소이다.
그럼 대접을 잘 받았고 , 이만 떠나가겠소이다."
김삿갓은 삿갓을 찾아 손에 들었다. 그러자 여인이 황망히 그를 만류한다.
"바쁘신 길이 아니라면 며칠 쉬었다 가세요. 내일 써주신 글을 관가에 낼 터인즉, 그 결과를 보시고 가심이 좋을 것 같습니다."
김삿갓도 휑하니 떠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이처럼 아름다운 여인과 가까이 말해 본 것 조차도 얼마만 인가 ?
그는 못이기는 체 하고 주저 앉았다.
"부인이 혼자 계신다 하는데 외간인 제가 이곳에 머물러도 되겠습니까 ? "
"그런것은 쾌념치 마시고 편하게 계세요. 선비님이 아니셨던들 내일 사또께 청원서를 낼수 있었겠습니까 ? "
김삿갓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여인이 다시 말했다.
"이곳은 길가의 방이라 유하시기 불편하실 터이니 안채로 드세요.
주인께서 쓰시던 사랑방이 있습니다."
김삿갓은 일이 매우 묘하게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않고 앞선 여인을 따라 사랑으로 들어갔다.
~~24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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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24~25)
* 月白雪白 天下地白 ..
여인을 따라 들어간 사랑방은 조금전 까지 누군가 사용하던 것처럼 매우 정갈했다.
기름을 잔뜩 먹음은 장판은 거울처럼 번들 거렸다.
"잠시 기다리셔요. 목욕물을 데워 놓을테니 목욕을 하시지요."
김삿갓은 어안이 벙벙했다. 외간남자가 안채로 들어온 것도 과분한데, 목욕물을 데워 준다는 것은 천만 뜻밖의 일 이었다. 허나, 이순간 모든 것의 결정권은 여인이 가지고 있었기에 그는 여인이 하자는 대로 그저 묵묵히 따를수 밖에 없었다. 혼자 따듯한 방에 앉아있으려니 졸음이 사르르 찾아왔다. 그는 벽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방금전 까지 자신과 마주대했던 미모의 여인에 환영이 눈 앞에 어른거렸다.
그러면서 자신도 알수 없는 미지의 세계가 온 몸을 휘감았다.
"주무셨나봐요."
얼마가 지났을까 여인의 부름소리에 눈을 떴다.
방문은 이미 열려 있었고 여인은 바시시 웃으며 문밖에 서 있었다.
"졸리시면 그냥 주무시게할걸 그랬나봐요."
"아이쿠, 그만 깜빡 졸았습니다." 김삿갓은 여인의 수고에 겸연쩍게 대답했다.
"목욕물이 데워졌으니 욕간으로 오세요. 저 아래 뜰에 있어요."
김삿갓은 실로 몇 개월만에 따듯한 물로 목욕을 했다. 때가 국수가락 처럼 나온다더니, 김삿갓의 경우를 두고 한 말 인것 같았다.
목욕을 마친 물이 마치 재를 풀어놓은 듯이 쟂빛 이었다.
"뜻하지 않게 호강 한번 잘 하는구나."
김삿갓은 기분이 무척 상쾌했다. 목욕을 끝내자 바로 저녁상이 들어오는데,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였다.
어떻게 닭을 잡았는지 닭찜이 올라와 있었고 향기로운 술도 한병 올려져 있었다.
맛있는 음식에 술 한병까지 모두 비우고 나니 세상 부러울 것이 없었다.
"세상 참 ,배가 부르니 만사가 조그맣게 보이는군... "
김삿갓은 집을 떠나 방랑길에 오른후 오늘처럼, 마음 편하게 음식을 먹으며 호사를 부린 때가 있었는지 생각해 보았다.
없었다. 항상 때마다 끼니를 찾아 주린 배를 채웠지만 그것은 피치 못할 형편이었을 뿐, 언제나 부담이 있는 끼니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곳에서의 식사는 편안했다.
그것은 아마도 경계심을 가지고 자신을 대하던 여인의 태도 변화에서 기인했을 것이다.
밤은 소리없이 깊어만 가고 있었다.
주인여자는 깨끗한 금침을 들여놓고 자리끼 까지 갖다 놓은후 안녕히 주무시라는 인삿말을 남기고 안채로 들어갔다.
자리에 누운 김삿갓은 갑자기 여인이 그리워졌다. 또 안주인 여자가 아니더라도, 이제 갖 스물을 넘긴 청춘의 젊은 피는 본능적으로 이성을 그리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불속에서 몸을 이리저리 뒤챘다. 그러면서 지금쯤 안방에서 옷을 벗고 잠자리에 있을 여인의 생각 뿐이었다.
"무엇을 하고 있을까 ? .. 혹시 나와 같은 상념에 사로 잡혀 있을까 ? "
온갖 잡생각이 그의 뇌리를 채우고 넘쳤다.
"안방으로 슬며시 건너가 말을 붙여 볼까 ?
..일엽편주(一葉片舟)의 고해(苦海)를 건너는
인생무상(人生無常)을 함께 논 하여볼까 ? ... "
온갖 잡념이 그를 짖눌렀다.
"아냐 ..지금쯤 그녀도 내가 오기를 기다릴지 몰라.."
한편으론 "까짓 사내녀석이 과부 하나쯤 꺾지 못해서야 사내라고 할수있나 !..."
그는 스스로 엉뚱한 자기 생각을 합리화 시켜 보기까지 하였다.
"흥, 기껏 목욕까지 하고 배불리 먹고 따듯한 방에 금침을 깔고 누우니
고마운 생각보다 엉뚱한 생각을 하는구나, 쯔쯧 ..."
이렇듯 자신을 꾸짖으며 소리를 내 중얼거렸지만 그의 귀와 눈이 자꾸만 안방쪽으로 향하는 본능은 억제 할수 없었다.
"헛참 ! "
그는 입맛을 다시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을 휘둘러 보니 문갑위에 연적과 필묵이 보였다. 그는 벼루를 꺼내 천천히 먹을 갈았다. 먹물이 짙어지기도 전에 글이 그의 머리속 에서 이미 정리가 다 되었다
客愁蕭條 夢不仁
(객수소조 몽불인)
<쓸쓸한 나그네의 베갯가의 꿈은 산란하고 >
滿天霜月 照吾隣
(만천상월 조오린)
<서리찬 달빛만이 더욱 외로 워라>
綠竹蒼松 千古節
(녹죽창송 천고절)
<푸른대와 소나무는 영원불멸의 절개를 뽐내지만>
紅枇白李 片時春
( 홍비백이 편시춘)
<홍도와 백리는 봄에만 피고지지않던가>
昭君玉骨 胡地土
( 소군옥골 호지토)
<왕소군의 육신도 오랑캐 땅의 한줌 흙이 되었고>
貴妃花容 馬嵬㕓
( 귀비화용 마외전)
<꽃같던 양귀비도 마이산 아래 티끌로 변했다>
世間物理 偕如此
(세간물리 해여차 )
<세상살이 이치가 이러할 진대>
幕惜今宵 解汝身
(막석금소 해녀신)
<그대 오늘밤 몸풀기를 너무 아까워하지 마소서>
김삿갓은 이렇게 써놓고 몇번씩이나 읽어보았다.
복숭아 꽃이나 오얏꽃이나 봄에만 화려하게 피어 났다 지고 나면 그뿐이며 , 청춘도 이같아 일생을 통해 잠깐 지나가는 한 때라는 암시였다.
게다가 천하 미녀 왕소군도 흥왕에게 끌려가 임을 그리다 죽으니 한줌 흙으로 돌아갔고, 당 현종을 사로 잡았던 양귀비도 안록산과 함께 잡혀 한 줌 티끌이 되었으니 허무한 일이 아니냐는, 충동을 불사르고 어여쁜 밤을 함께 하자는 추파의 글이었다.
김삿갓은 혼자 빙그레 웃었다.
"그럼 이것을 어떻게 전한다 ?"
김삿갓은 써놓기는 하였으나 다음 생각은 도무지 나지 않았다.
"에라 모르겠다, 사내 대장부가 먹은 마음을 그대로 실행 해야지 무엇을 망설인단 말인가"
그는 스스로를 위안하고 종이를 들고 살그머니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안방을 살펴보니 아직도 불이 켜져 있었다. 그는 살그머니 방쪽으로 다가가 귀를 기울였다.
방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고 여인은 잠 든것 같지는 않았다. 가슴은 연신 두근거렸다.
김삿갓은 살며시 장짓문을 열었다. 장짓문이 바사삭 소리를 내며 열리는데도 여인은 아는지 모르는지 기척이 없었다. 김삿갓은 문틈으로 살며시 종이를 밀어 넣었다.
"어머나 ! "
비로서 여인의 놀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김삿갓은 아무말 없이 방문을 다시 살며시 닫았다.
여인이 종이를 펼쳐 보는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 앞에서 한동안 쥐 죽은듯이 방안의 동정을 살피던 김삿갓은 애가 탔다.
지금쯤이면 글을 모두 읽었을 것인데 방안의 동정은 쥐 죽은 듯이 고요하기만 하였다.
(젠장 , 글 뜻이 무슨 소리인지 모르는게아냐 ?)
김삿갓은 자신이 여인의 교양을 너무 높이 본 것 아닌가 여겼다.
그러나 이쯤 나갔으니 이제는 그대로 물러 설수도 없다고 생각했다.
"에헴 !"
잔기침을 해서 아직도 자신이 방문 앞에 서 있음을 여인에게 알리고 싶었다.
"누구셔요 ?"
여인은 딴청을 부리며 물었다.
"사랑채 선비 말고 누가 또 올 사람이 있소이까 ?"
이번에는 김삿갓이 튕겨 보았다.
"어찌 밖에 계셔요. 추우실터인데 .."
"글을 보셨으면 답장을 받아야 할것 아닙니까 ?"
그제서야 방문이 열렸다.
"남녀가 유별할 시각이지만 은밀히 찾아오신 손님을 내쫒을 수야 있나요. 들어오세요."
김삿갓은 여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방안으로 들어갔다.
"어 춥다 ! "
김삿갓은 깔아 놓은 비단 이불을 들추고 몸을 밀어 넣으며 능청을 피웠다.
"어머,어머" ...
여인은 얼굴이 상기되며 김삿갓의 무례한 행동을 새삼스럽고 흥미있게 바라 보았다.
"허, 내 오늘 부인의 미모와 교양에 취하여 나비가 되어 찾아왔습니다 그려.."
"호호호 ..그럼 제가 꽃이란 말씀이신가요 ?"
"아무렴요 향기를 가득 품은 꽃이지요"
여인은 본능적으로 교태를 짓고 있었다. 김삿갓은 슬그머니 여인의 허리를 감았다.
"이러시면 안되요."
여인은 살며시 몸을 꼬으며 삿갓의 애간장을 녹였다.
"아까 나의 뜻을 전해 드리지 않았습니까. 더구나 이 큰 집에는 부인과 나밖에 없습니다.
피 끓는 젊은 남여가 하룻밤 회포를 푼다고 죄 될 것이 없습니다.
부인, 모처럼의 기회 우리 두사람 ..회포를 맘껏 풀어 봅시다."
이렇게 말을한 김삿갓은 여인의 허리를 힘껏 껴안은 채 비단요 위에 천천히 뉘었다.
김삿갓은 초례를 마친 신랑이 신부의 옷을 벗기듯 , 떨리는 손으로 여인의 옷을 하나씩 벗겨갔다.
하나씩 벗겨질 때 마다 여인은 온 몸을 움츠렸다.
그리고 벗긴 옷 끈을 쉽게 놓지 못하고 끝을 잡고 있었다.
여인의 몸은 우윳빛 처럼 희고 탄력있었다. 벗겨 놓은 몸에서는 난사향이 풍겼다.
"아아 ..이렇듯 황홀한 때가 또 있었던고 ?" 김삿갓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여인은 얼굴이 상기되어 가볍게 떨고 있었다.
두사람이 한테 섞이는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서로 ,육욕에 굶주린 세월과 시간이 얼마이던가 ?
김삿갓과 여인은 외금강과 해금강이 동해에서 섞이듯, 소용돌이 치며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
김삿갓은 폭포수가 절벽 아래로 내리 꼿듯 모든 것을 토해냈다.
여인은 은절구가 되어 세찬 폭포수를 온 몸으로 받아 주었다.
夜深, 水作瀑杵 春絶銀臼 ..
<깊어가는 이밤 ,
물은 세찬 폭포가 되어 은절구를 찧고 ..>
窓外, 月白雪白 天下地白 ..
<창밖에는,
달빛도 희고 눈빛도 희고 세상천지 모두 하옛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방랑시인 김삿갓(25)
*관북천리 (關北千里)..
다음날 , 김삿갓은 사랑방에서 느즈막히 일어났다. 밖에서는 사람 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온 것 같은데 여인이 뭐라고 분부를 내리는 것으로 보아 , 식구들이 돌아온 모양이다.
어떻게 연락을 했는지 주모도 돌아왔고 머슴도 돌아왔다.
안방 여인은 사랑에 묵고 계시는 선비가 천하의 명문장가로 청원서를 써주셨으니, 아침이 끝나는 대로 관아에 가지고 가야한다고 설쳐댔다.
여자란 낮과 밤의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더니 그말이 옳다고 김삿갓은 생각했다.
지난밤에 있었던 두 사람의 황홀한 순간을 생각한 것이다.
잠시후 아침상이 들어왔다. 역시 상다리가 휘어졌다.
"저는 마당쇠를 데리고 관아에 들어가 어제 써주신 글을 직접 사또께 드리고 오겠습니다.
떠나지 마시고 사또가 어떻게 일을 처리하는지 보셨으면 좋겠어요."
여인은 남편에게 대하는 모양으로 말을 하며 은근히 김삿갓을 붙잡았다.
김삿갓은 대답대신 빙그레 웃음으로써 자신의 의사를 표시했다.
관아로 떠난 여인은 점심나절이 되자 만면에 희색을 띄며 돌아왔다.
앞으로 열흘안에 안진사네 산소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사또의 약속을 받아왔다고 하였다.
"청원서를 써준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고 묻기에 삿갓을 쓴 젊은 과객이라 하였더니, 사또의 낯빛이 변하더군요. 암행어사라도 되는줄 알았던가봐요."
여인은 다녀온 관아에서의 일을 소상히 말하며 김삿갓을 향해 은근한 추파를 던져왔다.
그날밤 김삿갓은 아랫 사람들 모르게 주인여자와 다시 은근한 정을 나누었다.
다음날 일찍 , 관아에서 나졸 하나가 찾아왔다.
"주인 마님 계십니까 ?"
나졸은 사또의 분부라며 급히 주인 여자를 찾았다. 주인 여자가 나오자 나졸은 이렇게 말을했다.
"아주머니, 어제 올리신 청원서를 보신 우리 사또께서 크게 탄복을 하시고 오늘중에 안진사를 불러 해결을 한다고 하셨으니 염려는 안 하셔도 되겠습니다. 그러나 사또께서 어제 그 글을 쓰신, 선비께서 아직도 댁에 유하고 계신지 알아보고 오라 하셨습니다."
"아직 유하고 계십니다만 무슨 일 이신지요 ?"
"만나 뵙고 사또의 말씀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김삿갓은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모두 듣고 있었다.
"그러시다면 이리 오세요."
사람들이 다가오는 소리가 문밖으로 가까워졌다.
"저 손님 ! "
여인이 김삿갓을 불렀다. 그는 방문을 열었다.
"뉘시오 ? "
김삿갓은 밖에 이야기를 다 듣고 있었지만 시침을 떼고 물었다.
"선비님이셨군요. 저희 사또께서 분부를 하셔서 찾아뵈었습니다."
"사또께서요 ? 나는 죄 지은일이 없는데."
"그런것이 아니고 선비님께서 어느때 이곳을 떠나실지 모르겠사오나, 떠나시기전에 꼭 한번 뵙고 싶다고 하십니다."
"무슨 일 이랍니까 ?"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저희 사또께서 풍월을 즐기시는 터이라 어제 선비님이 써 올리신 청원서를 보시고 몇번씩 감탄 하신 것으로 보아 모셔다가 풍월을 즐겨 보시려는가 봅니다."
"허, 이거 영광이로소이다. 내 오늘중에 찾아 뵙겠다고 말씀 올리시구려."
나졸은 삿갓에게 고개를 굽신하더니 물러갔다.
김삿갓은 더 머물러 있으라는 여인의 청을 뿌리치고 길을 떠났다.
그가 관아에 도착한 때는 정오가 조금 비켜서였다.
"어서 올라오시오."
사또는 마치 구면을 대하듯이 그를 반겨주었다.
"보잘것 없는 일개 과객을 이렇듯 환대해 주시니 황송하기 그지 없습니다."
김삿갓은 공손히 예를 올렸다. 사또는 사십쯤 된 장년으로 안색도 허옇고 살집도 있어 호인의 인상으로 보였다.
"앉으십시다. 어제 보낸 글을 보고 내 무척 탄복했소이다. 그래 한번 만나뵙고 술이라도 한잔 나누고 싶은 마음이었지요."
김삿갓은 자신의 글을 알아보는 사또에게 호감을 느꼈다. 아울러 사또도 상당한 실력가 일것 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우리 통성명이나 합시다. 나는 권오익이라 합니다."
사또가 먼저 자기 이름을 밝혔다.
"죄송합니다만 삿갓을 쓰고 정처없이 떠도는 나그네가 근본이 있겠습니까.
다만 본관은 장동 김씨이오니 김립(金笠)이라 불러주십시오."
"김립이오 ? "
사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렇습니다."
"그럼 금강산 일대에서 시선 (詩仙)으로 이름을 날리던 그 김삿갓이십니까 ? "
김삿갓은 흠칫 놀랐다. 어떻게 이런 조그만 고을의 수령이 자기의 행장을 알고있단 말인가.
"시선이라니 가당치 않습니다. 그저 금강산에서 여름부터 가을까지 머물러 있었습니다."
"허허허, 이거 무척 반갑소이다. 이건 분명히 하늘이 내리신 인연이외다.
내 김선비의 선성을 벌써부터 듣고 내심 부러워 하고 있던 참입니다."
사또는 김삿갓의 손을 덥썩 잡기까지 했다.
김삿갓은 일개 방백이지만 한 고을의 수령이 자기를 알아주니 기쁘기 그지 없었다.
"다만 송구스러울 뿐입니다. 이렇게 면전에 보시니 실망이 크실줄로 짐작 됩니다."
"거 무슨 말씀이오, 이곳은 아시다시피 함경도에서 금강산으로 가는 길목 입니다.
봄 가을이면 금강산으로 오가는 유람객이 많습니다.
내 얼마전에 금강산에 다녀온 한 문우(文友)로 부터 금강산에 그동안 없던 젊은 시선이 나타났다는 말을 들었소이다."
김삿갓은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의 이름이 퍼져나가고 있음을 알았다.
"과장된 이야기 같습니다. 사또"
"무슨 말씀 , 내 친구는 헛소문을 전하는 사람이 아니올시다. 하였든 이렇게 만났으니 기쁘오.
오늘은 우리 약주나 나누면서 시나 읊어봅시다."
사또가 명을 내려 주안상을 준비하라 이르니 주안상은 마치 기다리고 있었단듯 지체없이 들어왔다.
두사람은 주거니 받거니 하며 술을 나누었다.
"김선비 , 이만하면 시 한수가 나올만도 하지 않습니까 ?"
"예, 시제를 주시면 한수 지어보겠습니다."
"그림자 영(影)자 어떻습니까 ?"
김삿갓은 잠시 술잔을 내려다 보고 있다가 붓을 들었다.
進退隨 (나)농 壟汝恭
(진퇴수농 막여공 )
汝(나)농 酷似 實非(나)농
(여농혹사 실비농)
月斜岸面 驚魁狀
( 월사안면 경괴장 )
日午延中 笑矮容
( 일오연중 소왜용 )
杭上若尋 無(찾을)역 得
( 항상약심 무역득 )
燈前回顧 忽相逢
( 등전회고 홀상봉 )
心雖可愛 終無信
( 심수가애 종무신 )
不映光明 去絶跡
( 불영광명 거절적 )
<나들이 할때 나를 따름에 공손하기 그지 없으며>
<너와 내가 같이 보이지만 실은 같을 수가 없도다>
<달이 서산에 기울면 너의 긴 모습에 놀라기도 하지만>
<하늘 복판에 이르러선 난장이 같은 너의 모습에 웃음이 절로 나오네>
<베개 위에서 찾으면 찾을 수가 없다가도, 등잔 앞으로 돌아서면 문득 만나게 되는구나>
<마음으로는 비록 사랑하나 믿을수는 없으니, 광명을 비추지 않으면 종적을 알수 없으니 안타까운 일이로다.>
김삿갓이 글을 마치자 사또는 무릅을 쳤다.
"좋습니다. 참 좋습니다.
과연 김삿갓이란 이름이 유명할만
합니다."
"과찬이십니다. 사또."
"과찬이라니오. 시란 어떤 글자를 써서 표현하는가도 중요하지만 시상을 글에 어떻게 넣어 지으냐도 중요하지요. 가히 따라하지 못할 만큼 훌륭한 시를 보여주셨습니다."
김삿갓은 시가 어떤것 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또가 참 멋들어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저녁늦게까지 두 사람은 시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 받다가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아침 김삿갓이 떠나려하자 사또는 못내 섭섭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디로 가실참 입니까 ? "
"안변으로 갈까 합니다."
"그것 참 잘되었습니다. 그곳 수령이 바로 내 친구올시다. 과거는 나보다 일년 앞섰으나 같은 스승 밑에서 공부를 했지요. 문장이 뛰어나고 예서와 경서에 능통해 장차 큰 재목이 될 사람입니다. 김선비가 그곳으로 가신다니 내 소갯장을 가지고 가신다면 좋은 글벗을 만나게 되실터인즉 , 안변에 가시거든 찾아가 보십시오."
사또는 김삿갓의 시에 대하여 언급하고 교우를 해보라는 내용으로 소개장을 써주었다.
김삿갓은 소개장을 품에 간직하고 사또를 하직한 후 다시 정처없는 발길을 옮겼다.
길을 떠난 열 하룻만에 김삿갓은 안변에 당도했다. 안변은 원산을 위로두고 있어, 교통의 요충지일 뿐 아니라 넓지는 않으나 평야에 자리잡고 있어 곡식이 풍부했다.
안변의 진산(鎭山)은 학성산이다. 가학루(駕鶴樓)는 학성산 동쪽 언덕위에서 동해를 굽어보며 날아갈듯 솟아있는 안변에 유명한 정자이다.
김삿갓은 가학루 다락위에 올라 사방을 두루 살폈다.
가학루에는 이곳을 다녀간 많은 시인의 글이 현판으로 걸려있었다.
그중에서 고려말 마지막 충신이었던 정몽주의 시가 눈길을 끌었다.
시문하인 시기루
( 試問何人 始起樓 )
<묻노니 이 다락을 누가 세웠던고>
등임료복 위엄류
( 登臨聊復 爲淹留 )
<내 이제 다락에 올라 오래 머무노라>
십년도노 부심사
( 十年徒勞 負心事 )
<십년 세월 헛되이 모든 것을 잊었다가>
백전산하 감루류
( 百戰山河 堪淚流 )
<옛 싸움터를 바라보니 눈물이 절로솟네.>
이곳 가학루 다녀간 만고충신 정몽주, 다락에 올라 본 것은 안변의 경치가 아니라 옛날의 싸움터를 먼저 보았던듯, 눈물을 흘리며 나랏일을 걱정하였던 모양이다.
그 옆에는 이조 개국공신인 정도전의 시도 걸려 있는데 , 정몽주의 시와는 지극히 대조적이었다.
上相登臨 駕學樓
( 상상등임 가학루 )
<영의정께서 가학루에 오르시어>
眼前詩句 壁間留
( 안전시구 벽간류 )
<보고 느끼신 것을 현판에 남기셨으니>
江山信美 非吾土
( 강산신미 비오토 )
<강산이 아무리 좋아도 내 땅은 아니니>
歲月無情 逐水流
( 세월무정 축수류 )
<세월만 덧없이 물따라 흘러가네.>
~~26회로~~
^^~~~%%%~~^^
●방랑시인 김삿갓(26) - ( 27)
* 김립 훈장.(金笠 訓長)
학성산 서쪽에는 표연정이 있어 , 동쪽 가학루와 쌍벽을 이룬다.
"가학루 보다는 서쪽에 있는 표연정이 더욱 좋으니 그쪽에도 한번 가보시죠." 누가 그렇게 일러주기에 김삿갓은 서슴지 않고 표연정으로 발길을 돌렸다. 과연 표연정은 뛰어난 누각이었다.
주위에는 해송(海松)이 울창하고 숲속에서는 꾀꼬리가 영걸스레 울어대고 바다와 접한 남대천 일대는 갈매기가 부산스럽게 날아 다니고 있었다.
시흥이 도도해진 김삿갓은 누각위에서 시 한 수를 읊었다.
표연정자 출장제
(瓢然亭子 出長堤)
<표연정은 긴 뚝에 우뚝 서있고>
학거누혈 조독제
(鶴去樓穴 鳥獨啼)
<학은 가고 빈 누각에 새만이 홀로 우네>
십리연하 교상하
(十里煙霞 橋上下)
<저녁노을은 십리에 뻗쳐 다리를 위아래로 감싸고>
일천풍월 수동서
(一天風月 水東西)
<하늘은 한 색 인데 달은 동서의 물결위에 흐른다>
신선종적 운과묘
(神仙踪跡 雲過杳)
<신선이 놀닐던 종적은 구름에 지워 아득하고>
원객금회 세모유
(遠客襟懷 歲暮幽)
<나그네 회포는 해가 저무니 더욱 사뭇치도다>
우화문전 무문처
(羽化門前 無問處)
<깃 꽂힌 문전에서 물을 곳이 없으니>
봉래소식 몽중미
(蓬來消息 夢中迷)
<봉래산 신선의 소식은 꿈 속에서 아득하구나.>
시를 읊고난 김삿갓은 누각 아래로 흐르는 시냇물을 굽어 보았다.
산 그림자가 한폭의 그림자로 시냇물에 어둡게 어른거렸다.
벌써 저녁 나절이 된 것이다. 안변 읍내는 밥짓는 연기가 지붕위로 몽실몽실 피어 올랐다.
김삿갓은 오늘은 어느집 문전을 두드릴까 생각을 하였다가 곧 마음을 고쳐 먹었다.
이곳 안변에 이르는 지난 얼마간 주막집 여인과 권오익 사또 덕분에 잘먹고 편하게 잠을잤다.
그러다보니, 불과 며칠사이에 김삿갓은 배부른 흥정이 앞섰다.
게다가 지금 품속에는 권사또의 소개장이 있지 아니한가 ?
안변읍 관아는 읍내 중앙에 있었다.
이제는 잎이 다 떨어졌지만 아름들이 느티나무와 팽나무가 울울히 들어선 곳에 관사가 있었다.
김삿갓은 위문(衛門)에 이르렀다. 수문장이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사또 나리를 뵈러 왔소이다. 자, 이것을 사또께 전해주시오."
그는 품속에서 소개장을 꺼내어 수문장에게 주었다.
수문장은 봉서를 받아가지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한참을 기다렸더니 그가 나타났다.
"이리 따라 오시오."
김삿갓은 그의 뒤를 따라갔다. 몇채의 집을 지나자 후원이 나타났다.
연못을 휘둘러 안쪽으로 들어 가자 문선재(文善齊)라는 현판이 붙은 아담한 별채가 나타났다.
"손님 모시고 왔습니다."
두칸 미닫이 문 앞에서 수문장은 고개를 굽신거리며 아뢰었다.
"듭시라 일러라."
방안에서 젊잖은 목소리가 들렸다.
"듭시지요."
수문장의 말에 김삿갓은 방안으로 들어갔다.
사또는 의관을 갖추고 책을 읽고 있다가 김삿갓을 맞이 했다.
"문안드립니다. 사또 ! "
김삿갓은 우선 인사부터 올렸다.
"소개장은 잘 보았소이다. 나는 권공하고는 막연한 친구 사이지요. 그의 소개로 천하의 문장가와 이렇게 만나게 되었으니 기쁘기 그지 없소이다."
안변사또는 목소리도 걸걸하고 체격도 우람한 대장부였는데 ,
첫눈에 김삿갓은 그와 의기가 상통할 것 같았다.
"공사가 끝난 해걸음에 , 이렇게 찾아 뵈온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원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원래 나는 놀기를 좋아해서 내 문전에는 시인묵객이 자주 왕래합니다.
더구나 김선비는 내 친구의 소개이니 더욱 반갑소이다. 이왕 오셨으니 마음편히 계십시오."
두사람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조금씩 친숙해 갔다.
"오늘 안변 구경은 하셨습니까 ? "
"예, 가학루와 표현정 경치를 구경하였습니다."
"시신께서 그곳을 보시고 그냥 내려오시지는 않았겠지요 ? "
은근히 시 솜씨를 보자는 말이었다.
"예, 표현정 저녁 경치가 좋아 스스로 읊조려 보았습니다."
"듣고 싶습니다."
김삿갓은 아까 읊조렸던 시를 낭송했다.
"참 좋습니다. 표현정을 두고 많은 시객들이 시를 지었습니다만 , 김선비 같은 시인은 아직 만나지 못했습니다. 한번으로는 어쩐지 서운 합니다. 한수만 더 들려주십시오.
그리고 시란 쓰는 맛과 보는 맛도 무시할 수 없으니 자, 여기에 적어 주십시오."
사또는 지필을 내놓았다.
김삿갓은 한 수가 아니라 열 수라도 사양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필을 들기 무섭게 죽죽 써내려 갔다.
林亭秋己晩 騷客意無窮 .
(임정추기만 소객의무궁)
<숲속 정자에 이미 가을이 깊었으매 , 글 짓는 나그네의 심사는 덧없이 슬프도다>
遠水連天碧 霜楓向日紅
(원수연천벽 상풍향일홍)
<물길은 멀어 하늘에 닿을 듯 푸르른데 ,서리 맞은 단풍은 햇빛을 받아 붉기도 하여라>
山吐孤輪月 江含萬里風
(산토고윤월 강함만리풍)
<산은 동그런 달을 외롭게 내뿜고 ,강은 멀리서 오는 바람을 함껏 먹음었네>
塞鴻何處去 聲斷普雲中
(새홍하처거 성단보운중)
<변방에 기러기는 어디로 날아가느냐 ,구슬픈 소리가 저믄 구름 속에서 들려오누나>
"김선비,이런 글이 대체 어디서 나오는거요 ? 실로 탄복할 일 입니다 ! "
사또는 동그런 눈으로 김삿갓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기막히다는 표시였다.
"내 숱한 시객을 만났지만 이런 시를 보기는 오늘이 처음이오. 내 친구가 좋은 분을 소개했구려."
시를 아는 사또는 김삿갓의 시풍에 깜빡 반해버렸다.
술상이 나오고 취기가 도도해지자 두 사람은 비록 나이의 차는 있으나 십년지기 처럼 흉 허물 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밤이 깊어지자 사또는 정갈한 방을 하나 내어주었다.
그리고 내집에 온 것 처럼 불편을 느끼지 말고 지내라고 누누히 당부를 하였다.
다음날 조반은 일찍 들어왔다.사또는 오전중 공사를 보느라고 자못 바쁜 눈치였다.
김삿갓은 따뜻한 방안에서 홀로 딩굴고 있노라니 세상근심 모두가 사라지는 듯했다.
점심상을 물리고 나니 사또가 몸소 김삿갓 방으로 들어왔다.
"혼자 무료하셨겠구려."
"아닙니다. 사또님 덕분에 세상 편하오이다."
"내 오늘 저녁에는 큰 잔치를 베풀까 하오. 더불어 이 근방에 글 깨나하는 양반들을 초청하여 시회를 겸할까 하니 ,김선비의 재주를 한번 보이도록 하시오."
글을 짓는 놀음이라면 어찌 김삿갓이 싫다하랴. 덕분에 푸짐히 먹고 놀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헌데 한가지 청이 있소이다."
사또는 낮빛을 고쳐가지고 말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신가요 ? "
"내게는 자식이 둘, 딸이 셋 있습니다. 큰 딸은 작년에 출가를 하였고 장남은 올해 열 일곱으로 과거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지방 향교(鄕校)에서 공부를 하였는데 지난 달 부터 집으로 돌아와 홀로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그 애가 과거를 볼 때 까지 스승이 되어 주셨으면 합니다. 내 사례는 톡톡히 하리다."
김삿갓은 자못 심각해졌다. 과거를 준비하고 있다면 이미 기초를 뛰어 넘어 수준 높은 경서나 문집을 공부하고 있을 것이다. 김삿갓이 걱정하는 것은 가르치는 실력의 문제가 아니라, 가르쳤다 손 치더라도 따라 공부하는 학동의 수준이 이르지 못하는 경우가 우선이고 , 또한 열심히 공부를 하였더라도 과거에 급제를 하지 못하면 선생 노릇을 한 보람을 찾을수 없다 여겼기에 그는 망설였다.
"어떻소이까 ? 바쁜 일정이 아니라면 내 청을 들어주시오."
사또가 재삼 이렇게 말을 하자 비로서 김삿갓이 입을 열었다.
"한낱 떠돌아 다니는 과객을 그토록 생각하시니 고맙습니다. 하오나 소생의 글이 워낙 짧아, 감히 소임을 이룰 능력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 무슨 말씀이시오 ? 하나를 보면 열 을 알수 있다 하였소. 그대의 시를 보고 읽는 순간 ,나는 오늘에서야 내 자식의 큰 선생님을 만났다고 생각하였소. 아울러 내 자식이 가히 아둔한 아이가 아니기에 가르치는데도 애를 먹지는 않을게요. 시경(詩經)에 중점을 두어 가르쳐 주셨으면 좋겠소.
꼭 부탁을 합니다."
김삿갓은 역시 망설이다가 마침내 승락을 하였다. "본인이 천학비재(賤學非才) 이오나 ,사또님의 지극한 분부가 있어 수락하오니 너무 큰 기대는 마시기 바랍니다."
"하하하하.. 역시, 그대의 겸사에 말이 지나치군요. 하긴 빈 수레가 더 요란하다 하였으니 그대의 겸양지사가 평소의 풍모를 보는듯 하오, 그대 같은 스승을 모시게 되어 아들놈도 크게 기뻐할 것이오."
이로부터 사또는 김삿갓을 "김선생님"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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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27)
* 가련과의 첫 만남.
"이따 밤에 벌어지는 연회는 이곳 안변지방에 내노라는 양반들이 모일겝니다. 내가 글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 문자를 써가며 이야기를 하려고 무진 애를 쓸 것이오. 하며, 김선생을 보면 얕잡아 보려고 할 터인즉 ,잘 알아서 골려 주시구려."
사또는 빙그레 웃으면서 귀띰을 해주고 다시 동헌으로 나갔다.
이윽고 저녁이 되었다.
시회를 겸해 열리는 잔치는 동헌 곁에 있는 빈청에서 베풀어졌다.
초청받은 양반들은 이미 들어와 앉아 있었으며 기생들은 조붓하게 앉아 있다가 사또의 행차를 맞아 ,일제히 일어서 예를 갖춘후 ,사또가 상석에 앉자 일제히 다시 자리에 앉았다.
한편, 김삿갓은 사또의 권하는 손짓을 보고 사또의 왼쪽에 앉게 되었다.
"여러분들 잘 오셨소이다. 내 오늘은 귀한 손님 한 분을 여러분께 소개하겠소이다.
이 분은 금강산에서 시로써 이름을 날려 시선이란 칭호까지 듣게 된 김선생 올시다."
자리가 정리되자 사또는 우선 김삿갓을 소개했다.
이어 초청된 양반들을 김삿갓에게 소개했다.
"저쪽 팔자수염을 하신 분은 원생원(元生員)이고 , 그 옆에 코주부 영감은 서진사(徐進士)며, 바른쪽 꽁생원 같은 분은 문첨지(文僉知)고, 그 왼쪽 눈꼬리가 치켜진 분은 조석사(趙碩士)올시다."
김삿갓은 사또의 소개로 눈이 마주치는 그들과 가벼운 목례로써 인사를 나누었다.
아울러 그들의 면면을 살펴보니 학문의 깊이는 둘째 치고, 돈푼이나 있는 덕분으로, 사또와 친교를 맺고 있는 모양으로 보였다.
"저 네분이 이곳 안변에 사걸(四傑)로 자못 이름이 높은 분들이오."
사또가 이쯤 말을 하자 네 사람 모두 한껏 점쟎을 빼며 김삿갓을 쳐다 보았다.
(내 저것들 문전을 두두려 먹을 것과 잠 잘 곳을 청 했더라면 틀림없이 밥 한 술 주지 않고 박정한 소리로 쫓아냈을 것이다...)
김삿갓이 그동안 방랑을 하며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의 행태를 가름하여 그들 사인을 보건데 , 자신의 짐작이 틀림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 그들의 점잖빼는 태도가 더욱 밉살스럽게 보였다.
"아니, 너희들은 뭣들 하는게냐 ? 새로 오신 손님에게 인사 올리지 않고 ... "
사또는 기생들에게 호령을 내렸다.
"예, 소첩은 설매라 하옵니다" 제법 큰 형님 뻘 쯤 되는 기생이 좌중에 먼저 고 했다.
설매(雪梅)라 ..딴은 영락 없는 기생 이름이로되, 매화치고는 나무가 고목이 되어 간다고, 김삿갓은 생각 되었다.
"소첩은 향현(香峴)이라 하옵니다."
향기 그윽한 언덕이라..이름이 좋아 보였다.
"소첩은 은하(銀河)라 하옵니다,
역시 운치가 있는 이름이었다. 은하는 기울어 야삼경인데 임은 어이해 오시지 아니하신가..
하는 시가 있지 않던가 ?
"소첩은 춘국(春菊)이라 하옵니다."
허허, 국화는 가을에 피어야 향기 높고 청초하거늘 어찌하여 봄에 피었느냐.
그러고 보니 몸이 사뭇 비대하다.
"소첩은 소엽(素葉) 입니다."
야들야들하게 생긴 품이 어떻게 보면 바람에 흔들릴 것 같은 나뭇잎과도 비슷하였다.
"소첩은 가련(可憐)이라 하옵니다."
가련이 ? 별난 이름이구나. 가련하다니 무슨 슬픈 일이 그리도 많아 가련하단 말이냐.
나이는 방년 이십세 쯤이나 되었을까 ?
아릿아릿하게 예쁜 얼굴이 단연 군계일학 이었다.
이렇게 기생은 좌중의 사내 숫자에 맞춰 여섯이 들어왔다.
소엽이 사또곁에 앉고 은하가 김삿갓 옆에 앉았다.
가련이는 서진사 곁에 앉았는데 둘은 벌써부터 서로 잘 알고있는 사이로 보였다.
술잔이 오가고 계집까지 곁에 있으니 흥취가 서서히 올라갔다.
"여러 양반님들께 김선생의 시 한 수를 보여 드릴 터이니 어느 분이 시제를 말씀하시오."
사또가 좌중에 말을 하자 코주부 서진사가 실눈을 뜨고 생각하는 듯 하더니 입술을 벌렸다.
"당송 팔대시인(唐宋 八大 詩人)의 이름을 넣어 시를 지으면 운치가 있을것 같소이다."
자기 딴에는 어려운 글제를 냈노라고 생각한 서진사는 턱주가리에 힘을 주어 목을 곧추 세우는 통에 늘어진 볼이 더욱 늘어져 보였다.
"당송 팔대시인이라 ..서진사, 거 참 멋진 시제를 내셨소이다. 애들아, 당송 팔대 시인이 누구누군지 알겠느냐 ?" 사또가 이렇게 말하며 기생들의 얼굴을 살피자 , 다소곳이 얼굴을 숙이고 있던 가련이가 얼굴을 들면서 낭랑한 음성으로 대답한다.
"소첩이 아뢸까 하옵니다."
"가련이 네가 ? 어디 들어보자."
사또가 귀엽다는 듯이 실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가련이를 지긋이 건네다 본다.
"첫째 이적선 (利謫仙- 李白)을 꼽사옵고 둘째로는 유종원(柳宗元), 황산곡(黃山谷), 백낙천(白樂天), 두자미(杜子美), 도연명(陶淵明), 한퇴지 (韓退之), 맹동야(孟東野)등을 꼽사옵니다."
"하하하하, 네가 잘도 아는구나. 기특하다."
사또는 너털 웃음을 터트렸다. 김삿갓은 가련이 ,글을 배운 기녀라고 생각했다.
"자, 김선생 가련이가 당송 팔대가의 이름을 대었으니 그대는 이제 시로써 우리를 기쁘게 해 주시오."
김삿갓은 정중히 예를 보내고 붓을 들었다.
장중에 사람들은 어려운 시제 임에도 불구하고 오래 생각하는 바 없이 덥썩 붓을 들어 화선지로 향하는 김삿갓의 손길을 경이로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이적선옹 골사상,유종원시 단수방 (李謫仙翁骨巳霜, 柳宗元是但垂芳)
<이백의 백골은 이미 서리가 되었고 , 유종원도 이제는 이름만이 남았도다>
황산곡리화천편, 백락천변 응수행 (黃山谷裡 花千片,白樂千邊雁數行)
<황산곡 안에는 천만송이 꽃잎만이 날리고 , 백락천 가에는 기러기만 떼지어 날아가네>
두자미인 령적막, 도연명월구황량
(杜子美人令寂寞, 陶淵明月久荒凉)
<두자의 미인도 지금은 적막할 뿐인데 , 도연의 밝은 달도 쓸쓸한지 오래어라>
가련한퇴 지하처,유유맹동 야초장 (可憐韓退 之何處,唯有孟東野草長)
<애달프다 한은 물러가 어느 곳에 있느뇨 , 오로지 맹동의 뜰에는 풀만 자라고 있구나.>
김삿갓의 처음부터 끝까지 막힘이 없이 써 내려가는 솜씨와 글씨도 놀라운 일 이지만, 만들어진 글귀 또한 천하의 일품 이었다.
좌중은 넋을 잃고 말이 없었다.
"선생님 , 실로 절묘합니다."
침묵을 깬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닌 가련이었다.
그러니까 가련이 먼저 김삿갓의 시를 감상했다는 말이다.
사또는 그제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던지,
"아니다. 네 말이 틀렸다. 이는 절묘한 것이 아니라 귀신의 솜씨로다.
아아 ! , 김선생 ! ...
당신은 실로 귀재요, 천재이오니다 !"
사또는 이렇게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런 사또의 극찬에 안변 사걸들은 말문이 닫히고 말았다.
이 순간에 섣불리 나서서 마땅히 할 말 조차 없는 지경 이었다.
그저 어서 이 자리에서 피하고 싶은 생각들 뿐 이었다.
"기가막힌 시를 보았으니 여러분들에 시흥도 솟았으리라 생각되오. 누가 한 수 읊어 보시려오.
가만 ..시제를 푼 ,서진사가 한 수 보여 주시려오 ?"
사또는 서진사를 꼬집어 지명했다. 그러자 서진사 얼굴이 금방 창백해졌다.
"사또 죄송하옵니다만 오늘은 은연중 마신 술이 크게 취하는듯 합니다. 그로인해 정신이 혼미하여 가늠키 어려우니 기회를 훗날로 미뤘으면 합니다."
이렇게 말 한 서진사의 이마 에는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혔다.
"허허, 무슨 술인지 취기가 걷잡을 수 없이 몰려오는군."
문첨지가 이렇게 재빨리 말을 하며 고개를 가누지 못하는 시늉을 해보인다.
서진사 다음으로 자신에게 화살이 쏠릴 것 같아 미리 방패막이를 친것 이었다.
~~28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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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28)-(29)
* 양반들의 김삿갓 골려먹기.
사또는 빙그레 웃었다.
다른때 같으면 자기들의 유식함을 어떻게라도 드러내려고 별의별 문자를 섞어 되는소리 안되는 소리를 하였을 것이나, 김삿갓의 시를 본 순간, 감히 자신의 실력을 드러내 보이지 못했다.
사또는 이러한 그들의 심정을 가늠하는 터라 , 더이상 괴롭히지 않았다.
"오늘 귀한 손님을 모신 자리라 특별히 비장한 술을 내놓았더니 모두 크게 취하는 모양이구료. 그럼 신기에 가까운 시를 감상하였으니 이제부터는 꽃이나 희롱하며 놉시다."
사또의 말이 끝나자 안변사걸은 일제히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연회는 밤이 늦은 후에 끝났다. 다음날 사또는 자기 방으로 김삿갓을 불렀다.
김삿갓이 사또의 방으로 들어가니 거기에는 사또의 큰 아들이 있었다.
"인사올려라. 네 스승님이시다."
사또의 말에 아들은 성큼 큰 절을 올린다.
"유선규라 하옵니다. 스승님에 대한 말씀은 저희 아버님을 통하여 익히 들었습니다.
소생 아직 우매하오나 스승님의 가르침을 정성껏 따르겠습니다."
사또의 아들 선규를 본 김삿갓은 그의 풍모와 말씨를 보아 ,큰 재목이 될 인물임을 직감했다.
"내 비록 배운 것은 없으나 아는대로 깨우쳐 줄것 이니 같이 노력하세."
김삿갓은 이렇게 답례하였다. 이로써 유선규와 김삿갓은 사제의 의를 맺게 되었다.
이날부터 별당에 글방을 차려놓고 김삿갓과 선규와의 글공부는 시작되었다.
예상대로 선규는 총명하여 한가지 이치를 깨우쳐 주면 그것을 여러가지로 응용하는 능력이 매우 우수하였다. 따라서 김삿갓은 총명한 제자를 두었음에 만족하였고 선규는 어떤 어려운 문제도 막힘 없이 술술 풀어내 쉽게 가르치는 스승의 학식에 감탄하였다.
이러한 김삿갓의 실력을 아들을 통해 전해듣고 있는 사또는 매우 기뻐 하였다.
더불어 김삿갓을 위하는 정도가 극치에 달했다.
한편, 뜻밖에도 어디서 굴러먹었는지 근본조차 알수 없는 젊은 과객이 나타나 자신들이 갖던 사또와의 교류가 잠잠해져 불안감을 갖던 안변 사걸들은 어떻게 해야 이녀석을 찍소리 못하도록 콧대를 꺾어놓나 하고 , 자나깨나 연구를 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서진사의 큰 사랑으로 사걸이 모이게 되었다.
지난번 김삿갓의 환영연 이후 사걸이 처음으로 다같이 모인 것이다.
"별고 없으셨소이까 ? " 문첨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사실 이들이 첨지나 생원등으로 서로 부르지만 생원에 급제한 일도, 첨지의 벼슬을 지낸바도 없었다.
서진사 조차도 자신의 할아버지때 진사에 급제했을 뿐 , 정작 본인은 진사시에 응시조차 못했다.
이렇듯 이들은 서로의 상대방이 좋아할 호칭을 마음대로 불러 제끼고 있었으나 , 이들은 모두 부농들이어서 소작도 많이 치고 ,행세깨나 하였기에 이들의 호칭을 문제삼아 , 감히 따지고 나설 안변 사람들은 없었다.
"여보 문첨지. 별일이 없었다니 ,그래 자네는 지난번 그 일이 있은 후 마음 편하게 지냈단 말인가 ? "
서진사가 핀잔을 주듯 이렇게 말을 하자 조석사가 잇달아 한마디 한다.
"난 낯이 뜨거워 못살겠소. 그놈의 글을 따라갈 재간은 둘째치고 , 난데없이 나타난 삿갓 때문에 사또와 우리 사이가 소원해 지겠기에 여간 걱정이 아니란 말씀이오."
모두 한 마디씩 불평을 해댔다.
문첨지가 곰방대를 뻑뻑 빨다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우리가 지금까지 이 지방에서 명문거족으로 글 잘하는 양반으로 행세해 왔는데 그놈에 삿갓인지 패랭이인지 하는 젊은 놈 때문에 , 자칯 그동안 우리가 쌓아 온 명성에 먹칠을 하게 생겼으니 잘들 생각하여 그놈을 쫒아 낼 방도를 모색해야 할것 이오."
"쫒아낼 수만 있다면 쫒아 내야지요. 헌데 사또가 자기 아들 훈장까지 맡기면서 편애하고 있는데 순순히 쫒아 내줄까 ?" 조석사가 고개를 갸웃둥 하였다.
"좋은 계책이 있소이다."
서진사가 나섰다.
"계책이라뇨 ? "
"사또도 삿갓놈의 신분과 내력은 모르고 있지 않소이까 , 그놈의 애비가 개 백정인지 어느 댁 하인인지 근본을 아무도 모르쟎소 ? 또, 그놈이 대명천지에 삿갓을 쓰고 다니는 것을 보면 필시 떳떳한 놈은 아닐게요. 허니 , 그놈의 내력을 은근히 물고 늘어지면 본색이 탄로 날까 두려워 야반도주 할것이 틀림 없소이다. "
"거참 좋은 계책이오. 삿갓이 상놈이라면 어떻게 사또의 자제를 맡겨 가르치게 한단 말이오.
그럼 어떤 방법으로 놈의 내력을 알아보면 되겠소이까 ? " 조석사가 물었다.
"내 우리집에서 잔치를 걸판지게 준비할 것이니 경비는 우리 네사람이 같이 부담 하십시다.
나만을 위하자고 하는 일이 아니니까요. 그리고 사또를 초청하자는 말씀 입니다.
명분이야 사또의 노고를 위로한다고 하면 그럴듯 하지 않겠소 . 사또가 오면 자연히 그 삿갓녀석도 올겝니다."
"경비는 얼마씩 추렴하면 되겠소이까 ? "
원생원은 돈이 들어간다는 말에 신경을 쓰며 물었다.
"이십 냥씩만 내시오. 그럼 육십 냥이고 내가 사십 냥을 내어 모두 백냥으로 차립시다."
쌀 한 가마가 일곱 냥이 되니까 백냥이면 넉끈할 것이오." 서진사가 힘주어 말을 했다.
"헌데 사또가 거절하면 어떻게 하시려오 ? "
전에도 사또를 초청한 일이 있었다. 헌데 사또는 민폐를 끼치기 싫다는 이유로 거절한 일이 있던 터이다.
문첨지는 그때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사또가 오지 않으면 삿갓만이라도 부를 것이니 걱정 마시오."
그들은 마침내 결정을 하고 잔치준비에 들어갔다.
여러 하인을 거느린 서진사는 사랑채에 앉아서 이것은 이렇게 ,저것은 저렇게 하인에게 이르며 잔치준비에 일일히 간섭했다.
사또를 초청하는 일은 문첨지가 맡아 관아의 일이 파할 시간쯤 되어 사또를 찾았다.
"사또 나으리 ! "
사또는 마침 공무를 마치고 김삿갓과 술이나 나눌까 생각하던 중이었다.
"누구요 ? "
"문첨지 올시다. 오늘 밤 서진사 댁에서 사또님을 모시고 소연이나마 베풀고자 하오니 왕림하여 주십시오."
"아니 갑자기 웬일이오 ? "
일전에 이들의 청을 거절한 일이 있었기에 사또가 그 내력을 아니 물을 수가 없었다.
"공사다망하신 사또님의 노고를 조금이나마 위로해 드릴까 하고 마련한 자리오니 물리치지 마시길 바랍니다."
사또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좋소이다. 내 언젠가 한 번 거절한 일이 있은즉, 성의를 다시 거절하기 어려우니 가겠소이다."
문첨지는 좋아라 하며 돌아갔다.
이들이 김삿갓을 곤경에 빠트릴 계획을 실행에 옮기고 있는 때 ,
김삿갓은 글방에서 선규에게 시경을 강론하고 있었다.
선규에게 시경을 강론한지 열흘을 겨우 넘겼는데 그의 지식은 놀랄만큼 진보되었다. 이것은 선규의 머리가 비상한 탓도 있지만 삿갓의 가르침이 분명하고도 막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공부가 끝날 무렵 , 삿갓은 서진사네 집에 연회가 있다는 전갈을 받았다.
그는 아무래도 석연치 않은 생각이 들었다. 무슨 꿍꿍이가 있어서 사또를 초청하는 것만 같았다.
만약 그 어떤 저의가 없다면 지난번 사또 면전에서 은근히 곤욕을 당한 그들이 사또를 청할리가 없는 것이다. 그는 사또보다 먼저 서진사 집으로 가서 그들의 눈치를 살피리라 마음 먹었다.
김삿갓은 먼저 출발 하겠다는 뜻을 사또에게 고하고 사령을 앞세우고 서진사 집으로 향했다.
"훈장님 , 저기 고래등처럼 커다란 기와집이 서진사 어른 댁입죠."
사령이 가르키는 곳을 보니 커다란 집이 저녁 어스름에 싸여 있었다.
"굉장히 큰집 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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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29)
* 김삿갓의 양반 골려먹기.
"아마 아흔 칸이 넘을 것이라고들 말하는뎁쇼." 앞선 사령이 말을 하였다.
과연 그 정도가 될것 같았다.
김삿갓은 서진사가 거드름을 필만 하다고 생각했다.
이윽고 서진사 집에 당도했다. 집안은 잔치집 답게 사방에 초롱불이 밣혀져 있고 사람들이 분주하게 돌아 다녔다.
김삿갓은 누구를 찾을 것도 없이 성큼성큼 사랑채로 향했다.
그가 사랑방 앞에 당도하니 방안에서는 네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 자연 양반 이야기가 나오면 그 녀석이 맥을 못출 것이 아니오 ?
첩의 자식도 어깨너머 글줄이나 익혀 문장깨나 할줄 안다고 거들먹 거릴수도 있으니 글 잘 한다고 모두 양반이겠소 ? 두고 보시오. 그놈도 서자 아니면 똑똑한 상놈일거요."
김삿갓은 이들이 자기의 내력에 대해 쑥덕공론을 하고 있음을 알았다.
다시 누군가의 말이 들려왔다.
"그놈에게 당하지 않도록 조심하시오. 사또는 사람이 없어 그런 놈을 훈장이랍시고 앉혀놓고 용의 알 처럼 떠받들고 있단말야 ... "
김삿갓은 부하가 치밀었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뛰어 들어가 늙은 것들의 상투를 잡아 흔들어 주고 싶었지만 그럴수도 없는 일이라 꾹꾹 눌러 참고 있었다. 그는 마당에서 잠시 머뭇거리다가 큰 기침을 몇번 하였다.
"거 누가 왔소 ? "
"예, 불초 삿갓입니다."
사랑문이 드르르 열리며 문첨지가 빼꼼히 내다보았다.
"오 , 훈장께서 오셨군 . 그럼 사또께서도 행차하셨소 ? "
"미구에 납실 것입니다."
김삿갓은 섬돌위로 올라서며 문안인사를 올리고 안으로 썩 들어갔다.
순간 ,방안의 공기가 딱딱해졌다.
양반들은 장죽 담뱃대만 빨고 있을 뿐 삿갓과 얼굴을 마주치려고도 하지 않았다.
"사또는 언제 납신답디까 ? "
서진사가 담뱃대를 박달나무 재털이에 탁탁 털면서 물었다.
"곧 납실 것 입니다."
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대문간이 소란스러웠다.
"사또께서 납시는 모양이네."
앉아 있던 사람들은 황급히 대문간으로 달려갔다.
사또는 사인교를 타고 납시었고 공식 행사가 아니어서 수행원은 많지 않았다.
"사또 어서 납시오소서. 이렇게 찾아 주시니 감격스럽기 그지없소이다."
서진사는 가마 옆에서 연실 굽실거리며 사또를 맞았다.
사또의 입장으로 연회는 바로 시작되었다.
연회장소는 여덞 칸이나 되는 별채 거실로 애당초 잔치장소로 특별히 지은 곳이다.
잔치상은 산해진미로 가득차 있었다. 십장생이 그려진 열두 폭 병풍을 배경으로 사또가 자리를 잡았다.
김삿갓의 자리는 말석으로 배정 되었다. 연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전날 사또의 빈청에 모였던 그사람들 뿐이었다. 기생도 그때 그 기생들이었다.
술잔이 오가고 기생들의 거문고와 장구 소리가 흥을 돋았다.
"애들아 이제 좀 쉬거라."
서진사가 손을 휘저어 기생들의 여흥을 중지시켜 장내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사또 나으리, 참 즐거운 밤이올시다." 서진사가 축 늘어진 턱을 들어 말문을 열었다.
"서진사 덕택에 모처럼 즐거움을 맛보는구려. 정말 즐겁소."
사또도 취기가 거나해져 기생의 허리를 감싼채 대답했다.
"사또 나으리, 사람은 무엇보다도 근본이 중요하지 않소이까 ? "
"근본 ? 그야 물론 중요하지요. 바탕이 좋아야 합니다. 말과 소 같은 짐승도 혈통을 가려 쓰는데
항차, 사람이야 말해 무엇하겠소 "
김삿갓은 이 작자들이 서서히 서론을 꺼내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들의 말을 유심히 들으며 말을 꺼낸 의도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사또 나으리, 백로가 노니는 곳에 까마귀가 끼일수 없는 법,
사람에게도 반상(班常)이 엄연히 구별되어 있지 않소이까 ? "
"반상이 ? 그야 물론이오."
사또는 무심결에 이렇게 말하다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서진사의 어투가 개운치 않음을 뒤늦게 알아차린 것이다. 혹시 이 자리에 김훈장이 끼여 있음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하는 말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번뜩 들었다. "서진사, 뭐 언짢은 일이라도 있었소이까 ? "
사또는 정색을 하고 서진사에게 물었다.
"아니올시다. 요즘 듣자 하니 내노라 하는 집안에 자제들이 천한 것들과 종종 어울린다는 말이 있어 여쭌 말씀입니다."
사또는 서진사의 뒷말이 자기를 들으라는 말로 들려 내심 불쾌하였다.
출신도 모르는 젊은 과객을 빈객으로 대접하며 아들의 훈도를 맡긴 것이 이 지방 토호들에게 성서롭지 못한 일로 보일 법도 한 일이었지만 아들의 진취적인 공부를 이끌고 있는 김삿갓이 아닌가 ?
사또는 짐짓 모른체하고 한마디 했다.
"그런 일이 사실이라면 내 조사를 하여 엄중히 기강을 바로 잡을 것이니 너무 염려를 마시오. 자 , 취홍도 도도하니 우리 저 김훈장의 시를 청하여 감상해 봅시다."
사또가 이쯤 말을 하자 나머지 양반네들은 더이상 군말이 없었다.
"글제는 무엇으로 하면 좋겠소 ? "
사또가 좌중을 둘러보며 말을 하자 원생원이 팔자수염을 쓰다듬으며 말을 한다.
"오늘밤 서진사께서 반상에 대해 말을 하셨으니 양반이라는 글자로 하면 좋겠소이다."
"음, 양반이라. 뭐 그것도 좋지. 김훈장, 어디 멋들어진 시를 보여 주시겠소 ? "
"예, 사또 나으리."
김삿갓은 서진사 일당의 저의를 알고 있는터라 주저없이 붓을 들어 단숨에 써 내려갔다.
彼兩班 此兩班, 班不知 班何班
(피양반 차양반, 반불지 반하반)
<이양반 저양반하고 양반 타령이구나, 양반이란 무슨 반이 양반인지 알 수가 없네>
朝鮮三性 其中班, 駕洛一邦 左上班
(조선삼성 기중반, 가락일방 좌상반)
<조선에는 세 가지 성이 그중에 양반인데, 가락국 에서는 김씨가 으뜸가는 양반이었네>
來千里此 月客班, 好八字令 時富班
(내천리차 월객반, 호팔자령 시부반)
<천리길을 왔으메 이 달에는 내가 손님 양반인데, 돈 많고 팔자 좋으면 요즘은 부자가 양반일세>
觀其兩班 壓眞班, 客班可知 主人班
(관기양반 압진반, 객반가지 주인반)
<이따위 양반들이 진짜 양반을 짓누르니, 손님 양반이 가히 주인 양반들에 지체를 알겠도다>
"아니 ? "
글을 읽고 난 서진사는 물론 나머지 사람들도 깜짝 놀라며 얼굴이 붉어졌다.
"왜들 놀라시오 ? 김훈장의 글은 요즘세태를 그대로 묘사하는 걸작이외다." 사또는 내심 통쾌하였다. 안변사걸이 글을 보고 놀란 까닭을 사또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술자리가 갑자기 싸늘해졌다. 그러나 서진사 등은 어떻게 하여야 이 수치를 씻을수 있겠는지 대책이 묘연했다. 양반 시비로 삿갓을 곤경에 몰아 넣으려다가 자신들이 진짜 양반을 몰라보는, 무식한 양반으로 되었으니 , 분한 마음보다도 뭐라 공박할 말이 냉큼 떠오르지 않았다.
"여봐라 , 네년들은 대체 뭣들하고 있느냐 ? "
사또는 기분을 바꿀 양으로 기생들을 호령했다.
"자, 이 술잔을 받으셔요."
오늘도 가련은 서진사 옆에 앉아 은잔에 맑은 약주를 찰찰 넘치게 따라 서진사 입가 까지 올리며 두 손으로 공손히 받쳐들었다.
"앗따 , 그년.. 애교 한번 간드러지는구나 ! "
사또는 일부러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분위기를 부드럽게 돌리려고 애를썼다.
~~30회로~~~
●방랑시인 김삿갓(30) - (31)
* 가련과의 은밀한 만남.
김삿갓은 안변 사걸들이 넋을 잃은 것을 보자 심히 통쾌하였다.
뻘줌해진 연회 분위기는 가련이 때문에 바뀌었다.
"참 훈장님은 시상이 무궁무진 하신가 봐요. 마르지 않는 샘처럼 말이예요. 말이야 바른 말이지 요즘 세상에는 돈 있으면 양반 행세를 하쟎아요 ?족보도 산다는데요. 뭘."
가련이가 이렇게 말하자, 문첨지가 호통을 쳤다.
"예끼 이년, 방자하게 어디서 입방아를 찧느냐 ! 아직 젖비린내 나는 것이 뭘 안다고."
"호호호, 첨지님은 항상 쇤네를 미워하시더라. 언제 살풀이를 해야겠어요." 가련이가 이렇게 받아넘기자 문첨지 입이 벌어진다.
"살풀이 거 좋다. 네 집 안방에서 하자꾸나. 오늘밤에 가랴 ?"
"아이, 서진사 어른 허락부터 받으셔요."
"허허, 그런가 ? "
웃음이 한바탕 일자 좌중의 분위기는 한결 부드러워졌다.
"훈장님, 시 한수만 읊어 주셔요. 쇤네의 청을 들어 주시겠죠 ? "
"애야 ,너도 시를 아느냐 ? "
조석사가 핀잔을 준다.
"석사님도 모르시는 말씀을 하시네요. 쇤네는 시를 지을 줄은 모르오나 읽어 색일 줄은 안답니다."
가련이가 곱게 눈을 흘기며 조석사를 반박했다.
이런 가련의 청순한 교태가 청춘의 김삿갓의 가슴에 무엇인가 찌르르 전해진다.
"옳치, 너는 당송 팔대가도 잘 알고 있으려니 이번에는 네가 시제를 한번 정해 보거라."
사또가 가련을 그윽히 바라보며 이렇게 말을 했다.
"가인 (佳人) 이라 하면 어떠실런지요."
"아름다운 사람이라 , 그것 좋네 ! "
김삿갓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붓을 들었다.
抱向東窓 弄未休
(포향동창 농미휴)
<그대 살풋이 안고 하룻밤을 지새울제>
半含較態 半含着
(반함교태 반함착)
<그 모습 수줍다 할 가 교태롭다 할가>
低聲暗問 相思否
(저성암문 상사부)
<내가 좋으냐고 나직이 속삭이니>
手整金釵 小點頭
(수정금채 소점두)
<금비녀 매만지며 고개만 끄덕이네>
"하하하하, 역시 훈장님 다운 솜씨요. 마치 서진사와 가련이의 모습을 그린것 같소이다."
사또는 탄복 하였다. 사또의 말을 들은 서진사는 처음으로 입을 헤벌죽 벌리고 웃었다.
가련은 새카만 눈을 들어 김삿갓을 은근히 쏘아 보았다. 그리고 눈길이 마주친 김삿갓에게 싱긋 웃음을 보여 주었다. 추파였다. 김삿갓은 가슴이 떨려왔다.
안변 사걸들도 이 글은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제각기 몇 번씩 낭송하며 기생의 허리를 껴안으며 술잔을 들었다.
연회는 밤이 늦어서야 끝이 났다. 숙소로 돌아온 김삿갓은 취기를 이기지 못하고 옷을 입은채로 쓰러져 잠이 들었다. 그리고 다시 며칠이 흘렀다. 동짓달도 중순으로 접어들자 날씨가 매섭게 차가워졌고 눈까지 많이내렸다. 겨울이 한층 깊어진 것이다.
김삿갓은 선규를 가르치며 한겨울을 사또 곁에서 보내리라 마음먹고 있는터라 되도록, 하루하루를 편한 마음으로 지내려고 하였다. 어차피 방랑에 나선 몸 , 한 두해로 끝날 방랑이 아니기에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눈이 소담스럽게 내린 어느날 , 관노 한 놈이 작은 쪽지를 들고 김삿갓을 찾아왔다.
"훈장님, 소인입니다."
관노는 김삿갓 방문 앞에서 그를 이렇게 찾았다.
김삿갓은 방문을 열었다.
"자네가 , 무슨일인가 ?"
"예, 어느 총각녀석이 훈장님 드리라고 이 쪽지를 주고 갔습니다."
"쪽지를 ? "
"예, 여기 있습니다."
김삿갓은 쪽지를 받았다.
관노가 물러가자 그는 방문을 닫고 쪽지를 펴 보았다.
쪽지에는 언문으로 또박한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김선생님 전상서.
소녀가 이렇게 외람되이 글월을 올림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오늘은 천지가 온통 은백색으로 변하였습니다. 이런 때 선생님의 시를 경청할 수 있다면 무상의 즐거움을 얻겠나이다.
원컨데 금일 저녁 소녀의 누옥으로 납시어 주옵소서.
지필묵을 준비하고 오시길 기다리겠나이다.
가련올림.
내용은 평범한 초청장 이었으나 ,언문이지만 가련의 글씨가 달필인 것에 김삿갓은 저윽이 놀랐다.
쪽지를 읽은 김삿갓은 왠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봄바람에 하늘 거리는 버들가지인양 교태가 자르르 흐르면서도 가을 하늘아래 피어있는 한떨기 국화처럼 청초하기 그지없는 가련의 자태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가야지. 암 꼭 가고말고."
김삿갓은 혼잣 말로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이며 빙그레 웃었다.
저녁 공부가 끝나자 김삿갓은 바쁜 걸음으로 관아를 빠져나왔다.
협문지기가 김삿갓을 보고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며 물었다.
"훈장님 어디를 가시는뎁쇼 ? "
"내 오늘 밤 늦을 것이니 혹시라도 사또님이 찾아 ,묻거든 뽕을 따러 갔다고 말씀드리게."
"뽕을요 ? 겨울에도 뽕이 있습니까 ? "
"암, 겨울에도 따는 뽕이 있다네."
김삿갓은 이렇게 관아를 나선후 재빠른 걸음으로 가련의 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처음 가는 길이었지만 통인에게 자세히 물어 두었던 터라 가련의 집을 찾는데는 어렵지 않았다.
"이리 오너라."
그는 대문 앞에서 낭랑한 소리로 아랫 것을 불렀다.
이내 대문이 열리더니 계집아이가 나타났다.
"뉘시온지요 ? "
"삿갓이 왔다고 가련아씨께 알려라."
"그러셔요 ? 훈장님이시군요. 어서 안으로 드셔요. 우리 아씨께서 기다리고 계셔요."
계집애의 호들갑이 보통이 아니었다. 김삿갓은 계집애가 안내 하는대로 따라 들어갔다.
"어서 오셔요."
분홍빛 호박단 치마 저고리를 입은 가련이가 섬돌 아래까지 내려와서 김삿갓을 맞았다.
"그간 잘 있었나 ?"
"네, 쇤네는 무고하였사옵니다."
가련은 김삿갓의 손을 잡고 방안으로 인도했다.
"오늘은 왼일인가 ? 나 같은 훈장을 다 초청하고."
가련은 눈을 곱게 흘기며 말을 했다.
"전 혹시 안오시면 어떡하나 하고 가슴을 졸이고 있었어요."
"허허 , 내가 무슨 뚝심으로 안 올수가 있겠나 ? 오히려 감지덕지 하며 달려왔네, 헌데 ..
오늘 이후 내 두 다리가 성하게 될지 그게 염려스럽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 "
가련이는 커다란 눈을 더욱 크게 뜨고 김삿갓을 요염하게 바라보았다.
"자네 눈치가 그렇게도 없었나 ? 서진사가 이 꼴을 본다면 눈에 쌍심지를 켜고 달려들게 아닌가 ?"
"아이 , 훈장님도 서진사와 제가 어쨌다고 그런 말씀을 하세요..하긴, 절 좋아는 해요. 별의별 소리로 나를 어찌 해 보시려는 것 같은데 , 기생의 몸으로 부르면 아니 갈수도 없는 일이라서 상대는 하고 있습니다만, 별 깊은 관계는 아닌 걸요."
"알았네. 내 별 뜻이 있어서 한 말이 아닐세."
술상이 들어왔다. 김삿갓은 이전과 달리 가련과 단둘이서 술상을 놓고 앉아 있으려니 기분이 이상했다.
"훈장님. 처음 뵈올때 부터 아무래도 보통분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숨기고 계신 일이 있으신것 같아요."
술이 몇잔 기울여지자 가련이 말문을 열었다.
"그건 어째서인가 ? "
김삿갓은 취기가 오른 눈으로 가련을 건너다 보며 물었다.
"글쎄요. 삿갓을 쓰고 계셔서 그런가 ..호호호 , 아네요, 훈장님의 시를 읽고나서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거, 훈장님 훈장님 하지 말게. 자네가 자꾸 훈장을 찾으니까 절로 시가 떠오르네."
"어머 .. 그렇지 않아도 한 수 청하려고 했는데 들려 주세요."
김삿갓은 고개를 끄덕이며 가련이가 내미는 붓을 들었다.
세상수운 훈장호, 무연심화 자연생 (世上誰云 訓長好, 無燃心火 自然生)
<세상에 누가 훈장노릇을 좋다고 했는가, 연기도 없이 속은 타서 심화는 절로 나는데>
왈천왈지 청춘거, 운부운시 백발성 (曰天曰地 靑春去, 云賦云詩 白髮成)
<하늘천 따지 하는 사이에 청춘은 지나가고, 부가 어떻고 시가 어떻고 하는 사이 백발이 되네>
수성난청 칭도어, 잠이역득 시비성
(雖誠難聽 稱道語, 暫離易得 是非聲)
<비록 지성으로 가르쳐도 좋은 소리는 듣기 어렵고, 잠시만 자리를 비워도 궂은 소리 듣기 십상이네>
장중보옥 천금자, 청촉달형 시정상 (掌中寶玉 千金子, 請囑撻刑 是情相)
<손아귀에 보석과 천금 같은 자식을 맡기면서, 때려서라도 잘 가르쳐 달라는 청이 딱하기도 하여라.>
"호 -"
시를 읽고 난 가련이는 입술을 동그랗게 오므리며 감탄을 했다.
그러면서 왈천왈지 ..하늘천 따지 하는사이에 청춘은 지나갔고의 구절에 마음이 딱 꼿혔다.
그것은 가야금 장고 소리에 청춘이 지나가는 자신의 처지와도 같은 것 이라고 생각되었다.
"어떤가 ? "
김삿갓은 글 쓰기를 마친후 술 한잔을 기울이고 나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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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31)
* 가련과 보내는 밤
"훈장 노릇이 그렇게도 괴로운 일 인가요 ? "
"안 해본 사람은 모르지. 그러니 훈장님 훈장님 하지 말게."
"그럼 뭐라 부르지요 ?"
"자네 마음대로 .."
"그럼 , 서방님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 "
"그거 좋군 ! "
두 사람은 여기서 말을 멈췄다.
가까운 곳에서 밤 개가 짖는 소리가 나는 듯 한데 , 그 소리가 무엇엔가 파묻혀 ,아득하게 들린다.
이순간,밖에서 눈이 내리는지 방안의 공기는 잠잠하고 촛불은 흔들림 없이 고요한 빛을 내고 있었다.
김삿갓은 갑자기 가련을 안아 보고싶은 충동이 불같이 일어났다.
"서방님. 서방님께서 지은신 시가 왼지, 소첩의 신세를 읊픈 것 같아 눈물이 나려 하는군요."
"아니 그건 내 신세타령을 한것 인데 자네 처지와 같다니 그건 무슨 말인가 ? " 김삿갓은 이렇게 말을 하면서도 감정이 미묘해졌다. 그것은 가련이 입에서 나온 , 서방님과 소첩이라는 말 때문 이었다.
"권주가를 부르고, 가야금과 장고소리에 저의 꽃다운 시절이 모두 지나가 버릴 것 같아서요."
"허허 , 그럴 법도 하군. 허나 사람들의 세상살이가 모두 다 그렇게 지나는걸 ..."
"그럴까요 ? "
"그렇다니까 , 그러니 자기 생각대로 뜻있게 살아가면 되는걸세."
"서방님 ,소첩도 부모님 덕분에 시문을 좀 배워 알고는 있지만 서방님같은 시제는 만나뵙지 못했습니다.
서방님 ,소첩에게는 간절한 소망이 한가지 있는데 들어 주시겠어요 ? "
"뭔가 ? 말하여보게."
김삿갓은 가련이 기생의 몸이다 보니 말을 함에 있어, 해라를 하여도 될것 이나 혀가 돌아가지 않았다.
따라서 가련과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엉거주춤한 반말이 되었다.
"서방님을 곁에서 모시면서 시문을 배웠으면 해서요 ..."
"이번에는 가련의 훈장 노릇을 하란 말 인가 ? 하하하 ..이러고 보니 다 뜻이 있어 날 불렀군 그래."
"달리 생각지는 마세요. 첫째로는 서방님이 좋으니까 곁에서 모시려고 하는 것이고 둘째로는 시가 좋아 배우려는 것이에요. 들어 주시겠어요 ? "
가련이는 말을 하며 엉덩이를 방바닥에 끌듯 붙여, 삿갓 곁으로 가까이 다가와 앉는다.
"그러다간 이 안변 땅에서 쫒겨나기 십상이지."
"그건 또 왜요 ? "
"사또 자제의 훈장 노릇을 하는 것도 시기가 나 , 나를 쫒아 내려는 사람이 많은데 , 한 발 더 나아가 자네, 가련이와 사귀고 있다는 소문이 나보게. 나를 기둥서방이라고 점찍어 배 아파 할 사람이 한 둘이 아닐걸세."
"서방님 , 제가 누구에게 매인 몸이라고 그런 말씀을 하세요 ? "
"우선 서진사가 가만히 있지 않을게야."
"서진사가요 ? 호호호호 ..."
가련이는 간드러지게 웃었다.ㅔ
"그 영감이 제게 침을 흘리고는 있지요. 하지만 그뿐이에요. 지난 봄에는 제 머리를 얹어 주겠다며 이천 냥을 줄테니 당신 ,소실로 들어 오라고 며칠을 두고 치근덕 거렸지요."
"그래 , 거절했단 말인가 ? "
"거절 했지요. 누가 그런 영감탱이 한테 순결을 바치겠어요 ? "
"순결 ? "
삿갓은 눈이 크게 떠졌다. 기생이 순결이라니 ..별스럽게 들리기 까지 했다."
그러자 가련이 눈치를 채고 .."서방님은 기생에게는 순결이 없는 줄 아세요 ? "
"글쎄 , 정절이라는 말은 들은바 있으되 순결 이라는 말은 아직 들은바 없네."
가련이는 갑자기 샐쭉해 지더니 한숨을 푹 하고 쉬었다.
"기생이 순결을 말하다니 어떻게 생각하면 가당치 않지요. 하지만 소첩은 아직 동기 (童妓)예요.
여자는 첫 정을 준 남자를 죽을 때 까지 잊지 못하는 법이에요. 우리같은 기생들도 마찬가지죠.
그동안 머리를 얹어 주겠다는 사내들은 많았지만 어차피 사내들 틈에서 시들어 갈 몸이라는 것을
생각하니 첫 정 만큼은 제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바치고 싶었지요."
김삿갓은 가련의 말을 듣고 그럴수도 있는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면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으면 평생 처녀의 몸으로 늙어 가겠군."
"호호호 ..걱정 마세요. 가련이의 처녀성도 이제는 경각에 달렸으니까요."
"경각이라니 ? "
"아이참 , 서방님도 어쩜 그리 둔감하세요. 제 머리는 오늘밤 서방님의 손으로 정히 올려질 거예요."
이 말을 듣자 김삿갓은 가슴이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 .. 가련의 첫 정의 상대가 되나 ? "김삿갓은 어림없다는 말투로 대꾸했다.
"그건 외람 되오나 제가 결정할 문제여요. 서방님, 부디 제 곁에 오래 있어 주세요. 제가 서방님을 편하게 모실수 있어요. 싫다 하시면 기생질을 못해도 좋아요."
김삿갓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것은 가련이와 정이 들더라도 이곳에 오래 머물러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냥 하룻밤 불장난이라면 모르겠지만...
김삿갓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가련의 손을 잡았다.
보드랍고 따듯한 손이 그녀의 마음을 손에 쥐어 보는 것 같았다.
"헛참 이거 정말 ,큰 일이군 ! "
김삿갓은 이런 마음이 앞섯지만 마음과 달리 ,몸은 따로 놀았다.
가련의 앵두같은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대 보았다.
가련의 입에서 흥건한 향기가 났다. 아니 그것은 자신이 마신 향기로운 술 냄새였다.
김삿갓은 가련의 목덜미를 자신의 팔로 감아 더욱 자기 쪽으로 끌어 당겼다.
그리고 자신의 혀를 가련의 입 속으로 넣었다. 코 끝에 가련의 깊은 숨이 따듯하게 느껴졌다.
이것은 가련도 마찬가지로 서로의 속 숨을 아낌없이 교환했다.
"아아 ..이러면 안되는데..." 김삿갓의 머리속에선 가련을 지켜주고 싶은 생각이 끊임없이 샘 솟았지만 그의 몸은 이미 가련의 몸을 탐하고 있었다.
가련이 삿갓의 손을 살며시 걷어냈다.
"서방님 잠깐만 .." 가련은 김삿갓의 성급함을 말렸다.
난데없는 가련의 제지로 김삿갓은 머쓱해졌다.
"상 좀 물리고 , 금침을 펼께요."
가련의 의도가 늦게나마 파악된 삿갓은 무안의 웃음을 지었다.
"자네로 향하는 마음이 너무 성급해 미안하네..."
김삿갓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자 가련은 눈동자를 위로하고 삿갓을 쳐다보며 배시시 웃었다.
무안해진 김삿갓은 빠른 손놀림으로 주안상을 윗목으로 물리는 가련의 모습을 멍 하고 보다가 술이 취한척 그자리에 벌렁 누워 버렸다.
"서방님, 서방님..."
상을 물리고 비단금침을 펴놓은 가련은 술취해 잠든 척 누워있는 삿갓의 가슴에 손을 대고 자신의 입을 삿갓의 귀에 대고 소근소근 불렀다.
삿갓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조금전의 성급했던 무안감 때문에 이제는 모든 것을 가련에게 맡기기로 하였다.
"아이참 .." 가련은 술 취한 척 누워있는 삿갓의 옷을 살며시 벗기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활활 타던 황촛불을 끄고 바스락 소리를 내며 옷을 벗더니 삿갓 곁으로 파고 들었다.
팔팔한 젊은 남녀가 자리를 같이하니 열정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삿갓은 가련의 몸을 애무했다.
마치 비단잉어를 만지듯 가련의 몸은 매끄럽기 그지 없었다.
"내 언문 시조를 한수 읊을까 ?" 좀전까지 취한척 했던 삿갓이 속삭이듯 가련에게 말했다.
"그러셔요." 이렇게 말을 한 가련의 입에서는 더운 숨이 뿜어져 나왔다.
"큰 솔밭 밑에 작은 솔밭 .. 작은 솔밭 아래 옹달샘 ..옹담샘을 돌아가니 여우굴이 나왔다."
"이것이 무엇인지 알겠느냐 ? ..." 삿갓은 가련에 귀에 대고 소근소근 말을 했다.
"얼굴이지요. 큰 솔밭은 머리털이고 작은 솔밭은 눈썹일 테고 ..여우굴은 콧구멍이 아니겠어요 ?"
"참말, 맞았다..." 삿갓은 어둠속에서 빙긋이 웃었다.
삿갓이 가련의 얼굴을 매만지고 있다가 살금살금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다시 한 수 읊으랴 ?" ..
"농담하시면 싫어요." 가련은 샐쭉 눈을 흘겼다.
삿갓은 가련의 몸을 어루만져 쓰다듬으며 나지막히 말을 했다.
"창 밖에는 동지섣달 함박눈이 내리는데 금침 속에서는 봄을 맞아 복숭아 두알이 향기롭게 익었도다. 미끄러지듯 흘러내린 언덕아래 옹달샘은 월궁 선녀가 목욕하는 자리인가 ?
김삿갓은 이렇게 읊조리며 가련의 옥문을 더듬었다.
"아이 ... "
가련은 몸을 꼬았다.
쌍심지에 불을 붙인듯 활활 타오르는 삿갓의 욕정은 더이상 참을수 없었다.
삿갓은 가련의 몸 위에 포개졌다.
가련의 아래에서 비릿한 냄새가 났다.
삿갓은 냄새에 개의치 않았다.
그것은 자신의 처(妻)와 첫날 밤을 맞았을 때와 같은 냄새였기 때문이다.
...
다음날 김삿갓은 느즈막히 눈을 떳다.
어느결에 일어 났는지 가련은 이미 몸단장을 곱게 한 뒤였다.
"잠도 곤하게 잘 주무시네요." 가련이 이렇게 말하고 얼굴을 붉혔다.
"자네 탓일세.."
잠이 덜 깬 삿갓의 능청스러움에 가련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고 눈은 게 눈 처럼 샐쭉 흘겼다.
"예쁘다..."
누워서 올려다보니 가련의 모습은 더욱 아름다웠다.
...32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