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설공찬의 이름 검토.
형제들이 이름에 같은 글자를 사용하는 것을 돌림자 혹은 항렬자(行列字)라 하는데, <국어사전>에 항렬자는 돌림자와 같다고 되어있지만, 돌림자는 친형제끼리만 사용하기도 하고, 문중(門中) 범위나 종중(宗中) 범위까지 넓혀 사용하기도 하며, 사용해 온 역사도 매우 깊다.
항렬자는 같은 성본(姓本)의 모든 동항(同行) 사람 이름에 사용할 돌림자를 미리 정하여 놓고 그에 맞추어 이름을 짓도록 공식화 되어 있는 글자를 말하는 것이다.
전주최씨 시조 최아(崔阿)의 아들은 용생(龍生), 용각(龍角), 용갑(龍甲), 용봉(龍鳳)으로 용(龍)자를 돌림자로 사용하고 있어서, 고려시대에도 이미 돌림자를 사용하여 이름을 지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항렬자가 나온 것은 그리 오래된 것이 아니다.
전주최씨의 경우 1864년(고종 1) 간행된 <동치보>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처음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1850년(철종 1)경부터 항렬자를 사용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문성공 23세손에서 시작하여 다음 순서로 항렬자를 지정한다.
自文成公二十三世孫始爲排次行字.
또 1898년(고종 35) 간행된 <광무보>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어서, 조선 말기에 이르면 항렬자 사용이 어느 정도 강제성을 띠게 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항렬자를 사용하지 않으면 세계를 알기 어려우므로, 이번부터는 [족보의]편(篇)이 시작될 때마다 항렬자를 적어서 표시하고, 이미 돌아가신 분의 이름은 그대로 두었지만, 살아 있는 사람 이름은 모두 항렬자에 맞추어 바꾸어 수록하였다.
앞으로는 모두 항렬자에 맞추어 새로 이름을 짓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無行字則世系難詳故今於每篇首預定行字以書而故者仍舊不改生者一從行字改之後生者從行字作名爲可.
설공찬의 사촌 형제들은 모두 공(公)자를 공통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시기적으로 볼 때 아직은 항렬자가 출현하기 수백 년 이전이기 때문에 항렬자가 아니고 돌림자로 보아야 할 것이다.
조선전기 사람들은 형제간에 돌림자를 사용했고 돌림자 이외의 나머지 글자도 같은 부수(部首)의 글자나, 같은 의미를 가진 글자나,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 원(元), 형(亨), 리(利), 정(貞)처럼 유교철학을 바탕으로 세트(set)를 구성하는 유명한 글자나, 유교경전에 나오는 유명한 문장의 한 부분을 인용하여 이름을 지었다.
그렇게 체계적이면서도 유식하게 멋을 부리면서 이름을 지을 수 있었던 이유는 태어나자마자 바로 이름을 지어서 출생신고를 하는 지금과는 달리, 아기가 태어나면 처음에는 아명(兒名)을 사용하다가 성장한 다음에 이름(名)을 지었기 때문이다.
또 옛날 사람들은 이름을 중요하게 생각하여 진짜 이름(名)은 숨겨두고 부르기 위한 이름으로 자(字)를 따로 만들어 사용하였다.
전주최씨 4세 월당공(月塘公) 휘 담(霮)의 아들은 광지(匡之), 직지(直之), 득지(得之), 덕지(德之)로 지(之)자 돌림인데, <맹자>에 나오는 다음 문장을 인용하여 지은 것이다.
요임금이 말하기를
백성들의 수고를 위로 해주고, 따라오게 하고, 바로잡아 주고(匡之), 고쳐주고(直之), 도와주고, 붙잡아주어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깨닫게 해주며(得之), 또 따라가서 구해주고 은혜를 베풀어라(德之)
라고 하였다.
放勳曰勞之來之匡之直之輔之翼之使目得之又從而振德之.
월당공 가문에서 이름을 짓는 체계를 세계표를 그려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5세 4형제는 지(之)자 돌림이며, 6세는 돌림자로 송애공(松崖公) 아들들은 명(明)자를 뒤에, 율헌공(栗軒公)의 아들들은 자(自)자를 앞에 사용하고 있으며, 연촌공(烟村公)의 아들들은 한 글자로 모두 삼수변(氵)을 부수(部首)로 하는 글자를 사용하고 있다.
즉 모두 돌림자를 사용하고 있지만 사촌 간에도 돌림자는 물론 돌림자의 위치마저 다르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7세에 이르면서부터 달라지는 것이 있으니 한 글자 대(岱), 혜(嵆), 곤(崑), 강(崗)으로 모두 산(山) 이름을 사용하고 있으며,
8세는 계손(繼孫), 연손(連孫)으로 돌림자 손(孫)자 이외 글자도 “이을 계(繼)”, “이을 연(連)”으로 “잇다”라는 같은 뜻의 글자를 사용하고 있고,
9세는 윤조(潤祖), 엄조(渰祖)로 돌림자 조(祖)자 이외 글자도 윤(潤)자와 엄(渰)자로 삼수변(氵)을 부수(部首)로 하는 글자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앞서 순창설씨 가문에서 이름을 지은 체계와 같은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세조, 성종 무렵부터 보이기 시작하는데, 이는 비단 전주최씨나 순창설씨 가문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현상이 아니고,
예를 들자면 설충란의 장인 이위(李偉)의 아들도 심원(深源), 윤원(潤源), 징원(澄源)으로 돌림자 원(源)자 이외의 글자도 심(深), 윤(潤), 징(澄)과 같은 삼수변(氵)이 부수인 글자를 사용하고 있는데, 그 무렵 사대부가문 족보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가정보>에서 설공찬의 동항(同行)을 살펴보면, 공회(公誨), 공근(公謹), 공포(公誧), 공순(公諄), 공심(公諶)으로, 돌림자 공(公)자를 사용하고 있으며, 돌림자 이외 글자도 모두 언변(言)의 글자를 사용하고 있는데 앞서 설명한 당시 풍습에 의한 것이다.
<기사보>에는 공심은 수록되지 않고, 공무(公珷), 공우(公瑀), 공호(公瑚), 공백(公百)만 수록되어 있는데, 공무가 공심이며, 공우가 업종(아명)일 것이라고 이미 설명한 바 있다.
여기에서 검토할 사항은 돌림자 이외의 글자가 언변(言)에서 옥변(玉)으로 바뀐 것이다.
1550~1560년 무렵에 문화유씨 가문에서 <가정보>를 만들기 위해 순창설씨 가문에 단자(單子) 제출을 요구했을 때, 이미 설충수 가문에서는 돌림자 이외 글자가 언변(言)에서 옥변(玉)으로 바뀌어 공심(公諶)은 공무(公珷)가 되었고, 업종은 공우(公瑀)가 되었으나,
순창설씨 가문에서 새로 수단(收單)을 하지 않고, 1510년 무렵에 만들어 둔 가승(家乘)을 그대로 복사하여 단자로 제출하였으므로, 공심이 공무로 이름이 바뀐 사실이 <가정보>에 반영되지 않았고, 동생 공우, 공호, 공백은 모두 어른이 되었지만 수록되지 못하였다.
설공찬 또한 당시 풍습을 따라서 언변(言)을 사용한 讚자를 사용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옥변(玉)을 사용한 瓚자를 사용하고 있다.
설공찬은 혼인하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에 가승에 수록되지 않아 단자에서 빠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므로 <가정보>에서 찾을 수 없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만약 설공찬이 혼인하여 가승에 수록되었다면 아마도 薛公瓚이 아니라 薛公讚으로 <가정보>에 적혀 있을 것이다.
薛公讚을 薛公瓚으로 바꾼 사람은 채수인가?
아니면 순창설씨 가문인가?
<기사보>에서 설공찬 형제들의 이름은 설공포(薛公誧)와 설공순(薛公諄)으로 <가정보>와 같으므로 순창설씨 가문에서 바꾼 것은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만약 순창설씨 가문에서 바꾸었다면 <기사보>에 설공포와 설공순의 이름이 바뀌어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산 사람 이름이야 이러저러한 이유로 바꾸겠지만 이미 죽은 사람 이름을 바꾸는 경우는 없으므로 薛公讚을 薛公瓚으로 바꾼 사람은 채수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옥변(玉)의 찬(瓚)자를 사용한 것이 설충수 가문의 이름 체계를 참고한 것인지 아니면 우연한 일치인지는 알 수 없다.
한편 설공찬의 사촌 설원은 이름에 원자 한 글자만 사용하고 돌림자 공(公)자를 사용하지 않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한글로만 적혀 있어서 혹시 원(謜)자나 원(瑗)자를 사용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겠으나 그렇다 하더라도 설원은 돌림자를 사용한 이름으로 보기 어렵다.
또 윤자신과 민휘는 족보에서 모두 비슷한 이름이나 성씨를 찾을 수 없다.
추정해 볼 때 설원, 윤자신, 민휘 세 사람은 실존 인물이 아니며 스토리 전개 목적에서 채수가 지어낸 사람들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