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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회 애지문학상 수상작품
문학비평부문 송기호
나무, 나무 그리고 나무
송기호
높은 곳에 이르기를 갈망하는 마음은 인간의 내면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다. 땅에 발이 묶여 사는 우리는 이곳의 삶이 비루하다고 생각될 때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이 저 높은 곳에 있다고 믿으며 그곳에 이르기를 소망한다. 천국이 우리가 서 있는 곳보다 낮은 곳에 있다고 믿는 사람은 없다. 어느 문화권에서든 대개 천국은 우리 위 높은 곳에, 지옥과 악마는 우리가 서 있는 곳보다 낮은 곳에 있다고 믿는다. 그렇기에 우리는 언제나 높은 곳을 갈망하며, 지금 있는 곳보다 더 아래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한다. 우리가 소망하는 것과 두려워하는 것은 높은 곳과 낮은 곳이라는 두 공간의 높이 차이를 통해 표현된다. 단테는 『신곡』에서 우리가 소망하는 것과 높이의 상관성을 누구보다 더 선명하게 그려낸다. 단테는 베아트리체의 안내를 받아 천국으로 오르는데, 이 천국은 아홉 개의 하늘로 이루어져 있으며 높이 오를수록 신에게 더 가까이 다가간다. 또 베르길리우스의 안내를 받아 연옥과 지옥도 둘러보는데, 지옥 역시 아홉 단계로 이루어져 있고, 아래로 내려갈수록 더 큰 죄를 지은 자들이 더 고통스러운 형벌을 받는다. 단테는 인간이 죽어서도 얼마나 높은 곳에 가 닿기를 소망하며 또 지금 있는 곳보다 더 아래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는지 잘 그려낸다.
땅에 발이 묶여 사는 우리는 높은 곳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새들을 동경한다. 그리스 신화에 새의 깃털을 밀랍으로 이어 붙인 날개를 달고 공중을 날았던 이카루스의 이야기가 있다. 태양에 너무 가까이 간 탓에 태양의 열기에 밀랍이 녹아 바다로 추락한 그의 이야기는 우리 안에 숨겨진 높이에 대한 갈망을 잘 말해준다. 높은 곳을 갈망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나무를 닮았다. 나무는 지구에 사는 생명체 중 가장 키가 크다. 그래도 나무는 여전히 위를 향해 자란다. 우리는 머리 위 하늘 높은 곳으로 자라는 나무를 보면서, 높은 곳에 가 닿기를 바라는 우리 안의 열망을 의식하게 된다. 높은 곳에 대한 갈망이 우리 안에 깊게 뿌리내리고 있기에 우리는 나무에 특별한 매력을 느낀다.
언제나 태양을 향해 고개를 들고 위로 자라는 나무처럼, 인간도 애초에 아래가 아닌 위를 향해 고개를 들고 살도록 만들어진 존재이다. 로마 제정시대의 시인 오비디우스는 『변신 이야기』에서 인간의 그러한 특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다른 동물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대지를 내려다보는데
신은 인간에게만은 위로 들린 얼굴을 주며 별들을 향하여
얼굴을 똑바로 들고 하늘을 보라고 명령했다.
방금 전만 해도 조야하고 형체가 없던 대지는 이제
여태까지 알려져 있지 않던 인간의 모습이라는 옷을 입게 된 것이다.
― 오비디우스, 『변신 이야기』, 천병희 역. 11
오비디우스에 따르면 이 세상에 인간이 등장하면서 대지의 모습이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지금까지 땅 위를 걷던 동물은 모두 아래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 땅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하늘을 올려다보며 위를 향해 고개를 드는 인간이 생겨난 것이다. 이제 인간은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든 유일한 존재라는 점에서 다른 동물과 구별된다. 고개를 들게 되면서 인간은 하늘에서 찬란히 빛나는 별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 별들을 운행하는 신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하늘과 그곳에 사는 신을 바라보게 만들어진 존재이기에 높은 곳에 가 닿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우리가 그런 존재이기에, 우리는 우리와 가장 닮은 생명체, 언제나 태양을 향해 고개를 들고 위로 발돋움하는 나무와 친밀감을 느낀다.
그런데 나무는 언제부터 땅에 뿌리내리는 삶을 시작했을까. 이 지구의 모든 생명체는 바다에서 삶을 시작했다. 지구가 생겨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지구의 대기 중에는 산소가 거의 없었던 탓에 강한 자외선을 막아 줄 오존(O3)층이 없었다. 모든 생물은 지표면에 직접 와 닿는 자외선을 견딜 수 없어, 초기의 생명체는 이 자외선을 막아주는 깊은 물 속에서만 살 수 있었다. 물속에서 조류가 생겨나서 활발하게 광합성 작용을 했고, 이 과정에서 산소가 대기 중에 방출되었다. 그 산소의 일부는 번개의 방전 등에 의해 오존이 되어 대기권에 오존층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이 오존층이 강한 자외선을 막으며 땅의 표면은 생물이 살아갈 수 있는 환경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물속에서 살던 생명체들은 점차 땅 위에서 살 수 있게 진화했다.
지금 보이는 나무의 생물학적 특성과 형태는 진화의 과정에서 확정된 결과이다. 물을 벗어난 초기 식물인 물가에 사는 선태류나 땅 위에 사는 양치식물은 달라진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몸의 표면을 단단하게 하고 기공을 만들었다. 그리고 수관과 체관을 만들어 수분과 양분을 공급했다. 특히 체관은 식물 줄기를 단단하게 지지하는 역할을 했고, 이렇게 해서 나무는 몸을 곧추세울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나무는 생존에 필수적 요건인 광합성 작용에 유리하게 태양을 향해 잎을 위로 밀어 올릴 수 있었다. 하늘을 나는 조류를 제외하면, 나무는 물을 벗어나 뭍으로 올라온 생명체 중 태양과 하늘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존재이다. 물속에서 편안히 유영하거나 물결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흔들리던 나무의 먼 조상들을 떠올려 본다. 무엇이 그들을 기를 쓰고 뭍에 오르게 했을까. 하늘로 오르려는 나무의 꿈은 그때 시작되었을지 모른다.
나무의 모든 것이 그저 신비하다. 몸통과 가지는 중력을 거슬러 위를 향하면서도, 뿌리는 중력에 몸을 맡기고 땅속 깊은 곳으로 향한다. 언제나 제자리에 발이 묶여 있으면서도 계절에 따라 다른 모양으로 제 몸을 바꾼다. 봄이면 바짝 여윈 나뭇가지마다 연한 싹을 살며시 내밀고, 여름에는 온통 초록빛으로 몸을 부풀리다가 가을이 오면 선명하고 강렬한 색의 옷을 입고 서 있다. 이렇듯 나무는 크나큰 신비를 품고 있어 그 존재의 근원에 결코 가 닿을 수 없을 것 같다. 심지어 나무는 겨울에 무성했던 여름 잎을 다 떨구고 바짝 여윈 모습으로 서 있을 때조차도 여전히 신비롭다.
잎 다 진 채
추위를 맞서며
헐벗고 외로운
가을 나무가
나긋한 가지 안에
시인이 읽을 수 있는 이야기를 품고 있네.
― Nosheen Irfan, 「A Tale for the Poet」
여름의 무성했던 초록과 가을날의 불붙듯 강렬했던 색을 다 떨구고 헐벗은 모습으로, 찬 바람을 맞으며 몸을 떨고 있는 나무를 보면 삶의 모든 열정이 소진되어 사라진 것 같다. 몸속마저 비어버린 듯하여 나무라는 존재의 내면도 텅 비어버린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러한 나무도 여전히 자신만의 이야기를 품고 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시인처럼 예민한 감성을 지닌 사람만이 읽어낼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시인은 누구보다 예민한 눈으로 대상을 관찰하고 그 의미에 대해 숙고하기에 다른 이보다 나무에 대해서도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인마저도 나무가 지닌 신비를 다 풀어내지 못한다. 그래서 한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나무처럼 사랑스러운 시를
볼 수 없으리라.
감미롭게 흐르는 대지의 젖가슴에
굶주린 입을 댄 나무.
온종일 신을 바라보고
기도하려고 잎 무성한 팔을 들어 올리는 나무.
여름에는 머리에
울새의 둥지를 이고 있을지도 모를 나무.
그 가슴에 눈이 내려앉고,
다정하게 비와 함께 산다.
시는 나 같은 바보들이 짓는 것이지만
오직 신만이 나무를 창조할 수 있다.
― Joyce Kilmer, 「Trees」
나무가 가장 사랑스러운 시가 될 수 있는 것은 여러 속성을 제 한 몸에 아우르기 때문이다. 나무는 대지의 여신의 젖가슴에 입술을 박고 감미로운 젖을 빤다. 언제나 대지의 젖에 굶주려 대지의 살 속으로 더 깊이 뿌리를 뻗는다. 동시에 나무는 온종일 고개를 들고 해를 바라보며, 그 해와 햇살을 보내준 신을 경배하며 잎이 무성한 팔을 들어 올리고 기도한다. 신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나뭇잎은 온통 초록 물결을 팔랑인다. 또 잎이 무성하여 울새가 둥지를 트는 때도 있지만, 잎이 진 나무의 가슴에 차가운 눈과 비가 내리는 때도 있다. 그래도 나무는 그 모든 시간을 다정하게 품는다. 시인은 나무의 그러한 삶을 인간이, 자신과 같은 시인도 흉내 낼 수 없다고 말한다. 나무는 그렇게 시인도 다 밝힐 수 없는 신비를 지녔으니, 그 나무를 창조한 신만이 그 신비를 다 이해할 수 있다. 요즘에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신이 만들었다고 믿지 않는 사람이 많지만, 한때는 누구나 그렇게 믿었다. 그런데 세상 만물이 모두 신이 만든 것이라 해도 나무는 특별하다. 나무의 신비로움이 나무의 키보다 크고 높아 보인다. 나무가 신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간 존재라는 말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중세 서양의 우주관은 우리가 올려다보는 하늘을 두 개의 서로 다른 공간, 혹은 세계로 설명했다. 그 두 세계가 만나는 곳에 달이 있다.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그 두 세계는 달이 지나며 그리는 궤적을 기준으로 경계가 나뉘어 달 위 세상과 달 아래 세상으로 구분된다. 그런데 이 두 세상은 서로 조금도 닮지 않았다. 이 세상에 속하거나 연관된 것을 뜻하는 영어 단어 sublunar 혹은 sublunary와 같은 말은 ‘달 아래’라는 어원적 의미를 품고 있다. 달 아래 세상은 공기로 채워져 있고, 그곳에서는 시간이 끊임없이 흘러가며 모든 것이 변하고 달라진다. 낮과 밤이 바뀌고, 빛과 어둠이 교차한다. 사계절의 변화가 반복되며, 모든 좋은 것이 시들고 퇴색하며, 쉼 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만물은 태어나고 죽는다. 인간도 달 아래 사는 존재이기에 생로병사의 변화를 겪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신이 사는 달 위의 세상은 아래 세상과는 전혀 다르다. 그곳은 공기 대신에 에테르라는 정기로 채워져 있고, 온통 신에게서 나오는 빛으로 가득 찬 곳이기에 어둠이 없는 곳이다. 또 시간이 흐르지 않고 멈추어 있어, 죽음이 없고 삶이 영원히 계속되는 곳이다. 그렇게 서로 다른 두 세계를 가르며, 우리가 서 있는 이 세상의 지붕이자 우리가 꿈꾸는 천국의 마룻바닥인 그 길을 오늘도 달이 지나간다.
달 위 신의 세상과 달 아래 인간의 세상은 나무를 통해 서로 연결된다. 나무는 이 두 세계 사이에 걸쳐진 사다리이다. 인간이 신의 세상에 가려면 이 나무 사다리를 타고 올라야 하고, 신이 달 아래 이 세상으로 내려올 때도 이 나무 사다리를 밟고 내려올 것이다. 바람 고요하고 달이 밝은 밤에 커다란 나무 아래서 우듬지에 걸린 달을 바라보면, 그 나무를 타고 오르기만 하면 달 위의 세상에 이를 것 같다. 제 팔로 달을 안고 있는 나무 아래 서면 달 아래 세상과 맞닿은 달 위 세상의 마룻바닥을 거니는 신의 발걸음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나무가 단순히 달 아래와 달 위의 세상을 연결하는 사다리, 혹은 두 세계 사이의 이동 수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무가 신 자신이라고도 믿는다.
만일 신이 이 세상으로
내려오려 한다면
신은
나무로 변할 것이다!
나무가 된 신은
인간을 바라보리라
열 개, 백 개, 천 개의
자애로운 눈으로.
초록빛 푸른 눈으로, 부드럽고
사랑스러운 비둘기 같은 나뭇잎들로!
신선한 산소로
몸에 생명의 공기를 부드럽게 불어넣으며,
귀에 신비로운 메시지를
속삭이면서,
예쁜 빨강, 분홍, 노랑 꽃들로
세상에 소나기를 내리며,
그 풍성한 사랑의 온기로
달콤하고 즙이 흐르는 열매를 권하며,
수백만 개의 씨앗으로
그 날개를 멀리 넓게 펼치면서!
오 자애로운 신이여!
생각해 보세요!
당신이 이 세상에
나타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어머니 대지를
달랠 길은 없겠지요!
감사해요, 감사해요!
오 장엄한 신神 나무여!
― Geeta Radhakrishna Menon, 「The Magnificent God Tree」
신은 이 세상을 동정하여 나무의 모습으로 인간에게 나타난다. 나무 자체가 신의 현신이라면, 나무의 다양한 모습은 신이 인간의 삶에 관여하는 다양한 방식이다. 천수천안千手千眼 관음보살이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제하고자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을 가지고 이 세상을 두루 살피듯, 나무로 변한 신은 다양한 방식으로 인간의 삶을 위로하고 보듬는다. 나무의 수많은 가지는 인간을 향해 뻗은 자애로운 신의 손이다. 가지에 난 잎은 인간의 삶을 구석구석 살피는 무수히 많은 신의 눈이다. 봄이 되어 겨우내 움츠렸던 사람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지면 그들을 보살피려는 신도 바빠진다. 신은 가지마다 연한 초록색 나뭇잎 눈을 내밀고 세상을 살핀다. 그래서 나뭇가지마다 사랑스럽고 부드러운 비둘기를 닮은 수많은 신의 눈이 앉아 있다. 여름이 깊어갈수록 신의 사랑도 깊어져 생명 있는 것들을 살아있게 하는 산소를 잎에서 내뿜는다. 그리고 인간을 사랑하는 신의 마음은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꽃으로 표현된다. 가을이면 인간을 사랑하는 신의 마음이 달콤한 즙이 흐르는 과일로 익어 그 열매로 사람들의 배를 불린다. 인간을 사랑하는 신의 마음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씨앗이 되어 더 널리 퍼져간다. 그래서 어느 때든 신의 도움이 필요할 때면 인간은 그 씨앗에서 인간을 향해 뻗은 수많은 나뭇가지 손과 인간의 고통을 살피는 수많은 나뭇잎 눈을 가진 나무가 새로이 자라게 할 수 있다. 나무가 이렇게 인간을 사랑하는 자애로운 신의 마음이 체화한 것이라면, 그 나무가 없는 세상은 얼마나 삭막할 것인가. 나무가 서 있는 자태가 아름답고, 나무가 모여 있는 숲이 싱그럽고 사람들에게 마음의 평화와 안식을 준다면, 거기에 인간을 사랑하는 신의 마음이 깃들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무가 신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존재라거나, 더 나아가 신의 현신이기도 하다는 생각은 동서양의 여러 문화권에서 두루 공유한 생각이었다. 기독교는 특히 여러 종류의 나무를 통해 기독교 신앙의 핵심 내용을 설명한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신인 야훼는 모세를 시켜 이집트에서 그들을 구해낸 후 모세에게 떨기나무의 불꽃 모습으로 나타나 그와 대화를 나눈다. 그리고 신이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이브를 위해 만든 곳인 에덴동산에서의 일화는 나무가 어떻게 신의 뜻과 연관되어 있는지 잘 보여준다.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에 두시니라…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니라…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니 그도 먹은지라
― 창세기 2:8~3:6
신은 인간을 위해 아름다운 동산을 만들고, 그 동산의 한가운데에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 좋은 열매가 열리는 두 그루의 나무를 심었다. 하나는 생명의 나무이고, 다른 하나는 선과 악을 분별하게 하는 이른바 지식의 나무이다. 그런데 이 지식의 나무는 인간이 신의 명령을 잘 따르는지 시험하는 나무이다.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이브는 그 나무의 열매를 먹었기에 시험에 통과하지 못한다. 그리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낙원을 잃어버린 자로서 살아가게 된다. 나무에 담긴 의미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고, 나무의 신비를 다 풀어내지 못하는 것이 애초부터 인간에게 주어진 운명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무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드러내는 상징이라는 것은 예수가 못 박혀 희생된 나무 십자가를 통해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성경에 나오는 가장 중요한 이야기 중 하나는 신의 아들인 예수가 인간의 몸으로 이 세상에 와서, 사람들을 구원하고자 그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가 부활했다는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 이야기에서도 나무는 핵심적 역할을 한다. 예수가 못 박혀 죽은 십자가가 나무로 만든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십자가를 물푸레나무 혹은 노간주나무로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어느 나무였는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 예수의 부활을 통해, 사람들도 죄를 회개하면 죄로 인한 죽음을 이기고 다시 구원과 생명의 길로 들어설 수 있다는 기독교 신앙의 토대가 되는 기적을 이룬 장소가 나무 위였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런 의미를 지닌 십자가 나무는 에덴동산에 심어진, 신의 명령을 따를지 시험하는 수단으로 등장하는 지식의 나무보다 더 중요하며, 기독교 신앙을 떠받치는 몸체가 된다. 그렇기에 중세시대 십자가는 영생의 나무와 동일시 되었으며, 그 나무의 열매는 예수였다. 인류의 죄를 대속하여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가 흘린 피는 그를 믿는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부여한다.
기독교 신앙에서 나무가 품은 이러한 의미를 잘 보여주는 시가 있다. 영국에 기독교가 막 전해지던 7세기경에 쓴 것으로 작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십자가의 꿈」(“The Dream of the Rood”)이 있다. 이 시에서는 꿈에 나무가 나타나 자기가 겪은 경험을 들려준다. 나무는 숲에서 자라고 있었는데, 어느 날 원수들이 와서 그의 몸을 자른다. 그리고 그렇게 잘린 나무는 죄인을 몸에 지고 있어야 하는 십자가가 되어 세워진다. 어느 날 그 나무의 몸에 어떤 사람이 매달리게 되는데, 그가 바로 예수다. 나무는 자기 몸에 매달린 예수의 무게를 견디기 힘들어 몸을 숙이고 싶은 유혹을 느끼지만, 잘 견뎌낸다. 나무가 몸을 숙이고 싶은 유혹에 굴복했다면, 예수를 통한 구원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무는 예수에게 쏟아지는 원수들의 조롱과 비웃음을 그와 함께 견딘다. 그 후 십자가 위에서 죽은 예수가 부활하여 하늘로 올라갈 때, 예수는 그 나무의 공을 높이 여겨 함께 데리고 간다. 그리고 그 나무를 온갖 귀한 보석으로 아름답게 꾸며준다. 나무는 자기 경험을 바탕으로, 누구든 이 세상에서 죄로 이끄는 유혹을 잘 견디어내면 그 보상으로 천국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다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 교리를 들려준다. 그렇게 나무는 아직 신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깨우친다. 이 이야기에서 나무는 인간을 구원하려는 신의 뜻이 실현되는 중요한 장소다.
십자가에서 고통 속에 죽어간 예수의 이야기는 본래의 종교적 맥락을 떠나 세속적 삶에서 고통의 상징으로도 변주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미국의 흑인 시인 랭스턴 휴즈Langston Hughes는 이런 시를 썼다.
남부의 남쪽 깊은 곳
(내 가슴이 무너진다)
그들이 내 젊은 흑인 연인을
십자로 길 나무에 매단다.
남부의 남쪽 깊은 곳
(멍든 몸 공중에 높이 걸리고)
내가 백인 예수에게 묻는다
기도가 무슨 소용이냐고.
남부의 남쪽 깊은 곳
(내 가슴이 무너진다)
사랑은 옹이 많고 헐벗은 나무 위에 걸린
벌거벗은 그림자
― 「Song for a Dark Girl」
남북전쟁 전 미국의 남부는 북부와 달리 백인 중심의 귀족 문화가 성했던 곳으로, 대농장을 경영하는 백인 지주들의 사회적 영향력이 컸던 곳이다. 이 농장에서는 주로 담배와 면화 그리고 사탕수수를 재배했는데, 모두 엄청난 노동력이 필요했다. 남부의 지주들은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팔려온 흑인들을 사들여 이들의 노동력으로 농장을 경영했다. 이것이 아프리카의 흑인들이 미국에 정착하게 된 계기이다. 비록 남북전쟁에서 북군이 승리하며 미국에서 노예가 공식적으로 해방되었지만, 흑인에 대한 차별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 차별이 뿌리 깊게 더 오래 남아 있던 곳이 남부였다. 남부에서 흑인들은 오랫동안 법률의 보호를 받지 못한 채 백인들이 사적으로 휘두르는 폭력의 대상이 되었다. 휴즈는 이 시에서 기독교를 믿고 예수의 사랑을 외치던 백인들이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흑인에게도 실천하고 있는지 묻는다. 남부에서 흑인들의 삶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처럼 고통스러웠다.
불교도 나무와 인연이 깊다.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불교를 창시한 싯다르타는 탄생에서부터 깨달음을 얻고 죽음에 이를 때까지 여러 번 나무와 깊은 인연을 맺었다. 첫 인연은 그의 어머니인 마야 부인에게서 시작된다. 마야 부인이 그를 임신한 뒤 출산을 앞두고 친정으로 가던 중에, 룸비니 동산에 이르러 산기를 느꼈다. 부인이 출산할 때 의지할 것을 찾던 중, 마침 곁에 있던 무우수無憂樹가 가지를 내려주었다. 마야 부인은 이 가지를 잡고 산통 없이 왕자인 싯다르타를 낳았으니 그의 탄생 자체가 나무와 큰 인연 속에서 이루어졌다. 싯다르타와 나무의 두 번째 인연은 그가 어렸을 때 생겨났다. 그가 왕국의 어린 왕자였을 때, 씨 뿌리는 파종축제를 보았다. 어린 그는 쟁기질하는 소와 소를 모는 농부가 힘겹게 밭을 가는 모습, 쟁기질에 뒤엎어진 흙에서 나온 벌레들이 발버둥 치는 모습, 그리고 그 벌레들을 먹이로 삼는 새들을 보면서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그는 한적한 숲으로 가서 잠부나무 아래 앉아 깊은 사색에 잠겼다. 그러자 잠부나무는 그의 명상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던지, 기우는 햇살에도 그림자를 옮기지 않고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싯다르타가 나무와 맺은 인연의 절정은 보리수였다. 부처가 되기 전 싯다르타는 보리수 아래서 수행하였는데, 보리수는 해를 피할 수 있는 넓은 그늘을 만들고 소나기도 피하게 해주어 그가 깊은 명상에 들 수 있게 하였다. 싯다르타가 성불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준 보리수의 이름에서 보리普提는 깨달음을 뜻하는 말이다. 싯다르타와 나무와의 인연은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된 이후에도 계속되어, 부처는 사라나무 두 그루 사이에서 생을 마쳤다. 이렇듯 싯다르타의 삶 전체가 나무와 인연을 맺었고, 나무는 그에게 깨달음으로 향하는 길을 함께 걷는 도반 같은 존재였다.
기독교나 불교와 같은 특정 종교와 연관 짓지 않더라도, 나무는 인간의 보편적 영성이나 신화적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나무는 오랫동안 인간에게 그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생명체 중 하나가 아니라, 이 세상에서의 삶을 성찰하도록 만드는 거울의 존재이다. 나무는 단순히 우리 눈에 보이는 땅의 표면에만 갇혀 있지 않다. 나무의 가지는 하늘에 닿고 뿌리는 땅속 깊은 곳에 닿아 있다. 나무의 이러한 속성은 땅에 발이 묶인 채 살아야 하는 인간에게 특별한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동서양 어느 문화권에서나 사람들이 나무에 대해 오랫동안 품었던 생각은 나무가 세 개의 세상, 삼계三界를 이어주거나 아니면 이 삼계를 묶어 제 몸에 품은 존재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나무의 가지와 잎은 하늘 혹은 천상의 세계를, 나무의 몸통은 이 지상 세계를, 그리고 뿌리는 지하세계를 상징하거나 혹은 각기 그 세계와 닿아 있다고 믿었다. 그러니 나무의 몸통, 뿌리, 그리고 가지와 잎은 그저 나무의 한 부분이 아니라 각기 독립된 세계라고 볼 수 있다. 그렇기에 나무의 각 부분이 품고 있는 서로 다른 세계를 살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 송기호, 『애지』 가을호(『신화와 문학에 뿌리내린 나무 이야기』)에서
제24회 애지문학상 수상소감
문학비평부문 송기호
문학을 공부하며 글을 써온 지 어느덧 오래되었습니다. 이번 애지
문학상 비평 부문 수상 소식을 듣고 기쁜 마음과 함께 제가 문학과 함께 보낸 시간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대학에 있다 보니 아카데미가 요구하는 글쓰기에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문학 텍스트를 정확하게 읽고, 논리적으로 설명하며, 기존 연구와 다른 의미를 찾아내는 일이 중요했습니다. 그렇게 읽은 것을 바탕으로 여러 편의 연구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그런 글의 쓸모에 대해 의문이 생겼습니다. 그 글은 문학에 관한 것이면서도 문학을 사랑하는 대중으로부터 너무 멀리 있는 글이었기 때문입니다.
문학에 관한 글이 정작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거나, 그들에게 가 닿지 못한다면, 그러한 글이 무슨 쓸모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소수의 연구자들이 관심을 가지고 읽는 글을 넘어, 문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도 읽으며 자신의 삶을 돌아볼 수 있는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커졌습니다.
말과 글은 한 사람에게서 시작되지만, 다른 사람에게 가 닿을 때 비로소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글을 통해 한 사람의 생각이 다른 사람의 생각을 불러일으키고, 한 사람의 경험이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할 때, 그 글은 비로소 한 개인의 것을 넘어서는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는 아카데미가 요구하는 글쓰기에서 조금 벗어나고 싶습니다. 오랫동안 문학을 공부하면서 생각하고 느꼈던 것을 더 많은 사람과 나누고 싶은 욕심이 생겼습니다. 문학 작품을 설명하는 글 대신 문학을 통해 삶을 이야기하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연구자를 위한 글쓰기에서 벗어나 독자를 만나기 위한 글쓰기로 나아가고 싶습니다.
비평은 문학 작품을 판단하는 데서 끝나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비평은 문학 작품이 다시 우리에게 말을 걸도록 작품과 독자 사이에 새로운 길을 내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길을 따라 펼쳐지는 삶의 풍경을 바라보며 각자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것이 비평이 할 수 있는 일일 것입니다.
나이가 들면서 문학을 바라보는 눈이 조금씩 달라지는 것을 느낍니다. 젊었을 때는 한 편의 시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고, 작품의 구조와 언어를 분석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작품을 깊이 바라보고, 한 문장을 오래 들여다보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시가 무엇을 말하는가보다 그 시가 내게 무엇을 묻는지가 더 중요해졌습니다. 문학은 늘 삶을 새롭게 바라보게 합니다. 수백 년 전에 쓰인 시가 오늘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도 그 때문일 것입니다. 오래전 시인들이 들려준 사랑하고, 기다리고, 이별하고, 상실을 겪고, 늙어가며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이야기들을 오늘 우리는 각자의 삶에서 다시 만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제가 쓰게 될 글이 문학 작품을 설명하는 데 머물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문학을 통해 삶의 질문을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요즘 제가 자주 생각하는 사랑, 죽음, 시간 등의 주제를 담은 작품을 천천히 읽으며,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생각하고 싶습니다. 결국 제가 쓰고 싶은 것은 문학에 관한 글이면서 사람에 관한 글입니다. 그래서 문학에 관한 설명을 듣고 싶어 하는 사람보다 문학을 통해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싶은 사람을 만나고 싶습니다. 대중을 위한 글쓰기이면서 동시에 한 사람의 독자를 위한 글쓰기, 그것이 제가 앞으로 쓰려는 글의 방향입니다. 이번 수상은 문학과 함께해온 지난 시간을 돌아보게 하고, 동시에 앞으로의 글쓰기를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귀한 상을 주신 애지문학상 관계자 여러분과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얼마간 더 문학을 연구하고 가르치겠지만, 이제는 문학을 본래 있어야 할 삶의 자리로 조금 더 가까이 데려가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아카데미 안에서의 글쓰기를 넘어 더 많은 독자와 만나고 싶습니다. 문학을 위한 글쓰기에서 사람을 위한 글쓰기로 한 걸음씩 나아가고 싶습니다. 제게서 시작된 한 문장이 누군가의 마음에 닿아 그 사람의 삶을 잠시 돌아보게 한다면, 그것으로 그 글은 이미 저의 것을 넘어서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고맙습니다.
송기호 약력
충북 보은에서 태어나 충북대학교, 서울대학교 대학원(석사), 미시
간주립대학교 대학원(석사, 박사)에서 영문학을 공부했다. 한남대학교 영문학과에서 영시를 가르치고 있다.
최근 지은 책으로 『시간을 물고 달아난 도둑고양이』(교유당), 『신화와 문학에 뿌리내린 나무 이야기』(지혜)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