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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여백
― 정해영의 『왼쪽이 쓸쓸하다』에 부쳐
조 윤 정
1. 고독의 자국
우리는 한순간에 보고, 듣고, 먹고, 만질 수 있어서 대상을 온전히 느낄 수 없는지 모른다. 눈을 감고 소리를 들을 때의 명징함, 코를 막고 음식을 삼킬 때의 의연함처럼 우리가 감각하는 것들은 순차적으로, 혹은 결여 속에서 더 선명하고 풍성하게 우리 안에 들어설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한꺼번에 느끼고 말하면서, 어느 한 부분을 포기하지 못한 채, 모든 것을 다 들여다본 것처럼 단정하고 쉽게 흔들린다. 어떤 대상은 불완전하고, 부분적으로 보았을 때 더 경이로울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종종 잊는다. 시인 정해영의 방식으로 말한다면, 그것은 ‘노을계단을 오르고 내려오는 일’에 비유될 수 있다. “못 보던 것이 보이는 아름다운 60계단”을 한 계단씩 오르고, 비로소 내려오는 길이 더 조심스러움을 알게 된 자만이 희미함 속에서 뚜렷하게 노을을 볼 수 있는 법이다.
사람은 사물을 받아들일 때에만, 그것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할 수 있다. 그럴 때, 사람은 그것에서 생명력을 느끼기 때문이다. 시인은 “말 못할 풍상을 겪고 그 허당을 메우려 밤마다 愁心으로 집을 지었을”(「나무의 얼굴」) 나무를 본다. 혹은 쓰레기통에서 튕겨 나온 빈 깡통에서 “흔적 없이 비워 막힘없이 통하는 허공”(「깡통 경전」)을 본다. 그리고 그는 나무의 얼굴에서 “잊을 수 없는 것을 잊은” 상실감을 느끼거나 빈 소리를 내는 깡통에서 “있다가 없어진 것들의 힘으로 참 못 볼 것 많이도 본 눈”을 발견한다. 시인은 ‘결여’ 속에서 그것을 온몸으로 감당하고 있는 대상의 ‘거기 있음’을 본다. 상실이 남긴 부재의 공간인 ‘허당’과 ‘허공’은 무엇이나 스미고 지나갈 수 있지만, 그 무엇으로도 채워질 수 없다. 시인은 이 절대 공백의 공간이 오로지 그 자신으로만 채워질 수 있고 또 채워져야 하는 공간임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또한, 시인은 그 공백의 공간이 ‘비어있으나’ 사라진 것에 대한 기억과 감성으로 ‘가득 찬’, 모순의 장소임을 보여준다. 그의 시 「여행가방」이 그렇다. 시인의 여행가방은 “언제나 비어있는 허전한 한쪽”(「여행가방」) 때문에 기우뚱하다. 그 기울어짐의 각도는 “오랫동안 머무르던 것들이 남기고 간 흔적/ 혹은 기척”이다. 여행가방과 그것의 기울어짐 사이에서 제3의 것으로서 ‘공허’의 이미지가 생겨난다. 중요한 것은, 이미지가 결코 주체에 의해 의식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어떤 이미지를 만들어내려는 의도를 비워낼 때 비로소 창출된다는 점이다. 그것은 고독의 자국이다. 표제작 「왼쪽이 쓸쓸하다」를 보자.
어릴 적 밥상머리 가르침은 손등을 맞아가며 숟가락을 왼손에서 오른손으로 옮기는 일이었다 세상 문리가 거의 오른쪽으로 트여 있어 ‘오른손주의’는 거칠게 엄격했다 치열하게 오른손을 익히는 동안 본래의 나는 점점 이동했다 어른이 된 뒤에도 자식의 혼례식장에서 하객들과 악수를 나눌 때 가위 눌렸던 왼손이 용수철처럼 튀어 나와 화사한 분위기를 찌르거나 제삿날 조상님께 올리는 눈물 담긴 술잔이 향불 위에서 슬그머니 왼쪽 길을 돌아 나오는 일은 막을 수가 없다 식구들 밥상을 차리다 느닷없이 봄빛 어른거리는 물길을 따라 나서고 싶다든지 한해의 한 번쯤은 후미진 세계의 한 모퉁이를 후비듯 들여다보고 싶은 왼편의 꿈은 말라버린 지 오래다
나의 왼쪽에는 추억도 사람의 그림자도 없다
가끔씩 뼈가 시린 까닭은 원래 나였던, 빈 그루터기에서 나는 바람소리 때문일 것이다
― 「왼쪽이 쓸쓸하다」 전문
‘나’의 왼쪽은 쓸쓸하다. ‘나’는 가끔씩 “빈 그루터기에서 나는 바람소리”를 듣는다. 그의 시는 ‘허공’이나 ‘바람’의 이미지가 ‘보다’, ‘듣다’라는 행위와 결부되어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이때, 공허나 바람은 “있다가 없는 것”들을 감지하게 하는 매개체이다. 그녀의 시에서 비어 있음은 무언가 ‘있음’을 전제한 ‘없음’이기에 대상의 사라짐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그가 보고 듣는 것은 여기에 있었지만 사라진 것들의 이미지나 소리이다. 「무성영화」에서 퇴직금을 몽땅 털어 증권에 투자했다가 ‘스토리만 남기고 소리도 없이’ 한 점 속으로 들어가 버린 아버지의 뒷모습이 그러하다. 소리를 잃은 아버지는 ‘고독한 산의 무채색 흔들림’을 낳는다. 그리고 시인은 어떤 뒷받침도 없이 아버지가 있는 힘을 다해 꾹꾹 누르며 살아온 뒷자리에 남긴 “자국”과 “몇 줄의 문자”(「꾹꾹 눌러쓰다」)에 기대어 평생을 살아왔다고 고백한다. 시인은 문득 놓칠 수 있는 것들을 포착함으로써 여기에 없지만 어딘가에 머물러 있을 존재를 복원한다. 그리고 자기 존재의 근원을 추적한다. 그의 이와 같은 행위는 기록되기 어려운 것으로 존재하는 대상들에게 일어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장악하는 구조로 이루어진 이 사회에서 시인은 자신이 이곳에서 놓친 것들을 실감하는 가운데 그것들과의 거리를 가늠한다. 그리고 사라진 존재를 증명하고, 그것을 기억하는 방식으로 만남을 이끈다. 시인은 가시화되지 않았기에 버려졌거나 죽은 것처럼 여겨지는 것들, 고독한 왼편, 점으로 사라진 아버지와 같은 대상들을 여기로 데려오고 기억한다. 이 때문에 그의 시는 닿을 수 없는 세계와 만나기 위한 기다림이나 그리움을 낳는다. 그리고 우리가 어떤 존재의 흔적이나 기미에 반응하게 한다. 시인에게 목소리는 제 몸의 사건이자, 세계에 입사하는 주체의 정념으로 의미를 갖는다. 시인은 이곳에 도달해야 할 고독의 자국을 기록함으로써 예전과는 다른 시간이 도래해야 함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시인 정해영에게 고독은 혼자 있다는 의미에서의 고독이 아니다.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기 위해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상태나 자신을 보여주고 보아야 할 필요도 없는 곳으로 물러나는 행위도 아니다. 그에게 고독은, 타자가 느끼는 이미지와 소리 그리고 감성을 통해서만 비로소 존재(의 결여를 증명)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의 고독이다. 이때, 고독은 어떤 상처와 같은 자국을 수반한다. 그의 시는 그 자국을 계속 살아 있게 한다. 이로써 우리가 무언가를 이해하려면 그것을 둘러싼 결핍의 이미지나 소리, 감성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것을 따라 고독의 정황을 받아들이면서 그 정황에 합일되었을 때, 슬픔은 깨달음처럼 찾아온다.
2. 슬픔을 이해하는 슬픔
언어는 애초부터 완전하게 이해될 수 없다. 말의 의미가 가진 슬픔. 시인은 애초부터 언어가 가진 비극을 체득한 자이다. 정해영 시가 보이는 몸짓들은 기표와 기의, 말해진 것과 거기에 완전히 담기지 못한 것들,
‘나’와 ‘너’ 사이의 어긋남을 수긍하는 주체에게서 발생한다. 그래서 시인은 지아비를 잃고 몸의 반쪽을 잃은 사람 앞에서 ‘손’을 덥석 붙잡고 실컷 운다. “손은 온몸으로 하는 길고 긴 말이다”(「손」). 맞잡은 두 손은 침묵 속에서 모든 말을 한다. 고통을 견디는 사람에게 내밀어진 손길은 배려하고 염려하며 통감대痛感帶를 형성한다. 이것은 타자의 슬픔과 아픔을 내 안으로 받아들이려는 노력에서 비롯한다.
슬픔이 에고를 넘어설 때, 슬픔은 완전히 새로운 슬픔이 된다. 이 슬픔을 바르트는 ‘연민’이라 불렀다. 그러므로 시인은 슬픔으로부터 깨어나는 주체, 슬픔의 에고로부터 연민의 사랑으로 건너가는 주체의 모습을 보여준다. 정해영 시의 슬픔은 자아의 상실감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때의 슬픔이란 타자의 슬픔을 이해하려는 노력으로부터 발생한다. 가령, 시인은 “한쪽으로만 닳은 신발”(「그곳이 아프다」)과 ‘부부싸움’(「물집」)을 통해 일상적 고통과 슬픔을 공유하고 ‘나’와 타자의 거리를 좁힌다. 그의 시는 ‘나’의 정서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것은 타자의 슬픔을 생각하고, 나에게 부재한 슬픔을 자청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종군위안부의 “지혈되지 않은 아픔”을 그린 「오래된 맛」, ‘버려진 아이의 울음’을 담은 「계십니까」, ‘늙은 부부의 울분’을 폭로한 「황혼 이혼」 등의 시들이 모두 그러하다.
어떤 시인들의 시에는 불안하고, 외롭고, 불행하고, 또 싸움을 일삼아 죄인같은 사람들만이 존재한다. 그 속에서 현실은 재난처럼 그려진다. 거기에는 분노의 목소리가 숨어 있다. 그러나 정해영은 고통, 싸움, 이혼, 사고, 심지어 죽음을 말할 때조차도 무엇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한 자들을 연민하는 방식을 취한다. 그리고 안으로 참고 참아 곪아 터진 상처를 끌어안고 사는 자들의 신산한 삶을 응시한다. 우리는 그의 시를 읽으며,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감정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그들이 보여주는 어떤 표징에 의해 감정적으로 영향 받고 감정이입하는 주체임을 알게 된다.
시인은 단순히 타자의 슬픔을 자신에게 옮겨 오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는 소리 채취자이자 원시안遠視眼을 가진 자다. 그는 비명, 발자국 소리, 넋두리, 울음, 떨어지는 소리 등 사람과 사물의 소리를 통해 그의 시가 소리들이 방산放散되는 공간으로 만든다. 그리고 그는 사람과 사물에 응결된 슬픔의 무늬를 더듬는다. 아무리 먼 곳이라도 문제될 것이 없다. 그에게는 “멀어서 닿을 수 없는 것”이 더 환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이제 보니 그는 천생 시인이다. 그는 “돌 속의 무늬”에서 “마른 울음”(「돌에서 울음 꺼내기」)을 꺼내고, 그곳에 갇혀 “몸부림치는 흰 슬픔”(「깊이 박혀 있다」)을 취한다. 가족들의 두레상에서는 “가끔 지우개 똥 같은 일”로 겪을 수밖에 없었던 ‘거무죽죽한 울음’의 흔적을 본다. 슬픔은 우리가 습관적으로 덮어두기 마련인 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해준다. 사물의 울음으로 사물의 삶을 보존한 채, 대상과의 거리를 유지하며 자기 자신을 투영해내는 일련의 과정에서 정해영의 목소리는 돌출한다. 대상에 감정을 부여하고, 대상과의 관계에서 내 감정의 자리도 마련하는 것. 정해영 시에 나타난 대상의 주체화는 바로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반짝이진 않아도 새소리 감긴
생나무 결 무늬가 좋았다
등을 구부려 차려주는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밥상
모나지 않아
식솔들 둘러앉기 좋았다
가끔 지우개 똥 같은 일이
채색 없는 가슴 위에 어지럽게
엉겨 붙으면 거무죽죽하게 울었다
날마다 아무렇지도 않게
접었다 펴는 사이
등 위의 아이들은 해바라기처럼 자라
도시로 나가고
결이 삭아
접힌 채 펴지지 않는 엄마가
벽에 걸려 있다
― 「두레상床」 전문
그러므로 의미가 없는 것은 슬픔이 아니라 슬픔의 부재이다. 시인은 가족들이 세파에 시달리며 슬퍼할 때에도 “날마다 아무렇지도 않게” 두레상을 접었다 폈던 엄마를 생각한다. 그리고 두레상의 결에서 엄마가 안으로 삭히며 감내했을 슬픔의 골을 가늠한다. 이제 결이 삭아 접힌 채 펴지지 않는 두레상은 홀로 벽에 걸려 있다. 끝 간 데 없는 그 의연함 앞에서 숙연해지는 것은 나뿐일까. 우리는 저마다 “태어나면서 갚아야 할 슬픔”을 간직한 채 “憂愁에 발 담그고 웃고 있”는 존재들이다. 시인은 슬픔의 소리들을 듣고 이해하는 과정을 시로 발화함으로써 타자의 슬픔을 또 다른 타자에게로 전이한다. 시인은 그렇게 슬픔을 갚는다.
그의 시들은 각자가 몰두하고 있다고 생각해왔던 슬픔의 경계를 허물면서 함께 슬퍼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한다. 이제 슬픔은 세상 만물이 연대할 수 있는 고리가 된다. 정해영은 이처럼 ‘나’와 ‘너’ 사이의 공명이 바로 ‘시’임을 보여준다. 공명은 우리 내부의 울림과 떨림을 경청하는 일로부터 시작한다. 시인은 컴퍼스가 원을 그릴 때 그러하듯, 당신과 내가 함께 모나지 않은 원을 그릴 때에도 떨림과 뒤척임, 흔들림의 순간을 감당해야 함을 말한다. 그러므로 두 사람이 맞잡고 원을 그리는 일은, “파도치는 슬픔을 건너”(「컴퍼스」)는 일이 된다. 그 컴퍼스의 운동이 시계 위로 옮겨간다 해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시인은 “어떤 슬픔에도 머물지 않는다/ 단지 살아갈 뿐”(「시계」). 그러므로 정해영이 시화詩化하는 슬픔은, 슬픔을 이해하는 슬픔이다. 시인의 목소리는 사람과 사물에 깃든 고독과 슬픔을 통과해 비로소 여기에 도달한다. 그의 언어는 대상에 내재한 감성과 운명, 역사를 노출한다. 이때, 우리는 쉽게 볼 수 없었던 타자의 심연을 마주한다. 우리는 우리의 외침과 중얼거림, 웃음과 눈물과 같은 생명의 잡음 속에서 발견되고 청취된다.
3. 우리들의 모국어
이 시대의 음악은 비非음악적 음향들, 주변적이고 잠재적인 모든 신호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생산된 것이다. ‘너’와 ‘나’의 속삭임과 중얼거림, 동물과 곤충의 소리들, 나뭇잎의 바스락거리는 소리, 비 내리는 소리, 바람 소리, 돌들의 마찰음들은 지워진다. 그러나 정해영의 노래에서 미음美音과 소음, 메시지와 잡음은 서로 분별없이 공존한다. 사투리는
“강물과 바람, 그리고 햇빛이” 키워낸 말의 열매들이다(「사투리」). 그것은 울퉁불퉁하지만 맛을 아는 사람만 안다. 아직 말이 되지 못한 말도 있다. 산과 들의 ‘옹알이’가 그렇다. 시인은 잔디 위에서 잠꼬대처럼 배시시 웃는 연노랑의 얼굴이나, 가지에서 하품하는 봉오리에서 옹알이를 듣는다. 이른 봄 여기저기서 “엄, 엄, 부, 우, 바 하는” 아기의 입속말을 듣고 시인은 “울컥 엄마처럼/ 놀란다”. 마음이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산은 이제 시인에게 모국어를 들려준다. 산은 “기교도 없이, 그저 바람소리, 물소리/ 나뭇잎 부대끼는 소리만으로”(「산」) 모국어를 가르친다. 시인은 그로부터 ‘사랑한다, 아름답다, 그립다’는 말을 배운다. 그것은 산이 내는 소리지만, 시인의 마음이 들은 언어다. 시인은 이제 “잊었던 우리들의 모국어를” 가르친다. 우리는 잊고 있었던 우리들의 모국어가 그렇게 아름다운 줄 이제야 알게 된다.
이처럼 시인은 대상의 ‘거기 있음’을 보존하고자 노력하는 동시에 그것을 주관의 영역으로도 포섭하려고 시도한다. 시인이 듣는 소리들은 언어의 한계 속에서도 타자를 향한 나의 마음을 보존한 채, 관계에 대한 끈질긴 마음으로부터 변환되어 나온 것이다. 소리를 내는 것은 자연이지만, 그 소리의 의미는 거기에 닿고자 하는 시인의 열망에서 비롯한다. 송림사 계곡에서 “방금 상처와 헤어진 낙엽들”(「만추」)이 시인에게 말하지 않았던가. “자신을 온전히 비워내야 비로소 내가 있다”고.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내 마음 속에 고여 있는 언어들이 자연에게서 자연의 소리로 발현되어 생명력을 부여받게 된다는 점에 있다. 태어난 곳의 언어, 자연 속에서 벼려진 언어. 그것이야말로 우리들의 모국어가 아니던가.
정해영 시에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말이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시인의 기억 속에서 부모는 소리도 색채도 없는 흑백사진으로 존재한다. 그의 시는 타자의 목소리, 즉 아버지와 어머니의 ‘침묵하는 목소리’를 통해 발화된다. 시인은 침묵 속에서 의미를 자아내고 낱말과 문장의 조직 없이 주체의 감정을 조절하는 경로를 발견한다. 그것은 시인을 낳은 또 다른 자연, 부모가 가르쳐준 모국어의 아름다움이다. 누구나 다 하지 못한 말을 가슴에 품고 산다. 그것은 발화되지 못한 말일 수 있지만, 도달할 수 없는 말일 수 있고, 입술에 묻었다가 삼켜진 말일 수 있다. 그것은 부모의 말일 때가 많다. 정해영의 시는 침묵, 혹은 적막을 향해 열려 있다. 시인은 발화되지 못한 타자의 목소리에서 시의 목소리를 찾아낸다.
“몇 안 남은 잎 하나가/ 천/ 천/ 히/ 떨어진다”(「만추」). 침묵으로 벌어진 틈 사이에서 의미가 발생한다. 시인의 말을 빌면, “나무를 떠나는 잎이/ 공중에서 그리는 곡선은/ 다하지 못한 잎의 말”(「가을을 훔치다」)이다. 그러므로 행간에 스민 침묵엔 아쉬움과 처연함이 묻어 있다. 곡선의 방향에는 안으로 숨어든 마음의 속살이 스며있다. 그것은 어머니의 방식이다.
둥근 식탁 위로
날카롭게 날아오르는 말
누군가가
찔릴 것 같은 어머니는
얼른 모서리부터 베어 잡수신다
삼킬 수 없는 것을 삼킨,
얼굴이 창백하다
하루에도 몇 번
튀어나오는 모퉁이를 끌어안고
휘어지신다 지나온 거친
계절의 길을 둘둘 말아
가슴속에 넣고 다니시는
어머니는 등이 둥글다
가을에 잘 익은 열매처럼,
잔등이 굽은
익어가는 것의
속에는 어머니 한 분씩 계신다
― 「곡선의 방식」 전문
시집 『왼쪽이 쓸쓸하다』에 수록된 시들을 보면, 그 속에서 시인은 손녀이면서 딸이고, 엄마이면서 할머니임을 알 수 있다. 시인을 호명하는 언어들은 타자의 목소리를 배면에 깔고 있다. 그러고 보면, 시인의 어머니라고 생각했던, “날카롭게 날아오르는 말”을 삼킨 어머니의 얼굴은 시인의 얼굴이기도 하다. 튀어나온 모퉁이를 끌어안고 익어 가는 열매는 어머니이면서 시인이다. 그 안에 숨어든 날카롭고 튀어나온 것들, 타자들을 가슴속에 품고 다니는 그는 점점 둥글어진다. 그러므로 곡선의 방식은 덧셈의 방식으로 세상의 온갖 것들을 ‘나’와 ‘시’ 안에 들어오게 한다.
개인 안에 공동체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개인이라는 존재가 포기될 수 없는 이유가 어쩌면 타자에게 달려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일 수 있다. 공동체는 그 개인 안에 자리한 무의식의 자리이다. 내 안에 타자의 몫이 있다는 것. 그것은 내 안에 타자를 받아들이는 일인 동시에 나의 목소리는 너의 목소리와 포개어질 때만 시가 될 수 있다는 사유를 바탕에 둔다. 그러므로 시인이 관계에 대한 인식을 끊임없이 재구성하는 과정은 포기될 수 없는 개인이 되기 위해 내가 타자의 목소리에 지위를 부여한 흔적이다. 정해영의 경우, 그 관계는 가족으로부터 자연으로까지 확장되어 있다.
시는 타자의 목소리를 통해 고안된 내 목소리, 타자를 살아내며 내가 울려내는 목소리이다. 그러므로 정해영의 시에서 우리는 당신과 나의 모든 경계가 무너지는 순간과 만나게 된다. 이 시들과 만나며 마음에 동요가 일어났다면, 당신도 어떤 고독에, 어떤 슬픔에, 어떤 목소리에 스민 울음에 공명한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결국, 함께 아파할 수 있는 존재임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정해영의 이 시들은 ‘왼편의 꿈’이 실현된 순간을 알리는 것이 아닌가. 시인은 알고도 침묵했으리라. 왼손의 소리 없는 꿈을 오른손이 더 잘 알고 있었으리라는 것을.
조윤정 2010년 서울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졸업 ―2014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