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시와 시인과 물질, 그리고 시적 태도
임현준
—한이나, 「말馬, 말言의 입」, 애지, 2026 봄.
—손택수, 「물질 고아원 원장님을 기리며」, 애지, 2026 봄.
—안현심, 「코딱지」, 애지, 2026 봄.
—이용훈, 「희곡지구」, 애지, 2026 봄.
—김영미, 「외야」, 웹진 《비유》, 2026 3-4월.
시의 사변화(思辨化)는 나쁜 게 아니다. 다만 순수한 사유만으로 인식에 도달하려는 시들이 사변화(私辨化)에만 경사되어 있는 것은 나쁘다. 저절로 순수한 사유가 말 많음으로 변질되고, 저절로 말 많음이 무기가 되고, 결국 사변적 말의 무기가 독자에게 위화감을 주기 때문이다. 이런 시각이 많은 시인들에게 얼마나 불편하게 느껴질지 잘 안다. 그렇지만 그 불편함을, 시인의 반대편에 앉아 소중한 시간과 정성을 들여 그 시를 읽고 있을 이들도 그 불편함을 느끼고 있지는 않을지 인식만이라도 해주시랍.
다행히도 <애지>의 많은 시들은 말이 많아도 쉰 우유처럼 배탈이 나지 않고, 번뜩이는 시어가 칼날처럼 날카로워도 독자를 위협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시의 사적인 감정의 배설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우리가 내내 고심해야 할 ‘이게 시야’에 대한 자문 때문이다. 말의 억양에 따라 두 가지 층위로 이해되는 ‘이게 시야’는 시인에게 가장 무섭고 위험한 질문이자 감탄사이다. 이 질문과 감탄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원론적인 것을 이야기해야 한다. ‘시인은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가’, ‘시인의 태도는 뭔가’, ‘시인의 시선은 어떠해야 하는가’, ‘시인은 현실을 어떻게 형상화할 수 있나’, ‘시와 시인은 시적 대상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나’ 같은 하나 마나 한 질문이 그것이다. 그럼에도 이 질문은 ‘시’와 ‘시인’뿐만 아니라, 시적 대상이 되는 세계의 실재하는 모든 ‘물질’을 기저에 깔아놓은 본질적 물음이다. 사실, 우리는 ‘물질’이다.
시와 시인: 시인의 욕망: 시의 경지 추구
말 잔등에 올라
처음부터 너무 처지지는 않게
힘과 살과 뼈에 비축해 두었다가, 결정적 순간
앞을 치고 나타나는 눈부심이게
말을 탈 땐 아무 소리 안 들리더군
승패를 염두에 두지 않더군
다만 고요 속
고삐를 움켜쥐고 갈기를 휘날리는 다문 입의 최선
날것의 욕망과 좌절 통속이 난문해도 돌아보지 않기
오직 너와의 호흡에만 집중하기
침도 마르지 않은 거짓말과 뜬소문
못갖춘마디 형식과 허풍
귀청 때리는 환호와 야유는 짐짓 모르는 채
그저 눈과 귀와 입을 닫고 살아가는 동안
말馬, 말言의 트랙 경기장 하얀 모래밭길
질주하는 말발굽에 채여 흙먼지 뿌옇게 일어나
어질머리하는 봄, 들여다보면 눈망울 크고 깊고 예뻐
마음 녹이는 그런 말 어디 없을까
최후의 날까지 현역을 살며 죽은 시인을 안다
—한이나, 「말馬, 말言의 입」, 애지, 2026 봄.
한이나의 「말馬, 말言의 입」은 동음이의어 “말馬”과 “말言”을 가지고 장난하는 시이다. 그러나 어린아이가 장난하는 마음의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말馬”과 “말言”의 이의동질(異義同質)을 투찰(透察)하는 시이다.
“말 잔등에 올라”타면 곧바로 시인이든 이 시를 읽는 독자든 “말馬, 말言의 트랙 경기장 하얀 모래밭길”을 “질주”할 수 있게 된다. “앞을 치고 나타나는 눈부심”을 맞이하는 “결정적 순간”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승패를 염두에 두지 않”는 “다만 고요 속”의 무아지경에 다다를 수 있다. 실제 “말馬”을 타고 달리는 듯한 2연과 3연의 섬세한 승마 진술은 경험의 유무와는 상관없이 이 시를 읽는 이들로 하여금 직간접적인 말타기 감각을 느끼게 한다. 특이하게도 이 시는 사실적인 이미지보다도, “처음부터” “힘을 살과 뼈에 비축해 두”는 감각과 “아무 소리 안들”리고 “승패를 염두에 두지 않”는 “결정적 순간”의 감각을 통해 “고삐를 움켜쥐고 갈기를 휘날리는” 승마 체험 속 내면에서 일어나는 감각의 근육을 생동감 있게 그려내고 있다. 지극히 추상적이고 사유적인 개인의 감각이 “질주하는” “말馬” 근육과 같이 선명한 운동을 하고 있는 이 대목에서 “다문 입”의 “말馬”이 “말言”로 자연스럽게 “잔등”을 갈아타게 만든다. 4연의 “오직 너와의 호흡에만 집중”하면서 “날것의 욕망과 좌절 통속이 난무”하는 “거짓말과 뜬소문/ 귀청 때리는 환호와 야유”에 “눈과 귀와 입을 닫고 살아가는” 무아지경의 고요를 통해 “말言”의 본질을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말言”은 소리의 근육이지만 “처음부터 너무 처지”거나 “힘을” 너무 주면 “욕망과 좌절”, “거짓말과 뜬소문”, “환호와 야유”의 진창에 빠질 수밖에 없다. 시인은 이런 “말言”의 근육을 “결정적 순간/ 앞을 치고 나타나는 눈부심”이게 하는 “다문 입의 최선” 같은 시언어를 바라보며 “질주”하는 존재이다. 그 “말馬, 말言의 입”에 집중하는 시인은 끝없는 “말言”에 대한 욕망, “마음 녹이는 그런 말 어디 없을까”라는 불가지론적 욕망의 “잔등”에 올라타고 싶은 “말言” 감각의 탐미자이다. 그러나 “마음 녹이는 그런 말”은 아무나 가질 수 없는 “눈망울 크고 깊”은 것이다. 그런 “말言”의 근육을 가진 시인은 흔치도 않고, 있다 해도 “트랙 경기장 하얀 모래밭길” 같은 현실 세계 속에서 살아생전 닿을 수 없는 경지의 것이다. 이 지점에서 이 시의 화자 또는 시인은 “최후의 날까지 현역을 살며 죽은 시인”을 소환한다. “다문 입의 최선”을 현실화하는 “시인”은 “죽은 시인”이기는 하지만, “시인을 안다”는 시적 화자의 염두는 “최후의 날까지 현역을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자기 희망의 욕망을 드러낸다.
한이나의 「말馬, 말言의 입」은 시인이 추구하는 시의 경지를 생각하게 한다. “돌아보지 않기”나 “집중하기”나 “짐짓 모르는 채”하는 것에서 ‘고요한 평안’이라는 개인적 정서를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말馬”과 “말言”의 이의동질(異義同質) 속에서 통찰되는 ‘높은 시에 대한 욕구’가 이 시의 본질로서 더 타당하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는 특이하게도 “말馬”을 타는 육체적 감각과 승마 체험 속 내면의 근육 감각을 통해 생동하는 운동성을 추체험하게 했듯이, 시에 대한 경지 추구라는 시인들의 형이상학적 관념을 “최후의 날까지 현역을 살며 죽은 시인”이라는 명확한 제시를 통해 독자들이 직간접적인 욕구 체험을 할 수 있게 만든다. 또 하나 다른 생각은, 그런 “갈기를 휘날리는 다문 입의 최선”의 경지에 닿은 시인이 존재하기는 할까 하는 의구심이다.
시인과 물질: 시인의 태도: ‘물질’을 바라보는 시적이고 따스한 태도
물질이 도구일 뿐이라면 쓸모가 다한 나도 버려진다는 거다
그래도 된다는 거다
말이 그러하듯이
그러니까 물질을 도구로부터 구원하는 건
차마 나를 구원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그런 자세와 태도를 가져본다는 거
물질이 넘쳐 내가 외롭구나
길바닥에 주워 모은 나사가 한 가마니였다니
어디서 또 주워왔을 양철간판에 새긴
응암동 물질 고아원
원장님은 예술원 회원 대학교수 시인협회장보다
고아원 원장 직함을 더 좋아하셨다지
고물이 어딨나 고물도 나도 같은 원소 같은 일가붙이
돌아갈실 땐 화랑에서 그림을 보고 나오던 길이었다지
쓰러진 바닥에 심장 소리를 들려주었다지
시인의 최후를 녹슨 자전거야 너는 기억하니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주인이 그였다는 걸 알고 있니
사물놀이를 한다 그처럼 최후를 맞고 싶은 사물들이 쿵더쿵
그를 찾아 떠돌아다닌다
성
찬경
사도 요한
—손택수, 「물질 고아원 원장님을 기리며」, 애지, 2026 봄.
손택수의 「물질 고아원 원장님을 기리며」는 앞선 시에서 품었던 의심, “최후의 날까지 현역을 살며 죽은 시인”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아무렇지도 않게 뒤흔드는 시이다. 현실에 그런 시인이 살았다는 실증적 근거 제시는 자칫 시의 현실성을 떨어뜨리는 요소가 될 수 있다. 우리는 현실에서 ‘시인’이라는 존재의 민낯을 여러 번 목격한 적이 있다. 그때마다 존경해 마지않는 ‘시인’을 추종하는 이들의 낭만 속에서 뜬구름 잡는 ‘부처님 불알 만지기’ 같은 허상의 실체로서 부유하다가 본성의 민낯이 까발려진 채 잊혀가는 일개 범부였던 게 다반사였다. 그러나 「물질 고아원 원장님을 기리며」의 “성/ 찬경/ 사도 요한”은 “쓰러진 바닥에 심장 소리를 들려”준 진짜 “최후의 날까지 현역을 살며 죽은 시인”이었다.
성찬경 시인은 의미의 밀도가 높지만 군더더기 없는 시어를 추구하던 ‘밀핵시(密核詩)’의 시인이다. 시류와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존경받았던 인품의 성찬경 시인은 구사하는 시어 안에 ‘의미’라는 생명성을 최대한 불어넣어 언어의 탄력이 시적 대상인 사물에 높은 밀도로 서리게 하는 시적 기법을 추구했다. 시뿐만 아니라 ‘응암동 물질 고아원’이라는 공예미술 전시를 생전에도 사후에도 열 정도로 시 너머의 실체적 물질에 대한 ‘의미의 밀핵’을 고찰하던 실천적 융합 예술 시인이었다. 생전 성찬경의 집에는 “길바닥에 주워 모은 나사”같이 길에서 주워 온 잡동사니 사물이 가득했다고 한다. 손택수가 성찬경에게서 본 ‘진짜 시인’의 면면은 “물질을 도구로부터 구원”하는 “자세와 태도”였다.
고대 그리스의 자연철학자들은 만물의 근원을 ‘물질’로 보았다. ‘서양 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탈레스는 ‘물’을, 엠페도클레스는 ‘물·불·흙·공기’를, 데모크리토스는 ‘원자’를 만물의 근원이라 했다. 이들을 최초의 유물론자들로 볼 수 있다면, 유물론은 세계의 궁극적인 실재가 ‘물질’에 있음을 전제 삼는 인식적 태도를 의미한다. 이에 따라 ‘정신’이나 ‘관념적인 것’들을 ‘물질’로 환원해 설명하려는 것이 유물론이다. 유물론은 ‘물질’과 ‘정신 또는 관념’을 각각 ‘몸’과 ‘마음’으로 치환한다. ‘몸’과 ‘마음’이라는 두 갈래의 절대적 인식에서 ‘물질’을 우선에 두면 유물론이고, ‘정신’에 우선을 두면 유심론이 된다. 서구의 정신사는 실재하는 ‘물질’에서 시작해서 상대적인 ‘정신’으로 시선의 무게 중심을 옮긴 인간 중심의 사유 집적체이다. 서구의 사유는 근대화되면서 ‘감각’의 주체가 ‘실재’라는 대상을 ‘파악’한다고 본다. 따라서 ‘주체’는 ‘의식’을 가진 존재이고, 반대로 ‘실재’는 의식을 가지지 못한 존재로서 ‘대상’이라는 이분법적 구분에 의해 규명된다. 근대적 인식론의 철학을 시발시킨 데카르트는 “co·gi·to, er·go sum”을 통해 ‘나’가 지금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는 의심할 수 없다는 명제를 도출해 낸다. 이제 ‘실재’는 물질적인 것에서 벗어나 ‘나’의 ‘의식’ 안에 갇혀 버린다. 이러한 ‘유아론’은 ‘인간이 세계의 우월한 기준이 된다’는 착각 속에서 ‘생기 잃은 물질’에 관한 유물론의 근간이 된다. ‘실재하는 물질’에 대한 인식은 수동적인 것이고 객체적인 것이고 죽어 있는 것이 된다.
「물질 고아원 원장님을 기리며」는 “물질이 도구일 뿐이라면 쓸모가 다한 나도 버려진다”는 인식하에 서구의 이원론적 잣대, 정확히는 “물질이 넘쳐 내가 외롭구나” 하는 현대인의 자기중심적인 유아론을 적확하게 진단하는 시이다. “고물이 어딨나 고물도 나도 같은 원소 같은 일가붙이”라는 ‘물질’에 대한 인식은 ‘물질’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이와 관련하여 ‘신유물론’이라는 아직은 정리되지 않은 채 생성 중인 철학적 입장을 소환할 수 있을 것 같다. 신유물론은 ‘물질’을 바라보는 인식이 새롭다는 뜻인데, ‘실재가 어디에 있느냐’ 하는 중요한 문제를 새로운 시각에서 갱신하려는 태도를 의미한다. ‘신물질주의’라고도 부르는 신유물론은 기존의 유물론과 달리 ‘활력 있는 물질’에 관한 시각이자 이론으로 “물질을 도구로부터 구원”하려는 “자세와 태도” 그 자체를 지향한다. 이러한 신유물론적 시각에서는 “예술원 회원 대학교수 시인협회장”이라는 인간 중심적 가치보다 “물질 고아원// 원장님”의 지위가 더 의미 있는 것이 된다.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도 ‘물질’들에게 “심장 소리를 들려주었다”는 ‘시인’의 일화는 ‘죽은 물질을 되살리는 것’을 넘어 ‘물질’과 ‘인간인 나’가 서로 위안과 위로를 주고받는 존재로서 수평적으로 횡단하는 세계의 본연성을 실재적인 증거로서 들려준다.
한이나의 「말馬, 말言의 입」에서 운만 띄우고 알려주지 않는 ‘진정한 시인’의 모습을 손택수의 「물질 고아원 원장님을 기리며」는 실재적 인물 “성/ 찬경”을 통해 제시한다. 그리고 “그처럼 최후를 맞고 싶은” 또 한 명의 시인이 “사물놀이를 한다”. 이때의 “사물놀이”는 말 그대로 ‘생동하는 물질’들이 “쿵더쿵”하며 노는 놀이이다. 풍물패의 놀이일 수도 있고, ‘의미’가 ‘밀핵’된 ‘물질’들이 저들끼리 놀다가 “기다려도 오지 않는” “성/ 찬경”을 그리워하는 또 하나의 놀이일 수도 있다. 이러한 동음이의어 “사물놀이”는 이 시를 쓴 시인이 스스로에게 환기시키는 시적 “자세와 태도를 가져본다는 거”의 일환이다. “응암동 물질 고아원”의 “사물놀이”는 ‘물질’을 바라보던 기존의 이원론적 위계의 시각 말고, ‘시인(사람)’과 ‘물질’의 흥취 있는 관계성을 생각하게 한다.
딴에는 성찬경 시인이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것을 생각하면, ‘신의 말씀’이라는 형이상학적인 가치를 믿는 자가 ‘물질’에서 근원적 생명성을 본다는 모순적인 부분을 발견하게 된다. 아마 ‘진짜 시인’이란 “물질 고아원” “원장 직함을 더 좋아”하듯이, ‘신의 말씀’으로부터 구원을 받으려면 ‘말씀’이 아니라 ‘물질’과 친구 맺는 쪽이 더 실천적인 “구원”에 가까운 “자세와 태도”가 아닐까도 생각하게 된다.
시와 시인과 물질: 시인의 시선: 시적 대상에 내재된 독자의 기억
잠결에 던져버린
코딱지 한 점
아침에 찾으려니 보이지 않는다
모가지까지 차오른 짐 부려놓은 후
호젓한 강변에서 함께 울자던
그,
가시내
어디 있을까
—안현심, 「코딱지」, 애지, 2026 봄.
우리는 삶 속에서 생활 속에서 불현듯 “그,/ 가시내”를 떠올린다. 한이나는 “말馬”과 “말言”의 말장난 속에서, 손택수는 “길바닥”에서 주운 “물질” 같은 사물에서, 안현심은 “코딱지”에서 삶과 생활을 관통하는 그 무엇을 기억 속에서 끄집어낸다. 「코딱지」는 이렇다 할 시적 기법이나 선명한 이미지 같은 시적 요소가 배제된 시이다. “모가지까지 차오른 짐 부려놓은 후/ 호젓한 강변에서 함께 울자던” 기억이나 약속을 드러내는 데에는 하찮고 더럽고 쓰잘머리 없는 “코딱지 한 점”이면 족하다. 시인에게 ‘물질’은 하찮고 더럽고 쓰잘머리 없는 것이 아니라, “어디 있을까”와 같은 거대한 세계에 대한 향방 같은 것을 떠올리게 하는 출입구이자 매개물이 되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신유물론의 논점을 밀고 나가면, ‘물질’에 대한 새로운 관점은 세상 만물에 실재하는 것들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거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창구로서 현실을 인식하게 만든다. 또한 새로운 물질성의 함의를 밀고 나가면, 물질이나 사물이 ‘확장된 행위자’로서 주체성을 갖게 된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행위’의 주체성을 ‘인간’을 넘어 ‘비인간적 물질’로까지 확장시킬 수 있게 된다는 말이다. 신유물론에서 ‘비인간적 물질로서 행위자’가 주요 논의의 대상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따라서 데니얼 데닛이 마음의 진화에서 ‘비인간적 물질’의 능동성과 활기를 받아들이고 나면 물질을 행위자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는 취지의 말을 한 것은 적확한 ‘물질’ 이해가 된다. 그는 ‘행위자’ 개념에 있어 모든 물질이 인간과 같이 정신적인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행위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정신적 의도나 심리적 욕망을 지향하는 ‘인간’적 행위자들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고도 말한다. 또한 ‘물질’들은 ‘인간적 행위자’를 지향하는 ‘두꺼운 행위자’와 정신적 지향 상태가 없는 것으로서 ‘얇은 행위자’로 나눌 수 있다고도 말한다. ‘얇은 행위자’로 부를 수 있는 ‘비인간적 물질’들의 행위는 인간의 정신적 지향보다는 자연 상태에서의 원인과 결과 작용에 가깝다. ‘물질’들의 인과적 작용은 ‘어떤 작용을 하도록 준비되어 있는 것’으로서의 운동성을 지닌다는 의미이다. 「코딱지」에서 “코딱지”는 단순히 “잠결에 던져버린” 일개 ‘물질’이 아니다. “모가지까지 차오른 짐 부려놓은 후/ 호젓한 강변에서 함께 울자던” 기억과 약속을 떠올리게 하는 행위자로서의 “코딱지”이다. 나아가 “그,/ 가시내”가 함의하는 선험적 존재성이 “어디 있을까”라는 존재론적 사유의 세계를 열어젖히고 가닿게 되는 과정까지 “코딱지”라는 행위자가 능동적으로 관여한다. “코딱지”가 인간처럼 정신적 지향에 의한 물활론적 사고나 의인화가 시도된 물질은 아니지만, “아침에 찾으려니 보이지 않는다”와 같은 대목을 통해 ‘물질’의 행동자로서 그 능동성을 가늠할 수 있다.
안현심에게 “코딱지”와 같은 사소한 ‘물질’은 시인의 넓고 깊은 내면으로 침잠해 들어갈 수 있는 출입구가 된다. 이는 좋은 시인이라면 지녀야 할 시인의 눈이라 생각된다. 시인이 바라보는 것은 “찾으려니 보이지 않는” “코딱지”의 이면에 오랜 시간을 견디며 도사린 “그, 가시내”라는 기억이자 현실이다. 시의 심플함 때문에 서사적 상상력의 한계를 느끼게 하지만, 그 허술한 서사성에서 길어 올려지는 독자의 상상력은 무궁하다. 그 상상력의 진폭은 이 시를 읽는 이에게 사소한 ‘물질’이 드러내는 심연, 그러니까 좀처럼 헤어나기 힘든 시의 구렁으로 빠져들게 하는 힘이 있다. 그 힘은 시의 심플한 서사와 묘사와 이미지의 배제에서 나올지도 모른다. 절제가 아니다. 애초에 「코딱지」는 정서의 정제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하나의 ‘물질’로서 “코딱지” 같은 시이기 때문이다. 즉, 「코딱지」는 시 자체로 독자에게 ‘행위자’가 되어 존재할 뿐 어떤 시적 강요도 요구도 하지 않는다.
다시, 시인과 물질: 시인의 현실: 현실을 바라보는, 그것도 시대에 맞게
쪼개진 돌 부스러기 돌덩이를 채운 자루의 행렬에서, 앞서가는 자의 낡은 운동화 실밥 한오라기 나불거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마대자루를 능숙하게 짊어지고 나르는 기술 아닌 육체를 밑천 삼아, 질기고 퍽퍽한 쉰내의 육즙을 품고 있는 삽질의 단역이, 한무더기 쌓인 쓰레기더미 똥자루를 옮기고 있습니다
흐르는 땀에 달라붙는 돌가루 끈적하니, 돌덩이 부스러기 줄줄 새는 값에 채울 수 없는 값값, 둘러맨 자루의 무게만큼 채우고 싶은 값값, 똥자루 말고, 파스값을, 똥자루 말고, 피곤한 근육 소생시킬 값을, 목구멍에 묵은 먼지 쓸어내릴 값을
하루벌이 쪼개고 쪼개도 모자람은 어쩔 수 없다는 잡부의 쓰레기 비질 소리에 벌겋게 달아오른 몸뚱이가 갑갑합니다 만신창이 몸에 약침 하나 꽂으면 시원하겠다 원 없겠다 다시금 살아날 수 있을는지, 산허리 삭둑 잘라내고 크레인 한개 두개 세개 내리박고 땅을 갈아엎고 터를 두드리는 거대한 항타기 매질 소리 들판에 퍼지는 속삭임은, 목숨 겨우 이어가는 도시 잃어가던 생명 이어줄 외침인지, 화창한 이른 봄날 무장무장 올라오는 허허벌판에 고개 숙인 서툰 몸짓의 잡부들인지
신도시 건설되는 마음으로 되살아나고 싶었던 나는 아니었는지
등에 박힌 돌쪼가리 수건을 털고, 신발 벗어 탈탈 털고, 양말 벗어 툴툴 털고, 발가락 벌려 사이사이 털듯 거친 숨소리를, 폐기물 차량으로 이어지는 긴 여운에 군말 없이 내맡기고자 합니다, 파란 방수포 펼쳐진 드넓은 대지 먼바다의 망망을 유리창에 비친 얼굴이 흘러가는 구름처럼 읊으면, 비언어 신체극의 막은 내려가겠지요, 한마디 대사 없는 행동의 지시문으로, 떠도는 자의 익숙함으로, 공사장 가림막 철판 펜스 짙은 그늘 밟으며 달리며, 기웃거려봅니다, 맡은 바 배역에 충실함으로
인력 배달차에 몸 싣고 가는 평택항 희곡지구
—이용훈, 「희곡지구」, 애지, 2026 봄.
이용훈의 「희곡지구」는 새로운 시대 새로운 모습의 노동시이다. 박영근이나 백노해, 백무산 같은 노동 시인들은 노동 현장에서의 체험을 투쟁의 형식으로 보여주고 있다. 노동자의 시선으로 인간성이 피폐해진 자본주의하 현실의 살풍경한 비정함을 온몸으로 겪고 저항했다는 우리 현대시사의 중요한 리얼리즘적 지점을 형성하고 있다. 그런데 이용훈의 노동시는 이들과 결이 다르다. 자본주의 그늘의 냉혹성은 그대로이지만, “흐르는 땀에 달라붙은 돌가루 끈적”이는 “만신창이 몸”을 이끌고 “잡부의 쓰레기 비질 소리에 벌겋게 달아”오르는 노동에 “하루벌이 쪼개고 쪼개도 모자람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을 견디는 것도 이전의 노동시와 다르지 않지만, “신도시 건설되는 마음으로 되살아나고 싶었던 나”라는 ‘시적 화자’의 내면은 이전과 확연히 다른 성질의 것이다. 투쟁도 저항도 현실 비판도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맡은 바 배역에 충실함으로” 노동의 현장에 서 있는 ‘나’는 “마대자루” 같은 건설 현장을 구성하는 하나의 ‘물질’일 뿐이다. 이러한 현실 인식은 시대적 함의 속에서 동정도 연민도 구걸하지 않는다. “평택항 희곡지구”는 대한민국이 처한 자본주의의 이상향이다. ‘개발’과 ‘호재’라는 시대적 가치 앞에 이전의 노동시인들이 보여준 삶의 참 본질은 낡은 시대적 외침이 되었다.
「희곡지구」는 “피곤한 근육 소생시킬 값”과 “목구멍에 묵은 먼지 쓸어내릴 값”이 현실적 추구 가치가 된 “신도시 건설” 속 “서툰 몸짓의 잡부”의 노동을 리얼하게 그려낸다.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는 ‘희극’의 아이러니함은 “목숨 겨우 이어가는 도시”가 “잃어가던 생명 이어줄 외침”이라는 자본주의의 엄살 같은 비명에 벌벌 떠는 우리네의 “비언어 신체극”을 사실적으로 형상화한다. 우리는 “공사장 가림막 철판 펜스 짙은 그늘” 안에서 “맡은 바 배역에 충실”한 “쓰레기더미 똥자루”임을 스스로 안다. 그러한 시대 그러한 공간 그러한 자본주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이러한 현실을 비난하거나 폭로하거나 저항하지 않는다. 현실 속에서 ‘생명력 잃은 물질’로서 “잡부”의 삶을 “한마디 대사 없는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이전의 노동시에는 ‘나’에 대한 연민이 내재되어 있었다면, 이용훈의 ‘나’는 스스로를 ‘생명 없는 물질’로 만들어 버린다. 그렇지만 이는 형이상학적인 본질이 아닌 현실의 본질 속에서 “맡은 바 배역에 충실”한 삶과 노동의 모습을 보다 진정성 있게 보여주는 일이 된다. 그리고 나아가 불가항력적인 시대에서는, 더군다나 개발과 호재가 당연한 합어리(合於理)가 된 자본주의 세계에서는, ‘나’가 어디에 어떻게 왜 존재하고 있는지를 생각하지도 기억하지도 못하게 하는 현실에서는 ‘물질’과 같은 “잡부”의 모습 그 자체가 하나의 이정표가 된다.
신유물론의 ‘물질’과 ‘물질’의 관계성을 이해하는 데 브뤼노 라투르의 ‘행위자-네트워크 이론(Actor-Network Theory)’을 참고할 수 있다. ‘행위자-네트워크 이론’에서의 신유물론은 기계나 도구, 장치 등의 비인간적 사물에 행위자의 지위를 부여한다. 브뤼노 라투르의 행위자는 대부분의 신유물론자들의 입장과 마찬가지로 ‘비인간적 사물의 행위’에는 정신적 의지나 목적이 없음을 명확히 한다. ‘행위자-네트워크 이론’에서 ‘행위’의 의미는 ‘효력 또는 차이’에 있다. 정신적 지향으로서 행위, 즉 인간 행위자와 동일한 효력이나 동일한 차이를 만들어 내는 ‘비인간적 사물의 행위’가 존재한다면 적어도 ‘물질’들은 ‘행위자’가 될 수 있다는 논리이다. 가령, 어떤 목적지를 향해 길을 찾아갈 때, 인간 스스로가 기억에 의존하여 찾아가는 행위의 효과는 네비게이션이 지도 정보를 띄워주어 찾아가게 하는 효과와 결과적으로 다르지 않다. 이용훈이 「희곡지구」를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은 현재 우리의 좌표, 즉 시대적 ‘물질’로서 살아가는 우리의 현실과 노동과 삶의 가감 없는 경도와 위도 그 자체에 있다. 다시 말해 「희곡지구」는 “인력 배달차에 몸 싣고 가는” “화창한 이른 봄날 무장무장” 올라가는 “크레인” 같은 자본주의 현실에서 우리가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알려주는 네비게이션과 같은 시이다.
「희곡지구」는 손택수의 「물질 고아원 원장님을 기리며」와는 ‘물질’을 바라보는 결이 다른 시이다. 시의 어투도 관점도 태도도 다르다. 하지만 ‘물질’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같다. 현실과 현실이 함의하는 시대 앞에서 ‘나’는 ‘영혼이 없는 물질’로서 “공사장”을 구성하고 있는 “삽질의 단역”으로 존재할 뿐이다. 이런 “비언어 신체극”을 바라보는 독자들, 그러니까 우리들은 노동의 가치를 되새겨야 하는 것일까. 질문이 낡았다. 아니 낡은 것처럼 생각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노동의 가치를 생각하거나 되새기기에는 “값값”이 되질 않는다. 이용훈 시인이 의도한 것은 노동에 대한 울분도 노동에 대한 가치도 아니다. “잡부”인 ‘시적 화자’ 스스로 ‘사물처럼’ 생각하는 생활 그 자체를 “맡은 바 배역” 같은 하나의 물질성으로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이 자체로 「희곡지구」는 새로운 시대 새로운 유형의 노동시가 어떤 리얼리티적 미학성을 보여줄 수 있는지 좋은 사례로서 자리매김한다. 그리고 안현심의 「코딱지」처럼 시 자체가 하나의 ‘물질’이 되어 우리의 삶과 현실에 능동적 행위자로서 개입한다.
다시, 시와 시인과 물질: 각자의 고유한 자리
아이와 야외야
오이와 우유야
와와
와아
이유의 야야
의아의 야야
왜에 이어
야유에 이어
우의와 유의의
요요야
요요와
요의
야외야
외야야
여유의 우아야
—김영미, 「외야*」, 웹진 《비유》 78호, 2026 3-4월.
*김혜순 시 「모음의 이중생활」 중 ‘세상에는 모음 외에는 사실 아무것도 없었다’ 구절에서 비롯된 시.
시작노트: 점 하나를 찍어 동그랗게 굴린다. 시작점에서 마지막 점까지 잇는다. 이응이 만들어진다. 초성 이응은 음가가 없지만 모든 모음과 어울려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다. 모음만으로 이루어진 세계, 이응의 세계를 생각해본다.
“세상에는 모음 외에 사실 아무것도 없었다”라는 문장에서 비롯된 시 김영미의 「외야」는 이용훈의 시와는 대별되는 시이다. 시의 형식과 내용에서 정반대의 것으로 보일 만큼 차이가 난다. 「희곡지구」에 등장하는 “잡부”의 노동은 보람도 열망도 없이 “퍽퍽한 쉰내의 육즙” 같은 “땀”만 있는 리얼리티 그 자체이다. 반면에 「외야」는 리얼한 현실도 ‘물질’로서의 구체적인 실재도 없다. 다만 “모음”으로 이루어진 소리들, 세상에는 없는 이름으로만 이루어진 홀소리가 내는 울음 같은 것들만 가득한 시이다. 「외야」의 시 세계는 “야야”와 “와아”의 감탄사만 들리는 정제되지 않은 감정의 세계이다. 김영미가 남긴 시작노트처럼 “음가가 없지만 모든 모음과 어울려 의미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불가해한 시적 공간이다. 「희곡지구」에는 희극처럼 “땀”만 있고, 「외야」는 동굴을 울리는 동그란 울음처럼 “ㅇ”만 있다. 결국 두 시는 형식과 내용에서 정반대의 태도를 취하지만, 한 가지 목소리만 주야장천 내고 있다는 점에서는 같은 태도를 취한다. 또는 ‘의미’를 잃어버린 것처럼, ‘의도’를 가지지 않으려는 것처럼, ‘의식과 인식’에 어떤 희망과 열망을 담아내지 않는 것처럼 오직 한 가지 정서를 향해 질주하고 있다는 측면에서는 같다. 그것은 마치 ‘영혼 없는 물질’이라 여겨지던 것들이 껍데기를 깨고 태어나려는 필사의 발버둥이나 울음소리 같다.
다시 유물론으로 돌아가서, ‘오직 의식만이 존재를 가능하게 한다’는 유아론적 인식론자들은 ‘실재의 존재 자체’에 대한 믿음과 확신을 ‘마음’이라는 ‘주관’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결국 인간이 감각하거나 인식해서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정신적인 작용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물질’은 실재하는 것이다.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실재는 ‘물질’이다. 따라서 ‘몸’이건 ‘마음’이건 인간이라는 실재는 세계에 존재하는 물질의 하나이다. 근대적 인식론의 문제는 물질 중 하나인 ‘인간이 세계의 우월한 기준이 된다’는 착각에서 비롯한다. 여기에서 파생되는 상·하, 좌·우, 안·밖, 빛·어둠, 선·악과 같은 이분법적 잣대가 이성적 사유의 근간이 되면서 인간을 중심으로 세계의 모든 물질들에 대한 위계질서가 세워지게 된다.
물질을 ‘나’라는 ‘자아’와 같은 선상에서 ‘타자’로 이해하는 것이 신유물론의 기본 입장이다. 이때의 ‘타자’는 이분법적 인식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입장만 고집하는 것만으로는 타인을 이해할 수 없다는 한계를 수용하는 것으로서의 의미를 전제로 한다. ‘자아’와 ‘타자’는 모두 물질이지만 똑같은 경험을 하지 않는다는 인식의 수용은 중요하다. 세계에 존재하는 실재로서 물질들은 저마다의 고유성을 지니고 있고, 그 고유성을 발견하는 것에서부터 신유물론적 인식은 기존의 유물론과는 다른 가치를 지니게 되기 때문이다.
김영미의 「외야」는 “모음만으로 이루어진 세계”이지만 하나의 고유성을 지니고 있다. “아이와 야외야// 오이와 우유야”의 세계에서는 “아이”는 ‘나이가 어린 사람’이나 ‘무엇을 조르거나 마음에 내키지 않을 때 내는 소리’가 아니다. “야외”는 ‘집 밖의 노천’이 아니고, “오이”는 ‘박과의 한해살이 덩굴풀’이 아니고, “우유”는 ‘소의 젖’이나 ‘하는 일 없이 한가롭게 지냄’이 아니다. 그냥 “음가가 없”는 고유한 모음으로서 ‘타자’일 뿐이다. 알아들을 수 없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은 것이 아닌 것처럼, 의미 없는 “여유의 우아야”라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이 시와 이 글을 읽는 당신과 내가 ‘자아’를 가진 존재이듯, “요요와 유의”는 이해되지 않은 채 ‘타자’의 자리에서 ‘물질’처럼 고유하게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이응의 세계”를 수용까지는 힘들더라도 인식하는 일이다. 그것만으로 「외야」라는 ‘물질’은 우리와 대등하게 서서 대등하게 우리를 인식하려 할 것이다. 그러면 시인의 군더더기 말 “시작점에서 마지막 점까지 잇는다”를 이해할 수 있다. 이 시를 소리 내서 읽어보면 입술이 단 한 번도 닫히지 않은 채 동그라미를 유지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것은 흡사 태어날 때나 소중한 이를 잃었을 때나 절망에 빠져 혼신의 힘으로 울고 있는 울음의 형태를 닮았다. 아, 이 시는 음가가 없는 “초성 이응”처럼 소리 없는 울음의 형상화이다.
김혜순의 「모음의 이중생활」은 호스피스의 엄마(母)에게 겨우 한 개 남은 음절(“자음을 버린 모음”)을 이야기한 시이다. 그것은 죽음 이전의 모든 기억의 소실일 수도 있고, 생의 모든 것들이 갈아져 가루가 된 자의 울음일 수도 있다. 이 시에서 태어난 「외야」는 ‘의미’를 지향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울음이나 감탄사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시는 두 가지 상반된 것을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그 두 가지 상반된 것은 한 문장으로 표현된다. 바로 ‘이게 시야’라는 무서운 문장이 그것이다. ‘이게 시야!’ 할 때는 시를 읽는 독자에게 말고, 시를 쓰는 사람들에게 조심스러워진다. 「외야」는 좋은 시임이 틀림없지만, 이렇게 따라 쓰지는 말라고 강권하고 싶다. 따라 해서 될 일이 아닌 시이기 때문이다. 흉내도 내지 않았으면 한다. 이러한 시는 형식과 의도를 따라 하는 순간 정나미가 떨어지는 유치찬란한 어설픔이 된다. ‘이게 시야?’ 할 때는 시를 쓰는 사람 말고, 시를 읽는 사람에게 조심스러워진다. 「외야」는 분명 김영미 시인이 쓴 시임이 틀림없지만, 이것만 읽고 시를 판단하지 말라고 사정하고 싶다. 시의 세계는 무한하며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귀찮아도 입으로 소리 내서 읽어보았으면 한다. 이러한 시는 이미지나 이야기가 아닌 시의 본질에 든든한 뒷배를 두고 있다. 시는 말이고, 말은 소리이고, 소리는 모음이 있어야 한다. 그 본질이 쓸데없이 형이상학적이고 도통 “값”이 안 된다고 해도 시는 거기서 태어나고 거기서 죽는다. 시는 모든 모음이 어울려 의미를 만들어 낸 세계니까 말이다.
‘시’는 ‘시인’의 또 다른 자아이다. ‘시’는 또 하나의 ‘물질’이다. 그러니까 시와 시인과 물질은 각자의 고유성을 지닌 채 수평적으로 횡단하는 사이이다. 거기로부터 “마음 녹이는 그런 말”에 대한 ‘시인의 욕망’이 움튼다. 거기로부터 “물질을 도구로부터 구원”하는 ‘시인의 태도’가 세워진다. 거기로부터 “어디 있을까”라는 ‘시인의 시선’이 생긴다. 거기로부터 “맡은 바 배역에 충실함”으로 ‘시인의 현실’을 사실적으로 그려낼 수 있게 된다. 거기로부터 “야야”와 같은 불가해한 “시인의 고유성”을 노래할 수 있게 된다. 그러니까 ‘시인’이라는 ‘물질’이여, ‘영혼 없는 물질’이 아님을 기어코 밝혀내시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