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을 잡아라’가 진정 의미하는 것은?
‘오늘을 잡아라’라는 말을 듣는다 – 그러나 정작 우리는 어떻게 이것을 할 것인가?
피오나 맥도날드는 어떻게 까르페디엠이 회복될 수 있는가에 대한 새 책의 저자와 대담한다.
피오나 맥도날드 17 May 2017
1968년 요트 난간에 기대어 달마티안 해협의 ‘깎아지른 바위 절벽들, 일렁이는 바다, 눈부신 하늘을 바라보며 작가이자 광고맨인 제리 맨더는 깨달음을 얻었다. 혹은 아마 그 반대이거나. “나와 모든 사물들 사이에 하나의 영화가 상영되는 느낌을 받았어” 그는 그의 1977년 책 텔레비전을 없애는 데 대한 네 가지 주장에서 썼다. “나는 엄청난 광경을 ’볼‘ 수 있었다. 나는 그들이 엄청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그 경험은 나의 눈에서 멈춰버렸다. 나는 그 광경을 나의 머릿속으로 들여보낼 수 없었다. 나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무엇인가가 나와는 엉뚱하게 진행해 버렸다.
맨더는 “어린 시절 하늘과 풀의 모습만으로도 물리적 즐거움의 파장이 나를 훑고 지나갔던 순간”들을 회상했는데 갑판에서는, ‘죽은 느낌이었다’라고 썼다. “자연은 나와 무관해졌고 내 삶에서 부재하였다. 단지 노출과 실행의 부족으로 인해서 나는 그것을 느끼고, 함께 동화하고 관심가지는 능력을 잃어버렸다. 인생은 지금 그러기에는 너무 빨리 지나갔다.”
그것은 거의 50년 전이었다. 삶의 속도가 그때 이후로 가속화되어왔으며 –사회철학자 로만 크르즈나릭에 따르면 맨더가 이야기하는 것은 점차 널리 퍼지고 있다. “인간은, 독서의 발명이후로, 항상 경험을 조정해왔다, 그러나 이제 TV같은 것이 우리에게서 직접적인 삶의 경험을 없애버려서 우리는 그것이 어떤 것인지 거의 까먹어 버렸다”라고 BBC문화면에 이야기한다. 그는 해결책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 모두 안에 있는 이 까르페 디엠 본능을 회복하는 것이 필수적이다”는 것이다.
(사진설명:
죽은 시인의 사회같은 영화는 “너무 직면해 있음을 느끼지 않는 죽음에 관해서 생각하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고 크르즈나릭은 말한다. “일종의 필터같은 것이 있다”)
2000년도 더 전에 로마시인 호레이스가 처음 만든 까르페 디엠 혹은 ‘오늘을 잡아라’은 “서양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철학적 모토들 중 하나”이다. 라고 크르즈나릭은 말하는데 그는 되찾은 까르페 디엠: 사라져가는 오늘을 잡는 기술 이라는 책을 썼다. 그러나 그것은 핀으로 고정시켜야 하는 자꾸 미끄러져 나가버리는 생각이다. 조사 하는 동안, 그는 대중문화에서 큰 반향을 가지는 한 개념, 즉 메탈리카, 그린데이의 노래들 그리고 죽은 시인의 사회와 같은 영화들에 영감을 준 한 개념에 대한 정의의 범위를 발견했다.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은 아주 다양하다, 기회를 잡는것에서부터 자발성, 쾌락주의, 현재의 순간에 있는것까지; 또한 까르페디엠의 집합적 정치형태로도.” “그들은 죽음에 직면하여 섭리를 느끼게되는,혹은 당신이 완전히 살아있다고 느끼게 되는 완전 다른 방식들이다.
문화에 있어 그 말의 만연함에도 불구하고- 혹은 아마 그것 때문에, 까르페 디엠은 광고 슬로건과 해쉬태그의 언어: ‘Just do it’ 혹은 ‘Yolo’에 의해 망쳐져 왔다. 크르즈나릭은 이것이 그 진정한 의미의 개념을 벗겨버리는 것을 도왔다고 주장한다. “까르페디엠의 강탈은 이 세기의 실존적 범죄이다.”라고 그는 쓴다.
“소비자 문화는 오늘을 잡는 것을 포착했다”,라고 그는 BBC문화면에 말한다. “그 말은 바로 실행하는 것 대신에 우리는 대신 그것을 산다라는 것인데: 쇼핑은 서양에서는 텔레비전 다음으로 두 번째로 가장 인기있는 레져활동이다. 오늘을 잡는 대신에 우리는 진짜로는 신용카드를 잡고 있다.”
까르페디엠은 우리의 스케쥴이 빡빡한 삶의 문화에 의해 강탈당해 왔다. 라고 크르즈나릭은 주장한다. ‘그냥 해버려’는 ‘그냥 계획해’가 된다 –사람들은 그들의 전자 캘린더 주 계획표를 노는 주말도 없이 미리 채우고 있다. 문화 역사의 측면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의 자발성이 지난 반 천년동안 그들로부터 도난당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다.
(사진: 공장의 시계가 우리의 시간에 대한 관점을 바꿔놓았다 라고 크르즈나릭이 말한다: “비록 우리는 디지털적 과부하같은 것들 때문에 자발성을 잃었다고 생각한다해도 좀 더 깊은 요인들이 있다”)
사람들은 중세시대에 더욱 자발적인 삶을 살았다 -“부분적으로는 물론 죽음이 훨씬 더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라고 그는 말한다. 그러나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죄악이라는 생각이 깊이 새겨져 왔는데 이것은 “종교개혁 때문이었으며, 이 종교개혁의 영향은 유럽에서 마치 서리처럼 내렸다.- 종교개혁으로 교회는 카니발과 여름 축제들을 금지하기 시작했고 대중적 춤과 오락을 금지하는 새로운 법들이 생겨났다. 그런다음 산업혁명이 대단한 무기인 공장시계를 가지고 나타났다.” 고 크르즈나릭은 말한다.
“우리는 여전히 산업혁명의 일부로서 발전된 언어를 가지고 있는데, 산업혁명 시대에 우리는 우리의 나날들을 생산성으로 채워야했고 해야할 일 목록을 가지고 일을 진행시켜야 했다” “우리는 까르페 디엠의 그 측면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대단한 고난을 우리 앞에 두고 있다.
동양의 약속
이것을 회복하는 한 가지 방법은, 그가 제안하기를, “쾌락주의가 오랫동안 인간 문화, 개인감정, 열정적 삶에 중심이어 왔으며, 현대의 삶에서 그것을 위한 장을 마련하는 것이 필수적이다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쾌락추구는 의심의 눈으로 보여질 수 있다고 그는 말하는데 “이는 천천히 우리의 마음속에 스며들어왔던 그리스 로마식의 도덕적 이상과 고행을 강조하는 기독교적 가르침의 유산 때문이다. 2000년 동안 쾌락에 반대하는 긴 전쟁이 있어왔다.”
역사상 가장 걷 보기에는 쾌락을 비난하는 기간들 중 하나인 동안에, 쾌락주의를 옹호하는 대안적 개념들이 대중적 상상력을 포착했다.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에 출현했던 ‘동쪽’에 대한 열광은 그 당시의 도덕적 코드의 직접적 반영이었다. “이것은 페르시아 카펫과 일본의 옻칠 가구에 대한 열광을 훨씬 넘어선 것이었다”라고 그는 쓴다. 동양은 또한 엄중한 빅토리아시대 기독교와는 반대인 에로틱 감각의 환타지와 열정적 까르페 디엠을 환기시켰다
(사진: ‘살아있는 동안 마셔라! - 죽으면 결코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같은 싯구들로, Rubáiyát of Omár Khayyám은 쾌락주의를 축하했다. )
('루바이야트(Rubáiyát)'란 말은 원래가 '4행 시집'이란 뜻으로서 루바이라고 하며(루바이야트는 그 복수형) 오마르 하이얌(Omar Kháyám, 11-12C)의 시집을 가리킴
"한 병의 붉은 술과 한 수의 노래가 있고 / 그에 곁들여 명을 이을 양식만 있다면 / 그대와 함께 폐옥에 사는 한이 있어도 / 마음은 왕후의 영화에 못지않게 즐거우리“)
그 때의 주요 텍스트들 중 하나는 Edward FitzGerald의 11세기 페르시아 시인과 수학자 Omár Khayyám에 의한 산문들의 마구잡이 번역인데 – 이것은 Rubáiyát of Omár Khayyám이라는 장편시의 형태를 띄고 있었다. Rubáiyát의 사본이 화가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에게 넘겨졌고, 그가 그것을 그의 라파엘 전파 써클과 공유한 후에 존 러스킨이 선언했다, “나는 오늘날까지 그렇게 영광스러운 것을 읽어본 적이 없다”라고. 크르즈나릭에 따르면, “거기서 적어도 1차 세계대전까지 지속된 Omár Khayyám 의 예찬이 시작되었다.” 그 시는 전 세대에 의해 암송되었고 인용되었으며 숭배되었다. Omár Khayyám 다이닝 클럽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심지어는 Omar 치약과 카드를 살 수도 있었다.
그 시는 쾌락주의를 축하했으며 절제, 까다로움, 자제라는 비공식적 빅토리아시대의 이데올로기에 반하는 격한 반응이었다. 향기로운 아랍의 밤에 시원하고 알딸딸하게 만드는 와인을 마시면서 쟈스민 가득한 정원에서 감각적인 포옹을 하는 그들의 모습으로는. Rubáiyát는 종교 그자체를 거부하고 사후세계는 없다고 하며 그 메시지는 인간 존재는 순간적이며 죽음은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다가올 것이므로 멋진 순간들을 음미하는 것이 최고다라는 것으로 보였다. 작가 GK Chesterton은 Rubáiyát는 까르페디엠 종교의 성서였다고 주장했고 한편 오스카 와일드는 그것을 그의 가장 훌륭한 문학적 애창시로서 셰익스피어의 소네트와 나란히 두며 “예술의 걸작”으로서 묘사했다.
(사진: 오마르 하이얌의 루바이야트는 ‘만약 당신이 와인으로 취해있다면, 즐겨라!/ 만약 당신이 당신의 연인과 앉아있다면, 즐겨라!라고 했는데 이것이 엄청난 추중자를 낳는 히트가 되었다.)
까르페디엠이 현실도피의 한 형태를 나타낼 수 있는 위험이 있는가, 비록 너무 많은 달콤한 순간들을 맛본다는 것이 당신의 모든 책임을 뒷전에 둔다고 해도? 쾌락주의의 위험 중 하나는 “트레인스포팅 스타일의 헤로인 과다복용과 폭음을 하는 것”으로 결국 끝날 수 있다는 것이며, 그것은 “당신도 그 누구도 도와주지 않을 것”이다 라고 크르즈나릭은 말한다. 그러나 까르페디엠 전통에서는 쾌락주의 같은 것은 과도함에 대해서는 그렇게 심한적이 없었으며 그것은 감각의 재발견, 직접적 경험의 재발견에 관한 것이었다. -그것이 자유사랑이든 미식탐구이든 간에.
**(트레인스포팅:1990년대 가장 뛰어난 영국영화 가운데 하나로 비평과 흥행 두 마리 토끼를 거머쥔 화제작. 마약에 빠져 인생을 망가뜨리는 젊은이들에게 삶의 의미를 되돌아보라는 교훈적 메시지를 파격적인 스타일에 거침없이 담아냈다.)
삶과 죽음
우리가 오늘을 살게 하지 못하게 하는 또 하나는 우리 자신의 유한한 생명을 마주하는데 대한 반감이다. “우리는 죽음을 부인하는 문화에 살고 있다, 왜냐면 광고 산업은 우리에게 우리는 영원히 젊다 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 2천년동안의 생각하는 까르페디엠의 초석들 중 하나는 죽음의 맛을 우리 마음속에 간직한다는 생각이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영원히 살 것이다 라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정말로 행동을 하겠는가? 우리는 어떤 일도 하지 않을 것이다”
“죽음을 받아들이려 애쓴다”라고 알베르 까뮈가 썼다. “그 이후로 어떤 것도 가능하다”. 크르즈나릭은 이것을 Carpe Diem Reclaimed작업을 하면서 실행에 옮겨보려고 했다. 내가 받아들인 새로운 습관들 중 하나는 ‘죽음 잠시 멈춤’이라고 부르는 것인데 이것은 약간 섬뜩하게 들리겠지만 죽음에 대해 잠시 생각하며 하루에 5분 정도 쓰며 그것을 내 삶속으로 가져오는 것에 관한 것이다.
(그림: 중세에는 “사람들이 그 당시에는 가지고 있었고 오늘날 우리는 가지고 있지 않은 죽음과의 이 연관성이 있었다.” -이것은 1485 판의 죽음의 춤에서 나온다.)
“철학자들은 내가 ‘죽음을 맛보는자들’이라고 부르는 많은 것들- 오늘을 사는 것을 위한 생각, 경험들 많은 것을 생각을 해 냈다. 고전적인 것은, 로마시대로 돌아가서, 오늘이 마치 마지막날인 것처럼 매일 산다는 생각이다. 또 다른 것은 마치 6개월만 남은 것처럼 사는 것인데, 이것은 좀 더 장기적인 생각이다. 그런 다음, 불교전통에서는, 인생이 마치 작은 죽음들로 가득차 있는 듯이 살아라는 것이다. 유한하다는 생각: 당신의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을 단지 한번밖에 볼 수 없으므로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라.”
그것은 오늘날 우리 스스로 상기해야할 어떤 것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문화는 중세와 르네상스 사회에 너무나 만연했던 죽음에 대한 생각을 잃어버렸다. 그 때는 교회벽이 춤추는 해골 프레스코 그림으로 덥혀있었고 사람들은 인간의 두 개골을 그들의 책상에 간직했는데 memento mori라고 알려졌었다, 라틴어로 ‘너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라는 뜻인데, 죽음이 언제든 그들을 데려갈 수도 있다는 것을 상기하는 문구이다.
(그림: “우리는 옛날보다 죽음에 대해 더 잘 이야기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아주 금기시되는 화제이다”라고 크르즈나릭은 말한다. )
2007년도 영화 ‘더 버킷리스트’는 ‘죽기전에 할 일들’산업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비록 크르즈나릭이 그 현상을 “우리의 초 개인주의적 욜로 문화의 결과”로서 본다할 지라도 “그 영화와 그 영화가 심어놓은 열광적 온라인 컬트 뒤에 따라다니는 흥미로운 실존적 질문 : 살 수 있는 시간이 일정 기간밖에 없다는 것을 안다면 무엇을 할텐가?” 이 있다고 그는 말한다.
크르즈나릭은 아키라 구로사와의 이키루 와 다크 코메디 Harold and Maude를 모탈리티를 강력하게 상기시키는 주제로 인용하며 말한다: “우리의 정신을 흩트려놓는 문화가 있지만 죽음에 당신의 마음을 열어주는 우연한 만남들이 있다.”라고. 그리고 이러한 것들은 “삶이 짧다는 것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깨워주는데 특별히 강력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작가이자 철학자인 쟝폴 사르트르는 표현하기를: “항상 다시 시작하는, 단지 하루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 하루는 새벽에 우리에게 주어졌다가 저녁에 우리에게서 도로 가져가는 것이다.”
첫댓글 직역을 하고 바로 올렸더니 영 매끄럽지 못하구만...감안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