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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체스카의 亂中日記 - 6.25와 李承晩 [발췌]
최근의 세월호 사건의 와중(渦中)에 SNS를 통하여, 그리고 심지어 일부 몰지각한 야당 정치인의 입을 통하여 필자로서는 도저히 듣고 넘길 수 없는 망령된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1950년 북한군이 전면 기습 남침으로 6.25 전쟁을 도발했을 때 “이승만(李承晩) 대통령(당시)이 서울시민들을 팽개치고 자신만 먼저 살 길을 찾아서 피난길에 나섰다”고 주장하면서 그들이 주장하는 이 같은 이 대통령의 행동을 이번에 승객들을 버려두고 침몰하는 세월호를 제일 먼저 탈출한 선장(이준석)의 무책임한 행동에 비견(比肩)하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역사 왜곡을 자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몰지각하고 무책임한 언동(言動)에 접하면서 필자의 뇌리(腦裏)에는 문득 얼마 전 신재성 예비역 소장(육군)이 보내 준 한 권의 책 - <프란체스카의 난중일기 – 6.25와 이승만>(서울 도서출판 기파랑, 2011) - 을 탐독(耽讀)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승만 대통령의 오스트리아 출신 부인 프란체스카 도너 여사는, 이승만 대통령의 현대판 사관(史官) 역할을 자임(自任)하여, 1950년6월25일 6.25 전쟁이 발발한 날부터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대통령의 일동일정(一動一靜)과 대통령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상사 및 전쟁의 진행 상황을 날마다 꼼꼼하게 기록해 놓았다. ‘도서출판 기파랑’은 이 같은 프란체스카 여사의 ‘난중일기’ 가운데서 전쟁 발발로부터 약 1년간의 부분을 정리하고 편집하여 이를 한 권의 책으로 출판했다. 그 책이 <프란체스카의 난중일기 – 6.25와 이승만>이다.
다른 분들의 경우는 모르겠지만 필자의 경우는 결코 편안한 마음으로 이 책을 읽기 어려웠다. 프란체스카 여사의 눈을 통하여 조명(照明)된 6.25 전쟁은 시대를 달리 하기는 했지만 갈 데 없는 ‘임진왜란(壬辰倭亂)’의 재판(再版)이었다. 1950년의 대한민국이 당한 6.25 전쟁은 1592년의 조선(朝鮮) 왕조가 당한 임진왜란과 똑 같이 아무런 대비도 없이 당한 ‘무비유환(無備有患)’의 전형(典型)이었다. 그러나, <프란체스카의 난중일기>는 임진왜란을 당한 당시의 조선왕조와 6.25 전쟁 발발 당시의 대한민국 사이에는 실로 엄청난 차이가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것은 임진왜란 때의 조선왕조가 ‘혼군(昏君)’의 극치(極致)였던 임금 선조(宣祖)의 치세(治世)였던 반면 6.25 전쟁 기간 중의 대한민국은 이승만이라는 위대한 민족적 지도자가 이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임진왜란에서 조선왕조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성웅(聖雄) 이순신(李舜臣)이 있었기 때문이었지만 6.25 전쟁에서 대한민국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이승만이 있었기 때문이었음을 <프란체스카의 난중일기>가 웅변(雄辯)해 주고 있다. 프란체스카는 이 책에서 이승만이 6.25 개전(開戰) 초기 서울을 떠나는 과정도 감동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필자는 대한민국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모든 분들, 그리고 특히 청소년들이 반드시 이 책을 읽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필자는 시중 서점에서 이 책은 이미 매진(賣盡)(?)되어 절품(切品)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고민 끝에 필자는 이 책 가운데서 필자의 생각으로 뜻 있는 분들이 꼭 읽어 보았으면 좋겠다는 부분을 발췌하여 <조갑제 닷컴>에 수록(收錄)하려 한다. 우선 여기에 1회분을 싣는다. 아무래도 몇 회에 걸쳐 나누어서 수록할 수밖에 없을 듯하다. 읽는 분들의 편달이 있기를 소망(所望)한다. 마침 우리는 이제 10여일 후에 6.25 전쟁 발발 64주년을 맞이한다. 특히 이 1회분을 읽음으로써 6.25 개전 직후 이승만 대통령이 서울을 떠나는 과정에 관한 사문난적(斯文亂賊)들의 역사왜곡에 현혹(眩惑)된 부분이 있었다면 이를 시정(是正)해 주는 기회로 삼기를 간절히 바란다. 2014.6.12. 李東馥 謹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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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6월25일>
북한 공산군이 새벽 5시에 쳐들어 왔다. 나는 이날 오전 9시 어금니 치료를 받으러 치과로 갔고 대통령은 아침식사를 끝내자 9시30분쯤 경회루(慶會樓)로 낚시하러 갔다. 10시쯤 신성모(申性模) 국방장관(국무총리서리 겸임)이 허겁지겁 경무대로 들어와서 “각하께 보고드릴 긴급 상황이 있습니다”라고 했다. 두 분이 집무실에서 마주 앉은 것이 10시30분, 이 자리에서 신 장관은 개성이 오전 9시, 그러니까 내가 치과로 떠나던 그 시간에 이미 함락되었고 탱크를 앞세운 공산군은 춘천 근교에 도착했다고 보고했다.
대통령은 “탱크를 막을 길이 없을 터인데....”라며 입속말을 했고 그 순간 얼굴에는 어떤 위험을 느끼는 듯 불안의 빛이 스치고 있었다. 시내에는 “우리 아이들” - 대통령과 나는 늘 군인들을 “우리 아이들(Our Boys)”라고 불렀다 – 을 태운 트럭이 북쪽을 향해 달리고 있었고 시민들은 영문도 모르는 채 “이제 38선이 깨진 모양이니 이북 땅을 되찾겠지....” 하면서 이들에게 격려의 박수를 치고 있었다.
경무대(景武臺) 안의 분위기도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는 것 같았다. “그 자식들 장난치다 그만 두겠지...” 라는 식으로들 생각하고 있었다. 신 국방까지도 대통령에게 “크게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라는 말을 되풀이 했다. 그러나, 경찰 정보는 “상황이 심각하고 위급하다”는 것이었다. 대통령은 고재봉 비서관을 불러서 정보 보고를 확인했다. 고 비서관의 보고 역시 “적군의 힘이 예상 밖으로 강력해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대통령은 잠을 잊은 채 자정을 넘겼다. 침통한 그 모습에 나는 그때까지도 한 마디도 말을 건넬 수가 없었다.
<6월26일 새벽 3시>
대통령이 도쿄(東京)의 맥아더 사령부에 전화를 걸었다. 전속부관이 전화를 받았다. 그는 장군을 깨울 수 없으니 나중에 걸겠다고 대답했다. 대통령은 벌컥 화를 내며 “한국에 있는 미국 시민이 한 사람씩 죽어 갈 터이니 장군을 잘 재우시오”라고 고함쳤다. 나는 너무 놀라서 수화기를 가로 막았다.
대통령은 “마미, 우리 국민이 맨손으로 죽어 가는데 사령관을 안 깨우다니 말이나 되는 소리요!”라며 몸을 떨었다. 상대편도 미국 국민이 한 사람씩 죽을 것이라는 말에 정신이 들었는지 “각하, 잠깐 기다려 주십시오” 하더니 맥아더 사령관을 깨우겠다고 했다.
맥아더 사령관이 전화를 바꾸자 대통령은 “오늘 이 사태가 벌어진 것은 누구의 책임이요? 당신네 나라에서 좀 더 관심과 성의를 가졌었다면 이런 사태까지는 이르지 않았을 것이오. 우리가 여러 차례 경고하지 않았습니까? 어서 한국을 구하시오”라며 무섭게 항의했다.
사령관은 바로 도쿄 극동사령부의 무기 담당 히키(Doyle Hicky) 장군에게 명해 무스탕 전투기 10대, 105mm 곡사포 36문, 166mm 곡사포 36문, 그리고 바주카포를 긴급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대통령은 조종사 10명을 보내 단기 훈련을 받고 나서 무스탕을 몰고 오게 하겠다면 전화를 끊었다. 맥아더 사령관과의 통화가 끝나자 워싱턴의 장면(張勉) 대사를 불렀다.
“장 대사, 트루먼 대통령을 즉시 만나서 이렇게 전하시오. 적은 우리 문전에 와 있다고, 미 의회가 승인하고 트루먼 대통령이 결재한 1천만 달러 무기 지원은 어떻게 된 것이오?” 대통령의 목소리는 흥분으로 계속 떨고 있었다.
군부 지도자들은 2, 3일 안에 원조가 오면 서울을 지킬 수 있다고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젠장, 비행기가 없으니 탱크를 막을 수가 있나!” 대통령은 안절부절 못히거 뒷짐을 진 채 방안을 맴돌았다. 오후가 되자 대통령은 직접 육군본부와 치안국 상황실로 나갔다. 의정부에서 2개 방면으로 방어선을 전개했으나 탱크를 저지하지 못해 계속 뚫리고 있다는 보고였다. 내가 알기로는 그때까지 미국은 한국과 같은 지형에서는 탱크를 쓸 수 없다고 판단, 탱크는 물론 대전차무기조차 공급하지 않았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었다. 대통령이 전황보고를 받고 경무대로 돌아 올 때 서울 상공에는 적의 야크기가 맴돌고 있었다. 나로서는 처음 보는 적기였다. 적기가 뜰 때마다 대통령이나 나나 방공호로 들어가야 했고 서울 시민의 얼굴엔 공포의 그림자가 뒤덮이기 시작했다.
숨 막힐 듯한 긴장과 긴박감 속에 하루가 지났다. 대통령이나 나나 자정을 넘겨서 막 잠자리에서 눈을 붙였을 때 비서의 다급한 노크 소리가 들려 왔다. 머리 맡의 시계는 27일 새벽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신성모(申星模) 국방장관이었다. 불길한 예감이 뇌를 스쳤다. 이어서 서울시장 이기붕(李起鵬) 씨와 조병옥(趙炳玉) 씨가 들어 왔다.
“각하, 서울을 떠나셔야 하겠습니다.” 신 장관이 간곡하게 남하(南下)를 건의했다. “안 돼! 서울을 사수(死守)해야 해! 나는 떠날 수 없어!” 대통령은 그 이상 아무 말도 없이 문을 쾅 닫으면서 방으로 들어갔다. 신 장관은 침통한 표정으로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나는 대통령을 뒤따라 들어가서 침착하게 그리고 간절하게 부탁했다. “지금 같은 형편에는 국가원수에게 불행한 일이 생기면 더 큰 혼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염려들 합니다. 그렇게 되면 대한민국의 존속이 어렵게 된답니다. 일단 수원까지 내려갔다가 곧 올라오는 게 좋겠습니다.”
내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대통령은 “뭐야! 누가 마미한테 그런 소릴 하던가? 캡틴 신이야, 아니면 치프 조야? 아니면 장인가 또는 만송(晩松•이기붕의 호)인가? 나는 안 떠나!”하고 고함을 질렀다. 대통령은 나에게는 신 장관을 캡틴 신(그는 한 때 선장을 했다), 조병옥 박사나 장택상(張擇相) 씨는 경찰국장을 지냈다고 해서 치프(chief) 조 또는 장이라고 불렀었다. 나는 다시 “모두가 같은 의견입니다. 저는 대통령의 뜻을 따르겠습니다”라고 했다.
이때 경찰간부(이름은 기억이 없다) 한 사람이 들어 와서 적의 탱크가 청량리가지 들이닥쳤다는 메모를 전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당시 적의 탱크는 그보다 훨씬 먼 곳에 있었고 그 메모는 대통령의 남하를 독촉하려는 꾀였었다. 나는 “수원을 서울에서 별로 멀지 않아요”라고 넌지시 거들었다. 신 장관이 때를 놓지지 않고 “각하가 수원까지만 내려가 주시면 작전하기가 훨씬 쉽겠습니다”라면서 머리를 숙였다.
<6월27일 새벽 3시30분>
남행 열차를 타기로 결정되었다. 비서관이 간단히 짐을 챙겼다. 금고를 탈탈 털어도 5만원 밖에 없었다. 이 돈을 황규면 비서관에게 맡기고 경호관 김장흥 총경과 경찰관 4명이 우리 일행이 되었다. 서울역에서 기차를 탔다. 차창이 깨지고 좌석의 스프링이 튀어나온 3등 객차였다. 대구에 도착한 것은 오전 11시40분이었다. 기차가 머물자 대통령은 여기가 어디냐고 물었다. 대구라는 대답에 대통령의 모습은 너무도 침통했다. 대통령은 나를 찬찬히 쳐다보면서 “내 평생에 처음으로 판단을 잘못했다. 여기까지 오는 것이 아니었는데....”
나는 바로 곁에서 20년 가까이 남편을 모셨지만 이때처럼 회오와 감상에 젖은 음성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대통령은 이내 비서들에게 서울로 올라갈 것을 명했다. 나는 너무나 큰 죄를 진 기분이었다. 앞을 예견할 수 없는 상황에서 국가원수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결국 우리나라가 불행해 진다는 생각에서 남하를 은근히 권했던 것이지 목숨이 아까워서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대통령이 후회하는 표정을 짓거나 나를 원망하는 듯한 말씀을 할 때는 너무나도 내 마음을 몰라주는 것 같아서 아내로서의 외로움과 설움이 왈칵 몰려 왔다.
대구에 머무른지 1시간도 안 된 12시30분 기관차의 머리를 서울로 되돌렸다. 간밥을 뜬 눈으로 새운데다가 식사조차 제대로들 못한 형편이었다. 나는 보리차를 대통령에게 권했으나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입을 꽉 다물고 차창 밖만 응시하고 있었다.
“수원까지만 가면 서울에는 자동차로 갈 수 있겠지....” 대통령의 머릿속에는 서울 생각뿐인 것 같았다. 나는 한층 무안해 질 수밖에 없었다. 철로변에는 모가 파랗게 심어져 있었고 밀짚 모자를 쓴 농부들이 열심히 논을 다듬고 있었다. 그 순간은 전쟁의 공포를 느낄 수 없었다. 기차가 대정에 도착했다. 플랫폼에는 윤치영(尹致映) 씨와 허정(許政) 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각하, 여기서 내리십시오. 서울은 이미 빨갱이들 수중에 드러갔습니다”라며 더 이상의 북상(北上)을 만류했다. 그런데도 대통령은 계속 서울행을 고집했다. 옆에 있던 이영진 충남지사가 대통령을 부추기는 말을 했다. “한 발짝이라도 서울 가까이 계셔야만 민심 동요가 적어집니다. 제가 모시고 올라가겠습니다”라는 것이었다.
대통령도 따라서 “자네 말이 옳아. 나는 서울로 가겠네”라면 응수했다. 나는 기차에서 내리려 했다. 대통령은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영어로 말했다. “목숨은 누구에게나 소중한 거야! (Life is dear to them too!)” 대통령은 열차에서 내려서 잠깐의 휴식을 위하여 대전철도국 2층 역장실로 올라갔다. 계단을 오르다가 갑자기 생각난 듯 황 비서를 불러서 기관사에게 수고비를 주라고 했다. 황 비서는 나에게 2만원을 기관사에게 떼어 주었다고 보고했다.
잠시 뒤 미국 대사관의 드럼라이트 참사관이 달려와서 유엔이 대북(對北) 군사제재를 결의했고 트루먼 대통령이 해•공군 출동 및 대한(對韓) 긴급 무기원조 명령을 내렸다고 전했다. 암담하던 분위기는 이 소식으로 활기를 되찾았고 임시정부를 대전으로 옮기기로 했다. 대통령은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즈음 충남 지사 관저를 숙고로 정했다.
<6월28일 아침>
임시 각료회의가 도지사실에서 열렸다. 그때 각료들과 국회의원들은 대전 근교 유성온천에 머물고 있었다. 이날 회의에서 전규홍(全奎弘) 총무처장이 국방장관을 경질하고 후임에 이범석(李範奭) 장군을 임명하자고 제의했다.
<3월29일 오전 8시30분>
무쵸 대사가 도착했다. 그는 맥아더 사령관이 한강 방어선 시찰을 위하여 도쿄에서 날아온다는 메시지로 가지고 왔다. 대통령은 한 시간 뒤에 비행장으로 나가겠다고 했다. 오랜만에 대통령의 얼굴에서 웃음을 볼 수 있었다.
한국군과 미군 임시 사령부가 위치한 수원농대에서 대통령은 감격적으로 장군을 얼싸 안았다. 그런 다음 대통령 대뜸 “장군, 장군의 구두가 지금 한참 자라고 있는 모를 밟고 있소”라고 나무랐다. 맥아더 장군은 “각하,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깎듯이 사과를 했다고 한다. 뒤에 대통령은 나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며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수원으로 비행하던 중 대통령이 탄 비행기는 야크기 2대의 추적을 받았다. 조종사는 거의 땅 바닥에 닿을 듯 저공비행을 하고 계곡을 타면서 적기의 공격을 회피했다고 했다. 나는 대통령이 돌아 올 때까지 7시간을 비행장에서 초조하게 기다렸다. 밤 8시30분 대통령이 무쵸 대사와 함께 도착했을 때 나는 반가워서 왈칵 눈물이 솟았다.
대통령의 도착 연락을 받고 장택상, 신익희(申翼熙) 씨가 밤 9시쯤 찾아왔다. 두 사람은 현상 타개를 위해서는 국방장관을 바꿔야 한다면서 역시 이범석 장군을 후임으로 추천했다. 대통령께서도 “철기(鐵驥•이범석의 호)는 게릴라전의 명수니까 전황타개에 묘책일 수 있겠다”면서 국방장관 경질의 뜻을 비쳤다. 무쵸 대사가 끼어들었다. 그는 “지금은 각료를 바꿀 때가 아니며 특히 국방장관을 바꾸면 큰 혼란이 일어날 수 있다”면서 극구 반대했다. 내가 알기로는 무쵸 대사는 이범석 장군을 무척 싫어했다. 그의 생각은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들은 고집이 세고 특히 미국의 말을 잘 듣지 않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었다. 무쵸 대사는 그런 쪽 사람들보다는 일제하에서 적당히 지냈던 사람들을 더 가까이 하는 편이었다.
개인적으로도 무쵸 대사와 이 장군은 무척 나쁜 관계였다. 다른 사람을 통해 들은 바에 의하면, 한 번은 무쵸 대사가 토론 도중 독립운동 경력이 있는 정치인들에 대해 편견을 드러냈다가 이 장군에게 매를 맞은 일도 있었다고 했다. 그날 밤 대통령은 나에게 들으라는 듯 “우리는 지금 철기 같은 파이터가 필요한데 ‘무쵸 펠로우(Muccio Fellow)’가 밤낮 저 모양”이라고 못마땅해 했다. 대통령은 사석에서는 무쵸를 ‘대사’라고 호칭하지 않고 영어로 ‘Fellow“(녀석)’라고 불렀다.
<6월30일>
대통령은 신 국방장관이 겸임하고 있는 국무총리 자리를 놓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마미, 고당(古堂) 같은 사람이 있으면 이 난국 해결에 도움이 큰 도움이 될 터인데...” 대통령은 항상 조만식(曺晩植) 씨를 생각하고 있었다. 전에도 여러 차례 사람을 평양에 보내서 조만식 씨에게 서울로 와서 함께 일할 것을 제의했었다. 그때마다 조만식 씨는 “압제 아래서 고통 받는 북한동포들을 두고 갈 수 없다”면서 사양했고 대통령은 그때마다 안타까워했었다.
대전으로 남하한 뒤 대통령은 침실 머리맡에 모젤 권총 한 자루를 놓고 자는 습관이 생겼다. 나는 차디찬, 그리고 싸늘한 총구가 기분 나빴다. 나의 이런 표정을 읽은 대통령은 “최후의 순간 공산당 서너 놈을 쏜 뒤에 우리 둘을 하나님 곁으로 데려다 줄 티켓”이라면서 내 손을 꼭 잡곤 했다. 그 뒤부터 나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 “우리 두 사람 티켓을 잘 간수하셨어요?” 하면 대통령은 “잘 있지”라면서 크게 웃곤 했다.
<7월1일 오전 3시>
아직 어둠은 걷히지 않았다. 황규면 비서가 대통령을 깨웠다. 공산군 탱크가 이미 수원을 지나서 빠른 속도로 남진하고 있다는 보고였다. 보고를 받고 난지 20분쯤 뒤, 미 대사관 1등서기관 헤럴드 노블이 관저로 달려 와서 대전 이남으로 옮겨야 한다고 대통령을 설득했다. 신 국방장관과 정일권(丁一權) 장군도 이내 도착했다. 하나 같이 침통한 표정이었다.
대통령은 “차라리 대전에서 죽는 게 낫지 더 이상 남쪽으로 내려가 경멸을 당하지 않겠다”면서 대전 사수를 고집했다. 침실로 들어가서 문을 걸어 잠근 대통령은 책상 위에 두 손을 올려놓고 기도하는 자세였다. 그의 얼굴은 불행한 국민들에 대한 연민(憐憫)의 정과 잇단 패전에 대한 분노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당장 상황을 뒤바꿀 어떠한 대책이 있을 수도 없었다.
대통령은 노트를 꺼내서 내게 건네주면서 메모를 부탁했다. 나는 조용히 그가 부르는 대로 받아 적었다. “죽음이 결코 두려운 것은 아니다. 다만 어떻게 죽느냐가 문제다. 나는 자유와 민주 제단에 생명을 바치려니와 나의 존경하는 민주 국민들은 끝까지 싸워서 남북통일을 이룩해야 할 것이다. 다만 후사(後嗣) 없이 죽게 되어 불효자(不孝子)일 뿐이다.” 나는 이 글이 최후에 대비한 유서(遺書)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후사 없는 불효자”라는 대목은 곧바로 비수(匕首)가 되어서 내 가슴을 갈기갈기 찢었다.
밖에서는 후드득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대통령을 다시 만난 노블이 “정부의 계속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대전 사수보다 남쪽으로 옮겨서 앞으로의 대책을 세우는 것이 시급하다”고 애원에 가까운 설득을 했다. 신 장관도 거의 울음 섞인 목소리로 남하를 건의했다. 빗줄기는 어느 틈에 장마 비로 바뀌어서 억수처럼 내리붓고 있었다. 우리는 이 빗속을 뚫고 또다시 목포를 향하여 떠났다. 대통령과 나, 김장흥 총경이 한 차에 탔고 황 비서, 이철원 공보처장, 김옥자(나의 개인비서) 씨가 다른 지프에, 그리고 경호경찰 4명이 맨 뒤에 따랐다.
길이 워낙 험해서 차도 사람도 몸살을 앓을 지경이었다. 우리는 8시에 이리(裡里)에 도착하고서야 우리를 뒤따르던 경호관들의 지프가 고장 나서 1시간쯤 쳐진 것을 알았다. 자동차로 목포까지 가는 것은 무리인 것 같았다. 이리 역장에게 기차 편을 요구했다. 역장은 모든 기관차와 객차는 징발(徵發)되었고 교통장관의 명령이 없이는 어느 누구에게도 기차를 내놓을 수 없다고 뻣뻣하게 대답했다. 황 비서가 철도전화로 대전을 불렀다. 잠시 후 김석관 교통장관이 나와서 곧 열차를 준비하겠다고 했다. 기차가 준비되는 동안 우리 일행은 역 구내에서 요기(療飢)를 했다. 황 비서가 주변 매점을 찾아다니면서 건빵을 한 아름 사 왔다. 나는 한 개도 먹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도 입에 당기지 않는 듯 억지로 한두 개를 우물우물 씹었다. 그러나, 대통령은 “허, 거 참, 별미(別味)네, 맛이 있는데” 하며 한 봉지를 눈 깜작할 사이에 비웠다. 그리고는 나를 향해 “마미, 당신도 먹어봐요. 아주 맛이 있거든....” 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오수 1시40분 목포역 구내로 접어들었다. 김장흥 총경은 기차를 역구내에서 500m쯤 떨어진 곳에 세우게 한 뒤 혼자서 목포경비사령부를 찾아갔다. 대통령의 바바리코트는 때에 절었고 파나마모자 테도 새까맣게 더럽혀져 있었다. 모든 이들의 행색이 말이 아니었다. 누가 보아도 대통령 일행으로 알아 볼 사람은 없었다. 김 총경이 혼자서 경비사령부로 간 것은 이런 행색으로 사령부에 나타났다가 경비군인들로부터 대통령이 봉변이라도 당하지 않을까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김 총경이 대통령을 비밀리 부산으로 모실 테니 배를 내달라고 하자 역시 사령관 정경모 대령은 의심하는 눈치였다. 사전에 아무런 연락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직접 대통령을 만나 뵈어야 하겠다고 버텼다. 김 총경은 전 사령관과 지프를 타고 대통령이 있는 곳으로 달려 왔다. 정 사령관은 모자를 깊숙하게 눌러쓰고 색안경을 쓴 대통령을 알아보자 그 앞에서 부동자세로 신고를 했다. 그 목소리가 약간 떨리는 듯 했다. 대통령이 정 사령관을 가까이 불러 “내가 부산으로 조용히 가고 싶네. 자네가 좀 수고를 해 주어야 하겠어”라고 하자 정 사령관은 “점심은 드셨습니까?” 하고 물었다.
“이판에 점심은 무슨 점심인가” 하는 대통령의 대답에 그가 차를 몰고 나가서 역전 다방에서 홍차와 토마토 등 간단한 먹을거리를 사들고 왔다. 우리는 4시에 부산을 향해 목포를 출발했다. 뱃길은 풍랑이 심했다. 나는 토마토 몇 쪽 먹은 것까지 모두 토했고 다른 사람들ㄷ호 뱃멀미로 여기저기 쓰러졌다. 오직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꿋꿋이 버티는 건 대통령뿐 한 분뿐이었다. 나는 70 노인이 저럴 수 있나 하고 놀랐다.
“아랫배에 힘을 주고 어머니의 인자한 모습을 그려 보게나. 울렁거리는 속이 가라앉을 걸세.” 대통령은 눈 한 번 붙이지 않고 오히려 수행원들을 격려했다. 함정에서는 군인 식사와 똑 같이 했다. 꽁보리밥에 짠지, 된장덩이가 전부였다. 모두가 음식 냄새조차 맡기 싫어했다. 대통령은 밥알 하나 남기지 않고 한 그릇을 맛있게 비웠다.
<7월2일 오전 11시30분>
배가 부산부두에 닻을 내렸다. 1주일을 머무는 동안 전선은 자꾸만 뒤로 밀린다는 암담한 전황만 들어오고 있었다. 미군에 대한 우리 국민들의 신뢰도 점점 떨어져 갔다. 미군은 적의 탱크를 맞아 무슨 폭탄을 써야 하는지도 몰랐다. 공산군의 탱크는 미군의 공격을 받고도 끄떡 않고 밀려오는 것이었다. 때문에 미군들의 공산군 탱크에 대한 공포심만 자꾸 눈처럼 불어났다. “정신 상태야, 정신 상태! 멍청한 것들! 우리 아이나 경찰에게 그들이 가진 무기와 장비를 주어 봐, 이처럼 후퇴하기에 바쁘진 않을 거야.” 대통령은 ‘멍청한 양코장이들’이라는 말을 몇 번이고 되뇌며 책상을 주먹으로 쳤다.
대통령이 부산에 머문 지 닷새째인 7월7일, 유엔안보이사회는 미국 통솔 아래 유엔군총사령부를 설치하기로 결의하고 초대 유엔군총사령관에 맥아더 장군을 임명했다. 이보다 앞서 7월4일 부산과 대구-대전을 연결하는 통신망이 되살아나고 도쿄의 미 극동군사령부와 직통전화가 연결되었다. 대통령은 경무대 직원들에게 24시간 전화기 앞에서의 근무를 명했다.
<7월4일 아침 8시>
아침 식사를 하려고 식당에 내려갔을 때 미국 대사관 1등서기관 닥터 노블이 와 있었다. 그가 미군들은 준비가 되면 3-4일 뒤에 공격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지난 밤 평양을 폭격했다는 소식도 전해 주었다. 그러나, 이날 오후 4시에는 채병덕(蔡秉德) 장군이 오스트레일리아 비행기들이 금강을 한강으로 오인, 수원과 평택을 폭격하는 바람에 우리 국군과 미군들이 다수 살상되었다는 어처구니없는 보고를 해 왔다. ‘우리 아이들’ 2백명과 미군 한 명이 죽었다는 것이다.
<7월6일>
7월6일 3명의 은행가(프란체스카 여사는 이름을 밝히지 않고 ‘Banker’라고만 기록해 놓았다)가 찾아 왔다. 그들은 대통령에게 통화개혁을 건의했다. 그들은 공산군이 서울을 점령한 뒤 우리 화폐를 몽땅 꺼내 쓰기 때문에 인플레를 빚고 위조지폐까지 나도니 신권 발행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대통령은 이런 사실을 주무장관이나 정보기관을 통해서가 아니라 은행가들로부터 듣게 된 것이 몹시 언짢은 듯 했다. 나는 사람을 시켜서 시내 쌀값을 알아보도록 했다. 소두(小斗) 한 말에 2,400원이었다. 서울을 떠날 때 1,500원 하던 것이 열흘 사이에 60%나 뛰어 오른 셈이다.
대통령은 아무래도 부산이 임시수도 대전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귀가 어둡다고 말했다. “황 비서, 나 대구로 가겠네. 기차를 준비하게. 그리고 조재천(曺在千) 지사에겐 방을 하나 빌리라고 전하게.”
<7월9일>
부산 체류 7일만에 우리 일행은 대구를 향해 떠났다. 대통령을 태운 열차는 방근 전선에서 돌아온 듯 차창에는 총알구멍이 뚫려 있었고 차체는 파편자국으로 얼룩져 있었다. 조재천 지사 관저에 자리 잡자 무쵸 대사가 찾아 와서 딘(William F. Dean) 장군으로부터의 연락이라며 미군이 대전까지 후퇴했다고 전했다.
대통령은 무쵸 대사를 향하여 “세계 각국이 한국인은 싸움도 않고 후퇴하는 국민인 줄 알겠소. 미군들은 어째 후퇴만 하는 거요? 차라리 우리들에게 무기를 주시오”라면서 버럭 화를 냈다. 그리고는 미군들이 철도국에 사전통고도 없이 자기들 철수만 끝나면 철도를 폭파, 숱한 철도원과 그 가족들의 발을 묶었다고 신랄하게 비난했다. 무쵸 대사는 작전상 불가피한 조치였다고 어깨를 들썩이면서 설명을 했다. “그놈의 작전상, 작전상, 당신들은 그것 밖에 할 말이 없소?” 대통령은 “미군들이 게릴라전을 몰라서 겁을 내고 있다”면서 “이를 간파한 적군이 낮엔 숨어서 잠을 자고 밤이면 습격을 한다”고 지적했다. 대통령의 말 속에는 “어서 빨리 우리 아이들에게 무기를 달라”는 뜻이 들어 있었다.
<7월11일>
7월11일 자유중국의 소육린 대사가 2만-2만5천명의 자국군을 파견할 용의가 있다고 참전 의사를 밝혔으나 대통령은 이를 정중히 거절했다. 내가 “한 사람의 장병이 아쉬운 판국인데 반공국가인 자유중국의 참전 제의를 어째서 거절했느냐”고 물었다. 대통령은 퉁명스럽게 “중공군을 내 손으로 불러들일 수는 없잖아”하고 한 마디 던지더니 이내 입을 다물었다.
<7월14일>
유석(維石) 조병옥 발사가 내무장관에 임명되었다. 내무장관 경질은 13일 무쵸 대사가 백성욱(白性郁) 장관을 바꿔 달라고 제의하여 이루어졌다. 미국측은 백 장관이 독일에서 교육을 받아서 영어를 잘 모르고 해서 협력하기가 힘들다는 이유를 내세웠다. 대통령은 미국이 남의 나라 장관을 마음에 맞지 않는다고 멋대로 바꾸라고 한다면서 불쾌해 했다. 그렇다고 대통령이 조 박사를 싫어 한 것은 아니었다. 미국의 간섭이 싫었던 것이다.
대통령과 나 사이에는 사람을 보는 방법도, 호감도, 그 사람에 대한 인상을 보는 느낌에도 차이가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제네랄 처치(처치 준장)의 경우였다. 나는 처치 장군이 예의 바르고 친절하며 우리 한국민을 깊이 이해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대통령은 그가 지독한 인종주의자로, 겉으로는 우호적인 체 하면서도 내면적으로는 황색 인종을 경멸하는 사람이라고 평했다. 개인적으로는 우월감에 차 있는 미국의 고급 장성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공식 석상이나 여러 사람들이 있는 장소에서는 ‘제네랄 처치’라고 불렀지만, 우리 둘이 있을 때는 언제나 ‘처치 보이’로 통했다.
14일에는 ‘현 전선 고수’라든가 ‘아군 선전(善戰)’ 등의 판에 박은 듯한 전황보고조차 들어오지 않았다. 미 대사관에서는 어서 빨리 부산으로 내려가는 것이 좋겠다는 연락만 왔다. 그때마다 대통령은 “내가 이 이상 더 내려가지 않아야 국민의 동요가 적다”면서 대구에 머물 것을 고집했다. 미국 대사관에 대한 공식 답변은 그러 했지만 실제로는 미군의 전의(戰意)에 대한 의구심 때문이었다. “마미, 내가 부산으로 가지 않는 것은 뒤로 물러서기만 하는 미군들을 믿을 수가 없어서 그래. 지금 내가 여기 이렇게 버티고 있으니까 그나마 싸우지 부산으로 갔다 하면 언제 대구를 내놓을지 모를 사람들이거든.”
대통령은 낙동강이 우리 최후의 방어선이자 생명선이라고 했다. 대통령은 지사 관저 식당에 앉아 모기에 시달리며 이날 밤을 꼬박 새웠다. 다음날 새벽 동이 트자마자 대통령이 대전으로 올라가 전황을 봐야 하겠다고 했다. 우리 모두가 깜짝 놀랐다. 워커 장군과 무쵸 대사도 극구 만류했다. 워커 장군은 앞으로 10일 이내에 전황이 달라질 터이니 그때까지만 참으시라면서 “제발 대전으로 오시지 말아 달라”고 했다. 장군의 “제발”이라는 단어에서 나는 대전을 포기할 시간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7월16일 아침>
국방장관은 동해안에 적군 300명이 상륙했다고 보고했다. 연합군 해군은 해안선을 철통 같이 지키고 있다고 했었는데 이 또한 허풍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서해안을 지키던 우리 군은 소형 보트로 상륙하는 적군을 격퇴시켰다. 포항 비행장은 미군들이 사용하기 위하여 수리 중이다. 국방장관이 미군은 금강을 사이에 두고 적과 격전 중이나 자꾸 후퇴할 기미이고 한국군사령부는 현 전선에서 더 이상 물러나지 않도록 싸우겠노라면서 버티는 중이라고 말했다.
딘 소장은 “대전을 방어하라”는 맥아더 장군의 명령을 받고 휘하 장병들에게 “후퇴하는 자는 즉결처분하라”는 엄명을 내렸다. 동이 트자 금강 전선의 미군 병력 가운데 3백여명이 뺑소니 친 것을 알게 되었다. 열흘 동안에 전황을 바꾸어놓겠다고 큰 소리 치던 워커 장군의 얼굴이 떠올랐다.
경무대를 지키다가 7월8일 간신히 서울을 탈출한 경찰관이 서울의 비참한 소식을 알려 왔다. 쌀값은 10배로 폭등했고 그나마 구할 수도 없다는 것이었다. 화교들은 장제스(蔣介石) 총통의 사진을 떼어버리고 공산군들을 맞이했다고 한다. 공산군은 온갖 약탈을 자행, 쌀이며 손목시계, 만년필 등 닥치는 대로 빼앗아 북쪽으로 보내고 있다는 것이다. 감옥에 갇혔던 빨갱이들이 서울시의 책임자가 되고 거리의 공산군은 10대가 대부분이며 13살짜리도 끼어있다고 했다. 모두가 처절하고 끔찍한 소식뿐이었다.
<7월17일>
장마철인데도 날씨는 계속 쾌청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돕고 계신다. 탱크를 막아낼 무기가 없는 우리 군을 불쌍히 여겨서 미군기들이 출격하여 탱크를 부술 수 있도록 맑은 날씨를 주시는 것이다. 대통령은 경북 지사실에서 제헌절 기념행사를 가졌다. 오후 2시에는 각도 지사와 경찰간부 회의가 대통령 주재로 열렸으나 서울에서 피납된 구자옥(具滋玉) 경기도 지사 자리만이 비어서 눈길을 끌었다.
내 일기는 7월20일로 사흘을 뛰어 넘는다. 이 사흘 동안 나는 거의 혼수상태에 빠져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설사가 너무 심해서 손 끝 하나 까딱 할 수 없었고 40도 가까운 고열에 헛소리를 할 지경이었다. 더위를 먹은 데다가 물갈이가 설사의 원인이었다. 물은 언제나 나를 괴롭혔다. 전에 대통령을 따라 지방 시찰을 갔을 때도 물이 맞지 않아 배탈이 나곤 했다.
대구의 더위는 지독했다. 대통령은 지사 관저 뒷마당의 펌프를 틀어 몇 바가지 쏟아버리고는 새 물을 받아서 시원스럽게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지하수는 이가 시리도록 찼지만 나는 배탈 걱정에 항상 끓인 뒤 식혀서 마셨다. 그런데도 탈이 난 것이다. 신경성 위염까지 도졌다. 솔직히 말해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다. 아무리 어려운 때라도 나는 옆에서 신경을 써 주는 사람이 있고, 세끼 밥은 거르지 않는다. 집과 가족을 잃고 먹을 것이 없어서 길거리에 나앉은 국민들은 얼마나 고생을 할까? 그 생각을 하면 나의 고통은 아무 것도 아니다.
전투는 계속되어도 어두운 소식뿐인 것 같다. 고열에 들떠서 멍멍한 속에서도 대통령의 기도는 매일 밤 내 귓전에 울렸다. “오 하나님, 우리 아이들을 적의 무자비한 포탄 속에서 보호해 주시고 죽음의 고통을 덜어 주시옵소서. 총도 없는 아이들이 오직 나라를 지키겠다는 신념만으로 싸우고 있나이다. 당신의 아들들은 장하지만 희생이 너무 크옵니다. 하나님, 나는 지금 당신의 기적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대통령의 기도는 절규(絶叫)였다.
조재천 지사 부인이 콩나물에다 파를 넣고 끓여서 소금으로 간을 맞춘 맑은 국물을 가져 왔다. 몇 모금 마시니 속이 부드러워지는 것 같았다. 나는 이 국물을 아꼈다가 대통령에게 권했다. 대통령은 “마미, 당신이나 두고 마실 일이지...” 하더니 단 숨에 한 대접을 몽땅 비우는 것이었다. 눈물이 솟구치는 것을 꾹 참았다.
임병직(林炳稷) 외무장관이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 해서 들어 왔다. 미군 GI가 장관 지프를 훔쳐서 달아났다는 것이었다. 임 장관이 미군 사령부에 이 사실을 항의했더니 그쪽에서는 “우리가 당신네 나라에 수많은 지프를 주었는데 그까짓 한 대쯤 없어진 것이 뭐 그리 대단해서 항의하느냐”고 대답하더라면서 흥분을 참지 못하고 있었다. 대통령이 무쵸 대사를 불러서 이렇게 나무랐다. “당신네 나라는 그런 일을 용납하는지 몰라도 한국정부에서는 안 됩니다. 미군 병사들이 한국을 도우러 왔다고 해서 도둑질을 해도 아무 상관이 없다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 돼요. 우리 땅에서는 한국인이건 미군이건 도둑질 하면 처벌 받아야 합니다.” 무쵸 대사는 금시초문(今時初聞)이라면서 “당장 그 병사를 색출하여 처벌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상한 일이지만, 아무리 모든 것이 참담하고 또 헐벗고 굶주려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도둑질 한다는 사건보고는 한 건도 없었다.
우리는 최근 서울에서 탈출해 온 사람으로부터 또 소식을 들었다. 그는 중앙청에서 소련 장교 3명이 걸어 나오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서울 쌀값은 소두 한 말에 2만7천원이라고 한다. 대구보다 120배가 비싸다. 대통령은 적이 포진하고 있는 지역에 “동족의 가슴에 총을 겨누지 말고 국군에 투항하라”는 내용의 전단을 비행기로 적 지역에 살포할 것을 명령했다. 우리측의 심리전에 당황한 적군은 어린아이들이 전단을 줍는 것까지도 총으로 쏘아서 어느 누구도 선뜻 전단을 주우려 들지 않는다고 한다.
<7월18일>
대통령과 무쵸 대사는 어제에 이어 오늘도 언쟁을 벌였다. 대통령이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내는 서한 내용 가운데 “우리 한국 국민은 공산군을 우리의 본래의 국경선인 압록강과 두만강 이북으로 몰아낼 때까지 싸울 것을 다짐하고 있다”고 되어 있는 대목을 무쵸 대사가 빼자고 하여 두 사람의 목소리가 높아진 것이다.
긴장과 초조가 고무줄처럼 팽팽한 하루하루 가운데 대통령에게 가장 행복한 시간은 꼬마 친구들과 만나는 때였다. 대통령의 꼬마 친구는 조 지사의 두 아들로 7살과 5살 정도였다. 두 녀석은 대통령 임시 집무실과 지사 관저 사이의 담장에 얼굴을 빠끔히 내놓았다고 대통령에게 들켰다. 대통령은 “이 녀석들, 엄마 아빠에게 들켜서 혼나기 전에 냉큼 나한테 건너 오너라” 하고는 집무실에 숨겨주고 함께 노는 것이었다. 대통령은 또 지난 신문과 달력으로 딱지를 접어서 함께 딱지치기를 하고 종이배를 만들어서 배를 띄우며 놀았다. 대통령은 딱지며 종이배 접는 솜씨를 14살 때 미국에서 디프테리아로 죽은 친아들 태산이한테 배운 것이라고 말했다.
조 지사 부인이 담장 넘어로 이 같은 광경을 보고 깜짝 놀랐지만 대통령은 손가락을 입술에 대고 “쉬!” 하며 아이들을 놀라게 하지 말라는 시늉을 했다. 이후부터 두 녀석은 대통령만 보면 쏜살같이 달려 와서 품에 안기곤 했다. 대통령은 다섯 살짜리를 더 귀여워했다. 하루는 이 녀석이 내 종아리에 간지럼을 태우자 대통령은 “라이벌이 생겼다”면서 농담을 했고, 이 녀석이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면 “마미, 당신의 보이프렌드가 왔어” 하며 환하게 웃었다. 대통령은 아이들을 너무나 사랑했다. 이곳저곳 지사 관저로 옮겨 다닐 때마다 예닐곱 씩이나 되는 그 댁 아이들을 일일이 껴안고 귀여워했다. 그러면서, “지사는 복이 많은 사람이야!”를 연발했다. 그때마다 나는 죄스러운 느낌을 가졌다. 대통령은 이내 내 안색을 살피고는 “대한민국의 청년들이 모두 우리 아들이야. 마미는 수없이 많은 아들들을 두었으니 할 일이 많아”라면서 위로해 주었다.
<7월20일>
배탈은 나을 기미가 없었다. 밤이면 더욱 심해져서 화장실을 들락거리다가 날을 밝힌다. 대통령까지 설사병에 걸려서 밤새도록 두 사람이 번갈아 화장실 출임을 했다.
<7월21일 아침>
오후 4시, 미군이 대전에서 철수한다는 정식 통보를 받았다. 중부전선에서는 적군이 청주에서 정읍까지 내려왔고 동부전선에서도 협공으로 안동을 향해 빠른 속도로 쳐들어오고 있었다. 대통령은 정일권 장군을 통해 이 정부를 확인했다. 정 장군은 금강에서 미군들이 민간인으로 위장한 북괴군 게릴라들로부터 배후 기습을 받아서 수백명이 무기를 버리고 달아났다는 것도 함께 보고했다. 미군들이 버리고 간 그 무기들을 우리 아이들이 주웠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문득 들었다.
워커 장군은 민간인복을 입으면 누가 누구인지를 구별할 길이 없다고 실토하면서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총질을 할 수도 없어서 난처하기 짝이 없다고 말했다. 워커 장군은 처음으로 대통령에게 자기네 병사들이 게릴라전에는 미숙하다고 자백했다. 대전에 침공한 공산군은 차량이 지나갈 만한 곳에는 모두 돌을 쌓아 벽을 쳐서 미군의 퇴로를 차단했다. 대전을 사수하려던 딘 소장이 실종된 데다가 피난민을 가장한 북괴군의 교란작전으로 미군은 사면초가(四面楚歌)였다. 보고를 다 받고난 대통령은 치솟는 분노를 참으려는 듯 빠른 걸음으로 방안을 왔다갔다 하다가 갑자기 차고로 뛰어나갔다. 나는 아픈 배를 움켜쥐고 급히 뒤따라 나가 겨우 차에 올랐다.
대통령은 직접 차를 몰아 무쵸 대사 숙소로 달렸다. 평소에도 대통령의 운전 솜씨는 거칠었다. 나는 겁이 나서 스피드를 좀 줄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워낙 화난 얼굴이어서 오직 두 다리에 힘을 주고 손잡이만 잔뜩 움켜쥐고 있어야 했다. 옛날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할 때 대통령은 워싱턴의 프레스클럽에서 연설할 기회가 있었다. 뉴욕에서 워싱턴까지 가려면 기간이 급했다. 대통령은 헤드라이트를 켠 채 신호를 무시하고 논스톱으로 곡예운전을 했다. 2대의 기동순찰 오토바이가 추격했지만 대통령의 스피드를 따라잡지 못했다. 그때는 어찌나 혼이 났는지 이 양반하고는 당장 결별해야 하겠다는 마음까지 먹었었다. 프레스클럽에는 정시에 도착했다. 대통령은 연설을 시작했고 입구에는 2명의 기동순찰대원이 연설이 끝날 때까지 지켜서 있었다.
연설은 감동적이었다. 수십번의 박수가 터졌다. 감시 경찰관이 대통령의 연설에 감동하여 따라서 박수를 치는 것을 나는 보았다. 연설이 끝나고 대통령이 참석자들과 악수를 나누는 사이에 경찰관이 나에게 닥아와서 속삭였다. “기동경찰 20년에 내가 따라잡지 못한 단 한 명의 교통위반자는 당신 남편뿐이오. 일찍 천당에 가지 않으시려면 부인이 조심을 시키시오.” 그들은 씩 웃고는 V자를 그려 보이며 되돌아 갔다. 나는 대통령에게 운전을 배웠다. 그러나, 내 운전은 아주 고왔다. 그래서 대통령은 비단처럼 부드럽게 운전한다고 해서 나를 ‘실키 드라이버(Silky Driver)’라고 불렀다.
경호원도 없이 손수 운전을 하고 나타난 대통령을 보고 무쵸 대사는 무척 당황해 했다. 대통령은 “미군들이 한국의 지형을 모르는 것이 큰 약점”이라고 지적하고 “우리 군경을 북괴군과 구별조차 못하는 형편이니 미군 부대에 한국군을 배속시켜 함께 싸우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의했다. 그러면서, “아니면, 차라리 당신들의 무기와 장비의 일부만이라도 넘겨 달라”고 요구했다. 무쵸 대사는 “무기가 넉넉하지 못해서 우선적으로 미군에 공급되고 있다”면서 “한•미군 혼성 편제 문제는 검토해 보겠다”고 대답했다.
<7월21일>
이날처럼 불행이 겹친 날이 없다. 오후 4시, 미군이 대전을 포기하고 철수하기 시작했다는 보고가 들어 왔다. 설상가상으로 미 24사단장 딘 소장의 실종이라는 충격적인 보고가 잇달았다. 대전을 유린한 적군은 물밀 듯 남하하는 피난민 대열 속에 민간인으로 변장하고 섞여서 민심을 교란하고 밤이면 게릴라로 돌변하여 곳곳에서 미군들을 괴롭혔다. 한국전에 처음 투입된 미군 병사들은 풋내기 초년병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에게 빨갱이와 이남 사람들을 구분하라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누가 적인지 모르고 덤벙덤벙 총질만 하고 있는 꼴이었다. 차라리 우리에게 무기를 넘겨달라고 애원하고 싶은 심정이다.
<7월22일>
피난 생활도 어느 덧 한 달이 다가온다. 이 곳 대구에서 누구보다 고생하는 사람은 조 지사 부인이다. 대통령 부부를 비롯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부인의 신세를 지고 있다. 대통령 임시 관저에는 항상 70여명의 고정된 식구들이 북적거렸다. 이 모두가 조 지사 부인의 일거리다. 우리 부부, 각료, 국회의원 비서관, 경호경찰, 수시로 드나드는 군 장성, 미 대사관 직원들, 그리고 가족들과 헤어져 이곳에 내려 온 정부 관리들도 모두가 조 지사 관저의 식객들이었다. 부인은 가정부 2명을 데리고 임시 경무대의 살림을 꾸려나갔다. 밥 짓는 일에서 빨래까지 그만한 중노동이 없었다.
대통령은 양복보다 모시 남방을 좋아 했다. 부끄럽게도 나는 모시옷을 다룰 줄 몰랐다. 다듬이질에서 풀 먹이는 일, 다림질을 조 지사 부인이 매일 같이 해 냈다. 결국 조 지사 부인이 과로에 못 이겨서 유산(流産)까지 하게 되었다. 얼굴이며 팔다리가 퉁퉁 부엇는데도 몸조리조차 못하고 일에 매달려야 했다. 대통령은 나에게 계란을 날로 먹자고 했다. 반숙이나 프라이를 하게 되면 그만큼 조 지사 부인의 일이 많아지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 대통령이 계란을 날로 먹으면 밑의 사람들도 그렇게 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지사 부인의 일감이 훨씬 줄어든다는 아이디어였다.
대구에는 사과와 토마토가 흔했다. 우리 부부는 아침 식사로 사과와 토마토에 날계란 2개씩을 먹기 시작했다. 모시 옷에도 풀을 먹이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대통령의 생각을 눈치 채지 못한 채 전과 같은 식생활을 하는 것이었다. 신 국방장관은 어김없이 오전 5시반이면 나타나서 꼭 반숙을 요구했다. 지사 부인은 “대통령 모시기는 쉬운 데 다른 장관님들이 더 힘든다”며 웃을 때도 있었다. 대통령은 매끼의 반찬을 세 가지로 제한했다. 임시 경무대의 살림 형편도 어려웠지만 지사 부인의 일손을 어떻게든지 덜어주겠다는 속셈이 있었다.
피난길에는 너나없이 단벌 신사들이었다. 장관이고 국회의원이고 고위관리고 간에, 양복이나 와이셔츠를 아끼려고 지사 관저에 들어오면 팬츠만 입고 웃옷은 옷거리에 모셔 놓았다. 그러다가 회의가 있거나 외국 손님이 올 때면 옷을 챙겨 입고 나타나곤 했다. 당시 지사 관저에는 헬린 김(金活蘭) 박사나 임영신(任永信) 여사 같은 여류 인사들도 무시로 드나들었지만 각료들의 팬츠 차림이 하나도 부끄럽지 않았다. 간혹 서울에서 비참한 소식이라도 들려 오는 날이면 두고 온 가족 생각에 모두들 팬츠 차림으로 둘러 앉아서 엉엉 우는 게 보통이었다. 그러한 고생 속에서 지사 부인은 단 한 번도 괴로운 표정을 짓는 일이 없었다. 정말 훌륭한 부인이었다. 우리 대통령 부부의 가슴 속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고마운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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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7월22일>
아직도 딘 장군에 관한 소식은 없다. 대통령을 몹시 걱정을 하며 군과 경찰에 그의 생존 여부라도 빨리 확인하라고 지시했다. 미군 사령부는 대전에서 안동으로 이동하는 한국군은 트럭을 이용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대하여 김석원(金錫源) 장군이 반발, 사령부의 명령을 거부했다. 그는 산길이 너무 험준한데다가 매복한 적군에게 노출될 경우 꼼짝없이 갇혀 많은 희생자를 내게 된다며 그러한 명령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버텼다. 신 국방이 이 같은 사실을 미 사령부에 통고하자 그들도 김 장군의 판단이 옳다고 인정, 기차를 내주었다.
신 장관은 한국군 부대가 안동에 무사히 배치되었다거 보고했다. 아울러 마침내 워커 장군과 미군부대에 한국군을 배치시켜 함께 전선에 투입하는 문제에 합의를 보았다고 알렸다. 전쟁 초기부터 우리가 주장했던 문제가 이제야 해결된 것이다. 당시 미군부대에 배속되었던 한국군이 바로 카투사(KATUSA) 제도의 시작이 되었다.
<7월23일>
대통령과 나는 무쵸 대사가 매일같이 전화를 걸어오는 시간 전에 교회를 다녀오기로 했다. 교회는 초만원이었다. 두 분 목사는 차례로 하나님은 언제나 정의의 편에 서신다며 자유와 정의를 위하여 피 흘리는 이 땅의 젊은이와 우방군인들을 하나님의 은혜로 보살펴 달라고 기도했다. 설교가 끝나고 대통령은 15분간 교인들의 손을 일일이 잡아 주며 “조금만 더 참자”고 위로했다.
적은 목포와 대구를 향하여 점점 다가오고 있다. 그런데도 미군들은 적의 전선 루트에 비행기를 출격시켜 보면 적군이고 탱크가 하나도 보이는 것이 없다고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직까지도 적의 수법을 모르고 있으니 한심한 사람들이다. 공산군은 낮에는 완전히 몸을 숨겼다가 밤이면 이동하는 전술을 쓰고 있는 것이다. 낮에는 더위를 피해 충분히 휴식을 취하기 때문에 밤의 전진 속도가 빨랐다. 공산군 수법을 미군들에게 귀가 아프도록 설명해도 믿으려 하지 않는다.
7월26일 저녁은 대통령과 조 지사 부인, 그리고 나 셋이서만 식사를 했다. 메뉴는 가지나물, 북어찜, 열무김치하고 고기를 넣은 두부찌개였다. 대통령은 반찬 가짓수가 너무 많다면서 다음부터는 두 가지만 차려 놓도록 또다시 당부했다. 부인의 음식 솜씨가 좋아서 대통령은 반찬까지도 하나 남기지 않고 깨끗이 비웠다.
<7월27일>
갑작스런 비행기 폭음에 대통령과 나는 소스라쳐 깨어났다. 시계는 새벽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적의 야크기가 대구 상공에 나타난 것이다. 야크기는 우리 집 위를 바짝 지나갔다. 적기는 대구 운동장에 폭탄을 떨어뜨리고 갔다. 내 짐작에는 그들이 운동장을 비행장으로 오인한 것 같았다. 당시 대구 지사 관저 앞에는 방공호가 있었으나 피할 틈도 없었다.
국방장관이 정오쯤 와서 하동(河東)이 적의 수중에 떨어졌다고 알려주었다. 채병덕(蔡秉德) 장군이 전투 중 오전 11시45분에 전사했다. 그는 무기에 관한 전문 지식과 무기 관리에 관한 제1인자로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되었던 장군이다. 외모와 첫인상만을 갖소 사람을 판단하려는 게 미 대사관 사람들이었다. 대사관과 미 장성들은 대통령이 하필이면 왜 한국에서 제일 뚱뚱하고 둔해 보이는 장성을 육군참모총장에 임명했는지 궁금해 했다. 대통령은 미국 사람들이 이러한 의문을 드러낼 때마다 이렇게 대답했다.
“나의 채 장군(My General Chai)은 날씬한 장군이 못 가진 기민성을 가지고 있어요. 전문적인 군사지식은 물론, 우리나라에 무슨 무기가 필요한가를 잘 알고 있는 경험으로 뭉쳐진 장군이지요.” 대통령은 또 “미남 장군들의 시원스런 큰 눈으로 보지 못하는 것을 채 장군의 졸리는 듯한 눈은 꿰뚫어 본단 말이야”라며 장군을 감싸고 돈 적이 있었다. 사람들은 채 장군이 너무 뚱뚱해 걸어가는지 굴러가는지 모르겠다고 입방아를 찧었지만 그는 정말로 충의(忠義)가 있는 한국의 장군이었다. 그러한 채 장군의 전사 소식은 오늘 새벽 적기의 폭음 소리가 찢어놓은 가슴의 상처 이상으로 우리를 비통하게 만들었다.
아군기의 오폭(誤爆)은 계속되었다. 우리 폭격기들은 꼭 한발 늦게 출격하여 적군이 다 떠나버린 장소에 폭탄을 투하했다. 때로는 적군 몇백명이 숨어 있단 정보에 따라 출격한 비행기들이 아예 시 전체를 폭격해서 선량한 시민들의 피해가 적지 않았다. 대표적인 것이 영동(永同)에서의 미 기갑부대(미 1기병사단) 전투였다. 그들은 영동을 원형(圓形)으로 포위하고 전 가옥을 파괴하다시피하면서 적과 싸웠다. 이 전투에서 미군은 적 사살 또는 포로 2천여명의 전과를 올렸다. 아군의 피해는 40여명에 불과했다. 싸움에 이기고도 미군들은 3마일을 후퇴했다. 승리 뒤에도 후퇴한 것이다. 그들은 지연작전을 펴고 있다고 했다. 그 지연작전은 우리 땅을 야곰야곰 잃게 만들고 있었다.
오후 2시15분 맥아더 장군이 대통령을 방문하기로 되어 있었다. 대통령은 부산에 가 있던 김활란 박사를 불렀다. 맥아더 사령관은 워커, 알몬드, 휘트니 장군과 스트레트마이어 제독을 대동하고 왔다. 그들은 대통령과 회담하는 자리에서 일본으로부터 올 수 있는 무기는 모두 건너 왔고 이제는 8월초부터 미 본토로부터의 보급이 시작될 것이라고 말했다. 대통령은 “우리에게는 충분한 인력이 있다. 사람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이들을 무장시킬 무기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뉴욕타임즈의 존스톤(Johnston) 기자가 왔다. 그는 미 대사관에서 무쵸 대사로부터 전황 브리핑을 받고 오는 길이라고 했다. 그는 미군의 작전계획이 적을 퇴각시키는 것이 아니라 어느 시기에 뒤를 끊어서 완전 섬멸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군의 반격은 한 두달 안에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대통령은 정일권 장군을 불러서 우리 군대가 단독으로 진격할 가능성에 대해 물었다. 정 장군은 자신 있게 “할 수 있다”고 대답하면서 “문제는 미군이 한국군의 단독 북진에 동의하지 않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영국 해군이 만고 있는 서해안 방어선이 자꾸 뚫린다는 소식이다. 북괴군이 소형 보트로 계속 상륙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통령은 적이 부산 가까이 왔다는 보고에 크게 실망했다. 워커 장군은 진주(晉州)에 있는 병력을 하동으로 이동, 배치했다.
적기의 대구 공습이 잦아지게 되자 나는 대통령에게 야간 민정시찰을 중단하는 것이 좋겠다고 권했다. 대통령은 요즘 저녁 식사 후에는 대구 거리와 골목의 시장을 두루 살피며 시민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즐기고 있었다. 대통령은 내 말에 대답도 않더니 저녁 식사를 마치자마자 조 지사 부인을 향해 “오늘은 나 혼자 나가서 맛있는 수박을 사 먹을 터이니 부인들은 집이나 지키시오”라면서 나갈 채비를 하는 것이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모시옷을 입혀드리고 조 지사 부인과 함께 따라 나섰다. 시내 안내는 늘 조 지사 부인이 앞장섰다. 대통령은 구멍가게와 싸전을 둘러 본 뒤 철물점으로 들어가 삽과 괭이 같은 농기구를 이모저모 살폈다. 대통령이 “참 잘 만들었는데”라고 하자 주인이 “그 삽은 국산입니다”라고 응수했다. 그러나 삽은 일제(日製)였다. 상인이 대통령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 눈치 챈 조 지사 부인이 “무엇이나 정직하게 말씀드려야 하지 속이면 못 써요”하고 핀잔을 주자 철물점 주인은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밤에도 피난민 대열은 꾸역꾸역 밀려들어오고 있었다. 김천 쪽에서 오는 피난민들이었다. 대통령은 침통한 얼굴로 피난민들을 쳐다보며 “우리 국민들이 너무 고생한다”고 고개를 떨구었다. 그날 밤 대통령은 이범석 장군을 국방장관에 임명할 뜻을 비쳤다. 이 장군은 현재 밀리고 있는 전세(戰勢)를 역전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을 대통령에게 보였었다. 문제는 미국이 쉽게 응해 주겠느냐는 것이었다.
<7월28일 아침>
신 국방은 적군이 하동을 지나 진주로 진격하고 있으므로 한국군 17연대를 안동에서 진주로 보냈다고 보고했다. 마산도 위험하다. 남원은 이미 적의 수중에 들어갔다. 진주에서 적을 막지 못한다면 부산의 운명도 어찌 될지 모를 일이다. 무쵸 대사와 노블 서기관이 오전 11시 대통령을 만나러 왔다. 이 자리에서 대통령은 이범석 장군을 국방장관에 임명하겠다고 했다. 무쵸 대사는 “신 국방이 잘 해내고 있다”면서 “미국과의 원만한 관계를 위하여 경질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반대했다. 신 국방은 또 유임되었다. 대통령은 불쾌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대통령은 다시 한 번 무기원조를 요구했다. “우리는 청년단을 조직하고 있다”면서 “만일 그들에게 총을 주지 않는다면 죽창이라도 만들어서 적군의 길목을 지키겠다”고 말했다. 대통령은 대구 남쪽 산맥에 이미 적의 게릴라 3개 부대가 숨어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그러면서 대구가 적의 수중에 들어가면 부산은 시간문제이므로 대구 사수는 절대적인 일이라고 강조했다.
미군들은 이 사태의 긴박성을 실감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존스톤 기자는 미군들이 하지(John R. Hodge) 장군을 다시 한국에 데려오려고 애쓰고 있다고 했다. 대통령은 한국인들이 하지 장군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되면 대단히 불행한 일이고 모든 일을 악화시키게 될 것이라고 반대했다. 새벽 3시30분 적이 벌써 함양(咸陽)에 들어왔다는 보고를 받았다. 적이 우리 부대(17연대)가 진주로 이동한 사실을 알아버린 것이다. 우리에겐 사람은 있으나 무장한 군인이 없다. 대통령은 워커 장군과 무쵸 대사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에게 또 한 번 무기공급을 애원할 참이다.
<7월29일>
아침에 내무부장관 조병옥 박사가 워커 장군을 만났다. 조 장관은 미군이 전면 공격만을 생각할 뿐 도처에서 준동하는 게릴라들에 대해서는 무방비라고 비난했다. 그는 어제 저녁 북괴 게릴라들이 울산에 침투한 것을 우리 경찰부대 50여명이 퇴각시켰다고 보고했다. 그는 적이 최근 정규전보다 게릴라전 방법으로 야금야금 점령지를 넓히고 있고 함양, 남원이 이 같은 방법으로 실함(失陷)되었다고 분석했다.
국방장관은 백인엽 대령이 지휘하는 17연대가 함양∼진주 전선에 투입되기 위하여 이동 중 대구역에 잠시 머물고 있다고 보고했다. 나는 <타임>지의 백 대령에 관한 기사를 읽었다. 그는 옹진(甕津) 전투의 영웅이었다. 우리는 17연대의 철수로 북쪽 전선이 큰 파국으로 떨어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철수를 해서는 안 되지만 지금 당장은 어쩔 도리가 없다고 한다.
밀려드는 피난민들의 숫자는 점점 늘어나서 쌀값은 아침, 저녁이 다르게 뛰어 오르고 있다. 대통령은 점심을 밥 대신 삶은 감자나 밀가루 음식으로 바꾸도록 지시했다. 사실 대용식을 바꾸고 나서 대통령은 몹시 허기(虛飢)를 느끼는 듯하다. 어제 저녁에는 김장흥 총경과 야간 민정시찰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팔다 남은 떨이 복숭아를 한 보따리 사들고 들어왔다. 복숭아는 좀 상해 있었다. 나는 곯은 곳을 잘라내고 감자처럼 푹 쪄서 식으로 내놓았다. 대통령이 너무나 맛있게 6개나 들었다.
부산과 포항에는 각기 8척, 4척의 수송선에서 병력이 상륙했다. 라디오를 들었지만 최근 미국에서 증파된 경비함의 활약상은 한 줄도 보도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우리 해군 경비정 2척이 진남포(鎭南浦)에서 남하하는 적의 보급선 12척이 서해안의 좁은 해협으로 들어서기를 기다려 차례차례 명중시켜 침몰시켰다. 적의 생존자는 한 명도 없고 우리 젊은 아이들을 죽일 많은 군수품은 고스라니 수장(水葬)되었다. 이 해전의 승리를 국방장관으로부터 정식 보고 받았을 때 대통령과 나는 함께 원더풀을 외쳤다.
대통령은 인내의 한계를 넘기고 있다. 대통령 자신은 온 국민과 더불어 대구와 함께 운명을 같이 할 비장한 각오를 하고 있다. 오늘 밤 대통령은 나를 불러 도쿄의 맥아더 사령부로 떠나라고 했다. 거의 명령조였다. “마미, 적이 대구 방어선을 뚫고 가까이 오게 되면 제일 먼저 당신을 쏘고 내가 싸움터로 나가야 돼요. 그쪽에 부탁해 놓았으니 당신만은 여기를 떠나 주시오.” 나는 절대로 대통령의 짐이 되지 않을 것이며 최후까지 대통령과 함께 있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내 손을 꼭 잡은 대통령은 “다신은 망명정부를 만들지 않을 거요. 우리 아이들과 함께 여기서 최후를 마칩시다” 하면서 내 등을 토닥여 주었다.
창밖 멀리 떼 지어 몰려드는 피난민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가슴 저리게 들려 왔다. 가족들의 이름을 부르며 애타게 찾는 소리, 끌고 온 송아지의 배고파 하는 울음소리며 달구지의 삐걱대는 소리가 화살처럼 귀에 들어와 박힌다. 창틀을 움켜 쥔 대통령의 기도도 울음 섞인 목소리였다. “하나님, 어찌하여 착하고 순한 우리 백성이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합니가? 이제 결전의 순간은 다가옵니다. 우리 한 사람이 적 10명을 대적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소서....”
<7월30일 이른 아침>
대통령은 오늘밤에도 대구거리로 나갔다. 자정 가까이 되어서 돌아온 대통령이 뚱딴지 같이 “마미, 나 오늘 순사한테 잡혀갈 뻔 했어”라고 말했다. 사연인즉, 오늘 낮에 이기붕(李起鵬) 서울시장 내외가 대통령께 드리려고 잣 한 봉지를 가져 왔다. 나는 허기가 질 때 드시라고 이 잣을 대통령 포켓에 넣어 두었다. 대통령은 누구에게서든지 조그마한 선물이라도 받으면 꼭 답례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분이다.
이날 밤도 대통령은 이기붕 시장의 잣에 대한 답례로 참외를 사 주려 했다. 그 참외는 이기붕 시장의 어린 두 아들 강석과 강욱에게 주라는 것이었다. 참외는 1천원에 7개였다. 그런데 대통령이 “덤으로 한 개만 더 주시오”라면서 한 개를 더 집으려 하자 참외장수가 “할아버지라 싸게 드렸는데 덤까지 가져가면 순사가 잡아가요” 하면서 도로 빼앗더라는 것이다. 이기붕 씨의 외모가 워낙 왜소하고 쪼글쪼글 한데다가 대통령도 풀 안 먹인 후줄근한 모시차림의 늙은이였으니 참외장수가 대통령과 서울시장 일행을 알아 볼 리가 없었던 것이다. “거 참, 참외 덤 얻으려다가 순사한테 잡혀갈 뻔 했다니까....” 대통령은 재미있다는 듯 자꾸만 웃었다. 나도 참외장수가 되었다. 힘없는 모시옷의 저 노인네, 대통령은 피곤해 보이고 더 늙어 보였다.
대통령의 참외선물을 받은 이기붕 씨의 두 아들 강석, 가욱이 고맙다는 인사를 하러 왔다가 대통령의 말동무가 되었다. 대통령은 두 형제를 보자 “요놈들, 이 할아버지하고 팔씨름 시합하겠니...” 하고는 팔을 걷어붙였다. 대통령은 언제나 상대편에게 역전승(逆轉勝)을 시켜 주었다. 대통령은 꼬마들의 주먹이 바닥에 닿을 듯 할 때까지 힘을 주었다가는 “아이고 힘들어, 못 당하겠네!”라면서 차츰차츰 자신의 팔을 기우려 주곤 하는 것이다. 꼬마들은 얼굴이 새빨가지도록 용을 쓰다가 역전승을 하면 신난다고 박수를 쳤다. 내가 “어차피 져 줄 것을 아이들 힘을 그렇게 뺄 게 무엇이냐”고 묻자 대통령은 “지더라도 최선을 다 하는 인내를 키워주고 결국에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 넣어 주기 위해서 그러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7월31일∼8월1일>
어제는 너무나 참담한 기분이어서 아무 것도 쓸 수가 없었다. 동부전선에서 진격 중이던 우리 육군에게 후퇴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적에게 보급로를 차단당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미군은 동부지역 한국군의 보급로 역할을 해 왔던 김천(金泉)을 포기했다. 백 대령이 이끄는 17연대는 미군을 좌우로 그리고 후방까지 엄호하고 있었다. 어젯밤에는 적이 미군의 후방을 공격해 왔으나 한국군이 이를 격퇴시켰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적의 기습 병력은 겨우 80명이었다.
고령에 주둔한 미군들이 어젯밤 기습해 온 북괴군 게릴라들과 접전 중이던 우리 경찰대원들에게 집중사격을 가해 30여명을 살상했다는 보고다. 도대체 뭐가 뭔지를 구분하지 못하고 싸우는 이 사람들은 무엇을 하러 온 사람들인가. 우리 아이들이라면 그 따위 멍청한 실수는 저지르지 않을 것이다. 한국군과 북괴군을 구분하지도 못하고 쏘아대는 판이니 아예 후퇴하는 정도는 비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대통령은 맥아더 사령관에게 이러한 실수를 따지는 편지를 썼다. 지난 번에도 이와 비슷한 사건에 대한 항의 편지를 워커 장군에게 전달, 맥아더 사령관에게 전해달라고 요청한 적이 있었으나 그 편지는 끝내 전달되지 않았다. 한국군은 만일 지금이라도 당장 미국이 한국인들에게 무기를 공급해준다면 적군의 공세를 저지시켜 미국이 총반격작전에 필요한 물자를 보급받을 시간을 벌 수 있다고 믿는다. 미군은 벌써 여러 날 째 곧 공격을 개시한다고 말만 하고 있다.
미국은 그들의 군사전략이나, 국익의 득실, 또는 트루먼 대통령을 비롯한 미국 정치가들의 정략이라는 저울대 위에 남한 땅을 올려놓고 있다. 남한 땅을 포기하는 것이 자국의 복합적인 이익에 부합된다는 쪽으로 저울 바늘이 기울 때면 그들은 냉큼 부산까지 내려갔다가 훌쩍 떠날 수도 있다. 그렇게 하게 할 수는 없다. 남한 땅은 우리에게는 생명이오, 미래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 국민만이라도 남아서 최후까지 이 땅을 지키겠다는 것이다.
무쵸 대사는 한국인들의 사기가 어째서 떨어졌느냐고 물었다. 대통령은 한국인들의 사기가 떨어진 적이 없다고 응수했다. “무쵸 대사, 나는 어제 2천 명의 우리 청년들이 훈련받고 있는 곳을 방문했었소. 미군 고문관은 한국 훈련병들이 잠잘 때나 먹을 때나 항상 총 자루를 쥐고 있다면서 극구 칭찬을 합디다. 우리 국민들의 정신은 그렇게 살아 있소.” 대통령은 이어서 미군이 더 이상 후퇴를 계속하지 않는다면 한국인의 사기는 충천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 젊은이들을 포함하여 부산에 대기 중인 10만명의 한국 청년들은 아직도 맨손이다. 무기! 무기가 필요한 것이다.
대통령이 미군들이 후퇴만 하다가 죽을 당하는 것이 몹시 안타깝다고 쏘아붙였다. 대통령은 만일 미군들이 무기를 우리에게 빌려주고 증원군이 올 때까지 우리더러 전선을 지키라고 한다면 미군도 살고 우리 아이들도 살고 우리 나라도 살지 않겠느냐고 무쵸 대사를 다그쳤다. 무쵸 대사는 몹시 화를 냈으나 대통령의 편지를 맥아더 사령관에게 전달하겠다고 약속했다.
중화기를 공급받은 한국군 부대가 그들이 맡은 모든 전선에서 적의 진격을 저지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되자 적군은 미군 방어선이 취약하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쪽만을 골라서 맹렬하게 공세를 펴기 시작했다. 우리의 17연대가 합천(陜川)을 탈환했다.
<8월2일>
우리 아이들이 훈련받고 있는 캠프를 다녀오는 도중에 대통령이 갑자기 논 옆에 차를 세웠다. 그것은 빈 논이었다. 옆의 논에는 벼들이 무성하게 자라서 이미 패기 시작하는 데 거기는 오래 전에 누군가 모를 심다 말고 가 버린 논이었다. 논 가운데는 아직도 띄엄띄엄 모 묶음이 흩어져 있고 논두렁의 모 묶음들은 자라지도 못한 채 누렇게 말라 있었다. 대통령은 빈 논 둑을 말없이 걸어 갔다. 그리고 말라버린 모 묶음을 움켜쥔 대통령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도 울었다. 이윽고 대통령이 눈길을 돌리더니 아쉬운 듯 말했다. “누가 모 묶음을 풀어서 뿌려 놓기만 했더라도 조금의 추수는 할 수 있었을 텐데.....” 대통령은 국민의 양식과 닥아 올 추수를 걱정했다. “농민들이 공산당에게 곡식을 빼앗겨서는 안 돼! 우리는 추수 전에 반드시 땅을 되찾아야 돼!” 대통령은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8월3일>
어젯밤에는 실로 오랜만에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하와이에서 새로 도착한 병력이 30여대의 탱크를 앞세우고 진주(晉州) 외곽에 와 있던 적군을 격퇴 중이라는 보고가 들어 온 것이다. 우리는 모두 이 소식을 듣고 기뻐했으며 기분도 훨씬 좋아졌다. 더구나, 적군은 식량과 연료, 그리고 탄약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이제 미국인들이 기어코 공산군을 밀어붙이겠다는 결의만 하면 되는 것이다.
미군이 김천을 포기하고 왜관(倭館)으로 후퇴하게 되어 전선은 더욱 남쪽으로 밀려내려 왔다. 한국군 17연대의 좌우 엄호(掩護)를 받던 일부 미군 병력은 거창(居昌)에 주둔하고 있었지만 어젯밤 전투를 치르고 나더니 미군은 고령(高靈)으로 후퇴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군은 후퇴를 거부했다. 이렇게 되자 후퇴를 결정한 미군들은 자신들의 무기를 한국군에게 넘겨주고 고령으로 떠났다. 한국군은 이 무기들을 가지고 거창을 방어하고 있다.
워커 장군은 오늘 아침 드디어 미군과 한국군이 똑 같은 무기를 제공받게 되었다고 발표했다. 워커 장군 자신이 한국군이 얼마나 열심히 싸우고 있는지를 직접 눈으로 확인했기 때문에 취한 조치였다. 대통령은 지난 1주일 내내 한-미 양국군에게 똑 같은 무기가 제공되어야 한다고 입이 닳도록 주장해 왔는데 이제야 미국측이 무기 제공에 있어서 한-미 양국군에게 아무런 차별을 두지 않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워커 장군은 또 한국 경찰에게도 완전무장할 수 있는 장비를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국군이 북진할 때 한국 경찰이 도처에서 준동(蠢動)하는 공산 게릴라들을 효과적으로 견제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서였다. 이제는 워커 장군도 한국군이 얼마나 우수한 전투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또 한국군이 없다면 미군이 아무런 일도 할 수 없었으리라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빈(Vienna, Austria)의 친정집에서 언니 베티가 <디 프레세(Die Presse)> 특파원 편에 비타민과 편지를 보내 왔다. 끝까지 용기와 희망을 잃지 말라는 격려 편지였다. 어머니는 우리나라에 전쟁이 터졌다는 소식을 듣고부터 근심으로 지새우면서 한국의 자유와 평화 회복을 기원하는 금식(禁食) 기도를 시작했다는 소식이었다. 요즘은 친척과 이웃은 물론, 단골 가게 아주머니들까지 합세하여 어머니와 함께 금식 금식 기도를 올리고 있다고 한다.
내가 이곳에 시집 온 것이 1934년.... 17년 동안이나 떨어져 살면서 그리워 했던 어머니다. 어머니의 인자하고 따스한 얼굴이 떠오르며 흐르는 눈물을 억제할 수 없다. 어머니는 내가 대통령과 결혼하는 것을 반대했었다. 독립투사와 정치가의 아내보다는 평범한 가정주부가 되기를 원하셨다. 그때도 어머니를 괴롭혔고 이제는 또 다시 어머니의 마음을 죄고 있으니 불효막심한 딸이다. 나이 많은 남편을 따라서 먼 나라로 시집온 딸 때문에 단 하루도 마음 놓고 지내신 적이 없는 사랑하는 어머니..... 나는 “이 전쟁이 승리로 끝나면 꼭 찾아 뵐 테니 그때까지 기다려 주세요”라고 속으로 되뇌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결국 한국동란 중에 돌아가셨다. 우리는 이 사실은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훗날 프란체스카 여사는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대통령은 장례 때 나더라 다녀 오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나라 사정을 생각할 때 빈까지의 여비도 문제였지만 한시라도 대통령 곁을 떠날 수 없는 상황이라 다녀올 엄두를 내지 못했다....”]
<8월8일>
지난 며칠간은 일기를 쓸 경황이 아니었다. 한국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려는 미군의 작전에 협조하기 위하여 철수했다. 대통령은 자신의 생각을 편지로 썼다. 나는 이 편지들을 장면(張勉) 주미대사와 올리버 박사(Robert T. Oliver●이승만 대통령의 정치고문) 등에 전달, 대통령의 뜻6이 미국 각계에 알려지도록 했다.
미군들이 기대 이상으로 잘 싸우고 있기는 하다. 워커 장군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 하고 있다. 그는 진정으로 한국을 사랑하는 것 같다. 이제 워커 장군의 전술에 관하여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것을 삼가야 하겠다.
대구의 더위는 한층 더 기승을 부린다. 물 사정도 예사가 아니다. 물이 부족해서 우리 내외 빨래도 물 사정을 보아가며 해야 했다. 가족들을 서울에 남겨두었거나 도중에 뿔뿔이 흩어져서 홀로 내려온 정부요인들이나 황 비서관, 경호원들은 옷을 사 입을 형편도 못 되었다. 그 바람에 군복을 얻어 입었고 빨래도 손수 해야 한다. 남자들 빨래 솜씨로는 비눗물이 늘 덜 빠지게 마련이다. 가끔 지사관저 뒷마당 빨래 줄에 국물이 덜 빠진 남방셔츠가 널려져 있어도 물이 귀해 손봐줄 수가 없었다. 여기저기를 깁거나 올이 다 닳아 구멍이 나기 직전의 빨래들이었다. 너무나 딱한 건 팬츠였다. 해어지기 직전의 천 조각에 불과했다.
나는 노블 참사관이 갖다 준 침대 시트를 침모와 함께 밤새껏 말려서 그것들로 팬츠를 여러 장 만들었다. 이 팬츠를 조 지사부인에게 주어서 직원들 숙소로 보내도록 했다. 지사 관저 앞에 있는 양조장과 덩치가 좀 큰 집들은 서울에서 내려온 정부관리와 사회 각계 인사들의 공동 합숙소였다. 방이 부족해서 모두들 새우잠을 자거나 차례가 늦은 사람들은 앉아서 자는 경우도 허다했다. 밤중에 누군가 화장실을 다녀오면 그 때는 자던 자리를 빼앗기는 것으로들 알았다. 자동차가 부족해서 지프에 4∼5명씩 끼어 타는 콩나물시루 신세들이었다. 장관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너나없이 등허리에 땀띠가 나도록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그래도, 누구 하나 불평하는 사람이 없었다. 너무나 충성스러운 사람들뿐이었다.
<8월10일>
대통령과 나는 온몸에 땀띠를 뒤집어썼다. 대통령의 잔등은 모기에 물린 곳까지 겹쳐서 보기에 딱할 지경이었다. 워낙 물이 부족하여 밤이면 물 한 대야를 떠다가 수건을 적셔서 대통령의 땀을 닦았지만 땀띠는 점점 심해져서 진물까지 흘렀다.
나는 워커 장군에게 땀띠 연고를 구할 수 있겠느냐고 물어보았다. 무쵸 대사나 워커 장군, 그리고 우리 집에 드나드는 미국인들은 나를 보면 “마담 리, 도와 드릴 일이 없습니까?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라도 알려 주세요”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대통령은 그들에게 사사로운 부탁은 일체 못하도록 나에게 엄명(嚴命)을 내려놓고 있었다. 나는 참다못해 워커 장군에게 땀띠 약을 부탁한 것이다. 장군은 땀띠 연고 외에도 다른 상비약과 영양제를 한 박스 보내왔다.
그런데, 내가 부엌일을 보러 잠시 들어간 사이에 약상자가 대통령의 눈에 띄고 말았다. 대통령은 나에게는 한 마디 의논도 없이 아침 보고를 하러 들어 온 신성모 국방장관에게 “일선의 우리 아이들에게 가져다주라”면서 약상자를 주어 버렸다. 약상자 뿐 아니라 나의 친정에서 온 비타민까지 몽땅 합쳐서 주어 버린 것이다. 내가 부엌에서 나올 때 신 장관은 막 약상자를 받아들고 밖으로 나가는 참이었다. 너무나도 안타까워서 나는 말도 못한 채 땀띠연고 하나만 빼 놓으라는 싸인을 신 장관에게 보냈다. 신 장관은 알았다는 듯 한 개를 슬쩍 빼 놓으려 했다.
그때 갑자기 뒷머리가 따갑다는 느낌이 들어서 고개를 돌리자 대통령이 무서운 눈으로 우리 두 사람을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무안해서 어쩔 줄을 몰랐고 신 장관도 멀쓱한 표정으로 냉큼 나가버렸다. 평소에도 남에게 무엇을 줄 때는 나에게 물어보는 법이 없는 대통령이었다. 그러한 성격에 자신의 땀띠를 치료하겠다고 얻어 온 약을 전선에 보내면서 나의 의사를 물어 볼 분이 아니었다.
<1945년8월10일>
영덕지구의 전황은 더욱 심각했다. 적군이 깊숙이 내려와서 병력을 집결, 대구로 밀고 내려올 태세였다. 안강리에 집결한 적의 대규모 게릴라들이 포항을 위협하고 있었다.
대통령은 무쵸 대사에게 기금 당장 2만 정의 총만 한국군에 지급해 주면 미국인들의 생명을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통령은 게릴라전이라는 것은 맞붙어 싸우는 백병전이나 다름없는데 한국인들은 그 같은 전투에 대한 훈련이 잘 되어 있다고 장담했다. 또 우리 아이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전투를 계속할 결의에 차 있다는 것이 대통령의 지론이었다. 무쵸 대사는 한국 외무차관(조정환)이 갖가지 뜬소문(미군의 울산 철수설)을 퍼뜨리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외무장관은 조 차관 이외에도 황성수(黃聖秀) 의원도 미군 대위가 하는 말을 들은 바 있다고 반박했다.
이때 김태선(金泰善) 서울시경국장이 와서 미군 비행기들이 이미 부산과 포항으로 날아갔으며 이제 대구공항에 남아 있는 비행기는 몇 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미군이 공개적으로 말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대부분의 비행기들은 8일 모두 대구공항을 떠나 버렸다. 많은 사람들이 어찌 된 일이냐고 질문하는 것은 당연했다. 임병직(林炳稷) 외무장관은 “평양방송을 청취한 미국 기자들이 적군이 9일 중에 대구를 점령할 것이라고 하는 것을 들었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이 평양방송 보도 내용은 삽시간에 꼬리를 물고 퍼졌다. 무쵸 대사는 최초에 이 소문을 퍼뜨린 미군대위의 신분을 밝힐 것을 거부하면서 여전히 소문을 퍼뜨린 것은 한국사람들이라는 주장을 고수했다.
오늘 아침에는 오랜만에 반가운 소식이 날아들었다. 우리 아이들이 밀려오는 적군을 몰아냈다는 것이다. 적군이 후퇴하는 자기 동료들을 향하여 사격을 가했다는 소식도 들어왔다.
<8월11일>
어제 오후 노블 참사관이 나에게 왔다. 그는 우리 정부가 워싱턴 공관으로 보내는 편지 사본을 무쵸 대사에게 주는 것은 잘하는 일이지만 무쵸 대사는 우리 워싱턴 공관이 그 편지 내용을 성명으로 만들어 발표하는 것은 사태를 악화시킬 것이라는 말씀을 대통령에게 여러 차례 드렸다고 말했다.
미국 정부는 소련이 빠져 나갈 문을 터주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인들은 우리가 발표하는 성명이 소련군의 한국전 개입을 유발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었다. 만의 하나, 소련군이 참전한다면 미군은 한국에 대한 지원을 철회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미군은 미●소간의 전쟁에 대하여 아무런 전쟁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궁극적으로 피해는 한국의 몫일 뿐이라는 것이다.
나는 노블 박사에게 “무쵸 대사는 어째서 그 같은 내용을 대통령에게 직접 말씀드리지 않고 당신이나 드럼라이트 참사관을 통하여 편지 전달방법을 가지고 시비하느냐”고 따졌다. 노블이 몹시 당황해 하는 것을 보니 그들은 대통령의 편지를 제대로 워싱턴에 전달해 줄 것 같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이 편지를 회수했다.] 미국무성은 어떻게든지 대통령의 입을 막고 회유(懷柔)하려고 급급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오후 5시쯤 우리 군대가 진주를 점령했다. 그러나 증강된 1개 연대 규모의 적 게릴라들이 포함을 포위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의 프랭크 에머리 기자가 대구에 도착했다. 그는 막 왜관에서 왔다고 했다. 그는 한국군들이 총도 없이 수류탄과 맨 주먹으로 용감하게 싸우고 있다고 전해 주었다. 그는 한국군이 공산군을 격퇴하는 데 성공을 거두곤 했지만, 그때마다 공산군은 반드시 다시 몰려오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는 그에게 한국인들은 공세를 취할 만큼 충분한 병력이 없을 때도 오히려 선제공격을 가하는 것이 유리하도 믿고 있으며 적이 공격을 취해 올 때까지 무한정 기다리고만 있는 것은 아주 불리한 전략이라고 믿고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었다. 전황은 매우 급박해져서 전선에서는 서울에서 공산군에게 징집된 학생들이 포로로 잡혀 오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
<8월13일>
국방장관은 한국군 1개 연대를 경주로 보내서 포항까지 진격하도록 명령했다고 보고했다. 이들은 오늘 아침 공격을 개시하도록 되어 있었다. 국방장관이 아침에 와서 매일 같이 전사자 명단을 놓고 검토해 보면 미 24사단에서 실종자가 대량 발생하고 있는데 실은 그들의 대부분이 도망병들이라고 했다. 미 전투부대의 실종자들은 거의가 일본에 주둔하고 있을 때 취사병이었거나 부대의 지원부서 사병들이었기 때문에 전투능력이 없었다. 워커 장군은 이 같은 사실을 알고 나서 그곳에 새로운 병력을 파견했다.
우리 학도병들이 그곳에 있는 미군을 지원하고 있었다. 임병직 외무장관은 미군들이 2대의 트럭을 몰고 와서 우리 아이들을 가득 싣고 가는 것을 목격했다고 보고했다. 우리 아이들의 일부는 구식 일본총을 가지고 있었으나 대부분은 아무 무기도 없었다. 우리 아이들은 트럭을 타고 산속으로 들어가서 그곳에 숨어 있던 공산군 게릴라들을 산 밑으로 쫓아냈고 이때 대기하고 있던 미군들이 게릴라들에게 일제사격을 퍼부었다. 이 작전으로 밤에 우리를 괴롭히던 상당수의 공산군 게릴라들이 제거되었다. 미국인들이 드디어 우리 아이들이 진심으로 그들을 돕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8월14일>
어제 오후 콜터(John B. Coulter) 장군이 무쵸 대사 및 드럼라이트 1등서기관과 함께 찾아와서 대통령에게 대통령의 편지에 대한 회신으로 맥아더 사령관이 자기에게 “7천명의 한국군 병사들에게 유엔군 휘장이 달린 군복을 입히고 미군과 함께 먹고 잘 수 있도록 조치하라”는 명령을 주었다고 보고했다. [지금까지는 한국군이 미군과 함께 행동하더라도 양국군이 먹는 음식은 달랐었다.]
그런데 사실은 대통령이 맥아더 사령관에게 편지로 요청한 내용은 그것이 아니었다. 대통령은 원래 우리 젊은이들이 적의 게릴라 활동은 물론 크고 작은 산속 길을 수색하며 적군의 침투를 막도록 하기 위하여 “3만 정의 소총을 공급해 달라”고 요청했었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미군 병사들이 같은 한국인인 한국군과 공산군을 구별하여 식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 같은 무기 공급 요청에 동의할 것 같지 않았다. 우리 아이들은 우리와 적군을 능히 식별하지만 미군은 그렇지 못한 것이다.
무쵸 대사는 “대구가 적군의 공격권 안에 들어갔다”면서 “정부를 제주도로 옮길 것”을 건의했다. 그의 주장은 제주도가 적의 공격으로붙너 멀리 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최악의 경우 남한 육지의 전부가 공산군의 수중에 들어갈 경우 ‘망명정부(亡命政府)’를 지속시켜 나갈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무쵸가 한참 열을 올려 이야기하고 있을 때 대통령이 슬그머니 허리춤에서 모젤 권총을 꺼내들었다. 순간 무쵸는 입이 얼어 버렸고 얼굴색이 하얗게 질렸다. 나도 깜짝 놀랐다. 미국에서 살 때 고속도로 순찰 오토바이를 따돌리고 과속으로 달릴 때 가슴이 떨린 이후 이렇게 놀란 적이 없었다.
대통령은 권총을 아래위로 흔들면서 “공산당이 내 앞까지 오면 이 총으로 내 처를 쏘고 적을 죽이고 나머지 한 알로 나를 쏠 것이오. 우리는 정부를 한반도 밖으로 옮길 생각이 없소. 모두 총궐기하여 싸울 것이오. 결코 도망가지 않겠소”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대통령이 권총으로 무슨 일을 벌일 것은 아니었지만 긴장한 무쵸 대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못하고 혼비백산(魂飛魄散)하여 돌아갔다.
이날 밤 나는 깊은 잠을 이루지 못한 채 악몽과 환상에 시달렸다. 바로 눈앞에서 공산당이 나타나 대통령이 나를 쏘았는데 불발(不發)이 되어서 우리가 붙잡히거나 치명상을 입지 않아서 목숨이 붙어 있는 바람에 그들에게 곤욕(困辱)을 치르는 환상에 잠이 오질 않았다. 잠이 들어 꿈을 꾸었다. 대통령이 나를 쏘았다. 그런데도 죽지는 않고 피만 흘렀다. 나는 피를 흘리며 공산당에게 이리저리 끌려 다녔다. 소스라쳐 눈을 뜨면 온 몸이 식은땀에 젖어 있었다. 나는 두 손을 모아 이 전쟁과 죽음의 공포를 물리쳐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한국전쟁은 엄연한 전쟁이면서도 어떻게 보면 전쟁이 아닌 것 같은 이상한 양상을 띄고 있다. 그것은 전쟁을 피하기 바라는 면이 있기 때문이다. 어떠한 방법으로 전쟁을 피한다는 것일까? 그것은 소련이 이 와중(渦中)에서 빠져나갈 수 있도록 뒷문을 열어놓는 것이다. 그러한 희망으로 우리측은 전쟁을 늦추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소련은 이것을 최대한 이용하면서 오히려 “미국은 어째서 전쟁을 시작했느냐?”고 오히려 시비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전쟁의 책임은 누가 져야 한다는 말인가? 미국이 소련으로 하여금 빠져나가게 해 주면, 소련은 자신들에게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생각할 것이 아닌가.
<8월16일>
우리는 전 세계의 우방들에게 한 가지 분명하게 밝혀두고 싶은 일이 있다. 그것은 어떤 나라든지 이 전쟁을 중재하기 위한 계획이나 제안을 내놓기 원할 때는 그러한 제안을 반드시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한국 정부에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민들은 남북한 간의 평화협상 제의가 소련 또는 다른 어떤 나라에 의하여 제시되는 것을 강력하게 반대한다. 우리는 과거에도 그 같은 경험을 수없이 겪어왔으며 지금 현재 미국인과 한국인들이 고통을 시간을 갖고 있는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정부당국과의 정당한 사전협의 없이 남북한 문제에 관하여 다른 나라들이 협정을 맺는 것을 결단코 반대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다. 우리는 유엔의 모든 회원국들이 대한민국의 독립을 완전히 승인했고 한국의 주권이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침해 받아서는 안 된다는 점을 이해하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우리의 우방들이 이 전쟁에 모두 참가해서 우리를 도와주고 있지만, 현재의 이 전쟁은 궁극적으로 우리 자신의 전쟁이다. 다행히도 우방들이 한국 땅까지 와서 우리를 도와주려는 목적, 즉 민주주의를 수호하려는 그 목적은 우리 자신이 추구하는 것과 일치하는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은 이러한 민주주의 수호자들에게 무차별 공격을 감행, 모든 민주국가를 파괴하고 공산주의로 세계를 지배하려 한다. 자유진영이 이러한 공산주의자들에 대항하여 우리와 함께 싸우고 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역사상 처음으로 하나의 공동 목적을 위하여, 소(小)는 (大)를 위하고 대는 소를 위하여 싸우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를 도와준 우방들이 우리나라를 다스리거나 우리의 내정에 간섭해도 좋다는 뜻은 아니다. 전쟁이 한반도에 국한하여 전개되는 한 이 전쟁은 전적으로 우리나라 국내 문제이며 우리들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다.
우리는 중요한 문제를 우방과 상의할 것이며, 그들이 내놓는 좋은 충고와 건설적인 제안에 대하여 감사할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해 둘 것은 어떠한 경우든지 간에 이러한 우방들의 충고와 제안을 받아들이거나 또는 수락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오직 우리 정부의 고유한 권한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