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그릇 心椀과
함께 배우는 불교
제 1163편
* 불교(佛敎)
역대 선사(歷代 禪師(祖師))
오도송(悟道頌) 및
선시(禪詩)
오도송(悟道頌)이란 무엇인가 ?
불교(佛敎)를
공부(功夫)하는
수행자(修行者)가
자신의 깨달음을 읊은
선승(禪僧)의 게송(偈頌)
가운데(中) 하나를
오도송(悟道頌)
이라고 한다.
오도송(悟道頌)과
열반송(涅槃訟)은
게송(偈頌)의 하나로써
구체적으로
비교해서 설명하면
고승(高僧)이
자신만의 깨달음(覺)을
노래(歌, 句)한 것이
바로
오도송(悟道頌)이며
고승(高僧)이
자신의 임종(臨終) 전에
남겨놓고 가는 노래(歌, 句)를
열반송(涅槃訟이라고
한다.
게송(偈頌)이란
불교의 가르침(敎義)을
함축(含縮 집약)하여
표현(表現)하는
운문체(韻文體)의
짧은 시구(詩句 문자)를
말하는데
곧 선시(禪詩) 내지
또는 선어(禪語 문장)를
이르는 말이다.
본래(本來)
게(偈)와 송(頌)은
같은 의미로
《게(偈)》
라는 글자(字)는
산스크리트어(梵語)
《가타(gatha)》의
음을 빌려와(音借) 따서
만든 말이고
《송(頌)》
이라는 글자(字)는
《가타(gatha)》를
한문(漢文)으로 번역한
것이다.
이렇듯
자신의 깨달음(正等覺)을 읊은
선승(禪僧)의 게송(偈頌)
역대(歷代)
조사(佛祖師 선사)
스님(高僧)들의
게송(偈頌)
즉,
오도송(悟道頌)과
열반송(涅槃訟)은
오랫동안
수련과정(修練過程)을
통해 함축된 의미로
세속(사바세계)의
사람(大衆)들에게
무엇인가를 전(傳)하고
말(說法 이야기)하고저
하는 것이며
후세(후학)들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역사적(歷史的)
문헌 기록상(文獻記錄上)
오도송(悟道頌)을
가장 먼저 남긴 이(僧侶)는
조동종을 일으킨
동산 양개(洞山良价,
807∼869) 선사(禪師)
이다.
생사일여(生死一如)의
구분이 부질없는 일임에야
사람들은
태어남을 기뻐하고,
헤어짐은 슬퍼한다.
오랜 세월
훌륭한 선승(禪僧)이나
선사(禪師) 스님들의
깨달음의 길(佛道行)이
매우 힘들고 어려우며
지난(至難)하듯이
역대(歷代)
조사(佛祖師 선사)
스님(高僧)들의 남겨진
오도송(悟道頌)과
열반송(涅槃訟)은
일반인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이렇듯
깨달음의 노래는
다시 한번
자신(수행자)의 삶(人生)을
돌이켜보게 하고
느슨해졌던 마음을
추스리게 한다.
여기
역대(歷代)
조사(佛祖師 선사)
스님(高僧)들의
오도송(悟道頌)과
열반송(涅槃訟)을
올려놓으니
그 깊은 뜻이야
어찌 우리가 모두 다 헤아려
알 수 있겠는가마는
행간(行間)의
곳곳(處處)에 숨겨져 있는
깊고 깊은 심오(深奧)한 뜻을
함께 발견(發見)하고
공부(功夫)하며
오늘을 사는
지혜(반야 보리 광명 智慧)를
찾아보시기 바램해 본다.
본론(本論)
불교(佛敎)
역대 선사(歷代 禪師, 祖師)
선시(禪詩)와
임종게(臨終偈) 및
오도송(悟道頌) 설해(說解)
"
옛 절에 봄은 깊어졌는데
(春深古院寂無事)
진각국사 혜심(慧諶) 선사
춘심고원적무사
(春深古院寂無事)
풍정한화낙만정
(風定閑花落滿庭)
감애모천운청담
(堪愛暮天雲晴淡)
난산시유자규제
(亂山時有子規啼)
아무런 일, 인적 없는
옛 절에 봄은 깊어졌는데
바람이 자자하여 머물다 간
뜰 안에 꽃잎만 가득 쌓였구나
해질 무렵 저녁 하늘의 구름
색깔은 맑고 쾌청 너무 좋은데
어지러운 시절, 산에는
여기 저기 두견새가 운다네.
"
이 시(詩,
게송, 禪詩)는
깊고 깊은
산 속(山中)의
봄 풍경(春景)을 읊어
자연(大自緣)과
서로 동화(同和, 일체)된
자연친화적 정서를 듬뿍 담은
서정(抒情)을 통해
아름다운
시상(詩想, 싯적 상상)을
펼쳐 전개해 놓았다.
도시(都市)의
복잡다난한 고민(번뇌, 苦悶)이
전혀 없는
대자연(大自緣)의
향수(鄕愁)를 느끼게 하는
시(詩, 게송, 禪詩)이다.
선시(게송, 禪詩)는
대부분
인간(人間, 중생)에
실존의 고민(實存苦悶) 따위가
기술(記述, 기록, 술회)되지
않는다.
번뇌(煩惱)의
갈등(칡 葛,등나무 藤)이
극복(克覆)된
경지(境地)에서는
존재(存在)의
있는 그대로(본래면목)를
받아들이고 수용(受用)하면서
긍정적(矜情的)으로
바라 보는 것이다.
※
갈등(葛藤,
칡 葛,등나무 藤)이란 ?
칡나무와 등나무가
한곳에 뿌리를 내리면
반드시 두나무 중에 하나는
메말라서 죽거나 고사한다
여기에서
유래(流來)한 말(고사성어)이
바로 갈등(葛藤)이다.
※
때문에
모든 것(一切諸法)은
그 자체(本來面目自性)가 가진
아름다움을
십분 발휘하는 것이다.
보조국사
지눌(知訥, 1158~1210) 선사
스님(僧, 大沙門)의
상수 제자(上首弟子)
혜심(惠諶) 스님(僧, 沙門)께서
이 시(詩, 게송, 禪詩)를
지었다.
지리산 연곡사에서
어느 해 늦은 봄에 지어
당두(當頭) 스님에게
주었다고 제목에서 밝히고 있다.
무의자(無衣子) 시집(詩集)에
수록된 시(詩, 게송, 禪詩)로
원제목이
춘만유연곡사증당두로
(春晩遊燕谷寺贈當頭老)로
되어 있다.
"
늦은 봄
지리산 연곡사에 놀다가
당두스님에게 주다.
"
라는 제목이다.
《무의자(無衣子)》는
혜심스님이 자기 스스로 짓은
자호(自號)다.
입적(入寂,
열반, 해탈)하고 나서
진각국사(眞覺國師)가
되었다.
유명한
《선문염송 30권》을
저술하였다.
※
진각국사(眞覺國師)
혜심(慧諶, 1178∼1234)
선사(大禪師)는
고려후기
대선사(大禪師)이며
스님(僧, 沙門)으로
단속사(斷俗寺)의
주지(住持) 등(etc)을 역임한
승려(僧侶)이다.
성(俗性)은 최씨(崔氏)
자(字)는 영을(永乙),
호(字號)는 무의자(無衣子)
법명(法名)은
혜심(慧諶)이다.
전라남도
나주 출신으로
아버지는 완(琬)이며
어머니는 배씨(裵氏)이다.
지눌 스님의
뒤를 이어 수선사(修禪社)
제2세 사주(社主)가 되어
간화선(看話禪)을
강조하면서 수선사의 교세를
확장하였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출가하기를 원하였지만
어머니가
허락하지 않았다.
1201년(신종 4)
사마시에 합격하여
태학(太學)에 들어갔으나
다음 해 어머니가 죽자
당시
조계산(曹溪山)에서
수선사를 만들어
교화 활동을 하고 있던
지눌(知訥) 스님에게 가서
어머니의 재(齋)를 올린 다음 지눌 스님의 제자가 되었다.
이때 부터
그(혜심(慧諶) 스님)는
힘써 정진하였으며
지눌 스님은
혜심(慧諶)의 재능을
매우 아꼈다.
1210년
보조국사 지눌이
입적(入寂)하시자
혜심이
수선사로 돌아가
개당(開堂)하였다.
1212년
강종(康宗)이 수선사를
증축시키고
부처님 법(佛法)을
구(참구)하므로
『심요(心要)』를 지어 올렸고
당시
문하시중 최우(崔瑀)는
그에게 두 아들을 출가시켰다.
고종(高宗)은
왕위에 올라 혜심스님에게
선사(禪師)에 이어
대선사(大禪師)를
제수하였으며
1220년(고종 7)
단속사(斷俗寺) 주지로
명(命)하였다.
1234년 6월 26일에
휘하문인(門人)들을 불러
여러 가지 일을 부탁한 뒤 입적(入寂, 열반, 해탈)하였다.
나이(歲壽) 56세
법랍(法臘) 32세였다.
고종은
진각국사(眞覺國師)라는
시호를 내리고
부도(浮屠)의 이름을
원소지탑(圓炤之塔)이라
사액(賜額)하였다.
부도(浮屠)는
광원암(廣遠庵) 북쪽에
이규보(李奎報)가 찬한 진각국사비(眞覺國師碑)는
전라남도
강진군월남산 월남사(月南寺)에
각각 세워졌다.
문인(門人 제자)에는
몽여(夢如)
진훈(眞訓)
각운(覺雲)
마곡麻谷)
등이 있다.
저서(著書)로는『심요』 1편
선문염송집(禪門拈頌集) 30권
조계진각국사어록
(曹溪眞覺國師語錄) 1권
구자무불성화간병론
(狗子無佛性話揀病論) 1편
무의자시집(無衣子詩集) 2권
금강경찬(金剛經贊) 1권
『선문강요(禪門綱要)』1권이
등(etc)이 있다.
※
ㅡㅡㅡㅡㅡㅡㅡㅡ
※
원문을
해석함에 있어서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見解)와
해석(解釋)으로
오역(誤譯)
오판(誤判)한 부분도
있을 것이다.
언제든지
글 내용 가운데
잘못 된 부분은 옳고 바르게
지적(指摘)해 주시고
새로운 가르침을 주시기를
간절히 바램해 본다.
- 마음그릇 心椀 드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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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그릇 心椀과
함께 배우는 불교
《== 다음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