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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처| 피영민 목사
서 론
이사야서는 66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도 66권입니다.
따라서 이사야서와 성경의 구조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 구약 39권, 신약 27권인 것처럼 이사야서도 앞 39장은 정죄(Condemnation)와 심판을 얘기하고, 뒤 27장은 위로(Comfort)를 얘기합니다. 이처럼 성경 전체의 구조와 이사야서의 구조가 동일합니다. 앞 39장은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 언약을 어기고 배교함으로 말미암아 정죄를 받게 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그리고 뒤 27장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로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이사야 40장 1절은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고 기록되었는데 이처럼 위로하는 말씀으로 이사야서 후반부를 시작합니다.
41장 10절 전반에도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또한 42장 3절에도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며’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목회자들이 병원에 가서 아픈 성도를 심방하며 나누는 위로의 말씀이 주로 이사야서 후반부 즉, 40장으로 66장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위로하는 말씀의 대부분은 이사야서 후반부에 기록되어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로하시는 말씀의 핵심이 오늘 본문 4절 말씀입니다.
4절 전반에는 ‘다시는 너를 버리운 자라 칭하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칭하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
‘헵시바’는 ‘나의 기쁨이 네게 있다(my delight is in you)’는 말이고 ‘쁄라’는 ‘결혼했다(married)’는 뜻입니다.
두 말을 합쳐 말하면 ‘내가 너를 기뻐하여 결혼을 했다’는 뜻입니다.
별히 유다 백성들에게는 이런 위로의 말씀이 필요했습니다.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멸망당하여 포로되었을 때 그들은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셨는가?’라고 생각했고, 유다가 바벨론에 포로되었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잊으셨는가?’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사야 49장 14절에는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결코 자기 백성을 잊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사야 49장 15절로 16절에는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찌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이사야서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핵심은 ‘헵시바’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름다운 이름으로 부르신다고 했습니다.
이사야 62장 3절에는 ‘너는 또 여호와의 손의 아름다운 면류관, 네 하나님의 손의 왕관이 될 것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이 말씀은 옛 이스라엘 백성뿐 아니라 오늘날 참 이스라엘인 교회를 향한 위로의 말씀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죄로 말미암아 혹은 인생의 어떤 실패와 좌절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나를 버리시고 잊으셨는가?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오늘 말씀을 듣고 힘을 얻으시길 바랍니다.
로마서 10장 10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는 말씀처럼 귀로만 듣지 마시고 마음으로 받아들이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헵시바가 놀라운 이유
헵시바 즉, 하나님께서 나를 기뻐하신다는 말씀은 세 가지 이유에서 생각만 해도 믿기 어려운 매우 놀라운(wonder) 말씀입니다.
첫째, 내가 나 자신을 보아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보면 ‘하나님께서 나를 기뻐하신다고 믿어지지 않는다’고 생각될 때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믿고 구원받은 성도라고 해도 여전히 우리에게는 극복하지 못한 죄가 있고 교만과 위선이 남아있으며 연약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눈에는 안목의 정욕이 살아있고 살과 뼈에는 육신의 정욕이 남아있으며 마음에는 이생의 자랑이 남아있어 끊임없이 우리를 넘어뜨리고 좌절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7장 24절에서 사도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며 탄식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헵시바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헵시바’ 즉,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혹은 ‘너는 내게 기쁨을 주는 사람(you bring me pleasure)’이라는 말씀은 참으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둘째, 성도들이 서로 상대방을 보아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가 있는 서로의 연약한 모습을 보면 ‘하나님께서 저런 사람을 기뻐하실 리가 있나?’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사랑의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시며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너는 내게 기쁨을 주는 존재니라”는 참으로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셋째, 세상이 교회를 보아도 기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5장 18절에는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교회를 몹시 미워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마귀의 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상 모든 사람이 아무리 미워해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서 ‘헵시바’ 즉,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내가 너로 인하여 기뻐하고 너는 내게 기쁨을 주는 존재니라’는 참으로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2. 헵시바의 이유
우리가 스스로를 보아도, 또 서로서로를 보아도, 그리고 세상이 우리를 보아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그래도 우리 안에 뭔가 하나님의 사랑과 기쁨을 받을 요인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시편 14편 2절로 3절에는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기록되었고,
예레미야 17장 9절에도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또한 이사야 64장 6절에도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 가나이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겉을 보나 속을 보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왜 헵시바 즉 우리를 기뻐하신다라고 말씀하실까요?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In Christ)’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났거나 숫자가 많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며 택하시고 예정하셔서 그리스도 안에 두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십니다.
에베소서 1장 3절로 4절에는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라고 기록되었고,
7절에도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또한 베드로전서 5장 10절에는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간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고 기록되었고,
요한일서 5장 20절 후반에도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우리는 교만하고 반항하며 죄 짖고 허물 많으며 음탕하고 실수하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실 리가 없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기 전에 그리스도 예수를 먼저 보신다는 말씀입니다.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세상을 보면 온통 검게 보입니다. 제가 차를 운전하면서 터널에 들어갔더니 매우 캄캄했습니다.
그래서 속으로 ‘누가 터널을 이렇게 캄캄하게 만들었나?’하고 한참 후에 보니 제가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있던 것이었습니다.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으니 터널 안이 캄캄하게 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무엇을 통해 보느냐에 따라서 만물이 달라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되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우리를 보시기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를 기뻐하심으로 예수 안에 있는 우리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세상의 어떤 것보다 위대한 특권이고 축복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비록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을 지라도 복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밖에 있으면 아무리 지위가 높은 사람일지라도 그는 살아있을 때는 가련하고 불쌍하며 죽어서는 더 비참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기뻐하십니다.
이사야 42장 1절 전반에는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여기서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마태복음 3장 17절에도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침례 받으실 때에 하신 말씀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변화산에 올라가셨을 때에도 동일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7장 5절 후반에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우리를 보시므로 우리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창세전에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부르시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며, 그리스도 안에서 지금도 우리를 양육하고 계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천국에서 받아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인생이 행복하냐 마느냐는 결정적인 이유는 그리스도 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다른 기준은 없습니다. 우리는 전에도 죄인이었고, 지금도 죄와 싸우며, 전에도 부족하고 지금도 부족하지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기쁨과 사랑은 영원 전에 시작되어 영원 후까지 변함이 없다는 사실을 믿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헵시바의 결과
하나님께서는 말로만 우리를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나타내십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 전반에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사랑하면 그 사랑을 주는 행동으로 나타나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는 세 가지 행동이 있습니다.
첫째, ‘구원(salvation, deliverance)하심’입니다.
시편 18편 19절에는 ‘나를 또 넓은 곳으로 인도하시고 나를 기뻐하심으로 구원하셨도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여기서 시편기자는 죄로 말미암아 지옥에 떨어질 것으로부터 나를 구원하셨다고 말하는데 이것을 ‘칭의(Justification)’라고 합니다.
그리고 지금도 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점차 거룩해 지도록 나를 구원해주고 계시는데 이것을 ‘성화(Sanctification)’라고 합니다.
또한 죄의 존재자체로부터 영원토록 구원하여 더 이상 죄를 짓고자 해도 지을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구원을 ‘영화(Glorification)’라고 합니다.
칭의구원은 이미 받은 구원이고, 성화구원은 현재 받아가고 있는 구원이며, 영화구원은 미래에 받을 구원입니다. 즉, 우리는 칭의의 의미에서는 이미 구원받았고, 성화의 의미에서는 구원받아 가고 있으며, 영화의 의미에서는 앞으로 구원받을 것입니다. 이 모든 구원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시기 때문에 주신 것인줄로 믿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징계(discipline)하심’입니다.
잠언 3장 12절에는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자식을 기뻐할수록 더욱 매를 들고 자기 가슴이 메어져도 자식의 잘못을 고쳐줘야 됩니다. 왜냐하면 잘못하는 것을 보고도 그냥 넘어가면 나중에는 아무도 감당 못하는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잘못하고 계속 엉망으로 살며 죄를 짓는데도 아무런 어려움이 없는 사람은 부모님께서 버린 자식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적인 부모님인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하시고 채찍을 드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에 어려움이 닥쳐올 때 ‘하나님께서 나를 버린 자식 취급하지 아니하시고 나를 기뻐하여 이렇게 징계하시니 정말 감사합니다’라고 생각하며 나아가는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천국(kingdom of heaven) 혹은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를 우리에게 주심’입니다.
누가복음 12장 32절에는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그 나라 즉, 천국을 주십니다. 현세에서 천국이 임하게 되면 의와 평강과 희락이 오는 것입니다.
로마서 14장 7절에는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 즉, 천국이 현세에 임하게 되면 마귀는 물러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가 오면 결코 마귀, 귀신, 악령이 사람의 마음과 가정을 지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천국이 임하도록 기도하라고 주기도문에서 가르치셨습니다.
‘나라이 임하옵시며(May your kingdom come)’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가 현세에도 내게 임하여 주시고, 내가 죽어서 이 땅을 떠나게 되면 하나님 나라를 내게 주시옵소서’라는 말씀입니다.
천국은 죽어서 가는 나라이기도 하고 현세에서 체험하는 나라이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천국에 당신이 기뻐하시는 사람을 모아 두시지, 미워하시는 사람을 모아 두실 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나를 기뻐하시지 않으시면 결코 내가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왕이신데 미워하는 사람을 당신의 나라에 두시지 않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을 천국에서도 받아주실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처럼 헵시바라는 작은 단어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축복이 다들어 있습니다. 우리 성도는 구원도 받고, 양육하심도 받으며, 하나님 나라도 받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보배는 헵시바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은 이처럼 말할 수 없는 큰 특권을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4. 헵시바가 주는 의무
특권을 받으면 의무가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권리만 누리고 의무를 얘기하지 않는 사람은 민주시민이 될 자격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은 하나님을 기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기뻐해야 되고,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다는 것을 기뻐해야 되며, 하나님과의 교제를 기뻐해야 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을 기뻐해야 됩니다. 우리는 억지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을 기뻐해야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법을 기뻐해야 됩니다. 또한 하나님의 일을 기뻐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비록 힘들지라도 하나님께서 기쁨을 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넉넉히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시편 32편 11절에는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 할찌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찌어다라’고 기록되었고,
35편 9절에도 ‘내 영혼이 여호와를 즐거워함이여 그 구원을 기뻐하리로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또한 37편 4절에도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마음의 소원을 이루고 싶으신 분 계시다면 하나님을 기뻐하십시오.
하나님께 나가서 온갖 찬사를 다하여 기도하십시오.
자식들이 부모님께 와서 아양을 떨면 ‘얘가 뭘 또 얻을게 있어서 그러는구나’ 생각하시면서도 자식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게 됩니다.
그러나 부모님이 들어와도 무뚝둑하게 인사도 안하며 부모님과 등지고 다니면 자식이 뭘 잘하는 게 있어도 원하는 것을 들어주기 싫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을 기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어떤 부귀영화보다도 하나님을 기뻐하는 성도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
우리는 부흥을 바라고 기원하며 기도합니다.
시편 85편은 부흥의 시인데 6절에서 시편 기자는 ‘우리를 다시 살리사 주의 백성으로 주를 기뻐하게 아니하시겠나이까’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신다는 것은 벌써 창세전에 시작된 것이고 영원까지 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변하지 않는 진리입니다. 따라서 주의 백성인 우리가 하나님을 기뻐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흥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과의 교제를 기뻐하고 주님의 일을 기뻐하며 주님의 말씀을 기뻐하고 내가 주안에 있다는 것을 기뻐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면 우리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고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원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기뻐하여 마음의 소원을 다 이루시고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는 성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성경 벌레들 글쓴이: 성경 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