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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하나님의 때와 창조적인 생활 : 박 조준 목사
2절에 보니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여기 “은혜받을 만한 때” 그리고 “구원의 날”이란 말이 나옵니다. 이사야 55장 6절에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가 있습니다. 이때는 하나님이 가까이 계실 때인 것을 말씀합니다. 전도서 3장에 보면 “범사에 때가 있다”고 하면서 심을 때가 있고, 거둘 때가 있고, 사업할 때가 있고, 봉사할 때가 있다고 했습니다.
옛날부터 우리 동양에는 천시(天時)란 말이 있습니다. 하늘의 때를 의미합니다. 영어로는 ‘Divine Opportunity’라는 말을 씁니다. 하나님의 기회가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때를 바로 포착해야 사업에도 성공하고, 나라도 부강하게 되고, 전쟁에도 승리하고, 민족도 중흥케 됩니다. 하나님의 때, 하나님의 기회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하나님의 때가 있습니다.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 은혜를 받을 만한 때, 구원을 얻을 만한 때, 회개해야 하는 때가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때를 놓치지 말아야, 우리가 회개하고 구원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언제나 가까이 계십니다.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를 힘쓰십니다.
그런데 우리 사람 편에서 보면 특별히 하나님이 가까이 계실 때가 있고 만날 만한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들은 소경 바디매오는 가만히 앉아 있지 아니하고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세요”라고 계속 소리질렀습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의 일행이 걸음을 멈추게 되었고, 예수님이 바디매오를 불러서 그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만일 바디매오가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것을 알고도 ‘이번에 내 차례까지 과연 돌아올까?’ 하면서 그냥 앉아 있었다면 예수님은 그곳을 그냥 지나갔을 것이고 그는 다시는 예수님을 만날 기회가 없어서 죽을 때까지 소경 거지로 지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열두 해 동안 혈루병으로 앓던 여인이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들 뒤로 살그머니 가서 예수님의 옷자락을 살짝 붙잡았습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을 붙잡는 순간 그렇게 고생하던 병을 고침받아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만일 이 여인이 예수님의 일행이 너무 복잡하게 많은 사람 가운데로 지나가는 것을 보고 ‘아, 나는 좀 한가한 때 찾아가 뵈어야지’라고 생각했었다면, 이 여인은 병 고침을 받지 못하고 평생 혈루병으로 고생하다가 죽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이 귀한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복된 기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가령, 인간의 일생을 보면, 청소년기는 하나님을 만날 만한 때입니다. 유년기는 너무 어리고, 중년기는 세상의 가시덤불에 덮이기 쉽고, 노년기에는 생활과 사상이 이미 굳어져서 새 길을 걷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청소년 시절은 대체로 그 마음 밭이 옥토와 같습니다. 양심이 맑고, 이상이 높고, 인생의 깊은 뜻을 탐구하며 영원을 사모하는 때입니다. 그러므로 종교사를 보면 많은 사람이 이 청년기에 하나님을 만나고, 일생의 소명을 받은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사야나 예레미야가 그랬고 베드로, 요한, 야고보를 위시해서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이 다 청년 때에 주님을 따랐습니다. 신약 시대뿐만 아니라, 전교회사를 통해 많은 위대한 영계의 거장들이 모두 이 청소년기에 하나님을 만나 소명을 받고, 일생을 통해 위대한 봉사를 했습니다.
사랑하는 젊은이 여러분, 이때야말로 여러분이 하나님을 만날 만한 때입니다. 그를 만나 회개하여 새 사람이 되고, 일생의 갈 길을 바로 찾을 때입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은 이 거친 세상을 살아 나아갈 때 종종 생의 위기에 직면합니다. 환난을 당합니다. 재난을 당합니다. 실패를 합니다. 질고를 겪습니다. 슬픔을 당합니다. 생의 풍파를 겪을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역경은 예고없이 우리를 엄습합니다. 오늘은 건강하지만 내일 아침에 병상에 누울 수 있습니다. 지금은 평안하지만 다음 순간 어떤 어려운 일을 당할지 알 수가 없습니다.
과거의 역사와 현대 많은 성도들의 경험을 보면 흔히 이와 같은 인생의 어두운 밤에 하늘의 광명한 빛을 받은 이가 많습니다. 성 프란시스, 성 로욜라, 파스칼 같은 위대한 신앙의 용사들이 다 병상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중고시대의 위대한 종교가 피터 왈도 같은 이에게는 사랑하는 친구가 연회석상에서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큰 슬픔의 체험이 회개의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당하게 되는 환난이나 실패나 고통이 물론 반가운 일은 아니지만 이러한 암흑의 밤이 오히려 하늘의 광명한 진리의 빛을 받을 만한 하나님의 때인 것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만나고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도 견디기 어려운 환난을 당하신 분이 계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셔서 환난을 잘 이기게 되시기를 바라며 이 환난의 기회가 하나님을 만나는 기회,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는 기회, 그래서 축복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더구나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면서 사회와 국가를 위하여 봉사할 수 있는 하나님의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건강한 때는 하나님께 봉사할 때입니다. 편안할 때도 봉사할 때입니다. 자유로울 때도 봉사할 때입니다. 형편이 넉넉한 때도 봉사할 때입니다. 좋은 위치에서 일하게 된 때도 사회를 위해서 봉사할 때입니다. 젊었을 때도 봉사할 때입니다. 늙으면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습니다. 이 봉사에도 하나님의 때가 있음을 기억하고 우리는 모든 봉사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봉사의 때도 제한이 있습니다. 젊었을 때, 힘이 있을 때 봉사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낮에 일하라고 하셨습니다. 밤이 오면 일하지 못한다고 경고했습니다. 기회가 있을 때 봉사하고 전도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후회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개인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민족적으로도 역사를 통해 보면 하나님의 때가 있습니다. 민족 역사에도 은혜받을 만한 때, 구원을 얻을 때가 있습니다. 옛날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모세와 여호수아의 시대, 다시 말해서 출애굽의 시대는 그 민족이 은혜받고, 민족적으로 해방과 구원을 얻은 시대입니다. 가나안 복지를 얻은 큰 승리의 시대였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민족은 사방에 있는 모든 원수들을 굴복시키고 백성은 평화를 누렸습니다. 튼튼한 예루살렘성과 아름다운 솔로몬의 성전을 화려하게 건축한 황금의 시대였습니다. 그 후에 불행하게도 국가의 분열과 우상 숭배와 온갖 죄악으로, 결국은 이스라엘과 그리고 유다까지도 멸망하는 민족적 암흑의 밤이 왔습니다. 그러나 에스라와 느헤미야 시대는 그 민족이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해방을 받아 다시 예루살렘에 돌아오는 은혜의 시대였습니다. 민족적인 구원의 날이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 역사뿐만이 아니고 신약 시대와 그 이후 교회사를 읽어보면 과거 2천년 동안에도 종종 특별한 은혜의 날, 혹은 구원의 시대가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외치고, 우리 주님이 친히 이 세상에 오시고, 오순절에 3천명이 회개하고 세례받은 것은 말하자면 은혜의 날이었던 것입니다. 이 큰 구원의 시대가 2세기, 3세기 계속되여 결국은 당시 세계를 다스리던 로마 제국이 기독교화 된 것입니다. 그리고 루터, 쯔빙글리, 칼빈 같은 사람이 종교개혁을 이룩한 16세기야말로 또한 큰 은혜의 시대였습니다. 구원의 날이었습니다. 18세기, 19세기에는 하나님께서 많은 위대한 신앙의 용사들을 보내어 전세계에 복음이 전파되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인류 역사에 있어서도 특별히 은혜받을 만한 때, 구원의 날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사는 이 20세기는 어떻습니까?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알고 경험하는 대로 모순과 혼란의 시대입니다. 빛과 어두움, 희망과 절망, 생명과 사망이 뒤섞인 시대입니다. 고도의 물질 문명의 발전으로 인간의 외적인 생활이 크게 변화되었고, 심지어 달나라까지 내왕할 수 있는 우주 시대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반면에 인심은 극도로 타락하여 그 어느 세기보다도 피비린내 나는 세기요, 이 땅을 피로 물들인 불안과 공포의 세기입니다. 그러나 성경 말씀대로 죄가 많은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풍성해서 이러한 세기에서도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을 잊지 않으시고 복음을 계속적으로 온 세계에 확대할 수 있게 하실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때는 항상 있는 것은 아닙니다. 기회를 잃으면 다시 찾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회를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나, 민족적으로 잃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잃으면 화가 됩니다.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성도들에게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간청합니다. 은혜의 좌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영원한 비극입니다. 가령, 부모가 그 자식의 성공을 위해서 희생을 합니다. 그러나 그 자식이 고맙게 생각지도 않고 자기 멋대로 살아간다면 부모의 가슴을 찢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기의 모든 은혜를 주시지만 사람들이 자기들을 거듭나게 할 수 있는 그 은혜를 거절하고 스스로 어리석은 길을 걸을 때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실까요?
본문 3절 이하를 보면 사도 바울이 언제나 그리스도 예수의 충실한 일꾼으로 일하기를 원한 것을 말하면서 그의 마음은 크리소스톰이 말한 대로 ‘고난의 눈보라’에 쏠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지난날에 극복해 온 것이고, 현재도 극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승리를 나타내는 말을 ‘견딘다’는 말로 표시했습니다. 바울이 말한 ‘견딘다’는 의미는 고난이 닥칠 때에 피동적인 자세로 참고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변화시키며 변모시킬 수 있도록 승리적으로 참고 견디는 능력을 말합니다. 이 인내를 크리소스톰은 ‘모든 선의 근원’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한계성을 넘어서도 부서지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을 언제나 기쁨으로 맞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용기와 승리가 넘치는 가능성을 말합니다.
이제 3절에서 10절까지의 말씀을 보십시다. “우리가 이 직책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곤난과 매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어 의의 병기로 좌우하고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사실 사도 바울은 남보기에는 근심하는 생활 같지만 항상 기뻐하는 생활, 남 보기에는 가난한 생활 같지만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는 생활, 남보기에는 아무것도 없는 생활 같지만 많은 것을 가진 자의 생활을 한 것입니다. 이런 생활을 창조적인 생활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기회를 창조의 기회로 삼은 것입니다. 여기 ‘창조’라고 하는 말은 없는 데서 있게 한 것이 아니라, 있는 자료를 가지고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문학 방면에도 새로운 시나 희곡 또는 소설 같은 작품이 나오는 것입니다. 음악에서는 새로운 곡을 작곡하는 것입니다. 과학 방면에서는 새로운 발명품이 우리 시장에 범람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인간은 하나님이 주시는 자료를 가지고 역시 하나님이 주신 우리의 지력과 통찰력과 상상력을 통해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예술이나 과학 방면뿐만 아니고 모든 방면에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이 짐승과 다른 것은 짐승은 새 것을 만들 수 없지만, 인간에게는 언제든지 새 것을 구상하고 만들어 낼 수 있는 지력이 있기 때문이며, 그래서 인간이 귀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영적인 방면에서도 그렇습니다. 위대한 예술가는 변변치 못한 재료를 가지고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어 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생활을 생각해 보면 예수님은 인간의 영적인 방면에서 위대한 작품을 만들어 낸 분이시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가령,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는데, 본래 십자가는 가장 추악한 죄인을 사형에 처하는 아주 추악한 형기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십자가를 모든 인류의 죄를 대속하는 대속의 표가 되게 했으므로 인류의 소망의 상징이 된 것입니다. 부끄러운 십자가를 변화시켜 영광의 십자가로 만드신 것입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모두 그렇습니다. 완고하고, 편협하고, 독선적이요, 무자비하기 이를 데 없던 바리새인 사울을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불러 변화시켜 사랑과 화평의 사도가 되게 하셨고, 이런 사람을 통해서 온 세계에 복음을 전파하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큰 가치의 새로운 창조입니까? 바울뿐만 아닙니다. 돈만 알던 이기주의자요, 자기의 민족도 모르던 민족 반역자인 삭개오 같은 사람을 불러내서 자기 재산의 절반을 팔아서 모든 다른 사람을 구제하는 데 쓰게 하였고, 자기가 토색한 것은 4배로 갚아 주는 사람으로 만들었으니 이것이야말로 또한 얼마나 큰 가치의 창조인지 말로 다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활을 보면 언제든지 이 영적 방면에서 새로운 작품을 만드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 같은 여자, 일곱 귀신이 들려 정신없고 미치고 부끄러운 줄 모르던 이 여자를 변하게 해서 아름다운 하나님의 딸로 삼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봉사할 수 있게 만든 그 기적을 생각할 때 이것이야말로 얼마나 큰 가치의 창조인지 말로 다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에만 그와 같이 한 것이 아닙니다. 복음이 가는 곳마다 이와 같은 새로운 가치의 창조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새로운 창조가 이룩되는 것입니다. 옛 것은 지나가고 새 것이 되어 전에는 매우 더러웠었으나 이제는 깨끗하게 되었고, 전에는 매우 이기주의적이었으나 이제는 오직 사랑과 봉사 그리고 헌신의 생활을 할 수 있는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주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면 우리도 주 안에서 이와 같은 창조적인 생활을 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에서 전도할 때, 어떤 귀신 들린 여자를 불쌍히 여겨서 고쳐 주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 여자를 고쳐 준 것 때문에 그 여자에게서 점을 쳐 수입을 얻던 주인에게 미움을 받아 그 주인이 여러 사람을 충동해서 오히려 바울과 실라를 잡아끌고 관원에게 가서 무고하게 많은 매를 맞히고 수고를 시키고, 마지막에는 빌립보 감옥에까지 갇히게 되고 말지 않았습니까?
아마 보통 사람 같았으면 그날 저녁에 바울과 실라의 마음속에는 분한 마음만 가득했을 것이고, 온 몸이 결리고, 쑤시고, 아픈 생각밖에는 다른 생각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과 실라는 그날 밤이 깊어갈 때 오히려 하나님께 찬송을 부르고, 모든 사람 앞에서 감사의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그때 큰 지진이 있었고, 옥문이 열리고, 고랑이 풀리고, 간수가 회개하고, 그 가족이 예수 믿어 구원받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빌립보교회는 본래 여자들만 있었는데 남자 교인도 생기게 되었고, 교회의 기초가 점점 튼튼해졌고 사도 바울의 모든 전도 여행 때도 항상 물질로 도와주는 귀한 교회가 된 것입니다. 그 후에 이 교회에 사도 바울이 편지를 보내 오늘까지 이 빌립보 편지를 읽고 많은 은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는 이런 환경 가운데서 간수를 회개하게 만들었고, 빌립보교회의 기초를 튼튼히 닦게 되었고, 빌립보서를 써서 세기를 통해 많은 사람에게 은혜를 끼칠 수 있는 정말로 창조적 생활을 하게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전 생애를 통해서 창조적인 생활을 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생활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누구든지 믿음을 가지고 주 안에 사는 사람은 창조적인 생활을 할 수가 있습니다. 어떤 환경과 어떤 조건에서도 이와 같이 열매 맺는 생활을 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요한 번연의 생활도 그렇습니다. 영국에서 청교도들을 핍박할 때에 복음을 전파했다고 번연을 감옥에 집어넣어 억울하게 12년 동안이나 갇혀 있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 같으면 거기서 썩는 생활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 번연은 썩은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은혜를 받고「천로역정」이라는 불후의 저서를 남기게 되었습니다. 그는 어려움 가운데서 창조적인 생활을 한 것입니다.
우리가 사실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면 어떠한 환경에서든지 창조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역경이나 실패, 질병이나 고통이 문제가 아니라 이와 같은 자료를 가지고 어떻게 위대한 작품을 만들 수 있는가가 문제입니다. 얼마전에 부산에서 청년들의 모임이 있어서 내려갔었는데, 어느 청년이 “목사님은 어려운 자리에 있을 때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구나 하고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물론 다른 사람들이 볼 때 하나님이 저를 버리셨다고 생각할 수 있을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와같은 조건을 가지고 어떻게 하나님이 나를 좋은 길로 인도하시려나 하는 생각으로 기다리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럴 때 지각밖에 넘치는 좋은 길로 인도해 주심을 체험했습니다.” 이것은 저의 대답만이 아니라 주 안에 사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대답일 것이라고 믿습니다.
요셉의 생애를 보아도 그랬습니다. 모든 서러운 사정, 억울한 사정, 고통스러운 사정, 이것이 우리가 받는 재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는 이것을 가지고 무엇을 해 보아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든지 우리에게 창조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도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의 생활을 할 수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