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두 형제의 야행
기차에서 내리는 김범우의 시야에 고깔 모양의 첨산이 제일 먼저 들어왔다. 언제 보아도 단아하고 말쑥한 그 모습이 맑고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유난히 선명하게 가까워 보였다.
아아...... 김범우는 어떤 아늑함과 따스함과 편안함, 그런 것들이 고루 섞인 감정의 흔들림을 느끼며 한껏 숨을 들이켰다. 그건 고향을 떠났다가 돌아올 때만 느낄 수 있는 형용하기 어려운 감정의 파장이었다. 그는 숨을 들이켤 때 스르르 감겨진 눈을 그대로 감은 채 숨을 토해내며 고향의 냄새를 음미하고 있었다. 갯내음과 땅내음이 어우러진 그 미묘한 냄새도 고향만이 주는 특이한 냄새였다. 그 냄새 속에는 이상하게도 바람에 갈대잎 쓸리는 소리, 기러기 울음소리 같은 것도 섞여 있는 듯 느껴지기도 했다. 분명 갯가이면서도 포구가 한정도 없이 길어 정작 바다는 멀리 밀쳐두고, 민물줄기를 따라 올라가면 반원을 그린 산줄기에 그넓은 낙안벌을 품고 있는 고향은 언제나 두 가지 정취를 함께 느끼게 하는 풍광 아름다운 곳이었다. 숨을 들이켰다가 내쉬는 그 짧은 시간만은 머리속을 깨끗하게 비울 수가 있었다.
아버지가 입원을 했다는 사실까지도.
끼룩, 끼룩, 끼룩...... 기러기떼의 맑은 울음소리가 피아노의 높은음 건반을 빠르게 두들기는 것처럼 섞바뀌며 들려왔다. 김범우는 습관적으로 왼쪽 포구의 하늘로 눈길을 던졌다. 언제나 정연하게 줄서서 나는 깔끔한 기러기떼의 모습이 먼 거기에 있었다. 아, 벌써......감정의 여울이 일었고, 그것이 뒤늦은 감상이라는 것을 깨달으며 김범우는 혼자 멋적게 웃었다. 십일월 상순이면 기러기가 먼길을 날아와 갈밭에 깃을 친지도 한 달이었다. 사람만 크게 보이고,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사건들은 더 크게 보이는 도시에서 비비적거리다 보니 계절의 바뀜을 마음에 담을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역을 벗어난 김범우의 발길은 빨라지기 시작했다. 차부를 지나 평소에는 별로 다니지 않는 샛길로 접어들었다. 한 걸음이라도 더 빨리 병원으로 가려는 서두름이었다. 그는 아버지가 입원했다는 전보를 받고 내려오는 길이었다. 전보는 으레 좋은 일보다는 궂은 일에 사용되는 빈도수가 많았고, 그럴 경우 그것은 터무니없이 냉정하고 거만하게 마련이었다. 그가 받아든 전보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부친급입원급래요망모' 살점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골격만으로 된 인체도와 같은 열 개의 글자. 그 생략될 대로 생략되어 버린 열 개의 글자 중에 두 개나 들어 있는 '급'자는 사람을 턱없이 허둥거리게 만들어 기차로 떠밀어 넣었고, 아홉시간이나 넘게 걸리는 기차는 전보 내용을 곱씹고 곱씹으며 온갖 불길한 생각을 지칠 때까지 할 수 있도록 지겹게 긴 시간을 제공했던 것이다.
"어찌 되셨습니까?" 김범우는 전 원장을 보자마자 인사를 차릴 겨를도 없이 이렇게 물었다. "김 선생, 오랜만입니다." 전 원장은 언제나 식물적인 느낌의 안온하고 순박한 얼굴에 웃음을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김범우는 그 손을 잡으며 전보 내용이 과장되었거나, 아니면그 동안에 어떤 위기를 넘기게 되었을 거라고 직감했다. "걱정 마세요, 무사하십니다." 전원장이 눈짓으로 입원실 쪽을 가리켰다. "감사합니다. 저는 일 당하는 줄 알았습니다." 김범우는 비로소 웃음을 지었다.
"앉으십시다. 주무실지 모르니까 간호원보고 다녀오게 하죠." 전 원장은 자리를 권하고는, "아마 급체를 하셨던 모양입니다. 노쇠로 체력이 약하신 데다 급체를 하고 보니 호흡곤란이 겹쳐져서 한때 당황하기도 했었어요. 원체 어르신께서 정신력이 강건하셔서 무사히 고빌 넘기셨습니다." 경과를 설명하고 나서, 간호원을 불러 입원실을 살피고 오라고 지시했다.
"원장님 의술이 저희 집안을 구해주셨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김범우는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하고 담뱃갑을 꺼냈다. "아닙니다, 제 의술이 변변찮아 김 선생을 이렇게 내려오게 만들었는 걸요. 그런데, 서울생활 재미는 어떠십니까?" 전 원장이 쑥스러워하며 화제를 바꾸었다. "글쎄요, 여기 있을 때는 신문만 가지고는 세상 돌아가는 것을 제대로 알 수가 없어 뭔가 답답하고 궁금하고 그래서 서울 가면 그런 마음이 풀릴 줄 알았는데, 정작 서울에 가서 보니 잔뜩 어수선하고 소란스럽고 한 게 복잡하기만 합니다 여긴 그동안 별일 없었습니까?" "웬걸요, 정신을 차릴 수가 없도록 날마다 사건이 터지고 있어요. 농지개혁법이 공포되고 난 다음부터 일정 때 소작쟁의보다 더 심하게 소작인들이 들고 일어나고 있습니다. 여기 벌교만이 아니라 곳곳에서 일어나는데, 일정 때야 사람이 죽는 일까지야 없었지 않아요." "누가 죽기라도 했습니까?" 김범우는 담배를 입으로 가져가려다 말고 눈을 크게 떴다.
"예, 술도가 하던 정 사장이 얼마전에 소작인들 낫에 찍혀 죽었습니다." "정현동씨가요?" 김범우의 뇌리에는 정현동과 정하섭이 동시에 떠올랐다. 전 원장은 정현동이 죽게 된 경위를 소문으로 귀동냥한 그대로 전했다. 김범우는 한참을 고개를 끄덕이고 앉았다가 불쑥 말했다.
"그 사람, 죽을 짓을 했군요. 죽음을 자초했어요." "내 생각에도 그분이 너무 과욕을 부렸던것 같아요. 그나저나 세상이 이렇게 반으로 갈라져 다투다간 무슨 큰일이 벌어지게 생겼어요. 농지개혁법을 새로 바꾸든지, 지주들의 그런 행동을 법으로 단속하든지 해야지, 소작인들을 나쁘다고 할 수가 없는 형편 아닙니까."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는 소작인들이 나쁠 리가 없지요. 그렇다고 정부가 법을 바꿀 리도 없고, 지주들이 그런 못된 짓을 멈출 리도 없고요." 김범우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럼 세상이 어찌 돼가겠어요. 소작인들은 점점 한덩어리가 돼가면서 거칠어지고 있는데." "지주들 편에 선 정부는 끄떡도 안합니다. 군인이나 경찰이 있는데 소작인들 정도 무서워할 리가 있습니까." "실제 형편은 그렇지가 않은데두요." "정치하는 자들이 깨닫지 못하는 한, 아닙니다. 알면서도 억눌러대면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한 도리없는 일입니다. 전국적으로 소작인들 난리가 일어나고, 정부가 엎어져야만 해결될 일입니다. 내란은 괜히 일어나는 게 아닙니다. 지금 정치하는 꼴은 내란을 조장하고있는 거나 마찬가집니다. 갑오난이 괜히 일어난 게 아니 듯이 이대로 가다간 또 그런 농민난리가 일어나게 돼 있습니다. 그때는 동학사상이 농민들을 일으키는 불씨가 됐고, 이번에는 공산주의가 불씨가 되는 것만 다를 뿐이겠죠." "나 같은 사람 생각으로도 안 될 일을 정치하는 사람들이 범하다니, 이거 참 큰일날 일입니다." 전 원장은 불안스런 안색으로 손 바닥을 맞비볐다.
"저어 원장님, 방금 잠에서 깨셨습니다." 간호원이 두 손을 흰 가운 앞에 모으며 말했다.
"응, 수고했어요. 김 선생, 가보실까요?" 전 원장을 따라 김범우도 일어섰다. 실금이 간 백자항아리에는 작년처럼 송이가 작은 보라빛 들국화들이 구름덩이처럼 풍성하게 꽂혀 있었다.
"어르신, 접니다. 서울에서 둘째아드님이 내려왔습니다." 전 원장이 나직하게 말하며 일본식 문을 옆으로 밀었다. "아닙니다. 그대로 눠계십시요." 전 원장이 팔을 들며 말했고, 그 겨드랑이 사이로 몸을 일으키려는 아버지의 모습이 김범우의 눈에 들어왔다. "아버님, 그냥 계십시오. 접니다." 김범우는 아버지 앞에 무릎끓어 앉으며 말했다. "그래, 먼 길 멀라고 이리왔냐." 일어나기를 작파한 김사용은 아들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김범우는 아버지의 모습을 대하는 순간 가슴이 섬뜩해지는 긴장을 느꼈다. 여윌대로 여윈 아버지는 전혀 딴 모습을 하고 있었다. 살이라고는 없는 얼굴에 저승꽃이 부쩍 늘어나 있었다. 정말 일당할 뻔했다는 것을 다시 느껴야 했다.
"전 원장님한테 경과는 들었습니다. 좀 어떠신지요." "이만허먼 다 나았다. 전 원장님이 큰 애럴 쓰시고 말고. 그래, 공부는 어찌 자리가 잽혔냐?" "예에, 그냥 그만합니다." 김범우는 이 짧은 대답이 목에 가시로 걸려 쉽게 나오지가 않았다. 이학송의 알선으로 통신사에 나가기 시작한 것이 벌써 두 달 가까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 세상이 이리 갈피를 못 잡게 어지러울수록 짖중해야 하니라. 니, 어무니는 뵈었냐?" "아닙니다, 역에서 바로 이리 왔습니다." "되었다, 날 봤으니 인자 어무니 가서 뵈어라.니럴 봐야 맘을 놀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 아버지의 얼굴에 희미한 웃음이 스치는 걸 김범우는 보았다. 그 웃음이 아버지의 안도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이들 커나는 것이 오뉴월 하루볕 다르고, 노인네 기력 쇠하는 것이 하룻밤 새 다르다는 말을 김범우는 실감하지 않을수 없었다.
"어여 가봐, 어무니 애탄다." "예에, 그럼 일어나겠습니다." 김범우는 두 팔로 방바닥을 밀며 느리게 몸을 일으켰다. 가슴에 가득한 우수가 몸을 무겁게 눌렀다. "어르신, 마음 편히잡수시고, 잠이 오는 대로 많이 주무십시오. 회복에는 잠이 약보다 훨씬 좋습니다." 전 원장이 요 밑에 손을 넣어보고 일어섰다.
"아버님이 어디 다른 데 이상이 있으신 건 아닙니까?" 긴 마루를 걸으며 김범우가 물었다. "이번 기회에 진찰을 다 해봤는데, 그런 것 같진 않았어요. 워낙 연세가 많으셔서 체력저하가 심하신 거지요." 김범우는 더 할 말이 없었다. 노쇠현상은 의술의 능력 밖이었다. 생명 있는 모든 것이 피할 도리가 없는 자연법칙이었다. 그것이 아무리 거역할 수 없는 자연의 힘이라 하더라도 김범우는 감정적으로 강한 거부를 느끼고 있었다. 그것이 육친의 정에 따른 부질없는 감정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김범우는 아버지의 발병과 치료경과에 대해서 한 시간 남짓 어머니에게 세세하게 들었다.
여자로서 과묵한 편인 어머니가 그리도 이야기가 긴 것은 그만큼 충격이 컸다는 증거였다.
김범우가 손발을 씻고 잠시 자리에 누우려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의외로 경찰서장 권병제였다. "예, 오랜만입니다, 권 서장님. 헌데, 제가 온 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아 예에, 경찰서장쯤 돼가지고 그걸 몰라서야 되겠습니까?" 권 서장의 웃음기 섞은 농담이었다. "허, 정보망이 읍내에 쫙 깔렸다는 애긴데, 그거 별로 기분좋은 일 아닌데요. 전화, 어쩐 일이십니까?" "예, 죄송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계엄사령관이 잠깐 뵜으면 하는군요." "저를요? 용건이뭔가요?" 김범우는 순간적으로 거부감을 느꼈다. "글쎄요, 제가 그걸 미리 물었는데도 말을 안하는군요. 김 선생이 오셨다는 것도 실은 거기서 먼저 알고 있었습니다. 이건 순전히 제 예측인데, 누가 김 선생과 손 선생 관곌 알려주고, 손 선생이 서울 김 선생한테 가 있는지도모른다고 귀뜀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일면식도 없는 김 선생을 무조건 만나자고 할 이유가 없는 일이거든요." "아니, 손승호가 뭘 어쨌다는 겁니까? 그 사람한테 무슨 일 생겼습니까?" 김범우는 권 서장한테까지 야무지게 시침을 뗄 필요를 느꼈다. "아 예,그럴 일이 좀 있었습니다. 김 선생은 전혀 모르시고 계시군요." 권 서장은 자신의 말을 믿는어투였다. 김범우는 다소 미안한 생각이 들었지만 그의 직책상 그것이 오히려 낫다고 생각했다. "아까 말씀하신 걸 보니 손승호가 여기 없는 것 같은데, 무슨 일입니까?" 못을 치기위해 재차 물었다. "아닙니다, 전화로 말씀드리긴 좀 곤란하구요, 어떻게, 좀 나와주시겠습니까?" "글쎄요, 제가 전연 알지도 못하는 일에 조사를 받으러 나가는 건 좀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조사 협조라면 그쪽에서 절 찾아와야 절차에 맞는 공무집행 태도고요." "김 선생님, 아까 말씀드린 대로 그건 순전히 제 추측일 뿐이구요,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으니까 절 만나신다 생각하시고 잠시 나와 주십시오. 심재모 사령관님 소식도 자세히 좀 들을 겸, 저도 김 선생을 뵙고 싶습니다. 어떻게, 절 좀 도와주십시오." 김범우는 심재모라는 말에 그만마음을 굽히고 말았다. "알겠습니다, 나가도록 하지요." 김범우는 전화를 끊으며 염상구의 얼굴을 지울 수가 없었다. 권 서장의 추측이 맞는다면, 그런 식의 제보를 할 수 있는 건 염상구 뿐이었던 것이다.
"혹시 서울에 손승호란 자의 은신처를 제공하고 있는 거 아닙니까?" 형식적인 인사가 끝나자마자 백남식이 대뜸 던진 말이었다. 수사관의 입장에서 완전한 혐의자를 다루는 태도였다. "그게 갑자기 무슨 말입니까?" 김범우는 백남식의 눈길을 맞쏘아보고 반문했다.
이런 식으로 시작된 백남식과의 대화는 끝내 기분이 언짢게 끝이났다. 손승호가 자취를 감춘 되로 백남식은 그를 위장전향한 빨갱이로 못박고 있었으므로 김범우를 곱게 대할 리가 없었고, 김범우 또한 서민영 선생을 통해서 백남식의 됨됨이를 다 들은 터라 태도가 좋을리 없었던 것이다. "빨갱이 은닉죄는 빨갱이와 똑같이 취급한다는 걸 아시오!" "그 정도야 자알 알고 있으니 걱정 마시오." 두 사람의 대화는 이렇게 끝났다.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마세요. 성질이 좀 그렇습니다." 권 서장이 정문을 나서며 말했다.
"그건 성질이 아니라 일본놈 장교 그대롭니다. 관동군에서 독립군등에 총질이나 하던 저런놈들이 장교라고 드글대며 판을 치고 있으니 원." 김범우는 말을 중단하고 말았다. 권 서장의 전력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그만 들어가시지요." "바쁘시잖으면 저기 다방에 가서 차나 한잔 하실까요?" 권 서장이 어색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김범우는 웃음으로 대답해 보였다. "저 백 사령관이 요새 신경이 날카로와져 있습니다. 여기 와서 얼마 안 되는 동안 끝없이 사건이 터졌고, 그 중에는 상부의 문책을 받은 일도 있는 데다 요새는 지주들 등쌀에 성질이 날 대로 나 있습니다." 걸어가면서 권 서장이 말했다. "지주들이 뭘 어쩝니까?" "양조장하던 정현동씨가 소작인들한테 살해된 사건이 있었는데, 그 사건 뒤로 지주들이 좌익척결위원횐가 뭔가로 뭉쳐가지고, 소작인들을 가차없이 다뤄라, 율어에서 당장 빨갱이를 몰아내라, 요구사항인지 압력인지가 대단합니다." "자기들도 당할까봐 몸들이 달았군요." "참 중간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입장입니다." 권 서장은 다방에 자리를 잡고 앉자 심재모에 대해서 물었다. "별일 없이 풀려난 것은 아시겠고, 그 뒤에 그러니까, 단양으로 떠나기 직전에 만나 술을 한잔 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벌교의 잊을 수 없는 기억들을 얘기했는데, 서장님을 '점잖았던 권 서장님'이라고 말하며 그리워하더군요. 그뒤론 소식이없었습니다. 아마 새 근무지에서 일이 바쁜 모양이지요." "제가 점잖긴요, 점잖기로 하자면 그분이 나이에 비해 점잖았고, 생각도 깊었지요. 단양이라면 거기가 태백산지구니까 여기 지리산지구와 똑같이 위험지구로군요. 결국 그 일로 그렇게 밀린 것이겠지요." 권 서장이 침울하게 말했다.
"대대적인 동계토벌작전을 개시한다 어쩐다 하는 소문인데, 어찌 될 것 같습니까?" "그게 좌익들을 상대로 한 심리전만은 아닐 겁니다. 징병의무제에 따른 징병검사가 아마 곧 실시될 모양이고, 그렇게 되면 병력보충이 지금과는 완전히 달라지니까 대대적인 작전이 가능하지요. 벌써 제주도 병력이 이동해서 지리산 일대에 투입되고 있습니다. 좌익들은 겨울이라는 악조건에다가 증강된 병력의 공격을 받게 되면 오래 견디지는 못할 겁니다." "그렇겠군요. 제가 좀 피곤해서......" "아 예, 가시지요. 제가 너무 죄송스럽기도 하고, 반갑기도 하고 해서 그만......" 두 사람은 경찰서 앞에서 헤어졌다.
김범우는 집으로 가면서, 오래 견디지는 못할 겁니다, 한 권 서장의 말이 곱씹히고 있었다. 그럼 염상진이고 안창민이고 이번 겨울에 죽어가게 될 거란 말인가. 만약 그들이 죽으면어찌 되나...... 김범우는 소름이 끼치는 걸 느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염상구는 그들이 다방에서 나와 헤어질 때까지 가게 안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김범우 저것이 암것도 몰르드라는디, 백남식이 그 빙신이 필경 김범우 수에 놀아나뿐 것일 끼여. 김범우 저것이 눈치 빨르고 대그빡 핑핑 돌아가는 백여신디, 백남식 지가 소리나 빠락빠락 질르고 주먹질이나 헐지 알었지 김범우 저것을 워찌 다루겄어. 나만 헛지랄 헌것이제. 김범우 저것이 틀림웂이 손승호 그눔얼 끼고 있을껴. 글안허먼, 머리크락 빼갖고 지 구녕에 도로 박을 손승호 그 촌눔이 워디 가서 멀 묵음시로 요리 오래 견디겄어. 나가 저눔 뒤럴 볿아 서울로 치고 올라가 뿌러? 염상구는 아무래도 마음이 개운하지가 않았다.
염상구는 차부에 배치해놓은 부하한테서 김범우가 돌아왔다는 보고를 받았던 것이다. 그 보고를 받는 순간 손승호가 김범우한테 피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쳐갔다. 그래서 바로 백남식에게 전화를 걸었던 것이다. 마침내 자기 능력을 인정받을 만한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면서. 그런데 김범우는 미꾸라지처럼 백남식의 손아귀를 빠져나가고 만 것이다.
"어이, 담배 한 겁 내." 염상구가 소리치며 팔을 뒤로 뻗쳤고, 주인여자가 서두르는 몸짓으로 담배를 가져다가 그 손에 쥐여주었다. 염상구는 돈도 안 내고 가게문을 밀치고 나갔다.
"썩을눔, 지리산 호랭이는 멀 묵고 사는고." 두꺼운 입술을 오무려 붙이며 주인여자가 눈을째지라고 흘겨댔다.
별들이 초롱초롱했다. 두 개의 그림자가 소리없이 담을 넘었다. 짙게 드리운 어둠 속 어디에선가 벌레우는 소리가 차갑게 흐르고 있었다. 두 그림자가 어둠을 헤치며 뒤란을 돌아가고 있었다. 멀리서 개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림자가 처마 밑을 따라 빠르게 움직였다.
가까이서 아기 우는 소리가 카랑했다. 그림자가 토방으로 성큼성큼 올라섰다. 그림자 하나가왼쪽방을 손가락질했다. 다른 그림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그림자가 마루로 올라섰다. 마루가 가늘게 신음했다. 두 그림자가 다급하게 벽으로 붙어섰다. "거, 거그, 뉘, 뉘기여!" 겁에 질린 늙은 여자의 목소리가 삐어져 나왔다. 벽에 붙은 두 그림자가 꼼짝을 하지 않았다. "거그, 바깥에 누구냐니께?" 여자의 목소리가 조금 더 분명해지고 커졌다. "니가 저 노친네 맡어라." 그림자 하나가 성급하게 속삭였다. "워쩌게라." 다른 그림자가 대답했다. "가서 주딩이 틀어막어." 그때였다. "상구야, 일나그라아!" 늙은 여자의 통곡 같은 외침이 터져나왔다.
그와 함께 두 그림자가 방문 하나씩을 걷어찼다. 그리고 총성이 울리기 시작했다. 느닷없이 어둠을 찢어댄 총소리가 이내 뚝 끊어졌다. 여자의 방문은 걷어찼던 그림자가 허둥지둥 옆방으로 옮겨갔다. 어둠에 익은 그의 눈에 두 사람이 쓰러져 있는 것이 금방 들어왔다. "성님, 성님, 정신채리씨요." 그는 문 가까이에 쓰러진 사람을 흔들었다. "저눔이 꼬꾸라짐스러 나럴 쐈다...... 저눔이 뒤졌응게...... 인자 되얐다......" "성님, 싸게 일나씨요, 총소리 냈응께 순사덜이 금방 쫓아올 것이오." 그는 쓰러진 사람을 일으켜 세우며 숨을 몰아 쉬었다. "나넌 가심얼 맞았응게...... 니나, 니나 가아...... 나 총도 갖고......" 그가 몸을 떠받쳤지만 쓰러진 사람은 몸을 가누지 못한 채 숨을 헉헉댔다. "금메 성님, 기운채리씨요. 안창민 동무 생각허고 기운만 채리먼 사요. 업히씨요, 일로 업히씨요." 그는 총 두 자루를 한쪽 어깨에 몰아서 맨채 총맞은 사람을 들쳐업었다. 그리고 고샅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벽에 붙어서서 밖의 동정을 살피고 있던 호산댁은 그림자가 사립을 나가는 것을 보고야 아들방으로 내달았다. 등잔불을 밝히자 배를 웅켜잡은 아들이 모로 쓰러져 있었다. "상구야,상구야!" 호산댁은 아들에게로 달려들었다. "워메, 요 피!" 호산댁은 질겁을 했다. 배를 웅켜잡고 있는 아들의 두 손은 피범벅이었고, 방바닥에도 피가 흥건하게 고여 있었다. "어엄니, 마당에다 싸게 불피우씨요, 불. 군인들이 여근지 알게 싸게싸게 마당에 불피우씨요." 눈을 치뜬 염상구가 빠득빠득 이빨을 갈며 말했다. "인냐, 알었다." 호산댁은 맨발로 마루를 뛰어내려 헛간으로 달려갔다. 짚단을 한아름 안고 나와 마당 가운데다 내던졌다. 그리고 아들방으로 뛰어들어 성냥을 가지고 나왔다. 그 동작은 번개치듯이 빨랐다. 짚단에 불이 붙으며 마당이 금방 환해졌다. 호산댁은 연상 짚단을 날라다가 불길을 키우고 있었다.
염상구는 흐려져가는 의식 속에서 마당의 불길이 방에까지 미치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문이 박살나면서 잠이 깬 그는 머리맡의 권총을 집어들었고, 눈에서 불이 번쩍 튀기는 것을 느끼며 그림자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던 것이다. 그리고 쓰러졌는데 또 하나가 방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손에 권총이 들려 있지 않다는 것을 그때서야 알았다. 배가 찢어져나가는 고통속에서도 손에 권총만 들려 있으면 새로 들어온 놈을 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디에 떨어졌는지 모를 권총을 찾아 몸을 움직일 수는 없었다. 상대방이 먼저 총질을 해버릴 것이었다. 죽은 듯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배를 웅켜잡은 채 신음소리가 새나지않게 이빨을 응등물었던 것이다.
여럿이서 뛰는 구둣발 소리가 고샅을 울려왔다. 짚단을 풀어 거센 불길 속에 던지고 있던 호산댁은 사립으로 달려가며 소리쳤다. "여그요, 여그!" "무슨 일이요, 무슨 일!" 군인들이 마당으로 뛰어들었다. "우리 아덜이 청년단 감찰부장 염상구요. 총맞고 방에 나자빠져 있는디 싸게 병원으로 델다주씨요. 피럴 철철 흘리고 있소." 호산댁은 방을 가리키고, 군인들을 쳐다보고 하며 정신이 없었다. "야, 너희들 네 명, 부상잘 빨리 병원으로 옮기고," 강 상사가 신속하게 부하들을 지목하고는, "아주머니, 그놈들이 몇이고, 어디로 도망 갔습니까?" 호산댁 앞으로 다가서며 물었다. "둘이었는디 쩌그 저 산얼 탔겄제라." 호산댁은 어둠 속에 가뭇없이 묻힌 부용산 쪽을 손가락질하고는 부리나케 돌아섰다.
강동기는 부용산 자락을 타고 홍태거리께의 뒷산에 이를러 뒤따라 오는 총소리를 들었다.
총소리를 듣게 되자 새로운 기운으로 어둠을 헤쳐나갔다. 등에 엎힌 형은 부용산을 벗어나기도 전에 이미 숨이 끊어졌다. "나가, 나가 이리 죽을란 거이...... 아닌디...... 대장님헌티......대장님헌티......" 그리고 숨을 거두었다. 땅이 끌어당기는 것이었을까, 아니면 편히 누워 죽으려는 것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면 자기를 버려두고 가라는 뜻이었을까, 숨을 거두기 직전에 형은 이상스런 소리를 내며 버둥거렸다. 마음은 율어로 치닫고 있으면서도 형을 내려놓을수 밖에 없었다. 숨을 거두자 한결 무거워진 형을 다시 업은 강동기는 눈을 부릅뜨며 율어쪽으로만 기를 쓰며 걸었다.
"혁명전사에게는 목숨을 아까와하지 않는 용맹스러운 투쟁 외에도 절대적으로 지켜야 하는 두 사지 사항이 있다. 첫째는 동지의 목숨은 바로 내 목숨이므로 서로 서로 아끼고 받들어 동지애를 키워야 한다. 평소에 사소한 개인적 문제로 다투는 것, 뒤에서 흉보고 헐뜯는것, 특히 투쟁 중에 전사한 동지를 적진에 버리고 오는 것, 이런 것은 절대로 용서될 수 없는 일이다. 전사한 동지의 시체는 반드시 옮겨다가 우리 손으로 장사지내야 한다. 만약 거리상으로 너무 멀거나, 적의 추격이 다급한 경우 같은 때는 적당한 자리를 골라 매장시켜 주어야 한다. 둘째는 총을 내 생명과 똑같이 귀하게 보존해야 한다. 평소에 총을 함부로 다루는 것, 총을 잃어버리는 것, 특히 자기 총이 아니라고 적진에 총을 버리는 것, 이런 것도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총을 적에게 한 자루 넘겨주는 것은 하나가 아니라 네 자루를 넘겨주는 것이 된다. 왜 그런가하면, 적은 전부가 총으로 무장을 했는데 우린 반에 반 정도밖에 무장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염상진 대장이 학습 때마다 강조한 가르침이었다. 그 가르침이 아니었더라도 강동기는 형의 시체를 차마 적진에 버리고 갈 수는 없었다. 시체가 적의 수중에 들어가면 형은 보나마나 또 거적 위에 눕혀져 역 앞마당이나 장터거리 빈터에서 며칠이고 구경거리가 될 것이었다. 그건 형을 두 번 죽게 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형수에게 그 꼴을 보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지곡리에 이르렀을 즈음에야 뒤를 쫓아오던 총소리가 사라졌다. 총소리가 들리지 않자 강동기는 몸이 허물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시체의 무게에 눌리며 주저 앉았다. 온몸이 땀으로 젖어 있었고, 목이 찢어지는 것처럼 갈증이 심했다. 그는 물소리를 따라 엉금엉금 기었다. 자신이 주저앉은 것은 총소리가 그쳐서가 아니라 물소리를 들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했다. 개울에 얼굴을 박고 물을 들이켰다. 한번이 아니라 서너번을 들이켜고 나서야 그는 긴 한숨을 토해냈다. 비로소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그는 무심결에 주머니를 더듬었다. 그러나 쌈지가 잡히는 순간 담배를 피워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야간 활동시에 담배를 피우는 것은, 나를 죽여주시오, 하는 것과 똑같은 일이다. 담배를 잡는 그 손가락을 깨물어라. 피가 나도록 깨물어라." 그리고 또 떠오르는 말이 있었다. "추격을 당하면서 총소리가 그쳤다고 해서 방심하면 절대 안 된다. 방심하고 쉬는 사이에 적에게 포위당하거나, 기습당한다. 완전히 안전지대에 들어서기 전에는 계속 걸어야 한다. 오분 쉬는 동안 적은 코앞으로 들이닥친다." 강동기는 벌떡 일어섰다. 안전지대까지는 아직 멀었다. 산을 두개는 더 돌아야 했다. 그는 벌써 뻣뻣한 느낌뿐인 형을 들쳐업었다.
그가 백동 마을의 임시초소에 다다른 것은 닭이 울고도 한참이나 지난, 날이 희번하게 밝아올 무렵이었다. "누구냐, 서라!" "까마구, 까마구......" 강동기는 있는 힘을 다 짜내 암호를 대고는 혀를 빼문 채 피그르르 쓰러져버렸다. 그의 등에서 시체가 먼저 땅으로 굴러 떨어졌다.
호산댁은 병원 진찰실 구석에 조그맣게 옹송그리고 앉아 있었다. 밤새워 한 수술이 진작끝났고,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것 같다는 의사의 말을 들었으면서도 호산댁은 한자리를 그렇게 줄기차게 지키고 있었다. 생명에 지장이 없을 것 같다고는 했지만 아들은 아직 정신이 깨나지 않고 있는데 호산댁으로서는 발을 한 걸음도 병원 밖으로 내놓을 수가 없었다. 정신이 든 아들 얼굴을 직접 보지 않고서는 병원을 뜨지 않을 작정을 하고 있었다. "할무니, 가서 아침 잡수고 오세요." 간호원이 소독기를 들여다보고 돌아서다가 말했다. "일 웂어." 호산댁은 마룻바닥만 내려다본 채 대꾸했다. "다녀오셔도 상관없어요. 깨날려면 아직도 한참 걸릴 거니께요." "일 웂다니께." "차암, 그럼 여기서 저하고 함께 식사를 좀 하세요." "나 배 하나또 안 고프시. 말이나 씹혀쌓지 말소." 간호원은 그만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돌아섰다.
신령님이 살피시니라고 총알이 창시 하나 안 건디리고 피해갔제. 항, 저것이 워쩐 자석인디. 저것을 뱄을 적에 희연헌 도야지 꿈얼 꿨는디, 고것이 워디 예사 꿈이간디. 자석 많이낳고, 묵을 것 안 기룹게 부자로 살 길몽 중에 길몽이었제. 워디 그뿐이간디. 껌댕이 도야지도 태몽으로는 치는디, 거그다가 희연헌 도야지가 아니었능감. 고것이 유명허게도 된다는 뜻인디, 신령님이 태와준 고런 기맥힌 태몽 타고난 내 자석얼 총알이 워찌 안 피해갈 것이여.
안직 장개도 못 가고, 태몽대로 되자먼 당아당아 멀었는디, 총알이 지가 안 피해가고 워쩌겄어. 호산댁은 수십 번 되풀이한 생각을 또 하고 있었다. 총알이 왼쪽 옆구리를 뚫고 나갔는데 다행히 내장은 하나도 다치지 않아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것 같다고 수술을 끝내고 난 의사가 말했다. 호산댁은 그 아슬아슬함에 한동안 진저리치지 않을 수 없었다. 총알이 한두 치 더 안쪽으로 박히고, 내장을 상하게 했더라면......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벌떡거리고 전신으로찬바람이 휘돌았다. 그러다가 문득 태몽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러자 그 아슬아슬함은 요행수가 아니라 신령님의 보살핌이라고 여겨지면서 마음의 안정을 찾게 되었다.
잉, 그려도 저것이 시상얼 헛살은 것이 아니여. 청년단이란 것이 순전허니 왈패덜 모자리판이고 사람 못된 것덜 집합손지 알었등마 요분참에 보니께 고것이 아니여. 즈그 오야붕이 총맞었다니께 그 밤중에 벌떼맹키로 뫼드는 것허고, 피가 모질랜다니께 니도 나도 폴 걷어부치고 서로 피뽑겄다고 나서는디, 그 젊은 것덜이 그런 의리 안 보였음사 수술이 워찌 됐을 것이여. 젊은 것덜 의리도 고맙제만, 다 지가 인심사게 오야붕 노릇 혔으니께 밑에서도 그런 의리 부리는 것 아니겄어. 항시 불화로 곁에 둔 아그맹키고, 물가에 세운 철웂는 것 같등마 다 지 앞감당 혀감스로 또록또록허니 산 것이랑께.
염상구가 총을 맞았다는 사실을 민간인으로서 제일 먼저 안 것은 외서댁이었다. 한밤중에 들이닥친 군인과 경찰들에게 외서댁은 속곳 바람으로 끌려 나왔고, 집안을 샅샅이 뒤짐 당해야 했다. "니 남편 강동식이 어딨어." "무신 소리다요, 그림자도 안 비쳤는디라." 외서댁은 눈물이 배도록 눈이 부신 전지불빛이 쏟아지는 속에서 한사코 배를 가리려고 애썼다. 부풀어오를 대로 부풀어오른 만삭의 배는 속곳바람이라 하나도 감춰지지 않고 그대로 드러나고있었다. "그 새끼가 초저녁에 여기 왔었지." "아니구만이라, 아니어라." 외서댁은 머리까지 홰홰 저었다. "바른대로 말해, 당하기 전에." 어떤 손이 머리채를 낚아챘다. "그 남정네 본지가 원제라고라. 안 왔응께 안 왔다고 허는디 왜 이래쌓소." 외서댁의 목소리가 메어들었다.
"그 새끼가 틀림없겠지?" 손이 외서댁의 머리채를 놓으며 누구에겐가 말했다. "염상구가 병원으로 실려가면서 강동식이라고 했다니까 틀림없겠지." "여긴 발길을 안한 것 같은데, 어떻게 하지?" "글쎄에, 염상구는 총상이 어느 정돈가? 살아날 가망은 있는가?" "배에 맞은 모양인데, 두고 봐야지. 근데, 여기다 두어 명 잠복시키면 어떨까? 만일을 위해서." "그게 좋겠군. 그리 허세." 남편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총을 겨누고 있는 두 사람을 밖에다 둔 외서댁은 방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그녀가 밤새도록 되풀이한 소리는, 지발 오지 마씨오, 뒤져뿌러라 칵 뒤져뿌러라, 두 가지였다.
날이 밝아져 나가보니 잠복했던 사람들은 떠나고 없었다. 외서댁은 마음 같아서는 병원쪽으로 직접 나가 수소문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흉거리가 분명한 불러오른 배로 읍내 걸음을 할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그래서 동서를 찾아갔다.
"하먼이라, 핑허니 댕게오제라." 외서댁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남양댁은 흔쾌하게 대답하고는, "참말로 시아주버니가 질이시오. 성님 원수갚음 헐라고 그눔얼 쏴제킨 것인디, 서럽고 기맥힌 꼴 당혔드락도 고런 장헌 냄편 뫼셨으니 성님이사 을매나 좋겄소. 시상에나, 거그 읍내 안통이 을매나 험헌지 다 암스로도 원수갚음 헐라고 뛰들었시니, 시아주버니가 질이시오." 탄복을 거듭했다.
그러나 동서가 가지고 온 소식은 외서댁의 무릎을 꺾이게 했다. 그리고 나흘이 지나서 은밀하게 전해진 소식에 외서댁은 혼절을 하고 말았다.
김범우는 긴 나무의자에 앉아 기차표를 만지작거리며 아낙네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워쩌크름 배때지에다 총을 맞고도 안 뒤지고 살아났으꼬이." "금메, 원체로 악헌 인종이 명이 찔긴 법이랑께로. 고것이 한 방이 아니라 시 방을 맞고도 살아날 인종 아니드라고?" "아니시, 그 병원 원장님이 원체로 기술이 좋아논께 그 인종얼 살려낸 것이네. 거 장순경인가 먼가는 시 방을 맞었는디도 살려내는 판인디 그까징 거 한 방짜리야 식은죽 묵기아니겄어?" "옳여, 그 말이 옳여. 그 인종 살아난 것은 그 고진인 원장님 덕이시." "그 원장님은 너무 고진이라서 탈이랑께. 염가고 장 순경이고, 고런 인종덜헌테넌 기술을 써도 쪼깐썩만 쓰고 말어야는디, 판판이 살려논께로 씨언혀질라고 허든 우리 속이 요리 되갱기는 것아니겄능가." "워따, 누가 듣겄네웨. 말얼 참든지, 소리럴 살살허든지 허소." "나가 못헐 말허간디? 바로 뚫린 입 갖고 말이야 바로 혀야제." "바른말 허고 살 시상이 아닝께 허는 소리시." "좌우당간에 요분 일로 땅치고 통곡헐 사람언 원수갚자고 총질헌 그 남정네허고, 염가눔 새끼밴 그 사람 마누래, 둘이여. 우리야 다 배불른 소리 허는 것이고." "그리 따지자먼 그렇제. 근디, 술도가집 일로 잽혀들어간 사람덜 뒷 소식은 누가 들었능가?" "재판을 받아야 헌다니께 안직 알 사람이 있겄다고?" "다 살인죄인으로 몰아때레 넴게뿌렀으니 그 사람덜워찌 될라능고?" "살인죄인이야 재판받아봐야 사형 당헌다고 허든디, 그 열두 사람이 싹 다 사형받을랑가?" "고 무신 미친 소리여. 아무리 시상이 있는 눔덜 차지고, 즈그덜 맘때로 헌다 혀도 워쩌크름 한 목심허고 열두 목심허고 바꾸겄어." "누가 안당가, 부자 한 목심허고 작인 열두 목심허고 바꿀란지. 작인덜 기 뿐질러 놀라고 그리 헐란지도 누가 안당가." "금메, 그 말 듣고봉께 그럴 만도 허시. 글먼 그 사람덜 으쩌까?" "죽어야제 워째, 애초에 작인인 것이 죈께로." "참말로 드런 눔에 시상이여." "순천행 개찰이요오, 순천행!" 발뒤꿈치를 세운 데다 목까지 잡아늘인 역원이 대합실을 휘둘러보며 외치고 있었다. 김범우는 나무의자를 등으로 밀며 일어섰다. 네 명의 아낙네들은 언제 그런 얘기들을 했느냐 싶게 빠른 몸놀림으로 그를 앞질러갔다. 보퉁이를 하나씩 든 가난한 입성들이었다.
김범우도 누구보다 빠르게 염상구가 당한 소식을 알았던 것이다. 아버지 문안으로 매일 병원에 들나들며 그의 회복상태도 비교적 자세하게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김범우는 한번도 그의 병실을 들여다보지 않았다. 별로 내키지 않은 일인 데다가, 그의 병실 앞에는 인상이 그다지 좋아보이지 않는 청년들이 둘씩 서 있었던 것이다. 무슨 장한 일하다 당했다고, 하는 생각과 함께 거부감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럴 필요 없다고 해도 자기들 마음대로군요. 병원분위기 생각해서라도 빨리 회복했으면 좋겠어요." 언짢은 기색을 드러내는 전 원장의 말이었다. 퇴원을 하게 되면 그가 더 열렬한 반공주의자가 되리라는 점만은 명백했다. 선우진이나 서북 청년단원들처럼. 김범우는 씁쓰레하게 웃으며 기차에 올랐다.
법일 스님은 퇴원해 있었다. 그러나 엎드린 채로 김범우를 맞았다. 김범우가 서울에서 받은 편지에는, 집행유예로 나와서 병원에 입원중이라고 적혀 있었다. "아직도 불편하신 모양인데, 어디가......" 김범우는 법일 스님의 어깨를 살피며 물었다. "뭐, 다 나았어요. 지금 새살이 돋아나면서 아무는 상태니까 엎드려 있어야 한다고 의사 선생께서 어찌나 당부신지 이렇게 지내고 있지요. 이것도 득도고행 방법 중의 하나가 될 만하군요." 법일 스님은 전보다 많이 상한 얼굴에 여유있는 웃음을 지으며 그렇게 말했는데, 그건 엎드려 지내는 고통스러움에 대한 우회적 표현인 것을 김범우는 알아들었다. "혹시 둔부에 이상이 있으신 거 아닌가요?" "그리 됐어요. 그 무지스런 사람들이 터진 데가 아물 만하면 때려서 터쳐놓고, 아물 만하면 또 때려서 터치고 하는 데다, 날이 더워놓으니 그 자리가 덧나고 곪을 수밖에요. 그런데 거기다가 어느새 파리라는 놈이 쉬를 깔렸는지 썩어들어가는 살 속에 구더기가 끓기 시작한 거지요. 의사선생 말씀으로는 살이 깊어서 그런다는데, 이번에 내가 구더기들한테 생전처음으로 그야말로 육보시를 한 셈이지요." "그것 참 큰 고생하셨군요. 어깨는 어찌 되셨습니까?" 허벅지나 팔을 동여맨 붕대 속에서 구더기를 파내야 했던 미얀마 전선의 부상자들을 김범우는 떠올렸다. "어깨야 더 부러뜨리지 않았으니까 저절로 치료가 됐지요." 법일 스님이 스산한 느낌의 웃음을 지었다. "집행유예라서 기분이 좋지는 않습니다만 우선 그렇게라도 나오셔서 다행입니다." "바른 생각, 바른 말이면 다 죄가 되는 이런 아수라 지옥에서는 그럴수도 있어요. 내가 관직을 탐할 것도 아니고, 집행유예라고 기분이 나쁠 것도 없지요." "사찰 일은 어떻게 해결이 되었습니까? 앞으로 거취문제도......" "종교가 타락하면 자체의 자율적인 법을 버리고 세간법을 이용하거나 의탁하게 되는 법입니다. 농지개혁법이라는 것이 그 모양인데 사답을 작인들에게 그냥 넘겨줄 리가 없지요. 그리고 나는 집해유예를 선고받은 엄연한 죄인이니 더 이상 불문에 머무를 수 없다는 해석입니다. 그래서 내가 먼저 불문을 떠나기로 했습니다." "아니, 어찌 그럴 수가 있습니까!" 김범우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때 여자아이가 과일을 내왔다. "이것 좀 드시지요. 손님이 사오신 걸로 손님대접을 하는모양입니다." 법일 스님이 과일접시를 김범우 앞으로 밀어놓으며 또 스산하게 웃었다. "아무래도 그분들 처사가 좀 지나친 것 같습니다." "그게 아니라도 어차피 불문은 떠나야 할 형편에 와 있습니다. 나오자마자 보도연맹엔가 어딘가 가입하라고 저리도 강압이니, 그런 곳에 가입한 몸으로 가사장삼이야 걸칠 수 없는 노릇 아닌가요." "아니, 스님한테도 말입니까?" 김범우는 아연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손승호가 서울로 떠나오지 않을 수 없었던 상황을 다시 실감하는 기분이었다. "집권자들의 입장에서는 공산주의자들만 잡자는 것이 아니라 성가신 존재들까지 잡자는 목적하에 만든 법이니까 나 같은 사람한테도 그 혜택이 올 수밖에요.
그래서, 이건 아직 발설할 단계는 아닙니다만, 나와 가까운 신도 한 분이 비용을 대겠으니 연고 없는 곳으로 이사를 가라고 권하는데, 폐도 되고, 어찌 해야 좋을는지......" "스님, 떠나도록 하십시오. 어차피 불문도 떠나신 마당에 여기 더 머무실 이유는 없는 것 아닙니까. 제 생각으로는 떠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강압 때문이라 하더라도 일단 거기 가입하시게되면 공산주의자를 자인한 결과가 되고, 그 다음부터 가해지는 정치보복은 어떤것도 피할 수가 없게 될 겁니다." "나도 그러리라 생각하고 있어요." 법일 스님은 왼손으로 허리를 받치며 힘겨웁게 몸을 옆으로 뒤척였다. 그 얼굴에 고통스러워하는 빛이 역연하게 드러났다. 엎드려 있자니까 허리가 많이 아픈 모양이었다. "이학송군과는 친교가 계속되고 있다고요?" 법일 스님은 고통을 감추려는 듯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예에, 시간이 나는 대로 자주 만나고 있습니다. 스님 덕분에 아주 좋은 선배를 갖게 되었습니다." "다행한 일이오. 그사람 참 바르고 똑똑하지." 법일 스님은 회상적인 얼굴이 되었다. "예, 식견이 남다르고, 배울 점이 많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과거에 대해선 의식적인 것처럼 말을 하지 않습니다." 김범우는 그동안 궁금하게 생각해왔던 점을 털어놓았다. "그렇던가요. 아마 그랬을 것이요. 자아, 과일 좀 들어요." 법일 스님은 사과 한 쪽을 조금 깨물어 천천히 씹으며 무슨 생각엔가 잠겨 있더니, "요즈음 방식으로 두 쪽으로만 편가르기를 하자면 그 사람도 천상 공산주의자일밖에 없지요. 허나 공산주의자는 아니고, 좀더 엄밀하게 구분하자면, 뭐라고 해야 할까, 민족적 사회주의자라고 하면 어떨까요. 그 사람, 학생 때부터 일본에 대한 저항감이 대단했고, 사상서적도 많이 읽었고, 웅변도 잘했는가 하면, 글재주도 상당했지요. 그런 생각이나 다능함이 대학공부를 거치면서 더 깊고 넓어졌을 것은 자명한 일이고, 그래 해방 전 해에 공산주의자로 몰려 징역을 살다가 해방을 맞았는데, 바로 고향강진으로 가서 젊은이들을 모아 자치대를 만들어 활동을 시작했지요.
그 사람이 제일 먼저 시작한 것이 민족반역자들을 가려내서 처벌하는 것이었는데, 전체 주민들의 비밀투표 결과 제일 악하게 굴었던 두 사람을 죽였지요. 그런데 그게, 군정이 실시되면서 친일 반역자들이 다시 득세하게 되니까 그 사람을 살인자로 몰아 죽이려 들었어요. 그래서 서울로 몸을 피할 도리밖에 없게 된 게지요. 이런 과거를 그 사람이 입에 올리기 좋아할 리 없겠지요. 그 사람이 기자생활을 하는 건 그 사람 자신을 위해서나, 우리 사회를 위해서나 아주 잘된 일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어요. 그런 사람들 힘으로 우리 사회가 조금씩이나마 바르게 지켜져야 할 테니 말이요." 김범우는 미루어둔 말을 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아직 말씀을 못 드리고 있었는데, 실은 제가 이 선배님 알선으로 통신사에 근무하고 있습니다. 한 두어 달 됐습니다." "아니, 어찌된 연고로요?" 법일 스님이 사뭇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예, 서울에 가서 보니 다 늦은 공부에 애착을 가질 분위기도 아니고, 저 자신도 의미를 찾을 수도 없고 그랬습니다. 지가생활같은 걸 통해서 현실 속에서 뭔가 바른 것을 찾고, 뭔가 실천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이 선배님한테 자릴 부탁했던 겁니다." "그리 되었군요. 아주 잘된 일인 것 같군요. 공부는 아무 데서나 책으로 하는 거지 학교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니까요." 법일 스님은 예상 외로 반가와했다. 김범우는 그 반응에서 아버지에게 감추고 있는 죄의식을 다소나마 씻어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