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버지의 눈물
(아들아, 아버지의 눈물의 의미를 아느냐?)
명나라 중압감에 시달리던 태조 이성계는 결국 몸이 병나 눕고 말았다. 깜짝 놀란 왕실은 도평의사사에 명하여 왕이 피접할 곳을 물색하여 보고하라 명했다. 불일사가 천거되었다.
이성계는 마땅하지 않다고 물리쳤다. 다급한 도당은 선운관 관원에게 어디가 길지(吉地)인지 알아서 보고하라 명했다.
현비 강씨는 자신이 5층 석탑을 시주한 연복사에서 휴양할 것을 권했다.
현비가 석탑을 시주할 때 회암사에 있는 무학대사가 먼 길 마다하지 않고 달려와 법회를 열어 주었던 곳이다. 현비 강씨는 연복사에 쏟아 부은 자신의 치성 덕분에 아들 방석이 여러 형들을 제치고 세자가 되었다고 믿고 있었다.
한없이 작아지는 조선국왕 이성계
이성계는 경천사를 택했다. 경천사는 처음이 아니다. 마음이 어지러울 때면 찾는 곳이다.
개경시내에 있는 연복사보다도 깊은 산속에있는 경천사가 마음에 끌렸다. 부소산 자락에 자리 잡은 경천사를 찾으면 심란하던 마음이 평온을 되찾았다.
적송에 둘러싸인 경천사에서 지저귀는 새소리와 졸졸 흘러내리는 물소리 들으면 시름을 잊었다.
경천사 경내를 산책하던 이성계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일을 어찌하면 좋을꼬?"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결단을 미루어 둘 사안도 아니었다.
대웅전 앞뜰에 있는 10층 석탑 앞에만 서면 한없이 작아지는 자신의 모습이 초라해 보였다.
"옛 조상들은 이렇게 우람한 돌덩이도 갈고 다듬어서 훌륭한 석탑을 만들었는데 나는 명나라를 갈고 다듬을 수 없을까?"
답은 없었다. 이성계에게 있어서 명나라는 넘을 수 없는 태산이었다. 요동을 정벌하고 여진족을 쳐부수며 지리산에 침투한 왜구를 소탕하던 장수는 한낱 반도의 무장이었을 뿐, 현재는 황제의 명을 받들어 조선을 다스리는 권지국사(權知國事)일 뿐이었다.
이성계는 고민에 쌓였다. 맏아들 이방우는 이미 사망하였고 정도전은 내줄 수 없었다. 요동정벌을 주장한 정도전은 명나라 조정에서 동이화원(東夷禍源)으로 점찍어 놓고있어 금릉에 들어가면 처형되거나 구금될 수 있었다.
또 하나 이성계가 정도전 파견에 흔쾌히 동의할 수 없는 이유는 정도전 없는 혁명과업 수행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황제가 있는 금릉을 방문하여 실타래처럼 꼬인 명나라와의 관계를 풀어낼 수 있는 적임자로 방원이 딱 인데 말을 꺼낼 수 없었다. 방원의 신분은 명나라가 요구한 조선국왕의 아들일 뿐만 아니라 명나라를 방문하여 사신임무를 수행한 경험이 있지 않은가
하지만 이성계는 혁명 일등공신을 홀대하고 있는 현실을 늘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있었다.
특히 형들을 제쳐두고 막내 방석을 세자로 삼은 자신의 과오를 표현은 안하지만 가슴에 담아두고 있었다.
경천사에서 휴식을 끝내고 돌아온 이성계가 방원을 불렀다.
"명나라 황제가 만일 묻는 일이 있다면 네가 아니면 대답할 사람이 없다.“
명나라를 다녀와 달라는 얘기다. 이성계와 이방원은 사(私)적으로 부자지간이고 공(公)적으로 군신관계지만 이것은 군신관계에서 왕이 신하에게 명하는 것이 아니라 부자지간에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부탁하는 것이다.
조심스러운 의사타진인 것 같지만 임금이 '사람이 없다'는 것은 곧 명命)이 될 수도 있다.
정에 약한 이방원
"종묘와 사직의 크나큰 일을 위해서 어찌 감히 사양하겠습니까?"
이방원이 부자지간의 정으로 화답했다. 군왕의 명에 의해서가 아니라 핏줄, 즉 종묘를 위해서 나서겠다는 뜻이다.
명나라를 방문하는 자신의 임무가 막중하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돌아오지 못하는 위험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비록 추동에 칩거하고 있었지만 명나라와 조선과의 긴장관계를 모르는 이방원이 아니었다.
"너의 체질이 파리하고 허약해서 만리의 먼 길을 탈없이 갔다가 올 수 있겠는가?“
이성계가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왕이 아니라 아버지의 눈물이었다. 그것은 진실로 뜨거운 눈물이었다. 애비로서 다하지 못한 죄책감과 자식을 사지(死地)로 몰아넣는 무기력한 회한에서 흘러내리는 가슴 뜨거운 눈물이었다.
나직이 말하는 이성계의 목소리에는 끈끈한 핏줄의 정이 흐르고 있었다. 그 정속에는 만감이 교차하고 있었다.
스물다섯 어린 나이에 혁명에 뛰어들게 한 아들, 그 아들을 제대로 대우하지 못하고 홀대하고 있는 아버지의 착잡한 심정이 녹아있었다.
이러한 순간도 잠시, 조정 신하들이 모두 정안군이 위험하다고 반대하고 나섰다. 죽음의 길이 될 수도 있는 명나라 사신 길에 왕자가 나서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뾰족한 대안을 제시하는 신하는 없었다.
"정안군이 만 리의 먼 길을 떠나는데 어찌 우리들이 여기에서 베개를 베고 눕겠습니까?"
남재(南在)가 나섰다. 이방원을 수행하여 스스로 따라가기를 청하였다. 명나라와 갈등을 빚고 있는 시점에서 사신은 물론 수행원도 위험한 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방원을 위하여 나서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연으로 남재는 훗날 태종 조에서 우의정과 영의정을 지냈다.
남재는 이성계를 도와 조선개국에 공을 세웠으나 포상을 피하여 산으로 은거했다 끌려오듯이 내려와 1등 공신에 책록된 강직한 선비다.
한마디로 벼슬이 싫어 도망갔다 잡혀와 타의에 의해 관직에 있는 사람이다.
산술(算術)에 능하여 남산(南算)이라 불리만큼 계산이 빨랐던 인물이다.
승리감을 안겨주고 실리를 취하라
명나라 사신단이 결정되었다. 정안공 이방원과 지중추원사 조반, 그리고 수행을 자청한 남재였다.
사신단에 이방원이 포함된 것은 이성계로서는 대단한 모험이었다. 부전이굴(不戰而屈) 전법으로 공세의 고삐를 죄고 있는 명나라에 무전이승(無戰而勝)으로 응수한 것이다.
굴종을 요구하는 명나라에 왕자를 보내어 “싸우지 않고 적을 굴복 시키는 것이 최선이다.” 는 승리감을 안겨주고 실리를 얻자는 것이다. 싸움없이 승점을 따자는 것이다. 이러한 지략은 이성계의 발상이 아니라 이성계를 움직이는 책사의 전략일런지 모른다.
이성계가 노리는 실리는 권지국사(權知國事) 꼬리표를 떼는 것이었다. 당시 명나라는 이성계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변방을 다스리는 권지국사(權知國事) 취급이었다. 이것이 이성계의 치욕이었다.
이러한 연유로 훗날, 이성계는 조선반도를 담을 그릇이었지만 이방원은 대륙을 담을 그릇이었다고 회자되었다.
위화도에서 회군할 무렵, 이방원에게 이성계와 같은 군대를 움직일 수 있는 병권이 쥐어졌다면 말머리를 남으로 돌리는 것이 아니라 북으로 향하여 요동을 정벌할 배포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역사에는 가정이란 없다.
명나라로 떠나는 날. 추동 이방원의 저택에 배웅하는 사람들이 운집했다. 밝은 모습만은 아니었다.
장인 민제는 근심어린 눈으로 방원을 바라보았다. 다시는 보지 못할 수도 있다는 절박감이 추동을 감싸고 있었다. 이방원을 따르던 조영규와 조영무는 눈물을 흘렸다.
"다녀 오리다."
"건강하게 잘 다녀 오세요.“
부인 민씨가 눈물을 글썽였다. 방원이 어떠한 길을 떠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생에 마지막 작별일 수도 있었다. 그의 뱃속에는 태아가 자라고 있었다. 실로 오랜만에 회임한 아기였다.
열일곱 새색시가 열다섯 신랑을 맞아 12년 만에 임신한 아기였다. 이렇게 귀한 아기가 유복자가 될 수도 있다 생각하니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