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초등학교시절이니 19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 초반일 것입니다.
전라남도 순천시에서 도시도 아니고 농촌도 아닌 애매한 곳 생목과 운동 사이에서 살았습니다.
생목은 어쩌면 도시와 농촌을 구분하는 경계선 쯤으로 여겨지는 위치라 그 곳 동네 피끓는 청춘들은 밤이면
신작로변에 있는 당산나무 근방에서 어슬렁 거리다 광양쪽 아니 운동,신대,운곡,비봉,현남,조례,두지마을에
집을 두고 순천 시내에서 볼일을 보고 귀가 중인 사람이나 중,고교생들에게 시비걸며 두들겨 패기 일수였습니다.
'생목 깡패'는 안쪽 마을 사람들에게 무서운 존재였고 그래서 해가 진 뒤 생목고개를 넘어가는 것은
매우 두려운 일이기도 했지요. 전기도 귀한 시절이라 해가 떨어지면 깜깜하였기에 더욱 공포스러운
길이었답니다.
나는 광양에서 순천으로 이어진 비포장 신작로길 중에서 생목 고개와 변전소 사이 도로변에 지어진 10여채 집 중
광양가는 길에서 위에서 언급한 마을로 들어가는 길(실고로 가는 길)이 갈라지는 삼거리에 위치한 집에서 살았습니다. 생목까지 오르막 길이었기에 길가의 작은 마을을 '높은 한질'이라 불렀지만 행정구역상으로는 실고 뒤에
있는 운동마을에 속했습니다.
생목 깡패들은 높은한질 사는 사람들에게는 절대 깡패질을 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우리집에 대해서는 당시 육군사관학교를 간 형님 때문에 아버지를 '어르신'이라 부르며 대우를 해
주었답니다.
우물은 변전소 앞 방앗간에 하나 있었고 생목을 다 가서 논 가운데 공동 우물이 하나 있었는데
남의 집 우물을 쓰는 것은 미안한 일이라 자주 못가고 대부분 상당히 먼 거리에 있는 공동 우물물을 길러다
마셔야 했습니다. 겨울철에는 물이 적어 새벽 두,세시에 물을 길러와야 했고 명절 전에는 밤새 대기하다가
한 두 바께스 길러오기도 했지요.
우리집은 지리산 자락인 하동군 화개면 신촌마을에 살다가 부모님의 자녀 교육을 위한 결단으로 내가 5살 때
이 곳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산촌에서 땔감 걱정없이 살다가 이 곳에 오니 땔감이 없어 여름에는 풀을 베다 말려서 땠고, 겨울에는 해촌들 벌판을 해메며 건초를 베다가 때야 했습니다.
그런 땔감은 한 망태나 한 리어커를 가져와도 하루 세끼 밥해 먹기도 힘들 정도로 소모성이 강했습니다.
여름방학에는 망태를 메고 크고 작은 산 세 개를 넘어 부엉이가 사는 '항바구'까지 갑니다.
부드러운 들판의 풀들은 소먹이로 쓸 지언정 말려서 땔감으로 쓰기엔 부적합 합니다.
습기가 많아서 더디 마르고 마르면 부피가 확 줄어들 뿐 아니라 마른풀의 화력도 매우 약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산에서 자란 풀은 습기가 없고 단단하여 마르는 시간도 짧고 잡목도 섞여있어 화력도 좋습니다.
그래서 항바구까지 가서 풀을 베 옵니다.
동네에서 가까운 산에는 우선 자원이 부족할 뿐 아니라 산 주인들의 감시가 심합니다.
하지만 먼 산에는 주인들이 올라오지 않으며 풀이나 잡목 등 우리가 원하는 것이 풍부한 편이기 때문에 고생을 무릅쓰고 멀리 갑니다.
풀을 베러 갈 때는 빈 몸으로 가지만 오르막이라 힘들고 올 때는 내리막이지만 풀을 지고 오느라
땀 범벅이 됩니다.
그렇게 고생해 베 온 풀을 마당에 말려 때면 세 끼 밥하기에도 부족했습니다.
참으로 노동력 대비 가치가 떨어지는 ~~유식한 말로 노동생산성이 아니 노동 부가가치가 매우 적었습니다.
하지만 돈이 귀하던 시절이기에 모든 것을 자급자족으로 해결해야 했습니다.
장작이나 죽은 나무 뿌리 즉 '고자배기' 정도를 구하려면 산길을 몇 십리 걸어가는 구랑실 진등재 등지로
가야 하는데 어린 나이에 갈 수 있는 길이 아니었습니다.
어느 집이든 나같은 국민학교 고학년 남자 아이들은 집안의 땔감을 조달해야 하는 막중한 임무가 주어졌습니다.
가을밤 바람이 심하게 불면 새벽같이 일어나 망태와 갈퀴를 들고 뒷산 소나무 밭으로 달려 갔고
평상시에는 들판 논둑에 몇 포기씩 말라있는 건초들을 벤다거나 순천 실고 뽕나무 밭에 들어가 잡풀들을
베어 오기도 했습니다.
이런 땔감을 구하는 나와 동생은 먼지를 뒤집어 써야 했는데 이 건초를 때는 어머니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여름에는 방앗간에서 보리타작을 한 후 보릿대를 자기네 집으로 운반하면서 떨어뜨린 한 길가 보릿대를
갈퀴로 긁어다 땔감을 했고 가을에는 순천 실고까지 이어진 도로변 플라타나스 가로수 낙엽을 줍기위해
도랑을 해메기도 하였습니다.
날씨가 풀리는 겨울날에는 망태와 갈퀴를 들고 뒷산으로 향하는데 가끔은 산 주인들이 쫓아와 어렵게 구한
낙옆을 뺏아 뿌려버렸고 독한 어른은 망태까지 낫으로 찢어버리기도 했습니다.
나는 주로 바로 아래 동생과 함께 땔감을 구하러 다녔습니다.
때로는 생목 가까이 사는 태희라는 친구와 함께 다녔습니다.
바로 뒷산은 소센(씨) 산인데 주인이 독하기로 소문 나서 잘 가지 않았고 같은 집안이지만 좀 멀리 있는
양지바른 산인 '무영이네 산'으로 가서 활엽수를 많이 긁어 왔습니다.
습기를 좋아하는 오리나무는 산 계곡(도랑)가에 있었는데 활엽수는 화력이 약하고 소모성이 강해
인기가 덜했습니다.
소나무등 침엽수 낙엽을 우선 긁어가기에 활엽수는 구하기가 비교적 쉬웠고
나와 태희는 봐 둔 오리목나무 낙엽이 많은 곳을 알기에 항상 그 곳에 가서 망태를 채워왔습니다.
명절이 다가오면 떡을 하고 음식을 많이 만들기에 화력 좋은 땔감이 많이 필요했습니다.
그에 적당한 땔감은 '솔방울'이었습니다.
산 주인이 보기에도 솔방을은 나무를 베가는 것도 아니고 나무가 자라는데 필요한 퇴비도 아니기에 조금은
너그럽게 대해주었습니다. 그래서 설날을 대비하여 솔방울 채취를 많이 했습니다.
솔방울 채취 장소는 '해송밭'이었습니다.
'해송밭'은 우리가 지은 이름인데 그 곳은 생목마을과 운동마을을 가로막고 있는 봉화산 줄기의 산맥이었고
정부 조림사업으로 심어놓은 해송이 빽빽하게 서있는 곳이었습니다.
너덜지대라 바닥에는 자갈밭이었고 해뜰 무렵에만 잠깐 햇볕이 들어올 뿐 항상 응달인 경사면입니다.
그 아래 산지기 집이 있지만 양지에서 음지를 바라보면 잘 보이지 않기에 솔방울 채취하기가 쉬웠습니다.
해송은 줄기도 매우 거칠고 사나워 맨손으로 만지면 상처를 입기 쉬웠고
솔방울에도 가시가 많아 잘 못 만지면 손가락에 가시가 박혔습니다.
하지만 기름기가 많아 조선솔방울보다 화력이 좋고 오래 타는 땔감으로서 장점이 많았습니다.
해송 채취 도구는 당시에는 매우 귀했던 면장갑,
아버지가 버섯공장이나 일용직을 나가 받아서 작업하고 갖다 놓은 헌 장갑을 두겹,세겹 끼고
솔방울을 따야 했습니다.
껄끄러운 해송나무를 타고 올라가 단단하게 붙어있는 솔방을을 너덜너덜 면장갑을 낀 손으로 조심히 돌려서
떨어뜨리면 동생은 떨어진 솔방울을 주워 모아서 마대에 담습니다.
아침밥 먹고 마대와 멜빵용 새끼줄을 두어발 갖고 해송밭으로 가기 위해 나즈막한 산 두 개를 넘고
큰 산을 올라 항상 응달진 해송밭으로 가 낱개로 모은 솔방울로 마대를 채우려면 서너시간 작업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채취한 솔방울을 모아두면 뿌듯합니다.
어머니가 호응해 주시고 칭찬해 주는 맛에 명절이 가까워 오면 매일 해송밭을 해멨습니다.
해송밭은 바람도 거셌습니다. 응달에 바람에 정말 추운 곳이지요
하지만 가는 길에 있는 양지바른 무영이 산에는 도라지도 많았고 바로 까서 먹을 수 있는
딱주(잔대)도 있었습니다. 시고 떫은 맹감(망개)나무도 많아 빨간 열매를 따 먹으면서 무료함을 달래기도
하였지요.
해송밭 윗쪽은 생목마을 뒷산이자 운동마을 옆산이기도 하였는데 그 곳에는 나무가 별로 없었습니다.
하지만 삽초,지우초,한가꾸(엉컹퀴)등 약초가 많았습니다.
어머니가 소화가 안된다고 하면 우리는 걸대바구리를 들고 그 곳에 가서 삽초를 캐 옵니다.
아버지께서 그 삽초를 달여서 복용하면 위가 튼튼해진다고 하였습니다.
어버지가 발을 접지르면 겨울에도 잎이 마르지 않은 엉컹퀴를 캐다가 찧어 발목에 붙였습니다.
해송밭 아랫쪽에는 엉컹퀴가 많았습니다.
초등학생 때는 봉화산으로 소풍을 자주 갔습니다. 소풍지로 신성포 바닷가 아니면 봉화산이었지요.
그 때는 봉화산이 왜 그리 높게 여겨졌는지요.
봉화산에는 작은 집이 한 채 있었고 그 아래로 복숭아 밭이 있었습니다.
복숭아 꽃이 필 때면 산 아래서 올려다 봐도 핑크빛 꽃이 만발한 봉숭아 밭이 아름다와 보였지요.
소풍 갈 때면 복숭아밭 아래 작은 계곡물에서 특이하게 생긴 개구리를 구경하였습니다.
등은 초록인데 배는 빨갛고 검은 반점이 많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약개구리라고 잡아다 말려서 불에 구워 가루를 내어 약으로 쓰셨습니다.
아버지는 무허가 침쟁이였고 한의사였습니다.
지금 알고보니 무당개구리였고 독성이 있는 개구리 입니다.
순천 샤인호텔 604호에 묵으면서 커튼을 열어 젖히니 이런 풍경이 눈에 들어옵니다.
운동,신월마을은 거의 옛모습을 잃었고 초등학교 시절 논이었던 곳은 이렇게 도심지가 됐습니다.
이른바 '상전벽해' 입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좋은날되시고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