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이었지요. 개나리가 한창이었는가 아니 벚꽃이 화사하게 꽃망울을 터뜨린 학교 켐퍼스는 꽃들로 가득했습니다. 하루 밤을 꼬박 세운 경찰서 취조실에서 잠도 들뽁이다가 돌아온 켐퍼스는 눈물 겹게도 꽃대궐이더군요. 그것뿐인줄 아십니까. 잔디밭은 으례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앉아 키타를 치며 노래 부르느라 잔치마당이었고요. 화려하게 단장한 봄날이래서 더욱 서러웠는지 모릅니다. 백열전구가 눈을 찌르는 취조실에서 연방 얻어맞아가며 조국의 앞날을 걱정했던 것은 신기루인가 사라지고 천진하게 노랠 부르는 내 또래의 청춘이 부러웠더랬지요. 아니 얄미웠답니다.
그때 켐퍼스는 '한 사람이면 독서를, 둘이면 대화를, 셋이나 넷이면 합창을' 하는 구호가 널리 퍼졌더래요. 키타를 치는 남학생의 어깨는 데모대가 내지르는 고함따윈 먼 나라 이야기고 나처럼 가난한 고학생의 시름도 몰라줍디다. 제가 슬그머니 끼어앉은 패거린 합창단 써클이었습니다. 내가 선배 하숙집에서 연행된 걸 아는지모르는지 무심하게도 노래에 열중했습니다. 야속해하던 내 마음도 노래따라 눈 녹듯이 녹아버렸지요. 노래는 이렇듯 사람의 마음을 녹여버리는 마술 같이 신비스러운 것이더군요. 아마도 '사랑해'가 아니었을른지요. 당시 가장 널리 불려졌던 노래는 아무래도 '사랑해'가 최고였지요. 종로 와이엠씨에서 토욜이면 '씽얼롱'이라는 노래 배우는 프로그램이 인기 짱이었답니다. 스포츠 머리를 한 단정하게 생긴 전석환씨가 키타로 이끌어주는 씽얼롱은 장안의 인기를 독차지했어요. 전석환씨한테 들었던가. 이 노래는 군대에 간 남자가 여자를 못잊어서 만들었다고. 그러나 그 여잔 고무신 거꾸로 신었다. 나쁜 여자. 뜸북새, 오빠 생각에다가 이스라엘 민요 돈나 돈나, 이젠 즐겨 부르던 포크송도 가물가물하군요. 한바탕 노랠 부르다가 보면 답답했던 가슴도 시원하게 씻겨주거든요. 부수입으로 주위를 돌아보며 이쁜 여학생하고 눈맟추다가 필이 꽂히면 아프터하러 나가지요. 원래 부수입이 짭잘한 게 아니겠어요. 밝히긴 어~라, 그러시면 제가 억울하지요. 수줍음 몹시 타는 친구, 고등학교 입시 100미터 달리기에서 양보해주었던 그 녀석이 맘에 둔 여학생이 거기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날 꼬신거랍니다. 저도 따라간 거니까요. 제가 여학생한테 말 잘 붙인다는 걸 알고서 그랬지요. 그 여학생, 물론 고향 출신인 여학생을 예전부터 맘에 둔 터라 내가 방자 역할을 하기로 작전을 짰지요. 어떻게 된 거냐고요? 말도 마시구려. 이렇게 안타까운 일이 있을까요. 우연히 만난 척하고 함께 막걸리집엘 갔거든요. 맙소사, 서너 주전자를 비우고서 딸국질을 해가면서 이 친구가 상사병에 걸렸노라고 알려줬더니 글쎄 웃고말더군요. 하기사 청운의 푸른 꿈을 꾸고 올라온 우리 나이에 고리타분한 시골 녀석을, 그것도 고향 친구를 좋아할 턱이 있나요. 세상에 널려 있는 게 젊은이고 항상 가능성이 엿보이는 청춘인지라 거들떠나 보겠어요. 친군 딱지를 맞았지요. 내 방자 역할도 허무하게도 우린 명동 선술집에서 막걸리잔을 기울이다가 비틀 걸음을 옮긴 곳이 명동 공원입니다. 아마 제일 백화점 자리였을게요. 목을 치미는 게 울음인지 막걸린지 벤치에서 꺽꺽 대며 실연의 아픔을 삭히는 친구가 외로워보였고 달은 무심하게 높다라니 빌딩 사이를 요리조리 피해가며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첫 사랑은 으례 깨어지는 거라고 달래는 나도 몹시 슬펐습니다. 종내는 오바이트하는 그 친구의 등어리를 두두려 주며 인생은 왜 이리 슬픈 거야? 이날 우린 어린아이 딱지를 뗀거지요. 어른이 된 거라는 말씀입니다. 우린 무척 불운한 세대였답니다. 학교생활 내내 데모만 하다가 말았거든요. 3선 개헌 반대에다가 부정선거 방지 감시단, 교련반대 투쟁. 결국은 위수령이 내리고야 졸업한 거예요. 졸업반 가을, 교정에는 대문이 굳게 닫히고 착검한 군인들의 총칼 위로 무심하게 내려쬐는 가을 햇빛이 사금파리 되어 가슴을 찌르는데 은신한 운동권 학우가 부탁한 불온삐라를 등사하느라 몰래 써클 룸에 들어갔지요. 그때 철필로 가르방을 긁으며 세상이라는 넓고도 막막한 바다를 생각하고 있었지요.
그땐 그랬어요, 요령 없이 크고 넓기만 한 바다가 내 신산한 청춘에 대해 빈정대더구먼요. "어떡 헐래? 내게로 헤엄쳐 올 수 있겠니?... 넌, 용기가 없잖니.."
어두워 오는 캠퍼스를 내다보면서 김지하를 떠올렸습니다.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 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 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그래도 강의가 끝나면 잔디밭에 둘러앉아서 키타를 치며 노랠 불렀어요. 사이몬앤 카풍컬의 '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어(Bridge Over the Troubled Water)', 음유 시인인 존 덴버의 'Take Me Home Country Roads'. 'Annie's Song', 씽얼롱에서 배운 포크송까지. 주로 칼립소풍의 노래여서 빠르고 경쾌한 노래라 피크(삐꾸)를 사용하던가 우아하게 클라식 주법처럼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나이론 줄을 뜯으며 키타를 쳤어요. 한참 뒤에 트윈폴리오가 나왔고 조영남은 딜라일라로 그때 한창이었지요. 딜라이라가 무슨 노랜지 아세요? 성경에 나오는 삼손과 들릴라, 바로 들릴라를 영어식으로 부른 거랍니다. 아~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많이 부르던 포크송은 제목 하나도 기억이 나질 않네요. 통키타 노랜 역시 트윈폴리오부터 이야길 시작해야겠네요. '하얀 손수건'은 스산한 바람이 불던 늦가을에 이 노랠 처음 들은 탓인가, 쓸쓸하고 고독한 남자의 노래라 그런지 좀은 청승맞지 않던가요? 송창식과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윤형주의 하이 보이스가 이렇게 멋진 화음을 이루다니. 무더운 여름, 농촌봉사 가서는 "조개 껍질 묶어 그녀의 목에 걸고......" 이렇게 감칠 맛 나는 노래가 어디 있을까. 얼마 전, '놀러와'에 출연한 송창식과 윤형주, 주책 맞은 조영남과 김세환이 나왔을 때는 보고 또 보며 아슴하게 가슴에 치미는 노래에 취했지요. 송창식은 이제 무슨 도사 같더라고요. 노래에서 도를 추구하는 것 같구먼요. 김세환은 나이를 먹지 않는지 아직도 청춘이고. 제 하숙방에는 키타 도사가 있었어요. 날 가르쳐 줄려고 애를 써도 제가 재주가 없는지 좀처럼 늘지 않더군요. 마리아 에레나, 안개 낀 밤의 데이트, 그거 아세요? 애절하다 못해 가슴을 후비듯 절절한 사랑 노래, 영화 금지된 장난에 나오는 '로망스'말예요. 키타를 만질 줄 안다는 사람은 한 번쯤 배워보는 로망스를. 그거 엄청 어려워요. 재주 없어도 그거는 제법 쳤답니다.
추위가 매섭던 겨울 밤, 하숙집은 방 네 개였는데 연탄을 돌려막기로 난방을 했으니 좀 추웠을까요. 눅눅한 이불 밑에 발을 넣고 시린 손가락으로 키는 로망스. 애절한 리듬이 끊어질듯 말듯 이어지는 애린 제 키타 소리에 귀기울이던 헤레나는 어디 갔을까요? 그래도 남자 친구 하숙방이라고 사온 국화 몇 송이를 빈 소주병에다 꽂아두고서 오돌오돌 떨면서 듣던 여린 키타의 애절한 로망스. 허나 오해 마시라. 로만스를 주제곡으로 쓴 영화가 금지된 장난이지 내 하숙방에 놀러온 헤레나와 금지된 장난을 친 거 아니라고요. 또 있어요. 은희의 '꽃반지 끼고.' "생각 난다. 그 오솔길~ 그대가 만들어준 꽃반지 끼고...." 포크송은 연주하기가 쉬어서 좋아요. 기껏 D,A,E,에다가 조금 어렵다는 C,F,G 에다가 마이너 코드까지 알면 키타 반주는 대충 되지요. 친절하게도 노래집에는 코드명까지 일일이 표기를 해주었으니. 오죽했으면 키타를 칠 줄 모르면 간첩이라 했을까요. 얼렁둥땅 배운 솜씨로 합창 공연 때 베이스 키타를 일렉트릭 키타로 연주한 적도 있다고 자랑한 거 아시지요. 왜 "오빠밴드"에 신동엽이하고 누구누구 나온 티브이 프로그램에서 신동엽이가 연주한 게 바로 베이스 키탑니다. 그래도 퍼스트나 세컨에 비해 베이스는 쉬운 편이지요.
좌충우돌 제 학창시절은 엉망이었어요. 데모는 무슨, 궐기문 썼다는 이유로 잡혀가서 뒈지게 맞고는 불온 학생 명단에도 올랐으니. 그때 학생 중에는 중앙정보부 끄나풀이 많았어요. 학생처에는 정보부원이 상주했던 시절입니다. 날 꼰질른 그녀석은 얼마전 티브이를 요란하게 장식하더군요. 국정원에서 대단한 자리에 올랐던 그가 신문 1면에 나올 정도로 큰 비리로 잡혀 들어가던 걸요. 학자금, 정보부에서 장학금을 받고서 동료 친구들을 꼰질르던 못된 버릇 어디 갔나요? 통키타하면 명동의 오비스케빈을 빼놓을 수 없겠지요. 양희은, 송창식, 딕훼미리....하이고~ 카수들 이름도 까먹어버리고. 그때 맥주 맛을 배웠습니다. 이렇게 쓰디쓴 맥주를 마시며 우리 청춘도 활활 타올랐답니다. 아~ 훼리 폰다였나, 바나나보트송도 즐겨 불렀어요. 데이요 데에에이요요호~ 틸아이 곤메니......가사가 좀처럼 떠오르지 않네요. 하지만 우린 이렇게 불렀어요. 키스하다 깨물린덴 아까징기 최고 틸아이.....
그러고 보니 박인희의 뚜아에무어를 빠뜨릴 뻔 했네요. 라디오에서 듣기로 이해인 수녀님이 길에서 박인희를 만납니다. 고등학교 동창이랬지요. 본래 말이 없이 조용하던 박인희랑 학교 다닐 때엔 친할 겨를도 없었지만 반가워서 친구 집에 같이 갔다 해요. 수녀님이 이야기 끝에 요즈음 이 노래가 참 좋더라 하고는 "모닥불 피어놓고 둘이 앉아서.."하는 노랠 조그맣게 불렀답니다. 박인희가 빙그레 미소를 띠고 가만히 듣기만 하더래요. 나중에야 수녀님은 그날 만났던 동창 박인희가 부른 노래라는 걸 알고는 한참 웃었다고 해요. 임자 앞에서 그 노랠 불렀으니 얼마나 민망했을까요. 박인희란 카수는 카나다엘 갔다지요? 아참~ 최민수 장모하고 해인 수녀님하고 친구라더군요. 사위라고 사진을 보여주는데 그 유명한 최무룡의 아들 최민수더래요. 수녀님은 발도 참 넓어요. 수녀님 만났을 때 물어봤잖겠어요. 박인희씨랑 동창이시라고요? 본당 강사님으로 초대해서 기차역에 아내랑 마중 나갔걸랑요. 수녀님, 시와 정말 닮지 않아서 놀랐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수녀님 시집을 몽땅 가지고 갔더니 엄청 기뻐하시며 본당가지 가는 차 안에서 일일이 싸인해주시던 걸요. 수녀님 시와는 많이 달라요. 세촘하고 차가운 맵씨의 시인인 줄 알았는데. 털털한 목소리에 쾌활한 편으로 말씀도 시원시원했어요. 그때 수녀님 시집 싸인 받은 거 한 열권이 넘을 걸요. 시인도 사람인지라 자기 시집 가지고 싸인해달라면 좋아하지요. 아무래도 포크송은 그만 둬야할까 봐요. 참 할 말도 많았는데 기억이 나는 게 별로예요. 치매끼가 있나? 그래도 이건 기억해요. "비바람이 치는 밤에 ...그대~만이 내 사랑..." 아이고 이 노래도 가물가물하다니. 우리가 얼마나 열씸이 불렀는데요. 연가 말예요. 복학생 친구따라 장충체육관엘 갔더니. 그래요 연고전 농구 게임이었어요. 응원가를 부르다가 눈물을 흘릴 줄이야.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봐도 가슴에 하나 가득 슬픔뿐이네. 무엇을 할 것인가 둘러보아도 보이는 건 모두가 돌아앉았네. 자 떠나자 동해 바다로 삼등 삼등 완행열차 기차를 타고, 간밤에 꾸었던 꿈의 세계는 아침에 일어나면 잊혀지지만 그래도 생각나는 내 꿈 하나는 조그만 예쁜 고래 한 마리, 자 떠나자 동해 바다로 신화처럼 숨을 쉬는 고래 잡으러..." 어깨동무하며 부르는 노래가 절규 같더라고요. 도대체 이 노래는 끝날 줄을 몰랐어요. 부르고 또 부르며 원을 그리며 돌아가던 우리 청춘은 소리 내어 울었지요. 그때 우리 청춘이 맨 정신으로 살 수가 있었간데요. (사실 이 노래 가사, 씨디를 보고 베낀 겁니다.)
에프엠 라디오에서 앙케트 조사를 했답니다. 우리나라 대중가요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노래를. 조사 결과 양희은의 '아침 이슬'이래요. 복음 묵상 중에, 왜요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유혹 받던 귀절을 묵상할 때 아침 이슬을 틀어놓고 하면 참 좋아요. 특히 제일 좋아하는 아침이슬은 '1999년 아침 이슬'이라고 양희은이 청담동 성당에서 합창단하고 녹음을 한 씨디를 들었지요. 합창단과 오케스트라가 어우러져 연주하는 가운데 양희은이 부르는 아침 이슬은 교향곡 베토벤의 합창에 견줄까 싶게 기가 막히던걸요. 양희은이 부르는 건 바로 사자후였어요. 아침 이슬은 대중가요사에 길이 남을 불후의 명곡이예요. 제 의견에 공감하시나요?
이야길 늘어 놓다가 보니 제대로 하는가 모르겠어요. 그래도 빼놓을 수 없는 노랜 트윈폴리오가 부른 "웨딩 케이크"였어요 제겐. 실연한 남자가 듣기에 너무 처절해서 가슴이 녹아 내리던 걸요. 디제이 윤형주 말에 의하면 결혼을 축하 노래로 라디오에 신청이 많이 들어온대요. 말이 돼요? 실연의 아픔을 노래하는 걸 축하 노래로? 가사를 음미하기보다 곡이 너무 아름다워서 착각한거지 뭐예요. 에이 그만 둘래요. 나머진 우리 벗님들이 채워 주시구려. 노래마다 사연이 없는 사람, 어디 있겠어요. 안 그래요? 벗님은 무슨 노래를 잊지 못하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