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3. 죽은 자는 죄와 상관이 없다 / 로마서 6:7
사람이 평생 동안 죄를 지었더라도, 죽은 뒤에는 그 죄를 처리할 수 없습니다. 살아 있을 때 지은 죄가 생명이 없어지면 어떻게 법을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유형의 것은 무형의 것에 적용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유형의 죽음과 무형의 죽음이 있습니다. 유형은 다스릴 수 있지만, 무형은 다스릴 수 없습니다. 몸은 죽일 수 있지만, 영혼은 죽일 수 없는 분을 두려워하지 말고, 몸과 영혼을 모두 지옥에 던질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라고 마태복음 10장 28절에 말씀하셨습니다.
죄는 살아 있을 때 중요하지만, 사후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결혼한 여성이 남편이 살아 있을 때는 남편과 관련이 있지만, 남편이 죽으면 관련이 없어지므로, 다른 사람과 다시 결혼해도 죄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 믿는 자가 죄와 무관하게 되려면 죽어야 합니다. 이 죽음의 방식은 가장 신비롭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해 죽지만 영이 의로 말미암아 살아날 것입니다(로마서 8:10). 또한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참으로 죽은 사람을 보았습니다. 김익두 목사와 권신일 목사였습니다. 그들은 믿기 전에는 술을 마시고 사람을 때리는 악한 사람이었지만, 주님을 믿고 나서 그들의 행실이 모두 죽었습니다. 이렇게 죽은 자에게는 죄와 상관이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은혜를 받는다는 것은 우리가 죽음의 법칙을 배워 죄 없는 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주님이 대신 죽으셨으니, 강도 바나바가 마땅히 죽었어야 했지만, 주님이 대신 죽으셨으므로 그가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나바는 그 은혜를 기억하고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 누군가가 나를 때리거나 욕할 때도 대항하지 말아야 합니다. 대항하는 자는 살아있는 자요, 죽은 자가 아닙니다. 또한 물건을 보고 탐내서도 안 됩니다. 이것이 죽은 자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죽은 자는 마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고 새싹이 나오는 것처럼, 그 속에서 부활의 새 생명이 있어 무덤을 깨고 어둠을 깨뜨리고 다시 일어납니다.
우리가 교회에 오는 이유는 죽음을 배우기 위함입니다. 어떻게 해야 올바른 죽음인지 배우려는 것입니다. 나라를 위해 죽는 것도 좋고, 어떤 주의나 도덕을 위해 죽는 것도 좋지만, 죄에 대해 죽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죄를 범하지 않으려고 죽는 자보다 적습니다. 왜 그럴까요? 세상이 온통 죄악투성이이기 때문입니다. 사방이 다 도둑들이어서 나 혼자 도둑질을 하지 않을 수 없으니, 그들의 칼에 죽든지 아니면 도망치든지 해야 합니다.
어떤 목사님은 다른 사람의 첩이 된 여인을 만났습니다. 처음에는 모르고 가서 밥을 얻어먹었는데, 그 후에 알게 되자 곧 떠났습니다. 기생이 회개하고 믿음 공부를 하던 중, 전에 알던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그 여자는 돈이 생길 것 같아서 영접하려 했지만, 지금부터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거절했습니다. 이는 그녀가 이미 죄에 대해 죽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죄에 대해 죽는 것이 우리 교회의 주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