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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아버지여! 어서 오시옵소서
에베소서 1:15-23 1958년 3월 9일(日), 전 본부교회.
<말 씀> 오늘 여러분 앞에 말씀드리고자 하는 제목은'오, 아버지여! 어서 오시옵소서.'입니다. 이런 제목을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본연의 에덴동산과 하나님
원래 하나님을 모셔 놓고 살아야 할 인간이요, 하나님을 모시고 즐거워해야 할 만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인간은 우리를 지으신 아버지, 우리를 주관해야 할 주인공을 잃어버린 상태에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고아와 같이 불쌍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깨닫는 그 순간부터 우리들은 새로운 섭리의 뜻을 찾아 나설 수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 인간들이 옛날 에덴에서 잃어버린 창조주를 우리의 아버지라 부르고, 에덴에서 잃어버린 선의 동산이 원래 우리가 살아야 할 생활환경이라고 느낀 때가 있었던가. 오늘날까지 수천년의 역사가 경과하였지만 그런 때가 아직까지 인간세계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사명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다 희생시키는 한이 있다 할지라도 우리들의 선조가 바라던 이념의 주인공인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 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복귀의 노정을 걷고 있는 여러분이 자기 한 자체를 천륜의 노정 앞에 냉정히 세워 놓고 비판하여 보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 자신들이 어떠한 위치에 놓여 있는가, 어떠한 입장에서 허덕이고 있는가를 반성해 보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그 위치와 방향을 인간에게 가르쳐 주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인륜을 대표하는 종교가 세워졌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신앙이란 명사를 세워 역사 과정에 종교를 중심삼아 인간을 찾아 나오고 계십니다.
인간과 하나되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심정
오늘날 우리 인간들은 자신에게 있는 중요한 부분의 가치를 망각하고 살 때가 너무 많습니다. 역사노정을 거쳐서 찾아오신 하늘이 항상 내 주위에서 운행하고 계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또 내 생활 환경에 하늘이 거하시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에, 여러분은 역사적인 노정 앞에, 시대적인 섭리의 뜻 앞에 머리를 숙여야 할 것입니다.
천륜의 뜻 앞에 머리를 숙여야 할 인간들인데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역사 과정을 거쳐오면서 섭리의 뜻을 잊어버리고, 자기들의 위신과 품위를 망각하고 나아갈 방향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들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괴로운 심정을 여러분은 느껴야 되겠고, 또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의 뜻을 염려하지 않으면 안 될 때가 왔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하나님, 이러한 창조주를 우리의 신앙의 주체로 모시기를 원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자신을 중심삼고 믿고 있다면 그는 하늘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하늘은 무한대의 소망을 갖고 나를 대하시는데, 나는 한계적인 소망을 갖고 하늘을 대하고 있으니 이 한계적인 소망과 무한대의 소망의 차이를 해소시키는 일을 누가 담당할 것인가. 이 차이가 크면 클수록 내 일신에 대해 사탄이 하늘 앞에 참소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인간 타락의 결과
그런데 인간만 그렇게 된 것이 아니고, 피조만물까지도 하나님이 믿을수 있는 권 밖으로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움직임을 만물에게서 찾아볼 수 없게 되었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미의 자극적인 충동을 나타낼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이 몸뚱이는 하나님의 탄식권 내에있는 만물을 섭취하며 자라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탄식권 내, 즉 죄악권 내에 있는 내 몸 자체를 분석해 보면, 선의 요소보다도 악의 요소가 더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내 전체적인 생의 노정에서, 신앙의 노정에서, 사랑의 노정에서, 이 악이 더 강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본래는 믿어 주어야 할 인간이었고, 사랑해야 할 인간이었고, 하나님의 생명체가 되어야 할 인간이었는데 그 인간을 믿을래야 믿을 수 없고, 생명을 같이할래야 같이할 수 없으며, 사랑을 같이할래야 같이할 수 없게 된이 서러움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생명의 인연, 사랑의 인연
여러분은 땅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슬픔이 남아 있는 땅이여! 하나님의 서러움의 담을 쌓고 있는 인류여!’라고 탄식하면서 그 하나님 대신 안타까워 할 하나의 사람이 역사적인 종말시대에 나타나지 않을 것인가 하고 유의해야 되겠습니다. 만일 그러한 한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수고의 역사도 수포로 돌아가고, 사탄의 참소조건, 즉 죄로 인한 탄식의 조건이 남아진 세계에서 살 수밖에 없는 입장에 처하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새로운 이념과 새로운 믿음, 새로운 생명과 새로운 사랑을 가지고 하늘의 형제가 되어야 합니다. 6천년 동안 나를 찾으시려는 하나님의 그 간절한 심정을 느껴 저희 또한 간절한 마음으로 ‘아버지여,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부르짖을 수 있는 자신이 되어 있는가 반성해 보아야 되겠습니다.
우리의 선조들은 지금까지 하나님의 뜻을 대신하고 어떠한 시대적인 사명을 감당하고자 이 땅 위에 나타났었으나 다 꺾여져 나갔습니다. 그러한 역사의 반복이 지금까지의 복귀의 역사라는 것을 여러분은 원리를 통하여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복귀의 원한에 사무친 하나님은 지금까지 안타까운 심정을 품고 참아 나오셨습니다. 즉 지금까지 하나님께서는 배척받는 가운데서도 참으셨고 배반당하는 노정에서도 참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우리를 세워 놓고 이날까지 소망하고 있는 하나님의 사정을 마음에 뼈저리게, 피 살에 사무치게 느껴 본 때가 있었습니까? 여러분은 진정으로 지금까지 역사하신 아버지가 나의 아버지이시요, 나를 위해 수고하신 아버지이심을 자신의 몸 마음으로 느껴야 할 것입니다.
우리 한국 백성들이 가진 것이 없고 불쌍하다 할지라도, 우리 가운데 하늘의 소망을 대하고 하나님의 염려를 지니고 하나님의 믿음의 마음을 갖고 이 땅 위에 나타나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 또는 그러한 모임, 그러한 민족이 된다 할진대, 하늘의 전권적인 위업을 계승 못 한다고 누가 단정할 수 있겠습니까? 불쌍한 이 민족, 의지할 곳 없는 이 민족, 소망할 곳 없는 이 민족이 이제 가져야 할 소망은 무엇인가? 죄악에 대한 회개의 마음을 가져야 하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하고, 하나님에 대한 소망을 가져야 하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가져야 합니다. 그럴 때에 비로소 이 민족은 천국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새로운 에덴동산에서 거할 수 있고, 창조이념의 목적을 대신할 수 있는 새로운 민족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떠한 분으로 오셨던가
에덴동산에서 영원히 믿을 수 있는 인간이 되지 못했는데 영원히 믿을수 있는 그 심정기준은 누가 갖고 있는가? 하나님이 갖고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심적 기준을 가진 인간이 되어야 할 것이었는데 인간이 하나님을 배반함으로 말미암아 그 생명의 심적 기준을 하나님이 갖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또 영원한 사랑의 심적 기준을 가진 인간이 되어야 할 것이었는데 인간이 하나님을 배반함으로 말미암아 그 사랑의 심적 기준도 하나님이 갖고 계십니다.
그러면 그 에덴동산의 이념을 건설할 수 있는 요소를 인간 앞에 제시하기 위하여 오셨던 분이 누구였느냐 하면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믿음과 생명과 사랑을 대신할 수 있는 하나의 기준을 이 땅 위에서 찾기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오랜 역사 과정을 통하여 수고하였지만 찾지 못했습니다. 노아를 통하고 아브라함․야곱․모세를 거쳐 찾으려 했지만 그러한 기준의 인간을 찾지 못하고 4천년 동안 수고하여 비로소 찾아 세운 존재가 예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떠한 분인가? 그분은 믿음의 메시아요, 생명의 메시아요, 사랑의 메시아라는 것입니다. 즉 그는 믿음의 구주요, 생명의 구주요, 사랑의 구주로 오신 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4천년 동안 인류역사를 주관해 오시면서 자신의 생명과 사랑이 심적 기준을 이루기를 소망했는데
이것이 예수로 말미암아 실현되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비로소 하나님의 섭리역사가 이 지상에서 다시 시작되었으며 복귀의 새로운 뜻이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뜻을 지니고 온 예수님 앞에 그때 사람들은 실체적인 믿음을 가져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이념과 일체가 되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품고 있었던 무형의 신앙의 이념, 무형의 생명의 이념, 무형의 사랑의 이념이 표현된 하나의 화신체로 나타나셨던 분이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오! 당신은 하나님이 4천년 동안 수고하시며 찾아온 믿음의 결실체입니다. 4천년 동안 찾아온 하나님의 소망과 생명의 실체로소이다. 오! 당신은 하나님의 이념동산에서 즐길 수 있는 영원한 사랑을 갖고 온 주인공이로소이다.’라고 증거하지 않았습니다.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누구도 그의 심정을 헤치고 그의 비밀의 말씀을 이 땅 위에 밝혀놓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2차적으로 인류에게 서러움을 빚어낸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예수님은 이 땅 위에 오셨지만 마음과 몸을 갖춘 하나의 실체로서 하나님의 믿음과 하나님의 생명,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지 못한 채 돌아가시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실체로서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믿음을 가지고 오셨고, 하나님의 생명과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오셨는데, 그 실체를 인류가 파괴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서러운 하나님이 되었습니다.
예수의 서러움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오실 때에는 영을 통하여 실체를 찾아 나오십니다. 그리고 그 실체를 통하여 만물까지 찾아 나오십니다. 그런데 인간이 실체를 통할 수 있는 믿음의 자격자, 실체를 대신할 수 있는 생명의 자격자, 실체를 대신할 수 있는 사랑의 자격자가 되지 못하고, 이 일이 영적으로만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는 그것들을 영적으로만 느끼고 있습니다. 즉 오늘날 인류는 영적 구원의 이념을 찾아 들어가고 있고, 영적 생명을 찾고 있으며, 영적 사랑을 찾아 헤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천국은 네 마음에 있느니라.’라고 말씀했습니다. 천국은 먼저 마음으로부터 찾아옵니다. 그런 다음에 ‘천국은 네 몸에 있느니라.’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즉 천국은 내 실체에 있다고 주장할 수 있는 한 날이 인류 앞에 와야만 비로소 나의 몸이 영과 하나되어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됩니다.
여기에 예수의 서러움이 있습니다. 마음의 천국을 대신할 수 있는 영적천국은 이루어 놓았으나, 몸의 천국의 이념을 대신할 수 있는 그런 천국은 못 이루었기 때문에 다시 오셔야 할 입장에 처해 있으며, 역사 과정을 거쳐오면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인간들을 위해 기도하셔야 할 운명에 놓여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끝날에 처한 오늘날 인류는 실체적인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2천년 전에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실체를 대신할 수 있는 하나의 소망의 존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끝날의 성도가 지녀야 할 신앙 기준
믿음에 대한 소망, 생명에 대한 소망, 사랑에 대한 소망의 모습으로 살고 있느냐를 항상 아버지 앞에 직고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옳소이다 아버지여! 나는 아버지를 믿겠나이다. 아버지는 날 못 믿는다 할지라도 나는 아버지를 믿겠나이다. 아버지는 나를 버려도 나는 아버지를 버릴수 없나이다.’라고 할 수 있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생활해야 하겠습니다.
엘리야도 이스라엘 민족 앞에 배척받고 몰림을 당하여 쫓겨 나갈 때에 "아버지여, 나만 남았나이다."라고 호소했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심정을 통할 수 있는 한 때를 가져 보았습니까? 3천만 민족이 모두 배척하더라도, 세계 24억의 인류가 모두 배척하고 천상에 간 모든 영들이 모두 배척할지라도 ‘나만은 당신을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런 심정을 체휼한 사람은 지옥에 갈래야 갈 수 없고, 이 땅에서 망할래야 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무엇으로 깨뜨릴래야 깨뜨릴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이런 마음을 가지고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하고 호소했던 그 마음 하나가, 사망의 권한을 짓밟고 올라설 수 있는 하나의 중심적인 포인트가 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와서 민족으로부터 배척받았고, 교회로부터 배척받았고, 종족으로부터 배척받았고, 또 보이지 않는 영계의 사탄에게도 배척받았습니다. 즉 어느 누구 한 사람의 친구도 없는 예수였습니다. 그러한 예수님이 오늘날 인류의 구주로 나타날 줄 당시의 사람들이 꿈엔들 생각하였겠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망의 길을 무릅쓰고 생명을 바칠 수 있었던 신앙 기준, 즉 자신의 몸까지도 희생할 수 있었던 신앙 기준을 끝날의 여러분들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늘은 그러한 신앙의 기준이 끝날의 성도에게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과 동고동락하는 실체적인 주인공
하늘은 우리들을 어떻게 찾아오셨습니까? 하늘 보좌에서 영으로 계신 하나님께서는 창세로부터 4천년을 기다려 예수님을 세우셔서 인간을 찾으려 하셨습니다. 또 예수님 이후 우리의 마음을 대신한 영적 세계에서 2천년을 더 수고하여 오늘날까지 6천년의 수고의 발자취를 통해서 우리를 찾아오고 계십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아버님, 황공하옵니다. 아버님, 면목없습니다. 아버님, 어찌하겠습니까?' 라고 하면서 나를 찾기 위하여 수고해 나오신 아버지의 서글픔을 해원해 드리겠다는 아들딸의 효심을 가졌습니까? 이것이 하늘이 원하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이런 마음을 가진 아들딸이 되었다 할진대는 예수님께서 33년 동안 긍휼의 심정을 갖고, 사랑의 심정을 갖고 아버지의 마음을 붙들고 고난 속에서 부활의 역사를 일으키신 것과 마찬가지로, 여러분들도 그런 마음을 갖고 사망권을 밟고 올라서서 부활의 역사를 일으켜야 되겠습니다. .
하나님은 나와 영원히 일체를 이루어 먹어도 같이 먹고, 살아도 같이사는, 즉 영원히 동고동락할 수 있는 실체적인 주인공입니다. 영원히 변할수 없는 사랑의 본체요, 영원한 소망의 화신체인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 앞에 예수님은 어떠한 변명도 조작도 없이 자기 자체를 잊어버리고 아버지를 대신한 뜻이라면 어떠한 행동도 할 수 있는 분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예수님의 발자취를 인계맡는 아들딸이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예수는 30여년의 생애를 거치면서 복음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제자들을 데리고 다니다가 굶주린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을 때에는 즉석에서 오병이어로써 5천여 무리를 먹이는 기적도 베풀었습니다. 줄 것을 다주었습니다. 믿음도 소개하였고, 생명도 소개하였고, 사랑도 소개하였고,인간이 요구할 수 있는 전체를 다 소개해 주었던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예수님의 소망과 하나님의 부탁
예수님께서 30여 평생의 노정을 걸을 때, 이 마을 저 마을로 쫓기면서 말씀하시기를 어느 한 곳 발 붙일 곳이 없어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 8:20)고하셨습니다. 이렇게 외로운 심정을 붙들고 안타까워하신 그 예수님의 말씀이 4천년 천륜의 결실을 대표하였던 말씀인 줄 그때 사람들이 알았느냐하면, 몰랐습니다.
재창조의 생명의 실체요, 영원하신 하나님이 소망하신 생명의 실체로서 4천년 동안 인류가 소망하여 왔던 그 뜻을 이루실 예수님인 것을 이스라엘 민족은 몰랐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믿음과 사랑과 생명을 가지고 나왔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몰라봄으로써 넘지 못했던 이 고개를 누가 해원해 넘어갈 것인가? 오늘 여러분이 비록 몰리고 있고 의지할 곳이 없는 불쌍한 무리라 할지라도 예수님의 뜻을 이어받는 인계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2천년 전 예수님께서 뱃새다 근처에 있는 빈들에서 수많은 무리에게 떡을 나눠 주었습니다. 그런데 떡을 먹었던 무리들이 어찌하여 다 망하였던가? 말씀을 들었던 그 민족들이 어찌하여 예수를 배반하였던가? 3년 동안같이 고생하면서 따르던 제자들이 어찌하여 예수를 배반하였던가? 그들이 배반한 이유는 말씀이 그날 그날을 위한 말씀인 줄로만 알았고, 주시는 떡이 그날 그 한 시간의 배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주시는 것으로만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주신 말씀이 자기 자신을 통하여 세상 끝까지 옮겨 주어야 할 말씀인 줄 몰랐습니다. 예수가 나누어 주는 떡이 자신을 통하여 세계 인류 앞에 나누어 주어야 하는 떡인 줄 몰랐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말씀과 떡은 자신의 실체이기 때문에 내 마음․몸․이웃․민족․국가․세계의 온 인류에게까지 옮겨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뜻을 몰랐기 때문에 다 망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여러분이 주 앞에 서거나 아버지 앞에 설 때에 '오, 나의사랑하는 아들아! 이 말씀을 주노니 이 말씀을 간직하여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 되라.'고 부탁하는 것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또 ‘오, 사랑하는 아들 딸들아! 네가 살아생전 네 몸에 아버지가 임재할 수있는 실체적인 성전이 되어다오.’라고 부탁하는 것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아버지만이 내 생명의 본체요, 아버님만이 내사랑의 본체라고 느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일체감을 느껴야 한다
어떠한 사망의 권세라도 넘어서 그 사망세계를 가로질러 가나안 복지를 향하여 갈 수 있고, 아버지를 붙들고 6천년 동안 수고하신 그 서러움을 함께 나눌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아담 해와의 실수를 청산짓고 하늘의 마음을 가진 모습으로서 아버지를 대신하여 영광 받을 수 있는 여러분이 되어야 합니다. 하늘은 힘든 가시밭길도 무릅쓰고 슬픔의 길을 거쳐 나왔습니다. 여러분이 몰림을 받을 때 염려하시는 아버지를 바라보면서 참아 나가야 하며, 아버지께 안길 수 있는 한 날을 주시는 것에 대해 감사해야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좌’ 하면 천륜의 역사를 대신한 하나님의 섭리의역사가 ‘좌’ 하고, 여러분이 ‘우’ 하면 하나님의 생명이 ‘우’ 하고, 여러분이 ‘정’ 하면 하나님이 ‘정’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바로 이러한 사람을 잃어버리고 가정을 잃어버린 것이 에덴동산에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탄식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자신의 슬픔을 놓고 눈물 흘리지 마십시오. 언젠가는 그 눈물을 아버지께서 씻어 주시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자신이 억울하다고 불평하지 마십시오. 그 억울함도 아버지는 아실 것입니다.
이제 내가 아버지를 떠난 줄 알았더니 내가 아버지 앞에 선 것을 알았고, 내가 아버지의 사랑을 모르는 줄 알았더니 내 몸이 벌써 아버지의 사랑에 잠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아버지는 나의 아버지이심을 느끼게 됩니다. 내가 알려는 아버지는 관념에 붙잡힌 신앙의 하나님이 아니고,실증적으로 체휼할 수 있는, 즉 나의 생활권 내에서 체휼할 수 있는 친아버지라는 것입니다.
내가 동하면 만물이 동하고, 내가 움직이면, 모든 사람이 내 뒤를 따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런 경지에 들어가게 되면 모든 만물이 여러분을 대하여 환희하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또 그런 경지에 들어가게 될 때 남이 듣지 못하는 것을 듣게 되고, 남이 보지못하는 것을 보게 되고, 남이 알지 못하는 것을 알게 되고, 남이 체휼하지 못하는 것을 몸으로 체휼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모실 수 있는 참아들딸이 되려면
오늘날 우리들의 신앙생활을 다시 한 번 돌이켜 보면, 하나님께서는 나한 자체를 찾으셨지만 한 자체로서의 나를 찾으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느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함은 나 하나를 사랑하기 위함이 아니요, 하늘땅 전체를 사랑하기 위함입니다. 나를 부르심도 내한 자체를 중심삼고 나를 좋게 하기 위함이 아니요, 하늘땅을 위해서인 것입니다. 나를 믿어 주려 함도 나 하나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나를 사랑하는 것도, 나를 생명의 실체로 세우고자 하는 것도 나 하나를 위하려는 것이 아니라 온 천주를 위하시고자 함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의 몸 마음은 영원히 여러분의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늘은 오늘날 사탄권 내에 있는 여러분을 하늘땅의 믿음과 생명과 사랑을 갖고 대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창조 당시의 아버지에게 슬픔을 체휼시켰던 것을 회상하여 ‘나를 대함으로 말미암아 타락하지 않은 아담의 영원한 모습을 대하는 것과 같이 즐거워 하시옵소서. 아버지!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상실한 뜻을 나를 대하시어서 찾으시옵소서.’라고 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여러분이 되어야만 ‘오, 아버지여!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할 수 있는 아버지의 아들이 되고 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명심해야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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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아주
참부모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