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후상(張后相) 1677~1742. 자는 몽여(夢汝), 몽여(夢予), 몽여(夢與), 몽여(蒙予), 호는 석문(石門)이다. 아버지는 첨지중추 장유(張瑜)이며, 어머니는 예안김씨(禮安金氏)로 김돈(金墩)의 딸이다.
장진(張璶)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699년(숙종 25) 문과 초시에 이어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나 같은 급제자 중 김인지(金麟至)와 이도징(李道徵)이 서사(胥史)에게 뇌물을 주고 부정 합격된 사실이 발각되어, 시험 자체가 무효화되고 홍패를 수거 당하였다. 1705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가니 세상 사람들이 선급제후진사(先及第後進士)라고 불렀다. 이 소문이 왕에게 알려져 1699년 급제자 중 부정에 관계된 사람만 제외하고 모두 다시 합격되었다.
그 뒤 성균관의 학유·학록·학정을 거쳐 1714년 성균관 박사가 되었고, 이듬해 전적에 올랐다. 1716년 사헌부감찰을 지내고, 1720년 성균관직강이 되었다. 1722년(경종 2) 성균관 사예를 거쳐 예조정랑이 되었으며, 이듬해 함흥의 능침실화사건에 이사상(李師尙)과 함께 봉심관(奉審官)이 되어 다녀왔다. 그 뒤 양산군수로 나가서는 탐리를 다스리고, 세금과 부역을 경감하며, 생업을 권장하는 등 선정을 펴 군민이 공적을 추모하여 철비(鐵碑)를 세웠다. 당시에 “ 권 양산(權梁山, 江左 權萬))은 천재(天才)요, 장 양산(張梁山)은 인재(人才)이다.”라는 말이 회자될 정도로 성망이 높았다. 1726년(영조 2) 선전관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728년 이인좌의 난(戊申亂)에는 안동에서 의병을 창의(倡義)하고 영주 제민루에서 진영을 설치하였다.
1729년(己酉)「이산서원 입격기」가 있다. 이재(頤齋) 권연하(權璉夏) 행장을 짓고, 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가 묘갈명을 지었다. 무신란기와 석문시고(石門詩稿)』 3권이 있다.